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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무릎꿇다>를 읽다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6. 10. 11:26 | Posted by 김수민
학교 도서관이 무료배포 서가를 마련했다. 최근에 2차 배포에 포함된 책은 대부분 영어 서적이었다. 제목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싶은 것이 없었다. 1992년 대선 이후 나왔던 <정주영 무릎꿇다>를 뽑았다.

1992년 초, 총선을 두달여 앞두고 창당된 통일국민당은 강령에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그리고 재벌해체를 명시하고 있었다. 재벌이 기업의 힘을 빌려 만든 당의 정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의 정주영을 베를루스코니나 로스 페로에 비견하는 건 무리다. 특히 정주영은 이건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이건희가 후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하위 파트너로 두는 노선을 걸은 반면, 직접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은 정치의 고유 영역과 그 속성을 인정했던 셈이다. 달리 말해 재벌이 곧 국가라기보다는, 정치에는 정치에 맞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가졌던 거다. 따라서 그 밑절미는 자본주의나 부르조아 정신이 아니라, 민족주의나 애국심이 된다.    

그외에도, 관훈클럽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에도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에도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공산당'과 '북한'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 이때 김대중은 정주영의 주장이 헌법 실정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정주영의 북한관은? 경제개방을 통한 5년내 흡수통일이었다. 김대중은 이에 북한의 무력도발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후일 정주영의 경제주의적 통일관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서 빠질 수 없는 기조가 되었고, 두 사람은 역사적 화합을 했다.

책의 뒷표지에도 써 있는 것이지만 "경제전쟁에서 익혀온 노회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결국 정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후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은 독자정당이 아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틈새와 우수리를 노리다가 후보단일화 경쟁에서 좌절했다. 정주영의 천지동우회까지는 동행했으나 민자당으로 방향을 튼 이명박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주구장창 '탈여의도'를 외치고 'CEO 담론'을 펴면서 기존 정치인들을 비효율적 이미지에 몰아넣은 전략은 주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토지공개념을 담아낼 비전 같은 건 없으며 그의 노선은 자본주의가 아닌 대자본가주의로만 치달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정치를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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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리 초대박

Listen to the 무직 | 2008. 6. 6. 19:25 | Posted by 김수민

저변에 깔리는 리듬은 활기차지만 멜로디는 썰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원 모어 타임>이 나왔을 적의 내 소감으로 나는 이 노래가 어떻게 될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쥬얼리는 이미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안되면 쇼 매니지먼트의 힘으로 밀어붙여서라도 노래가 히트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그 노래가 얼마나 히트를 할지 지켜 보았다. 주로 제자리에 머무는 가벼운 몸짓과 이티춤은 늦봄 가요계를 이미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매우 도전적인 율동을 선사하는 후속작 <모두 다 쉿!>으로, 2008년의 쥬얼리는 여자댄스그룹 역사상 최고의 기획작임을 확정하게 되었다. 

이전의 쥬얼리는 멤버들이 각자의 특징으로 각개약진하는 느낌이 강했고, <네가 참 좋아>나 <슈퍼스타>처럼 강도만 조절하면서 변화를 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이지현, 조민아가 교체되면서 쥬얼리는 팀웍이 강해졌고, 포메이션은 2-2를 취하는 것(<원 모어 타임>)과 전원공격, 전원수비를 방불케하는 것(<모두 다 쉿!>)으로 나타났다. <슈퍼스타>에서 털기를 선보인 서인영의 약진이 가장 큰 특징인데, <베이비 원 모어 타임>에서만큼은 주연이 서인영이었다(모던락계열의 음악으로 솔로활동을 하기도 했던 박정아의 목소리는 금속성 음향에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예전의 S.E.S나 핑클은 소년팬에 호소하는 이미지로 음반판매수, 가요차트순위 등에서 가장 획기적인 성과를 기록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과감한 펀치를 날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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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간첩조작에서 <서울 1945>까지

[한국근현대사의 OST] 이소라, <개희의 노래>


김수민/woodstocksm@naver.com

  2001년 9월 4일, 역사학자 방선주와 정병준의 요청으로 기밀해제된 미육군 정보국의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베어드 조사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계(박헌영계)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이강국과 임화(시인)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CIC 요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마 이 대목에서 해방정국기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하나 같이 김수임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강국의 애인이자 존. E. 베어드 대령(미8군 사령부 헌병감)의 동거녀였던 김수임은 오랫동안 이강국의 기밀입수 활동에 이용되었던, 달리 말해 기밀 유출을 위해 베어드에 접근했던 ‘여간첩’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날 미 육군부가 1950년 8월부터 석달동안 조사하여 작성한 ‘베어드 보고서’는 김수임의 혐의에 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베어드 대령이 거꾸로 김수임을 통해 이강국이 전하는 북한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1930년대말 김수임은 유학 시절 독일공산당에 참가한 바 있는 이강국을 만난다. 그는 이강국에게 공산주의 사상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활동을 전해 듣지만, 이념보다는 사랑에 이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분방한 성품에 지성을 겸비하고 특히 영어에 능숙해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던 그녀는, 그러나 한반도 분단의 상황에서 애정의 분열을 경험해야 하는 ‘약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 만들어진 신화일 뿐


  이강국이 체포령을 피해 북한으로 도주한 후 그녀는 반도호텔에서 미군정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상관인 베어드 대령은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였고, 그녀는 옥인동 주택에서 동거에 들어갔으며 서른 일곱 나이에 아들인 김원일을 출산한다.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하지만 베어드는 경찰고문으로 남한에 잔류하였으나, 그들의 동거는 지속되지 못한다. 1950년 봄 김수임이 간첩죄로 체포된 탓이었다.


  그렇지만 21세기 벽두에 비로소 공개된 CIC의 비밀문서가 아니더라도 김수임의 간첩행위 13가지는 대부분 그 당시에 반박되고 있었다. 우선, 미군정의 체포령에 직면한 이강국을 은닉하고 월북을 도와준 것은 분단이 확정되기 이전의 일이라 간첩죄의 구성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범인은닉이나 도주방조와 같은 일방형법, 38도선 월경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미군철수나 한국경찰의 무장에 관한 기밀을 적국에 제공했다는 혐의도, 베어드가 고위전략적 정책을 잘 알지 못했고 따라서 김수임에게 기밀을 유출하지도 않았으므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 것도, 공포한 흔적도 없는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로 특무대에 갇혀 있던 이중업을 김수임이 탈옥시켰다고 여론몰이하였다(정작 기소내용에서는 누락되었다). 김수임의 집에서 나왔다는 권총을 검사들이 증거물로 내세웠다가 혐의와 무관하다는 변호인들의 이의제기가 먹혀 채택이 보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심한 고문에 의해 허위사실을 자백했을 가능성은 당시나 지금이나 제기되는 것으로, 베어드 파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수임은 재판 시작 3일만에 한번의 공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형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그녀는 ‘여간첩의 신화’로 남아 전해졌고,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이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했던 마타하리와 곧잘 비견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마타하리의 간첩행위를 부풀려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보다는 ‘미모의 여간첩’이라는 공통점이 부각되면서 말이다. 그뒤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저작과 방송들이 김수임을 다루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윤석화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 김수임>(연극) 등이 개인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변호하였다.


  2006년 KBS가 상영한 <서울 1945>도 김수임을 모델로 한 인물 김해경(어린시절의 이름은 ‘개희’)를 등장시키고 있다. 한은정이 열연한 김해경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같은 성장과정이나 반도호텔에서의 근무와 같은 이력에서 김수임과 닮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강국에 참고하여 만들어진 최운혁(류수영 분)이 공산당계였던 실제 모델과는 달리 여운형(신구 분)의 동지로 나오듯, 김해경 또한 김수임과 다른 점이 많다. 김해경은 이화여전을 나온 김수임처럼 고학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운혁이 월북한 뒤 그녀에게 구애하는 인물도 미국인 장교가 아니라 양심적 우익이자 최운혁의 벗인 이동우(김호진 분)였다. 김해경은 간첩으로 체포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의 도움으로 풀려나 최운혁과 해후한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포화 속에서 빨치산에 합류한다.



김해경, "당은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김수임보다 또는 김수임만큼. 김해경의 어머니(고두심 분)는 결혼을 허락하면서 최운혁에게 “정치에 손을 떼고 대학 교수 일에 전념하라”고 부탁하고, 최운혁은 ‘좌우합작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해경의 운명은 결코 순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치에도 이념에도 관심 없는 이 여성은 사랑 앞에서 후퇴하지 않는 열정을 타면서 해방정국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극의 막바지, 조선노동당은 최운혁의 스승이자 빨치산을 지도하던 문동기(홍요섭 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우연히 이를 먼저 알아챈 김해경은 냇가에서 최운혁에게 묻는다. “당(黨)은 정말...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단지 김수임의 분신이 아니라 해방정국의 격동에 휘말린 ‘연약한 여성’의 대변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학습은 깊지 않았지만 어떤 회색의 이념으로도 뭉갤 수 없는 삶의 푸르름을 갈구했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건너간 해경이 들어간 어느 교실, 액자에는 태극기도 인공기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것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높지 않은 시청률과 극우단체의 비난 속에 드라마가 막을 내린 후, 열성 시청자들은 이소라가 노래한 <개희의 노래>를 들으며 김해경과 김수임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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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1년 대학에 들어와서 2002년부터 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괜찮은 교육학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학점이 너무 좋지 않았고 교육학에 관해 아는 것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졸업한 다음에 전공을 살릴 일을 맡을 지도 불분명한데, 그러나 만일 교육학과 관련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직일 것이다. 필자가 교사라면, 사학을 이중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역사 선생일 터이다.

교직과정 이수를 작심한 교육학도들은 3,4학년에 교생 실습을 나간다. 필자는 모교로 나가고 싶다. 졸업하면서 그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었건만 10대의 마지막 세해를 바친 그곳을 데면데면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학벌'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학연혐오론자인 것과는 별개로, 경북 구미에 있는 내 모교를 나온 학생을 우연히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 실제로 필자는 한 인터넷 매체에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어떤 독자에게 동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반가운 감정이 일었었다. 모교는 남자학교다. 남학생들로만 가득찬 학급에서 여섯해씩이나 보낸 처지에서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군데 가장 먼저 갈 곳이라면 그 학교를 택하겠다. 대신에, 틈틈이 제발 빠른 시일내에 그 학교가 이웃의 여고와 통합하기를 기도하겠다.

국사 교과서를 펼쳐 가장 먼저 읽는 단원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E.H.카의 물음에 부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경험상 대개의 교사들은 이 단원을 하루도 안 되어 독파하기 일쑤였다. 역사 교육이 교과서의 주요 대목들을 암기하여 객관식이 다수인 시험문제를 맞히기 위한 것인 탓이다. 필자는 이 단원에서 최소한 1주일동안의 수업시간을 모두 할애할 것이다. 학생들의 푸념이 들려올 지도 모른다. 잘하면 학부모의 귀에 들어가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물론 학생의 장래를 걱정하는 선생으로서, 서울대제일주의를 욕하는 일도 서울대 출신들의 몫임을 목격한 인생의 선배로서, 시험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다. 허나 학교가 그깟 시험점수를 올리는 곳인가. 그렇다면 학교는 문을 닫고 교사들은 학원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교과서나 문제지에 제시된 판에 박힌 답만을 남기고 빠르게 암기에 들어가는 태도에 맞서, 필자는 너 임자 만난 줄 알아라, 는 식으로 덤벼들 것이다. 입시에 쫓기는 학생들을 고려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요약해 프린터로 돌리고, 첫 주의 수업에서 열띤 토론을 유도할 것이다. 필자는 토론을 벌일 때 처음에는 쭈볏쭈볏하던 학생들이 초반에 나온 발언을 곱씹다 어느새 진지한 논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필자는 수업의 처음, 중간, 종반에 잠시 끼어들어 유명 사학자, 철학자들의 사관 및 역사철학을 소개하면서 토론의 댐을 열 것이다.

필자는 사관에 못지 않게 현대사, 특히 한국현대사에 관한 부분을 교실에서 잘 듣지 못했다. 교육과정이 기말고사 이후로 밀려나 '시험에 안 나오는 나머지 부분'으로 치부되거나, 시험 직전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수업하여 '잘해야 한문제나 나오는 단원'으로 전락했었으니까 말이다. 요사이에는 대폭 보강되고 별도로 '한국근현대사'가 수능선택과목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근대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를 이어서 생각하여 전자가 후자에 끼친 영향과 후자를 통해 전자를 읽는 지혜를 헤아리는 기회가 더 필요하다. 필자는 교단에서 김춘추의 나당연합 외교과 오늘날의 한미동맹을 견줘볼 것이다.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 중상파와 중농파를 대조하면서 함께 좌우혁보의 전선을 설명할 것이다. 저널리즘을 가까이 두고 수업할 것이다. 당대의 시사문제를 직시한 사람은 나중에 역사를 바로 기억하기 용이하다.

수행평가나 방학숙제에 도입할 것은 '유적 발굴'이다. 고고학적인 탐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규모가 적거나, 중요성이 낮게 취급되었거나, 역사유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곳을 찾아서 발굴하는 숙제다. 자기만 알거나 아예 사연을 지어내는 걸 막기 위해서 얼마나 대중들에게 가치있는지를 채점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발굴하지 않거나 못한 학생들에게는 독서 숙제를 내줄 것이다. 그리하여, 1학기나 여름방학에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등을 과제로 하여 역사관 논쟁을 벌일 것이다. 토론장소는 인터넷과 교실을 아우른다. 2학기나 겨울방학에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통해 유구하다고 인정된 것이 실은 머지 않은 과거에 인위적으로 생겨났음을 고찰하면서, 찬반 토론을 벌일 생각이다.

아무래도 필자는 제도권 학교에서는 배겨나기가 힘들 것 같다. 학교장, 동료 교사들, 학부모, 그리고 불만을 가진 학생들의 항의가 지속되면, 살아남을 수 있어도 사표를 던져 버리는 게 필자의 성격이다. 그러나 필자는 굳이 그런 사태를 그려보지 않는다. 애초에 교육철학과 수방식이 맞아 떨어지는 대안학교 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박봉에 고생하는 것은 듣지 알아도 충분히 알 만하다. 돈이 문제라면 다른 일을 벗삼아 하여 생계를 꾸릴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하워드 진도 미국의 교사였다. 교사는 그저 그런 직업이라느니 그래도 요즘 불경기에 인기직종이라느니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비판적 지성인이 월급받아먹는 곳이 대학 뿐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 교실에 학생과 같이 갇힌 선생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교실을 우주로, 우주를 교실로 만드는 선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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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선택

Free Speech | 2008. 5. 7. 21:11 | Posted by 김수민

하루는 학교에서 나이프가 없어졌다. 소로가 도둑으로 몰렸다. 집이 가난하다는 점, 자연을 좋아하는 그가 나이프를 필요로 했으리라는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소로는 "나는 훔치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며칠 뒤에 진짜 범인이 잡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가 훔쳤는지를 알고 있었다. 나이프가 없어진 날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뉴턴에 갔었다." 사람들이 "왜 그날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로는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했다"고 대답했다.

- 박홍규, <나의 헨리 데이빗 소로> 가운데 William Ellery Channing, Thoreau: The Poet-Naturalist(Robert Brothers, 1873), p. 12를 참조한 부분.


"내가 왜 구구절절 이야기를 해야 해? 당신부터 똑바로 이야기하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할 상황이 있다. 그러나 그때 원칙론은 먹히지 않기 마련이라 단번에 상대방의 억측을 뒤엎을 수 있는 증거를 속속 들이밀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가장 옳은 방식으로 버틸 것인가, 단칼로 빠르게 공박 또는 변호할 것인가. 선택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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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실습 첫날

Free Speech | 2008. 5. 6. 23:28 | Posted by 김수민
오리엔테이션 한번 안 해보고 출근하는 첫날, 미지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교사 휴게실에는 이미 두분의 동료 교생 선생님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혼자서 뻘쭘하게 한달동안 지낼 우려는 단번에 사라졌다. 기술교육을 전공한 강효진 선생님은 나보다 한살 어린 구미고 20회 졸업생이다. 나와는 달리 고교 시절에 기억나는 사건이나 교사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성격이 싹싹한 분이다. 한문을 담당하는 이지혜 선생님은 옆동네의 구미여고 출신인데, 5월 실습은 신청이 되지 않아 구미고로 왔다고 했다. 첫날부터 숙제를 받고 '파자(破字)'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짧게나마 가진 인사 자리에 모든 선생님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역시나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몇분 눈에 띄었다. 내가 교육학과에 합격할 때는 "거기 선생되는 과 아니제?"라고 물으셨던 분들이 많았지만, 7년만에 다시 나타난 제자를 진심으로 기쁘게 맞아주셨다. 재학 시절 과학 교사였던 교감 선생님은 자신을 잘 기억 못하는 강효진 선생님에게 섭섭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들 가운데에는 얼굴이 꽤 수척해진 분들이 계셨는데, 그중 한분은 몇해 전에 쓰러지셨다고 들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로 하체가 매우 단련되신 분이셨다. 안타깝다.

별도의 사전 면담 없이 출근하는 바람에 행정적, 기술적으로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연구주임, 지도교사, 학급담임 교사 분들께서 재빠르게 조처를 취해 주셔서 해결되었다. 나의 지도교사와 학급담임은 같은 분으로 2학년 5반 담임이시다. 내가 경찰 복무 이후로는 사람들 연령을 잘 짐작하지 못하지만- 30대 중반 가량의 여 선생님이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방송인 전제향을 닮으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시험날 첫 출근을 했고, 졸지에 시험감독으로 입실하게 되었다. 인사를 하자 교실이 떠나갈 듯했다. 그럼 이지혜 쌤이 들어간 교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체?(아그들 하교할 때도 여 교생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 뵈던데. 니넨 운 좋은 줄 알아라. 지방인 데다가 광역시도 아닌 지역의 남학교에 웬 여자 교생 선생님이...ㄲㄲ) 시험은 목요일까지 이어지고, 금요일은 학교장 재량 휴무일이다. 그 다음날과 24일은 '놀토'다. 12일은 석가탄신일이고, 22일은 학교 축제, 23일은 체육대회다. 15일 스승의날 일정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한달 실습하는 주제에 노는날, 쉬는날은 다 챙겨가게 생겼다.

90년대산 학생들은 거의 신인류급이었다. 앳된 학생과 들어 보이는 학생의 격차도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가볍다. 내 담당교사 분은 다소 샤프한 분이신데도 아이들은 정말 엄청나게 까불었다. 복도에서 날 보고 대뜸 '어서옵쇼~'하는 동작으로 "교생 쌤님~ 안녕하십니까~"하는 애들도 있었다. 2학년 5반에 들어갔더니 어떤 녀석이 어떤 급우를 가리키며 외쳤다. "쟤 수학 45점 맞았어요". 더 놀란 건 종례 시간에 담임 교사가 꺼내든 가방이었다. 가방에는 시험치기 전 내놓은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가방 자체가 휴대전화를 꽂기 좋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ㅡ_ㅡ  

달라진 건 교실 뿐이 아니었다. 여자 교사가 늘었고 평균 연령도 크게 낮아진 듯했다. 물론 교육실습생을 대하는 태도가 학창 시절 보았던 교사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풍경도 적이 달라졌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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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연두>에 연재.


'그리운 내 님'은 독립운동가 박헌영

[한국현대사 OST]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 최초의 국민가수? 혹자는 그를 '그레이트 김정구 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건국 이후 최고의 코미디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김국진이 1위를 차지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그가 ‘당시에’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조사를 벌이면 비슷한 원리에 따라 순위가 도출될 것이고, 구봉서나 배삼룡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제 영향력에 비해서는 뒷전에 쳐지기 쉬울 것이다. ‘가수’로 부문을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론가나 저널리스트, 연구자를 빼고 일반 국민들에게만 투표를 맡긴다면 말이다.


  순위야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기록과 기억은 어떤 분야에서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학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스타 김정구와 민중의 희망 박헌영


  이 칼럼의 제목은 ‘한국 현대사 OST'이지만 오늘은 ‘근대사’에 있었던 음악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왜 나는 제목을 ‘근현대사’라고 짓지 않았을까). 일제시대는 나라 없는 민족들임에도 조선인들이 ‘국민가수’를 가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구이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난 김정구는 연주에 능했던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가수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 신자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일찍 학업을 접고 양치기나 물지게꾼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충무로 대중음악계에 뛰어든 그는 <서울감상곡>, <항구의 선술집> 등의 곡을 취입하여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고, 제법 거금을 벌며 철마다 세벌쯤의 양복을 맞추어 경성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가 ‘가오’만 한껏 잡을 줄 아는 가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즈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재담과 제스춰였다.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만담에 뛰어났던 데다가 그의 노래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는 것은 물론, <왕서방 연서>를 부르며 이가 빠진 중국인 복장을 하고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김정구를 인기연예인에서 민족의 대표 가수로 격상시킨 노래였다. 이 곡은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에서 독립군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정소월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가 이시우가 정식음반으로 남기면서 김정구에게 노래를 맡겼고, 김정구가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3절까지 늘렸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를 뒤엎는 주장이 역사학자 임경석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거두였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증언을 담았는데, 증언자는 원경 스님으로 박헌영의 아들이다. <동아일보>에서의 퇴사와 <조선일보>에서의 해직 등을 거치며 끊임없이 혁명운동을 해온 박헌영은 1925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헌영은 재판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는 등(이것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심화되었고,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였다.”:소설가 심훈이 묘사한 그때의 박헌영이다. 참고로 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 주세죽 부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 주세죽, 박헌영 부부. 아기는 딸 박 비비안나. 허나 주세죽은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가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일제 말기 박헌영과 잠깐 만난 어느 처녀는 그의 아들인 원경 스님을 낳고 집으로 끌려 내려갔으며,

박헌영은 윤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928년 8월 두 부부는 바닷길을 통해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때 영화촬영차 두만강에 있다 소식을 들은 작곡가 김용호가 두만강변에서 영감이 떠올라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뚜렷하지 밝혀지지 않았던 작곡가 김용호는 다름아닌 김정구 친형 김용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경 스님은 또 1963년 라디오에 출연한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이야기를 친형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널리 불려지고, 박헌영은 잊혀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노년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왔던 국민가요이며, 강산에의 <라구요>로 또 다른 울림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빨갱이 두목’을 그리워하여 작곡된 것이라니! 대반전이 따로 없다. 더구나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북한에서도 이 노래에 담긴 역사성과 철학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공산당계의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관철시키기다가 좌익 내부의 협동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며, 공산당계의 신전술에 따라 민중들이 궐기했을 때는 이미 이북으로 탈출해 있었다. 남로당의 봉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국토완정론’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은 도리어 이승만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져 주었다. 북한 역시 건국 때 갖고 있었던 얼마간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세워지면서 그 자신부터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북한은 박헌영이 연희전문 창립자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을 만나 미국의 스파이가 되었다면서,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기 그리고 한국전쟁기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죄다 미국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우익 계열의 민족지도자들이 은둔이다 문화운동이다 심지어는 친일이다 하면서 침묵하거나 훼절하던 일제 말기에, 박헌영이 지하에서 부단히 독립투쟁을 이어가며 ‘그리운 내 님’으로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해방정국기에도 미군정은 그를 여운형, 이승만, 김구와 같은 반열에 선 대통령 후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권력투쟁에 소질이 있어서 좌익계의 다른 라이벌을 제치고 또 우익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 갇히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운동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북한의 부수상으로 나타나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결국엔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박헌영 뿐이랴.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들 모두를 위한 노래이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난에 부딪혀 나갔던 조선 민중의 노래인 것이다.




*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하는 사람들. 박헌영이 누구인지 아는 관객은 거의 없을 듯하다.

:

친일인명사전

史의 찬미 | 2008. 4. 30. 17:51 | Posted by 김수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인물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은 '직종'별로 분류되어 있고, '직위'를 준거로 삼고 있다. 이는 친일을 어설프게 은폐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 중 군수급의 관료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진정 제국주의에 부역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도 꽤 많다. 친일의 핵심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붙은' 데 있지 않다. 친일은 어떠한 경우에는 전쟁범죄였고 대부분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었으며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협력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과 층위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친일파를 공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들의 이름의 순서대로 각각의 이력과 행적을 공개하는 것과 친일행위를 정리하면서 관련인물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과정에 목격된 과거사 청산의 열의는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인명 순으로 정리된 사전이 편찬되면서는 '반민특위의 복수', '뒤늦은 숙청'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매국노'와 파쇼 군경과 행정공무원들이 친일파라는 기준 하에 그냥 뒤섞여 버린 사태에 입맛이 좀 씁쓸하다.

예전 김명인이 친일인명사전의 허점을 지적했던 글이다.


 

[정동칼럼]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문제
 
[경향신문 2005-09-08 18:42]

〈김명인/인하대 교수·계간 ‘황해문화’ 주간〉


한 민간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예비작업으로 친일인사 3,000여명의 명단을 발표해 적지 않
은 파문이 일고 있다.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거창한 민족주의적 수사학을 동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의 왜곡이 바로 친일잔재가 온존된 데서 비롯되었고, 지금도 한국사회의 수구냉전적이고 비자주적
인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의 원류가 바로 그 친일잔재에 있기 때문에 친일잔재의 올바른 청산이 결정적
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나-


하지만 친일잔재를 올바로 청산하는 한 계기로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라는 방식을 택한 데 대해서는 과
연 그 방법밖에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전이라는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 기술방식으로 한번 사전에
 등재된 사실은 좀처럼 수정되거나 말소되기 힘든 강한 경직성을 지닌다. 즉 그 사실은 하나의 가설에서 ‘정
설’로 고정되는 것이다. 아마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전이
라는 형식을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한국사회에서 친일잔재와 직·간접적으로 같은 이해를 갖는 기
득권 세력의 힘이 강한 만큼 저항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비교적 명백한 친일인사들을 ‘친일파’로 명토 박아
서 친일잔재 청산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성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친일잔재에 뿌리를 댄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득권 세력
의 힘이 여전히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민주화와 남북화해, 과거청산이라는 대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득권층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전 만들기 같은 유격적 전술이 아니고 친일잔재를 넓게 포위하는 헤게모니적 전술이다.


게다가 친일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설사 그런 기
준이 마련되어서 그 기준에 저촉되는 것이 확실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전후의 행적을 함께 고려하면 상대적
으로 평가가 곤란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뒷북을 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기 전에 먼저 광범한 친일행적자료를 먼저 공개하는 방
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구 누구가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사전적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그들의 친일관련
행적과 그 외의 전체 행적들을 자료집 형태로 폭넓게 수록하여 국가적 규모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거나 열
람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를 토대로 광범한 국민적 토론을 통해 친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내고, 그 결과 명백한 친일파들을 적출해 내고 엄중히 논죄하는, 그런 유연하고도 보다 견고한 방식의 친일
잔재 청산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 어설픈 봉인될 수도-


그리고 기실 더 중요한 것은 친일인물이나 식민지적 유제, 혹은 그에 기반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이라는 문제
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전되어 있는 친일적 정신구
조의 청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찰해 내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면서 내면화
된, 강한 것에 대한 굴종과 약한 것에 대한 경멸이라는 이중적 정신구조는 일제가 남긴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정신적 잔재이자 해방 전의 친일적 경사를 오늘날의 친미적 경사로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매개고리이며 이
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친일잔재는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지 재생산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올바로 성
찰하고 극복하는 보다 본질적인 기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는 이벤트는
미래를 열어젖히는 문고리가 아니라 과거를 서둘러 장송하는 어설픈 봉인이 될지도 모른다.

:

채플, 졸업, 거처

Free Speech | 2008. 4. 27. 14:40 | Posted by 김수민

2005년 11월 대강당을 박차고 나온 이래 채플을 들어가지 않았다(채플 불참에 대한 어느 글). 4학기 이수자만이 졸업자격을 가질 수 있는데, 나는 현재 3학기 이수 상태다. 이전부터 채플을 보이콧했고 2006년에는 함께 자율화운동을 했던 친구에게 먼저 채플에 출석할 것을 권했다. 나도 뛰따라서 갈 생각이었다. 그 친구와는 달리 어차피 한학기만 남은 상태이기도 했고. 부모님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설득하거나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 힘으로 다닌 대학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그동안 낸 등록금이 아깝다. 내가 번 돈으로 다녔다면 아마 이미 학교를 때려치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그 대강당 안으로 들어가기가 싫거니와 졸업이 내게 그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졸업장은 쓸모가 없다.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성질머리 때문에라도 대기업 같은 데는 입사 못한다. 더구나 나는 'No Spec'으로 일관하고 있다. 언론사는 들어가기도 거의 불가능하지만 설령 그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도 보람은 없을 것 같다. 대학원에는, 가봤자다. 가고 싶은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공부하려면 대학원하고는 일찍부터 담을 쌓는 게 좋다. 그냥 이대로 채플에 불참하고 학교를 버린다고 해서 더 좋아지는 것도 없겠지만 나빠지는 것도 없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무기력해진 내가 흘러 들어갈 법한 몇가지 코스를 작년에 짚어냈고, 그것들을 다 끊어 버렸다.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도 대부분 없애버린 셈이다. 남은 건 꿈이나 소득은 다 제쳐두고 생계를 유지할 방법 뿐이다. 요즘 진지하게 축산업을 고려 중이다. 물론, 나는 과수원과 소 키우기를 겸했던 어느 농부의 손자일 뿐 어떤 노하우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목축은 내가 최근에 끌리는 얼마 안 되는 일이다. 소나 닭을 '풀어놓고' 키우는 구상을 한다. 그러나 이것도 대책이 만만치 않다. 대규모 목장을 가지거나 일을 작게 벌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한우를 인터넷으로 직매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물량 자체가 딸리면 난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좁은 우리에 몰아넣어 동물들을 미치게 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역시 목축은 겸업이나 부업의 대상인가?

내 소유로 된 땅이 있었다. '억대 자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쪽에서 소를 키워볼까 고려했었지만, 얼마 전 부모님와 의논하고 땅을 팔아 버렸다. 원래부터 재테크에 무심했던 어머니는 부동산 시험을 준비하면서 2년 정도 부동산 소유에도 관심을 가졌었지만, 근래엔 도로 신경을 꺼버리시고 불교 공부에 몰두 중이다. 땅을 판 것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거기말고 교외에 땅을 두군데인가 더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목축을 하려면 또 부모님 신세를 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거취'가 아니라 '거처'를 논해야 할 형편이다. 올해 12월, 나는 3년간 산 원룸을 떠나게 된다. 아버지가 내년 정년 퇴임을 하고 '범-정권'에 합류를 하여 가족이 상경한다는 시나리오(그러면 난 그 집에서 살게 된다능;)가 친척들 사이에서 돌지만 그거야 그저 추측일 뿐이다. 이거 참 어디서 살아야 할지를 걱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서른 즈음이다('서른 즈음에'를 자기 노래로 삼을 수 있는 연령이 27~33살이라는 일설에 따르면 나는 초심자).

만일 내가 채플을 마저 이수하고 졸업을 하게 되면 졸업장 말고 내 손에 쥐어지는 '스펙'으로는 교원자격증이 있다. 임용고사는 미치지 않는 한 준비하지 않을 작정이고 사립학교는 재수 없으니까 그걸 써먹으려면 대안학교행 밖에 없다(자격증을 굳이 요하지 않는 학교도 있기는 하다). 현재로서는 어딘지는 몰라도 그 대안학교 근처에서 살 공산이 높아 보인다. 거기는 서울일까, 아닐까? 이제는 좀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서울에서 만난 서투르면서도 교활하고, 악랄한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한 인간들에 지쳤다.


며칠 전 교육실습을 준비하면서 정장 한벌을 맞췄다. 이력이며 스펙이며 얼굴이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조금 딴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벗어나게 될까, 빨려들게 될까. 내가 중도에 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 않은 것이 벌써 운명을 결정해 버렸을까. 아니면 나는 내년 초를 전후하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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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 C

Free Speech | 2008. 4. 23. 23:47 | Posted by 김수민

집에 내려와서 어머니한테 얼마 전 아버지와 구미 경실련의 간부와 식사를 함께할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대충 감이 온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어머니에게 인상착의에 대해 물었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가 맞다고 한다.

C. 인민노련의 옛 활동가. 노동자 출신으로 대학생 출신들을 직접 가르쳤다는 인물.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과 한국노동당의 구미 지역 대표자였다. 민중당이 망한 후 경실련에 투신하여 지금 구미 지역에서 가장 명망있는 시민운동가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겪은 에피소드를 따라도 그렇다. '구미'하면 늘 진보운동가 두명이 꼽혔다. 하나가 김기수(민주노동당 전 최고위원, 현 진보신당)고 다른 이가 C이다. 

원래 부부동반 모임을 제의했는데 그는 혼자 나왔다고 한다. 접대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럽고 또 깐깐해 보였다는 것이 어머니의 후문이다. 그냥 척 보기에도 똑똑하고 일에 잔뼈가 굵고 인품이 훌륭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현황과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떨런지는 잘 모르겠다. 인민노련에서 중책을 맡았던 모 선생은 "참 똑똑한 사람"이라면서도 "중간층이 튼튼해야 진보정치가 발달한다"는 C의 견해에 대해서는 "계급은 두가지 뿐, 저것은 패배를 부르는 발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노동당에서 그를 만났던 또 다른 어떤 이는 작년에 "언젠가는 다시 함께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는 작년에 노회찬의 경선 출정식에서 지나가다 그를 본 적이 있다. 인민노련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이들이 모여 있었다.

당원인지는 몰라도 그는 (당연히)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무슨 목적으로 만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협의차 만난 것은 물론 아니고 지역 명망가 둘이 만나서 의견을 나누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대충 '대운하'가 주요 화제였나 보다. 그는 잘라 말했다고 한다. "대운하를 파면, 결국에 주로 쓰이는 건 관광용입니다. 뭔가 싶어 한번 유람선을 타보기야 하겠지요. 그라고 끝입니더."

뉴스를 검색해 보니 그는 근래에 금오공대와 경북대 공대 통합, 삼성전자 기술센터 등의 문제에 뛰어든 것 같았다. 그의 인터뷰에는 좌파가 하기는 힘든 어휘와 수사가 있었다. 나는 그런 것으로 좌우를 가리거나 하나의 축으로 한 인간의 포지션을 판단하는 것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가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좌파운동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행보가 '지역 유지'쯤으로 비쳐지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이념이 서린 구호를 핏대 올려 소리지르기보다 온갖 현안을 하나씩 짚어가고 발언하고 움직이며, 또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도 유능한 민완 시민운동가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그를 조금씩이나마 매체로 접해보면서 내가 내린 평가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지지니 뉴라이트니 하며 이탈하는 와중에서도 C는 진보적 활동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곧 그의 경험과 테제, 수완이 더욱 귀중하게 다루어질 날이 올 것이다. 어머니가 전하는 이런저런 인물평을 들으며,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임에도 뿌듯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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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돌아왔다... -_-

Free Speech | 2008. 4. 22. 13:48 | Posted by 김수민

5월 5일부터 교육실습(일명 '교생실습')에 들어간다. '어린이날'부터? 물론 그날은 쉬고 이튿날부터일 것이다. 어린이날에 놀토에 스승의날에 석가탄신일에, 놀 복은 터졌다. 나는 중간고사를 치는 과목이 하나도 없어 일단 오늘 집에 내려갔다 올라오려고 한다. 가는 김에 미리 연구주임 교사를 뵈려고 한다. 어제 모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교사 명단을 봤더니, 허걱, 돌아온 그들이 있었다. 늘 붙박혀 있는 사립학교와 달리 공립학교 교사는 주기적으로 전근을 가지만, 부근의 학교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패턴이 있다. 공교롭게도 딱 맞아 떨어졌다. 작년 교육실습 신청을 하러 갔을 때는 김oo 국어 선생님만 있었지만, 해가 바뀌면서 대거 복귀한 것 같다.

서xx 영어 선생님. 학교 다닐 때 무척이나 악명이 높았다. 공부도 빡시게 가르쳤던 데다가 양뺨을 두 손으로 압축시켜 버리는 체벌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그를 욕하는 졸업생이 아무도 없던 걸로 기억한다. "때려서 나를 바로 잡아주어 고맙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알고 보면 괜찮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지"라는 이유에서인데, 사실 한국 교육에서는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대개의 교사들처럼 나하고는 별 인연이 없던 분인데, 졸업할 즈음 내가 문학특기자라는 걸 알고 뒤늦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내가 졸업한 다음 실력을 인정받아 외국어고로 전근을 갔던 기억이 난다.

류xx 수학 선생님. 나를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에게 약간 관심을 가졋던 사람이다. 고2때 나는 '수학 열등반'에 있었는데 그 반에서는 내가 제일 잘하는 편이었다. 나는 문제풀기를 시키는 데 대비해 자습장을 끼고 살았는데, 한번 시켜서 잘 하니까 자꾸 시키고 결국 내가 못 풀기 시작하니까 "수민아, 공부 포기했냐~"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수학 선생이라기보다는 야간자습 감독 선생으로 더 많이 기억난다. 그는 야간자습에서 1학년 때 내 옆짝과 온갖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김xx 영어 선생님. 영어도 열정적으로 가르치지만 환경미화에 더 열성적이었던.... 학급에만 들어오면 바로 주번을 불렀다. '지각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지각하면 운동하는 거 말이당) 어느날 그 선생님한테 걸려 지각운동을 하다가 한 친구가 어지럼증을 내게 호소했던 날이 있는데, 그날 저녁 그 친구는 결국 사물함 쪽으로 쳐박히듯 쓰러졌고 그 친구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내가 그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근데 아주 잠깐 나돈 소문은 내가 사람을 때려서 죽인 걸로... ㅡㅡ;;;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가 새는구만. 여튼 김 선생은 내가 고3때 학년주임 선생이었다. 내가 졸업한지 한 2년쯤 지나 다른 신설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 근처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운동장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그가 역시나 아이들에게 쓰레기 줍기를 시키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전근가고 얼마 안 지나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 좀 궁금하다.

김-- 국어 선생님. 김00 국어 선생님이 급진적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은 전교조 교사였던 데 반해, 김-- 선생은 보수적인 성향이 보이는 분이었다(당시 두분이 딱히 대립했던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이고 학생들한테도 격의 없이 대했던 분이기도 하다. 그분이 김수영의 시를 읊으면서 정치적으로 조갑제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신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분이 쓴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는 최근에 뉴라이트계열의 교사모임에서 대표를 맡았다. 그렇게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분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좀 난감했다. 나를 좋아하는 교사였고 내가 문학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도 연신 잘됐다고 하셨던 분이다. 이번에 만나면 어떨지 모르겠다. 나에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 <딴지일보>를 빌려 가셨었는데, '좋은 책 읽는다'는 칭찬만 했다. 물론 이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군사독재 청산도 중요하지만 문민독재도 그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냐?"

이xx 교감 선생님은 내가 재학 당시에 지구과학을 가르쳤던 분으로,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어서 '김정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작년 학교를 찾아갔을 적에 교감으로 계시는 걸 봤는데, 어라, 머리가 덜 곱슬이고 김정일의 모습을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벼.

암튼 중요한 것은, 내가 잠시 돌아가 있을 곳애 그들이 돌아와 있다는 사실. ㄷㄷㄷㄷㄷ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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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전과 뒤통수

Free Speech | 2008. 4. 15. 00:47 | Posted by 김수민

나도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동안의 활동을 의심케 할 생각을 내비친 사람이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회피와 왜곡에
답답해진 나는 아무개가 근래에 쭉 써온 쓴 글을 읽어보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그는 읽지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문제 없다.
다만 그러면서도 계속 거기에 대해 읽은양 찬성하는양
말해온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장에 반감이 없으니까
그냥 시늉을 한 것이다.  

그는 그 필자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필자를 믿지 않는 것이랑 그 이야기의 옳고그름을 판별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느낌을 가지고 현상을 쉽게 재단하고
그 재단을 가지고 그 인물을 쉽게 논하고 흉보고는 했다.

그러다가는 어느새인가 친해져서 어울려 다녔다가
또 한편에서는 그 거꾸로의 장면을 연출하고는 했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습성을 나무랐다.
그는 그냥 면피한 것이지 새겨들은 것은 아닌데
마치 새겨들은 양 나와도 어울린 것이다.

그의 고집스러운 자세란 분별력도 없이 단순한 당위를 내세울 때나 가능했던 것이고
(분별력 없는 당위는 다른 살펴야 할 당위를 죽여 버린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그저 친교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었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
그 친구가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는 걸 그동안 쭉 알고 있었다.

예전 그가 과거 청소년기에 가진 어떤 신념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걸 기억하면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곰곰히
돌아보면 그때와 별다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더이상 간여하고 싶지 않다. 비맞은 중처럼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노래를
읖조린다.. 렛 잇 비~ 렛 잇 비~

여기서 더 참견하면 꼰대밖에 더 될 것 같고
나 역시 함정에 빠져들어갈 것 같다.

나는 뒤통수를 맞지 않았지만
내 뒤통수를 어루만져 본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라
어떤 고민에 파묻혀 다른 고민을 제쳐둔 것은 아닌지
한계를 짚어낸답시고 여지를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의 상상력과 사려심이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이 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어느 우주와의 대화를 마감한다.

하지만 'educo'(안에서 끄집어낸다)에 대한 믿음만은
버리지 말기로 하자.

남들이 나더러 가차 없다고 하거나 말거나...
또는 거꾸로 성선설론자라 규정하든 말든...
 
어디다 꺼내지도 써먹지도 못할
뒤죽박죽 횡설수설
술 안 먹고 쓴 술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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