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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찬가'에 맞섰던, 대운하시대에도 듣고픈 이노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2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2008년 03월 08일 (토) 20:37:22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전편에 나온 ‘시나위’의 주요 활동무대는 ‘록 월드(Rock World)’였다. 1984년 ‘라이브’라는 카페를 운영했던 신중현이 이태원의 태평극장을 개조하여 만든 이 헤비메틀 전용 공연장은, 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김도균, 오태호, 손무현, 서태지 등의 산실이자 숙식소였다. 신중현은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이라는 세 음악인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의 록씬과 1990년대 가요계를 수놓은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신중현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추자, 펄 시스터즈, 김정미, 박광수, 박인수, 바니 걸스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았고, ‘더 멘’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 록 제1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더 이상 신중현의 전성기가 될 수는 없었다. 김완선의 데뷔곡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 중후반 활동이 중단되었던 신중현을, 세월은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쟁고아 신중현과 전쟁청년 박정희의 악연

 
 ▲ 신중현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록그룹 '애드 포'의 음반
   .
 1938년 출생한 신중현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뀐 시기는 그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터졌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고아가 되어 하루 17시간씩 막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그는 기타에 취미를 붙였고 홀로 연습하다시피하면서 연주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는 ‘재키 신’이라는 별명으로 미8군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그에게 가난을 선사했던 한국전쟁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자 터전이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청년들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좌우익의 대결 속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상당수 사라졌지만, 그래도 군부의 우산 아래 있던 청년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문익환이나 리영희처럼 나중에 ‘재야 인사’로 불리던 인사들조차 국군 통역장교 출신이다.

  남조선노동당의 군부 내 프락치였다가 체포된 뒤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비공식적으로 군 업무에 복귀했던 즈음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1949년 이미 북조선의 대대적인 남침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정보장교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머니의 제사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그의 사상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깨끗이 씻어냈다. 동거녀와 결별한 고통을 딛고, 전쟁 중 만난 육영수와 결혼하기도 했다. 6.25는 5.16의 젖줄이었다. 신중현은 뒷날 쿠데타 이후 출현한 독재 정권과 악연을 맺는다.

 고향을 떠나온 백인 미군 병사들은 신중현에게 주로 컨트리 음악을 요구했지만, 그는 온갖 장르를 두루 소화하면서도 록을 지향했다. 1962년에는 한국 록밴드의 원조인 ‘애드 포’(Add 4)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 영국의 비틀즈(The Beatles)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 둘, 베이스, 드럼으로 짜여진 라인업도 같았고, 그런 형태를 보편적으로 퍼뜨렸다는 것 또한 비틀즈와 애드 포의 공통점이었다.

  ‘덩키스’, ‘퀘스천스’를 경유하여 ‘더 멘’에서 연주하던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조국 찬가’를 작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딱히 비판적인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중현은 음악인의 자존심으로 버티며 거절한다. 그리고 반항했다. 삭발한 보컬리스트 박광수를 대동하여, 대통령 찬가 대신 작곡한 <아름다운 강산>을 방송에서 부른 것이다. 그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가 쇼에 참석했다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후문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박 정권으로부터 닥쳐올 박해의 서막이 되었다.

  197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기 위해 무자비한 부정선거를 펼칠 만큼 박정희의 지지도는 떨어졌다. 반면 신중현은 1974년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여 공전의 히트곡 <미인>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일본으로부터 귀화 제의를 받는가 하면 미국의 언론에게도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다음 정권의 손아귀는 록, 포크 계열의 반항적 음악인들을 더 세게 죄어가기 시작한다. 신중현의 노래 다수도 금지되었다. 김추자가 부른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고 해서, <미인>은 퇴폐적이라는 사유로, <뭉치자>는 “북괴와도 뭉치자는 이야기냐”고 트집이 잡혀 금지곡이 되었다. 특히 <바람> 등 신중현사단의 일원인 김정미가 부른 노래들은 거의 모두가 포박당했다.


대운하시대에 듣는 <아름다운 강산>

  점차 날개가 꺾이던 신중현은 1975년 12월 4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의 아들이 음악인들과 어울리면서 대마초파동이 시작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스운 건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시점은 대마초파동 이후의 1976년 4월 7일이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발이 묶였고, 신중현도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는 노장사상을 접하면서 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신중현. 드럼 연주자는 신중현의 삼남인 신석철이다.


  그가 접한 노장사상은 1990년대 발표한 [무위자연], [김삿갓]에서 만개했다. 하지만 당시에 신중현을 수식한 찬사인 ‘살아있는 록의 전설’에서, 강세는 ‘살아있는’보다는 ‘전설’에 찍혔을 따름이다. 그를 재평가하는 무수한 평론이 분만되는 한편, 그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달 5일, 필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신중현을 처음으로 봤다. 그는 공로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무대 위로 올랐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었다. 2006년 11월 그의 은퇴공연에라도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작년 대선에서 ‘노 브레인’이 이명박캠프 측에 로고송을 제공했을 때, 나는 조국 찬가를 거절한 신중현의 꼿꼿함을 떠올렸다. 요즘은 어마어마한 생태파괴가 예상되는 데다가 경제효과마저도 없다는 대운하를 파겠다는 이명박 정권을 경멸하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다시 꺼내 듣는다.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반복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후퇴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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