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산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펼쳐 한달음에 읽어내려갔고 저녁 6시에 책장을 덮었다. 숱하게 등장한 인명을 이 독자의 머리에 입력해두기가 어려우나, 어쨌든 '부드러운 직선'보다 그냥 직선을 좋아한다는 그는 실명 거론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권용목과 김창현인데, 권용목을 향한 안타까움은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드러냈었고, 김창현과 이영순은 가히 낙선운동 대상자급이었다. 김과 이를 위시한 울산연합의 행태에서 놀랐던 것은 이들이 통일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좌절과 민주노동당 분당에 관한 회고[각주:1]가 없다는 점을 빼면, 민주노총 위원장과 구청장을 지낸 인사의 자서전으로서 여러모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특히 투쟁과 협상의 방법을 적은 메뉴얼이 인상적이다.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펼친 활동 가운데 내게 가장 경이를 안겨다준 건 골리앗 투쟁도 민주노총 위원장 활동도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라 구청장 시절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회장들과 가진 면담이다. 또 그는 곳곳에서 애국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정파주의 등 각종 집단주의를 경계하고 배격한다. 그는 견결한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돋보인 것이 탄탄한 민주주의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갖고 있었던, 구청장 시절 공문서 조작 사건에 대한 의구심도 풀렸다. 현중 활동가 여럿의 훼절에도 불구 직선으로 걸어온 그가 잘되길 빈다. 그리고 자신이 곡선도 꽤 잘 그린다는 걸 인식했으면 한다. 사실 나와 그의 이념적 거리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노총이나 연맹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굵직한 노동운동가 중에 내가 가장 덜 꺼려하는 사람이다. 이갑용은 여전히 민주노총 직선제를 주장한다. 직선제가 되면 우파(국민파)의 득세가 온존 내지 강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업장 매몰, 연맹이기주의, 정파의 패권추구를 꺾고 노동계급의 연대를 지향하려면, 조합원 개개인에게 표와 이니셔티브가 돌아가야 한다. 가입이나 조합비 납부에서도 그렇다. 내가 만일 언젠가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다면, 직선제 쟁취에 뜻을 보태련다. 노동운동의 G-드래곤, 갑드래곤의 또다른 히트작을 기다리며.
이갑용은 문제의 2.3 당대회에서 최고의 명연설을 남겼다. 남한진보정파연합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수명을 다하기 직전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는 일심회 사건을 해당행위가 아닌 국가보안법상의 탄압으로 연계시키려는 자주파에게, "노동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며 경고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피식 웃었을 테고, 특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선동가가 그랬다면 '네가 노동자대표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갑용이었다. [본문으로]
다녔던 대학교의 도서관이 졸업생의 일상적 출입을 사실상 금했다. 학기초에 신청을 해야 한단다. 뒤늦게야 안 것은 반년 넘게 거길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때 출입체크기계가 이상한 반응을 했다. 아, 그게 그거였나 보다. 졸업생은 책을 빌리려고 해도 30만원쯤인가의 금액을 평생동문회비로 내야 했는데 이제 출입도 따로 신청해야 한다. 더러워서 안 가지만, 갈 이유도 없다.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삶'. 이루지 못했던 꿈이 올 한해 피어오르는 중이다. 최근 3, 4년간 누가 내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면 바로 답을 하지 못했었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자료'에 불과했다. 책의 외양을 하고 있어봐야 한낱 자료뭉치였다. 묶고 엮는다고 다 책이 아니다. 冊의 가로획은 독자가 긋는 것이다. 언젠가 경제위기가 닥치게 되면 주저 없이 책을 팔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는 데 20년이 걸린 셈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멍청해지는 인간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진도가 빨라지기는 했다. 저렇게 멍청해지느니 이렇게 멍청한 게 낫겠다. 책이라고는 좀처럼 읽지 않는 삶이란 글 같은 것은 남기지 않는 삶과 꽤 포개어질 것이다. 이제 쓸 글도 별로 없다. 예전에 내 글을 읽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들려줄 예전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가 드물다. 결국은 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책을 자료로 전락시켰듯 글을 메모로 강등하면 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칼의 꼬붕이 된 펜이 펜을 못 구한 칼을 이겼을 뿐이다. 펜을 버리고, 아무도 참칭하지 않고, 허공에만 나의 칼을 휘두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버려야 하고, 그 다음에 버릴 것들을 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무소유의 비장미를 풍겨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몰락이어야 한다. 서서히 꺼지기보다 확 타오르다 사라지는 게 낫다는 어느 뮤지션의 유언은 헛소리다. 당신도 서서히 꺼진 거라고. 자살은 말야. 인간만이 가능하다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자연사거든. 제 명에 죽은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책과 글, 활자에 얽힌 비루한 인생이 굳어져서, 나는 또다시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일 테다. 그래도, 가능하면 덜 읽고 덜 쓰자.
그래, 어쩌면 황석영의 오늘은 장준하의 1972년 7월 4일과 10월 17일 사이와 대동소이할지도 모른다.
손학규를 지지했든 이명박을 감싸든 통일 때문일 수는 있단 느낌이 든다.
그 '통일'이 튀어보려는 그의 버라이어티쇼의 중심소재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중도, 그의 통일은
가운데에서 하나를 내세워 흩어진 다원성을 억압하는
또하나의 극단
또하나의 분단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통일과정의 지난함보다는
통일 이후를 먼저 깨우치는 것이
눈높이에 맞을 것 같다.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을 추천한다.
새벽을 꼬박 바쳐 읽고 나니 이응준이 다시 보인다.
(...) 진짜 사회주의자는 말이야. 제 애비가 정주영이라고 해도 사회주의자인 놈이어야 해. 어디 있냐? 그런 놈이. 나한테 연락 좀 부탁한다고 그래라. 통일 이후에도 그래. 좌파들이 이북 노동자들한테 하는 소행들이 어떠냐? 방금 뉴스에서도 함경도 아저씨 하나 천국 갔잖아. 또 우파들이 누구냐? 통일 전에 그렇게 북한 인권을 들먹이던 사람들 아니냐. 그걸 걸고넘어지면서 식량 원조에 반대하던 양반들이 아니냐고. 뭐냐? 통일이 되고 나니까 이북 사람들 바로 왕따시켜 버렸잖냐. 통일 전에 우파들은 북한 사람들을 걱정했던 게 아니라 그들에게 공으로 퍼 주는 게 아까웠던 거야. 좌파들은 동포애를 주둥이로만 나발거렸을 뿐 막상 옆집에 이북 사람들이 살게 되니까 너무 좆같은 거고.
그럼 뭡니까?
뭐냐고?
네.
회사원인 거지. 양쪽 다 회사원. (...)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까지 전부 회사원이니 나머지 놈들은 말 다 했지.(...)
나는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을 선정하며 평을 붙이지 않았으나, 별도의 포스팅으로써 나름의 소감을 밝히기로 결심을 수정했다.
1. 장정일 <인생>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기껏 그를 '야한 소설 잘 쓰는 작가', 조금 더 그럴싸하게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추문에 휩싸인 사제'쯤으로 여겼었다. 그런 내게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실린 단상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그를 정치사회적 발언가로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정작 '인생'은 유미주의 반대가 지성주의의 탈을 쓰고 암약하는 사회상에 유쾌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서 장정일이 피력한 견해는 작년에 내가 작성한 '미스코리아가 누드모델보다 잘났어?'('20대 대구 여성'이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례적인 기사였다)로 이어졌음을 고백한다. 옛날 장정일은 시쓰는 법을 잃어버렸다며 그후 소설과 희곡에 천착해 왔는데, 요즘엔 교술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어쩌면 소설쓰는 법조차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울 때마다 집이나 도서관의 책장에서 예전 작품을 뽑으면 그만.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을 곱씹어보면, 그의 행로는 넉넉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그의 인문학 공부를 훔쳐 보련다.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기숙사 자치회실에서 받아읽던 <시사저널>에 실린 작품. 그가 이 에세이에서 지적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의거한 '옆차기'는(지랄옆차기여!) 내가 대학생활 내내 경계해온 것이다. 그는 거짓말처럼 2002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을 숨겼던 탓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공 잘 차고 춤 잘 춘다는 그는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리베로의 구평을 구사해 왔다. 1980년대 PD계열 활동가 겸 비평가였다는 사실, 이인화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증거를 잡아낸 지난 사건은 나중에 알았다. 이성욱처럼 다재다능한 비평가로는 정윤수와 성기완을 꼽을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한 분은 축구해설가로 다른 한 분은 기타리스트 또는 시인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까 리베로 '비평가'로서 나는 이성욱을 제일 첫자리에 앉혀 놓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성욱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고, 소장한 저서도 <비평의 길>밖에는 없다. 이 작품을 선정하면서,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를 그간 별러왔으면서도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나는 2002년의 반미 무드가 석연치 않았고 못마땅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하등의 반성도 없었으며 이주노동자를 괄시하던 이들이 언제 그리도 "약소국 국민"으로서 분개했는지 우습기 그지 없었다(곧 있음 강대국된다매?). 나는 그래서 민족주의를 초월한 미국 비판을 부산교대 교지의 기고문을 통해 주문하기도 했었다. 반미운동의 심각한 결함은 도리어 심미선, 신효순 씨 사건으로 더욱 분명히 폭로되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즈음 온 나라는 월드컵에 취해 다른 이슈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시위가 터지자, 일부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주검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동록 사망에 침묵하다가 별안간 "효순이, 미선이"를 부르짖은 대중들은 가부장주의("감히 우리 딸을!")를 실토했다. 반성은 없었다. 촛불시위를 제안한 네티즌 '앙마'는 세계주의적 자세를 시종 견지했고 이라크전쟁반대운동까지 꾀했지만, 우리의 '운동권'들께서는 소파개정구호를 주한미군철수요구로 뒤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다시 한번 분노의 마음으로, 필자에 관한 소감까지 생략하면서, 이 글을 되새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운동가는 아니었고 진보적이지도 않았지만, 남북통일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던 한 선배가 있었다.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라고 못박던 내게 그는 "그런 발상이면 통일은 영영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기 내에 통일을 하지 못하면 기회는 없다"고 타일렀다. 그는 내게 2000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정운영 강연의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통일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나.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글도 챙겨 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중앙일보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감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초창기 시절에 내놓은 칼럼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본작처럼 울림이 큰 경우도 있었다. 왼쪽으로 흐르고 있던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그와 이 칼럼에서 조우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둡체크의 방랑과 복수! 한동안 나는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로 체코와 프라하를 꼽았다. 정운영은 고인이 되었고, 그 선배는 노동쟁의로 들끓었던 어느 기업의 직원이 되었다. 비조합원이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진보개혁을 지지하지만 고종석의 글을 싫어한다는 이들은, 그의 신중함과 거리두기에 이물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러나 고종석만큼 편파적인 글장이도 없다. 상대방의 비열함에 맞춰 자신의 강약을 훌륭히 조절하는 그는 자주 가차 없는 독설가로 등장한다. 이 글을 그 증거로 제출한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이문열의 담론권력은 막강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옳은가 그른가를 물으면 6:4가 나왔지만 이문열의 홍위병 발언이 옳은가 물은가를 조사하면 비율이 거꾸로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문열은 창작에 부진했고 제자를 양성하러 만든 부악문원도 흐지부지되었으며 그의 말빨은 예전처럼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이에 고종석의 기여가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에세이는 참으로 적절한 수준의 사나움으로 이문열의 사기극을 제압하였다. 이문열의 수구반동성에 동조하거나 그에게 예술가-예외주의를 베풀던 팬들이야 벌떼처럼 흥분했지만, 이제 담론권력으로 치면 검도 5단 이문열보다 뿅망치 1단 진중권이 더 강렬한 시대가 왔다. 나중에 이문열은 이빨빠진 호랑이의 모습으로 고종석과 대담하였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2006년 추석 연휴를 앞둔 밤 술을 진탕 마신 나는 버스 안에서 약간의 두통과 극심한 허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귀향길이었다. 김명인이 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었던 덕분이다. 정과리는 1988년 민중문학론을 이렇게 비판했다. "(...) 민중의 주체성의 회복 문제에 그들을 가둠으로써 (...) 결국 그것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라는 명분 하에, 그 노동 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때 민중문학론의 한 가운데 있던 김명인은 1990년대 전향을 선언했다. 당시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는 모 비평가는 세해 전 재인식 어쩌구를 지껄이는 집단에 가담했으며, 정과리는 수구신문과 어울리고 있다. 김명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과리에게 배운 셈이 되었지만, 정과리는 김명인에게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듯하다. 김명인은 7, 80년대와는 다른 이념과 방법으로 여전히 폭압에 저항하고 있다. <스텐카 라진>(잡지 수록 당시 제목은 <찬가의 비극>)의 감동은 그가 90년대 새 길에 들어서며 내놓았던 <불을 찾아서>보다도 훨씬 진하고 또 은은하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바람을 타고 박민규는 <한겨레>의 '야! 한국사회'로까지 나아갔다. 대통령탄핵의 폭풍과 후폭풍이 한국사회를 휩쓸 무렵 그가 표출한 유머러스한 결기가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서 갈구한 '일 많이 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화두는 한국사회에 닥쳐온 실업과 고용불안 속에서 손쉽게 사장되었다. 박민규는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가 흠칫했듯 '십구구단'과 같은 고난도 코스가 새로 들어선 대신, 가감승제 가운데 나눗셈만은 우리네의 '스펙'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박민규는 후일 용 네 마리가 모여 이룬 '말많을 절'이라는 한자를 제목으로 삼은 소설을 발표했다. 무림고수의 극악빙공은 지구온난화에 꺾여 버리고, 민주는 아빠에게 자긴 돈이 전부라고 소리친다. 곱셈을 넘어 제곱에 맛 들린 이 나라에, 박민규는 루트를 씌울 수 있을까. 제법 똑똑하고 제 정신이기도 한 몇몇 사람들이 지구 멸망에 대비한다며 충북 단양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민규, 단양에서 취재하시라.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교수들이란, 참 믿기 힘든 사람들이다. 얼마나 많이 남의 다리 밑을 기면서, 숱하게 학문적 재미나 이념적 소신을 집어 던졌을까. 박홍규는 "(...)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박홍규는 믿을 만한 교수이다. "쓰레기 같은 이메일이라 잘 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기도 해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 내가 보낸 메일에 대한 그의 답신이었다. 이 에세이에 밀려 아깝게 수상작에서 떨어진 <나의 초라한 보수주의>를 옮긴다: "어제 참 오랜만에 ‘진보’ 교수들과 개강 술 같은 걸 마시면서, 정규 교수직 임금을 10%만 깎아도 비정규 교수직 임금은 2배가 되는데 그런 운동을 하자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 공생을 위해 대학에서는 자가용이나 휴대전화를 쓰지 말자고 하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컴맹인 나를 시대착오적 골통 ‘보수’라고 비웃는다." 박교수여,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그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를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이다. 구미가 고향이라는 박홍규를 보면, 갑자기 내 안에서 애향주의가 도지기까지 한다.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중학교 1학년생일 때 그를 처음 읽었다. 이 글은 2006년 1월 어느날 아침에 받아든 한겨레신문에 있었다. 와우,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는가? 나는 2년에 걸쳐 한 대목을 내 프로필에 가져다 썼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사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어느 기고문의 초반부에서 이재현이 한총련 학생들에게 했던 표현("한총련은 30초 안에 버릴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로버트 드니로라면, 화염병보다 먼저 주체사상을 버렸을 것이다" )을 인용하고, 뒷부분에서는 학생사회는 운동권문화와 기만적 탈정치를 30초 안에 모두 버려야 한다고 변주한 적도 있다. 그해는 내가 가장 열심히 다양한 운동(movement)에 뛰어들었던 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난 세계의 칼에 베여 죽지 않았고, 멍청한 세계는 역시나 나를 해석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였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이번의 수상자 가운데 진중권은 이재현, 고종석과 함께 청소년기부터 내게 영향을 끼친 글장이로 꼽힌다. 그는 글을 빠르게 많이 쓰고, 본 수상작 말고도 기억에 남는 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2년 반에 걸쳐 유지한 민주노동당 당원자격을 버린 직후에 나온 이 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4년 2월 민주노동당 입당 결심을 굳혔고, 제대하고 나서 3개월쯤 지나 입당했다. 민족해방파와 사회주의자들 양쪽 등쌀을 못 견뎌낼 것 같아 말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2006년초부터 지난한 당혁신운동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고, 2007년 9월 내가 밀었던 노회찬 후보가 꼴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TKO를 선고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진중권은 별다른 정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학내 강연에 그를 초빙하러 연락했을 때, 그는 정치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민노당 분당을 전후해 나는 "진중권 안 오기만 해봐"라며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고 썼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김수민에세이상은 김수영문학상이 김수영을 기리는 상인 것과는 달리, 김수민을 기리는 상이 아니라 김수민이 주는 상이다. (당연한 말씀...) 상품, 상장, 상금은 일절 제공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시상식이 개최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내가 대학생 신분이었던 2001년 3월~2009년 2월(군복무 기간 포함)에 발표된 에세이 및 칼럼들 중에 열 편을 골랐다. 메시지가 마음에 들고 울림이 크면서, 미문이거나 독특한 스타일이 빛난 작품들이다. 순위는 없으며, 발표 순서대로 배열한다.
고심 끝에 작품별 해설은 생략하기로 했다. 밑줄도 치지 않았다. 괜한 주접이 될 터이므로. 단 하나만 뇌까리자면, 대중음악을 다룬 에세이가 수상작에 포함되지 않아 아쉽다.
수상작 명단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1.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김희선과 최지우는 참 예쁘다. 두 사람이 서로 친한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두 사람이 분위기 좋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식당에서 포도주를 한 잔씩 기울이며 가끔씩 인생을 이야기 하였으면 하고 바란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네티즌들이 이런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공부를 못했을 것 같은 사람은 누구?' 이런 할 일 없는 사람들 때문에 연예인들은 참 피곤하다. 결과는 김희선이 1등, 최지우가 2등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며칠 전에는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책을 읽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네티즌, 이 사람들 스토커가 아닌지 모르겠다. 결과는 김희선이 1등, 최지우가 2등. 아내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다.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 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열거한 즐거움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고한 원칙과 각오만 되어있다면 철저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오직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주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사는 일이,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빌어 개인적인 사욕을 키우는 사람들 보다 더 신뢰가 간다. 보기만 해도 창자가 울렁거리는 이회창이나, 여성 운동을 팔아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이 된 이연숙 같은 사람보다 아무도 찍어 바르지 않는 개인주의자가 훨 낫다. 예쁜 사람이 머리 나쁜 것은 신이 그만큼 공평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 쪽팔릴 일도 아니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안티미스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 잔인하게 느껴진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할 수 없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가장 뛰어난 장점과 특기로 성공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처럼 구구단도 못 외우고 영어도 할 줄 모르지만 기막히게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1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고, 타고난 두뇌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듯이 타고난 미모로도 자긍심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예쁘고 머리 나쁜 여자는 식모나 점원을 해야만 당신들의 직성이 풀리나? 사실을 말해보면, 자신을 과시하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은 비단 미녀들만의 허영만은 아니다. 성상품화니 여성 비하니 하는 것은 당사자가 느껴야 절실한 것이지 주위 사람들이 대신 해줄 수 없다. 학교 성적을 알 수는 없으나, 하려고만 했다면 김희선이나 최지우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승부를 내야할 분야를 잘 알고 있었기에 우등상 같은 건 다른 동료들이 받을 수 있도록 양보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네티즌들은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공부를 못했을 사람이거나 가장 책을 읽지 않을 사람과 같은 시시콜콜한 문제로 여담을 하기 보다 신의 불공정과 같은 좀 더 해골 아픈 문제로 골을 쥐어짰을 것이다. 두 미녀분들, 책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는 편인데 며칠 전의 그 기사를 보았더라도 절대 책 읽지 마세요. 인생은 알죠? 앞에 쓴 그대로랍니다. 인생의 즐거운 일 가운데 분명 하나이기 때문에, 두 분이서 포도주 마실 때, 나도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싶어요.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이번 겨울 올림픽의 ‘김동성 사태’는 의외로 많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실격으로 처리되었다는 통보가 전광판에 뜨자, 순간 불같이 분노한 김동성은 손에 쥔 태극기를 내던진다(혹은 손아귀에서 태극기가 미끄러져 나갔다). 다음날 <조선일보>에는 ‘텃세로 우승 가로채는 짓이나, 그렇다고 태극기 내던지는 짓’이나 모두 인간 말류가 하는 짓이라고 비난하는 만평이 실렸다. 그리고 같은 신문 ‘미니칼럼’에도 김동성의 행동을 삼엄하게 나무라는 논조가 게재되었다.
그 만평이나 칼럼이 김동성에게 요구하는 율법은 물론 국가주의이다. 말하자면 국가 및 그것의 상징인 국기 앞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개인의 감정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되며 더불어 어떤 감정이나 분노도 모두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완벽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철 의지에의 요구이다.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동성은 ‘국가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주의적 모범생의 행동 방식을 취하지 않은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셈이다.
국가 대표 선발 과정에 국가를 위해서라면 감정을 비롯한 개인의 모든 것을 다 헌납할 수 있는, 요컨대 ‘국가주의 순도 측정치’ 검사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려나 김동성이 잘못을 하기는 했다. 일순 눈이 뒤집히는 분노가 치솟아도 우선은 손에 든 태극기를 얌전히 개켜놓은 다음, 그 연후에야 비로소 이마로 아이스링크를 다 깨어 버리든지, 주심을 들이받든지 해야 할 일을 그는 너무 순진하게 제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다. 아마 태극기를 모셔놓은 다음에 분노의 ‘액션’이 나왔더라면 아카데미 주연상은, 손 올리는 제스처 하나로 금메달을 가져간 미국의 안톤 오노가 아니라 김동성에게 돌아갔을 터이다.
한데 예의 만평이나 칼럼을 뒤집어 보면 그 이면은 너무 끔찍하다. 그것들의 요구는 한 개인의 감정이나 내면을 너무나 간단히 잘라버리는 국가주의적 ‘개작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장 공비’가 총을 머리에 대고 위협을 해도, 이승복 어린이처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쳐야 한다고 강요하던 반공주의의 율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비록 어린이일망정 총구 앞에서 겁을 집어먹거나, 이리저리 갈등해서는 안된다는. 반공의 율법 앞에서는 개인의 어떤 감정도 내면도 모두 유예되거나 소거해야 한다는 광기의 이력이, 지난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활보하고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앞에서 끔찍함을 보지 않으면 뭘 볼 수 있을까. 난자당하는 개인성 앞에서 끔찍함을 느끼지 않으면 뭘 느낄 수 있을까.
겨울 올림픽의 주연은 국가주의·민족주의·애국주의
문제의 심층은 물론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번 솔트레이크 겨울 올림픽의 주연은 국가주의·민족주의·애국주의 3형제였다. 미국의 선정적인 애국주의가 개막식을 더럽히기 시작하더니, 거기에 러시아의 슬라브 민족주의가 미국 애국주의를 을러대면서 선수단 철수를 러시아 의회 차원에서 결의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거기에 IOC 홈페이지를 폭탄 메일로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리고 안톤 오노에게 협박 메일을 날리는 우리의 ‘신세대’ 국가주의, 대선 주자를 비롯해 김동성 문제를 초당적으로 대처하자는 우리 국회의원들의 눈물겨운 애국주의 등도 실로 ‘불광동 휘발유’처럼 불탄다.
다른 문제도 겹친다. 김동성이 실격당한 이유는 반칙이 아니다. 얼굴이 노랗기 때문이다. 전이경이 IOC 위원 선거에서 낙관적이던 전망과 달리 낙선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예의 삼형제 옆에 인종주의라는 형제 하나가 더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네타 플라워스가 봅슬레이 여자 2인승에서 겨울 올림픽 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는 점은 바로 그런 인종주의의 오랜 역사를 증거한다.
국가보다는 개인, 성적보다는 참가 그리고 세계 평화라는 구호를 걸었던 올림픽은 스스로를 배반해 온 배덕자의 역사이자 20세기 최대의 사기 중 하나이다. 거룩한 구호와 정반대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전장이 되고, 검은 애들이나 노란 애들은 알리바이용으로 배치될 뿐인 백인들의 동네 운동회가 올림픽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동성 문제에 대한 ‘국가적’ 분노가 없으면 올림픽은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주의나 먹고 사는 올림픽에 대해 왜 우리가 이렇게 악을 쓰고 분노해야 하는지, 또 그 분노의 엔진인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와 대체 무슨 관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 늪 위에서 알 수 없는 적을 향해 옆차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한겨레 2002. 12. 15
"하나 속에 모든 것이 포함돼 있고, 모든 것은 하나의 개체로 표현된다." (一卽多 多卽一) 효순이와 미선이 살해자가 법정에서 무죄평결을 받고 지은 미소를 보면서,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동양 성현들의 그 명언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미군으로서의 자긍심”으로 가득 찬 살인자의 미소 속에서 한 인간을 그처럼 비인간화시켜버리는 집단의 내력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 무기와 돈의 힘을 빌려 전세계에서 수백만, 수천만명의 목숨을 짓밟았으면서도 이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참회하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열등 인종’을 살인하는 것이 왜 나쁜지 모르겠다는 그 얼굴 속에서, 살인적인 경제제재로 굶어죽거나 약이 없어서 죽은 수백만명의 이라크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의 부어버린 배들이 보였고, 폭격과 기아로 사지가 찢어지거나 아사하거나 노예로 팔려버린 아프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대형 국가범죄에 유죄판결을 내리기는커녕 ‘테러와의 전쟁’을 찬양하는 그들의 무수한 신문과 방송들의 자만에 가득 찬 어조가 기억났다. 장갑차를 몰고다니는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유세계의 수호천사’라고 치켜세우는 펜과 카메라의 살인마들도 전세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을 깔아뭉개고 있다.
이 폭력과 오만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하여금 지속적인 ‘인신 제사’를 요구하는 지구적 차원의 힘과 죽임의 사교(邪敎)다. 그 사교의 광신도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희생이 우리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햇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효순이와 미선이들을 굶어죽게 만들거나 폭격·지뢰로 죽이는 광신도들에게 분노할 때, 우리의 아픔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마음가짐인가. 이라크나 아프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은, 비록 얼굴과 피부가 다르게 생겼지만, 살인주의자의 손에 억울하게 죽을 때 우리의 효순이·미선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그 부모의 통곡소리도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시위를 하면서 우리의 요구인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 개정 등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와 함께 이라크와 아프간, 그 외 수많은 나라들의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살인주의자들의 침략을 규탄하고 그들 희생자들과 연대와 동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은 더 순리가 아닐까 자신들의 집단을 최고의 진리이자 유일한 선(善)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달리, 우리가 우리의 아픔뿐 아니라 다른 희생자들의 아픔도 함께 나누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진정한 ‘극미’(克美)가 이루어진다. 우리 안의 집단·민족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상처를 우리의 상처로 인식할 때, 그들이 뿌린 악의 씨를 조금씩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철권’(鐵拳)은 민족과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어제는 아프간, 오늘은 이라크가 희생되고, 내일은 북녘 아이들의 폭탄에 맞아 죽는 비명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주먹이 전세계를 위협하는 만큼 우리도 민족과 국적을 가릴 형편이 못된다. 미군의 폭력에 의해 무고하게 죽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은 이라크인들이고, 아프간의 청소년들은 모두 우리의 아이들이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우리의 목소리에 ‘민족감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오래 전부터 내동댕이쳐버린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한다면, 그들의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 개별적인 국가나 민족이 아닌 몇몇 공범들을 제외한 전세계라는 사실을, 전 인류가 하나가 돼서 그들의 악행을 규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살인을 기뻐하는 웃음은 꼬리를 감출 것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정운영 칼럼]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05-01 21:09]
국경을 넘어 밤새 달려온 기차가 프라하 중앙역에 이르렀다. 카프카의 게토, 스메타나의 조국 체크에 도착한 것이다. 미명의 적막에서 나를 깨운 것은 작가와 음악가가 아니라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한 정치인과 한 경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들을 불러낸 호출 부호는 단연 혁명이고, 그들 모두 혁명의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아는 기원전 이곳을 정복하고 다스린 민족으로 지금은 이 지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 가지면
프라하는 봄이었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서구에서 타오른 68혁명의 봉화는 부패한 자본주의 문명을 성토했고,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은 주자(走資)로의 탈선을 고발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경직된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과녁이었다. 카프카의 복권으로 개시된 60년대 해빙기에 작가 밀란 쿤데라,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 등 문화계 지식인이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불길은 공산당에서도 올랐는데, 47세로 제1서기에 오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주역이었다. 그는 구체제를 개혁하고, 당과 사회의 민주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의회 제도 확립, 정당 정치 부활, 법에 의한 재판, 사전 검열 폐지 등 그의 민주주의 상식 실험을 흔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문제는 '야수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역공이었다. 이해 8월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 5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프라하의 성지 바츨라프-영어로는 윈체슬라스-광장은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피를 뿌렸고, 외국군 장갑차와 대포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를 겨눈 가운데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부는 모스크바로 압송된다. 뒤따른 고문.투옥.유배.숙청 등 '사회 정화'의 미친 바람 속에 프라하의 봄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프랑스의 코스타-가브라스 감독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영화 '고백'으로 만들었는데 취조가-배후의 권력이-얼마나 간악하며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리얼리즘보다 '리얼한' 이브 몽탕의 연기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그려냈다.
이해 11월 소련은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한다. 한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으로 주변국 생존이 위험할 경우 이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협으로 간주해 주권을 제한할-무력으로 개입할-권리가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를 '살해하고' 급조한 명분이었다. 프라하 시위대의 구호대로 "레닌이 깨어나 브레즈네프가 미쳐버린" 것일까? 이듬해 공산당에서 제명된 둡체크는 잠시 터키 대사로 유배됐다가 슬로바키아 지방의 산림 감시원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새 권부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정상화'를 되찾았다면서, 봄을 빼앗은 대신 빵을 늘리는 '실질적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
극장 의자에서 시작된 벨벳 혁명
프라하를 보려거든 동구의 물이 빠지기 전에 보라고 했다. 그러나 홈쇼핑 채널의 비만 치료제 선전에서 역전 광장의 섹스숍까지 도처에 서구의 물이 찰랑거렸다. 개나리와 진달래만 피라는 봄은 아니니까…. 체크의 젖줄 블타바-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루프 모스트-찰스 브리지-는 정재와 미연의 10년 사랑이 이뤄지는 커피 광고의 배경이 된다.
둡체크의 공관은 지금 한국 대사의 관저로 쓰인다. 혹시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나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L대사는 "전혀 없어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경제학자 얘기는 뒷날로 미뤄야겠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이런 생각] 이문열씨 인식에 중대 착오 · 대중적 인기로 정치 선동
벌써 이태 전 일이지만, 소설가 이문열씨는 시민운동 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몰아쳤던 자신에게 항의해 그의 책 반환운동을 펼친 부산의 한 사진가에게 ‘당신 전라도지?’라고 다그친 바 있다. 기자는 그 사건을 살핀 한 칼럼에서, 이씨가 그 동안 되풀이 보여준 엽기적 언행을 생각하면 그의 ‘전라도’ 발언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양식 있는 문단 동료들이 그의 반사회적 발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씨에게서 아무런 시민적 양식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그의 산문집 발간에 즈음해 신문 지면 위에 흩날렸던 그의 발언들을 읽으면서도 윤리적 감수성이 발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곰곰 생각하면 주관적 윤리의 수준에서 이씨의 바탕이 별나게 무르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다. 그가 정부와 개혁 진영에 험담의 팔매질을 해대는 것도 그 나름의 애국심, 구국의 일념에 바탕을 둔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 애국심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살아온 기자는 이씨의 나라 사랑 앞에서 외려 옷깃이라도 여미며 부끄러워해야 할 처지다. 심미적 수준에서도, 그에게 ‘부름’을 내렸다는 ‘한국 보수세력’의 눈에는 그의 악담과 선동이 아름답게까지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윤리나 심미와 무관한 ‘순수이성’의 수준에서, 이씨의 자기 인식에 중대한 착오가 있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한 석간 신문을 보니, 이씨는 이른바 ‘개혁’이나 ‘진보’ 쪽에 궁둥이를 걸친 인텔리들에게 ‘하류 지식인’이라는 판정을 내린 모양이다. ‘하류’니 ‘상류’니 하는 말이 그 자체로 천하기는 하지만, 그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자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 짚자. 그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에게 ‘하류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면, 그 발언은 적어도 자신은 ‘하류 지식인’이 아니라는 인식을 깔고 있을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상류’ 지식인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이씨에게 동의할 수 없다. 이씨는 무슨 근거로 자신이 ‘하류 지식인’이 아니라고, ‘상류 지식인’이라고 판단하는가? 그가 다녔다는 대학이 ‘상류’ 대학이고 몇몇 ‘상류 지식인’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국민 작가’가 모교의 명성이나 몇몇 뛰어난 동문의 이름에 기대 자신의 ‘상류 지식인’ 됨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책을 수천만 부나 팔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도 석연치 않다. 그의 눈부신 책 판매량은 그가 재주 있는 대중 작가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가 ‘상류 지식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씨는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 작가고, 그가 지닌 문화 권력의 대부분은 그의 이런 대중성에서 온 것이다. 그의 들큼한 문장에 녹아 난 수백만의 ‘천둥벌거숭이들’(이들은 이씨가 애호하는 또 다른 전문용어로는 ‘홍위병’이다)이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고 있다. 소설가 장정일씨는 이씨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살핀 한 칼럼(문화일보 2월16일자)에서 그를 ‘엘리트’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 ‘엘리트’라는 말이 ‘엘리트 문학의 생산자’라는 뜻이라면 기자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심미적 훈련을 사전에 요구하는 문학이 엘리트 문학이라면, 외려 장정일 문학이 이문열 문학보다 ‘엘리트 문학’에 근접해 있다.
대중 작가로서의 이씨의 재능은 그를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대신, 그가 ‘상류 지식인’이 되는 것을 방해한 것 같다. 이문열씨! 자신에 대한 비판을 지역주의의 틀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이 바로 하류 지식인이다. 제 소설의 대중적 인기를 정치 선동의 엔진으로 삼으며 ‘헤헤거리는’ 당신이 바로 포퓰리스트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로 시작되는 <스텐카 라진>이라는 제목의 그 노래를 불러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4반세기도 더 전, 대학 시절에 벗들과 모여 주점에 가거나 엠티를 가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추억의 애창곡이었다. 특히 대성리나 청평 등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엠티를 가서 나룻배로 강을 건널 때, 강물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맛은 각별했다. 에카테리나 여제가 연모했다고 전해지는, 또 다른 농민반란군 수괴였던 푸카체프와 함께 우리 70년대 후반 구닥다리 운동권들에게는 녹두장군의 러시아 버전으로 기억됐던 스텐카 라진을 추억하는 그 노래를, 그때는 질리지도 않고 참으로 목청을 다해 수없이 불러댔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의 모순
그러나 80년대에 와서 다른 노래들, 광주항쟁 이후의 <님을 위한 행진곡>, 또 조금 뒤의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 등등의 토종 386 노래들에 밀려 그 노래는 더 이상 잘 부르게도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쯤 개봉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그 노래가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비에트 점령군 장교들의 회식 자리에서 마치 승전가처럼 불려지고 그것을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역겨워하는 장면에서 다시 듣게 되었을 때 복잡한 모욕감을 느꼈던 일이 기억난다. 침략군의 승전가로 불리는 것, 날라리 같은 자유주의자에 의해 그것이 경멸되는 것 모두가 조금 견디기 어려웠다. 그 이후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일은 없었고, 가끔 러시아 민요 음반을 통해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니콜라이 갸우로프라는 유명한 베이스 가수의 부음을 전하는 FM 음악방송에서 그의 목소리를 통해 이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진행자는 이 노래의 가사가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납치해서 볼가강 배 위에서 그녀와 주연을 벌이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농민들의 항의를 듣고 문득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주를 강물 속에 빠뜨리고 다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임을 전해주었다.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외롭도다 그 모습” 우리가 불렀던 그 부분이다. 우리는 그 시절, 혁명과 반란의 대의 앞에서 사랑도 가차없이 버린 영웅 스텐카 라진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이 노래를 그렇게 수없이 반복 재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스텐카 라진은 그렇게 다시 농민 속으로 들어가서 영웅이 되었겠지만, 납치되어 반란군 수괴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한순간 수중 고혼이 되고 만 그 공주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갸우로프의 그 장려한 목소리의 뒤에서 코러스를 넣는 합창단 속의 여가수들은 이런 내용의 노래에 아무 의식 없이 그렇게 고운 음성을 바쳤을까 하는 생각. 또 그 시절 함께 노래를 부른 동료 여학생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이며 반란이며 이런 일들이 얼마나 반여성적이며 반생명적인가 하는 생각, 그리고 역사의 뒤꼍에서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고 세상의 모든 찬가며 기념비며 헌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생명의 찬가라면 모두 함께 부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착취와 억압과 기아와 살육이 횡행하는, 그러면서도 아무도 그렇다는 사실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으려는 ‘침묵의 아비지옥’이지만, 그 지옥을 또 다른 지옥으로 대체하는 일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시는 <스텐카 라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뒤에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숨기고 있다면, 그 어떤 찬가도 행진곡도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기념비에도 그 어떤 헌사에도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힘과 다른 지혜로, 다른 정의와 다른 사랑으로, 아무도 억압하지 않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낮은 음정으로, 여럿이 불러도 혼자 부르는 것 같은 그런 노래만을 부를 것이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웰빙은 즉, 뺄셈이었다. 그런 눈치를, 이제 우리도 긁었다. 적게 먹고,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생활의 속도를 줄여 느리게 살고, 한적하게, 그리하여 심신의 여유를 지키는 것이 웰빙이란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되었다. 덜자, 그리고 줄이자, 버릴 것은 버리자, 빈 채로 남겨두자, 빼고 나니 살 것 같다, 이제 좀, 잘 살아보자. 인식의 전환이 있기까지는 - 잘 살아보자 외치며 달려온 지난 50년의 덧셈이 있었다. 개인도 사회도 모으자, 키우자, 찌우자, 채우자로 살아온 웃지 못할 시절이었다. 얼마든지 드세요. 소고기 뷔페가 있었고, 본전을 뽑느라 과식을 하고 소화제를 털어넣던 인간들이 있었다(먹을 땐 꼭 보릿고개 얘기를 했지, 한 오분). 야근에 특근에 잔업에 휴가 반납을 해가며 넓힌 집에, 넓어진 면적보다 두세배 많은 가구를 채워넣고 만족해하던 우리가 있었다.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바쁜 게 자랑이고, 복부 비만을 풍채라 여기고, 큰 차를 타는 게 자랑인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렇다. 이제 그것이 웰빙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게, 되었다. 비로소 이제 당신도 내 말에 공감하겠지만 웰빙은 즉, 뺄셈이다.
이제 곱셈을 하는 거야
이제 덧셈을 하는 한국인은 없다. 모두가 웰빙을 해서가 아니라, 차곡차곡 예컨대 은행적금 같은 걸 재테크라 믿을 촌뜨기는 한국에 없다.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란 걸 우리는 알아버렸다. 그런 눈치를, 긁은 지도 오래다. 주식(株式)은 어느새 우리가 일용할 주식(主食)이 되었고, 부동산은 바야흐로 전 국민이 뛰놀고픈 꽃동산이 되었다. 돈은 이렇게 버는 거야, 그것은 곱셈이었다. 큰돈을 굴리든 쌈짓돈을 굴리든, 늙으나 젊으나 우리는 곱셈을 익히고 또 익혔다. 그것은 열풍이었다. 사오 이십, 사륙이 이십사… 칠일은 칠, 칠이 십사… 소고기 뷔페에서 열심히 고기를 집어넣던 일념으로 우리는 구구단을 외기 시작했다. 구구단은, 이를테면 글쎄 얼마 전에 산 주식이 상장되거나, 눈치로 사둔 땅이 덜컥 개발 열풍을 타거나, 시세차익으로 글쎄 얼마를 챙겼지 뭐니 - 로 구술되었다. 제가 요즘 팔단을 외웁니다. 그럼 팔육은? 사십팔!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 삼단을 외고 있는데. 말하자면 한국인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식의 전환은 - 실은 덧셈에서 곱셈이 된 것이지, 뺄셈으로 이어진 게 아니었다. 지글지글, 연기 한번 자욱한 우리들의 한국은, 여전히 후끈한 단체환영 소고기 뷔페다. 자, 많이들 드시오. 구구 팔십일, 이제 더는 욀 것도 없다(아차, 요즘은 인도의 십구구단을 외어야 한다지).
웰빙은 나눗셈이어야 한다
웰빙을 해봐서 알겠지만, 당신은 이것이 웰빙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안쓰럽고, 말하자면 촌스럽다. 즉 소고기 뷔페에 앉아 있는 80년대의 인간, 그 인간의 이마에 맺힌 땀을 쳐다보는 2005년의 인간, 그 인간의 안쓰런 마음 같은 것이 자꾸만 일어 나는 그만 웃지도 못하겠다. 아니 실은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겠다. 미련한 것은 울거나 웃을 감정의 대상이 아니므로, 그런 것이므로. 말하자면 이제 웰빙은 즉, 그래서 나눗셈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괴로운 것은, 어떻다 해도 돈이 많아야 장땡이란 저 간단하고 명쾌한 진리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도, 부정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소고기는 어쨌든 몸에 좋은 것이고, 곱셈은 편리한 것이며, 구구는 팔십일이니까. 불변의 진리를 시시하게 만드는 방법은 빨리 진도를 나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삼단이든 오단이든 각자의 레벨에서 나눗셈을 시작한다면,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그 기분을, 웰빙을 경험한 당신은 알 것이다. 구구 팔십일 외치는 게 시들해지는 세상은, 그래서 당신과 내가 얼마나 나눌 수 있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다. 웰빙하자. 구구단은 이제 그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젊은 날, 오로지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그 맑은 눈에 어른들이 당당하지 않게 보여, 그들처럼은 살지 않으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작문 숙제에 나는 선생 아닌 다른 것은 무엇이라도 좋다고 썼다가 심한 꾸중을 들었다. 선생인 아버지와 친척들, 그리고 학교 선생들에 대한 반항 탓이었다. 그러나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젊은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당하게 살아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홀로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인연의 무리든 간에 그 속에 뒤섞여 자아를 잃고 살지 말라. 어려서부터 무리 속의 삶에 지쳤던 나는 부모, 형제, 처자까지 남들과 똑같이 대하고자 노력했다. 기타 혈연, 지연, 학연, 지연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다. 따라서 동창회든 종친회든, 등산회든 골프회든, 친목계든 관혼상제든, 교회든 절이든 일체의 모임에 가지 않는다. 젊은 벗이여, 고독해라!
내게는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동기, 동료, 선후배나 스승, 제자, 벗이 없다. 물론 스승, 제자, 벗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배울 만하면 스승이고, 가르칠 만하면 제자이며, 마음이 통하면 벗이다. 그들은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 그렇게 관련될 뿐이다. 따라서 스승이라고 해서 우러러볼 것도, 제자라고 해서 낮춰 볼 것도 아니다. 사실은 모두 벗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젊은 벗이여, 모든 인간을 벗삼아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어떤 지배, 명령, 복종, 지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벗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어떤 권력이나 이데올로기부터도 자유롭고, 영웅주의나 천재주의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가치를 지켜라. 그리고 그런 세상을 꿈꾸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라.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현실에 대한 도전 없이 당당한 삶은 있을 수 없다. 젊은 벗이여, 꿈꾸고 맞서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참된 벗일수록 각자가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갖고 그것을 굽히지 않으며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 없이,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남들에 떠밀려 사는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온 나는 남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거나 글을 쓰는 자를 경멸한다. 특히 자기 생각을 굽히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사는 자를 스승은커녕 벗으로도 삼지 말라. 젊은 벗이여, 굽히지 말라!
물론 이처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한국에서 특히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한다. 젊은이여, 그럴수록 더욱더 당당하게 살라고. 오로지 당당하게 당당하게 살라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젊은 벗이여, 저 도도한 패거리 문화가 만드는 억압과 불평등, 무사상과 무실천의 야만을 당당하게 갈아엎어라!
2005년 4월에 박홍규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이재현
난 ‘좌빠’다. 최근 유행하는 식으로 딱지 붙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십 수년 동안 겪은 정치적 환멸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환멸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더 좌파 이념을 믿어왔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 나는 내 믿음대로 세상이 확 뒤집어지거나 혹은 방향을 홱 바꿔 굴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바는, 옛날 식으로 표현해서, ‘숨은 신’이다.
요즘 ‘죽은 개’ 취급을 당하는 어떤 철학자는 딱 160년 전에 유명한 명제를 통해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처음 접한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일단 세계를 해석하는 것, 즉 ‘단지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음을 잘 안다. 독일어로 ‘다양하게’란 말은 ‘죽은’ ‘서거한’이란 뜻도 지닌다. 그 말이 어원상 칼로 무언가를 갈라서 분리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탓이다. 헌데, 세계를 바꾸기는커녕, 내 나름대로 세계를 이리저리 갈라보며 분별하는 것도 매우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재빠르게 세계의 변화가 나를 베어버렸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이거야말로 환멸과 상처를 십 수년 이상 견디고서 얻은 나름의 지론이다.
나는 한쪽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잽싸게 읽어내려고 애써 노력해 온 반면에, 다른 쪽으로는, 없이, 둔하게 살아왔다. 없이 살아왔다는 건, 내게 없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해외에 한번도 나가 보지 못했다. 못한 거냐 안한 거냐 라고 묻는다면 둘 다 라고 답해야 맞을 것이다. 둘째, 차도 없고 면허도 없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다. 면허를 딸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영어 작문이나 회화 공부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신용카드를 가져본 적이 없다. 특별한 직업이나 기술이 없는 나로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 못해
좌빠로서 세상을 견디며 사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렇게 나는 살아왔다. 또 멍청하고 둔하게도, 이렇듯 내게 없는 세 가지를 내심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안에 틀어박혀 있지만 책과 신문과 인터넷이면 충분해. 배기 가스로 공기를 더럽히거나 주차 문제로 열 받아 싸우지는 않아. 카드를 안 쓰니 거대 전자관리시스템이 내 사생활 정보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어.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세계가 나를 변질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의 변화를 읽고 쓰는,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의 내 친구나 동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간간이 그러하다.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문학평론을 때려치우고 만화평론‘이나’ 한다든가 또 요즘에는 그 만화평론‘도’ 하지 않고 있다든가 하는 비난이 그것이다. 대학에서 보따리 장사를 해서 최저생계비의 일부를 벌기 위해, 내가 늦깎이로, 예컨대 만화 및 사진을 포함한 이미지의 역사나 문화 이론 등을 힘들게 공부해 가는 게 옛 친구들로서는 이해될 리 없었던가 보다. 그런데 나이 먹은 좌빠로서 이런 분야들을 새로 공부하는 것은 어려움도 크지만 즐거움도 많다.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맘을 먹으면 신이 나서 뇌에서 엔돌핀, 즉 마약이 마구 분비되는 것이다.
난 ‘자빠’이기도 하다. 자빠로서 나는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걸 중요한 임무로 삼는다.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가 있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자유주의 앞에 ‘신’자를 붙인 채 사기를 치는, 낡아빠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사람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기만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늘 ‘전투 모드’로 임해서 매번 ‘보스전’을 벌인다. 물론 나의 전투는 거리에서의 몸싸움은 아니고 말이나 글로 싸우는 거지만. 이런 점에서, 나는 얼마 전에 보석으로 풀려나서 재판을 벌이는 홍콩 WTO(세계무역기구) 반대투쟁의 한류 전사들, 그 11명의 ‘수퍼 코리안’들에게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아직,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맞아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은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내가 놀던 동네에서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심한 욕이었으므로, 자빠로서 내가 말해 온 것은 고전적, 혹은 역사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해방주의(libertarianism)라고 변명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 사회 영역에서든 문화 영역에서든 자유해방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난봉꾼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기에는 나는 너무 약하고 소심하다.
자유주의를 말하기 힘든 현실
좌빠든 자빠든 간에 학삐리로서 말이나 글로 싸우다 보니까 모국어의 쓰임새에 늘 민감하다. 남한에서 최초로 일본어 등에 의존하지 않고 본격적, 전면적으로 모국어로 배우고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한, 최초의 세대가 문학 쪽의 4.19세대일 것이다. 모국어를 쓰는데 있어서,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4.19세대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나는 80년대 대학가의 대자보를 그 정치적 활력에 압도된 채 경이롭게 따라읽어간 적이 많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렇게 글을 거칠게 쓰면 어쩌나 하는 아쉬움을 느낀 것이 그 첫 번째 차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 게시판의 글, 댓글, 답변들이 그렇다. 나를 자주 ‘낚기’도 하지만, 생각이나 표현이 너무 거칠고 파괴적이어서, 마치 단세포 동물의 단말마로 느껴지는 짧은 글들, 더 정확히는 글이자 동시에 말이니까, 그 글-말들의 황폐함에 이래저래 속이 아주 상한다.
사회적으로 모국어가 거칠게 쓰인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보자면 우리의 모국어가 아직 어리고 여리다는 뜻이다. 4.19세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겨우 40년밖에 안되는 것이다. 우리 모국어의 역사에는 아직 라블레도 없고 셰익스피어도 없고 괴테도 없지만, 없다는 얘기는 얼마든지 앞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거칠게 쓰이고는 있지만 우리 모국어는 싱싱하고 파릇파릇하다. 모국어의 감옥이 나는 좋다.
그러니까 나는, 육칠십대와 일이십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회적, 언어적 계곡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몇 가닥 밧줄로 엮인 구름다리인 셈이어서, 매순간 출렁거리기는 하지만 두 세대를 이어준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 자부심은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서 냉정한 눈으로 보자면 헛다리짚는 걸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허공에 걸려 있는 게 어디냐며 자위하며 살아간다.
한국에는 많은 이재현이 있다. 제일 유명한 이는 CJ(씨제이)그룹의 이재현이고, 그 다음으로는 CJ 이재현보다 더 많은 현찰을 한꺼번에 직접 주물러 본, 차떼기 주역인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이재현이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이재현들이 있는데, 나-이재현의 신년 계획은 일단 두 가지다. 하나는 외국에 나가보는 일이다. 보름쯤 전에 레바논 미술가들을 만나서 얘길 나누다가, 내가 사회복지나 문화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인프라가 엉망이라고 개탄하면서 아직 한국은 제3세계라고 했다가 크게 반박을 당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6070과 1020 이어주는 자부심
그 다음에는 장구를 배우는 일이다. 우선 타악기는 몸과 마음에 다 좋을 거 같아서고, 게다가 또,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만에 하나 내가 쿠바나 푸에르토리코의 장구 치는 한국 대사가 되는 날이 오면, 마구 막말을 쏟아내기 위해서다. “미국, 너야말로 범죄정권이야, 너는 역사를 위조해 왔어”라고 장구를 치듯 흥겹게 막말을 내뱉게 될 지도 모른다.
양쪽 계획에 다 곁들여서, 말하고 듣고 쓰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앞서 말한 철학자는 만 5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룻날에 할아버지가 되었고 그 해 가을부터 러시아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분보다는 더 오래 살 작정이니까, 새로 시작하는 공부도 그 분에 비해서는 아주 빠른 편이 될 것이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謹弔 민주노동당
예상했던 결과다. 비상대책위원회의 혁신안은 불필요한 수순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의 눈앞에 이른바 '자주파'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 당의 상황을 CD로 구워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는 해당 행위를 해도, 민주노동당에서는 결코 제명당하지 않는다. 이른바 자주파는 그냥 당기위에 올려 조금 제재나 하자는 자기들 측의 중재안까지도 부결시켰다.
1.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른바 평등파들이 퇴장하면서 다음 안건 하나가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상정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북핵자위론을 주장했던 어느 간부에 대한 징계안이다. 하지만 혁신안의 대부분의 내용이 부결되었으므로, 설사 의결이 이뤄졌어도 징계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라는 얘기다.
비대위에서 혁신안 부결을 불신임으로 간주한다고 했는데도 부결시킨 것을 보면, 입에 '대동단결'을 달고 사는 그들도 충실한 종북이라는 원칙(?)이 문제가 되면, 대동단결을 안 하고 싶은 모양이다. 박용진 전 대변인이 '혁신안이 부결되면 당이 깨진다'고 울먹이며 호소를 해도, 종북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을 깨면 깼지, 북핵의 정당성과 '본사'에 보내는 보고의 의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태도의 분명함은 평가해줄 만하다. 사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이들이 대충 혁신안을 받아들여 사태를 무마한 후, 숨을 고르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튀어나와 이제까지 했던 짓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자신들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냈으니, 앞으로도 대중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고, 제 정치적 목표와 정체성을 숨김없이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종북노선이 문제가 아니라 패권주의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종북노선과 패권주의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주사파들이 패권적 행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종북노선의 관철을 위해서다. 당내에서 자신들의 종북행위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존재하니,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작태가 바로 패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종북노선이 존재하는 한 패권주의는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손석춘 씨가 "통일운동에 찬물 끼얹지 말라"고 했던가? 북한에서 핵무기 만드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통일운동'이라면, 그런 통일운동에는 앞으로 찬물이 아니라 똥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는 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 그의 독특한 윤리 감각에 따르면, 제 동지들 신상 파악해 북한에 보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그걸 비판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져버린 패륜 행위다.
옆에서 김민웅 씨도 거든다. 내 기억에 2002년인가? 제 동생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왔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난다며 민주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해서, 나와 설전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 위기까지 고취하며 민주노동당에 표주면 사표가 된다고 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대한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다. 그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종북파의 정체를 몰라서 그런 발언 했다면 용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접해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이번 대회에서 종북파의 정체가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앞으로 계속 이 그들의 행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면, 앞으로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종북파에게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있겠지만, 내게는 통일 되는 날 김정일 정권 아래 고생했던 북조선 인민들에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3.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고 하자, 태연히 "남한에서도 여름에 익사 사고 나지 않냐"고 대꾸하던 이들. 동성애에 대해 묻자 버젓이 "자본주의적 퇴폐"라고 대답하던 이들.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하자 지도원 동무에게 허락을 받고 노래를 하더라며, 이를 "집단주의의 미덕"이라고 찬양하는 이들. 미선이 효순이 끔찍한 사체 사진을 연하장(?)만들어 돌리는 이들. 이런 이들하고 같이 '진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몇 년 전에 내가 당에 절대로 주사파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모 인사가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며 주사파들과 나의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주사파는 내게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민주노동당 가입을 권유하는지 자랑을 했다. "동지, 김 주석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김 주석이라면 남조선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을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종북주의자들이 온갖 편법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을 장악해 들어와도 징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당시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때 내가 탈당으로써 경고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을 해 봤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이른바 평등파도 한때 망해가던 소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동구의 몰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북한을 모델로 삼는 자주파도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주사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주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어떤 경험적 증거, 어떤 정합적 논리, 어떤 상황적 변화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4.
오늘로써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본사'와 연락을 방해하던 세력이 다 나갈 터이니, 이제 이름도 자기들이 애초에 원하던 대로 '민족자주당'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그들은 드디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게 축하의 말을 보내는 바이다. 앞으로 '본사'와 더 긴밀한 협력 아래 '조국은 하나다', '당과 인민도 하나다' 철학을 힘차게 구현해 나가며, 앞으로 진보진영과 아무 관계만 없어 주기를 바란다.
'북한에 정말 아사자가 생겼는가?' '아니면 미제의 공화국 모략 선동인가?' '북한의 핵무기가 정당한가?', '북조선에서는 정말 당과 인민이 하나인가?' '그래서 조선노동당을 비판하면 곧 북조선 인민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가?' 이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논쟁하느라 정력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믿고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여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의제를 향해 진보를 하면 그만이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남아 있었던 이들. 당신들의 생각과 충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니, 더 이상 쓸 데 없는 노력을 접고 진정으로 현대적인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길에 나서라. 그리고 자신이 최소한 주사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남한의 진보정당이 최소한 조선노동당의 지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제 미련을 털기 바란다.
진보정당을 재건하는 과제가 생겼다. 다시 시작하려니 모든 것이 막막할 것이다. 하지만 8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운동권 내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기대는 접어버리자. 그리고 앞으로 진보정당의 새로운 토대가 될 이들에게 눈을 돌리자. 사회에 진보적 역량은 충분하다. 그 역량은 이제까지 낡은 운동권 방식, 낡은 주사파 형식으로 표현되기를 거부해왔을 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남한의 진보운동이 드디어 거추장스런 주사파의 족쇄를 풀어버렸다. 몇 년 전에 버렸던 진보정당의 당원증 다시 주워들고 싶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힘든 길이다. 하지만 진보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면,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라 하더라도 걸음은 내디뎌야 한다. 거대한 위기는 동시에 위대한 기회다.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다. 그가 이 작품을 쓰면서 깊이 알아야 했던 것은 비단 민생단사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과 당대 만주의 상황,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은 물론 그 시기 유행했던 노래에까지 파고 들어갔을 작가의 노고가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감각이 발휘된 묘사의 힘으로써,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설치된 바리케이트에 걸려 그만 설명과 서사에 주도권을 가벼이 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밤은 노래한다>는 아마 소설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악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온 오프라인의 웅성거림을 들어보니 나에 앞서 이 작품을 읽은 이들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연수가 NL이었던 것 같아"라는 속삭임도 더러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촌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녕 NL의 냄새가 난다면 뒤지지 않아도 맡아낼 요량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틀간 각일의 밤을 빌려 읽으며 나는 중간중간에 저 촌평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냐면, 외려 도대체 그의 전력이 드러날 만한 구절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와 중공의 양압에 신음하는 조선인들을 그렸다고 해서 작가를 민족주의자라거나 민족해방파로 모는, 몰지각하고 폭력적인 독해습성이 없는 사람은 다들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의문은 '작가의 말'에서 풀렸다. 김연수가 NL임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촌평자들이 얼마나 희떠운지를 깨닫게 됐다. 단지 북한 사투리로 시를 써보았다고 해서, 촛불시위에서 만난 남총련의 깃발과 학생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고 해서, 그가 NL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다니. 물론 촌평자들이 그게 아닌 소설 텍스트의 어떤 부분(들)을 근거로 삼았을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바 소설의 설정에서부터 섬세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런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촌평자들이 작품 이전에 '작가의 말'을 읽었더라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필요한 선입견과 잡념에 휘둘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사회에서(다른 나라의 사회에서는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좁힌다) 텍스트의 함의가 전력으로부터 연유된 속내 읽기에 거꾸러지는 사건은 흔하게 벌어진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내 엉덩이밑도 약간 불안하다. 나는 김연수가 여섯 해전인가에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동인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도 나타나 있다. 김연수 씨는 대찬 작가는 아니다 싶었었다. 그래도 나는 종래의 인물평으로 소설읽기를 덮치지는 않았다,라며 이 글의 첫 문단을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지만, 불안하기는 불안하다.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나는 동인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작품에 대한 필요 이상의 악평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홍기빈의 <소유는 춤춘다>를 읽는 중이다. 얇은 분량에 여기저기 삽화가 들어간 이 책이 독자층을 어떻게 설정했는지 좀 알쏭달쏭하기는 하나, 내가 읽기에 참 좋다.ㅎㅎ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가 인상적이다.
(...) 대학에 들어가서 똑똑한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남들보다 뛰어난 쪽으로 경쟁을 하는 것보다는 내게 의미가 있고 남들에게도 쓸모가 있어 보이는 일이나 공부를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 경제학이나 국제 정치학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공부하게 되어, 지금도 계속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공부나 다른 뜻 있는 일을 하는 데 꼭 특출한 머리와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과목과 학과를 나누어 가르치는 지식의 틀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그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외교학으로 석사를 땄다. 현재 정치학 박사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는데, 그의 연구 주제는 엉뚱하게도 '지구정치경제학'이다. 그가 경제학, 외교학, 정치학을 연이어 공부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한국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면 그리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와는 두 번 만난 일이 있다. 물론 나는 그에게 '빨간테 안경'을 쓴 어떤 대학생으로 기억되었을 뿐, 그는 내가 <프레시안>에서 자신의 글을 반박했던 이라는 것까지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을 함께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어떤 이야기보다 그것을 뚜렷이 기억하는 건, 그 말이 나를 개안케 했기 때문은 아니고, 나의 생각과 표현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내가 수업시간에 교수로부터 '여운형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에(발설자는 고 방기중 선생이다), 갑자기 반색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박헌영이 싫다고 했고, 그때 가장 옳았던 것은 여운형 노선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제주도에 땅 몇평을 사서 움막을 짓고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책날개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어린 시절 창경원에서 코끼리와 처음 만나 길고 커다란 코와 악수하며 비스킷과 물벼락을 주고받은 뒤, 코끼리를 평생의 토템으로 삼고 있다.
코끼리는 죽기 직전 남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조용히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의 주검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옛날 발간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나왔던 내용이다. 코끼리라...
오바마현상으로 주가만 오르는 게 아니라 블로그 조회수도 오르는구만. 어제 이 블로그 조회수를 보고, 열풍에 끼어든 것 같아 머쓱해진다. 거푸 말하지만, 나는 미국 시민이라면 투표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바마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는다. 다만 케냐와 인도네시아에서 들려오는 함성에는 귀가 솔깃하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쏘아올린 그놈의 '글로벌' 시대정신에 부합한 정치인은 WASP가 아니라 '아프로-아메리칸' 이었던 것이다.
미래학자 워런 와거가 <인류의 미래사>라는 소설을 냈었다. 피터 젠슨이라는 이가 손녀에게 편지를 써 2000년 이후 200년의 역사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세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로, 여성이자 흑인이고 소속 정당은 '빼앗긴 자의 연합'이며 이름은 '차베스'인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 있다. 2032년경 유색인종이 미국 인구의 반 가까이에 이르고, 결국 내전이 벌어져 민주당-공화당 체제가 무력화된 결과다. 그뒤 미국 차베스 정권은 자본가연합과 필사의 대결을 벌이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야 마는데, 이때 미국과 유럽의 성향은 현재의 성향을 뒤바꿔 놓은 듯했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세계당'의 주도 하에 세계연방으로 묶인다. '작은당'의 승리로 정부 없는 개인들의 지배가 오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한 어떤 한국계 여성(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민주당원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자신이 유색인종으로서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국계 미국인 중엔 꼴통보수가 꽤 많지 않았었나? 모 하원의원을 봐도 그렇고. 히스패닉의 경우에도 오바마보다 힐러리에게 더 끌리는 건 아닌가, 그래서 대선에서의 응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미 대선에서 유색 인종 및 소수 민족의 대다수는 오바마에게 표를 던져 백인층에서 매케인에게 뒤진 그를 당선자로 올려 놓았다.
나는 여전히 오바마 정권기에 정치적으로든 사회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변혁은 없다고 예상한다. 그러나 유색인종의 비율 증가가 몰고올 미국의 변화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계급 정치'와 제대로 배합된다면 유럽과 다른, 또는 유럽보다 더 진보적인 흐름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흐름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며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3할의 시민들이 창조자로 나서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사>와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문화 창조자들>이라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난 아직 이 책이 거는 희망에 관해 유보적이긴 하지만.)
한편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이번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충분히 민주당이 선명한 색깔과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번 선거와 결부된 저서가 아니다. 레이코프는 미국판 강준만이 아닌 것이다. 민주당이 레이코프의 전략을 소화할 수 있을지 일단 의문이 들고, 미국적 이상과 가족적인 근본 프레임을 천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전제하는 레이코프에게도 한계가 있다. 근래 미국에서는 제3당을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었단다. 물론 오바마의 부상으로 잦아들었겠지만, 이 흐름을 부자당이나 우익 민중주의에 내어줘서는 안 된다. '빼앗긴 자의 연합'의 지혜가 필요하다.
서점에서 <케인즈&하이에크-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좋은 교양서적이 나왔겠거니 하고 지나치려다가 손으로 집어들고 말았다. 지은이 때문에.
현재 진주산업대에서 화폐금융을 강의하는 박종현 교수는 7년 전 내가 수강했던 <정치경제학> 수업의 강사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분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내 이름을 먼저 알았고, 수업시간에 내 이야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났다. 내가 수업을 들었을 때도, 뻔히 강의실 안에 앉아 있단 걸 알면서도, 내 칭찬을 했다. 왜 그렇게 칭찬을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수정자본주의 대 신자유주의', '시장실패론 대 정부실패론'이라는 교과서적 구도에 입각한 듯한 이 책을 피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몇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나는 그의 수업을 들었고, 그의 스타일과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서 조금 안다. 몇해 전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던 그의 경제칼럼도 재미나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안다고 넘겨버린 것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싶었다. 사실 난 아직도 경제학에 문외한이다. 하이에크에 대해서는 오래전 <노예의 길>을 읽고 밀턴 프리드먼과는 다른 부류라는 직관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케인즈에 관해서도 나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나는 진정으로 '시장'을 통찰했다고 보기 어렵다.
박 교수는 수업시간에 다양한 사례를 들다가 다른 길로 접어들고마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일화를 꺼내드는 그에게 "이번엔 돌아오셔야 해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 습관이 가장 빛났던 때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이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같은 이론들이 정연하고도 다채롭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강연 끝머리에 그는 자신의 성향과 자신이 속한 어떤 연구모임의 성격을 "케인지안 좌파"라고 밝혔다. 조금 어렴풋한 기억인지라 무슨무슨 일을 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는 그 강의를 끝으로 국회도서관 연구원 일만 했고, 조금 지나서 진주로 갔다.
책날개에 나오는 "대안적 제도주의 경제학의 분석틀을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도 관심이 있다"는 저자 소개에 '그러면 그렇지'한다. 조금 더 그의 글을 자주 봤으면 좋겠다. 책 내용은? 지금 막 읽기 시작했다.;
1.
"어제, 간첩이 잡혔다. 너희도 이런 건 알아야 돼... 민중당의 김낙중이란 사람 등등이 간첩으로 잡혔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들은 이야기다. 담임 교사가 워낙 정색을 하고 말한 데다가 나는 그것을 뒤엎는 보도를 볼 수가 없었다. 과거 박정희 정권이 고문을 자행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간첩사건들이 조작되어 왔고 아직도 그러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는 뜻이다. 김낙중 선생의 딸, 김선주 씨가 집필한 책이기도 하다. 김낙중은 청년시절 부닥친 전쟁 속에서 국군도 인민군도 거부하였고, 손수 쓴 통일방안을 들고 남북을 오가다 북에게는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남에게는 '북에서 1년간 교육받은 요원'으로 찍힌 비운의 인물이다. 이 사건은 파고 또 퍼내는 우물이 되어 그를 수차례 간첩으로 만들고, 굴비처럼 간첩단을 엮어내는 기원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무르익지 않은 나라에서 발생한 좌우갈등에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는 민족적 관점의 결핍으로부터 좌우분열의 원인을 찾았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자였고, 사회진보를 추구하지만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사회주의자였으며, 남한과 북조선의 관제 통일방안이 아닌 중립화와 연방제통일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남과 북 사이의 중도파였다.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과 보수야당(김대중)과의 연대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에서 좌우 사이의 중도정치인이기도 했다(나는 실제로 여권측이 민중당의 계좌로 돈을 넣었고, 김낙중 선생이 그런 현상을 괴로워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다. 김낙중 선생은 김대중에게 민중당 후보를 일괄 사퇴시킬 터이니 서울 지역구 두개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물론 나는, 이것이 매우 현명한 거래라고는 보지 않는다).
김낙중을 기억하는 이는 문익환과 백기완을 기억하는 이보다 훨씬 적다. 두말할 나위 없이, 레드 컴플렉스 때문이다. 문익환은 다분히 친미적인 배경을 가진 목사이며, 백기완은 반공주의자인 김구와 장준하의 제자 또는 후배였다. 반면 김낙중에게는 딱히 방패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수병이나 김남주 같은 지하조직사건의 희생자들만큼 기려진 것도 아니다. 김낙중은 남루하고 축축한 회색지대에 서 있었다.
2.
인터넷뉴스로 한국전쟁 참전국의 국기들을 들고 있는 일군의 예비역 사내들을 보았다. 최근에 이름을 널리 알린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이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6월 25일이다.
3.
환경이라는 게 참 무섭다. 어리벙벙하게 뛰어다니다 휴식시간에 좋아하는 유행가 한소절씩을 부르던 훈련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1주일이 지나 습관적으로 군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해,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군가는 <전선을 간다>였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맺힌 눈동자
밟아도 뿌리를 뻗는다며 옛날 옛적 조상들이 세운 큰나라를 찬양하는 <아리랑겨레>나 "고향땅 부모형제 평화를 위해"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걸라는 <멸공의 횃불>보다 우리는 이 노래를 더 좋아했다. 가슴이 찡해 남몰래 슬쩍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탐루라...
학교 도서관이 무료배포 서가를 마련했다. 최근에 2차 배포에 포함된 책은 대부분 영어 서적이었다. 제목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싶은 것이 없었다. 1992년 대선 이후 나왔던 <정주영 무릎꿇다>를 뽑았다.
1992년 초, 총선을 두달여 앞두고 창당된 통일국민당은 강령에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그리고 재벌해체를 명시하고 있었다. 재벌이 기업의 힘을 빌려 만든 당의 정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의 정주영을 베를루스코니나 로스 페로에 비견하는 건 무리다. 특히 정주영은 이건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이건희가 후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하위 파트너로 두는 노선을 걸은 반면, 직접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은 정치의 고유 영역과 그 속성을 인정했던 셈이다. 달리 말해 재벌이 곧 국가라기보다는, 정치에는 정치에 맞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가졌던 거다. 따라서 그 밑절미는 자본주의나 부르조아 정신이 아니라, 민족주의나 애국심이 된다.
그외에도, 관훈클럽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에도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에도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공산당'과 '북한'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 이때 김대중은 정주영의 주장이 헌법 실정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정주영의 북한관은? 경제개방을 통한 5년내 흡수통일이었다. 김대중은 이에 북한의 무력도발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후일 정주영의 경제주의적 통일관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서 빠질 수 없는 기조가 되었고, 두 사람은 역사적 화합을 했다.
책의 뒷표지에도 써 있는 것이지만 "경제전쟁에서 익혀온 노회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결국 정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후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은 독자정당이 아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틈새와 우수리를 노리다가 후보단일화 경쟁에서 좌절했다. 정주영의 천지동우회까지는 동행했으나 민자당으로 방향을 튼 이명박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주구장창 '탈여의도'를 외치고 'CEO 담론'을 펴면서 기존 정치인들을 비효율적 이미지에 몰아넣은 전략은 주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토지공개념을 담아낼 비전 같은 건 없으며 그의 노선은 자본주의가 아닌 대자본가주의로만 치달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정치를 잘 몰랐다".
블로그에 고정적으로 다녀가시는 분이 10명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답변하실 수 있는 분은 댓글 좀 달아주세요.
요즘 만화가게를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만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강풀이나 최규석 만화는 거의 다 봤구요, 만화가게에 있는 허영만 만화도 다 봤습니다.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맨>을 팔고 있는 책방이나 온라인 서점을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취향은 대중 없습니다. 그림이 조잡한 건 잘 보지 않습니다. SF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반게리온> 이런 거 취미 없구요.
얼마 전 본 <20세기소년>은 매우 괜찮은 만화였습니다. <키드깽>을 제일 재미있게 봤구요.. 웃겨도 장땡입니다. 주제도 뭐 대중 없습니다. 음악에 관한 것도 좋고, 뻔하지 않으면 스포츠만화도 오케입니다. 일상적인 주제를 다룬 것(ex. 천재 유교수의 생활)도 좋습니다. <타짜>나 <쩐의 전쟁>류의 만화도 곧잘 봅니다.
추천 좀 해주세요. 만화방에서 세겹으로 된 책꽂이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헤매니까 정신 없고 머리 아픕네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