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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경에 관해 (이화여대 교지. 2007년 봄)

휴지통 | 2008. 3. 12. 18:06 | Posted by 김수민
2003년 3월 11일, 춘천으로 가는 입영열차에 올랐던 날이다.
벌써 5년이 지났다.

2007년 봄, 이화여대 교지의 관계자가
내가 경찰로 복무했던 것을 어디선가 슬쩍 본 모양인지
기고를 청탁해 왔다.

아래는 내가 보낸 글이다.




                       방패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진실
                                   
                                                                        김수민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4학년)

들어가기 앞서

나는 2003년 3월 육군으로 입대하여 4월 하순 작전전투경찰순경으로 배치되어 경찰학교에 입교했으며, 2주일의 교육을 거쳐 모 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났다. 내가 소속된 전경대는 시위가 빈번하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 뿐더러 나는 질병 및 부상 등의 이유로 상당 기간동안 전경대 바깥의 일선치안현장-파출소, 순찰지구대에서 근무했다. 따라서 나는 서울 지역 의 기동대나 전경대 등 진압부대에서 근무했던 전의경에 비해 시위진압경력이 미미하고, 경험했던 시위도 상대적으로는 평화적인 편이었다. 독자들은 이것을 유념해주셨으면 한다.

하나 더 밝히자면, 나는 시위와 진압을 동시에 경험해본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지면은 시위대와 전의경이 간접적으로나마 소통하면서, 동시에 ‘나’의 두가지 이력이 서로 대화하는 공간인 셈이다. 기회를 준 이화연대교지편집위원회에 감사한다.

전경이 될 줄이야

대학 1, 2학년이던 2001, 2년에 나는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했다. 그 운동의 문화는 NL(민족해방계열)과 PD(민중민주계열)로 상징되는 전통적 학생운동과 적지 않게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부역하고 오늘날에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해치고 있는 거대신문사를 보이콧하는 운동이니 따지고 보면 급진적이기는커녕 특별히 진보적이지도 않은 소박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실천의 방식에서는 경직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전통적 학생운동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고 때문에 ‘신사회운동’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나는 거리시위에 나선 적이 별로 없다. 학내외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신문을 펴내 돌리거나 조선일보사 부근 서울시의회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지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길거리로 뛰어든 것이 2002년 10월이었다. 당시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중학생을 추모하고 미패권주의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고 있던 차였고, 나도 거의 처음으로 전통적 학생운동계열이 주도하는 시위에 끼어 거리를 누볐었다.

극미(克美 혹은 克米)의 물결은 12월 대통령선거의 무드와 만나 절정에 달했다. 그때 나는 전의경들과 처음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힘겨루기를 했다. 당시 촛불시위에 가담한 인파는 5만을 훌쩍 넘겨 있었고 전의경들은 ‘데모꾼’도 아닌 일반 시민들의 힘마저 당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전경을 뚫고 나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아직 오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0여명의 전경들이 2열종대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피하지 않은 채 촛불을 들고 서 있었고 내 키(180cm)를 상회할 만큼 장신이었던 그들은 나를 가운데에 묻은 채로 지나쳐갔다. 누가 이걸 사진으로 찍으면 괜찮겠군,이라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5개월 후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 나는 강원도 102보충대대로 입대했다. 그곳에서는 “너희들은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는 우스개가 떠돌고 있었다. 나는 나흘이 지나 화천에 위치한 훈련소로 군사기본교육을 받으러 떠나며 내심 철책선 근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소 3주 후 나를 비롯한 240명의 인원 가운데 자그마치 100명씩이나 전경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5주차에 그 대열에 내가 끼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육군 입대자가 전경이 된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경과 의경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전경은 시위를 진압하고, 의경은 교통정리 등을 한다는 따위의 선입견만 퍼진 것 같다. 의경은 ‘의무전투경찰순경’의 줄임말이며 입대를 맞이한 젊은이들이 자진해서 시험을 거쳐 임명되고 일차 임무는 ‘치안업무 보조’이다. 전경은 ‘작전전투경찰순경’의 준말로 행정자치부 경찰청이 국방부 육군 입소자를 차출하면서 ‘만들어’지고 일차 임무는 ‘대간첩작전’이다. 그런데 시대상황이 달라지면서 전경 역시 ‘대간첩작전’보다는 이차 임무인 ‘치안업무 보조’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들을 뭉뚱그려 ‘전의경’이라고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전의경의 근무지는 다양하고, 소속에 따라 업무도 천차만별이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고, 진압부대(전투경찰대, 의경 기동대, 의경 방범순찰대)에서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다. 시위진압은 진압부대의 몫이고, 시위진압의 양적·질적 부담은 의경 부대가 전경대보다 더 많이 진다.

나름대로 편한 군복무를 위해 의경을 지원했다가 기동대로 분류되었든, 육군으로 입대했다가 경찰로 분류되어 전경대에 배치되었든, 제대가 먼 미래인 신병에게는 불운하기 짝이 없는 경우다. 시위진압에 나서는 전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심적 타격부터 우선 헤아려야 한다.

서로를 적이 아니라 말하지만

“뭐? 쫄병도 자기 전에 MP3를 듣는다고?” 작년 초 휴가를 나온 후임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도 후임보다 선임이 많아 군생활이 편해졌다는 말이 선뜻 나오기는 힘든 입장일 터라서 그의 증언이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군대 중에서도 가장 완고하고 무지막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의경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징병제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날 부대의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전경대의 변화가 여느 육군부대를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악습의 기원이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튼튼했기 때문이다.

처음 전투경찰대로 발령나던 날부터 나는 2주일동안 신병으로서 담당 조교가 시키는 대로만 일일이 움직이게 되었는데 반쯤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악습들을 새삼스레 상세히 증언하지는 않겠다.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었던 것 그대로다.

대원들을 옭아매는 악습이 유지되는 힘은 크게 두 군데에서 나온다. 첫째는 “이것이 군대다!”라는 지상명령이다. 육군의 내무생활문화가 바뀌든 말든 전경대는 그 부대만의 독특한 관습이 있으며 그것은 ‘까라면 까는’ 철저한 상명하복이라는 식이다. 물론 전투경찰대설치법이나 경찰 간부들이 (적어도 말로는) 금지하는 바들이 어째서 고참의 권력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문민 통제’의 방법으로서 기강을 잡기 위한 상명하복은 당연히 아니다.

둘째는 “빠지면 뚫린다”는 강박증이다. 편해진 생활은 군기를 흐트러뜨리고, 그것은 시위대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뜻이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효과적인 진압에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의심은 그렇다고 쳐도, 실제로 부대가 시위를 제대로 막지 못할 때 대원들은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상부에게 추궁을 당한 간부들이 대원들을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생활실(전의경 부대는 내무반을 생활실이라고 부른다) 벽에 붙은 행동요령에는 “시위대는 적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무리하게 진압하지 말고, 씨름이나 럭비를 하듯 대처하라”는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무력충돌의 위험과 진압실패 시에 따르는 스트레스에 직면한 전의경들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별 의미가 없다.

시위에 나서는 ‘운동권’도 ‘전의경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고 발언한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경찰이 먼저 공격했다’ 혹은 ‘충돌 양상이 경찰로 인해 더 크게 번졌다’는 주장이 훨씬 더 앞선다. 그러나 폭력은 선후(先後)나 ‘상대적으로 더 큰 책임’을 가려낼 만큼 깔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평화시위를 외치는 것은 국가와 자본에 굴복하는 것이다’라는 견해까지도 나온다. 폭력은 자제되기는커녕 규명되지도 않고 서로의 아집만 강화시키고 있다.

필요 이상의 노출 vs. 쓸데없는 모욕

전시를 대비하는 국방부 소속 장병들과는 달리 전의경의 현장출동은 언제나 실전이다. 그럼에도 시위 현장에서는 쉽게, 빨리 전의경이 목격된다. 살벌한 풍경이다. 근래 들어서는 버스를 이용해 진을 치거나 비상시에 물대포를 쏘는 다양한 전술들이 선을 보이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검문검색을 불사하는 방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일선치안현장에서도 경찰이 지나친 노출을 자제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보 순찰을 도는 이미지로 각인된 런던의 경찰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순찰지구대나 파출소의 근무경관들이 입는 순찰복(얼마 전 디자인이 바뀌면서 이제는 아예 자원봉사대 같은 외양을 하고 있다)과 달리, 척 보기에도 전투태세를 짐작할 수 있는 복장을 착용한 전의경들이 방패와 봉을 들고 진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윤리적 판단을 떠나 전략적으로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위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항의이며, 그 항의는 정서적인 분노와 떼어놓을 수 없다. 구호가 아무리 이성에서 나와도 몸은 감성과 야성을 따르는 법이다. 평화시위를 기획했다고 해도 버스로 행인들과 격리시키고 마치 시비를 걸 듯 전의경을 배치해놓은 꼴을 보면, 시위 참여자도 맞대응의 충동에 휩싸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연히 필요 이상의 노출은 쓸데없는 모욕을 자초한다. 시위현장에서의 내 비애감도, 앞서 밝혔듯 폭력충돌을 비교적 덜 겪은 부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육체적 고달픔보다는 모욕을 받는 기분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막대기 네 개를 달고 있던 고참 시절에 전국공무원노조사태가 있었다. 마침 부대가 있던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파업으로 인한 공무원 해고자가 많았고, 시위는 사뭇 격렬했다. 요즘 들어서 학생시위는 과격한 축에 들지 못한다. 경제적 손실에 의해 노동자나 농민이 거리에 나섰을 때, 그리고 그 투쟁을 전국 규모의 단체나 진보정당이 지원했을 때, 그때가 충돌이 첨예한 시기인데, 전공노사태도 그렇게 확산되었다.

해고사태 직후 해당 지역의 도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제일 활약(?)했던 분이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여성이었는데, 시비를 걸려고 작정하고 나온 듯했다. 그의 입은 내 이해심을 추월해 나갔다. 그는 앞줄에 서 있던 체구가 작은 대원에게 쏘아붙였다. “넌 전경 왜 갔냐?”(순간, “시위대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는 지시가 대열 여기저기로 전파되었다). 그 대원은 나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후임이었고, 어느새 2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집회현장에 동료 대원이 시위대에게 욕을 먹거나 타격을 받으면 마음이 상한다. 그가 설령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고참이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그날 우리가 섰던 곳은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었다. 전진 배치를 하면 할수록, 물러서게 되든 버티고 서 있든- 치욕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은 커지는 것이다. 시위대에게 딱히 이념이 없고 지도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경우라면 도리어 사태는 더 커질 수도 있다. 한번은 정부 방침 때문에 땅값이 떨어진다며 항의하러 나온 아줌마들이 대뜸 벽돌을 던져댄 적도 있었다. (우스새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왕 성내러 나간 김에 전경들의 ‘방패’와 ‘보호장구’를 믿고 화풀이를 한 것이다.

“너무 앞에 세워놓고 시위대의 공분을 유발하자는 거나 뭐냐.” 이따금 휴가를 나와 만나는 후임들도 불만을 토로한다. “왜 먼저 진을 쳐놓고 폭력사태를 유발하는 거냐.” 이것은 시위당사자나 인권단체의 비판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만큼은 전의경과 시위대가 다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내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전의경 제도가 축소되니 폐지되니 말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드디어 정부가 작심을 한 모양이다. 내년부터 20%씩 인원을 줄여나가다가 2012년경에는 완전히 폐지한다는 계획안을 내놓았다.

자질구제한 심부름에서부터 시위현장 투입에 이르는 여러 3D 업무를 맡길 인력을 잃어버리게 될 경찰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엄청난 인력증원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해할 만한 주장을 펴기도 하고, 치안공백이 엄청나게 발생하리라며 과장된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경찰청의 의견이 얼마나 옳은지는 더 검토해봐야 한다. 하지만 전의경을 수단으로 삼은 병정놀이를 반성하는 데 게을렀으면서, 없어진 병정들의 자리를 직업경찰이 채워야 한다는 소식에는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찰청의 모습은 비판받아야만 한다.

더불어, 병정놀이의 가장 윗선에 청와대가 있음을 기억하자. 국정상황실에서 경찰청을 닦달할 때, 일선 대원들에게 미칠 그 여파는 가히 ‘나비효과’를 방불케 할 것이다. 전의경 폐지만을 공고하고 5년동안 진압양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전의경의 적이 될 것이다.

오늘날 전의경 부대의 실상은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내무생활의 혁신은 어려우리라고 사료된다. 이것은 마땅히 일선의 지휘관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부대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의경 부대의 특성상, 윗선에서의 지침이 하달되어 실현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의경 부대에 부임한 경관들은 대부분 전의경 부대를 현장의 외근이나 본서의 내근에서 벗어난 해방구로 인식하는 듯하다. 힘겨운 경찰생활 도중 조금 편한 근무지에 머무르며 자기계발에 열중하는 일을 탓할 수는 없지만, 구타와 가혹행위가 잔존하는 것까지 너그럽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의경 제도가 폐지되어서야 비로소 악습이 사라지는 불상사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

경찰 바깥에도 쓴소리를 던져야겠다. 아마 작년 말쯤에, 내가 제대할 무렵 신병이었던 대원들까지도 군복무를 모두 마쳤을 것이다.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후임들 대다수는 내 전임들이 그랬듯 시위하는 사람과 단체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의경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문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전의경의 수는 4만명에 달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니, 한명 한명의 구체적 현실에 봉사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집단적 행동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걸 새겨두기 바란다. 전의경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더라도, 그 뒤에 남은 것이 뻔뻔하고 무조건적인 자기합리화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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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424

 
'박정희찬가'에 맞섰던, 대운하시대에도 듣고픈 이노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2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2008년 03월 08일 (토) 20:37:22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전편에 나온 ‘시나위’의 주요 활동무대는 ‘록 월드(Rock World)’였다. 1984년 ‘라이브’라는 카페를 운영했던 신중현이 이태원의 태평극장을 개조하여 만든 이 헤비메틀 전용 공연장은, 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김도균, 오태호, 손무현, 서태지 등의 산실이자 숙식소였다. 신중현은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이라는 세 음악인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의 록씬과 1990년대 가요계를 수놓은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신중현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추자, 펄 시스터즈, 김정미, 박광수, 박인수, 바니 걸스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았고, ‘더 멘’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 록 제1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더 이상 신중현의 전성기가 될 수는 없었다. 김완선의 데뷔곡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 중후반 활동이 중단되었던 신중현을, 세월은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쟁고아 신중현과 전쟁청년 박정희의 악연

 
 ▲ 신중현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록그룹 '애드 포'의 음반
   .
 1938년 출생한 신중현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뀐 시기는 그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터졌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고아가 되어 하루 17시간씩 막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그는 기타에 취미를 붙였고 홀로 연습하다시피하면서 연주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는 ‘재키 신’이라는 별명으로 미8군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그에게 가난을 선사했던 한국전쟁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자 터전이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청년들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좌우익의 대결 속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상당수 사라졌지만, 그래도 군부의 우산 아래 있던 청년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문익환이나 리영희처럼 나중에 ‘재야 인사’로 불리던 인사들조차 국군 통역장교 출신이다.

  남조선노동당의 군부 내 프락치였다가 체포된 뒤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비공식적으로 군 업무에 복귀했던 즈음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1949년 이미 북조선의 대대적인 남침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정보장교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머니의 제사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그의 사상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깨끗이 씻어냈다. 동거녀와 결별한 고통을 딛고, 전쟁 중 만난 육영수와 결혼하기도 했다. 6.25는 5.16의 젖줄이었다. 신중현은 뒷날 쿠데타 이후 출현한 독재 정권과 악연을 맺는다.

 고향을 떠나온 백인 미군 병사들은 신중현에게 주로 컨트리 음악을 요구했지만, 그는 온갖 장르를 두루 소화하면서도 록을 지향했다. 1962년에는 한국 록밴드의 원조인 ‘애드 포’(Add 4)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 영국의 비틀즈(The Beatles)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 둘, 베이스, 드럼으로 짜여진 라인업도 같았고, 그런 형태를 보편적으로 퍼뜨렸다는 것 또한 비틀즈와 애드 포의 공통점이었다.

  ‘덩키스’, ‘퀘스천스’를 경유하여 ‘더 멘’에서 연주하던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조국 찬가’를 작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딱히 비판적인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중현은 음악인의 자존심으로 버티며 거절한다. 그리고 반항했다. 삭발한 보컬리스트 박광수를 대동하여, 대통령 찬가 대신 작곡한 <아름다운 강산>을 방송에서 부른 것이다. 그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가 쇼에 참석했다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후문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박 정권으로부터 닥쳐올 박해의 서막이 되었다.

  197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기 위해 무자비한 부정선거를 펼칠 만큼 박정희의 지지도는 떨어졌다. 반면 신중현은 1974년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여 공전의 히트곡 <미인>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일본으로부터 귀화 제의를 받는가 하면 미국의 언론에게도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다음 정권의 손아귀는 록, 포크 계열의 반항적 음악인들을 더 세게 죄어가기 시작한다. 신중현의 노래 다수도 금지되었다. 김추자가 부른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고 해서, <미인>은 퇴폐적이라는 사유로, <뭉치자>는 “북괴와도 뭉치자는 이야기냐”고 트집이 잡혀 금지곡이 되었다. 특히 <바람> 등 신중현사단의 일원인 김정미가 부른 노래들은 거의 모두가 포박당했다.


대운하시대에 듣는 <아름다운 강산>

  점차 날개가 꺾이던 신중현은 1975년 12월 4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의 아들이 음악인들과 어울리면서 대마초파동이 시작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스운 건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시점은 대마초파동 이후의 1976년 4월 7일이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발이 묶였고, 신중현도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는 노장사상을 접하면서 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신중현. 드럼 연주자는 신중현의 삼남인 신석철이다.


  그가 접한 노장사상은 1990년대 발표한 [무위자연], [김삿갓]에서 만개했다. 하지만 당시에 신중현을 수식한 찬사인 ‘살아있는 록의 전설’에서, 강세는 ‘살아있는’보다는 ‘전설’에 찍혔을 따름이다. 그를 재평가하는 무수한 평론이 분만되는 한편, 그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달 5일, 필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신중현을 처음으로 봤다. 그는 공로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무대 위로 올랐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었다. 2006년 11월 그의 은퇴공연에라도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작년 대선에서 ‘노 브레인’이 이명박캠프 측에 로고송을 제공했을 때, 나는 조국 찬가를 거절한 신중현의 꼿꼿함을 떠올렸다. 요즘은 어마어마한 생태파괴가 예상되는 데다가 경제효과마저도 없다는 대운하를 파겠다는 이명박 정권을 경멸하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다시 꺼내 듣는다.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반복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후퇴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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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청년

Free Speech | 2008. 3. 10. 20:35 | Posted by 김수민

만화 <20세기 소년>은 유년 시절 내뱉은 주인공의 말이, 다른 친구에 의해서 현실로 다가온다는 줄거리다.

그리고 여기, '21세기 청년'들이 있다. 발설한 적이 없는 1년 전 나의 상상과 관측을, 그대로 이행하고 있다.

1. A가 판을 벌린다. 그는 부담이 없다. A는 애초에 법규에 가로 막힌다.
2. 논란이 일고 싸움이 붙는다. 카드를 꺼내 보라는 턱짓까지 나온다.
3. A가 B를 불러낸다.

나는 누가 A이고 B인지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속내 따위는 모른다. 지금도 관심없다.
그들이 1년동안 치밀히 계획을 짰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들의 됨됨이가 어떠한 맥락과 조건에 처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짐작했고, 그 다음
나는 가볍게 그들을 읽어냈을 뿐이다.  

본심이 아니다. 움직임이다.

어느날 나는 일어나 있었지.
21세기 청년들께서는 앉아 계셨고.
그때 그들의 뇌리에 스친 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눈빛을 힌트로 사용했어.
아주 쓸모 있더군.

걱정하지마 나는
찬반을 밝히지 않을 테니까 나는
객석 꼭대기에서 구경할 거야.
 
21세기 청년들은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지만
너무 적당히 이롭거나 해로워서
나를 간지럽힐 수도 없으니까 말이지.

물론 나를 건드리지는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청년들도 아직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2008년 봄 한국이 아니면
벌어질 수가 없는 연극이다.

나로서는 고별 관람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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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Free Speech | 2008. 3. 9. 02:00 | Posted by 김수민

장정일은 자신의 소설 판권을 사들이려는 일본 출판사측에 "내 진짜 대표작은 <중국에서 온 편지>인데, 이것도 사라"며 '끼워팔기'를 감행했다.

이창동은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가 되자 감독에게 그 영화의 조연출 자리를 얻는 조건으로 소설을 넘겨줬다.

이런 게 고수들의 거래요 처세다. 당신들의 손금이 없어지기 전에, 좀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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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

Free Speech | 2008. 3. 7. 16:43 | Posted by 김수민
두 친구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 내용.

사람그렇게많은데 돌을진짜던져?? 미쳤어그냥 ㅋㅋ 3개나주워 아주죽여버릴려고;▽;
3/6 10:53 pm 조xx

나열대나따리고못됐다ㅜㅜ
3/7 3:35 am 김xx



사연인즉슨...

어제 한 친구와는 10시까지 술을 마셨고, 다른 친구와 3시까지 술을 마셨다.

첫번째 친구와 헤어질 때, 그녀석이 무어라고 놀렸고 나는 작은 돌맹이를 세개 주워서 신촌 바닥에서 달리기를 해가면서 던져서 맞췄다.

두번째 친구와 헤어질 때는 가방에서 스틱을 꺼내어 톡톡 두들겨 줬다.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에는 내가 도망간 걸로 봐서 내가 괜히 그랬나 보다.

쫓고 쫓기느라 하여간 두번 다 숨이 가빴던 기억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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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 허무 대화

Free Speech | 2008. 3. 7. 16:24 | Posted by 김수민
그: 채플 자율화를 외치시는데, 기독교나 신학대에 대해서도 반대하시나요?
나: 아닙니다. '기독교의 이해' 수업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 저는 신학대도 없어져야 한다고 보는데요. 그런 걸 대학에서 가르쳐야 합니까?
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그럼 만일 점성술 같은 걸 가르친다고 학과를 만들어도 가만히 두시겠어요?
나: 네.

2006년 5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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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책에 낄 뻔한 사연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3. 4. 05:00 | Posted by 김수민

개강맞이 컨디션 조절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지승호가 인터뷰해서 만들어낸 <신해철의 쾌변독설>을 한숨에 다 읽다가 밤을 새버린 것이다. 인터뷰어, 인터뷰이, 독자의 관심사가 다 비슷했던 탓이 가장 크다. 후반부 진중권과 <디워>에 대한 이야기는 압권이다.  

2003년 초에 '아웃사이더'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크라잉 넛을 다룬 데 이어 신해철에 관한 책을 낼 것이며, 내 글이 하나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넥스트 팬의 성장사와 거기에 깔린 멘탈리티와 문화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 느슨한 에세이 하나를 쓰기로 했다. 그러나 끝내 최종청탁은 들어오지 않았다. 출판과 함께 나오기로 한 넥스트 5집이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넥스트 5집은 2004년에야 나왔고, 책은 지승호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되어 다른 출판사에서 이제서야 나왔다. 한마디로 '다른 책'이지 뭐.

나도 사실 청탁을 받았을 땐 인터뷰를 맡고 싶었으나, 이미 그무렵 지승호는 인터뷰 전문가로 자리를 확고히 굳히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인터뷰했다면 대마초, 간통, 정치 이야기 등은 지승호보다 적게 꺼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이야기가 좀 더 많이 나오고(신해철은 이 책에서 공부는 NL에서 하고 시위는 CA에서 했다고 잠깐 털어놨다), '보컬론'이 반 챕터쯤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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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이한열, 6월 항쟁…그리고 시나위의 음악
[한국현대사 OST] 87년 6월10일, 항쟁속에서 울려퍼진 '새가 되어 가리'
 
김수민
한 대학생이 신촌 교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튿날,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1987년 6월 10일이다. 이날은 그 달 29일까지 진행되는 국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 항쟁으로 생겨난 헌법은 6공화국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 1987년 6월 10일 발매된 시나위의 2집     ©대자보
“저 멀리 날아가는 새야/ 들판을 날아 어디로 가는지/ (중략)/ 영원토록 외쳐/ 외로이 한 없이/ 날아가는 새야/ 너 새가 되어가리/ 너 새가 되어가리.”

 
시위현장에서 젊은이들이 불러도 어울렸을 법한 이 노래의 생일 역시 1987년 6월 10일이다. 우연이겠지만 말이다. 본곡이 수록된 음반은 <Down & Up>으로 시나위의 2집인데, 시나위는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재야는 물론 거리의 시위 인파와 별 연관을 가지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우회하였듯 전두환 정권도 1980년 광주의 피륙을 난자한 뒤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기획했다. 자로 치마 길이를 재고 가위로 장발을 자르는 대신, 청년들에게 신나게 놀며 정치적 억압은 잊으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 첫 작품은 <국풍 81>이었다. 신군부 핵심인 허문도까지 제 대학 후배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당국은 대학생들의 광범위한 참가를 유도하는 데 분주하였고 실제로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국풍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끝나고 말았으며, 당일 가요제에 출전한 이들은 대학사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새가 되어 가리>도 6월 10일에 태어났건만...
 
서울대에서 사건이 터졌다. 국풍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의 공연 소식을 듣고 성난 학생들이 학생회관 라운지의 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청중은 별안간 애국가를 요구했다(반정부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 열심히 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를 들고 다녔던 것도 그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징이었다). 기타 연주자가 급한 대로 떠듬떠듬 애국가를 연주하자 학생들은 무대를 부수어 버렸다. 이어 대운동장에서 열린 ‘옥슨(81)’의 콘서트에도 학생들은 각목을 들고 나타나 공연을 무산시켰다. 밴드들의 수모는 이어진다. ‘옥슨(82)’ 역시 공연 도중 학생들의 막걸리 세례를 받았고, 유명 그룹 ‘산울림’도 대학축제 중 앰프의 플러그가 뽑혀지는 봉변을 당했었다. 1980년대, 록 밴드와 학생운동권의 관계는 불화 그 자체였다.
 
학생운동권이 록음악을 경멸한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향락적 서구음악이자 제국주의의 피조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의 주역이 노동계급이었음을 알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그 무렵 대학가의 ‘대세’는 풍물패나 탈춤반이었고 대중음악에서도 1970년대 이후 포크에 경도되어 있었다. ‘록밴드’는 그다지 대학친화적이지 않았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무한궤도’의 신해철은 서울대, 서강대 재학 중인 멤버로 채워진 밴드를 유별나게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0년대 중반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유행이 옮겨가면서 대학가와 밴드 사이의 괴리는 더 커진 감이 있다. ‘마그마’, ‘무당’, ‘이수만과 365일’에서 언뜻 보였던 헤비메틀은 국내 음반사상 최초로 시나위의 1집에서 만개했다. 그리고 ‘백두산’, ‘부활’, ‘H2O' 등 메틀 밴드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캠퍼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당연히 저항적 학생운동과도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갔다. 



▲한강변에서 열린 축제에 나타난 시나위. 김종서(보컬), 신대철(기타), 강기영(베이스, 현 DJ달파란), 김민기(드럼)의 모습이 보인다.

정작 메틀 밴드들을 반긴 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해적판 외국 음반에 익숙하던 그들은 시나위 1집에서 “한국인도 메틀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신대철의 기타와 임재범의 보컬에 열광했다. <새가 되어가리>가 들어간 2집의 반응은 더 좋았다. 고교생용 잡지 <하이틴>에서 발표한 인기가요순위에서 <새가 되어 가리>가 1위를 차지했고, 같은 음반에 실린 <빈 하늘>, <해 저문 길에서>, <들리는 노래>, <시나위>, <마음의 춤>이 2위에서 6위까지도 석권해 버린 것이다.
 
시나위가 대학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90년대 초입 국내 메틀밴드는 하나둘씩 해산을 결정했고, 시나위도 1991년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0년대 다시 록은 강산에, 넥스트, 크라잉 넛의 출현과 함께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더 이상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난이 없었다. 도리어 록에 호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록은 비판과 저항의 음악으로 격상되었다. 학생회 선거에 나온 어떤 운동정파는 “서태지, 넥스트와의 제휴”까지 거론했다.    
 
항쟁 기념식에서 그 노래를 듣고 싶다
 
1995년, 메틀이 아닌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기초하여 사회적인 가사를 들고 돌아온 시나위도 환영의 대상이었다. 대학가에 초대되는 어엿한 단골 뮤지션이 되었고, 1997년에는 연세대사태 직후 위기에 처해 있던 한총련의 출범식에도 초대된다. NL(민족해방계열)이 주도하던 한총련과 ‘한국 메틀의 원조’ 시나위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정치적인 동맹도 아니었고, 문화적 취향에 이끌린 교감도 아니었다. 젊음과 젊음의, 뒤늦은 만남이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엎어지지 않고 더디게나마 진전된 반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발육부진에 가까웠다. 나는 그에 보태어 정치적인 올바름과 문화적인 생동감, 세련됨이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 것도 ‘1987년 체제’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께 ‘인디(독립) 음반’이 80년대 금서를 조달하던 사회과학서점에서 유통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향후 대학가의 문화지형은 단순화되고 대학생들은 탈정치화되었다. 록을 제국주의라고 손가락질하던 학생운동권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경직성을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오늘날 소멸의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 그럼 록은? 홍대앞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빨려드는 분위기다.    
 
1987년 6월 우연히 함께 나온 해방의 운동과 자유의 노래는, 당시에는 조우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되고, 예술은 길다. 언젠가 6월 항쟁 기념행사에서 시나위의 <새가 되어 가리>가 연주되는 풍경을 상상한다. 새가 되어 날아갔을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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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史의 찬미 | 2008. 3. 3. 09:48 | Posted by 김수민

며칠 전 산 둔기 <The Left>를 읽고 있다. 첫장 '민주주의의 사회화'는 의외로 어느 사회민주연맹 회원 둘의 '자유연애 결합'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책장을 넘기다 이렇게 두꺼운 작품을 완성한 건 학구열이 아니라 예술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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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과 모계 사회에 대한 잡상

Free Speech | 2008. 3. 2. 22:16 | Posted by 김수민

***

어쩌다 주말에 대형서점에 가면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공간은 온통 네모로 채워져 있다. 가족단위로 한 네모.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뒤섞여 있지만 네모는 깨지지 않는다.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지키려 하는 바운더리는 철저하게 가족들, '내 새끼들'이다. 보호하기 위해 감시와 훈계가 따르는 것은 기본이다. 사람이 붐빌수록 그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남이 밀리든 말든 자기 애만 붙잡으면 다다.  

***

애들은, 남의 애라도 귀엽지 않나? 보육에 자기 자식, 남의 자식이 따로 있지는 않다. 태어난지 1년이 지나야 걷는 인간의 특성상 '낳은 사람'이 기르고 돌보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고, 그 사회가 동물들과 다르다면야 키우는 것은 여러 사람의 몫이다. 부모, 보모, 교사한테 떠맡기면 다가 아니다. 잘 보라니깐? 애들은 남의 애라도 귀엽다고...

***

<괴물>의 박강두(송강호)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 날뛰던 중 딸을 잃어버린다. 남의 딸 손을 잡고 뛰었기 때문에... 실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강두는 마지막에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거두어 키우게 된다.

***

양육, 보육, 교육이 사회화된다면야 예전 형태의 가족제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특히 가부장은 쓰잘데기 없는 존재다. 가부장은 다른 집에 가부장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외에 가부장이 차세대의 성장에 별 도움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암컷이야 몇가지 사례를 빼면 자기가 낳은 애를 알아보지만 수컷은 그렇지 않다. 수컷은 먹을 거 가져와서 모으고 나누는 일에 암컷과 함께 참여하면 된다. 그럼 자기 애든 남의 애든 다 살릴 수 있다. 젖도 안 나오는 가부장이 뭐 그리 붙박이로서 쓸모가 있겠냐...

물론 사회화가 더 진행되면 암컷이 붙박이로 있을 이유도 없지만, 인류의 진화단계상 오랜 기간동안 책임지는 '상근자'가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일단은 모계 사회부터~

세줄요약
1. 애들은 다 귀엽다.
2. 내 애인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게 중요해? (DNA 검사? 검사자는 신이거나 중립자인가?)
3. 쓸모 많으신 여자들이 상근하고, 남성들은 무차별적 돌봄에 나서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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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

Free Speech | 2008. 3. 2. 03:46 | Posted by 김수민

아무리 절대권력자라도 자살을 한다거나 죽음을 앞둔 상황이면 그 순간만큼은 소수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대뜸 한 사람이 "그럼 이건희 딸이 죽은 것도 불쌍해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건희 딸이라면, 남들이 보기에 꽤 스펙이 좋으면서도 "평민"이었던 연인과 만나다 집안의 반대에 절망해 자살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잖아".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순간 그는 경악하며 비판했다. 아니 비판하지도 않았다. 순간 술자리에는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와~ 어떻게" "그게 무슨..."이라는 반응 사이에 가려진 진의는 누구라도 알 것이다. 진보적이라는 이가 어찌 재벌가 딸의 죽음을 동정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도저히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지경까지 간 탓에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은 이렇다: "안 됐다..."라고 생각되는 게 측은지심이다. "이건희 딸은 이건희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짚어내는 것은 시비지심이다. 부유한 강자의 집안에서도 발생하는 폭압이 약자와 빈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수오지심이다. 첫번째와 두번째에도 이르지 못한 자가 세번째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허위의식이다.

그는 사양지심이라도 가졌을까? 남의 죽음에 대해서, 그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에게 '겸손하야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은 어울리지 않다.

그 사람은 -엔엘파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몹시도 품성을 중시해왔으며, 폭력적이기는커녕 매우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그리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을까? 계속해서 주접을 떨어대는 그에게 난 입 쳐닫고 있으라고 했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서 그의 언행을 넘어갔다. 다만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망가뜨리는지, 그러고도 세상은 자칭 좌파를 생산해내는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사람은 윤리적으로 고만고만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지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암튼 날 경악하게 만든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그들이 세상을 장악하면... 난 그날로 끽이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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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

史의 찬미 | 2008. 3. 1. 14:27 | Posted by 김수민
룩: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한답시고 원래 해야 하는 걸 덮는 거 아녀?
베: 무슨 소릴하능겨. 어차피 우회하는 건 날로 먹는 거라고.
룩: 에, 그거 하면서 은근슬쩍 훼방놓고 원칙 박살내는 거잖아~
베: 아 거... 한다고 해도 문제, 안한다고 해도 문제...

따지고 보면 그런 이야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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