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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다시 시청앞으로 갈 예정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하시는 분들께 하나 일러드릴 게 있다면
현재 경찰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강의 경찰이라는 점이다.
2002년 12월 7일, 시민들이 미 대사관 앞을 점거했다. 내 어림으로 그날 10만도 안 왔는데 경찰이 사정없이 밀렸다.
이 사건부터 경찰에게는 계속해서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한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최루탄 사용까지 재검토되었다. 내가 그때 전경대 신병이어서 떨던 기억이 난다.
화물연대파업부터 네이스, 새만금을 거쳐서
부안과 평택 문제와 부닥치면서 경찰은 변곡점에 이르렀다.
짐마(닭장차)로 진 치고 물대포 늘려서 쏴대기... 이거 노무현 정권 작품이다.
2005년 12월, 난 3년만에 시위 나갔다가 물대포 맞고 머리가 다 얼었다.
식당에서 밥 먹는데 속에서 수화기 분말가루가 올라오더라.
그 이후부터 어지간한 집회는 행인들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게 처리됐다.
노무현의 위대한 유산이다.
노무현 정권기에 교활함이 극에 이른 경찰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기분을 한껏 부리고 있는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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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쓰러졌다.
경찰이 던진 돌에 맞고 한번에 넘어가서 일어나지 못했다.
봐! 그의 머리에서 흐른 피다.
이제 너희는 경찰이 아니라, 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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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펄 잼은 세간에서 일컷듯 '(미국의) 국민 가수'라기보다는 '노동계급의 희망'이다. 미국에서 록음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적인 문화이다. 반면 그것은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 집안의 자식들이 듣는 음악이었고, 따라서 록밴드와 노동계급과의 연관도 크게 떨어진다. 대다수 노동대중은 물론 조직적 계급운동과 연관을 맺은 록밴드는, 처음부터 운동지향성을 명확히 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우 드물다. 안치환만 해도 록을 시도하면서 운동진영과 멀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리저리 흩어진 주변계층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대변할 만한 밴드는 있다. 블랙홀은 그 전형이다. 그들은 분단, 지역주의, 전직 대통령, 동학농민운동 등 큼직한 주제를 다루는 한편, 오토바이 배달부, 성매매 여성, 앵벌이의 삶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그리고 제 자신의 활동방식을 주제의식과 일치시켰다. 그들은 기타를 들고 전국 구석구석 어디라도 찾아 다녔다.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 고향 구미에서 딱 두번 프로 뮤지션의 콘서트를 겪었는데, 그중 하나가 블랙홀의 공연이었다. 공연 초반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다. 칠곡이나 김천에서 온 관객들을 확인하고 그들은 참 흐뭇해 했다.
올초 2집 <모래시계>를 발매한 WON은 사회적으로 블랙홀의 계보를 이을 만한 그룹이다. 장르적으로는 멜로디컬 메틀이라고 할 만한 블랙홀과 달리 소위 '정통적인 메틀'을 추구하고 있다. 블랙홀의 주상균이 돈 도켄(도켄), 미하일 키스케(헬로윈)에 가까운 데 비해, WON의 손창현이 아이언 메이든류의 어프로치를 보여주는 것도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의 가사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자존심이라는 공통분모가 곧잘 눈에 띈다. 주상균과 손창현이라는 두 보컬리스트는 '화자'로서는 비슷한 점이 있었다.
1998년 내놓았던 WON의 1집 <락 컴플렉스>은 기량 좋은 그룹의 평범한 데뷔작이었으나, 9년만에 나온 2집은 재미있고, 훨씬 다이나믹하다. 트윈 베이스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별다른 전위성을 가지지 못한 것은 좀 안타깝다. 그러나 록의 한국적 어법이라는 측면에서 블랙홀이나 안치환, H20에 필적하는 성과를 남겼음을 부인할 수 없는 역작이었다. 독일의 스콜피온스나 일본의 라우드니스가 그랬듯 영어권 바깥의 아티스트들이 자국어로 헤비메틀을 소화하는 일은 드물고 지난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은 시나위, 백두산, 부활부터가 어떻게든 한국어 가사를 소화하기 위해 발버둥쳤고, 블랙홀의 주상균은 국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으면서 진지하게 연구했다. WON의 <모래시계>도 그 빛나는 성취의 연장선상에 있다.
노래 좋으면 꼭 음반을 삽시다!
vs.
만약 못 가진 것이 죄가 된다면 낮밤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죄인인가?
또 못 배운 것이 흠이 된다면 참아가며 일만한 사람들은 전부 죄인이다
아파도 쉴 수 없고 슬퍼도 울 수 없는 어깨 위 무거운 짐이 너무 무거워
이건 아니야 절대로 이건 아냐
많이 가진 것이 힘이 된데도 손 비비며 굽신 굽신 숙이지 않겠다
많이 배운 것이 명예가 된데도 때만 되면 기웃 기웃 기웃 찾지 않겠다
기뻐도 웃을 수 없고 억울해도 호소할 수 없는 이 땅위에 시선들이 정말 무서워
이건 아니야 절대로 이건 아니야
잘 사는 것이 이것이라면 피땀 흘려 밤낮없이 일하지 않겠다
행복이란 것이 이런 거라면 정직하게 여기저기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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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일민족’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내셔널리즘
조관자는 “기존의 한국사 논의는 단일민족의 범주에서만 내셔널리즘을 인정”했다고 지적한다.1) 다시 말해 내셔널리즘의 범주를 하나의 민족만으로 설정하는 오류를 그동안 한국사 논의가 범했다는 이야기다. 이 자체로는 맞는 지적인데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사에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구별되는 이념이었고, 내셔널리즘이라는 영단어는 국가주의는 확실히 껴안되 민족주의와는 어정쩡한 포함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좁은 시각이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친일을 반민족성 또는 비민족성의 죄과로 심판하는 것이다. ‘친일’이라는 단어도 제국주의 부역행위를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반민족’ 담론 역시 구체적인 취지와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를 정리하거나 청산하는 작업에서 ‘반민족’은 ‘반민주’와 ‘반민중’과 거의 동급 수준의 윤리적 준거가 되었음에도, ‘민족에 반하였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라는 뜻과 과연 같은지2), 더 나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거나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단일한 민족주권이라는 존재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민족은 실체가 있고 그것이 기반한 언어, 혈통, 지역, 문화가 있으나, 결정적으로 민족을 응고시키는 힘은 ‘상상’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저서 <상상의 공동체>에도 잘 나타나 있듯 이 ‘상상’은 단순히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태도’는 아니지만, 유구하지 않지만 거대한 문화적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민족은 재구성될 수 있다.
조관자의 글은 바로 그렇게 민족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한 대표적 조선 지식인을 다루고 있다. 본문은 그의 글의 여파를 살려 민족운동가 이광수가 어떻게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조선 민족이 식민지 제국 일본의 국민이 되게끔 선동하였는지를 따져보며, 식민지에서 피어난 협력의 논리가 제국주의 종주국에 뒤지지 않는 내셔널리즘의 한 형태로 발전하는지를 되짚어 본다. 나아가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와 깔끔히 분리될 수 없으며, ‘반민족적’이라고 여겨진 행위가 당사자의 항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친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2. 문명과의 일체: 민족의 오늘에서 내일의 내셔널리즘으로
결론부터 말해 지식인 이광수의 성장기와 일제 말기를 대비해서 전향, 변절했다고 보는 시각은 단선적이다. 이광수는 일진회 유학생 시절부터 강고한 문명지향을 품고 있었는데, 이의 다른 한편에는 비루한 제 동포들에게서 엿본 절망적인 야만이 깔려 있었다. 그가 민족운동에 나선 것은 민족 계몽에 대한 결심 때문이었다.
그가 <동경잡신>에서 추천했다는 필독서에는 도쿠토미 소호의 선집이 수록되어 있다. 도쿠토미 소호는 원래 개인의 권리와 평민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아시아 진출과 국가주의를 신봉하게 된 인물이다. 우리는 이 배경이 되는 근대 일본이 어떻게 문화를 창조해내었는지에 관한 답을 후발자본주의 국가의 특수성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의 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원을 두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독일의 국수주의 문화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문화가 일본문화로 유입되는 수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뒤쳐진 자’로서 가지는 대항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어떤 개인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높여가는 것처럼 독일과 일본은 신흥강국으로서의 자부심과 후발주자로서의 콤플렉스가 길항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후발주자에게 짓밟힌 식민지인으로서 이광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이미 ‘대동아문명’이름으로 곧 만개할 ‘아시아 문명’에 자신의 신념을 두고 있었다. 아시아민족으로서의 신문화 산출을 민족의 이상으로 삼자고 제안한 1917년 <학지광>의 글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는 “의인은 어떠한 권력에 대해서도 노예가 되지 아니하거니와 오직 자기의 응낙에는 완전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3)라고 썼다. 얼핏 누구의 간섭과 지배도 배제하고 철저히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결단만을 좇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광수의 언설에는 결정적으로 ‘자기 반성’과 ‘자기 갱신’의 정신이 부재한다. 문학적으로 과장된 표현일지라도 “자기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철학의 산물이며 개인주의와는 모순되는 태도이다.
이에 붙여 이광수는 “자유는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 원리와 지도를 택하는 데 쓴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의인’으로 상징되는 ‘바람직한 개인’은 이광수에게 있어 ‘개체’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전체’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는 전(全)우주적 개념은 아닌 듯하고, ‘외부’를 필연적으로 가지는 ‘아와 비아와의 싸움’이라는 역사관에도 맞닿아 있다. 그는 주체와 전체를 동일시했고, 전체의 범위는 문명 일본과 그의 식민지 조선을 중점으로 한 아시아공동체였다. 그러한 이광수로서는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를 지도하는 원리를 택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일제의 국민 공동체에 복속되는 것은 자민족의 존엄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개인의 자유와 전체적 위계질서, 식민지의 암울한 상황과 제국의 그릇된 욕망이라는 통할 수 없어 보이는 가치들을 이어가려 했던 셈이다. 제국주의 시대 태동한 파시즘은 일방적인 ‘자유 몰수’보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자유 헌납’에 더욱 크게 의존하였다. 자유를 헌납하는 개인은 자신을 보호하는 전체가 든든해짐을 느끼며 그 덕분에 자신이 더욱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는 에리히 프롬이 해부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개인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개인에 관한 잘못된 자의식이 어떻게 전체주의로 번지는지를 입증하였다.
3. 민족운동으로 일제에 충성하기
이광수가 품은 최대의 딜레마는 '주권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힘 있는 국민의 형성'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주권 없는 민족도 상해임시정부 등의 존재를 상기하며 민족적 의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근대의 민족주의는 ‘국가’라는 도플갱어와 맥놀이를 일으키지 않는 한 꾸준하고 공고하게 진행될 수가 없다. 마침내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전도된 형태로 기존 민족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변화는 형식적으로는 전도로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굴절인지 발달인지 잘라 말하기 힘들다. 다만 ‘민족 역량 확대’라는 욕망이 더욱 뜨거워지고 확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대륙의 하늘에는 바야흐로 전운이 굼틀거린다...... 우리는 인류가 총동원 대출연하는 오늘의 무대에 일역을 맡지 못하고 막 뒤에 쭈그리고 안는 생명없는 백성이다. 우리에게 힘이 오르는 날 인류의 무대는 우리에게 정중한 출연 요구장을 보낼 것이다. 오늘은 힘을 기루는 날.”4) 이광수의 망딸리떼를 단적으로 드러낸 문장이다. 이광수는 1930년대 들어 세계대전의 기운 속에서 주역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민족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언젠가는 당당하게 힘겨루기에 나서고 말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성도 이성에 기초한 정치사상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연애나 이유 없는 결투에서나 발견될 만한 성찰 없는 정념이다. 이광수는 제국주의끼리의 싸움에 끼지 못하는 민족에게 ‘생명’조차고 없다고 말하는, ‘공포와 연민’의 지식인이다. ‘출연 요구장’을 운위하는 부분에서는 사무라이나 조직폭력배의 감성까지도 감지된다.
이광수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재만주동포들에게 경제와 문화를 향상할 것을 권고하면서 비폭력, 비정치 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등과 ‘수양동우회’를 할 적부터 철저히 비무장노선을 걸었는데, 이광수와 동우회가 세운 민족운동의 비전은 1930년대 전반에 나온 이광수의 <조선민족운동의 삼기초 사업>(1932), <민족운동에 관한 몇 가지 생각>(1935)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 논작들은 기본적으로 근대화에 걸맞게 노동생산규율을 훈련하자고 주장하면서, 공동체 윤리 의식을 배양한 생활공동체 조직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조선 파시즘화의 기초라고 비판당하기도 했는데, 1933년 사회주의자 박철이의 경우 동우회운동이 자본주의의 파괴력이 강해지며 나타난 국제 파시즘과 공통점이 있는 식민지 파시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광수의 비폭력노선에는 재만동포를 주로 겨냥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무장독립투쟁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는 물론 여기서,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자칫 폭력의 미학에 물들며 제국주의를 닮아가거나, 또는 그 이전에 벌써 제국주의적 사고로부터 직접 힘을 얻었을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는 1등국민들-일본인’과 ‘그들을 문화와 경제로 뒷받침하는 2등국민들-조선인’을 잇는 작업은 이론적으로 무리가 없는 일이고, 따라서 재만동포의 무장투쟁은 견제하면서도 일제의 폭력을 찬미하는 노선은 근본주의적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광수가 비폭력, 비정치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안창호가 1938년에 병사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그는 내선일체를 위한 이데올로그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130여편의 친일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관되게 조선인이 일본의 문화국민이 되는 방법론과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특히 ‘총력전 체제’라는 전시환경은 그에게 조선민족을 위한 더할 수 없는 기회였다. 집단의 단합을 강조하는 총력전이 거세질수록 조선 민족은 차별 없는 국민생활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선 우선 종래의 조선심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5) 라고 강변하며 심지어 조선인의 존재를 <일본서기>에서 구름과 안개로 표상되는 ‘죄’에 등치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또 조선인의 전향을 막는 장애로 본래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실증주의나 과학주의, 그리고 적극적인 의지를 훼방하는 자유주의나 이기주의를 거론하면서, 그 사상들로부터 혼을 빼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내선일체는 현실적으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광수는 어느 일본인으로부터 “음험한 인간이 정말 싫다”며 조선인을 향해 ‘거짓말쟁이 혐오증’을 표출하는 발언을 듣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광수의 반응인데, 그는 조선인이 그렇다면 슬픈 일이라고 자책하면서 신용을 문화 국민의 표상으로 규정하였다. 한용운의 <복종>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이 더욱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광수를 빌어 발휘된 셈이다. 내선일체는 결코 인종주의를 뚫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와 그로 인한 차별이 강화될수록 내선일체의 집착도 함께 강해지는, 일제 말기의 비극을 이광수는 연출해내었다.
4. 이광수와 루쉰
영화 <한반도>에서 배우 차인표가 연기한 국정원 요원은, 친일-친미-반공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급속하게 반일-반미-용공적 민족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지를 어설프게나마 보여주었다. 한데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친일청산의 정신적, 실질적 대부인 임종국은 1960년대에 친일파의 국민문학 정신만큼은 긍정적으로 검토하자고 발언한 적이 있다. 고쿠민쇼세츠(國民小說)는 자국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식민지인에게까지 굴욕을 안겨준 데다가 오늘날에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적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따라 배우자는 제안이 친일청산론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은, '반민족행위'와 일본을 배격하기는 쉬워도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며 폭력에 맞서는 것은 지난함을 방증한다. 민족의 아픔에 고통받다가 제국의 논리에 동화된 이광수의 역사는 얼마든 재생 반복될 수 있다.
이광수의 일제 시대 행적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또 다른 점은 그의 엘리트주의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민족의 현실에 반응하는 예민한 지식인이었다. 그점에서 그는 <아Q정전>으로 중국인들의 몽매한 정신에 죽비를 내려친 루쉰과 닮은 점이 있다.
루쉰은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마오쩌둥주의적 시각에서 왜곡되기는 했으나 이광수처럼 ‘개인’에 민감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박홍규의 말에 따르면 영원히 비판하고 회의하는 지식인이었는데6), 바로 이점에서 그는 이광수와 달랐던 것 같다. 루쉰은 철저히 비판정신에 근거한 자신의 이념을 계속해서 의심하였고, 대중추수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중국 인민의 자유와 독립에 헌신하였다. 그가 중국 인민을 혼내고도 존경받는 인물로 남은 까닭은 중국 인민이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라 남에게 내려친 죽비를 스스로에게 들 줄 아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위에서 필자가 지적했듯 개인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주의는 정념이 이성을 지배하고 영혼이 정신을 통제하는 류의 과격한 낭만주의에 기초해 있었고, 독일에서의 니체철학이나 바그너의 음악이 보여주었듯 그 낭만주의는 민족주의와 귀족주의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최근 또 지면에 오르내리는 한 소설가는, 자신의 분별없는 말로 인해 겪게 된 공박과 고립을 두고 예전부터 ‘예술가가 겪는 고난’쯤으로 표현해 왔다. 정서가 없는 인간의 논리적 천착도 볼썽사납지만, 틀린 논리를 들이대놓고 결정적으로 감성의 영역으로 후퇴하는(그러나 이는 예술가-열외주의라는 철저히 타산적인 이념에 머문다) 그 소설가도 여러 면에서 흉하다. 오늘, 이광수는 여전히 떠올리고 곱씹어볼 만한 인물이다.
1)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
2) 가령, 가네코 후미코는 ‘친민족/반민족’으로 겨우 세워진 윤리적 잣대로,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3) 이광수, “젊은 조선인의 소원”, <동아일보>, 1928.9월 4~19일자. 인용은 <<전집>> 10, 201~203쪽.
4) <<동광>> 28호(1931년 12월), 1쪽.
5) 香山光郞(이광수), <行者>, <<文學界>>(1941년 3월), 85쪽.
6) 박홍규, <<자유인 루쉰>>, 우물이있는집,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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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부터 서점에 <핫뮤직>이 들어오지 않고, 음악계 사정에 더욱 더 눈이 어두워져 가는 중이다. 어쩐지 요즘 난 음악을 많이 듣지 않게 됐다. 나는 70년대 올드패션 하드록 좋아하고, 80년대 NWOBHM, LA메탈, 스래쉬 메탈 다 끌리고, 90년대 그런지 음악에 환장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나온 신주류 음악들은 별로다. 모던락, 브릿팝 재미 없다. 랩코어 중에 RATM은 좋지만 힙합으로 좀 더 기울어진 쪽엔 감흥을 못 느낀다.
제대 직후에는 아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벌하게 들었다. 그때는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던 터라 특집을 준비하며 오만가지 음악을 다 들었다. 블루스, 컨트리, 포크, 글램, 펑크, 하드코어-펑크, 싸이키델릭, 아트 록... 거기다가 재즈까지. 그중엔 좋아하는 것도 있고 끌리지 않는 것도 있고 가끔만 듣고픈 것도 있다. 그렇게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얼마 전 만난 한 시민운동가는 내게 클래식에도 로큰롤만큼 다이나믹한 명곡이 있다며 감상의 폭을 넓힐 것을 권하였다. 그럴 생각이다. 잘 될지는 몰라도.
취향이라는 게 참 무섭고 갑갑하다. 빠져 나오려는 순간, 음악듣기가 작업이 되어 버린다. 그런 차에 왕년의 용사들이 새롭게 뭉쳐 나오면 정말 반갑다. 오디오 슬레이브, 벨벳 리볼버...
산다 산다 하다가 결국 못 산 음반이 있다. 크리드의 보컬이었던 스캇 스탭이 2005년에 낸 음반이다. 못 샀다는 걸 알면서도 레코드가게를 최근에 들르질 못했다. 벅스 뮤직이 시간이 꽤 흘러서야 그 음반을 스트리밍 서비스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음반을 사서 처음 돌릴 때 느끼던 두근거림을 나는 스무한살께부터 잃었다. 어제 스캇 스탭의 음반을 컴퓨터로 듣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불꽃을 일으키고 있음을 이내 느꼈다.
가장 마지막 트랙인 <Broken>이 참 가슴 찡하다. 나와 목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스캇 스탭에게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 저런 발성으로 호령하듯 노래부르던 시절이 있었다(그때 음정은 잘 맞았는지 모르겠다. 주변에 아첨쟁이들이 많아서...)
크리스찬들이 멜로디는 참 잘 만든다. 크리드는 가장 유명한 크리스찬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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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수선한 시국, 한 전경이 자신을 육군으로 보내 달라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경은 경찰청이 국방부에 잠시 훈련을 의탁한 다음 다시 경찰학교로 불러들여서 양산해 내는 것이고, 전경은 국방부가 인력을 경찰청으로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경은 의경에 비해 군인의식이 강하다.
나도 2003년 4월말 훈련소를 나와 경찰학교로 갈 때 8천원에 팔려갔고, 그중 절반인 4천원이 내 호주머니로 들어왔다.
훈련소 3주차쯤 전투경찰로 200명쯤이 빠진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훈련병 대다수는 그걸 유언비어로 치부했다. 훈련병 이전에 3박 4일동안 춘천 102보충대에서 '장정'으로 있으면서 "너희는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 따위의 말이나 들어왔고 2년동안 화천 15사단에 자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라, 쉽게 예상하고 납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5사단 신병들은 내 기억으로 38연대, 39연대, 50연대로 흩어져 전입하게 되는데, 나는 38연대나 39연대를 희망하고 있었다. 거기가 GOP 부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로 가지 않아 GOP부대의 자세한 사정은 지금도 모르지만, GOP에 들어가면 철책선 경계근무가 중요하므로 훈련이나 다른 근무는 하지 않거나 뒷전으로 둔다고 알고 있었다. 또 적어도 후방보다는 내무실 생활이 편하고 선임병과의 관계가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영하 수십도의 추위가 날아가는 건 아니지만.
훈련병 4주차쯤에 부대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전경으로 가고 싶은 사람과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각자가 딱 반반이었다. 시위 막는 게 얼마나 고된지 짐작이 갔던 나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다는 쪽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희망을 조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별 기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전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참 우습다. 훈련소 동기들이 자대로 막 배치되어 적응하는 동안, 전경으로 차출된 인원들은 경찰학교에서 2주간 지내게 된다. 직접 겪어보았지만 경찰학교에서의 생활은 파라다이스다. 방패술, 봉술 훈련을 대강 받고(20분하고 40분 쉰 적도 많다), 강의실 이론교육 때는 적당히 존다. 일과 중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 줄맞춰서 식당 앞으로 걸어갈 때다. 의경들이 자습하고 있는 시간에는 신나게 노가리를 깐다. 전경은 의경과 달리 시험을 치지 않고 추첨으로 근무지역을 결정하니까. 훈련소에서 금지되었던 담배도 태울 수 있다.
훈련소 나갈 때 나는 얄팍한 심사로 전경 복무를 기대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무 근거도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진압부대(전투경찰대)로 가지 않고 왠지 경찰서 같은 데로 배치될 것 같아. 전경의 파라다이스 근무지라는 경찰학교에서 일하는 꿈까지 꿨다.
결과는 강원도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것도 강원도 유일의 전투경찰대로 가는 것이었다. 나중엔 일이 쉽게 풀렸지만 초창기에는 정말 고생했다. 2주간 중대신병 교육을 받으면서 하루에 물을 두 모금 먹었다. 악습과 가혹행위 때문이었다. 소대 배치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구타와 암기강요에 노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흉통이 도지고 손도 다쳤다. 사실 당시에 고발도 했었다. 내가 고발했음을 눈치챈 선임병들은 우습게도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또 고발하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제 식구 만들기'를 재개하였다. 그게 한창이던 중 나는 일선 치안현장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고 오랫동안 횡성 일대를 떠돌며 근무했다. 꽤 시간이 흘러서 나는 본대에 붙박히게 되었는데 내가 그다지 설쳐대지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부대에 남아 있던 몇몇 동기와의 마찰이 있었다.
부대는 처음에 내게 원주 톨게이트의 최고참으로 근무하며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당시 소대장의 뜻으로 분대장을 달면서 짧은 톨게이트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야 했었다. 권력이 강하지 않은 최고참이 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쫄병들, 그것도 차이가 많이 나는 쫄병들에게 잘해주는 일이었다. 내 동기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후임과도 잘 지냈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한 고참 가운데 누구와 사이가 좋았느냐?"라는 설문을 했는데 내 이름이 계속해서 나왔다고 한다(내 출신 부대는 내가 제대하고 3개월이 지나 터진 '전경부대 알몸진급식'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곳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 같아 아마 그런 설문을 했던 걸로 보인다). 1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후임들에게 특히 좋은 고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평생에서 제일가는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2년 간의 군 생활이란 건 무사히 끝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왜 육군으로 입대한 사람이 경찰로 빼돌려져야만 하는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군사훈련을 받으며 익힌 제식을 버리고 듣도보도 못한 전경대 제식을 익힐 때 들었던 황당한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경대는 중대 단위로 각자 떨어져 있어 상부계통에서 나온 지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육군에 비해 구타가 잘 근절되지 않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당시 소속 부대는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내용들을 모두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희한한 관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밥 먹었냐?" "시정하겠습니다.") 멜로디 없는 군가도 정말 외우기가 힘들었는데, 그건 전국적으로 전경부대의 공통점이었다.
'전투화'를 신고 운동장을 돌다가 '얼차려'를 받던 사람이, '워커'를 신고 경찰서 뒷마당을 돌고 구타를 당하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내 소속부대는 운동장이 있는 새 시설로 옮겨 갔고 구타와 가혹행위도 점점 줄어갔다. 하지만 그게 군인을 함부로 경찰로 교체하는 걸 합리화할 수는 없다. 경제 살리라고 대통령 시켜줬더니 미친소나 먹으라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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