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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다

그는 급박한 시기에 죽었다. 독일과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 노선을 포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모든 국가에서의 동시적인 총파업을 결행함으로써 전쟁을 막자고 결의했다. 프랑스 노동단체 CGT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며 전쟁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던 1914년 7월 27일 반전시위를 단행하였다. 이 시위에서 노동자와 경찰은 대충돌을 일으켰다.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반전평화를 호소했다. 7월 30일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대중 연설을 펼치고 파리로 돌아와서 외무부를 방문했다. 7월 31일에는 <뤼마니테 L’ Humanitè>의 편집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장 조레스는 참석차 몽마르트르 부근의 신문사 거리에 있는 한 식당에 방문하였다. 그는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극우파 청년에게 흉탄을 맞고 숨졌다.


  CGT는 독일제국주의를 비난하며 반전시위를 중단했다. 사회당은 전쟁특별예산을 통과시켰고, 지도급 인물인 게드는 전시거국내각에 입각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우애는 무너져 내렸고,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곧 그들을 뒤덮게 된다. 혹자는 그의 죽음이 그를 보호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조레스가 살아남아 세계대전을 맞이했다면, 그때 그는 애국자로서 누구보다도 전쟁에 앞장섰을 터이며 어쩌면 전쟁광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그저 모른체하기는 힘든 주장이다. 조레스 사후 서구 사회주의자들은 그대로 전쟁의 광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해서 그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조레스는 조국을 중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도 민족들 안에서 거점과 표지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조국과 헤어진 사회주의는 ‘시든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3) 그러나 조레스는 사회주의적 사상 체계 안에서 조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조국은 사회주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에 쓰이는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4) 자유와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서 고개를 돌리는 날 조국은 자격을 상실한다고 믿는 이를 애국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오류다. 


  2008년 7월 31일, 우리는 조국의 특질과 강점을 간파하면서도 정의가 국익을 압도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던 사회주의 정치가의 94주기를 맞이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던 그는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혁명가들’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조레스는 혁명의 주역도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국가원수나 내각수반도 아니었다. 당의 확고한 영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묘비는 조레스를 ‘인민의 호민관’으로 프랑스 역사에 새겼다. 한국의 의회에서도 호민관이, 조레스와는 달리 생존으로써 성공하는 호민관이 속속 등장하기를 빌며, 붉은 장미를 그의 영전에 마음으로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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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화파에서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장 조레스는 1859년 프랑스 남부의 카스트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 지역에는 소농과 장인이 많았고, 그의 집안환경도 소부르주아적이었다. 명석했던 그는 장학생들에게 선발되어 로이 르 그랑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한 끝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베르그송, 뒤르켐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동기생이고, 이후에도 사르트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들이 이 학교를 거친다. 그는 3년간의 수학을 끝내고 알비 중학교의 교사와 투르즈대학교의 철학 강사를 지낸다.


  조레스는 해군제독인 집안 아저씨의 영향 탓인지 정치인의 꿈을 품고 있었고 1884년 도 단위 공화파 명부로 고향에 출마해 의원이 된다. 이 시기의 프랑스 공화주의는 역동적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은 1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반면 조레스의 고향은 기업과 교회의 막강한 힘에 좌우되고 있었고, 근왕주의나 복고주의 성향을 가진 지역민들도 숱했다. 1889년도에 두번째로 출마한 그는 소농과 장인들을 대변하며 지역구에서 대기업가, 대금융가들과 맞서 싸우다 패배하였다.


  그후 시장보로 근무하던 조레스는 숙련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레스가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1892년 터진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이었다. 노동자의 편에서 사태를 분석한 그는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사회주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무렵 프랑스의 4개 사회주의 정당은 16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사회주의자도 21명에 달했다. 


  조레스가 시도한 거리와 의회의 접속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1893년 하원의회에서 ‘사회주의, 탄압 그리고 노동자 주동자들’이라는 명연설을 펼쳤다. 주동자 적발에 골몰한 정부를 비난한 이 연설은 무슨 일만 터지면 배후를 찾는 한국의 기득권세력에게 그대로 들려주어도 유용할 것 같다.


어디에 주동자들이 있고 어디에 사주자들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귀하가 은밀하게 해체하고자 하는 노조를 조직하는 노동자들, 이론가들, 사회주의 선전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동자들, 중요한 사주자들은 우선 자본가들 사이에 있고 여당 안에 있다.5)


  그는 1906년 1100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탄광 사고가 일어났을 때 참사의 원인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았다. 그는 1906년 단독 집권에 성공한 급진주의자들(클레망소 내각)이 여전히 소유를 중시하는 습관에 젖어 노동자의 현실을 간과하는 데 매우 비판적이었다.6) 또 조레스는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법률의 추를 주시하며 1904년 북부 샤티용 파업 때 고용주와 사법당국의 협잡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업이 노동계약의 파괴를 부른다는 논법을 반동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주목할 점은 노동자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장 조레스에게 공화주의란 번데기 시절의 껍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유소년기인 동시에 영원한 젖줄이었다. 마치 록(Rock)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전지(電池)로 여기듯 말이다. 1898년 3선 실패 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지는 동안 장 조레스는 대학에 복귀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를 내놓는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찾아나선 역작이었다.



3. 각축하는 좌파‘들’ 틈에서


카르모의 노동자들과 함께 조레스에게 사회주의를 심어준 인물로는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도서관 사서 에르(Lucien Herr)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 이론과 독일학에 조예가 깊었고, 장 조레스와 나중에 인민전선의 내각을 지휘할 레옹 블룸의 스승이었다. 에르는 조레스에게 사회주의가 꼭 블랑끼즘이나 게디즘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Socialisme Utopique)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생디컬리즘(조르쥬 소렐7)), 반중앙집권적 사회주의(말롱) 등의 전통도 만만치 않았다. 1848년 선포된 공화정에서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된 루이 블랑의 경우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에 해당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세를 떨친 흐름은 에르와 조레스가 선을 그은, 그라쿠스 바뵈프-오귀스트 블랑끼로 이어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였고,8) 이는 쥘 게드9)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한편 블랑끼의 동지였던 바이양은 지하운동을 청산하면서 프랑스혁명당(PRF)을 창당했다.) 


  게드는 1879년 프랑스노동당(POF)의 창당을 주도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기존의 토착 사회주의와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1880년 전당대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탈퇴하고, 개혁주의의 맥을 잇는 가능주의파(possiblilistes)도 게드가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뛰쳐 나가 사회노동연맹(FTS)을 창설하고 의회민주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J.알만의 노동사회혁명당(PSOR)도 파리코뮌의 전사인 동시에 루이 블랑의 개혁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좌파들을 모아 나갔다. 그들은 혁명적 생디칼리즘과도 연대하는 한편 파리고등사범 출신들을 영입한다. 조레스의 스승인 에르는 바로 이 당의 기관지 ‘노동자의 당’의 논객으로서, 다수의 글을 기고해 국제사회주의운동과 독일사민당, 영국 차티스트운동을 소개했다. 에르와 조레스의 가담은 지성적 사회주의(socialisme d’ intellectuels)의 신호탄이었고, 이때부터 노동자중심의 사회주의운동에 많은 지식인들이 스며 들게 된다.



4. 조레스주의, 게드를 넘어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광대한 운동으로부터 부상한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하나의 계급이 민주주의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혁명의 처음 며칠이 지나서도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키게 되면 그들은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다.10)


  프랑스의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장 조레스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11) 그들은 대체로 조레스가 프랑스식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 조레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을 따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는 개혁주의자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세력 다수가 부르조아 내부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외면한 드레퓌스 사건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죄 없는 유대인 장교를 탄원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게드파에게 의혹을 받는다. 1899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권에 참여해도 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혁명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적극적 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에 불참하는 원칙을 세우면서, 다만 특별한 상황에서만큼은 장관을 파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면서 매듭지어졌다.


  조레스의 드레퓌스 사건 투신은 사회주의의 보편적 정신을 구현하고 사회주의의 한 틀인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권 참여에 대한 그의 입장이 타협적이고 나이브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혁명주의자들이 도피적이고 순혈주의적이라고 해서, 정권 불참론의 정당성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공화파 정권은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고, 좌파들에게 정부 혁신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지도 않았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조레스도 결국 노동투쟁 속에서 집권세력의 기만을 깨닫고 이를 규탄하는 활동을 펼쳤다.


  개혁주의와 혁명주의의 대결은 1901년 리용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을 위한 3차 대회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브루쓰파와 알망파의 연합으로 프랑스사회당(PSF)이,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합작으로 프랑스의 사회당(PSDF)이 생겨났다. 조레스는 물론 PSF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2차 인터내셔널 6차대회에서 개혁주의는 표싸움에서 졌고 조레스는 승복했다. 그로 인해 등장한 통합사회당이 바로 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SFIO)라는 다소 희한하고도 긴 명칭을 가진 정당이다. 이 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할 때까지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창당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였고, 국가를 부르주아지배의 도구로 낙인찍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게드주의를 이겨내려는 조레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조레스는 좌파당원 3만 5천명을 압도하는 20여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 주목했고,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의 통합을 지향하며, 1906년에는 게드주의를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자본주의 착취가 있는 한 전쟁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게드의 입장은, 조레스에게 있어 명백한 광신적 애국주의이기도 했다. 그는 파업이 전쟁의 도구라는 관점에 반대했다.


  1908년 조레스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세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설정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정복한다. 둘째, 단기적으로는 선거와 의회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때때로 총파업을 실시한다. 조레스는 국가는 하나의 계급이 아닌 계급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전제하며, 국가는 외부의 혁명이나 폭력보다는 내부에서 정복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관철되었고 조레스는 사회당의 명실상부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후 클레망소 내각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노동조직은 여전히 총파업 신화에 빠져 있었으나, 사회당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14년 당원수는 7만 2천여명에 이르렀고, 지식인 그룹도 꾸준히 조레스주의에 합세하였다.

  


5. 개인주의와 다수혁명론의 의의 


프랑스 학자 자크 들로즈는 조레스에게 ‘통합과 종합의 천재’라는 찬사를 바친 바 있다. 조레스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혁명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그의 사회주의는 혁명 대 개혁의 해묵은 대치를 불식시켰고, 혁명노선의 모험주의를 억누르는 동시에 개혁노선의 타협과 타락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론 내부의 투쟁을 무마하는 절충주의로 비쳐지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한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조레스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전통에 사상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조국애가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조국애는 상대적으로 혈통주의보다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래서 조레스에게 조국애는 공화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또 한편으로 조레스는 프랑스 고유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더구나 그의 고향은 개인주의의 주역인 소농민과 소장인들로 가득했다.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 사건을 피해가지 않았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도 반동으로부터 공화국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이 계급문제보다 하위의 가치라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한 인간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가 부르조아일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해치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경계심에 예민하였고 충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아무것고 개인 위에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개인 권리의 최우선적 확인이라고 명토 박았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의 탈집중화론이 경제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비켜갔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는 논리적이고 완전한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확장함으로써 혁명적 개인주의로 이어간다.12) 


자본주의 체제는 소유와 노동을 떼어놓았다. (···) 탈집중론자들은 공상만 하든가, 아니면 반동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입장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소유의 변혁 없는 탈집중화는 오래된 토지 세력의 패권을 복구시키는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이다.13)


  조레스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은 빈곤한 일상으로 인해 단순하다’는 편견에 저항하며 노동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그가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 사고하지 않았고 노동자 개개인의 의식 발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도 좌파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얄팍한 정치공학이 아니라, 개인주의와 그로부터 유래된 다수혁명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진전과 더불어 ‘크나큰 다수(majoritè immense)’가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크나큰 다수는 ‘부르주아와 적대하는 프롤레타리아’로 환원되지 않는다.14) 조레스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민주주의를 토대로 구성한 ‘다수의 의지’가 계급의 독재로 뒤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미래 사회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를 꺼리는 것을 술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다만 진화의 자유와 생의 풍요로움을 존중할 뿐”이라고 대꾸했다. 봉기에 집착하는 혁명주의를 버리고 의회정치와 현장투쟁, 정권 획득 등 모든 정당하고 합리적인 경로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달성에 나선 것도 사회주의의 그러한 ‘열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철권 통치와 인권 탄압에 이어 멸망과 퇴행으로 귀결된 오늘날, 조레스는 레닌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로 기록될 만하다.



6. 다시, 한국을 생각하며

 

조레스가 활동하던 즈음의 프랑스처럼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에도 여러 정파가 존재하며 진보정당과 노동조직에 나타난 분열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 양상 자체보다는 이들이 한줌의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하며 관념적인 이상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여전히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합법정당활동과 의회정치를 개량, 타협, 투항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아무도 혁명에 도전하지는 않지만.


  선거에서조차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사교섭 적용률이 현저하게 낮은 가운데 혁명이란 그저 몽상일 뿐이다. 반면, 의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천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수구파와 보수파의 여론 점유율이 다시 오르는 현상은 명백한 현실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조레스처럼 모든 정당한 수단과 합리적 경로에 도전해야 한다. 조레스와 같은 걸출한 리더쉽 역시 절실하다.


  한국에서 진보 정치의 리더쉽을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물은 정파구도와 종파주의이다. 내부 헤게모니투쟁에 골몰하기를 강조하는 구조 속에서, 대개 리더들은 두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로 흐르기 쉽다. 하나는 분열주의적 리더쉽이다. 51을 차지한다면 100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때로는 51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분열을 꾀해 26을 얻으려 한다. 다른 하나는 봉합적 리더쉽이다. 여기에서는 이 소리로 저기에서는 저 소리로 환심을 얻어 나가며, 최소한 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다수에게 추대되는 길이다.


  언제까지 구조를 탓하며 실효성 없는 담론과 한탄만을 양산할 수는 없다. 필자는 우선, 기존의 구도에 아랑곳않는, 그러면서도 진보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표현하고 구사해 나가는 리더가 먼저 나타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러한 리더는 정치적 허영심이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야 할 것이고, 자연히 기성과 전통으로부터 충분히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사유를 갈고 닦는 사상가적 면모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조레스도 정치가 이전에 사상가였다. 조레스의 혁명적 개혁주의는 프랑스적 전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조레스는 경험과 관찰 그리고 진중한 사유로 진보의 나무를 가꾸었고, 그를 통해 좌파의 분열과 정체를 타개해 나갔다.


  물론 사유와 발언만으로 훌륭한 정치 리더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조레스는 탁월한 행동가였다. 거리와 의회에 한발씩을 디디며 양쪽이 위치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투쟁’과 ‘결정’의 장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오늘 한국에서 다수의 노동자는 수구정당이나 보수정당에 투표하는데 이는 여느 선진국도 말끔히 해결하지는 못한 난제다. 사회경제적 처지와 투표 성향의 괴리는 설명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강렬할 인상을 남길 진솔한 행동만한 방책이 없다.     한국은 프랑스와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공화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전통이, 프랑스와 다르게든 혹은 비슷하게든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나름의 진보정치의 역사는 얼마든 쓰여질 수 있다. 나뭇잎의 모양은 달라도 어지간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면 나무는 어디에서나 자라기 마련이듯. 조레스와 같은-나아가 그를 뛰어넘는-사상가, 정치가의 출현 역시 결코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고문헌]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한국사회민주주의 연구회, <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사회와 연대, 2001.
장석준,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이론과 실천>, 2002년 7월호.
노서경,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55~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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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 선생 별세

史의 찬미 | 2008. 3. 23. 16:23 | Posted by 김수민
건국 이후 혁신정당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그는 더없이 든든한 거목이었다.
진보당 사건 당시 그가 패기와 객기에 차서 남긴 메모가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에 대한 무기로 쓰인 바 있었으니
그가 이후에 겪었던 심적 고통은 짐작할 만하다.
정 선생이 근래에 진보진영에 남긴 말들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간 것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어도 늘 생각에 잠길 기회와 마주치곤 한다.
진보당계와 근민당계, 민자통과 중통련의 차이를 연구하며
한국 진보진영에게 통일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게 안겨준 분도 그분이다.
저승에서 조봉암 등 동지들과 반갑게 해후하시길 빈다.
공교롭게도 정태영 선생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나는 조봉암에 대한 원고를 작성한 바 있다.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
  [弔辭] 진보 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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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

史의 찬미 | 2008. 3. 1. 14:27 | Posted by 김수민
룩: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한답시고 원래 해야 하는 걸 덮는 거 아녀?
베: 무슨 소릴하능겨. 어차피 우회하는 건 날로 먹는 거라고.
룩: 에, 그거 하면서 은근슬쩍 훼방놓고 원칙 박살내는 거잖아~
베: 아 거... 한다고 해도 문제, 안한다고 해도 문제...

따지고 보면 그런 이야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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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

史의 찬미 | 2008. 1. 18. 12:40 | Posted by 김수민

 

“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1)

- 영국 노동당내 좌파의 대안경제전략(AES)


김수민



1. 사회주의에 무심한 노동당, 사회화를 포기한 사회주의 


영국의 근대사는 이웃한 프랑스에 비하면 격랑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계급적 평등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놓고 사유했던 앵글로색슨적 전통은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덜 두드러지게 벌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의 특성은 이와 밀접하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의 제도적 진입을 위해 결성한 ‘노동자대표위원회(LRC)’의 후신이었고, 당명 그대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정당’,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노조의 당’에 가까웠다. 특별히 당원제도가 없이 노동조합원들이 곧바로 집단입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등의 특성은 이를 정확히 뒷받침 한다.


  영국 노동당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손색을 갖춘 것은 1918년 당 대회에서부터였다. 여기서 노동당은 “생산수단·분배·교환의 공동 소유, 민중적 경영과 산업·서비스의 통제 체계”라는 구절의 당헌 4조를 통과시킨다. 뿐더러 대회에서는 개인입당제도가 신설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로 노동당이 궁극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상층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된 힘으로 당을 이끌어나갔고, 여기에 하원의원들이 당의 일상활동을 주도함에 따라 당의 민주화를 저해하였다. 집권할 때는 각료들이, 그렇지 않을 때는 쉐도우 캐비넷(그림자 내각)의 구성원들이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다. 당수라는 존재도 이러한 구조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가 의원단의 선거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은 원내 인사들과 기꺼이 타협하여 당의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노동당은 사회주의의 핵심 강령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도 실현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애틀리 정부를 출범시켰고,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무상의료를 구현하고 주택의 공공화에서도 성과를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국가가 개입하여 수정을 꾀한다는 케인즈주의적 발상에 머무르고 만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그랬듯 결국 노동당은 노동자 주도의 경제,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계획과 시장의 혼합, 조세와 재분배를 더 주창하기에 이른다. 토니 크로슬랜드 등의 이데올로그들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전부인 양 여겼고, 1950년대 후반의 당지도부는 당헌 4조를 삭제하려고 시도했다. 혼합경제와 재분배를 1단계로 자주관리나 생산수단의 사화회를 2단계로 쳤을 때, 1단계에 집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1단계가 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면 말이다. 




2. ‘벤 좌파’와 대안경제전략의 부상


당의 우경화를 비난하며 왼쪽 깜빡이를 켜 당수가 된 헤롤드 윌슨도 총리 재임 기간동안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 데 실패한다. 노동당의 1964년 선거공약부터가 산업근대화와 경기확대라는 탈이념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윌슨은 사회주의 강령은 차치하고, 임금인상을 봉쇄하는 노동법 개정을 강행했다가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치는 등 ‘노동’당답지도 않은 모습을 연출한다.


  이 시기 노동당과 윌슨 정부의 우회전에 가장 제동을 걸었던 프랭크 카즌스 기술장관이 내각을 떠나 원래 일하던 운수노조로 복귀하면서, 당내 좌파의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 이가 토니 벤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영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명단에서 켄 리빙스턴 현 런던시장의 윗자리에 오르지만, 처음부터 그가 꽤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원의원을 아버지로 둔 윌슨의 1순위 후계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뒤 상원의원직을 맏아들로서 계승하게 되면서 그는 이 구습을 타파하고자 3년동안 투쟁했고, 영국식 민주주의와 이에 무비판적인 노동당의 행태를 회의하게 되었다. 공화파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해악을 직시하며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프랑스의 장 조레스와 닮은 부분이다. 


  토니 벤이 떠오르면서 노동당은 1970년대 들어 좌경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거대 노동조합에 좌파적 성향이 뚜렷한 지도부가 들어서고, 68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지역활동가로 자리잡았으며, 토니 벤은 전국집행위원회의 핵심인물로 급진적 정책 구상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전국집행위원회의 좌우 비율은 1964년에는 8:20이었으나 그무렵은 12:15로 좁혀져 있었다.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국유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집행위원회는 드디어 1973년에 들어 급진적 정책들을 채택한다. 정책강령은 초반에서 “노동당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권력과 부의 근본적이고도 불가역한 이전을 가져올 사회주의정당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선포하였다. 보수당 히드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며, 일반은행, 보험회사, 금융기관 그리고 제조업부문들을 국유화할 대상기업에 포함시켰다. 국민기업위원회(NEB: National Enterprise Board)는 바로 이 일련의 대안경제전략(AES: Alternative Economic Strategy)의 화룡점정이었다. NEB란, 25개 제조업을 비롯해 개별기업의 주식을 국가가 강제로 매입시키는 국가주주회사이다. 여기에 계획협약을 통해 국가가 100여개의 대기업체들로부터 가격, 이윤, 투자계획 등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덧붙여지면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노리는 AES는 한결 더 색깔이 짙어졌다.    


  AES는 만약 실현될 경우 국민총생산 및 총고용의 4할을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노동당이 1960년대 중후반에 실시한 산업재조직공사, 산업확대법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면, AES는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시도되는 사회주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노동당 좌파의 거두인 오를 후트가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강령”이라고 추켜세운 정책강령은 그해 말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1974년 2월 파업파동 등 혼란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1931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에 불구하고 불안하게나마 집권할 수 있었다. 총리 복귀한 윌슨에 의해 토니 벤은 산업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전국집행위원회 산하의 국내정책위원회 의장이었기에 정부와 당에 걸쳐 튼튼한 권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당내 좌파로 꼽히는 마이클 후트와 바바라 카슬도 각기 고용장관,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슨은 더 튼튼한 정부를 구성키 위해 10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했고, 노동당은 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3. NEB의 타락과 노동당의 패배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당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6%였고 공공부문 임금상승률은 20%에 이를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무역수지도 악화되었고 실업자는 100만면을 넘어섰다.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 바야흐로 케인즈주의가 몰락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벤 장관은 관료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실무자들의 녹서에 근거해 1974년 5월 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영국산업의 재건>이라는 백서2)는 선거공약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산업계와 보수언론은 당연히 반발했다. 각료들도 이미 국가개입보다 만성적 저투자의 해결에 관심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벤의 제안이 정부와 산업의 신뢰관계를 파손하리라고 우려했다. 


  결국 윌슨 총리는 그 자신이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앉아 노동당내 좌파를 배제하고 백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정안은 “산업부문과의 공개적 제휴”를 내걸었다. 애초 계획협정은 정부 필요에 의한 사부문 기업들을 강제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수정안에서는 계개별기업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재정지원을 받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게다가 NEB가 25개 업체를 인수하고 제약, 은행, 보험회사를 공공으로 이전한다는 언급도 삭제되고 이는 해당기업이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사부문의 축소하겠다는 취지가 사적 기업들을 보호·유지하는 쪽으로 꺾인 셈이다. 


  윌슨 정부는 새로 만든 산업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무난히 통과시켰다. 그런데 영국산업연맹은 윌슨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사부문이 더 침해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재수정을 요구했다. 윌슨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업이 정보를 노동조합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조항마저  지워졌다. 국유화는 물론이고 산업민주주의마저 부인되고, 산업투자와 생산력 확장을 위한 재정보조가 NEB의 주요기능이 되었다. 그리고 벤 장관은 보수당, 보수언론, 경제관료들의 공세와 그에 뇌동한 총리에 의해 경질당한다.


  NEB 이사회의 의장과 부의장도 사기업측의 대표자가 맡았다. 주식을 국가로 이전할 방도를 잃은 NEB는 몰락산업의 구조자로 전락했다. NEB가 출범 초기 주식을 사들인 68개의 기업 중 정부의 지분이 절반을 넘는 기업은 19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산업계획은 점차  영국 정부와 노총, 산업연맹의 3자협상 테이블인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C)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NEB를 위시한 실험은 “위대한 배반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1976년, 영국은 IMF 위기에 직면한다. 벤이 국내정책위원회에서 구제금융조건을 거부하고 국내의 자본 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은 IMF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40억 파운드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대공황 이후 최대의 규모로 예산을 삭감하고 금리를 15%로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위기는 1979년 보수당 대처 정부를 불러 일으켰고, 그 다음 총선에서도 노동당 우파 일부가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분열이 일어나 보수당과 대처가 승리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팡이었던 케인즈주의는 부러졌고 신자유주의의 험로가 놓인 것이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선의의 경쟁이라도 벌이듯 자본과 시장의 원리를 관철시켰다. 훗날 노동당은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을 내세워 정권을 잡지만, 이미 영국과 노동당은 그 사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블레어 총리는 ‘붉은 옷을 입은 대처’가 되었다.



4. 아직도 ‘벤 좌파’를 예의주시하는 이유


서·북유럽 진보정당 가운데 사회주의적 성격이 가장 묽은 영국 노동당에서 국유화 전략이 등장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나타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30년 대공황에 이어 또다시 민생경제를 강타한 1974년도의 불황은 진보·좌파 세력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계기였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세력이 기업의 지분을 차근히 인수하여 생산수단 사회화를 달성하려는 임노동자기금 계획을 세웠고, 독일에서는 소유의 사회화를 다시 사회민주당 강령에 삽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프랑스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강령을 통해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에 합의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민간기업이 성장한 가운데 국유화 전략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원래 사회주의의 이상은 ‘사회화’이며, ‘국유화’는 그의 한 유력한 수단일 뿐임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 좌파연합은 해외자본, 보수세력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우파와 동거정부를 꾸리며 ‘니니 정책(민영화도 국유화도 하지 않는다)’에 눌러 앉았다. 서·북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소유의 사회화 방안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후 불어올 신자유주의의 바람의 전초현상인 셈이다. 사회화에 대한 좌파의 무기력이 원인인지, 사회화가 무리하게 꺼내든 무기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국유화 테제를 자본주의 초기 국가가 시장과 자본의 힘을 유일하게 제어할 장치였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오늘날 좌파들은 협동소유나 자주관리 그리고 민주적 경영참여 등의 여타 사회화 전략으로 결론을 터야 할 것이다.


  서·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 내에서, 소득의 재분배나 다소의 경제계획에 우선 만족하는 편이 ‘사민주의 (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산업민주주의 내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계속 시도하는 쪽은 ‘사민주의 (내의)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좌파의 도전은 내외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보수화의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파탄이 나고 좌파 정당의 주류가 ‘제3의 길’로 우경화되면서, 그들이 사회주의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1973년, 영국 노동당에는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이 결성됐고, 5년이 지나서는 노동당조정위원회(LCC)가 출범했다. 전자의 목표는 의원단의 독재를 타파하며 당의 혁신과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AES를 더 연구하고 교육·선전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조직은 세를 불리며 서로 연합해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벤 좌파’ 또는 노동당 ‘신좌파’의 대표 조직이 되었다. 신좌파는 당헌 4조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찬성한다는 점에서 ‘트리뷴’ 그룹과 같으나, 의원단구조를 혁파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구좌파’와 달랐다. 신좌파는 정·부당수를 의원단이 아닌 대의원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시켰고, 구좌파 쪽의 마이클 푸트가 그 다음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수로 취임했다.


  벤 좌파는 아쉽게도 노조단위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블록투표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개별 당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제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의원단의 전횡을 견제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유지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대신 벤 좌파는 블록투표가 각 단위별 민주적 절차에 의거하도록 노력하고, 당구조에 직장분회를 신설하며 평당원 민주주의에 이바지한다. 또 당 바깥의 지식인들까지 초빙하여 ‘일요모임’이라는 정책집단을 만들고,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 등과 노동운동의 교류를 추진했다. <뉴 소셜리스트>는 바로 이 같은 벤 좌파의 운동을 홍보하는 기관지였다. 


  벤 좌파는 영국 정치와 노동당내의 힘 있는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대처 총리와 보수당에 맞서느라 노동당은 주류 우파 중심으로 굴러갔고, 블레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당은 더욱 우경화되었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굴신하는 것을 거부한 켄 리빙스턴(런던 시장)과 같은 이들이 있으나 내각의 다수자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100년 전 노동당이 소집한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환경·여성·소수민족까지 참여시키면서 창조적으로 복원하자는 토니 벤의 목소리는 우경화를 반대하는 영국 좌파의 표상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유럽의 진보정치는 사민주의의 이상을 배반하며 정당의 운영 면에서도 당원중심의 대중정당 모델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벤 좌파의 정당혁신과 ‘민주적 사회주의’는 안티-테제로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테제로서 가장 앞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다.


1) ‘제3의 길’의 이데올로그였던 앤서니 기든스가 토니 블레어에 이어 영국 총리로 취임한 영국 노동당 당수에게 “브라운, 이젠 당신 차례요”라고 말한 것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2) 백서는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뜻하고, 녹서는 특정 정책영역에 대한 토론보고서이다.



[참고문헌]


고세훈, 『영국노동당의 선거전략과 국유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적 성격과  당내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와 사회> 13호, 1992.

고세훈, 『영국 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장석준, 『역사속의 진보정당들 11. 영국노동당 신좌파운동: 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이론과 실천> 2003년 6월호.

한국 사회민주주의 연구회,『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도서출판 사화와 연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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