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에 관하여

史의 찬미 | 2008. 6. 19. 04:32 | Posted by 김수민
조관자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를 읽고,
2007년 2월 1일 학부생들의 학회인 연세사학회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을
오늘 잠깐 꺼내서 다시 곱씹다가, 수정하여 블로그에 올린다.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에 관하여



1. ‘단일민족’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내셔널리즘


조관자는 “기존의 한국사 논의는 단일민족의 범주에서만 내셔널리즘을 인정”했다고 지적한다.1) 다시 말해 내셔널리즘의 범주를 하나의 민족만으로 설정하는 오류를 그동안 한국사 논의가 범했다는 이야기다. 이 자체로는 맞는 지적인데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사에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구별되는 이념이었고, 내셔널리즘이라는 영단어는 국가주의는 확실히 껴안되 민족주의와는 어정쩡한 포함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좁은 시각이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친일을 반민족성 또는 비민족성의 죄과로 심판하는 것이다. ‘친일’이라는 단어도 제국주의 부역행위를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반민족’ 담론 역시 구체적인 취지와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를 정리하거나 청산하는 작업에서 ‘반민족’은 ‘반민주’와 ‘반민중’과 거의 동급 수준의 윤리적 준거가 되었음에도, ‘민족에 반하였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라는 뜻과 과연 같은지2), 더 나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거나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단일한 민족주권이라는 존재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민족은 실체가 있고 그것이 기반한 언어, 혈통, 지역, 문화가 있으나, 결정적으로 민족을 응고시키는 힘은 ‘상상’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저서 <상상의 공동체>에도 잘 나타나 있듯 이 ‘상상’은 단순히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태도’는 아니지만, 유구하지 않지만 거대한 문화적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민족은 재구성될 수 있다.


  조관자의 글은 바로 그렇게 민족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한 대표적 조선 지식인을 다루고 있다. 본문은 그의 글의 여파를 살려 민족운동가 이광수가 어떻게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조선 민족이 식민지 제국 일본의 국민이 되게끔 선동하였는지를 따져보며, 식민지에서 피어난 협력의 논리가 제국주의 종주국에 뒤지지 않는 내셔널리즘의 한 형태로 발전하는지를 되짚어 본다. 나아가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와 깔끔히 분리될 수 없으며, ‘반민족적’이라고 여겨진 행위가 당사자의 항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친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2. 문명과의 일체: 민족의 오늘에서 내일의 내셔널리즘으로 


결론부터 말해 지식인 이광수의 성장기와 일제 말기를 대비해서 전향, 변절했다고 보는 시각은 단선적이다. 이광수는 일진회 유학생 시절부터 강고한 문명지향을 품고 있었는데,  이의 다른 한편에는 비루한 제 동포들에게서 엿본 절망적인 야만이 깔려 있었다. 그가 민족운동에 나선 것은 민족 계몽에 대한 결심 때문이었다. 


  그가 <동경잡신>에서 추천했다는 필독서에는 도쿠토미 소호의 선집이 수록되어 있다. 도쿠토미 소호는 원래 개인의 권리와 평민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아시아 진출과 국가주의를 신봉하게 된 인물이다. 우리는 이 배경이 되는 근대 일본이 어떻게 문화를 창조해내었는지에 관한 답을 후발자본주의 국가의 특수성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의 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원을 두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독일의 국수주의 문화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문화가 일본문화로 유입되는 수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뒤쳐진 자’로서 가지는 대항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어떤 개인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높여가는 것처럼 독일과 일본은 신흥강국으로서의 자부심과 후발주자로서의 콤플렉스가 길항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후발주자에게 짓밟힌 식민지인으로서 이광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이미 ‘대동아문명’이름으로 곧 만개할 ‘아시아 문명’에 자신의 신념을 두고 있었다. 아시아민족으로서의 신문화 산출을 민족의 이상으로 삼자고 제안한 1917년 <학지광>의 글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는 “의인은 어떠한 권력에 대해서도 노예가 되지 아니하거니와 오직 자기의 응낙에는 완전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3)라고 썼다. 얼핏 누구의 간섭과 지배도 배제하고 철저히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결단만을 좇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광수의 언설에는 결정적으로 ‘자기 반성’과 ‘자기 갱신’의 정신이 부재한다. 문학적으로 과장된 표현일지라도 “자기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철학의 산물이며 개인주의와는 모순되는 태도이다.


  이에 붙여 이광수는 “자유는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 원리와 지도를 택하는 데 쓴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의인’으로 상징되는 ‘바람직한 개인’은 이광수에게 있어 ‘개체’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전체’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는 전(全)우주적 개념은 아닌 듯하고, ‘외부’를 필연적으로 가지는 ‘아와 비아와의 싸움’이라는 역사관에도 맞닿아 있다. 그는 주체와 전체를 동일시했고, 전체의 범위는 문명 일본과 그의 식민지 조선을 중점으로 한 아시아공동체였다. 그러한 이광수로서는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를 지도하는 원리를 택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일제의 국민 공동체에 복속되는 것은 자민족의 존엄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개인의 자유와 전체적 위계질서, 식민지의 암울한 상황과 제국의 그릇된 욕망이라는  통할 수 없어 보이는 가치들을 이어가려 했던 셈이다. 제국주의 시대 태동한 파시즘은 일방적인 ‘자유 몰수’보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자유 헌납’에 더욱 크게 의존하였다. 자유를 헌납하는 개인은 자신을 보호하는 전체가 든든해짐을 느끼며 그 덕분에 자신이 더욱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는 에리히 프롬이 해부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개인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개인에 관한 잘못된 자의식이 어떻게 전체주의로 번지는지를 입증하였다.

   


3. 민족운동으로 일제에 충성하기 


  이광수가 품은 최대의 딜레마는 '주권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힘 있는 국민의 형성'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주권 없는 민족도 상해임시정부 등의 존재를 상기하며 민족적 의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근대의 민족주의는 ‘국가’라는 도플갱어와 맥놀이를 일으키지 않는 한 꾸준하고 공고하게 진행될 수가 없다. 마침내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전도된 형태로 기존 민족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변화는 형식적으로는 전도로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굴절인지 발달인지 잘라 말하기 힘들다. 다만 ‘민족 역량 확대’라는 욕망이 더욱 뜨거워지고 확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대륙의 하늘에는 바야흐로 전운이 굼틀거린다...... 우리는 인류가 총동원 대출연하는 오늘의 무대에 일역을 맡지 못하고 막 뒤에 쭈그리고 안는 생명없는 백성이다. 우리에게 힘이 오르는 날 인류의 무대는 우리에게 정중한 출연 요구장을 보낼 것이다. 오늘은 힘을 기루는 날.”4) 이광수의 망딸리떼를 단적으로 드러낸 문장이다. 이광수는 1930년대 들어 세계대전의 기운 속에서 주역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민족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언젠가는 당당하게 힘겨루기에 나서고 말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성도 이성에 기초한 정치사상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연애나 이유 없는 결투에서나 발견될 만한 성찰 없는 정념이다. 이광수는 제국주의끼리의 싸움에 끼지 못하는 민족에게 ‘생명’조차고 없다고 말하는, ‘공포와 연민’의 지식인이다. ‘출연 요구장’을 운위하는 부분에서는 사무라이나 조직폭력배의 감성까지도 감지된다.   


  이광수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재만주동포들에게 경제와 문화를 향상할 것을 권고하면서 비폭력, 비정치 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등과 ‘수양동우회’를 할 적부터 철저히 비무장노선을 걸었는데, 이광수와 동우회가 세운 민족운동의 비전은 1930년대 전반에 나온 이광수의 <조선민족운동의 삼기초 사업>(1932), <민족운동에 관한 몇 가지 생각>(1935)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 논작들은 기본적으로 근대화에 걸맞게 노동생산규율을 훈련하자고 주장하면서, 공동체 윤리 의식을 배양한 생활공동체 조직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조선 파시즘화의 기초라고 비판당하기도 했는데, 1933년 사회주의자 박철이의 경우 동우회운동이 자본주의의 파괴력이 강해지며 나타난 국제 파시즘과 공통점이 있는 식민지 파시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광수의 비폭력노선에는 재만동포를 주로 겨냥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무장독립투쟁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는 물론 여기서,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자칫 폭력의 미학에 물들며 제국주의를 닮아가거나, 또는 그 이전에 벌써 제국주의적 사고로부터 직접 힘을 얻었을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는 1등국민들-일본인’과 ‘그들을 문화와 경제로 뒷받침하는 2등국민들-조선인’을 잇는 작업은 이론적으로 무리가 없는 일이고, 따라서 재만동포의 무장투쟁은 견제하면서도 일제의 폭력을 찬미하는 노선은 근본주의적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광수가 비폭력, 비정치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안창호가 1938년에 병사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그는 내선일체를 위한 이데올로그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130여편의 친일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관되게 조선인이 일본의 문화국민이 되는 방법론과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특히 ‘총력전 체제’라는 전시환경은 그에게 조선민족을 위한 더할 수 없는 기회였다. 집단의 단합을 강조하는 총력전이 거세질수록 조선 민족은 차별 없는 국민생활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선 우선 종래의 조선심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5) 라고 강변하며 심지어 조선인의 존재를 <일본서기>에서 구름과 안개로 표상되는 ‘죄’에 등치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또 조선인의 전향을 막는 장애로 본래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실증주의나 과학주의, 그리고 적극적인 의지를 훼방하는 자유주의나 이기주의를 거론하면서, 그 사상들로부터 혼을 빼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내선일체는 현실적으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광수는 어느 일본인으로부터 “음험한 인간이 정말 싫다”며 조선인을 향해 ‘거짓말쟁이 혐오증’을 표출하는 발언을 듣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광수의 반응인데, 그는 조선인이 그렇다면 슬픈 일이라고 자책하면서 신용을 문화 국민의 표상으로 규정하였다. 한용운의 <복종>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이 더욱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광수를 빌어 발휘된 셈이다. 내선일체는 결코 인종주의를 뚫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와 그로 인한 차별이 강화될수록 내선일체의 집착도 함께 강해지는, 일제 말기의 비극을 이광수는 연출해내었다. 



4. 이광수와 루쉰


  영화 <한반도>에서 배우 차인표가 연기한 국정원 요원은, 친일-친미-반공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급속하게 반일-반미-용공적 민족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지를 어설프게나마 보여주었다. 한데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친일청산의 정신적, 실질적 대부인 임종국은 1960년대에 친일파의 국민문학 정신만큼은 긍정적으로 검토하자고 발언한 적이 있다. 고쿠민쇼세츠(國民小說)는 자국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식민지인에게까지 굴욕을 안겨준 데다가 오늘날에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적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따라 배우자는 제안이 친일청산론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은, '반민족행위'와 일본을 배격하기는 쉬워도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며 폭력에 맞서는 것은 지난함을 방증한다. 민족의 아픔에 고통받다가 제국의 논리에 동화된 이광수의 역사는 얼마든 재생 반복될 수 있다.


  이광수의 일제 시대 행적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또 다른 점은 그의 엘리트주의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민족의 현실에 반응하는 예민한 지식인이었다. 그점에서 그는 <아Q정전>으로 중국인들의 몽매한 정신에 죽비를 내려친 루쉰과 닮은 점이 있다.


  루쉰은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마오쩌둥주의적 시각에서 왜곡되기는 했으나 이광수처럼 ‘개인’에 민감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박홍규의 말에 따르면 영원히 비판하고 회의하는 지식인이었는데6), 바로 이점에서 그는 이광수와 달랐던 것 같다. 루쉰은 철저히 비판정신에 근거한 자신의 이념을 계속해서 의심하였고, 대중추수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중국 인민의 자유와 독립에 헌신하였다. 그가 중국 인민을 혼내고도 존경받는 인물로 남은 까닭은 중국 인민이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라 남에게 내려친 죽비를 스스로에게 들 줄 아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위에서 필자가 지적했듯 개인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주의는 정념이 이성을 지배하고 영혼이 정신을 통제하는 류의 과격한 낭만주의에 기초해 있었고, 독일에서의 니체철학이나 바그너의 음악이 보여주었듯 그 낭만주의는 민족주의와 귀족주의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최근 또 지면에 오르내리는 한 소설가는, 자신의 분별없는 말로 인해 겪게 된 공박과 고립을 두고 예전부터 ‘예술가가 겪는 고난’쯤으로 표현해 왔다. 정서가 없는 인간의 논리적 천착도 볼썽사납지만, 틀린 논리를 들이대놓고 결정적으로 감성의 영역으로 후퇴하는(그러나 이는 예술가-열외주의라는 철저히 타산적인 이념에 머문다) 그 소설가도 여러 면에서 흉하다. 오늘, 이광수는 여전히 떠올리고 곱씹어볼 만한 인물이다.  


 

1)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

2) 가령, 가네코 후미코는 ‘친민족/반민족’으로 겨우 세워진 윤리적 잣대로,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3) 이광수, “젊은 조선인의 소원”, <동아일보>, 1928.9월 4~19일자. 인용은 <<전집>> 10, 201~203쪽.

4) <<동광>> 28호(1931년 12월), 1쪽.
5) 香山光郞(이광수), <行者>, <<文學界>>(1941년 3월), 85쪽.
6) 박홍규, <<자유인 루쉰>>, 우물이있는집,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