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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났더니 일이 커졌던 두번째 편지..

연세대학교 자유게시판에도 올렸었다. 거기선 추천수가 3을 넘기가 힘든데, 이 나름의 선전포고에 추천을 눌러준 스물 여섯 분께 감사드린다(알아본 결과 그 스물 여섯 분의 대다수는 운동권이 아니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계셨던 분들이었던 것 같다). 그분들께 또한, 죄송한 마음 전하고 싶다.



방우영 이사장님,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주장] 사학 이사장이자 언론사주인 방우영님께 일개 학생이 드리는 편지
 
    김수민 (lolla) 
 
 
 
안녕하십니까.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방우영 선생님.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 선생님. 저는 연세대 교육학과에 재학 중인 김수민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습니다. 예전엔 구독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열람하거나, 누가 버린 신문을 보거나, 네티즌들이 퍼다 나른 글을 보면서 논조를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제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조선일보를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궁금했던 터라 조선닷컴을 방문했습니다.

"사학법에 무슨 딴 뜻 있기에 이렇게 밀어붙였나." 조선일보는 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사와 학부모, 지역대표들로 구성돼 있지만 운영회의 주도권은 조직화-세력화돼 있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넘어갈 것이 뻔하다"며 전체 교사의 6퍼센트에 불과한 인원이 모인 전교조를 손수 고무·찬양해주셨습니다.

"일부 사학 재단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당국이 엄정한 감사를 통해 적발하고 바로잡으면 된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씀입니다. 참고로 저는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사립학교에 문제가 생기면 사립학교 내부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설립자 나름의 종교적, 교육적 이념을 실현하려고 귀한 재산을 내놓아 세워진" 학교를 당국의 엄정한 감사만으로 유지하고 바로세울 수 있겠습니까? 설립자가 먼저 부패를 일소해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사학 내부의 여러 구성원들이 나서야 하며,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국가나 시민사회가 참견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상문고나 에바다농아학교의 사례를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설의 마지막 부분은 "전교조가 만들어내는 인간형에 기대 앞으로 몇 십 년 더 집권해 보겠다는 정권의 딴 뜻"을 거론합니다. 내친 김에 "다음 주 중 하루를 휴교하고 앞으로 헌법소원, 정권 퇴진 운동, 2006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 학교 폐쇄 등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결정한 한국사학법인연합회의 "딴 뜻"도 짐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는 후속 사설을 위해 친히 홍성대씨가 세운 상산고의 "운동장에" 서셨습니다. 사립학교법의 개정이 돈과 열정을 들여 건립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를 해친다는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신대로 "학교가 정한 기준에 따라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고, 교육과정의 재량 폭이 크고, 등록금은 일반 학교의 3배 이내에서 자율로 정할 수 있는 게 자립형 사립고"입니다. 그 외 예시한 장밋빛 현황과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고 싶지 않군요.

그런데 문제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자립형 사립학교의 진취적 사업에 물을 끼얹었다고 단언하시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면 홍성대씨의 막대한 투자금이 밖으로 샌답니까? 개방형 이사를 두면 하루아침에 자립형 사립고의 자율적 정책이 흔들리기라도 합니까? 자립형 사립고의 확대를 보류하자는 교육부 자문기구의 결정만으로 현존하는 자립형 사립고가 존폐의 기로에 서는 것입니까? 조선일보야말로 합리적 정책의 "다리를 잡아끌"고, 교육의 공공성을 "내리눌러" "공멸의 불평등" 앞에 눈을 감는 작태를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조선일보는 '종교계가 교육에 둔 뜻을 짓밟아버린 사립학교법'이라는 사실에서 사학 비리의 대부분이 족벌경영과 재산싸움이며, 종교계 소속 사학은 해당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그렇다면 족벌경영과 재산싸움으로 얼룩진 사학은 왜 강조하지 않았을까요?).

조선일보가 착각하고 있는 지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조선일보는 종교계가 세운 사학은 가족끼리 '사바사바'하는 사학과 다르다고 착각합니다. '가족'이 문제가 되는 까닭이 단순히 혈연관계로 맺어진 유착과 독점 때문일까요? 문제는 유착과 독점 그 자체입니다. 종교계는 여기서 자유로웠습니까?

지난해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학교에 맞선 학생이 징계를 감수하고 투쟁을 벌이고, 양심적인 목회자는 외로이 그 싸움을 지지했습니다. 그 학교는 종교단체가 세운 학교라서 문제가 없고, 맞서 싸운 학생과 목회자는 건학이념을 몰이해했던 것입니까?

둘째, 사립학교법의 개정은 사학의 부패척결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해 사립학교법의 개정안은 특정 사학은 물론 전체 사학을 겨냥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패의 조건'을 최대한 줄이려는 법안일 뿐, 사학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개방형이사의 비율도 '1/3'에서 '1/4'로 후퇴했습니다.

"전교조의 장악"요? 겨우 추천권이나 행사하는 전교조가 개방형이사를 추대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더라도 겨우 전체 이사의 1/4를 가지고 학교를 장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나머지 3/4의 상당 부분을 꾀어 장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허나 그럴 가능성은 사학설립자의 입장이 3/4만큼 강하게 관철되고 결국에는 개방형이사마저도 사학설립자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낮아 보이는군요.

만에 하나, 전교조의 학교장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교조가 해당 학교에서 큰 지지를 받아 절차적 정의에 따라 이뤄진 일일 겁니다. 저는 아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조선일보의 전교조 찬양·고무는 끊이질 않는군요.

드디어 조선일보는 "학부모에 학교 선택권 되돌려주면 사학비리 해결"된다고 외칩니다. 평준화를 폐지 내지는 완화하라는 말씀이시군요. 평준화를 폐지하여 학교 간 서열이 생기는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서열 구조에 놓인 학생들과 학부모들 가운데 "명문고라도 학교운영이 바람직하지 않으면 진학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영롱이도 웃고 스너피도 웃을 노릇입니다.

저는 이 따위 말장난으로 채워진 신문을 뿌려대는 조선일보의 명예회장님께서 연세대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시는 것을 반대해왔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여러모로 부족한 구석이 있지만, 적어도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에 부역하고, 최소한의 개혁조치에도 반발하는 족벌신문의 우두머리가 재단이사장에 버젓이 앉아도 괜찮은 학교는 아닙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은 2001년에 방우영 선생님의 퇴진을 외쳤습니다. 그 학생들은 운동권의 연합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양심적인 개인으로서 자발적으로 연대하였습니다. 그해 여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세금포탈이 적나라하게 들통 났고,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합동으로 방우영 선생님과 김병관 선생님이 각각 연세대와 고려대의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시라는 취지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작년에 학내의 진보적 학생들이 일제부역행위가 있는 용재 백낙준 선생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리라 예상했지요. 탈정치를 내건 총학생회가 반대해서도, '철거'에 부담을 느끼고 멈칫한 여론 때문도 아닙니다. 얼마 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문제제기를 국학연구회가 받아들여 백낙준의 친일에 관한 심포지엄이 주최되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발제와 반대토론에 학내 교수들 중 아무도 참가하지 않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버티고 계신 한, 이런 현실은 바뀌지 않겠지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사장님의 퇴진을 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퇴진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저에게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사람들도, 그럴 의지도 계획도 없는 듯합니다. 방우영 이사장님께서는 박정희나 전두환보다 더 운이 좋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저 혼자라도 이야기하렵니다. 방우영 이사장님,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사립학교법의 개정에 극렬히 반대하고, 과거사청산의 대의를 매장하는 신문사의 사주가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립학교'의 재단이사장인 것은 분명히 불합리합니다. 더욱이 연세대학교가 무슨 방우영 이사장님의 사재를 대거 털어 만든 '자립형 사립고'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사장님이 그만두시더라도 연세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선일보가 혐오하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까닭을 아십니까?(그들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돌립시다.) 노무현은 사지에 몸을 연거푸 던지며 큰 승부에서 이겼고, 민주노동당은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어렵지만 꾸준히 컸습니다.

남의 특권을 해제하려면, 자기 것부터 걸어야 합니다. 방우영 이사장님이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사원들에게 넘기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우영 이사장님.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십시오. 물러나서 '빨갱이'들과 싸우십시오. 용퇴를 부탁드립니다.

방우영 재단이사장님께
종강을 맞이한 일개 학생 김수민 드림.


2005-12-22 17:15 ⓒ 2007 OhmyNews
 
 


:

대학에 다니던 도중 몇번 공개서한을 썼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일이 커진 적도 두 차례 있었다.
2001년 여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던 시절에 발표한 글.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아일보 독자인 대학교 1학년생입니다.

제가 객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정기구독하는 신문이 없기에, 신문은 인터넷으로 보거나 기숙사나 캠퍼스 내에 널린 신문을 읽고는 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신문은 다른 신문들이었고 동아일보는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내려와서는 아침마다 동아일보를 받아보고 있습니다.

저의 집은 94년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할 당시 동아일보 지국에서 사람이 나와 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던 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때 신문지국이 이삿짐 센터까지 겸하고 있는 줄로 알았었지요.


자유언론의 전통 지켜라?

요즘 들어 동아일보를 펼칠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는 합니다. 그나마 정신 건강에는 좋아서 다행일 듯합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화가 벌컥벌컥 나고는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나라 신문들이 이렇게 유머러스해졌는지 말입니다. 동아일보 사원들뿐 아니라 외부 필자까지도 농담 실력이 향상된 거 같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것이 농담이라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 16일자, 전여옥 씨의 기고는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서 조선, 중앙과 달리 활용할 수 있었던 카드는 70년대의 그 자랑스러운 경력이었습니다. '백지광고 사태'로 일컬어지는, 언론자유를 갈망하는 언론인들과 유신 정권의 대결은 당시 세상에 없었던 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익히 들어 아는 바입니다.

신군부 등장 이후 납작 엎드려 있었던 '쪽 팔리는' 경력도 있었지만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보도나, 박종철 씨 치사사건 특종 등으로 그 전통은 조금씩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통을 동아일보는 새삼스레 되살려, 작금의 사태는 70년대의 언론탄압과 유사하다는 소도 웃을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여옥 씨는 맞장구를 치며 80년대 초 신군부의 언론장악 사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네는 또 몇몇 신문들이 현 상황에서 "납작 엎드렸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처럼 조중동 비대 언론의 공세 앞에서 "납작 엎드리지" 않은 몇몇 신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70년대의 동아일보와 관련하여 주시해야 할 쪽은 현 동아일보가 아니라 동아투위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동아투위 출신 사람들, 그리고 한때 동아일보가 품고 있었던 김중배 현 MBC 사장이나 손석춘 한겨레 미디어 팀장, 전 논설위원이었던 경기대 김재홍 교수를 비롯한 분들은 현재 동아일보가 언론탄압이라 주장하는 언론개혁을 두고, 찬성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론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을 쫓아낸 동아일보가 남의 업적을 도둑질하고 있음에 경악하고 또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아일보가 저지른 조세정의 침해와 신문시장 불공정 행위가 70년대 동아투위 기자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언론자유입니까? 또 왜 지금 동아투위 분들이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하고 있겠습니까? 동아일보는 정상인데 그들이 변절해서입니까?


언론탄압은 어디서 오는가

필력에 걸맞지 않은 신비의 지능지수를 가진 이문열 씨가 지면에 나섰습니다. 이제는 그가 쓴 소설 제목이 <삼국지>인지 <홍위병>인지 얼핏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에 이어 왕년에 재야운동권 출신이라던 김문수 의원은 "시민단체들이 최면에 걸려 있다"며 일갈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만 보고서는 도저히 시민단체들이 도대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정신차려라라는 식의 공허한 외침만 들려올 뿐입니다. 조선,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문은 각자의 논조와 입장이 있는 거지만 각계의 주장을 충분히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의 권리만 목이 터져라 주장하는 터라 의무는 잊은 것입니까?

눈에 띄는 건 <野 "세무조사는 언론탄압">류의 헤드라인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예의상 빅3 언론이 한나라당의 기관지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언론개혁을 외치는 시민단체들이 홍위병이라는 투의 주장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빅3 언론은 계속해서 한나라당의 주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언론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홍위병에 더 가까운 쪽은 빅3언론이 아닙니까?

언론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기껏 기자들이 현장에서 기사를 날라왔더니 그런 식으로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탄압이 이제사 오고 있다구요? 스스로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동아일보를 볼 때마다 버마를 떠올립니다. 버마 민중들의 민주화 운동에 군부독재 정권은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지요. 국제 사회에서는 버마에 대해 경제적 제약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버마 정부는 무어라고 항변할까요? 아마 "버마를 탄압하고 있다!"가 되지 않을까요? 기자들의 60%가 세무조사를 조세정의 확립이라고 보며 거의 대다수가 정간법 개정에 찬성하는 데도 불구하고 유력신문 3사의 의견은 왜 이 모양입니까.


법 질서 불신하는 엄살

언론사 세무조사는 정치적 의도가 강할까요? 물론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치계가 하는 일에서 정치적 의도를 빼면 시체지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권 재창출용일까요? 그럴 겁니다. 정권 재창출을 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가나 정당이 아니라 시민운동일 것입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김정일 답방대비용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현 정부가 노리고 있는 대북정책의 성과는 김정일의 답방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고 언론이 딴지를 걸어버릴 경우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석연찮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세무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정치권 일각의 의도가 시대의 요청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 행위는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당대가 요구하는 바와 일치할수록 그만큼 정당성을 띠게 됩니다.

모든 선행은 아주 순수한 동기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선행으로서 자기를 만족시키려 하는 욕구, 양심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욕구,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얼마간의 대가를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 등이 맞물린다는 것입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정부가 마땅히 시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며 여기에 이익 욕구가 개입되었다고 해서 문제삼을 만한 게 아닙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제도가 현 정권이 급조한 것도 아니며 민주질서를 위반하는 위헌위법적 혹은 초헌초법적 행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로서는 빅3언론의 이런저런 딴지걸기가 건설적 비판과 대안제시가 아니라 물어뜯기이며 빅3언론이 쥐고 있는 과도한 권력이 그 배경이라고 판단했을 법합니다. 그래서 아마 정부의 정책들이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뒤늦게나마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언론개혁을 요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탈법 행위는 그간 면제받아왔고 언론사는 성역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조 말기 세도가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언론이 누리고 있는 과도한 권력이란 그 논조보다는 면제받아왔던 온갖 부정 행위를 뜻합니다.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논조는 시민의 비판을 받고, 언론계의 자율적인 조정 속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불법은 정부만이 단속하고 처벌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세무조사가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이냐'입니다. 추징금이 과하게 매겨졌으며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법부로 달려 가십시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삼권분립을 지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언론탄압이요? 언론 재갈물리기요? 그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아실 겁니다. 날마다 지면을 통해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으면서 탄압받고 있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한국은 절도범뿐 아니라 사형수의 인권도 존중하게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깟 탈세 혐의 포착되었다고 겁 먹은 척하지 마시고 할 말은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명과 발뺌대신 과감한 시인과 진심어린 사과, 소속을 초월한 언론개혁 대의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같이 세무조사를 받고도 건전언론으로 거듭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정말이지 한국의 법 질서를 불신하지 마십시오. 왜 한국의 민주주의를 믿지 못합니까. 비록 완성도는 떨어질지언정 정부의 일방통행으로 언론이 탄압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허풍과 함께, 그런 엄살과 법적합리적 권위에 대한 무시가 보는 눈을 지치게 만듭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오늘자 신문을 통해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김병관 명예회장의 부인인 안경희 씨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무조사가 언론의 목을 죄어온 결과 안경희 씨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이 만연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지난 91년 대학생들이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여 자살을 택했던 잔인한 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에 대해서 안타까움과 불만과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회의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에 대해서는 한치의 동감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시도를 증오합니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으며 죽은 학생들을 잔인하게 묻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굿판은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노태우 정권과 언론권력이 빚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학생들을 죽음에 몰게 했고 그 죽음을 이용하여 한바탕 '굿판'을 벌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 죽음의 굿판이 재현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오늘 7월 16일자 A30면에서 "일생 내조만 하며 살아온 전통적인 한국 여성이 권력과 시대상황이 빚은 거친 세파에 희생양이 된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주변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 거친 세파의 책임에는 동아일보 스스로의 몫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에 불구하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빅3 언론은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굿판인 것입니다.

안경희 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현 정국에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허풍과 엄살은 비판받을 대상이지만 죽음의 이용은 명백한 도의적인 문제입니다. 만일 동아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모든 걸 무마하려 했다"고 떠든다면 동아일보측에서는 분노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무조사가 사람 죽였다"라는 말 역시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짓입니다.


부자유스러운 동아일보에게

저는 동아일보의 부자유스러움이 세무조사 정국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부자유스러움 앞에서, 동아일보에게 가졌던 일말의 기대들을 하나씩 접어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신문을 두 개 보던 96년경, 정리해고(?)를 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저는 하나만 보자는 부모님에게 좀더 개혁적이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동아일보를 택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문 앞에는 동아일보가 계속 배달되었고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99년이었던가요, 박정희 기념관 국고 보조를 반대하는 동아일보 사설을 읽고 뿌듯하고 다행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동아일보가 주는 감동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어느새 "이거 끊어버려야 하는데, 끊어버려야 하는데"를 연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장 나쁜 신문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언론이라고 생각치도 않았던 것입니다.

시민들에게는 자신에게 더 맞으면서도 또 합리적인 논조를 내세우는 신문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일보를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가족들간에 합의가 되지 않아서 동아일보를 끊지 못하고 있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애독자가 아닙니다. 동아일보에게 할 말에는 애정어린 제언이 아니라 분개와 항변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사회면이었던가요, 아주 조그만 기사로 "동아투위 기자들이 70년 광고탄압과 현 언론사 세무조사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항의 성명을 내었다는 소식을 담았습니다. 그 기사를 실으려 했던 분들에게는 칭찬을 보내고 싶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사실보도나마 해주는 분들께 앞으로도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의지와 신념을 잃지 않을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때의 자유언론, 동아일보의 양심회복을 촉구합니다. 세무조사를 역으로 이용한 언론탄압을 중단하고 부자유언론의 멍에를 벗기를 소망합니다.

독자 올림.

덧붙이는 글 | 수신인
동아일보 E-mail 주소 newsroom@donga.com
김학준 사장, 김용정 편집국장
이규민, 김충식, 송문홍, 송영언, 전진우, 황호덕, 민병욱 논설위원
윤영찬, 김정훈, 박성원, 선대인, 윤종구, 송인수, 김삼영, 문철, 이재호, 윤정훈 기자 (정치면을 참고하여 열 분을 기자 수신인으로 정했습니다)

출처 : 부자유언론 <동아일보>에 드리는 글 - 오마이뉴스

:

박노자의 계급관을 비판한다 (2006. 1. 20)

휴지통 | 2009. 2. 5. 02:23 | Posted by 김수민
<유뉴스> 기획위원 시절인 2006년 초 발표됐다. 박노자 교수를 비판한 내 유일한 글이었다. 지금 <우리교육>에 가 있는 김명희 <유뉴스> 상근 기자에게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냐?"고 당시에 물었었다. 그는 "아니. 너 답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지난 번 나는 이 매체의 <일즉다 다즉일>이란 칼럼에서 민주노동당 김창현 전 사무총장의 부적절한 인식을 비판했다. '대중정당을 표방한 국민정당 노선'은 대중정당과 계급정당은 서로 대치되므로 택일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대중정당을 부정한 교조적 계급정당 노선'도 동일한 토대 위에서, 지난 역사로부터 이치를 구하지도 않고, 현실을 세밀히 분석하지도 않는, '초보적 계급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서민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초반부터 철저히 정파간의 싸움으로 점철된 민주노동당 선거를 맞이하여 '다함께'는 1월 14일자 기관지의 내용을 미리 인터넷으로 끌어 올려 박노자 교수가 김인식 정책위의장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했다. 그는 "한국의 영세업자들을 보면 대자본에게는 수탈을 당하는 입장이지만, 예컨대 자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자기 가족들을 초과착취한다든가, 아르바이트생 중 최하층의 노동자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중간적이다"라고 밝혔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한국사회 현실에 관한 박노자의 몰이해 탓에 고개를 저었다. 가내상업에서, 동원한 이들은 기업인이라기보다 중간층 이하 노동자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영세자영업자들에 가깝고, 동원된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대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알바생 착취'도 프렌차이즈업계에서 극명히 드러나는 현상이지 '붕어빵 장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박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 "지금 한국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 중에서 65~70 퍼센트 된다. 이 각계 각층의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간다 해도 이미 시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굳이 그 성격을 훼손시킨다는 것은 극히 올바르지 못한 판단이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가혹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더라도) "착취자이기도 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남성 노동자는 여성을, 어른 노동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짓누르고 있다.

계급은 지배-억압관계의 거대하고 유력한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잣대다. 잣대는 단선적이라서, 성, 민족, 종교, 연령 등의 다른 잣대들과 어울려야 비로소 세계를 해석할 수 있으며 실천의 지렛대로 쓰인다.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것은 곧 여성과 성적 소수자를, 제국주의에 핍박받는 민족들을, 박해에 노출된 이교도들을,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노동계급과 함께 구석에 몰린 농민, 자영업자, 빈민들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자영업자의 양면성은 분석되어야 하나 그들을 내칠 이유는 없다. 만일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삼아 그 입장을 우선시하고 그것만으로도 다수를 대변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면, 박노자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해왔던 민족주의, 구체적으로는 '선민의식'과 '다수결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세계의 진보를 이루는 힘은 노동계급의 전진이 아니라 개개인의 고뇌 어린 결단에서 나온다. 피라미드 질서에서 아랫사람을 부리고 윗사람을 동경할 것인가, 아랫사람의 모습에서 윗사람에게 당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인가. 이를 도외시하는 지식인은 파시즘과 속류 사회주의의 기로에 선, 민중의 이익을 핑계로 제 이익을 기도하는 야심가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사회 구성원들이 고립과 구속과 차별 대신 연대와 자유와 평등을 선택할 여건을 떠받치는 존재여야 한다. 진보정당은 마이너리티의 '정체성들'을 대변함으로써 '계급정당'의 의의를 살리며, 자신들이 끌어안아 중심에 세울 계급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정당'의 구실을 해야 한다.

김창현이 진보적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고 '국민'을 중심에 세우려 고집했다면, 박노자는 '노동계급중심'이라는 늪에 발목이 잡혀 복잡한 구도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이번 민주노동당 선거는 진보진영이 이런 초보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고 또 발전했는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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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와 인문주의

휴지통 | 2008. 12. 23. 12:56 | Posted by 김수민
생태주의 없는 인문주의는 착취자들의 전유물이며, 인문주의 없는 생태주의는 몽상가들의 인질극이다.

(200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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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내 뒷이야기..

휴지통 | 2008. 3. 19. 11:40 | Posted by 김수민

나름대로 3년 정도(2001.9~2002.12, 2006.1.~) 활동이란 걸 하면서 살았지만 나는 남들 눈앞에 좀처럼 튀지 않는 사람이었다. 운동가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고 직업정치에 뜻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며, 내가 할 말만 사람들에게 전파되면 그만이라는 기조 아래서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알고 보니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포레스트 검프처럼 살아왔다고나 할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때 그 현장'도 많다. 그냥 존재감 없이 앉아 있었던 적도 있고, 아주 약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적도 있었다.

진보신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내가 취한 자세에 대해서는 딱히 표현하고 규정할 말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내 깜냥껏 약간은 설치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고, 그만큼 나는 성공적으로 내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부한다. 정작 노회찬, 심상정 탈당 정국 때부터는 내 할 일이 없어졌고, 이건 내 개인적인 후퇴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의 우려와 이탈로 이어지긴 했지만.

작년 민노당 경선에 참여한 것은 실은 재창당 또는 분당을 위함이었다.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평등파 계열 인사들 몇몇이 노회찬을 지지하면서 혁신을 밀어붙이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합의를 한 바가 있다. 물론 평등파 내에서는 소수에 해당하는 의견이었고 그들의 결의는 말그대로 그냥 결의였다. 1. 분당을 각오한 2. 재창당 수준의 3. 혁신 작업. 뭐 이쯤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분들과는 교감한 적 없었지만 평소 지인들에게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경선을 전후로 한 자주파의 마지막 몸부림과 노회찬의 부상을 계기로 새로 가담하기 시작하는 대중들이 맞닥뜨리면, 당내 투쟁에서 자주파를 변두리로 몰거나 제2창당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자주파가 어쩌면 노 의원을 그토록 밟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이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의원회관에서는 "노회찬이 결선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행사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것이 보좌관의 잘못된 전달임을 깨달았다. 동행자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그때 얼마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잠실에 도착하니 이미 행사가 끝났는지 환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는 노 의원이 보였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다들 '조직화'와 '혁신'을 이야기했다. 나는 속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대선 끝나면 당을 떠날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걸 약속하고 다짐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난 안 한다'는 맹세를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인사하러 옆에 앉은 노 의원에게 해준 이야기는 '오아시스보다 큰 강물줄기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함께 있던 학생 당원이 울분에 차 인사불성이 되는 바람에 내게 건배 발언이 돌아왔을 때에도, 나는 "당을 바꾸면 세상이 바꾼다"라는 구호를 제의했다. 노 의원은 적어 가야겠다고 했지만, 동상이몽이었다. "바꾼다"는 것은 혁신하고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의 미필적 고의였고, 멋 모르고 사람들은 좋다고 건배했다. (ㅎㅎ 나의 티저 겸 마술에 걸린 것이다)

그날 자리에 김종철 씨가 위로차 방문을 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심상정 지지자나 그쪽의 민주노총의 모임을 가보면 넥타이 맨 사람도 많고 형편이 괜찮은 사람도 많다. 반면 권영길 후보의 지지자 모임에 가보면 사람들이 참 '못났다'." 진정 가난한 이들을 조직할 줄 아는 엔엘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는 엉뚱한 직감에 빠졌다. '김 선배가 엔엘이랑 아주 잘 어울려서 무슨 통합적 리더쉽 같은 걸 세우려는 게 아니라면, 혹시 분당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때 내 예감이 맞았는지는 나중에 물어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선배님들은 정치 노동자입니다. 당원이 낸 당비와 국민의 혈세로 살아갑니다. 이건 명분을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자주파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면, 당을 나가야 합니다." 민노당의 대선 참패 이후 만들어진 어떤 자리에서 내가 이연재 씨에게 한 말이다. 지금 그는 진보신당 유일의 대구경북 지역 후보이다. 그가 그날 이후 신당 창당에 앞장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선량한 눈빛과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동의해 주었다. 내게 전적으로 동의해줬던 진재필 씨도 노, 심 의원 탈당 이전에 신당건설에 합류했다. 깊이 고민하던 김석준 씨도 그랬다. 분당 논의에 강한 우려를 표하던 정창윤 씨도, 그를 설득하던 이장규 씨도 이젠 모두 함께하게 되었다. 대선 참패 이후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출범에 이르는 약 한달의 시간, 그때만큼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 기억도 드물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자잘한 뒷이야기를 남기며, 우리는 민노당을 떠났고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두어달 뒤 어디에선가 다들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을지, 의미있는 출발에 기뻐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수한 뒷이야기들이 그저 '후일담'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직 민노당이었던 시절인 1월에 열린 평당원 토론회. 나는 발언을 하겠다고 참석했는데,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할 말을 다 해버리는 바람에 그냥 앉아 있었다. 김혜경, 이덕우, 김준수, 윤영상, 조진한 씨 등등이 보인다. 나도 어디엔가 앉아 있다. 출처는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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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경에 관해 (이화여대 교지. 2007년 봄)

휴지통 | 2008. 3. 12. 18:06 | Posted by 김수민
2003년 3월 11일, 춘천으로 가는 입영열차에 올랐던 날이다.
벌써 5년이 지났다.

2007년 봄, 이화여대 교지의 관계자가
내가 경찰로 복무했던 것을 어디선가 슬쩍 본 모양인지
기고를 청탁해 왔다.

아래는 내가 보낸 글이다.




                       방패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진실
                                   
                                                                        김수민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4학년)

들어가기 앞서

나는 2003년 3월 육군으로 입대하여 4월 하순 작전전투경찰순경으로 배치되어 경찰학교에 입교했으며, 2주일의 교육을 거쳐 모 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났다. 내가 소속된 전경대는 시위가 빈번하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 뿐더러 나는 질병 및 부상 등의 이유로 상당 기간동안 전경대 바깥의 일선치안현장-파출소, 순찰지구대에서 근무했다. 따라서 나는 서울 지역 의 기동대나 전경대 등 진압부대에서 근무했던 전의경에 비해 시위진압경력이 미미하고, 경험했던 시위도 상대적으로는 평화적인 편이었다. 독자들은 이것을 유념해주셨으면 한다.

하나 더 밝히자면, 나는 시위와 진압을 동시에 경험해본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지면은 시위대와 전의경이 간접적으로나마 소통하면서, 동시에 ‘나’의 두가지 이력이 서로 대화하는 공간인 셈이다. 기회를 준 이화연대교지편집위원회에 감사한다.

전경이 될 줄이야

대학 1, 2학년이던 2001, 2년에 나는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했다. 그 운동의 문화는 NL(민족해방계열)과 PD(민중민주계열)로 상징되는 전통적 학생운동과 적지 않게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부역하고 오늘날에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해치고 있는 거대신문사를 보이콧하는 운동이니 따지고 보면 급진적이기는커녕 특별히 진보적이지도 않은 소박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실천의 방식에서는 경직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전통적 학생운동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고 때문에 ‘신사회운동’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나는 거리시위에 나선 적이 별로 없다. 학내외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신문을 펴내 돌리거나 조선일보사 부근 서울시의회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지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길거리로 뛰어든 것이 2002년 10월이었다. 당시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중학생을 추모하고 미패권주의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고 있던 차였고, 나도 거의 처음으로 전통적 학생운동계열이 주도하는 시위에 끼어 거리를 누볐었다.

극미(克美 혹은 克米)의 물결은 12월 대통령선거의 무드와 만나 절정에 달했다. 그때 나는 전의경들과 처음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힘겨루기를 했다. 당시 촛불시위에 가담한 인파는 5만을 훌쩍 넘겨 있었고 전의경들은 ‘데모꾼’도 아닌 일반 시민들의 힘마저 당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전경을 뚫고 나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아직 오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0여명의 전경들이 2열종대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피하지 않은 채 촛불을 들고 서 있었고 내 키(180cm)를 상회할 만큼 장신이었던 그들은 나를 가운데에 묻은 채로 지나쳐갔다. 누가 이걸 사진으로 찍으면 괜찮겠군,이라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5개월 후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 나는 강원도 102보충대대로 입대했다. 그곳에서는 “너희들은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는 우스개가 떠돌고 있었다. 나는 나흘이 지나 화천에 위치한 훈련소로 군사기본교육을 받으러 떠나며 내심 철책선 근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소 3주 후 나를 비롯한 240명의 인원 가운데 자그마치 100명씩이나 전경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5주차에 그 대열에 내가 끼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육군 입대자가 전경이 된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경과 의경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전경은 시위를 진압하고, 의경은 교통정리 등을 한다는 따위의 선입견만 퍼진 것 같다. 의경은 ‘의무전투경찰순경’의 줄임말이며 입대를 맞이한 젊은이들이 자진해서 시험을 거쳐 임명되고 일차 임무는 ‘치안업무 보조’이다. 전경은 ‘작전전투경찰순경’의 준말로 행정자치부 경찰청이 국방부 육군 입소자를 차출하면서 ‘만들어’지고 일차 임무는 ‘대간첩작전’이다. 그런데 시대상황이 달라지면서 전경 역시 ‘대간첩작전’보다는 이차 임무인 ‘치안업무 보조’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들을 뭉뚱그려 ‘전의경’이라고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전의경의 근무지는 다양하고, 소속에 따라 업무도 천차만별이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고, 진압부대(전투경찰대, 의경 기동대, 의경 방범순찰대)에서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다. 시위진압은 진압부대의 몫이고, 시위진압의 양적·질적 부담은 의경 부대가 전경대보다 더 많이 진다.

나름대로 편한 군복무를 위해 의경을 지원했다가 기동대로 분류되었든, 육군으로 입대했다가 경찰로 분류되어 전경대에 배치되었든, 제대가 먼 미래인 신병에게는 불운하기 짝이 없는 경우다. 시위진압에 나서는 전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심적 타격부터 우선 헤아려야 한다.

서로를 적이 아니라 말하지만

“뭐? 쫄병도 자기 전에 MP3를 듣는다고?” 작년 초 휴가를 나온 후임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도 후임보다 선임이 많아 군생활이 편해졌다는 말이 선뜻 나오기는 힘든 입장일 터라서 그의 증언이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군대 중에서도 가장 완고하고 무지막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의경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징병제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날 부대의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전경대의 변화가 여느 육군부대를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악습의 기원이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튼튼했기 때문이다.

처음 전투경찰대로 발령나던 날부터 나는 2주일동안 신병으로서 담당 조교가 시키는 대로만 일일이 움직이게 되었는데 반쯤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악습들을 새삼스레 상세히 증언하지는 않겠다.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었던 것 그대로다.

대원들을 옭아매는 악습이 유지되는 힘은 크게 두 군데에서 나온다. 첫째는 “이것이 군대다!”라는 지상명령이다. 육군의 내무생활문화가 바뀌든 말든 전경대는 그 부대만의 독특한 관습이 있으며 그것은 ‘까라면 까는’ 철저한 상명하복이라는 식이다. 물론 전투경찰대설치법이나 경찰 간부들이 (적어도 말로는) 금지하는 바들이 어째서 고참의 권력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문민 통제’의 방법으로서 기강을 잡기 위한 상명하복은 당연히 아니다.

둘째는 “빠지면 뚫린다”는 강박증이다. 편해진 생활은 군기를 흐트러뜨리고, 그것은 시위대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뜻이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효과적인 진압에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의심은 그렇다고 쳐도, 실제로 부대가 시위를 제대로 막지 못할 때 대원들은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상부에게 추궁을 당한 간부들이 대원들을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생활실(전의경 부대는 내무반을 생활실이라고 부른다) 벽에 붙은 행동요령에는 “시위대는 적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무리하게 진압하지 말고, 씨름이나 럭비를 하듯 대처하라”는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무력충돌의 위험과 진압실패 시에 따르는 스트레스에 직면한 전의경들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별 의미가 없다.

시위에 나서는 ‘운동권’도 ‘전의경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고 발언한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경찰이 먼저 공격했다’ 혹은 ‘충돌 양상이 경찰로 인해 더 크게 번졌다’는 주장이 훨씬 더 앞선다. 그러나 폭력은 선후(先後)나 ‘상대적으로 더 큰 책임’을 가려낼 만큼 깔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평화시위를 외치는 것은 국가와 자본에 굴복하는 것이다’라는 견해까지도 나온다. 폭력은 자제되기는커녕 규명되지도 않고 서로의 아집만 강화시키고 있다.

필요 이상의 노출 vs. 쓸데없는 모욕

전시를 대비하는 국방부 소속 장병들과는 달리 전의경의 현장출동은 언제나 실전이다. 그럼에도 시위 현장에서는 쉽게, 빨리 전의경이 목격된다. 살벌한 풍경이다. 근래 들어서는 버스를 이용해 진을 치거나 비상시에 물대포를 쏘는 다양한 전술들이 선을 보이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검문검색을 불사하는 방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일선치안현장에서도 경찰이 지나친 노출을 자제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보 순찰을 도는 이미지로 각인된 런던의 경찰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순찰지구대나 파출소의 근무경관들이 입는 순찰복(얼마 전 디자인이 바뀌면서 이제는 아예 자원봉사대 같은 외양을 하고 있다)과 달리, 척 보기에도 전투태세를 짐작할 수 있는 복장을 착용한 전의경들이 방패와 봉을 들고 진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윤리적 판단을 떠나 전략적으로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위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항의이며, 그 항의는 정서적인 분노와 떼어놓을 수 없다. 구호가 아무리 이성에서 나와도 몸은 감성과 야성을 따르는 법이다. 평화시위를 기획했다고 해도 버스로 행인들과 격리시키고 마치 시비를 걸 듯 전의경을 배치해놓은 꼴을 보면, 시위 참여자도 맞대응의 충동에 휩싸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연히 필요 이상의 노출은 쓸데없는 모욕을 자초한다. 시위현장에서의 내 비애감도, 앞서 밝혔듯 폭력충돌을 비교적 덜 겪은 부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육체적 고달픔보다는 모욕을 받는 기분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막대기 네 개를 달고 있던 고참 시절에 전국공무원노조사태가 있었다. 마침 부대가 있던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파업으로 인한 공무원 해고자가 많았고, 시위는 사뭇 격렬했다. 요즘 들어서 학생시위는 과격한 축에 들지 못한다. 경제적 손실에 의해 노동자나 농민이 거리에 나섰을 때, 그리고 그 투쟁을 전국 규모의 단체나 진보정당이 지원했을 때, 그때가 충돌이 첨예한 시기인데, 전공노사태도 그렇게 확산되었다.

해고사태 직후 해당 지역의 도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제일 활약(?)했던 분이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여성이었는데, 시비를 걸려고 작정하고 나온 듯했다. 그의 입은 내 이해심을 추월해 나갔다. 그는 앞줄에 서 있던 체구가 작은 대원에게 쏘아붙였다. “넌 전경 왜 갔냐?”(순간, “시위대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는 지시가 대열 여기저기로 전파되었다). 그 대원은 나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후임이었고, 어느새 2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집회현장에 동료 대원이 시위대에게 욕을 먹거나 타격을 받으면 마음이 상한다. 그가 설령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고참이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그날 우리가 섰던 곳은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었다. 전진 배치를 하면 할수록, 물러서게 되든 버티고 서 있든- 치욕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은 커지는 것이다. 시위대에게 딱히 이념이 없고 지도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경우라면 도리어 사태는 더 커질 수도 있다. 한번은 정부 방침 때문에 땅값이 떨어진다며 항의하러 나온 아줌마들이 대뜸 벽돌을 던져댄 적도 있었다. (우스새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왕 성내러 나간 김에 전경들의 ‘방패’와 ‘보호장구’를 믿고 화풀이를 한 것이다.

“너무 앞에 세워놓고 시위대의 공분을 유발하자는 거나 뭐냐.” 이따금 휴가를 나와 만나는 후임들도 불만을 토로한다. “왜 먼저 진을 쳐놓고 폭력사태를 유발하는 거냐.” 이것은 시위당사자나 인권단체의 비판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만큼은 전의경과 시위대가 다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내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전의경 제도가 축소되니 폐지되니 말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드디어 정부가 작심을 한 모양이다. 내년부터 20%씩 인원을 줄여나가다가 2012년경에는 완전히 폐지한다는 계획안을 내놓았다.

자질구제한 심부름에서부터 시위현장 투입에 이르는 여러 3D 업무를 맡길 인력을 잃어버리게 될 경찰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엄청난 인력증원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해할 만한 주장을 펴기도 하고, 치안공백이 엄청나게 발생하리라며 과장된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경찰청의 의견이 얼마나 옳은지는 더 검토해봐야 한다. 하지만 전의경을 수단으로 삼은 병정놀이를 반성하는 데 게을렀으면서, 없어진 병정들의 자리를 직업경찰이 채워야 한다는 소식에는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찰청의 모습은 비판받아야만 한다.

더불어, 병정놀이의 가장 윗선에 청와대가 있음을 기억하자. 국정상황실에서 경찰청을 닦달할 때, 일선 대원들에게 미칠 그 여파는 가히 ‘나비효과’를 방불케 할 것이다. 전의경 폐지만을 공고하고 5년동안 진압양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전의경의 적이 될 것이다.

오늘날 전의경 부대의 실상은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내무생활의 혁신은 어려우리라고 사료된다. 이것은 마땅히 일선의 지휘관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부대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의경 부대의 특성상, 윗선에서의 지침이 하달되어 실현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의경 부대에 부임한 경관들은 대부분 전의경 부대를 현장의 외근이나 본서의 내근에서 벗어난 해방구로 인식하는 듯하다. 힘겨운 경찰생활 도중 조금 편한 근무지에 머무르며 자기계발에 열중하는 일을 탓할 수는 없지만, 구타와 가혹행위가 잔존하는 것까지 너그럽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의경 제도가 폐지되어서야 비로소 악습이 사라지는 불상사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

경찰 바깥에도 쓴소리를 던져야겠다. 아마 작년 말쯤에, 내가 제대할 무렵 신병이었던 대원들까지도 군복무를 모두 마쳤을 것이다.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후임들 대다수는 내 전임들이 그랬듯 시위하는 사람과 단체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의경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문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전의경의 수는 4만명에 달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니, 한명 한명의 구체적 현실에 봉사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집단적 행동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걸 새겨두기 바란다. 전의경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더라도, 그 뒤에 남은 것이 뻔뻔하고 무조건적인 자기합리화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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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인

휴지통 | 2008. 2. 23. 22:51 | Posted by 김수민
임종인 의원이 처음 언론에 부각되었을 때는 이해찬과 천정배가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맞붙었을 적이다. 그는 이해찬을 지지하는 유시민에게 개혁파가 그러면 안 된다라고 했고, 예전 법무법인의 동료였던 천정배를 지지했다. 이때 경선이 우스웠던 것은 이해찬보다 천정배가 개혁에 적극적이었지만, 천정배를 후원하는 정동영그룹과 이해찬을 지원하는 재야그룹의 성향은 그 반대였다는 점이다.

나는 당시에는 임종인과 유시민의 대결이 당내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투쟁으로만 여겼는데, 임종인은 그후 나의 예상을 연이어 엎는 행보를 했다. 그는 정동영에게도 김근태에게도 줄서지 않았고 참정연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 국참연에 참여했지만 언필칭 실용주의 행보에 반대하여 금세 탈퇴했다. 이라크파병에서부터 사회경제적 이슈까지 그는 거의 모두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선택을 함께하며 '열린노동당 의원'이 되었다. (그가 2005년 말 이라크파병연장안 투표 당시 정족수 미달을 노리지 않고 반대표를 던졌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정족수가 채워지는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출석하여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 구체적으로 사정을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린다.)
 
나는 임종인 의원이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가 진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정당에 몸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도 옛날일인 것이다. 물론 다수의 당원들이 반발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2008~2012년 대표 야당 교체의 계획을 세우는 과정 속에서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임종인 의원은 진보진영보다는 자신을 일단 지지했던 '개혁층'을 대변하겠다며 신당 참여를 거절하고 있다. 잔머리 굴리기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곁에는 김성호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고, 통합민주당이나 창조한국당과는 서로 껄끄러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천정배 쪽이 작년 한때 따로 민생정치모임을 꾸렸음에도 홀로 걸어간 임종인이다. 다만 현재 임종인 그리고 김성호가 서 있는 포지션으로는 미래를 도모하기 힘들다는 것이 사실이다. 바야흐로 분화와 재편성의 시대가 다가왔다. 임종인을 밀어줄 만한 에너지는 통합민주당과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가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17대 국회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었던 의원 중 한명이다. 아마 더이상은 의회에서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요즘 <대자보>가 그를 '작전주'로 띄우고 있지만 지식인층의 평가를 반영할 뿐 정치인으로서 그의 주가는 올라가고 있지 않으며, 신당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도리어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측면도 있다.

다음은 2005년 홍준표법 파동 당시 내가 써서 <대자보>에 올린 글이다.

:

허경영 인터뷰 1 (2007.5)

휴지통 | 2007. 12. 26. 06:59 | Posted by 김수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를 밀게 되어 있다"
다시 대선에 도전한 열린우리당 허경영 후보 인터뷰 ①
김수민 (lolla)
1997년 대통령선거 군소후보 토론회를 기억하는가? '민주공화당'이라는 익숙한 당명을 내세우고 나타난 한 사나이가 번뜩이는 눈매를 과시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처했다. 그리고 세해가 지나서는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는 저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바로 허경영 민주공화당 전 총재이다.

그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대통령 당선 직후 잠적했다가 백만 인파가 몰린 잠실주경기장에서 취임식을 갖겠다", "암행어사제를 부활하겠다",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를 퇴출시키겠다"는 등의 공약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고 <딴지일보>를 통해 인터넷 언론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를 그해 대선 토론회에서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주창했고 선거 이후에는 사기죄로 구속된 국태민안호국당의 김길수 후보가 관심을 모았다. 허씨와 공화당측은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가 125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가정집에서도 그 책을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그는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왔다. 지난 4월 23일부터 시작된 대선 예비후보 등록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가 있었고, 더구나 현재 당적은 열린우리당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범여권 통합과 단일후보 선출의 레이스에 진입한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많은 네티즌들을 그를 혹시 오픈프라이머리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연세대학교 진보정치 웹진 <오렌誌>(http://club.cyworld.com/orangenews)가 유명 후보의 기세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군소 후보들과의 인터뷰 시리즈를 준비했고, 그 첫번째 순서를 위해 허경영 후보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전화번호는 저서의 뒷면과 인터넷 등지에 공개되어 있었고, 그는 다소의 의구심을 깨고 김세현 기자의 전화를 받았으며 인터뷰도 흔쾌히 수락했다.

▲ 경제공화당 사무실 풍경. 허 후보의 사진과 집무 책상이 보인다.
ⓒ 김세현

김세현 기자와 김수민 편집장은 5월 29일 오후 6시 여의도백화점 9층에 위치한 경제공화당(최근 당명을 개정했다)의 사무실을 찾았다. 소강당으로 쓸 만한 곳을 비롯 무려 세개의 번듯한 사무실을 갖춘 당사에는 50여명의 지지자들이 인터뷰 소식을 듣고 운집해 있었다.

뜻밖의 반응과 상황에 당황한 기자들을 공화당 사무총장과 대변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소강당 한쪽 구석의 병풍 뒤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던 허경영 후보가 모습을 드러냈고, 허 후보와 기자들이 앞쪽에 배석한 채 강연회 비슷한 분위기로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허경영 후보는 시종일관 거침없는 달변을 구사했다. 임기응변의 혐의조차 읽히지 않았다.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달려오는 내용에 기자들은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물질은 소금물 같은 거라서 물질이 발전할수록,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갈증이 심해진다"는 가치관을 드러내면서 20여분이 넘는 답변을 선보였다. 그리고 "나의 중산사상, 무종교, 무국경, 무차별, 이게 세계의 영적 혁명을 이뤄낸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최근에 인터넷으로 퍼진 '아이큐 430'설에 대해서도 사실임을 강조했다(인터뷰에 앞서 만난 한 관계자는 "430이 아니다. 허 총재님 아이큐는 무한대다. 측정을 더 할 수가 없어서 430으로 해둔 것"이라고 말해 기자가 커피를 제대로 마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또 그는 "3불(기여입학, 고교등급, 본고사 금지)제도는 아이큐 100짜리들이나 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현 정세에 관해 허경영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을 후계자로 밀 수밖에 없는 이치를 설명했다. 호남의 맹주인 김 전 대통령은 "경상도인이나 경기도인을 대권 후보로 수입해오게 되어 있다"며 "내가 열린당에 가면, 힘의 균형상 대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대선 주자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는데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이명박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열린우리당 김혁규 후보에 대해서도 "안상영, 남상국과 콤비였으며 약점이 많은데, 자살하기 싫어 열린당에 갔다"며 "산 걸로 만족해야지. 도둑놈들이 국가 경영할 수 있나?"하며 맹비난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을 대놓고 만나버렸기 때문에, 손학규 후보는 얼굴과 목소리가 쥐 같아서, 유시민 의원은 비아냥거리는 듯한 얼굴을 지닌 탓에 대통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성 대통령이 나올 시점이 아니라 한명숙, 박근혜 후보도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그는 "민심과 천심은 다르다"며 "대통령이 된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된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된다는 소문이 났으니 안 된다. 김대중은 허경영을 밀게 되어 있다. 국민들은 꼭 헛다리를 짚는다. 그러나 하늘이 볼 때는, 이명박은 죄인 중에 죄인이다"라고 밝히며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아이큐 430설' 이상으로 엽기적인 '영혼복제(영혼이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는 "내가 그 다음에 내가 영혼복제를 하면 세계의 부자들이 나한테 와서 고개를 팍 숙인다. 영혼복제를 하면 몸은 하나의 소모품이 된다. 언제나 영혼은 있으니 복제하고 이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 그는 한미FTA에 찬성의사를 밝히며 반대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감성적인 집단"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인 중산주의를 해설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수정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거쳐 복지에서 만났지만 망국으로 가는 복지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90%를 중산층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중산주의는 실업수당에 의존하는 복지주의와는 정반대라는 것. 그가 평소에 설파한 바에 따르면 중산주의는 또한 무차별, 무국경, 무종교의 기조를 띠고 있다.

허경영 후보는 '진짜 극우파'로 알려져 있고 혹자에게는 "한국의 장 마리 르펜(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대통령 후보)"이라는 별명까지 선사받았다. 하지만 인터뷰 도중에 그가 발설한 자유주의적 또는 개인주의적인 발언들은 기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는 주요 공약의 하나인 '산삼뉴딜'을 설명하며 "뉴딜정책하면 인플레 생긴다고? 잘못된 말이야. 건설업자한테 돈 주면 안 생기고, 국민한테 주면 생긴다? 노인들한테 주면 생기고, 공무원들한테 주면 안 생긴다?"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 "나는 가정살리기 10대 공약으로 여성들을 파고드는 사람이다. 강한 남자는 자기밖에 모른다. 스펀지와 같이 부드러운 자가 나온다"며 여성성의 시대가 온다는 예견을 남겼다.

성전환수술에 대해서는 "자기 몸을 성전환을 할 의사가 있으면 바꿔주는 게 원칙이다"라고말했다. 재임 도중 서울역에서 노숙자를 보면 해결되기 전까지 청와대에서 잠을 자지 않겠다며 "노숙자 한사람의 무게는 나머지 전 인류의 무게와 같다"는 명언을 남겼다. '아이큐 430'이나 '영혼복제'를 이야기하는 것만 빼면, 허 후보의 인간관이 현재 유력 주자들의 그것보다 결코 열등하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김수민 <오렌誌> 편집장(이하 '편'): 저희가 17대 대선에 대한 인터뷰 첫 번째로 허경영 총재를 모셨다.

허: 고맙다. 연대에서 첫 번째로 (인터뷰 선정을) 했다는 것이 참 고맙다.

편: 요즘 근황은 어떤가.

허: 공화당을 쭉 하다가 작년 7월에 열린우리당에 들어가 대통령후보를 하려고 한다. 열린당이 인기가 있어서 들어갔다면 내가 바보다. 나중에 국민들은 알게 된다. 지난번에 노무현 후보가 떨어진다고 할 때 내가 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지 않은가.

물질은 소금물 같은 거라서 물질이 발전할수록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갈증이 심해진다. 인류가 극한상황에 치닫게 된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영적인 거다. 한반도는 선진국보다 더 영적으로 앞서 있으니까 세계를 미리 내다본다. 한반도는 세계의 콧구멍이야. 우리를 통해 기가 들어가야 미국도 살고 중국도 산다. 코리아가 막히면 다 죽는다.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3차대전, 아마겟돈이다.

한반도에서 등불이 나타난다는 예언이 있다. 한반도에서 깨달은 자가 나온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새로운 정치가 나와야 한다. 우리 한반도는 거대한 용광로다. 용광로에서 만든 새로운 물질이 세계를 구원하게 된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하는 정치제도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자유는 있는데 평등은 없고, 공산주의는 평등은 있고 자유가 없다.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세계에서 나쁜 것 480가지가 있고, 북한에서는 하나도 없다. 거기는 당뇨병도 없고 에이즈도 없다. 남북한은 사상적으로도 대치되어 있고, 종교적으로도 대치되어 있다. 북한에는 헬레니즘의 인간중심사상인 주체사상이 있다. 신 중심의 신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신(을 믿는 것), 그게 북한이다.

근황을 물어보았는데 그의 방대한 철학이 펼쳐졌다. 그리스문화, 기독교문화, 신본주의, 60진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의 아이큐가 430이라고 밝히며 미륵 또는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예언이 자신으로 인해 적중되리라는 신념이 이어졌다. 그는 한달만에 한국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완료하고, 세계를 통일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물질적인 혁명만 해서 실패했다. 지엔피가 올라갈수록 더 쪼달린다. 어느 순간에 가족이 해체될지 모른다. 한치 앞에 대한 보장이 아무것도 없다. 다 거지가 된다. 누구한테 하소연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자기 능력이 부족하면 죽는 거다. 물질이라는 소금물을 계속 잘못 마시고 있다.

헌법에 대통령직무 조항을 보면 이중성이 있다. 국가원수와 행정수반을 겸하는 대통령은 정당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런데 이명박 같은 사람은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가서 다른 후보보다 100배를 더 썼다. 그래서 비서가 고발했다. 비서로서 떨어진 상대방을 보고 자책감을 느낀 거다. 그래서 이명박이가 벌금 700만원 물었다. 징역3년에 해당하는 건데, 그것도 많이 깎은 거지 3000만원 나올 뻔했다. 100만원도 중죄라서 뱃지를 떼는데, 그런 자가 대통령한테 사면을 받아서 시장 선거에 나왔다. 그게 우리나라다. 그런 후보가 대로를 활보하면서 인터넷과 오프라인에서 대통령 후보 1, 2위에 올라가 있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의 물질의 갈증을 풀어줄 사람은 아니다. 영적 혁명을 할 사람인가? 물질혁명은 성공했다. 원시시대 4000천년, 농업이 400년, 공업이 40년, 이동안에 문명이 발전하고 물질이 팽창했다. 이명박 후보 같은 사람이 활보하는 걸 보고 있겠나? 바로 잡겠다.

대통령은 정당에 들어가면 안된다. 국회의원도 그렇다. 대통령되면 정당 없애겠다. 모든 사람이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한다. 예컨대 전국민이 노인수당을 찬성한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발의하면 한나라당이 반대한다. 하지만 한나라당 지지하는 경상도 사람한테 물어보면 찬성한다. 정당이 생겨서 국민들의 직접민주주의를 막게 되어버린 거다. 국회의원은 자기 지역에 가서 “노인수당 찬성하나” 물어보고 찬성하면 국회에서 찬성에 손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 되고 민주주의가 아닌 정당주의가 되고 있다. 정당끼리 경쟁이 붙어서 국민은 중간에 볼모가 돼서 맨날 고생한다. 상대방 당을 죽기살기로 반대하고 있다.

▲ 거침없는 달변을 보여준 허경영 열린우리당 대선 예비후보
ⓒ 김세현


이명박 후보는 서울시장 나올 때 사면받았는데, 사면해준 사람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잡아넣겠다. 우리나라에 원수와 수반을 겸하는 대통령으로서 이명박 후보는 자격이 없다. 인터뷰할 가치도 없다. 학생들도 알아야 한다. 학교 대자보에 올려라. 사면받은 절차를 밝히라고 해라. 한나라당에서 대통령 나갈 수 있는 사람 5명밖에 없다. 열린당에는 열댓명쯤 된다. 벌금 낸 기록 있으면 대통령에 못 나간다.

김세현 기자(이하 '현'): 아까 영적 통일, 영적 혁명을 말씀하셨는데 자세히 말해 달라.

허: 특수한 영 능력자가 아니면 아시아연방 통일이 불가능하다. 내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특수한 몇가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전 세계 대통령이 와서 무릎을 꿇는다.

지금까지 물질시대는 양적인 시대였다. 영적 시대에서는 작아질수록 유리하다. 한반도는 작다. 영국, 일본, 독일, 몽고도 작았다. 그런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 적이 있었다. 작은자들이 바로 21세기를 보편화시킨다. 물질의 양적 전쟁에서 질적 전쟁으로 넘어가는 게 21세기다. 영적인 것으로 세계를 리드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이 쳇바퀴 돌 듯 살아가지만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공허하다. 이럴 때 아무도 없는 네팔이나 인도에 가서 영상수련원에서 6개월동안 지내다 돌아오곤 한다. 영혼적인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자기가 잘 살고 있는지 나중에 가서 헷갈리게 된다. 내가 나중에 보여주면, 전 세계가 놀란다. 나의 중산사상. 무종교, 무국경, 무차별. 이게 세계의 영적 혁명을 이뤄낸다.

무종교는 뭐냐. 예를 들어 불교도가 많은 LG그룹 입사시험에 응시한다. 점수가 같은데, 한명은 불교고 한명은 기독교면, 인사 담당자가 기독교인을 제껴 버린다. 종교 때문에 전쟁도 많이 한다. 신앙은 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 남이 알면 안된다. 개인의 자유, 프라이버시에 어긋나는 거다. 신앙은 있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 예수님, 하나님의 사상을 따르는 것인데도 박씨는 알에서 나왔다, 김알지는 알에서 나왔다, 이렇게 하면서 싸우고 난리다.

1차세계대전이 뭐죠? 제국주의 전쟁이다. 2차대전은 패권전쟁, 3차대전은 핵전쟁이다. 미국이 계속 물량주의로 저렇게 나가면서 한손에는 유엔을 가지고 한손에는 물질을 쥐고 세계를 이끌다가 아마겟돈 전쟁으로 간다. 성경에 보면 세계를 경영할 자가 동방에서 나온다. 내 이름이 ‘경영’이다.

우리 정책에 결혼수당, 출산수당, 노인수당이 있다. 자동차세, 주민세 폐지되고 가정집에 세금고지서는 안 된다. 5만원을 넘으면 그만큼은 내야 한다. 상류층은 세금 낸다. 빌딩 갖고 있는 사람은 내야 한다. 상류층은 의료보험도 많이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산주의다. 주부들은 살판난다. 학생들도 좋아진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등록금이 없다.

3불정책은 없어진다. 대학은 기부입학 허용한다. 등록금이 없어지니까. 두번째. 아인슈타인은 한국 오면 대학 못간다. 수학만 100점이고 다 빵점이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는 전공 공부를 하고 대학갈 때 본고사를 쳐야 한다. 3불은 나라 망하는 정책이다. 중학교까지는 전과목 공부하고, 고등학교 때는 과외할 필요없고 한과목만 공부하면 된다.

대학가면, 여자가 나타난다! 공부를 제대로 못한다 (좌중 웃음). 군대에서 또 오라가라 한다. 대학생이 갑자기 가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학에 가면 70퍼센트 이상이 산란해진다. 고등학교 때가 한창 공부할 수 있는데 그때 헛공부 15과목을 과외비 들입다 들여서 하고 있다.

삼불제도 이런 건 아이큐 100짜리들이 하는 거다. 내가 아이큐 430이다. 서울대 교육심리학과 교수들이 측정한 거다. 100문제를 60분에 푸는 건데, 나는 5분에 풀었다. 박 대통령은 사흘동안 끙끙댔다.(웃음) 아까 여기 계신 분들한테 문제 냈는데 하나도 못 맞췄다.

내가 하나 물어보지. 1에서 10까지 숫자중에 부부한테 맞는 숫자 두 개가 뭐냐?

편: 2랑 3?

현: 2랑 4?

허: 틀렸다. (웃음) 아이큐 테스트 문제를 보니까 한번도 못 본 거더라. 답은 21이다. 두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니까. 그럼, 1에서 10까지 중에 승리랑 관련된 숫자?

편, 현: 승리?

허: 5라 이말이요. ‘오~ 필승 코리아’ (좌중 폭소)

1에서 10까지 숫자 중에 제일 높은 것은? (관중에게) 아이큐 130 넘는 사람이 연대 들어가요.

8이에요. 무한대. (무한대 기호를 바로 세우면 8이 된다. -편집자 주)

아이큐 테스트는 계속됐다. 같은 문양을 다섯 개 써놓고, 한획씩 그어서 한자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답은 '古 石 右 可 司'였다. 이것은 아이큐 테스트라기보다는 사실상 ‘넌센스 퀴즈’였다.

허: 이걸 맞추기가 어려워. 차원이 다른 거다. 2차원은 생각나도 3차원이 생각이 잘 안 난다. 근데 나는 사람들한테 4차원, 5차원 이야기를 하거든? 영적 혁명이 5차원이고, 영혼복제가 4차원이다.

▲ 허경영 인터뷰에 운집한 지지자와 자원봉사자들
ⓒ 김세현


편: 79년 박대통령 사후 민주공화당 깃발을 지켜오시다가 열린우리당 오픈 프라이머리에 참여하시게 됐다. 항간에서는 한나라당에 더 맞는 게 아니냐는 말도 많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리고 민주공화당의 향후 진로는?

허: 민주공화당은 경제공화당으로 재창당했다. 나는 거기 대표가 아니고 이제 열린당에 들어가 있다. 나중에 열린당 이름도 경제공화당으로 바뀔 수 있다. 합당을 시도해서.

내가 열린당에서 노리는 효과가 있다. 열린당이 갖고 있는 비밀이 있어서 들어가 있다. 열린당은 계속 민주당과 합당을 추구할 것이고, 오픈프라이머리를 통해 열린당과 신당, 민주당 등이 하나가 된다. 거대한 한나라당을 이기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 인지상정이다. 지금 합당한다 안한다 하는 건 쇼다.

2002년 대선 때처럼, 2차 3차 오픈프라이머리를 해가면서 합당한다. 지금 대선에서 제일 떨고 있는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씨다. 누가 되느냐에 따라 김대중과 그 아들이 전부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호남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김대중은 교도소로 간다.

편: 호남 사람이?

허: 제2의 김대중이라는 한화갑이 나오면 김대중이 호남에서 희석된다. 신라에서 김유신 말고 다른 사람이 나오면 김유신이 죽어버린다. 연개소문은 끝없이 다른 장수들을 죽였다. 한화갑은 김대중을 죽임으로써 호남의 영웅으로 둔갑할 수 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도 자기 측근을 후계로 내세우지 않는다. 박대통령도 김종필한테 주지 않았다.

허경영 같은 사람이 김대중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는 거다. 김대중은 노무현을 택하지 않았었나? 충청도 사람인 이인제를 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이인제가 전라도 사람이야.

편: 그렇습니까?

허: 이인제 고향이 옛날에 호남 지역이었거든. 오히려 김대중은 경상도 출신에 지지 국회의원 한명(천정재) 뿐인 노무현을 밀어줬다. 김대중은 전라도 국회의원은 허용하지만 호남 대권 후보는 허용 안 한다. 고건을 못 나오게 김대중이 압력을 넣었다. 고건이 전라도에서 뜨면 김대중은 교도소 간다. 고건이 집권해서 일이 잘 안되면 김대중 아들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래서 김대중은 경상도인이나 경기도인을 대권 후보로 수입해오게 되어 있다.

내가 열린당에 가면, 힘의 균형상 대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 내가 진주 사람이고 서울에서 났다. 김해허씨, 김해김씨가 800만명이다. 지금 김대중 만나는 사람은 김대중이 도와주지 않는다. 안 찾아온 사람만 돕는다. 결국 맨날 찾아가는 한화갑, 이인제가 아닌 노무현이를 돕지 않았느냐.
:

사르트르는 자신의 문학 작품 <구토>를 두고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누보로망(신소설)의 선두주자 리카르두는

"<구토>는 아이가 죽어가는 추문을 폭로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고종석은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고 했지만

나는 리카르두가 더 옳다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1학년 시절 우리반에 창길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고 옷차림도 남루했다.


그 아이는 화장실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성기에 난 점 때문이었다.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그를 발견하면

"창길이 고추에 점났대요"를 그렇게도 신나게 불러댔다.


한번은 창길이랑 화장실에서 단 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혼자인 줄 알고 편하게 일을 보려다 흠칫 놀라버린 그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안 놀릴게, 나는."


'창길이가 놀림받는 건 공부와 옷차림 때문이야.

그런데 창길이한테는 죄가 없다.

걔네 부모님한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창길이네 집이 위치한 마을은 학교 부근 '새터'로

이름과는 달리 슬레이트 지붕을 한 집이 대부분이었다.


'창길이네 아버지는 게을로서 돈을 못 벌어오는 사람일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집도 잘살지는 못해서

사원주택에 살지만, 아버지가 새벽에 퇴근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하시는데...

게으를 뿐만 아니라 아주 나쁜 사람일 거야.

애를 저렇게 놔두다니...'




그러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창길이 아버지의 모습을.


덥수룩한 수염만 제외하면 아들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창길이 아버지가 하교하는 창길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지나갔다.


일을 많이 한듯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인사하는 우리에게 오냐,하며 환히 웃었다.


풍경은 스쳐지나갔지만 생각은 길디 길었다.

왜 우리집은 회장 사장 아저씨네만큼 살지 못하고,

창길이네 집은 왜 우리집보다도 더 못사는가.


능력의 차이인가, 정말?




내가 평등과 노동에 관해 본격적이고 꾸준하게 글을 쓰진 않았지만,

글쓴이로서의 나는, 적어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89년에 머물러 있다.

2학년 진학 후에는 이야기도 거의 해보지 않았던

창길이의 아버지는 오늘도 나의 든든한 우군이다.


나는 그러나 만으로 25년을 살아오면서

평등의 길에 초석 하나 깔기는커녕

단 한사람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청소년기 나는 노약자나 어린이를 사고사의 위험에서 구하고

대신 죽거나 다치는 공상에나 의지하고 살았으며,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제 나는 내 스스로의 생명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내 안의 리카르두는 묵묵부답이고

대신 사르트르의 비관적 문학관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제 내 안의 리카르두는 대답해야 한다. 창길이 아버지한테.  

질문하지 않고 묵묵히 웃는 그에게.


대답한다.
사르트르가 옳다. 리카르두는 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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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8.1 <ROCK 팬들이 이명박을 돕는 법>

휴지통 | 2007. 10. 18. 19:10 | Posted by 김수민
2005년 8월 1일

 
록팬들이 '위대한' 이명박시장 돕는 법
[Rock'n'roll Diary] 일류도시 일류시장의 자부심 위해 블랙리스트 작성?
 
김수민
 
지난 주 토요일 오랜만에 ‘MBC 음악캠프’를 보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티비를 등진 자세로 아주 산만하게 시청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김종서와 렉시의 무대였던 터라 인터넷으로 ‘럭스’의 공연 중 ‘카우치’라는 게스트가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우치의 성기 노출에 대해 그리 긴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생방송인지 모르고 그저 신나게 놀았을 뿐이라는 변명은 개념이 없다는 걸 자백한 것이고, X지를 깠으면 이유를 대든지 당당하기라도 하든지 했어야 할 일이다.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욱일승천기를 입고 나와 지상파 방송에서 바지를 벗고 경찰에서는 얼굴을 가린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사람들이다. 짐 모리슨은 자기네 공연에서 성기를 내놓았고, 당당하게 잡혀갔다. 그에 비하면 그들은 신종 '바바리맨'이다.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이 사태는 자연히 음모론을 낳았는데 MBC의 X-파일 폭로로 체면을 구긴 삼성의 보복극이라는 내용이 있다. 소설을 쓴다면 모를까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이니 그런 소리들일랑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의 ‘음모 노출’이 이명박 서울시장의 ‘새로운 음모’를, 그러니까 파쇼적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을 유도해냈다는 점이다. 1일 오전 서울시 간부회의에서 이 시장은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으며 “퇴폐적”인 공연을 하는 팀의 “블랙리스트”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서울시 산하공연에 초청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그는 또 “동남아 2류국가들이 하는 짓”을 서울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1류도시’의 시장임을 은근슬쩍 과시했다.

카우치가 토요일 오후대 지상파 방송에서(더구나 제작진이 인디계열의 음악을 소개하려는 장한 의도로 평론가들의 자문까지 받아 만든 코너에서) 바지를 내린 것은 큰 잘못이다. 방송사는 그러한 행위를 사전에 규제하고 사후에 징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울시도 자기네가 주최하는 공연에서 당연히 그 취지에 맞는 팀들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명박 시장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런데 작업을 구태여 어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려면 뒷조사도 불가피할 텐데 엄청나게 구린 짓거리를 하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것으로 보아, 서울시청은 현재 무지하게 덥거나 아니면 에어콘을 지나치게 틀고 있는 것 같다.
 
더위를 잡수셨거나 혹은 냉방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이명박 시장과 그 일파들은 한국 기독교에 블랙리스트 작성을 위임하시라. 일찍이 이명박 시장은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다. 사실 이 정도는 좀 온건한 편이다. 한국에는 전세계를 미국에게 봉헌한 다음 미국이 세계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교인들이 많이 계신다. 그 분들은 워낙에 부지런하셔서 록그룹들에 대한 조사에도 열심이셨는데, 오지 오스본이나 마릴린 맨슨(이 시장과 얼굴이 닮았다는 일설이 있다)의 퍼포먼스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소녀취향의 팝메틀을 연주하는 본 조비의 대표곡 ‘You Give Love A Bad Name'도 사탄찬양가로 해석하신 전력이 있다. 이명박 시장이 자문을 구하시면, 홍대 부근의 장로들이 클럽가에 총출동하셔서 재빠르게 블랙리스트를 만드실 것이다. 그분들 말씀이 곧 사회적 통념이고, 그분들에 맞서는 자들이 바로 퇴폐의 온상일지니.

하지만 홍대앞 클럽에 서울시청 공무원이나 교인들이 들락거리는 것은 수치스럽고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공은 홍대앞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서울시가 굳이 수고하지 않고도 ‘1류공연’을 꾸릴 수 있는 여건을 락팬들과 밴드들이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모든 홍대 클럽들은 정문에 ‘개와 서울시청 공무원과 교인은 출입금지’ 팻말을 붙이기 바란다. 이것은 위에서 내가 서울시에게 한 충고와 배치되지만, 그래도 나는 공무원들이나 교인들이 각각 행정과 전도에 전념하는 쪽이 옳다고 생각한다. 클럽과 밴드들은 자발적으로 서울시 산하 공연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져 이명박 시장의 시정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크라잉 넛이나 델리 스파이스처럼 쑥쑥 커버린 형님들이 도와주시면 금상첨화다. 

할 일은 더 남아 있다. 제 버릇은 개 못주는 법이다. 박정희가 일본 군인으로 키운 버릇을 못 버리고 최후의 날에도 여자를 끼고 술을 먹다 총 맞아 죽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호프 이 시장께서 대통령이 되시면 블랙리스트는 더욱 풍성해질 확률이 크고, 따라서 서울시청 공무원도 아닌 청와대와 내각이 ‘퇴폐’에 저항하느라 난리를 칠 여지도 커진다. 한나라당원이 시장으로 앉아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큰 부산광역시로서도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참고로 부산시는 해마다 국제락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피곤해지고, 이 시장, 아니 이 대통령께서 과로와 신경과민으로 쓰러져 10.26에 준하는 국가적 혼란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시장의 임기는 내년 6월에 끝난다. 재출마는 없을 것이다. 명심하라. 이 사실은 절대 다행이 아니다. 그분이 서울시장을 관두시는 까닭은 그 이듬해 연말에 쿵짝쿵짝 대통령에 당선되려는 꿈 때문이다. 지금도 통념을 수호하고 퇴폐를 처단하는 과업은 시민사회에서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 정치행정이 거기에 달려드는 것은 중복, 과잉, 비효율이다. 이만하면 매니아와 뮤지션들이 이명박 시장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할지 윤곽이 잡힐 것이다.

이명박 시장에 대한 예우 못지 않게, ‘동남아 2류 국가들이 하는 짓’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그짓이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예컨대 섹스관광 같은 것은 장소는 동남아지만 주인공은 한국인들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동남아 2류 국가’라지만 “지하철 기관사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따위의 발언을 하는 시장이 거기에 몇이나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깟 서울시 산하 공연, 부천판타스틱영화제한테 했듯이 보이콧하면 그만이지만, 이 시장의 입방정을 듣고 올라간 불쾌지수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3년 전 문화예술계에서 떠돌던 “이X창이 되면 우린 다 죽는다”는 풍문이 기억난다. 그래, 죽여라. 너 혼자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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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간첩 떠나다 (2003.2)

휴지통 | 2007. 10. 6. 18:16 | Posted by 김수민

4년 8개월 전, 군 입대를 한달 앞두고 <유뉴스>에 썼던 고별 칼럼이다.




한 선배가 내게 말한다. "넌 전통적 좌파가 되기엔 너무 묽고, 고전적 우파가 되기에는 너무 붉어." 맞는 말이다.

한국 먹물 사회에 갑자기 좌파가 수두룩하다. 강단에서 좌파 이념을 가르치고 일상에서 전형적 우파로 살아가는 살롱 사회주의자들, 실제 위치는 우파이면서 자신의 좌파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얼치기들, 그리고 그와 달리 당당히 진보를 선언하며 불편한 길을 가려는 좌파들까지. 나는 누구에게 좌파 이념을 가르칠 의사도 없고, 내 자리를 굳이 왼쪽으로 보려 착시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좌파와 진보주의가 제시한 경로를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좌파는 방법이 계급혁명이건 의회주의건 궁극적으로 유토피아를 바란다. 반면 나는 유토피아에 반대한다. 포기한 게 아니라 그 유토피아가 실제로 디스토피아일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인류를 어느 이상사회로 갖다놓으려는 노력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사회를 목적으로 이기심과 욕망을 짓누를 때, 디스토피아는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좌파들의 어떤 정책에 내 표를 던질 채비가 되어 있지만, 좌파들에게 거시기획의 완고함이 자칫 인간의 존재를 주마간산격으로 대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우파도 우파 나름이지만, 인류가 배워온 가르침에 대한 수긍이 그들 모두의 특징이다. 우파는 지금껏 확고히 위치를 굳히고 있는 자본주의를 선호하고, 그 자본주의의 방향에 따라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국가의 개입에 따라 시장을 발전시키자는 의견을, 어떤 이들은 정부 참견의 최소화만이 완전한 시장을 보장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나는 전자에 훨씬 기울어 있고, 후자에게는 비판적이며, 또한 시장원리조차 깨닫지 못하는 한국의 사이비 우파들을 적대시한다. 나는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기를, 가능한 소수가 최소한으로 불행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 자본주의의는 개인의 자유와 최소한의 불행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자와 여자와 성적 소수자가, 모든 인종과 민족이, 고루 누리기를 보장하는 데 역부족이다. 화폐와 자본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은 왕과 귀족이 쥐었던 힘을 시민사회로 가져다 놓았으나, 시민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은 빈자일수록 낮다. 나는 그 점을 우파들에게 얘기한다. 나의 우파색은 갑자기 붉은빛을 띤다.

스스로를 '세속도시와 유토피아를 오가는 이중 스파이'라고 밝힌 고종석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나는 묽은 좌파와 붉은 우파를 오가는 '이중간첩'이다. 이 이중 정체성은, 물론 후자의 정체성이 더 강했지만, 날 쉼 없이 번민케 하며 고생시켰다. 끝내 어느 한편으로의 귀의나 전향은 이뤄지지 않았고, 불안한 상태 그대로 글쓰기는 시작되고 이어졌다.

나는 허접쓰레기들로 꽉 채워진 중등교육의 빈 구석을 간신히 찾았다. 글을 읽어 성적을 떨어뜨렸고 글을 읽어 의아한 시선을 받았다. 나중에는 글을 써서 칭찬을 받고 글을 써서 진학 기회를 쥐었다. 정신을 차리니 글을 써서 때때로 고료를 받는 김수민이 보인다. 나는 대학을 1년 반 다녔고, 작년 가을부터는 14년만에 학교로부터의 해방을 누렸다. 나는 계속 썼다. 정치평론도 썼고 음악비평도 썼다. 신문기사를 썼고 정당 학생위 논평을 썼다. 그리고는 또 읽어댔다. 하지만 갈수록 거취는 불명확해졌다.

그래, 억지 부리지 말자. 돌이켜보면 나는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만들고 (미력하게나마) 싸운다'의 주어로서 오로지 스스로 세운 원칙이 건재함을 확인해 왔다. 그 작업의 상당 부분은 '시투아앵의 발걸음'에 빚지고 있다. 학생운동과 밀접한 유뉴스가 학생운동으로부터 독립적이려는 필자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나는 지난해 녹음이 우거질 무렵 출발해서, 올해 첫 겨울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연재를 마감하고 있다. 그동안 시계추는 묽은 좌파와 붉은 우파를 오갔고, 뻐꾸기는 '시투아앵'('부르조아'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시민. 이 낱말의 의미와 어감은 건전한 좌우파라면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의 길을 안내했다.

지난 2년여동안 해왔던 활동을 앞으로 2년여동안 중단한다. 실존의 줄이었던 글에서 손을 떼었으니, 양심을 건사하기가 더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행운아다, 황폐한 곳에서 자신에게 가혹한 자아성찰을 적용하게 되었으니. 내게, 어떤 꼴보수 교수의 미담은 절대적인 선악의 부재를 일러줬고, 어느 좌파 논객의 사기질은 반성만이 진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기꺼이 어려운 시험을 받아들인다. 부디 여러분들도 승리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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