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8개월 전, 군 입대를 한달 앞두고 <유뉴스>에 썼던 고별 칼럼이다.
한 선배가 내게 말한다. "넌 전통적 좌파가 되기엔 너무 묽고, 고전적 우파가 되기에는 너무 붉어." 맞는 말이다.
한국 먹물 사회에 갑자기 좌파가 수두룩하다. 강단에서 좌파 이념을 가르치고 일상에서 전형적 우파로 살아가는 살롱 사회주의자들, 실제 위치는 우파이면서 자신의 좌파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얼치기들, 그리고 그와 달리 당당히 진보를 선언하며 불편한 길을 가려는 좌파들까지. 나는 누구에게 좌파 이념을 가르칠 의사도 없고, 내 자리를 굳이 왼쪽으로 보려 착시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좌파와 진보주의가 제시한 경로를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좌파는 방법이 계급혁명이건 의회주의건 궁극적으로 유토피아를 바란다. 반면 나는 유토피아에 반대한다. 포기한 게 아니라 그 유토피아가 실제로 디스토피아일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인류를 어느 이상사회로 갖다놓으려는 노력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사회를 목적으로 이기심과 욕망을 짓누를 때, 디스토피아는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좌파들의 어떤 정책에 내 표를 던질 채비가 되어 있지만, 좌파들에게 거시기획의 완고함이 자칫 인간의 존재를 주마간산격으로 대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우파도 우파 나름이지만, 인류가 배워온 가르침에 대한 수긍이 그들 모두의 특징이다. 우파는 지금껏 확고히 위치를 굳히고 있는 자본주의를 선호하고, 그 자본주의의 방향에 따라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국가의 개입에 따라 시장을 발전시키자는 의견을, 어떤 이들은 정부 참견의 최소화만이 완전한 시장을 보장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나는 전자에 훨씬 기울어 있고, 후자에게는 비판적이며, 또한 시장원리조차 깨닫지 못하는 한국의 사이비 우파들을 적대시한다. 나는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기를, 가능한 소수가 최소한으로 불행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 자본주의의는 개인의 자유와 최소한의 불행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자와 여자와 성적 소수자가, 모든 인종과 민족이, 고루 누리기를 보장하는 데 역부족이다. 화폐와 자본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은 왕과 귀족이 쥐었던 힘을 시민사회로 가져다 놓았으나, 시민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은 빈자일수록 낮다. 나는 그 점을 우파들에게 얘기한다. 나의 우파색은 갑자기 붉은빛을 띤다.
스스로를 '세속도시와 유토피아를 오가는 이중 스파이'라고 밝힌 고종석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나는 묽은 좌파와 붉은 우파를 오가는 '이중간첩'이다. 이 이중 정체성은, 물론 후자의 정체성이 더 강했지만, 날 쉼 없이 번민케 하며 고생시켰다. 끝내 어느 한편으로의 귀의나 전향은 이뤄지지 않았고, 불안한 상태 그대로 글쓰기는 시작되고 이어졌다.
나는 허접쓰레기들로 꽉 채워진 중등교육의 빈 구석을 간신히 찾았다. 글을 읽어 성적을 떨어뜨렸고 글을 읽어 의아한 시선을 받았다. 나중에는 글을 써서 칭찬을 받고 글을 써서 진학 기회를 쥐었다. 정신을 차리니 글을 써서 때때로 고료를 받는 김수민이 보인다. 나는 대학을 1년 반 다녔고, 작년 가을부터는 14년만에 학교로부터의 해방을 누렸다. 나는 계속 썼다. 정치평론도 썼고 음악비평도 썼다. 신문기사를 썼고 정당 학생위 논평을 썼다. 그리고는 또 읽어댔다. 하지만 갈수록 거취는 불명확해졌다.
그래, 억지 부리지 말자. 돌이켜보면 나는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만들고 (미력하게나마) 싸운다'의 주어로서 오로지 스스로 세운 원칙이 건재함을 확인해 왔다. 그 작업의 상당 부분은 '시투아앵의 발걸음'에 빚지고 있다. 학생운동과 밀접한 유뉴스가 학생운동으로부터 독립적이려는 필자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나는 지난해 녹음이 우거질 무렵 출발해서, 올해 첫 겨울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연재를 마감하고 있다. 그동안 시계추는 묽은 좌파와 붉은 우파를 오갔고, 뻐꾸기는 '시투아앵'('부르조아'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시민. 이 낱말의 의미와 어감은 건전한 좌우파라면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의 길을 안내했다.
지난 2년여동안 해왔던 활동을 앞으로 2년여동안 중단한다. 실존의 줄이었던 글에서 손을 떼었으니, 양심을 건사하기가 더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행운아다, 황폐한 곳에서 자신에게 가혹한 자아성찰을 적용하게 되었으니. 내게, 어떤 꼴보수 교수의 미담은 절대적인 선악의 부재를 일러줬고, 어느 좌파 논객의 사기질은 반성만이 진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기꺼이 어려운 시험을 받아들인다. 부디 여러분들도 승리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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