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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7.17 뾰록 1
  3. 2008.07.16 작품 구상 3
  4. 2008.07.15 적벽대전
  5. 2008.07.11 잔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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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7.07 KJM
  9. 2008.07.06 이한열의 기일 -그리고 정성희와 임용준
  10. 2008.07.05 스님
  11. 2008.07.02 국무회의여, 문제는 금성판이 아니라 뉴라이트판이다
  12. 2008.07.02 열폭계급
 


<Hunger Strike>(단식투쟁) - TEMPLE OF THE DOG

타락한 주둥이에서 빵을 뺏는다면야...
하지만 내 컵은 이미 넘치는데
힘없는 자들을 삼킬 순 없잖아

그러나 그건 식탁에 있어.
불이 요리하고 노예들이 밖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은 아기들을 재배하지

피는 식탁 위를 흐르고 그 입들은 질식한다

하지만 난 굶주리고 말지...
굶주리고 말지



Temple of the dog은 pearl jam의 전신인 mother-love-bone의 멤버들과 soundgarden 멤버들이 주축이 된 프로젝트 그룹으로,마더-러브-본의 보컬이었던 앤드류 우드를 추모하는 음반을 냈다. 이곡의 보컬은 고음부-크리스 코넬(사운드가든), 저음부- 에디 베더(펄 잼)로 분담되어 있다.

앤드류 우드의 사후 마더 러브 본의 데모 테입을 우연히 농구 파트너에게 얻은 에디 베더는 자신의 골방에서 데모 테잎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빙하였다. 이를 들은 멤버들이 감동하면서 주유소 직원, 호텔 웨이터를 전전하며 오후에는 윈드 서핑(미국에선 노동계급의 레저활동)을 저녁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이 청년 노동자가 보컬리스트로 전격 발탁되고야 말았다는, 희한하고 아름다운 뒷이야기를 남겼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두 그룹은 롤라팔루자의 출연진 가운데 하나로, 1990년대 시애틀 그런지씬의 대표적인 밴드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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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록

Free Speech | 2008. 7. 17. 02:15 | Posted by 김수민

1992년 정계에 입문한 이후 16년동안 온갖 잘못을 은폐해 오신 달인, 뾰록 이명박 선생의 레이스가 극에 달하였다.

올해 총선 때 서대문지역의 진보신당 유세차를 몬 아저씨는 나와 처음 만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어제 북한이 미사일 쏜 거? 거, 이명박이가 북한에 전화 때린 거 아녀, 시방?"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정치외교학 아닌 외교정치학이다. 금강산과 독도에서 연달아 일이 터질 때, 사람들은 전광석화의 속도로 이명박을 체크하게 된다.

드디어 나왔다. 초당적 협력. 거기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이명박 이 인간은 속을 다 까뒤집어 보여준다. 분열은 일본과 북한이 바라는 바다? 아니 그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 총으로 쏘고 일본이 교과서에 장난칠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광우병, 촛불시위에 때맞춰 잭팟을 터트렸다는 건가? 우끼고 자빠졌네.

국무회의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를 의결했단다. PD수첩은 사과명령을 받았다. 너무나 전형적인, 후지고 낡은 수법이다. 얌마, 다 뾰록났어.

이쯤에서 중간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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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구상

Free Speech | 2008. 7. 16. 00:57 | Posted by 김수민

몇년간 습작을 쓰지 못했다. 내 전경대 경험을 다룬 <독사의 낙원>이라는 작품을 구상했지만, 단편을 쓰기 전에는 장편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스스로 지키다 이 모양이 됐다. 떠오르는 족족 소재가 장편감이라, 단편 못 쓰는 놈이 장편쓴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기나 하면서. 거의 6개월에 하나꼴로 소재를 만들었고, 이번 여름부터는 작품으로 착실하게 옮겨야겠다.

하나는 허경영과의 인터뷰 그리고 '아는 형이 아는 선배'의 사연을 버무릴 작정이다(아차, '아는 형'에게 허락을 받는다(기보다는 상의를 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허경영에서 딴 인물의 이름은 '황건영'으로 처리되는데, 눈치가 빠르다면 어디서 유래된 이름인지 알 것 같다. 또다른 하나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경험담은 안 들어간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95%는 구라가 될 전망이다. 아마 두번째 스토리가 먼저 나올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희곡을 쓰려고 한다. 하워드 진이 쓴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리메이크할 예정이다. 원작으로 공연을 했다가는 마르크스 역할을 맡은 배우의 머리가 터질 수도 있다. 모노드라마기 때문이다. 이걸 한국을 배경으로 해서 여러 배우가 등장하게끔 바꿀 생각이다. 예전부터 문화혁명에 관한, 웃기는 짬뽕 같은 연극도 하나 구상하고 있는데, 이건 아마 머리가 반백쯤 되어서나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습작을 쓰다 보면 꼭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이 있다. 조세희, 고종석, 박민규다. 조세희를 떠올린다는 것은 거의 망상에 가깝다. <난쏘공>의 문체는 공원에 잠시 앉아 검열자들을 겁내며 쓰지 않고는 나오기 힘들다. 고종석은 사람들의 예상보다 소설을 잘 쓴다. 나는 그의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즐겁게 읽는다. 김병익이 평한대로 고종석의 작품이 '사소설'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결국 사변보다는 서사가 더 돋보이는 게 고종석의 소설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를 보고 있자면 흥미롭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다. 박민규 소설은 punk다. 그를 읽은 사람들 상당수는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 소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내가 느낀 박민규는 조금 다르다. 그의 펑크는 섹스 피스톨즈나 레이먼즈의 펑크와는 다르다. 시골 할아버지들이 통기타로 띵가띵가 치는 델타 블루스를 어깨 너머로 배운 다음에 그 취향으로 바로 도시에 상경한 채 급하게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다고나 할까?

그 셋의 이름은 어떤 의지도 욕망도 없이 그저 눈앞에 기웃거린다. 요즘 들어 가끔씩 조두진이나 백가흠이 떠오를락 말락...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고, 참고하거나 훔칠 만한 작품도 없다. 다 쓰고 나도 어디 공개할 곳도 없고... 탈고와 동시에 축문처럼 태워버릴까나?

2003년 10월에 썼던 습작은 눈에 띄지 않는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파출소 옆 문방구에서 산 노트에 육필로 써내려갔다. 10대 시절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썼지만, 나중엔 내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 학교에서의 활극을 시눕소스로 쓴 적도 있었다. 앞으로도 나의 10대, 달리 말해 1990년대는 마르지 않는 먹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1990년대'를 소재로 한 연작소설도 기획하는 중이다. 그 첫번째는 '최불암 시리즈'의 배후를 밝히는 놀라운 음모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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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Free Speech | 2008. 7. 15. 12:57 | Posted by 김수민

영화 <적벽대전>을 봤다. 유비, 조조는 뻔하고 단순하게 나오는 반면, 주유, 제갈량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주유(양조위 분)야 '미주랑(잘생긴 주 도련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람이니 어쩌면 새로운 인물해석은 아닐 수도 있겠다. 금성무가 연기한 제갈량이 좀 특이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만화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캐릭터인데 그러면서도 저게 제갈량의 본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였다.

적벽대전은 '합종'과 함께 동맹의 한 교과서로 꼽히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하삼분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도 중도개혁과 수구보수에 맞서기 위한 천하삼분계가 절실하고, 그래서 적벽대전이 시사하는 바도 그리 가볍지 않다. (근데, 정말?)

처음 진보진영은 '형주'는 건너뛰고 '촉나라'부터 선택했다. 촉은 조직노동자(그리고 농민운동, 통일운동)였던 셈인데, 나중에 "이 산이 아닌가벼~ 여기는 남만인가벼~"하는 신세가 됐다. 요즘말로 옮기면 집권전략이 엉망이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진보진영은 당시의 유비측처럼 군력과 영토가 턱 없이 모자란다. 그럼 정녕 오나라의 힘을 빌려서 위나라에 맞서야 하나? 오나라는 누구지? 민주당? 손권, 주유, 노숙은 추미애, 천정배인가? 주화파들은 손학규 부류? 글쎄글쎄글쎄올시다. 천하삼분계가 맞긴 맞는 건가? 결국엔 사마씨가 먹는 게임이지 않나? 박근혜가 사마씨인가? 어휴, 이 물음표들을 봐라..

내 나름대로의 답이 있기는 한데 나는 공명이 아니지 않은가. 잘하면 간옹(간웅 말고 간옹)쯤 되려나? (자기가 공명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많다) 고전에 몰입하면 어디 쓸만한 데도 없을 생각이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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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Free Speech | 2008. 7. 11. 14:44 | Posted by 김수민

생일 모임을 가져본지도 오래되었다. 작년 생일 겪은 언짢은 일이 기억난다. 그날 난 모처에 첫 출근(?)을 해서 모처럼만의 격무와 옆자리 동료 때문에 짜증이 났던 차였다. 그럼에도 6시가 되어 부푼 마음을 안고 퇴근했는데 그만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강변에 가자고까지 했던 잉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파토내 버린 것이다. (재작년 생일에도 약간은 별스러운 일을 경험했다.)

이번에 나는 세사람을 초청해 정겹게 놀기로 했다. 당분간 힘든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은 뒤로 미루고, 서울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부터 불렀다. 고마운 사람이 어찌 셋뿐이랴. 다만 인원과 참석자간의 면식을 고려해 세명을 뽑았다. 자주 만나지 못하여도 또는 핏대올려 싸워도 나는 결코 당신들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는 수줍고 조용한 고백이기도 했다.  

과 선배 L. 그와의 학연은 깊지 않다. 내가 입학한 직후 그는 학교를 떠나며 학사장교로 임관했다. 나는 01학번이고, 그는 2000년도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다. 새내기 때의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면서도, 처음 예상대로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마음 속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는 했다. L형에 대해서도 얼마간 그랬다. 이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이듬해 친구의 전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글을 두고 악평했다는 내용이었다. 뿐더러 내가 새내기 시절 썼던 글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고도 했단다. 그무렵 나는 일부 독자들의 공격적인 평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그만큼 나는 원래 L형과 별로 친화적이지 않았고, 그저 '아 형은 이러저러하니까 내 글이 당연히 고깝게 보이겠지..'하는 심정이었다.  

그와 가까워진 것은 내가 군복무 중간중간에 휴가를 나오면서부터였다. 술자리에서, 또 인터넷게시판에서 의견을 주고 받고 또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지워놓은 틀에 L형은 없었다. 그가 변한 점도 있겠지만 내가 만든 틀은 애초부터 정확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에 그가 동의를 표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놀랐다. 내가 복학하던 당시 L형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당시 투쟁 중이었다. 민족해방투쟁, 노동해방투쟁이 아닌 제 삶의 영역에서의 투쟁. 그 원동력은 선의라기보다는 회의였고, 그는 언제 어디서나 비판하고 성찰하기를 멈추지 않는 듯하였다. 그가 운영하는 개인클럽 이름처럼 그는 '고독한 싸움꾼'이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싸움꾼. 나중에 알았지만 L형은 특정 정파에서 학생운동을 할 적에도 내부에서 철저한 소수자이고 소신파였던 모양이다. 진영 논리에 찌든 세태에 염증을 느끼던 나는 그의 외로운 싸움과 비판에 몰래 환호하였고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사실 그는 한때 불치병을 앓았고, 내 입대 전후즈음에는 병원에서 생활했다. 난 앞으로 그를 볼 수 없을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한 일자가 내 생일과 겹치거나 내 생일의 언저리에 있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잠시 기자로 활동하였던 L형은 이제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또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잘되었으면 좋겠다.

동료 U. 같은 학교 04학번이다. 복학하고 나서 뜻맞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2005년 가을경 그를 만나게 됐다. 그는 채플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응원하는 자는 있어도 따르는 이는 없는 고독한 운동이었다. 그와 만나고 2주일 또는 한달쯤 지나서였나, 나도 채플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꽤 많은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 부분은 비밀에 부쳐졌었다. 학내에서 학술네트워크를 만든다거나 채플 자율화 캠페인을 함께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움직임에 속했다. 우리는 사실, 지금에야 털어놓지만, 소위 NL도 PD도 아닌 진보적 학생들을 규합하는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학생회 선거까지 나서기로 하면서. 정작 후보로 내세울 적임자가 없고 역량과 자원이 달려 포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나는 집 화장실에서 학생회 구조개편안을 불태웠다). 그후로는 조금 떨어져 움직였다. U는 언론출판협의회라는, 실체는 분명하지만 잘 돌아가지 않는 기구를 맡으면서 바쁜 동시에 속이 썩어나갔다. 내가 그해 총학생회 선거를 보이콧하자는 대자보를 중앙도서관 앞에 걸었을 때도 그는 함께하지 못했다. 총학생회 선거 토론회를 관장하는 위치에서 중립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리하여 내 이름 하나만 대자보 명의에 걸리게 됐다.

우리 둘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한 지인은 "두사람은 (학교) 바깥에 나가면 좀 각광을 받지만 안에만 들어오면..."이라고 한마디한 바 있다. 아마 그게 얼마 되지도 않는 역량을 축내면서도 우리 둘이 가까워진 이유일지 모르겠다. 새로 등장할 세대에 희망을 걸어야 할 만치 사유가 맞는 동료 학생을 잘 찾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객기'는 있어도 극악단순한 사고방식을 급진주의라는 미명으로 드러내는 버릇이 없었다. 그는 실무에서나 공부에서나 노력파였고 실력파이다. 다만 비위 맞춰주지 않는 말버릇이나 현장이나 집회에 참여해 얼굴을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 그를 격하시킨 요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가 변치 않고, 또 끊임없이 변하면서, 제 진가를 인정받게 되길 바란다.

몇달 전 나는 그에게 채플 출석을 권유하였다. 그는 수용했다. 나도 곧 뒤따라가 들어갈 작정이다. 우리는 이 열패감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것을 뒤늦게라도 바꿀 것이다.

K형. 나보다 두살 위고 학교는 다르다. 7년 전에 같은 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그는 동음이의어 활용 같은 썰렁개그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첫 만남은 좀 곤혹스러웠다. 또 무지막지하게 잘 외우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박람강기가 돋보였다. 움직임도 참으로 왕성하여 그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그런 덕택에 어떤 이들은 그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특히 일하지 않고 말만 많은, 밥상 펴면 나타났다 설거지하면 사라지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랬다. 물론 그의 습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던 시기 그는 툭하면 하루에도 몇번씩 동료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대기도 했다니. K형은, 예전보다는 꽤 나아졌지만, 완급 조절이나 분위기 파악이 좀 서툴다. 몇달전 나는 그에게 "어떤 화제나 이슈를 급하게 들이대듯 꺼내서 상대방이 흥미가 떨어지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6년 전 내 인간관계가 좁아지면서 그와 더 가까워졌다. 불행 중 다행인 셈이다. 입대하던 나를 배웅하러 온 사람이 두명이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고 다른 하나가 그였다. 내가 복무하는 동안, 그는 무려 12학기만에 학부(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과학사 협동과정)에 들어갔다. 석사과정을 4학기만에 산뜻하게 매듭지은 걸 보아하니, 이제 공부는 그에게 천업이 된 듯하다. 그의 졸업논문은 <식민지시기 조선인 생물학자 성장의 맥락>으로, 조복성이라는 곤충학자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지금은 전공을 약간 틀어 STS(과학기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방송통신기술이 주요 관심사인데, 이 분야에서 그가 일가를 이루는 모습을 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가 공부하는동안 시민사회운동이 입은 손실은 적지 않다,고 난 감히 장담한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우리 또래에서는 단병호급, 박원순급, 최민희급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데다가 손발도 그만큼 빠르다. 그런 그가 활동가의 길을 당분간 접고 연구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나는 그의 선택이 언젠가 거대한 이득으로 사회에 돌아오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때까지 나와 그는 또 숱하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그는 자주 내가 언성을 높여 싸우는 맞상대가 되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싸워야 친해지는 법이다.

어젯밤 나는 L, U, K에게 참치회를 거나하게 풀었다. 사장님이 '빨갱이'인 어느 술집에 들렀다가 자리를 옮겨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칭따오를 마시고 양고기를 먹었다. 다음에 들른 막걸리집에서 K는 뺑끼를 쓰다가 내일 출국(볼티모어의 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란다)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떴다. L형은 예전처럼 "또 언제 보냐.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탔다(그래도 생각보다는 자주 그를 만났던 편이다). U는 우리집에서 한잔 더 하고 같이 곯아떨어졌다. 그의 비밀을 하나 듣기도 하면서. 심포지움은 흔히 '향연'으로 번역되지만, 연세대 철학과에 있었던 어떤 교수는 죽어라 '잔치'라고 옮겼다. 심포지움. 잔치라. 이들과 내년에도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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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검색

Free Speech | 2008. 7. 9. 21:30 | Posted by 김수민

"불응하시겠다구요? 차, 옆으로 대시죠." 부대에서 강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탓에 난 물렁한 고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옆에 있던 3개월 후임 대원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을 감추는 기색이다(나보다 오래 부대에 있었던 그는 진압훈련에는 능한 반면 치안보조업무에는 서툴렀다. 부대 복귀 전까지 끝내 검문에서 한건도 올리지 못했다). 차가 갓길로 가는 동안 나는 후임을 지나치며 보란 듯 중얼거렸다. "씹새끼... 한번 해보자 이거지?" 톨게이트에서 근무할 때 일어난 일이다.

순찰지구대 근무할 적에도 검문소나 순찰 지역 내 거점에서 곧잘 검문검색을 했었다. 검문검색의 목표는 무면허 운전자를 적발하고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 것이다. 실제로 무면허운전자와 기소중지자는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성과도 짭짤했다. A수배, B수배, C통보, 이렇게 등급별 건수를 따져 보너스가 지급되기도 했으니.

검문검색은 음주단속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생각보다는 순순히 응하는 시민들이 많지만 논에 나는 피처럼 이따금 짜증을 내거나 반항하는 이들도 많았다. 차를 댄 그는 면허증이 없다면서 버텼고, 처음부터 그랬듯 연신 반말을 찍찍 내뱉었다. 나는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주민등록번호를 무전으로 쳐 실내 근무 중인 대원이 검색을 하면 운전자 이름, 면허 여부, 지문번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문번호는 아홉가지로 분류되는데, 세가지로 나눌 줄만 알아도 검사하기에 지장이 없다. 손가락은 열개나 되니까.  
 
"어이, 뉴스에 보니까 서울에는 지문만 대면 다 나오는 기계 나왔던데?"
"여기는 강원도구요. 주민번호 불러주십시오. 지문 대조해보겠습니다."
"안한다면?"

부근 파출소로 넘기겠다는 말에 그는 멈칫하고, 동석한 친구가 심통 그만부리고 응하자고 한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야 그는 주민등록번호를 불었다. "경찰법 3조와 전투경찰대법 200조에 의거하여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근거 법조항까지 붙이는 내 앞에서 그가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근거 법조항은 경찰관이 검문을 할 수 있는 받침대일 뿐, 시민이 반드시 검문에 응해야 하는 강제성을 띤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은 나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생사람 잡는 일상적 검문검색은 없어져야 한다. 더구나 검문검색의 스트레스는 검문소, 톨게이트, 파출소 등에서 근무하는 전의경들이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 대원들을 그만 부려 먹어라. 시민들을 그만 성가시게 해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 차량을 상대로 수배 및 도난여부를 체크할 수 있는 휴대용 조회기.
HDT라고 부른다. Hand Data Terminal. 군생활 내내 나와 함께하였다.
가죽장갑을 끼고도 나는 후임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저 기계를 다루었다.
밤에 슉 지나가는 차량의 번호판까지 포착하여 조회할 때면 경찰직원들조차 놀라곤 했다.
그것은 나의 얼마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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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ÖTLEY CRÜE <Saints of Los Angeles>

Listen to the 무직 | 2008. 7. 9. 08:34 | Posted by 김수민
기나긴 활동(또는 여기 더해 오랜 공백)과 스타일의 일관된 고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가슴 설레는 명작을 내놓았다, 라고 한다면 단연코 그는 거장일 것이다.

LA메틀? 지금은 2008년인데....
거장, 머틀리 크루다.
(이 잉간들, 괜히 영어 이름을 -이 포스트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독일어식으로 표기해서 자판으로 치기가 힘들다.)

발매 첫주만에 빌보드 앨범차트 4위!


Saints of Los Ang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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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M

Free Speech | 2008. 7. 7. 06:16 | Posted by 김수민

서울에서 더는 못 버티겠다는 절망감과 5월 고향에서의 즐거운 추억 사이로 친구들 생각이 부쩍 난다. 5월 3일 KJM이란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래위 하얀 턱시도를 입은 녀석의 모습이 좀 웃겼다. 그날 난 같이 하객으로 갔던 다른 두 친구와 구미로 돌아와 즐겁게 놀았다. 한넘은 통영의 조선 회사에 취직했고, 다른 한넘은 나처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양복쟁이 셋이서 커피숍에 들러 타지에서 겪은 설움이나 짜증스러운 기억,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자신의 전공 공부 등을 이야기했다. 넥타이를 좀 풀고 술 한잔하며 만화 <20세기 소년>을 이야기하고, 노래방에선 넥타이를 대가리에 두르고 T-Rex의 <20th Century Boys>를 불렀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지만 참으로 그리운 날이었다. 각자의 사정 탓에 후일을 기약하기도 벅차다.  

그날 짤막한 대화만을 나눠야 했던 KJM은 요즘 평택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하는 중이다. 나는 그에게 이미 서너해 전에 말해두었다. "넌, 지금 사귀는 여자랑 계속 사귀다가 스물 여섯이나 일곱쯤에 그대로 서로 코 꿰여 결혼할 거다, ㅋㅋ." 근래 들어 아무래도 육교 밑에 자리를 까는 게 낫겠단 소릴 듣기는 하지만, 이런 내 예견은 그저 감에서 나온 건 아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매우 유순하면서, 끝끝내 놓지 않는 고집통이 있다(내가 서울에서 만난 상당수의 인간들과는 완벽히 대조적이다). 고집통의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크기와 단단함이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KJM은 우리 중에선 고집통이 제일 작은 것 같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단단하다. 고집통이 작으면 고집이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한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 친구는, 한마디로, 순응적이다. 나는 그가 자기 부모에게 대든다거나 자기 상관이나 선배에게 개기는 모습을 잘 상상할 수 없다. 물론, 갑자기 못 참겠다는 식으로 나올 수는 있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 그가 참다참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던 적이 두번 있다. 당황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엉뚱하여, 하얀 턱시도를 입은 모습만큼이나 귀엽게 웃겼었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하고 재수를 해서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경로와 운으로 전교생 중 가장 먼저 대학에 합격한 나로서는 스무살 한해동안은 그에게 차마 연락할 엄두를 못냈고, 합격소식이 들릴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KJM의 해사 입성에 관해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도 좀 있었다. 그가 워낙 순해서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어울린다고 못 박았다. 관료제나 상명하복에서도 적응을 잘 할 사람. 내 친구라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KJM이 한번의 연애(ㅎㅎ정말일까? 내 알기론 맞다) 끝에 일찍 결혼하리라는 내 예감에는 특별한 근거가 필요 없었다. 그는 '딴 생각'을 잘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딴 생각'이 회의나 고민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그는 무성찰의 인간이 아니니까. 그 '딴 생각'이란 잡념이다. 지고지선이라는 게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고 그 반대인 경우가 외려 더 많지만, 어쨌든 그는 지고지선한 인간이다. 그는 별 탈 없이 졸업하여 임관했고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취업했다. 당연하지, 군대를 따로 가지 않아도 되고 졸업 후에 취업이 보장되는 대학엘 다녔으니까.

나와는 참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간이다. 내겐 회의가 많고, 잡념은 그 이상으로 많다. 나는 그의 대척점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십년지기인데도 말이다. 십년지기라. 그 친구와 트고 지낸지 꼭 10년이 됐다. 그와 나는 둘이서 <하드락 카페>, <난타> 등을 보러 구미예술회관을 들락거렸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해변가에 놀러가기도 하고, 그를 비롯해 다섯명의 친구들이 모여 어느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을 빌려 밤새 백일주를 마시기도 했다. 백일주를 마실 때 그가 낙방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해변가에 놀러갔을 때 그가 해군 장교가 될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함께 객석에 앉아 있을 때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손쌀같이 흐를지도 몰랐다.

근무지를 옮기면서 신혼집을 목포에 차린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갔는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식 이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2년 전임을 고려하면 얼굴을 다시 볼 날이 언젤지 장담할 수가 없다. 전화나 한통 때려야겠다. 그러면 대척점에 서 있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는 쑥 기어들어가겠지? 야 근데, 학생이 축의금으로 5만원이나 냈는데 구미서 만날 일 있으면 비싸고 맛난 것 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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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의 기일 -그리고 정성희와 임용준

史의 찬미 | 2008. 7. 6. 07:24 | Posted by 김수민
매년 6월 9일 추모제를 열지만 이한열 열사의 기일은 7월 5일이다. 우연하게도 어제 그의 기일을 맞이하여 사상 두번째 규모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추모제 일자는 6.10항쟁기념을 염두에 둔 일정이겠지만, 나는 앞으로 될 수 있으면 7월 5일로 무게를 옮겨 실었으면 좋겠다. 해마다 학교 도서관에 걸리는 피흘리는 그림도, 생전의 해맑던 고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이한열 님 외에 연세대가 학교-전학생 차원에서 기리는 열사로 노수석 님이 있다. 그러나 연대에는 기려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열사가 두 분 더 계신다. 둘 다 녹화사업 와중에서 의문사를 당한 분들이다. 열사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추모제가 열리지 않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하 yolsa.org에서 퍼옴.

 
  정성희  
  (1961년~1982년)   당시 20세 학생열사
 
1962년 1월 출생
1981년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1981년 11월 25일 시위관련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음
1982년 11월 28일 강제징집됨
1982년 1월 4일 자대배치, 이후 학원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옴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동지는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하고 노래를 선창하였다는 이유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된 뒤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리고, ’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강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동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달려간 가족들은 병참모부에서 빈소를 보게 됐다. 군 당국에서는 사고 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현지답사는 불가능하다며, 가족들에게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 사인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81년 흥사단아카데미와 학내에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다 11월 25일 학내시위에서 연행돼 동료 14명과 함께 강제로 입영됐다. 부대생활 중 지휘계통과 보안부대의 관찰, 면담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사망하기 전 입대동기가 사신관계로 보안사령부에 구속됐고, 학교 선배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오인되어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동지와 학교동료들을 언급, 경찰과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또한, 동료들에게 죽음을 예시했고, 전방실습생에게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과 장영자 사건에 대해 물었다. 군 동료들과 소대장, 중대장, 보안부대 병사 등은 휴가 전후 동지가 보안부대에 호출되어 갔다고 하나 보안부대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임용준  
  (1962년~1984년)   당시 22세 학생열사
 
1962년 4월 21일 출생
1981년 연세대 심리학과 입학
연세방송국 기자 활동
1981년 11월 교내시위 때 연행, 훈방
1984년 4월 18일 군 입대
1984년 11월 2일 오후 5시 45분경 소총으로 목부위 관통,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81년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하여 연세방송국의 취재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81년 11월 교내시위 때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훈방된 후, 경찰의 특별 관리대상과 순화대상자로 선정되어 경찰에 의해 집중 관리되었다. 그리고 ’84년 4월 18일 가족과 기관원들의 종용에 의해 휴학원을 제출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 후 11월 2일 오후 5시경 M16 소총에 의해 총탄 한 발이 목 부위에 관통하여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음 이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동지가 경찰에 의해 집중 관리되었고, 기관원들의 종용에 의해 거의 강제 입영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군 입대 이후 동지가 체격이 왜소하고 체력이 떨어져 거의 매일 고참병들에 의해 상습적인 구타와 가혹행위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기무사의 자료 비협조 등으로 사건의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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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Free Speech | 2008. 7. 5. 11:24 | Posted by 김수민
스님들이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매우 도가 낮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성철 스님은 정말 도가 낮은 분이죠. 도가 낮기 때문에 번뇌를 벗기 위해 면벽하고 눕지 않고 밖에 나오지 않았던 거죠.

스님들보다 도가 높은 우리 같은 중생들은 출가하지 않고 또 고도의 수행을 하지 않고도 해탈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 올 석가탄신일의 전야에, 내가 어머니에게.


어제 시국 법회에 나가지 못했다. 108배에 깃든 108가지 참회문을 읽었다.
도 낮은 스님들의 번뇌가 보인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상에 찌든 번뇌를, 우리네가 없는 척 숨기는 번뇌를 읽었다.

도가 낮은 사람들이, 결국엔 앞장을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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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5월 한 달 간 교육실습생으로서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쳤다. 공교롭게도 그때 손에 든 교과서가 금성출판사의 것이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육과학부 장관과 국무총리의 입담 위에 오른 바로 그 교과서다. 그들이 떠든 바와는 달리, 이 교과서는 남한의 새마을운동을 균형적으로 소개하였고 북한의 천리마운동이 지닌 한계를 비추었다. 그러나 현행 역사교과서를 향한 색깔공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멎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금성교과서에는 일찍부터 ‘친북좌파’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사실이 좌파적이라면, ‘우익’은 거짓말쟁이?


  금성판 교과서는 좌파적인가? 일제시대 독립운동 서술에서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을 ‘제대로’ 비추고 있기는 하다. 이 교과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유입된 사회진화론의 위험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식민 지배를 (···) 인정하게 될 가능성도 컸다. 일제는 민족운동을 타협주의, 개량주의로 유도하는 데에 (···) 이런 속성을 이용하였다.”(203쪽)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개량주의’의 후계세력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특히 1924년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면서 (독립투쟁을 포기한) 자치론의 불씨를 지피고, 일제 말기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동아일보>에게 더욱 그럴 것이다.

  금성판은 좌파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이래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자들과 연결된 비합법 조직인 혁명적 노동 조합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밝히고 농민운동도 비슷하게 서술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가인 정종명을 여성 운동의 대모로 조명하였다(212-217쪽).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 다수가 훼절하거나 침묵했던 시대, 사회주의운동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금성판 교과서가 과연 ‘친북’적이기는 한가? 금성판은 김일성이 이름을 떨친 ‘보천보 전투’를 거론하였다. 두산출판사의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나, 이를 두고 ‘브라보’를 외쳤다가는 한승수 총리 꼴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러나 국내외 학계에서는 (···) 북한의 역사 기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어 왔다.”(196쪽) 금성판은 또 주체사상이 “김일성 개인 숭배를 합리화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며, 주체사상이 “쇼비니즘”이고 “편협”하다는 북한 방문자들의 술회를 옮겨 실었다(302쪽).   


  아마 자칭 우익세력의 눈에 거슬린 대목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금성판은 일제의 신문 강제폐간을 다루며 “이미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동아 일보, 조선 일보마저”도 폐간되었다고 서술하여, 현존하는 막강 언론사의 과거를 짤막하게나마 들추어냈다(154쪽). ‘역사찾기’라는 별첨자료에서는 문인, 예술인, 기업인, 경찰, 교육인의 친일활동을 분야별로 다루기도 했다(164-5쪽). 


  수업시간 말미 이따금 시간이 남을 때 나는 금성판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학생들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또는 친북·좌파적이라는 지적을 들은 제 교과서를 새삼 들추어 보는 동안, 나는 흑판에 'Fact'라고 썼다. 동아일보가 신탁통치 소식을 왜곡 보도했다거나, 북한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를 개혁했다거나, 한국전쟁 이전에도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거나, 베트남전쟁에서는 그 특수의 이면에 베트남인과 한국군의 큰 희생이 있었다거나 하는, 금성판 교과서의 여느 역사 서술도 모두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왼편에 몰아넣는 행위는, 오른쪽에 서 있다는 자신이 거짓의 편이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와 탈민족주의는 껍데기 뿐


  금성 교과서의 대척점에는 뉴라이트단체인 교과서포럼이 낸 <대안교과서 근·현대사>가 있다. 초반부부터 조선후기사회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취지로 ‘소농사회론’을 꺼내어 기존 교과서가 전제하는 내재적 발전론 또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맞선다는 점이 이 교과서의 굵직한 한 특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소지와 필자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여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동학농민운동이 ‘유교적 근왕주의’에 따른 복고적 개혁운동이라는 견해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넘어간다(참고로, 유영익 교수가 펼쳐온 이 주장은 진보 성향의 박노자 교수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어 또 다른 논쟁을 빚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단원은 (전체 분량의 2할에 불과한 개화기와 대조적으로) 절반에 육박하는 비중을 차지하는 해방 이후 현대사이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은 곧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이며, 이승만이라는 아버지에 노골적으로 줄을 대고 있다. 가령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을 “신생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농민들이 “6.25전쟁 이후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아 있었다”(146쪽)며 호평하였다. 또 민주주의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낯선 정치제도였다면서도 이승만 정권기에 민주주의 자체가 유보되거나 후퇴되는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잘못된 것은 시대적 한계와 국민의 수준 탓이며 잘된 것은 이승만·자유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는 투다. 


  이들은 대한민국 성립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선택”(148쪽)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찾지만, 5.16 쿠데타를 설명할 때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손쉽게 내팽개친다. 박정희가 한국전쟁 와중에 쿠데타를 모의했다거나 4.19로 인해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채, 결국 5.16쿠데타는 “도덕적 멍에”를 안았지만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던 “근대화혁명의 출발점”(181쪽)이었다고 미화되었다.   


  특이한 점은 5.16 군정이 초창기에 실시한 부정축재 기업가에 대한 구속과 벌과금 부과를 ‘미숙한 경제정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업가의 구속과 처벌로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다(183쪽). 군사쿠데타의 역사적 의의를 지지하지만, 국가주의보다 재벌식 자유지상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조갑제보다는 복거일과 더 친화적이다. 또 이 교과서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 이병철과 정주영을 꼽았으나(223쪽), 재벌기업가들이 직접 자행한 시장경제의 굴절은 부각시키지 않는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탈민족주의를 공언했음에도 통치이념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휘둘렀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너그럽기만 하다. 물론 뉴라이트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 대신 ‘한국인’을 입력한 결과로, 좀 더 명확하게는 ‘국가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흔히 민족주의가 비판받는 커다란 이유 두가지는 배타성과 획일성인데, 이는 국가주의에서도 그대로 또는 더 심하게 나타난다. 그래도 국가주의가 민족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국가주의든 민족주의든 내셔널리즘을 극복하지 않고도 탈민족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이 국가주의는 호오를 떠나 북한을 국가 또는 체제로 인정하는 데에도 매우 인색하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북한 정부의 수립에 대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역할을 무시하고 스탈린의 지시만을 부각시킨다. “스탈린의 나라가 된 한반도 북부”(281쪽)라는 거친 표현에서는 과거 북한을 ‘괴뢰’라고 부르던 반공지상주의의 메아리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주체사상에 대한 관점은 참 오묘하다. 황장엽의 주체사상은 점차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저작권이 황장엽에게 있다고 단정 지으면서 그를 김일성으로부터 분리시킨 셈이다. 

 

   실증주의가 아니라 싫증주의


  뉴라이트 교과서는 집필진들의 ‘본분’ 탓인지 정치투쟁 뿐 아니라 학술전쟁에도 거침이 없다. 그들은 경제학자 박현채의 견해가 일부나마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스며들었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서, 박현채가 김대중에게 건넨 대중경제론이 실현불가능하거나 성급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비판했다. 남한 정치세력 내부의 모순과 미국 때문에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수정설’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한 반면, 오로지 북한의 남한적화와 기습남침에만 골몰하는 ‘정통설’의 단점은 비판하지 않았다. 강만길이나 최장집처럼 민족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농후한 지식인들이 참여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했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철저한 실증주의를 지향”(5쪽)했다는 자부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건 비단 이 책에 가득한 역사투쟁의 화염병 때문만이 아니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사실관계의 오류’들의 전시장이다. 비전문가인 필자도 별도의 참고문헌 없이 한번의 정독만으로 숱한 잘못을 발견했다. 고종의 즉위년도는 1863년이 아닌 1864년으로 표시되었다. 사진 속의 박영효에게 홍영식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홍영식은 그 사진을 찍을 무렵 이미 세상에 없었다). 민비도 명성왕후도 명성황후도 아닌 민왕후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1908년 공표된 사립학교령은 졸지에 두해 앞당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은 설립 이듬해에 설립되었다. 여수·순천사건은 여주·순천사건으로 표기되었다, 두 번씩이나. 1973년부터 1992년까지 남북의 공식적 접촉은 한번도 없었으며, 공창이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마련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걸로 처리되었다. 어쩌면 철저한 실증주의라는 머리말의 구절부터가 오류 또는 오기일지도 모른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집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없다는 일각의 지적은 올바르지 못하다. 여기엔 더러 영역을 침해당한 역사학자들의 불쾌감이나, 독자적인 가치관보다는 전공 학문에 따라 학설을 달리하는 경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경제학자나 윤리교육학과 교수라고 해서 역사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뉴라이트는 교과서의 독자가 상품구매자나 ‘정치업자’가 아니라 공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단순한 기본을 저버렸을 따름이다. 그들의 문제는 비전문성이 아니라 비윤리성이다. 


  교과서 집필의 출발 지점은 명료하다. 모두의 가치관을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만인이 곱씹고 생각할 수는 있는 재료를 제공해야 한다. 하기야, ‘싫증주의’를 유발하는 뉴라이트 교과서도 그런 재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자나 해학의 소재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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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폭계급

2008. 7. 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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