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다
그는 급박한 시기에 죽었다. 독일과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 노선을 포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모든 국가에서의 동시적인 총파업을 결행함으로써 전쟁을 막자고 결의했다. 프랑스 노동단체 CGT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며 전쟁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던 1914년 7월 27일 반전시위를 단행하였다. 이 시위에서 노동자와 경찰은 대충돌을 일으켰다.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반전평화를 호소했다. 7월 30일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대중 연설을 펼치고 파리로 돌아와서 외무부를 방문했다. 7월 31일에는 <뤼마니테 L’ Humanitè>의 편집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장 조레스는 참석차 몽마르트르 부근의 신문사 거리에 있는 한 식당에 방문하였다. 그는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극우파 청년에게 흉탄을 맞고 숨졌다.
CGT는 독일제국주의를 비난하며 반전시위를 중단했다. 사회당은 전쟁특별예산을 통과시켰고, 지도급 인물인 게드는 전시거국내각에 입각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우애는 무너져 내렸고,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곧 그들을 뒤덮게 된다. 혹자는 그의 죽음이 그를 보호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조레스가 살아남아 세계대전을 맞이했다면, 그때 그는 애국자로서 누구보다도 전쟁에 앞장섰을 터이며 어쩌면 전쟁광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그저 모른체하기는 힘든 주장이다. 조레스 사후 서구 사회주의자들은 그대로 전쟁의 광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해서 그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조레스는 조국을 중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도 민족들 안에서 거점과 표지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조국과 헤어진 사회주의는 ‘시든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3) 그러나 조레스는 사회주의적 사상 체계 안에서 조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조국은 사회주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에 쓰이는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4) 자유와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서 고개를 돌리는 날 조국은 자격을 상실한다고 믿는 이를 애국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오류다.
2008년 7월 31일, 우리는 조국의 특질과 강점을 간파하면서도 정의가 국익을 압도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던 사회주의 정치가의 94주기를 맞이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던 그는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혁명가들’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조레스는 혁명의 주역도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국가원수나 내각수반도 아니었다. 당의 확고한 영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묘비는 조레스를 ‘인민의 호민관’으로 프랑스 역사에 새겼다. 한국의 의회에서도 호민관이, 조레스와는 달리 생존으로써 성공하는 호민관이 속속 등장하기를 빌며, 붉은 장미를 그의 영전에 마음으로 바친다.
2. 공화파에서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장 조레스는 1859년 프랑스 남부의 카스트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 지역에는 소농과 장인이 많았고, 그의 집안환경도 소부르주아적이었다. 명석했던 그는 장학생들에게 선발되어 로이 르 그랑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한 끝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베르그송, 뒤르켐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동기생이고, 이후에도 사르트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들이 이 학교를 거친다. 그는 3년간의 수학을 끝내고 알비 중학교의 교사와 투르즈대학교의 철학 강사를 지낸다.
조레스는 해군제독인 집안 아저씨의 영향 탓인지 정치인의 꿈을 품고 있었고 1884년 도 단위 공화파 명부로 고향에 출마해 의원이 된다. 이 시기의 프랑스 공화주의는 역동적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은 1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반면 조레스의 고향은 기업과 교회의 막강한 힘에 좌우되고 있었고, 근왕주의나 복고주의 성향을 가진 지역민들도 숱했다. 1889년도에 두번째로 출마한 그는 소농과 장인들을 대변하며 지역구에서 대기업가, 대금융가들과 맞서 싸우다 패배하였다.
그후 시장보로 근무하던 조레스는 숙련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레스가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1892년 터진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이었다. 노동자의 편에서 사태를 분석한 그는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사회주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무렵 프랑스의 4개 사회주의 정당은 16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사회주의자도 21명에 달했다.
조레스가 시도한 거리와 의회의 접속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1893년 하원의회에서 ‘사회주의, 탄압 그리고 노동자 주동자들’이라는 명연설을 펼쳤다. 주동자 적발에 골몰한 정부를 비난한 이 연설은 무슨 일만 터지면 배후를 찾는 한국의 기득권세력에게 그대로 들려주어도 유용할 것 같다.
어디에 주동자들이 있고 어디에 사주자들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귀하가 은밀하게 해체하고자 하는 노조를 조직하는 노동자들, 이론가들, 사회주의 선전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동자들, 중요한 사주자들은 우선 자본가들 사이에 있고 여당 안에 있다.5)
그는 1906년 1100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탄광 사고가 일어났을 때 참사의 원인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았다. 그는 1906년 단독 집권에 성공한 급진주의자들(클레망소 내각)이 여전히 소유를 중시하는 습관에 젖어 노동자의 현실을 간과하는 데 매우 비판적이었다.6) 또 조레스는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법률의 추를 주시하며 1904년 북부 샤티용 파업 때 고용주와 사법당국의 협잡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업이 노동계약의 파괴를 부른다는 논법을 반동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주목할 점은 노동자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장 조레스에게 공화주의란 번데기 시절의 껍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유소년기인 동시에 영원한 젖줄이었다. 마치 록(Rock)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전지(電池)로 여기듯 말이다. 1898년 3선 실패 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지는 동안 장 조레스는 대학에 복귀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를 내놓는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찾아나선 역작이었다.
3. 각축하는 좌파‘들’ 틈에서
카르모의 노동자들과 함께 조레스에게 사회주의를 심어준 인물로는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도서관 사서 에르(Lucien Herr)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 이론과 독일학에 조예가 깊었고, 장 조레스와 나중에 인민전선의 내각을 지휘할 레옹 블룸의 스승이었다. 에르는 조레스에게 사회주의가 꼭 블랑끼즘이나 게디즘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Socialisme Utopique)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생디컬리즘(조르쥬 소렐7)), 반중앙집권적 사회주의(말롱) 등의 전통도 만만치 않았다. 1848년 선포된 공화정에서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된 루이 블랑의 경우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에 해당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세를 떨친 흐름은 에르와 조레스가 선을 그은, 그라쿠스 바뵈프-오귀스트 블랑끼로 이어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였고,8) 이는 쥘 게드9)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한편 블랑끼의 동지였던 바이양은 지하운동을 청산하면서 프랑스혁명당(PRF)을 창당했다.)
게드는 1879년 프랑스노동당(POF)의 창당을 주도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기존의 토착 사회주의와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1880년 전당대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탈퇴하고, 개혁주의의 맥을 잇는 가능주의파(possiblilistes)도 게드가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뛰쳐 나가 사회노동연맹(FTS)을 창설하고 의회민주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J.알만의 노동사회혁명당(PSOR)도 파리코뮌의 전사인 동시에 루이 블랑의 개혁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좌파들을 모아 나갔다. 그들은 혁명적 생디칼리즘과도 연대하는 한편 파리고등사범 출신들을 영입한다. 조레스의 스승인 에르는 바로 이 당의 기관지 ‘노동자의 당’의 논객으로서, 다수의 글을 기고해 국제사회주의운동과 독일사민당, 영국 차티스트운동을 소개했다. 에르와 조레스의 가담은 지성적 사회주의(socialisme d’ intellectuels)의 신호탄이었고, 이때부터 노동자중심의 사회주의운동에 많은 지식인들이 스며 들게 된다.
4. 조레스주의, 게드를 넘어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광대한 운동으로부터 부상한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하나의 계급이 민주주의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혁명의 처음 며칠이 지나서도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키게 되면 그들은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다.10)
프랑스의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장 조레스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11) 그들은 대체로 조레스가 프랑스식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 조레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을 따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는 개혁주의자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세력 다수가 부르조아 내부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외면한 드레퓌스 사건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죄 없는 유대인 장교를 탄원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게드파에게 의혹을 받는다. 1899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권에 참여해도 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혁명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적극적 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에 불참하는 원칙을 세우면서, 다만 특별한 상황에서만큼은 장관을 파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면서 매듭지어졌다.
조레스의 드레퓌스 사건 투신은 사회주의의 보편적 정신을 구현하고 사회주의의 한 틀인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권 참여에 대한 그의 입장이 타협적이고 나이브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혁명주의자들이 도피적이고 순혈주의적이라고 해서, 정권 불참론의 정당성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공화파 정권은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고, 좌파들에게 정부 혁신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지도 않았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조레스도 결국 노동투쟁 속에서 집권세력의 기만을 깨닫고 이를 규탄하는 활동을 펼쳤다.
개혁주의와 혁명주의의 대결은 1901년 리용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을 위한 3차 대회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브루쓰파와 알망파의 연합으로 프랑스사회당(PSF)이,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합작으로 프랑스의 사회당(PSDF)이 생겨났다. 조레스는 물론 PSF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2차 인터내셔널 6차대회에서 개혁주의는 표싸움에서 졌고 조레스는 승복했다. 그로 인해 등장한 통합사회당이 바로 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SFIO)라는 다소 희한하고도 긴 명칭을 가진 정당이다. 이 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할 때까지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창당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였고, 국가를 부르주아지배의 도구로 낙인찍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게드주의를 이겨내려는 조레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조레스는 좌파당원 3만 5천명을 압도하는 20여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 주목했고,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의 통합을 지향하며, 1906년에는 게드주의를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자본주의 착취가 있는 한 전쟁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게드의 입장은, 조레스에게 있어 명백한 광신적 애국주의이기도 했다. 그는 파업이 전쟁의 도구라는 관점에 반대했다.
1908년 조레스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세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설정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정복한다. 둘째, 단기적으로는 선거와 의회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때때로 총파업을 실시한다. 조레스는 국가는 하나의 계급이 아닌 계급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전제하며, 국가는 외부의 혁명이나 폭력보다는 내부에서 정복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관철되었고 조레스는 사회당의 명실상부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후 클레망소 내각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노동조직은 여전히 총파업 신화에 빠져 있었으나, 사회당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14년 당원수는 7만 2천여명에 이르렀고, 지식인 그룹도 꾸준히 조레스주의에 합세하였다.
5. 개인주의와 다수혁명론의 의의
프랑스 학자 자크 들로즈는 조레스에게 ‘통합과 종합의 천재’라는 찬사를 바친 바 있다. 조레스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혁명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그의 사회주의는 혁명 대 개혁의 해묵은 대치를 불식시켰고, 혁명노선의 모험주의를 억누르는 동시에 개혁노선의 타협과 타락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론 내부의 투쟁을 무마하는 절충주의로 비쳐지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한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조레스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전통에 사상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조국애가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조국애는 상대적으로 혈통주의보다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래서 조레스에게 조국애는 공화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또 한편으로 조레스는 프랑스 고유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더구나 그의 고향은 개인주의의 주역인 소농민과 소장인들로 가득했다.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 사건을 피해가지 않았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도 반동으로부터 공화국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이 계급문제보다 하위의 가치라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한 인간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가 부르조아일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해치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경계심에 예민하였고 충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아무것고 개인 위에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개인 권리의 최우선적 확인이라고 명토 박았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의 탈집중화론이 경제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비켜갔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는 논리적이고 완전한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확장함으로써 혁명적 개인주의로 이어간다.12)
자본주의 체제는 소유와 노동을 떼어놓았다. (···) 탈집중론자들은 공상만 하든가, 아니면 반동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입장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소유의 변혁 없는 탈집중화는 오래된 토지 세력의 패권을 복구시키는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이다.13)
조레스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은 빈곤한 일상으로 인해 단순하다’는 편견에 저항하며 노동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그가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 사고하지 않았고 노동자 개개인의 의식 발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도 좌파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얄팍한 정치공학이 아니라, 개인주의와 그로부터 유래된 다수혁명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진전과 더불어 ‘크나큰 다수(majoritè immense)’가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크나큰 다수는 ‘부르주아와 적대하는 프롤레타리아’로 환원되지 않는다.14) 조레스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민주주의를 토대로 구성한 ‘다수의 의지’가 계급의 독재로 뒤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미래 사회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를 꺼리는 것을 술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다만 진화의 자유와 생의 풍요로움을 존중할 뿐”이라고 대꾸했다. 봉기에 집착하는 혁명주의를 버리고 의회정치와 현장투쟁, 정권 획득 등 모든 정당하고 합리적인 경로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달성에 나선 것도 사회주의의 그러한 ‘열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철권 통치와 인권 탄압에 이어 멸망과 퇴행으로 귀결된 오늘날, 조레스는 레닌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로 기록될 만하다.
6. 다시, 한국을 생각하며
조레스가 활동하던 즈음의 프랑스처럼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에도 여러 정파가 존재하며 진보정당과 노동조직에 나타난 분열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 양상 자체보다는 이들이 한줌의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하며 관념적인 이상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여전히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합법정당활동과 의회정치를 개량, 타협, 투항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아무도 혁명에 도전하지는 않지만.
선거에서조차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사교섭 적용률이 현저하게 낮은 가운데 혁명이란 그저 몽상일 뿐이다. 반면, 의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천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수구파와 보수파의 여론 점유율이 다시 오르는 현상은 명백한 현실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조레스처럼 모든 정당한 수단과 합리적 경로에 도전해야 한다. 조레스와 같은 걸출한 리더쉽 역시 절실하다.
한국에서 진보 정치의 리더쉽을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물은 정파구도와 종파주의이다. 내부 헤게모니투쟁에 골몰하기를 강조하는 구조 속에서, 대개 리더들은 두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로 흐르기 쉽다. 하나는 분열주의적 리더쉽이다. 51을 차지한다면 100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때로는 51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분열을 꾀해 26을 얻으려 한다. 다른 하나는 봉합적 리더쉽이다. 여기에서는 이 소리로 저기에서는 저 소리로 환심을 얻어 나가며, 최소한 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다수에게 추대되는 길이다.
언제까지 구조를 탓하며 실효성 없는 담론과 한탄만을 양산할 수는 없다. 필자는 우선, 기존의 구도에 아랑곳않는, 그러면서도 진보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표현하고 구사해 나가는 리더가 먼저 나타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러한 리더는 정치적 허영심이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야 할 것이고, 자연히 기성과 전통으로부터 충분히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사유를 갈고 닦는 사상가적 면모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조레스도 정치가 이전에 사상가였다. 조레스의 혁명적 개혁주의는 프랑스적 전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조레스는 경험과 관찰 그리고 진중한 사유로 진보의 나무를 가꾸었고, 그를 통해 좌파의 분열과 정체를 타개해 나갔다.
물론 사유와 발언만으로 훌륭한 정치 리더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조레스는 탁월한 행동가였다. 거리와 의회에 한발씩을 디디며 양쪽이 위치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투쟁’과 ‘결정’의 장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오늘 한국에서 다수의 노동자는 수구정당이나 보수정당에 투표하는데 이는 여느 선진국도 말끔히 해결하지는 못한 난제다. 사회경제적 처지와 투표 성향의 괴리는 설명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강렬할 인상을 남길 진솔한 행동만한 방책이 없다. 한국은 프랑스와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공화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전통이, 프랑스와 다르게든 혹은 비슷하게든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나름의 진보정치의 역사는 얼마든 쓰여질 수 있다. 나뭇잎의 모양은 달라도 어지간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면 나무는 어디에서나 자라기 마련이듯. 조레스와 같은-나아가 그를 뛰어넘는-사상가, 정치가의 출현 역시 결코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고문헌]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한국사회민주주의 연구회, <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사회와 연대, 2001.
장석준,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이론과 실천>, 2002년 7월호.
노서경,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55~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