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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국호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Union of Burma였다. 1989년부터 쓰인 Myanma는 군사정권의 개작이므로, 그 나라의 정권을 반대하는 버마와 세계의 전 인민들은 '미얀마'가 아닌 '버마'를 고수하는 것이 원칙이다.

버마의 군사독재는 1962년 아웅산과 함께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꼽혔던 네윈이 쿠데타을 일으킨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던 1974년,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우 탄트(1961~1971년)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랭군 대학이 군부에게 습격 당했다. 그와 함께 시신탈취와 학살극이 벌어졌는데, 이로써 버마 무장투쟁의 막이 올랐다.  

1988년, 찻집에서 동네청년과 시비를 벌이던 랭군 공과대학생 세명은,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한 사태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항쟁과 학살로까지 번지게 된다. 학생들은 경찰에 구타당한 끝에 희생되었고, 즉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1988년 오늘, 궐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15000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산악에 들어가 무장하였다. 9월 18일에는 쏘 마웅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발했다. 잠시 유화적이던 군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며 혼란을 부추겼고,1989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되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27일,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가 8할이 넘는 지지율을 얻었음에도 정권은 그들에게 이양되지 않았다. 도리어 의원 100명이 구속되었고, NLD 등 몇몇 정당을 뺀 단체들이 불법화되었다. 그후 아웅산 수지는 두번을 더 가택연금 당해, 총 12년동안 집에 갇혀 살았다.

8888을 계승해 1999년 9월 9일에 일어난 9999항쟁은 반정부세력 간의 연대에 실패한 채 역시 폭력진압으로 쓰러졌으며, 2003년 5월 아웅산 수지는 NLD를 재건하는 도중 피습을 겪기도 했다. 2005년 엠네스티 보고서는 버마의 양심수가 2004년 12월 기준으로 135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UN는 이미 1987년 버마를 자원이 부족한 최빈국으로 지정하였고, 1994년부터 정치적으로도 독재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EU,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버마의 노동착취 역시 2000년도에는 ILO에서 제제를 결의할 만큼의 수준이었다. 8만명 이상이 버마 군부에 동원되어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고 각종 개발공사에서 12~14시간 강제노동을 하였다. 이에는 임신 여성까지도 포함되었으며, 숱한 사람들이 지뢰나 풍토병에 희생되었다. 소수민족들 또한 자원개발사업에 끌려갔다.  

이러한 가운데 8888세대는  National Recnciliation Movement를 전개하는가 하면, 독립운동가들도 '연륜 있는 정치가들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우리는 2007년 유엔특사의 방문과 석유값 2배, 천연가스 4배 인상에 따른 생활고를 맞이해 버마에서 일어난 항쟁을 잘 알고 있다. 그해 9월 버마의 탄 쉐이 군부 정권은 총파업에 나선 전국승려연합회를 비롯한 인민들을 또다시 학살하였다. 버마국영방송은 3천명을 체포하고 2천명을 석방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민주세력은 6천명이 체포되고 5백명이 석방되었다고 밝혔다.

"뚜쩐아욱가 라욱먀욱삐, 씨쭨 아우똑역캐." 다른 국가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으나 군대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만큼 버마 인민들의 삶을 극명히 드러내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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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와 KBS노조의 진실 (펌)

Forum | 2008. 8. 8. 14:48 | Posted by 김수민
나의 친우인 '참이슬'이 쓴 글이다.
 


정연주 사장은 ‘노무현 낙하산 인사’로 사장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다음 노무현 선대본 고문을 맡았던 서동구씨를 사장으로 임명했을 때, 당시 제9대 KBS 노조 김영삼 위원장 이하 노조원들은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며 삭발 투쟁,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습니다. 8일 간의 투쟁을 통해 서동구 사장 임명은 철회되었지요. 그 다음에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사장공모추진위원회’(사추위)를 구성하였고, 이 사추위에서 선임하여 이사회에서 뽑은 사장이 바로 정연주 사장입니다.

 따라서 정연주 현 KBS 사장은 민주노조의 ‘낙하산 인사 반대’ 투쟁을 통해 시민사회의 힘으로 선임된 것입니다. 서동구 사장을 임명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의도를 분쇄한 후 선임된 사장을 어떻게 ‘노무현 낙하산 인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KBS 노조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 노조가 아닙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노조 집행부를 맡았던 제9대 김영삼 위원장은 분명히 1990년대 서기원 사장 퇴진 투쟁 등 방송 민주화 운동의 맥을 이었던 세력이었습니다. 김영삼 위원장이 민주노조의 맥을 이었다는 사실은 2003년 서동구 사장 임명 저지 투쟁을 보아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KBS 노조 제10대 진종철 위원장, 제11대 박승규 위원장은 1990년대부터 전개된 방송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한 민주노조의 맥을 이은 세력이 아닙니다. 2000년 “운동권 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한 100인 위원회”에서 성추행 사건으로 규탄받은 강철구 전 KBS 노조 부위원장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들은 ‘방송 민주화’보다는 ‘철밥통 지키기’와 ‘임금인상’에 더 관심을 가지는 어용 노조 세력입니다. 노동운동이 썩어가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흔히 나타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KBS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승규 집행부를 민주노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박승규 집행부는 구조조정으로 자기네 철밥통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기술직 노조원과 지방 방송국 노조원들의 힘으로 당선된 세력입니다. 이들은 방송 민주화나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공정한 방송 보도에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네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낙하산 사장’ 임명도 반길 그런 세력들입니다.

 현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는 자신들을 ‘어용노조’라고 비판하는 네티즌들과 시민들에게 “어용노조는 공정방송노조(위원장: 윤명식)이고, 우리는 민주노조입니다”라는 식으로 슬쩍 정체를 위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공정방송노조(위원장: 윤명식)는 ‘올드라이트’ 노동조합이고, 박승규 집행부의 KBS 노조는 ‘뉴라이트’ 노동조합입니다.

 공정방송노조는 한나라당 성향의 KBS 간부 윤명식이 부장급 이상 사원들을 조직 대상으로 만든 노동조합입니다. 정연주 사장의 팀제 실시로 철밥통이 위협받는 데 불안을 느낀 한나라당 성향의 간부사원들을 규합하여 KBS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노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윤명식이 한나라당의 정권 장악을 위해 KBS 조직 장악이 필요하다고 강동순 전 방송위 상임위원(2006-2008년 사이 한나라당 추천 방송위 상임위원)과 술자리에서 밀담을 나누었던 사실은 미디어오늘(www.mediatoday.co.kr)에 올라 있는 ‘강동순 녹취록’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고 인터넷에서도 널리 퍼져 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 ‘강동순 녹취록’에서 윤명식이 한나라당의 KBS 조직 장악을 위해 진종철 위원장 후임으로 박승규를 노조 위원장에 앉혀야 한다고 강동순 전 방송위 상임위원에게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결국 윤명식이나 박승규나 ‘그 놈이 그놈’인, 한나라당 성향의 어용 노조 세력인 것이지요.

 그리고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가 네티즌들이 ‘공영방송 KBS 지키기’를 위해 촛불시위에 나선 것을 “일부 사내 정치세력의 사주”에 의해 벌어진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데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촛불시위의 배후에는 친북 주사파가 있다”고 떠들어 댄 조중동과 영락없이 똑같은 논리이니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티즌들은 다음 아고라에서 자발적인 토론과 논의를 통해 ‘공영방송 KBS 지키기’를 위한 촛불시위에 나섰습니다. 6월 11일부터 이명박 정권이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KBS 표적 감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촛불시위에 동참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과 다를 바 없는 ‘배후론’으로 네티즌들의 촛불시위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KBS 노동조합을 어떻게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네티즌들이 ‘정연주 사장 지키기’에 나서는 것을 “‘노빠’들의 정연주 구하기”로 폄하하고 있는데요. 이 또한 매우 치졸하고 악의적인 음해 모략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티즌들이 ‘정연주 사장 지키기’에 나서는 것은, 공영방송 독립성을 보장하고 ‘낙하산 인사’를 저지하기 위해 KBS 사장의 남은 임기를 보장하라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공영방송 사장 임기제가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인데, 이를 이명박 정권이 훼손하면서 ‘땡박뉴스’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는 거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연주=친노인사’로 규정한 후, ‘정연주 지키기=노빠들의 정연주 구하기’로 낙인찍어서야 되겠습니까?

 정연주 사장이 KBS에 온 다음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 같은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강택 PD 같은 분이 2006년 KBS 스페셜에서 “광우병의 진실”을 파헤치는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었던 것도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민주화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는 이러한 KBS의 프로그램 편성을 ‘친북 좌파 코드방송’이라 주장하는 조중동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 정연주 사장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정연주 사장의 ‘친북좌파 코드방송’의 실체가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방영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어용 KBS 노조에게는 방송의 민주화와 공공성보다는 산골짜기 송신소에서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으면서도 연봉 1억원이 보장되는 ‘철밥통’이 더 소중한가 봅니다.

 KBS가 80년대 ‘땡전뉴스’와 같이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영방송 지키기’를 위한 촛불 네티즌들의 행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힘으로 KBS를 지키겠다“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배후가 있다”라며 폄하하며 한 편으로는 호도하기 위해 온갖 얕은 꼼수를 쓰는 KBS 뉴라이트 노조의 본질을 똑똑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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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골드, 그 추억의 선수들

Free Speech | 2008. 8. 7. 01:56 | Posted by 김수민

TV로 티베트 학살을 목도하며 절대 베이징 올림픽을 관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근래 결심이 좀 흔들리고 있다. 당장에 카메룬 대 한국전이 눈앞에 와 있는데 이를 어찌 하오리까. 요즘 집에서 매일 WINNIG 11을 하는지라 축구 경기는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내게 올림픽이란 대부분이 '92년 바르셀로나와 '96년 아틀란타를 뜻한다. 1988년 올림픽에 대해서는 레슬링 김영남과 탁구 유남규의 결승전 장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00 시드니 올림픽 때는 고3이었고, '04년 아테네 올림픽은 군복무 중에 있었다. 2000년, 우리 학급은 몰래 TV를 틀어 올림픽을 보곤 했는데, 아이들이 여자 배구 시합에서 갑자기 상대팀인 이탈리아에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아리따운 선수 두명 때문이었다. 2004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작지만 정말 더러운 쇼비니즘의 기억이 남아 있다. 한국선수단의 금메달 부진에 열오른 어떤 경찰 왈, "한국이 이것밖에 안돼?" 아, 이 또라이 생각하니 나도 열이 오른다.

금메달 유력후보였다가 은메달에 그친 한국 선수는 눈물을 흘리는 데 반해, 동메달 건진 다른 나라 선수는 방긋 웃는-심지어 취미 삼아 출전하는 선수들도 많았다-시상식 장면이, 한국인으로 자라온 내게 가장 깊이 각인된 올림픽의 풍경이다. 노골드 한국 선수의 잘못이라고는 빡센 나라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그러나 비운 역시 하나의 금자탑을 이루는 법이다.


1. 윤현

한국을 대표하는 비운의 올림픽 선수. 아마 체급은 엑스트라 라이트급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1988년 유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으나 선배인 김재엽에게 양보했다. 김재엽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4년이 지나 윤현의 코치가 되었다. 윤현이 결승전에서 졌을 때,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던 김재엽의 얼굴이 생생하다.


2. 여홍철

그의 이름을 꺼내자 사촌동생은 "노홍철도 운동선수였냐?"고 묻는다. 여홍철은 1992년 유옥렬이 뜀틀 동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을 확고한 세계 최정상 선수였다. 그의 이름을 딴 기술명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공중제비는 황홀하다. 하지만 착지가 문제였다. 다다다닥... 그때도 그는 뒷걸음질을 친 댓가로 은메달을 땄다. 한걸음만 덜 물러났어도 금메달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학급에서 한탄을 했으나 장난끼 많은 우리는 남의 비극을 즉시 희극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당연히 그의 공중제비를 따라할 수 없던 우리는 노홍철, 아니 여홍철의 착지 자세를 흉내내기에 여념 없었던 것이다. 다다다닥... 나는 당시 여홍철을 노홍철로 들은 내 외사촌동생과 같은,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3. 이봉주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마라토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놀룰루 대회 이후로 상도 곧잘 탔다. 다만 황영조와 견주어 볼 때면 그가 참 안타깝다. 황영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세대 특유의 퍼스낼러티를 가진 스타였다면, 그는 바보처럼 달리고 또 달리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비쳐졌다.

1992년, 투그와니(아프리카 어느 나라 사람인데... 케냐였나?)와 각축을 벌인 끝에 1등을 놓치는 것이 확실시되는 순간, 그의 얼굴은 비로소 환해졌다 . 금메달을 딴 투그와니는 자녀가 여러명이었다는데... 나는 친구들과 "그래도 그집 살림 피게 된 건 그나마 잘됐다"고 한마디했다.


4. 김택수

1992년 탁구 남자단식 동메달리스트. 아... 가슴 한켠이 짠해진다. 나에게 '축구는 황선홍, 야구는 선동렬'이고, 탁구는 유남규도 유승민도 아니고 김택수다. 유남규-현정화가 꾀돌이 또는 여우로 불려졌다면 김택수는 홍차옥과 함께 순둥이란 소리를 들었다.

유남규가 1인자였고 그는 영원한 2인자였다는 회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거짓말쟁이이다. 김택수는 발트너, 페르손 같은 세계 랭킹 1, 2위급의 스웨덴 선수들을 꺾고 선수권을 쥐기도 했던 선수다. 그를 가린 건 발트너도 유남규도 아니고, 선수권보다 올림픽 골드메달에 더 치중하는 한국스포츠문화이다.

4년 전 유승민이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는 선수보다 더 기뻐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감동적이었다.


5. 2004년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우생순>도 나왔겠다 생략.


6. 이승배

1992년 복싱 미들급 동메달. 1996년 은메달. 소위 '얼짱'이었기 때문에 금메달리스트였다면 올림픽 스타로 뜰 수 있었던 선수.


7. 남승룡

간단히 말해, 우리는 (손기정 선수에 비해) 그에 관하여 아는 바가 너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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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서적' 읽었다고 TV에서 밝힌 병사

Free Speech | 2008. 8. 3. 00:24 | Posted by 김수민
이번에 군내 금서 지정 사건에 관해, 불온서적으로 꼽힌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MBC 느낌표의 추천도서였음을 상기시키는 기사가 곧잘 뜬다.

근데, 이건 몰랐을 거다. MBC 느낌표가 군부대를 방문했을 때, 한 병사는 인터뷰에서 현기영의 소설을 근래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고, "4.3사건을 다루었다"며 책 내용까지 소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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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다

그는 급박한 시기에 죽었다. 독일과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 노선을 포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모든 국가에서의 동시적인 총파업을 결행함으로써 전쟁을 막자고 결의했다. 프랑스 노동단체 CGT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며 전쟁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던 1914년 7월 27일 반전시위를 단행하였다. 이 시위에서 노동자와 경찰은 대충돌을 일으켰다.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반전평화를 호소했다. 7월 30일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대중 연설을 펼치고 파리로 돌아와서 외무부를 방문했다. 7월 31일에는 <뤼마니테 L’ Humanitè>의 편집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장 조레스는 참석차 몽마르트르 부근의 신문사 거리에 있는 한 식당에 방문하였다. 그는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극우파 청년에게 흉탄을 맞고 숨졌다.


  CGT는 독일제국주의를 비난하며 반전시위를 중단했다. 사회당은 전쟁특별예산을 통과시켰고, 지도급 인물인 게드는 전시거국내각에 입각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우애는 무너져 내렸고,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곧 그들을 뒤덮게 된다. 혹자는 그의 죽음이 그를 보호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조레스가 살아남아 세계대전을 맞이했다면, 그때 그는 애국자로서 누구보다도 전쟁에 앞장섰을 터이며 어쩌면 전쟁광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그저 모른체하기는 힘든 주장이다. 조레스 사후 서구 사회주의자들은 그대로 전쟁의 광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해서 그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조레스는 조국을 중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도 민족들 안에서 거점과 표지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조국과 헤어진 사회주의는 ‘시든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3) 그러나 조레스는 사회주의적 사상 체계 안에서 조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조국은 사회주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에 쓰이는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4) 자유와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서 고개를 돌리는 날 조국은 자격을 상실한다고 믿는 이를 애국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오류다. 


  2008년 7월 31일, 우리는 조국의 특질과 강점을 간파하면서도 정의가 국익을 압도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던 사회주의 정치가의 94주기를 맞이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던 그는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혁명가들’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조레스는 혁명의 주역도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국가원수나 내각수반도 아니었다. 당의 확고한 영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묘비는 조레스를 ‘인민의 호민관’으로 프랑스 역사에 새겼다. 한국의 의회에서도 호민관이, 조레스와는 달리 생존으로써 성공하는 호민관이 속속 등장하기를 빌며, 붉은 장미를 그의 영전에 마음으로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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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화파에서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장 조레스는 1859년 프랑스 남부의 카스트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 지역에는 소농과 장인이 많았고, 그의 집안환경도 소부르주아적이었다. 명석했던 그는 장학생들에게 선발되어 로이 르 그랑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한 끝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베르그송, 뒤르켐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동기생이고, 이후에도 사르트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들이 이 학교를 거친다. 그는 3년간의 수학을 끝내고 알비 중학교의 교사와 투르즈대학교의 철학 강사를 지낸다.


  조레스는 해군제독인 집안 아저씨의 영향 탓인지 정치인의 꿈을 품고 있었고 1884년 도 단위 공화파 명부로 고향에 출마해 의원이 된다. 이 시기의 프랑스 공화주의는 역동적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은 1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반면 조레스의 고향은 기업과 교회의 막강한 힘에 좌우되고 있었고, 근왕주의나 복고주의 성향을 가진 지역민들도 숱했다. 1889년도에 두번째로 출마한 그는 소농과 장인들을 대변하며 지역구에서 대기업가, 대금융가들과 맞서 싸우다 패배하였다.


  그후 시장보로 근무하던 조레스는 숙련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레스가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1892년 터진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이었다. 노동자의 편에서 사태를 분석한 그는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사회주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무렵 프랑스의 4개 사회주의 정당은 16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사회주의자도 21명에 달했다. 


  조레스가 시도한 거리와 의회의 접속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1893년 하원의회에서 ‘사회주의, 탄압 그리고 노동자 주동자들’이라는 명연설을 펼쳤다. 주동자 적발에 골몰한 정부를 비난한 이 연설은 무슨 일만 터지면 배후를 찾는 한국의 기득권세력에게 그대로 들려주어도 유용할 것 같다.


어디에 주동자들이 있고 어디에 사주자들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귀하가 은밀하게 해체하고자 하는 노조를 조직하는 노동자들, 이론가들, 사회주의 선전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동자들, 중요한 사주자들은 우선 자본가들 사이에 있고 여당 안에 있다.5)


  그는 1906년 1100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탄광 사고가 일어났을 때 참사의 원인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았다. 그는 1906년 단독 집권에 성공한 급진주의자들(클레망소 내각)이 여전히 소유를 중시하는 습관에 젖어 노동자의 현실을 간과하는 데 매우 비판적이었다.6) 또 조레스는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법률의 추를 주시하며 1904년 북부 샤티용 파업 때 고용주와 사법당국의 협잡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업이 노동계약의 파괴를 부른다는 논법을 반동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주목할 점은 노동자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장 조레스에게 공화주의란 번데기 시절의 껍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유소년기인 동시에 영원한 젖줄이었다. 마치 록(Rock)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전지(電池)로 여기듯 말이다. 1898년 3선 실패 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지는 동안 장 조레스는 대학에 복귀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를 내놓는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찾아나선 역작이었다.



3. 각축하는 좌파‘들’ 틈에서


카르모의 노동자들과 함께 조레스에게 사회주의를 심어준 인물로는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도서관 사서 에르(Lucien Herr)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 이론과 독일학에 조예가 깊었고, 장 조레스와 나중에 인민전선의 내각을 지휘할 레옹 블룸의 스승이었다. 에르는 조레스에게 사회주의가 꼭 블랑끼즘이나 게디즘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Socialisme Utopique)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생디컬리즘(조르쥬 소렐7)), 반중앙집권적 사회주의(말롱) 등의 전통도 만만치 않았다. 1848년 선포된 공화정에서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된 루이 블랑의 경우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에 해당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세를 떨친 흐름은 에르와 조레스가 선을 그은, 그라쿠스 바뵈프-오귀스트 블랑끼로 이어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였고,8) 이는 쥘 게드9)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한편 블랑끼의 동지였던 바이양은 지하운동을 청산하면서 프랑스혁명당(PRF)을 창당했다.) 


  게드는 1879년 프랑스노동당(POF)의 창당을 주도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기존의 토착 사회주의와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1880년 전당대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탈퇴하고, 개혁주의의 맥을 잇는 가능주의파(possiblilistes)도 게드가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뛰쳐 나가 사회노동연맹(FTS)을 창설하고 의회민주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J.알만의 노동사회혁명당(PSOR)도 파리코뮌의 전사인 동시에 루이 블랑의 개혁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좌파들을 모아 나갔다. 그들은 혁명적 생디칼리즘과도 연대하는 한편 파리고등사범 출신들을 영입한다. 조레스의 스승인 에르는 바로 이 당의 기관지 ‘노동자의 당’의 논객으로서, 다수의 글을 기고해 국제사회주의운동과 독일사민당, 영국 차티스트운동을 소개했다. 에르와 조레스의 가담은 지성적 사회주의(socialisme d’ intellectuels)의 신호탄이었고, 이때부터 노동자중심의 사회주의운동에 많은 지식인들이 스며 들게 된다.



4. 조레스주의, 게드를 넘어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광대한 운동으로부터 부상한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하나의 계급이 민주주의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혁명의 처음 며칠이 지나서도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키게 되면 그들은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다.10)


  프랑스의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장 조레스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11) 그들은 대체로 조레스가 프랑스식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 조레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을 따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는 개혁주의자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세력 다수가 부르조아 내부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외면한 드레퓌스 사건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죄 없는 유대인 장교를 탄원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게드파에게 의혹을 받는다. 1899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권에 참여해도 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혁명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적극적 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에 불참하는 원칙을 세우면서, 다만 특별한 상황에서만큼은 장관을 파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면서 매듭지어졌다.


  조레스의 드레퓌스 사건 투신은 사회주의의 보편적 정신을 구현하고 사회주의의 한 틀인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권 참여에 대한 그의 입장이 타협적이고 나이브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혁명주의자들이 도피적이고 순혈주의적이라고 해서, 정권 불참론의 정당성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공화파 정권은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고, 좌파들에게 정부 혁신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지도 않았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조레스도 결국 노동투쟁 속에서 집권세력의 기만을 깨닫고 이를 규탄하는 활동을 펼쳤다.


  개혁주의와 혁명주의의 대결은 1901년 리용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을 위한 3차 대회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브루쓰파와 알망파의 연합으로 프랑스사회당(PSF)이,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합작으로 프랑스의 사회당(PSDF)이 생겨났다. 조레스는 물론 PSF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2차 인터내셔널 6차대회에서 개혁주의는 표싸움에서 졌고 조레스는 승복했다. 그로 인해 등장한 통합사회당이 바로 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SFIO)라는 다소 희한하고도 긴 명칭을 가진 정당이다. 이 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할 때까지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창당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였고, 국가를 부르주아지배의 도구로 낙인찍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게드주의를 이겨내려는 조레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조레스는 좌파당원 3만 5천명을 압도하는 20여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 주목했고,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의 통합을 지향하며, 1906년에는 게드주의를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자본주의 착취가 있는 한 전쟁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게드의 입장은, 조레스에게 있어 명백한 광신적 애국주의이기도 했다. 그는 파업이 전쟁의 도구라는 관점에 반대했다.


  1908년 조레스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세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설정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정복한다. 둘째, 단기적으로는 선거와 의회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때때로 총파업을 실시한다. 조레스는 국가는 하나의 계급이 아닌 계급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전제하며, 국가는 외부의 혁명이나 폭력보다는 내부에서 정복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관철되었고 조레스는 사회당의 명실상부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후 클레망소 내각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노동조직은 여전히 총파업 신화에 빠져 있었으나, 사회당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14년 당원수는 7만 2천여명에 이르렀고, 지식인 그룹도 꾸준히 조레스주의에 합세하였다.

  


5. 개인주의와 다수혁명론의 의의 


프랑스 학자 자크 들로즈는 조레스에게 ‘통합과 종합의 천재’라는 찬사를 바친 바 있다. 조레스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혁명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그의 사회주의는 혁명 대 개혁의 해묵은 대치를 불식시켰고, 혁명노선의 모험주의를 억누르는 동시에 개혁노선의 타협과 타락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론 내부의 투쟁을 무마하는 절충주의로 비쳐지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한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조레스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전통에 사상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조국애가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조국애는 상대적으로 혈통주의보다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래서 조레스에게 조국애는 공화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또 한편으로 조레스는 프랑스 고유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더구나 그의 고향은 개인주의의 주역인 소농민과 소장인들로 가득했다.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 사건을 피해가지 않았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도 반동으로부터 공화국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이 계급문제보다 하위의 가치라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한 인간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가 부르조아일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해치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경계심에 예민하였고 충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아무것고 개인 위에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개인 권리의 최우선적 확인이라고 명토 박았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의 탈집중화론이 경제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비켜갔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는 논리적이고 완전한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확장함으로써 혁명적 개인주의로 이어간다.12) 


자본주의 체제는 소유와 노동을 떼어놓았다. (···) 탈집중론자들은 공상만 하든가, 아니면 반동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입장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소유의 변혁 없는 탈집중화는 오래된 토지 세력의 패권을 복구시키는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이다.13)


  조레스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은 빈곤한 일상으로 인해 단순하다’는 편견에 저항하며 노동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그가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 사고하지 않았고 노동자 개개인의 의식 발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도 좌파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얄팍한 정치공학이 아니라, 개인주의와 그로부터 유래된 다수혁명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진전과 더불어 ‘크나큰 다수(majoritè immense)’가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크나큰 다수는 ‘부르주아와 적대하는 프롤레타리아’로 환원되지 않는다.14) 조레스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민주주의를 토대로 구성한 ‘다수의 의지’가 계급의 독재로 뒤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미래 사회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를 꺼리는 것을 술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다만 진화의 자유와 생의 풍요로움을 존중할 뿐”이라고 대꾸했다. 봉기에 집착하는 혁명주의를 버리고 의회정치와 현장투쟁, 정권 획득 등 모든 정당하고 합리적인 경로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달성에 나선 것도 사회주의의 그러한 ‘열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철권 통치와 인권 탄압에 이어 멸망과 퇴행으로 귀결된 오늘날, 조레스는 레닌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로 기록될 만하다.



6. 다시, 한국을 생각하며

 

조레스가 활동하던 즈음의 프랑스처럼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에도 여러 정파가 존재하며 진보정당과 노동조직에 나타난 분열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 양상 자체보다는 이들이 한줌의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하며 관념적인 이상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여전히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합법정당활동과 의회정치를 개량, 타협, 투항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아무도 혁명에 도전하지는 않지만.


  선거에서조차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사교섭 적용률이 현저하게 낮은 가운데 혁명이란 그저 몽상일 뿐이다. 반면, 의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천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수구파와 보수파의 여론 점유율이 다시 오르는 현상은 명백한 현실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조레스처럼 모든 정당한 수단과 합리적 경로에 도전해야 한다. 조레스와 같은 걸출한 리더쉽 역시 절실하다.


  한국에서 진보 정치의 리더쉽을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물은 정파구도와 종파주의이다. 내부 헤게모니투쟁에 골몰하기를 강조하는 구조 속에서, 대개 리더들은 두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로 흐르기 쉽다. 하나는 분열주의적 리더쉽이다. 51을 차지한다면 100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때로는 51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분열을 꾀해 26을 얻으려 한다. 다른 하나는 봉합적 리더쉽이다. 여기에서는 이 소리로 저기에서는 저 소리로 환심을 얻어 나가며, 최소한 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다수에게 추대되는 길이다.


  언제까지 구조를 탓하며 실효성 없는 담론과 한탄만을 양산할 수는 없다. 필자는 우선, 기존의 구도에 아랑곳않는, 그러면서도 진보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표현하고 구사해 나가는 리더가 먼저 나타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러한 리더는 정치적 허영심이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야 할 것이고, 자연히 기성과 전통으로부터 충분히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사유를 갈고 닦는 사상가적 면모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조레스도 정치가 이전에 사상가였다. 조레스의 혁명적 개혁주의는 프랑스적 전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조레스는 경험과 관찰 그리고 진중한 사유로 진보의 나무를 가꾸었고, 그를 통해 좌파의 분열과 정체를 타개해 나갔다.


  물론 사유와 발언만으로 훌륭한 정치 리더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조레스는 탁월한 행동가였다. 거리와 의회에 한발씩을 디디며 양쪽이 위치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투쟁’과 ‘결정’의 장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오늘 한국에서 다수의 노동자는 수구정당이나 보수정당에 투표하는데 이는 여느 선진국도 말끔히 해결하지는 못한 난제다. 사회경제적 처지와 투표 성향의 괴리는 설명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강렬할 인상을 남길 진솔한 행동만한 방책이 없다.     한국은 프랑스와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공화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전통이, 프랑스와 다르게든 혹은 비슷하게든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나름의 진보정치의 역사는 얼마든 쓰여질 수 있다. 나뭇잎의 모양은 달라도 어지간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면 나무는 어디에서나 자라기 마련이듯. 조레스와 같은-나아가 그를 뛰어넘는-사상가, 정치가의 출현 역시 결코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고문헌]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한국사회민주주의 연구회, <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사회와 연대, 2001.
장석준,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이론과 실천>, 2002년 7월호.
노서경,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55~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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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록

Listen to the 무직 | 2008. 7. 30. 16:33 | Posted by 김수민

1987년 청소년잡지가 집계한 차트에서, 시나위는 2집에 든 노래들로 1위부터 6위까지를 휩쓸었다. 들국화나 송골매와는 달리 디스토션을 과감히 걸고 나선 메틀 밴드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White Snake의 <Here, I go again>이나 Van Halen의 <Jump> 같은 대중적 히트곡을 남기지는 못했다(이 두곡을 특별히 예로 든 건 빌보드 차트 1위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야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와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바로 직전에 서태지가 있었다.

<난 알아요>에서 회오리춤과 함께 몰아친 신서사이저 사운드는 대중가요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록의 파수꾼으로서 침투했음을 숨기지 않는 기타 사운드였다. 초반의 랩 파트에서 브리지("난 정말 그대그대만을 사랑했어") 사이에 펼쳐진 신대철(아니면 손무현)의 기타 리프는 서태지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2집에서 들고 나온 <하여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궁상박치우나 태평소 소리, 스크래칭 등은 하나의 악세사리였을 뿐이고, 곡 전반은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록 사운드가 지배하고 있다.

그 경향은 차트 상위권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선동가로 남은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완전히 만개하고 말았다. 서태지는 '아이들'과 함께 기타 사운드에 대한 거부감을 춤으로써 무력화시켰고, 록 매니아가 되는 또다른 경로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3집은 사회적 반향에 비해 음악적 호응을 이끄는 데는 실패했고, 서태지는 4집에서 록과 힙합의 분군행진의 전략을 취한다(<컴 백 홈>+<필승>).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2년 뒤 그는 록커로 컴백한다.

솔로 데뷔 후 그의 음반에 썩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6집에서 시도한 소위 랩코어, 뉴메틀 사운드는 그의 목소리로 따라하기는 버거웠고, 그에게 맞게 재창조되는 것도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음반과 음반 간의 장르적 격차를 좁힐 줄 몰랐고, 그가 선보인 사운드는 예전처럼 그때그때의 구미 팝의 시류를 따랐다. 그러나 청자들이 더이상 신선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환상 속의 그대> 중에서)

우연히 네이버의 어느 블로그에서 새로 나온 <모아이>라는 곡을 듣고 알아차렸다. 보다 부드러워지고 멜로디컬해진 7집에서야 그는 비로소 중심을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또 한번 변신을 감행했다는 것을.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변신은 서태지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곡 자체도 꽤 서태지다웠다. 그에게 덧씌워진 과도한 광휘를 벗겨낸다면 더욱 흡족하게 듣고 즐길 만한 작품이다.

1980년대 메틀의 세례를 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1990년대 한국 팝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승환이나 유희열도 록커였거나 록매니아였다는 뒷이야기는 그러한 진술을 더 단단하게 받친다. 그러나 이들 뮤지션 상당수는 2000년대 들어 10대와 구별되는 20대용, 또는 20대와 구별되는 30대용의 음악인으로 머문 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중음악은 외화내빈의 극한에 이른 듯하다. 서태지의 팬층도 확확 넓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깊어지기는 할 터이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앞으로 음악을 펼쳐갈 나날이 지난 세월의 이상이 되기를 바라는 이로서, 나는 그가 어떻게 해쳐 나갈지 참 궁금하다. 그가 록 뮤지션이라서 더 궁금하다. 그것도 1980년대 메틀 키드 출신이니. 나는 문닫은지 꽤 오래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파고다 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이다.

추신: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댄스 가수'였을 때가 더 좋았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권한다. <난 알아요>와 <하여가>를 포함하여 1집과 2집에 든 몇가지 노래를 추억 속에서 떠올리지만 말고 다시 한번 잘 들어보라. 아는 사람은 다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몰랐던,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태지의 한방은 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록팬으로서의 내 허장성세 섞인 호언이다. 록이 배후에 있을 때와 전면에 나왔을 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아름다웠는지는 제가끔 느끼고 판단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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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선거 투표를 하러 연희장로교회에 갔다. 노부부 두분이 있었고 투표장은 한산했다. (앗, 개표함 앞에는 지난 총선 때 나와 같이 참관인 했던 아주머니가... 한나라당이었던가 가정당이었던가.. 그래도 왠지 반가웠다.) 투표장 바깥에서는 중학생들이 투표안내를 하고 있었다. 안내는 되고 투표는 안 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일행이 교육감 선거 이야기를 한다.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YTN뉴스에서 호주의 스타벅스 30퍼센트가 문 닫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떤 이가 말한다.

"저기 있지 말고 다 한국에 와야 돼. 한국에서 비싼 값에 커피 팔아먹는 건 당연한 거야. 수요-공급 곡선에 맞춰가는 거지."

얼마 뒤 이천수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나왔다. 그러자 그이가 말한다.

"저새끼 국부 유출 주범이야. 해외 나갈 땐 십몇억에 팔려가더니 들어올 때는 30억이야." (나는 이게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른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태도는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로 힘을 갖고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88만원세대의 평균적('평균'이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경제관에 가깝다. 글쎄, 내가 운이 없어 한쪽만 본 건가. 아니면 너무 비관적으로 판단한 건가. 그래도 시장주의와 민족(국가)주의의 기괴하고도 태연한, 그래서 자연스럽게까지 보이는 합작은 또렷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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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면의 90년대와 80년대

Listen to the 무직 | 2008. 7. 28. 00:51 | Posted by 김수민


예전 여기서 크라티아의 보컬 출신으로 <의미 없는 시간>으로 유명해진 최민수를 소개했었다. (<최민수의 두 얼굴>) 그는 김종서나 서태지, 임재범만큼 록밴드 출신이었음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80년대 메틀로 출발하여 90년대 가요의 귀중한 흔적을 남겼다. 비슷한 예로는 김성면이 있다.

동영상은 김성면을 스타덤에 올린 <사랑과 우정 사이>다. 1993년에 <다시 만난 너에게>로 이름을 알린 피노키오의 최고 히트곡으로, 신효범의 <난 널 사랑해>, 이상우의 <비창>과 함께 1994년도 봄을 강타한 발라드 넘버다(작곡자는 오태호. 오태호는 손무현과 함께 록 기타리스트로 출발해 작곡가 및 프로듀서로 성공한 대표적인 예이다). 김성면은 이듬해 피노키오를 탈퇴하고, 기타리스트 이태섭과 함께 K2를 결성하여 인기 행진을 이어간다. 이태섭은 본격적으로 스래쉬 메탈을 시도한 거의 최초의 밴드인 '아발란쉬' 출신으로(그 이전에는-또는 그 전후에-'한가람'이라는 밴드가 있었다고 한다), 서태지의 <하여가>를 연주하기도 했었다.

디스코그래피상 이태섭과 김성면의 첫 만남은 1988년 <프라이데이 애프터누운 1>이었다. 물론 한곡에서 만난 건 아니다. 김성면은 'Iron Rose(철장미)'라는 밴드의 보컬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IRON ROSE(철장미). 오른쪽 썬글라스를 낀 이가 김성면.


음성과 창법은 피노키오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고, K2의 <잃어버린 너>에서도 이러한 과거의 자취가 느껴진다. 밴드 시절 김성면은 노래의 기본은 무시하고 무작정 록에 도전하는 분위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멜로디컬하고 여린 감성의 노래에서 그가 지닌 개성이 돋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언더그라운드(요즘말로 '인디')에서도 이러한 록 보컬리스트가 있을까? 나중에 록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한국 팝의 2010년대를 수놓을 준비된 싱어가 있을까?



IRON ROSE(철장미) - <RAIN(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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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능'과 '그 일'

Free Speech | 2008. 7. 26. 02:25 | Posted by 김수민

내게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특기가 하나 있다. 나는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로 볼펜을 한바퀴 돌릴 수 있다(한창 땐, 조금 짧은 볼펜을 두바퀴 돌렸다. 아니, 두바퀴 반이었던가?). 그런데 내가 그러한 쪽이 아니라 밥벌어 먹고 살 수도 있는 하나밖에 없는 재능이 있음을 요사이 깨달았다.  

어쩌나. 나는 그것과 전혀 무관하게 스물 일곱 평생을 살아왔다. 나는 이 곤혹스러움을 모른체하고 있다. 그동안 재능도 없는 분야에 도전하고 살아온 아둔함을, 나는 책망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신의 재능을 찾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뒤늦었고 아무 밑천도 없으면서도 도전하는 용기도, 재능의 하나이다. 결국 나는 재능이 없는 거구만.^^  

나의 일부를 한껏 드러내면서도 남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안타깝다. 그러한 직종의 일은 의외로 별로 없다. 은둔과 기행의 소설가 이외수도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지 않았는가. 숨어서 해도 꾸준히 하고 이름값을 올리다 보면 마침내는 얼굴을 팔아야만 한다. 거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반면, '그 일'은 얼굴을 내비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일'을 하다 얼굴이 꽤 알려진 이들도 있지만, 적잖게 성공하고 나이먹은 이들까지 포함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물론 새로운 세대는 종종 그들의 얼굴을 보길 바라나, 그럴 가능성이 없는 세부분야에 집중하면 그런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게 '그 일'이다. 쩝쩝. 아깝다.  

(내가 연극을 잘하리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러나 나는 외모컴플렉스 비슷한 것이 있어서, 그건 불가능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불가능하다. 이건 충분히 검증되었으므로, 기죽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따위의 조언은 나한테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나더러 정치를 하라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나를 개망신시키는 지름길일 뿐이다. 내 라이벌은 '뒷집 개'-'뒷집 개짖는 소리처럼 대우한다'는 표현이 있다-이고 그는 출마할 수 없으므로 나는 누구한테도 표로 이길 수 없다.

'그 재능'과 '그 일'이 무언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기로 하였다.(짐작은 소용 없다. 당신이 틀릴 테니까.) 나는 '그 일'에 종사하지 않고도 왕왕 '그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 약간이나마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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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마, 나도...

Free Speech | 2008. 7. 26. 02:24 | Posted by 김수민
6월 28일이었지 싶다. 20만명의 인파가 모여 시위를 했던 날이다. 시민들과 경찰은 격렬히 충돌했고, 차벽 뒤에 숨어 있던 경찰들이 치고 들어와 차도를 차지했다. 시민과 경찰은 인도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물론 전선은 우습게 뭉개졌다. 시위하다 흩어진 시민들이 인도로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쓰는 작은 바리케이트도 세개나 쳤쳐놨건만 그 앞으로 태연하게 걸어가는 아군들...(이는 올해 촛불시위를 상징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때 어떤 중딩께서 까나리 액젓을 물총으로 전경 방패에 쏘고 있는데, 어떤 양복 입은 아저씨가 그러지 말라고 말린다.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라면서 지나갔다. 나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저거 저, 노무현 똘마니 아냐?" 그러면서 나는 노무현 욕을 늘어놨다.

그랬더니 중딩으로 보이는 어느 여학생께서 나를 쫙 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노무현을 씹어대자 씩씩거리기까지 한다. 모른체하고 주디질하느라 은근히 혼 났다.

'얌마, 나도 중딩 때 노무현 왕팬이었어.' (겹따옴표가 아니라 홑따옴표임을 유의하라)

방안 책장에 꽂힌 <여보 나 좀 도와줘>를 발견하고 문득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샀던 책이다. 그때만 해도 노무현이 대통령까지 하고 나한테 욕 먹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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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열사 26주기

Free Speech | 2008. 7. 23. 12:04 | Posted by 김수민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희생자인 정성희 열사의 죽음은 그저 '의문의 죽음'이라, 의문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추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까요? 사망 사고의 현장이 민간인통제구역 안이라 제대로 된 조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유가족은 각서를 통해 부검을 포기하고 화장에 동의하였습니다. 휴가 전후 보안부대에 불려 갔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보안부대는 끝끝내 관련 사실을 부인하여 그의 죽음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학생운동 참여자들을 강제로 군에 징집하고 그들을 통해 운동권을 분쇄하려 했던 독재 정부의 음모는 확연한 사실이었으며, 고인의 사망 과정이 어쨌든 이는 분명히 '직접적 사인'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연세대 당국과 학생들은 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문을 열사로 기리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왜'인지를 물어보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집니다.

잊혀진 두분의 연세대 열사를 추모하고, 그들을 숨지게 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공부하기 위해 사이버 기념관을 열었습니다. (http://club.cyworld.com/yonseiyolsa)

정성희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성희  
  (1961년~1982년)   당시 20세 학생열사
 
1962년 1월 출생
1981년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1981년 11월 25일 시위관련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음
1982년 11월 28일 강제징집됨
1982년 1월 4일 자대배치, 이후 학원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옴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노래방 송별회 자리에서 부르지만, 실은 작자가 군에서 숨진 자신의 형을 기리면서 만든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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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Free Speech | 2008. 7. 20. 13:26 | Posted by 김수민

최근 우리 집안이 불교에 귀의하면서 개고기를 본지가 꽤 됐다. 나는 아홉살 때 매달린 채 할아버지에게 껍질이 벗겨진 개와 마당 큰 대야에 담겨진 그 잘린 머리를 보았다. 그리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냥 '헉'하고 지나갔다. 아니 차라리 '헐~'에 가깝나?) 그러나 개고기를 즐기지는 않았다. 고기에서 나는 향도 마뜩치 않았거니와 아무리 먹어도 특별히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먹을 바에 닭이나 소, 돼지를 먹지.

자신과 거리가 먼 고기를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그것은 인류의 진화와 문명화에 엮여 있기도 하다. 소는 소를 먹으며 광우병에 걸렸고, 인간은 그런 소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개고기를 먹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너는 진화가 덜 되어 미개인의 습속이 남아 있다,는 소리도 입밖에 낼 이유가 없다. 다만 한가지만큼은 알아두는 게 좋겠다.


개를 먹으면 절대 체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먹어본 사람들은 다 동의할 텐데, 여기에는 그리 산뜻하지 않은 원인이 숨어 있다. 개는 닭, 돼지, 소보다 지능이 발달하여 스트레스에도 예민하다. 개를 때려잡을 때 온몸에 물이 오르면서 고기가 순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는 도축방법의 개선과 개고기 양성화를 떠받치는 사실이기도 하다.


개고기 먹으면 야만인이라는 오리엔탈리즘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방금 어느 누리집에서 '피를 토하듯' 개고기를 지지하는 글을 읽고 문득 생각이 났다. 분명한 건, 개의 몸과 마음은 돼지나 소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할리가 달팽이와는 달리 인간의 친구인 개를 어찌 먹느냐는 이다도시에게 반박하였듯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물오른 개고기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앞지르는 생물학적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 아,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난 찜찜한 기분에 비해 맛이 영 떨어지기에 개고기를 안 먹는다. 달팽이? 찜찜하지 않고, 맛만 있으면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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