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한동안은 '미전향 장기수'라는 말이 쓰였다. 그러던 것이 '비전향'으로 바뀐 것은 '미-'라는 접두사가 '되어야 할 것이 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서, 전향을 당당히 거부하는 장기수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논리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만큼은 아니지만 '비혼'이 '미혼'을 밀어내는 모습도 이따금 보인다.
'미조직 노동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진보적이어서 아무래도 모두가 '비전향 장기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때의 접두사 '미-'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각별히 선택되어 대안적인 문제의식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노동자들을 구체적 차원에서는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하다못해 교섭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로,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급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일념에 기초한 선택이다. 나 역시 당연히 방안과 사고를 좀 달리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조직과 형성'이라는 명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미조직 노동자'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눈에 띄는대로, 틈나는대로 재고를 요청할 생각이다.
당장에 '비조직'으로 써도 조직화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는 시시껄렁한 설명이 가능하거니와, '비-'는 '미-'보다 규정성이 약하다. 규정성이 약한 것은 적어도 폭력이나 중심성, 타자화 등등의 위험은 훨씬 덜하다. 극복되어야 할 현실지언정 현실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앞으로 기필코 조직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담기보다 '조직되지는 않은'이라는 정도로 규정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짧은 시간동안 성과주의의 눈총을 받을지도 모르나, 목적 이전에 지향한 가치를 지키며, 전략적으로도 폭넓은 조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좋은 인식에서 좋은 실천이 나오고, 강박감을 버리는 것은 좋은 인식의 첫걸음이다.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등성명을 부르기 힘든 '그냥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한다. 아무리 악의 없는 생각일지라도 두려움을 잃은 접근은 몽상 아니면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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