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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값들에게

Free Speech | 2008. 8. 26. 15:18 | Posted by 김수민
헛소문도 몰래 퍼뜨리면 진상이 되나 보지?
모함하다 걸리는 순간 얼굴 표정부터 연습해 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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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재판기록 요약

史의 찬미 | 2008. 8. 23. 00:00 | Posted by 김수민

미국측 기밀문서를 통해 실제 스파이였음이 드러나고 있는 이강국의 재판기록을 요약해 봤습니다. 물론 북조선측의 문서이고 박헌영간첩설의 신빙성이 떨어지는지라, 상당수 또는 전부 또는 일부가 조작되었을 개연성을 고려하고 읽으셔야 할 듯하군요.

어떤 역사학자들도, 제 개인적으로도 결론을 잘 못 내리고 있습니다.

궁금해 하는 지인들이 있어 노가다하며(ㅜ.ㅡ) 요약했습니다.

심지연 교수가 집필한 <이강국 연구>의 마지막 부분인 474~489쪽에 '부록 3: 이강국 관련자료'를 펴시면 전문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증인 리강국에 대한 신문(리강국의 진술)

- 1945년 11월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소집에서, 하지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이를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음.
-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를 받고 미국 500만 달라 강제 차관 반대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입북 지령을 받음.
- 박헌영의 비호로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직에서 간첩활동.
- 박헌영의 도움으로 비밀정보 입수하여 뻐트(미군 24사단 헌병사령관)에게 제공.
- 1950년 봄, 박헌영이 입북시킨 미국 간첩 현 애리스와 관계.

* 기소장

- 그는 1935년 미국 뉴욕에서 정탐부원인 크로리에 의해 간첩으로 고용.
- 크로리와 련계를 가지려 김수임과 련애. 김수임을 반도호텔에 취직시켜 뻐트에 접근.
- 1946년 6월 뻐트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 그후 월북하여 그의 간첩으로 가담.
- 월북 후 리강국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각 분야의 중요 정보를 수집, 제공.
- 1950년 5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간첩 현 애리스, 리 위리암을 평양 자택에서 두차례 만나 밀담.
- 노블의 지시에 의해 활동한 리승엽과 련결 가지기 위해 노력.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당에서 리용할 것을 소개.
- 리승엽 도당의 간첩활동에 가담한 리강국은 1952년 10월까지 수집된 군사기밀을 비롯, 4차에 걸쳐 당, 정부의 중요 비밀을 수집, 림화를 통하여 리승엽에게 제공.
- 림화는 자기 진술에서 리강국과 리승엽 간의 련락에 대해 리승엽 및 공모자들의 정체를 음폐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

* 피심자 각 개인의 죄명

- 그(리강국)는 공산주의의 탈락자. 1935년 독일 백림대학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할 때 미국 정탐기관의 크로리를 만나 범죄적 련계를 가질 것을 밀약.
- 1946년 9월 간첩활동 서약. 1947년 1월부터 북조선 외무국장 직위 잠입. 1948년 8월까지 5차에 걸쳐 비밀을 수집하여 미국 정탐기관에 제공. 1950년 5월경에는 미국 간첩 현 에리스, 리 윌리암과 간첩행위 감행을 약속.
- 1951년 7월부터는 리승엽의 지도 하에 있는 간첩망과 련계, 1952년 10월까지 4차에 걸쳐 공화국의 군사 정치적 비밀을 수집 제공.
- 조선을 미제에 예속시키고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정치적 모략활동 감행.
(리강국의 직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조선 일반 제푸 수입상사 전 사장'으로 표기되어 있음- 간추린이 주)

* 공판심리

(경력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주문)
- 저(리강국)는 진정한 맑스 레닌주의자가 아니며, 호기심과 공명심에서 맑스 레닌주의를 연구.
-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독일 계통이고 독일은 사회주의운동이 강하였기에 독일로 류학.
- 1932년 재독 공산주의자에게 지도받고, 프로레타리아 과학동맹 가담. 혁명적 아세아인 회의 참가. 1932년 10월 독일공산당 가입, 일본인 그루빠 책임자. 1935년까지 공산주의 실천활동 전개 후 학비관계와 본국에서의 운동을 이유로 11월 말 귀국.
- 마야께 교수사건 관계자로 일경에 체포, 기소유예 석방. 처남이 경영하는 증권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함.

- 1936년 4월 리주하와 원산 적색노조와 관계를 맺음. 1938년 10워 원산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저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음에도 피신생활을 계속하다 동년 12월 체포.
- 1941년 5월까지 감옥생활하며 동지를 팔지 않음. 1941년 5월 예심 종결 당시 "공산주의 실천운동에서 손 뗀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는 전향문 작성. 보석 석방. 1941년 5월 출옥 후 다시 체포, 1942년 2년 징역, 5년간 집행 유예 판결, 석방.
- 1942년 5월부터 8.15까지 대화숙 회의에 참가나 신궁 참배하지 않음. 술, 마작으로 세워을 보냄. 변절은 했으나 협력은 말자고 맹세. 조준호의 경제적 원조로 부화한 생활하며 적극적 친일파가 되지 않음.

- 일제말기에는 최용달과 같이 해방 맞이 태세. 세계정세를 약간 알았기에 민주진영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점을 리해하고 8.15와 동시에 민주주의진영에 나섬. 려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사업에 참가, 박헌영의 공산당 조직에 참가. 속죄의 정신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열성 발휘. 
- 1945년 9월 인민공화국 참가, 1946년 2월 민전 사무국장, 1946년 9월 하지 정책 규탄선언 발표하여 체포령 내리자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입북 후 박헌영의 신변인으로서 1946년 10월부터 1947년초까지 사업. 1947년 북조선 외무국장, 1948년 9월부터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이후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1년 11월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무역성 일반 제품 수입상사 사장.


(미국 간첩 활동에 대한 질문)
- 저는 자원적인 미제의 주구. 불가피적으로 간첩으로 전락한 공동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라고 자인. 세계주의 영향으로 부르죠아적 자유주의사상 잔재가 농후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높이 평가.
- 독일 류학시 만난 미국인 크로리는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맑스주의에 동정적. 미국인 공산주의자라는 사람 2명까지 만나 담화.
- 귀국 후 일제의 탄압과 자신의 안일 위하여 운동을 적극적으로 못하고 미국인과의 련계도 맺지 못함.
- 해방 후 남조선이 미제에 강점되었으므로 더욱 미제와의 련계 희망. 적당한 기회가 없어 하지 뻐취(미군정 사령관)와는 공적인 관계만 맺음. 김수임의 반도호텔 취직에 동의. 김수임을 통해 헌병사령관 뻐트와 상면, 협력 약속.
- 미제가 획책한 좌우합작공작에 순응. 3당합당을 표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내막으로는 이 사업을 지연. 미국 간첩과 련계하였으나 표면상 미군정 정책을 규탄하여서 체포령이 내려짐. 김수임의 집에 숨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 입북 후 미제와의 련계 그리고 38선까지 헐하게 오기 위해 뻐트 만남. 뻐트는 체포령이 하지의 명령이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입북한 뒤에도 협력하자며 요구. 1. 김수임을 민주진영과 련계를 지어줄 것 2. 미군이 이북에 잠입시키는 자들을 옹호하여 줄 것 3. 우리의 필요한 자료를 보내줄 것.


- 뻐트가 소개한 미국인 차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와서 개성에서 최만용의 안내로 입북. 박헌영은 미국인 차를 타고 왔음을 말할 필요 없다고 일러둠. 입북 후 남조선 출신 불평분자들을 중심으로 친우 물색. 권오직, 한병옥, 장시우, 박승원, 림화 등과 친교.
- 1946년 10워 서득은에게 김수임 리용 권고. 1946년 12월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하는 방법 획책. 1947년 1월~1948년 5월 5차 정보 제공. 비서 신태희->김수임->빠트. '1947년 인민경제바런계획서', '쏘미공동위원회에 대한 쏘련측과 북조선측의 태도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표', '평양학원과 금강학원의 무장상태 훈련 등이 정규군과 같다는 세밀한 내용', '1947년 인민경제계획 실천 정형', '8.25 총선거를 위한 문건들과 간부 책벌 결정을 위시한 1948년도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등 제공. 아울러 이외에 날조문건 2건. '쏘련군사령부의 간섭이 있다는 것', '화폐개혁으로 소시민들의 재산 강탈, 인민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
- 1948년 8월 이후 정치적 실각으로 위축, 공작 중단. 1948년 미군 간첩 현 애리스와 리 윌리암 래방. 1950년 재차 방문하여 협력 요구. 그후 그들이 오지 않아 간첩 련계 맺지 못함.
- 1951년 6월 리승엽은 전달할 자료는 림화를 통해 달라고 말함. 전달자료가 간첩자료임을 직감, 응락.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한 후 리승엽은 김수임을 인입했다고 말한 바 있고, 1948년 8월 후 김수임으로부터 련락이 없어 리승엽과 김수임이 직접 련계를 맺는다고 생각했고, 리승엽이 신변을 주의하라는 충고를 준 일이 있었고, 리승엽이 저를 등용하려 노력한다는 점 때문.
- 리승엽의 요구가 그리 큰 기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그런데 리승엽은 제가 김수임을 소개하기 전부터 미제의 간첩이었음. 때로 저는 리승엽을 김수임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리승엽이가 간첩이 되었는가 고민.
- 자료는 림화가 취사하여 리승엽에게 제공케 함.


(피소자의 길과 실지 행동의 모순을 묻는 검사에게 리강국은 모순된다고 대답. 계급적 리해, 조선혁명이 아닌 류행식 맑스주의 조류에 인입하였고, 공명심 출세주의에 의해 활동을 했다고 밝힘. 박헌영의 테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지지한 리유로는 변절적 기회주의적 이데올로기, 명확한 테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 박헌영과 협력하면 출세주의적 숙망이 달성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을 듦. 테제의 내용이 반당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소부르죠아 정당화하는 노선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지지했다고 말함.)


(이어서 검사는 리승엽에게 림화를 통해 리강국의 간첩자료를 받았느냐고 묻고, 리승엽은 인정)
(리강국은 친한 녀자의 알선으로 미국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박헌영에게 보고했고, 어떤 녀자라는 질문에 당내에서 일반적으로 리용할 수 있는 녀자라고 대답하였다고 진술)


- 1951년 7월에 와서 비로소 리승엽이 간첩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 저는 사상적으로 다른 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고, 해방 전부터 계속된 간첩이다. 국제간첩과 련계를 맺었다는 것을 승인함. 김수임의 소식은 들었고, 내용은 그가 1950년 미국 놈들에게 학살되었다는 것. 간첩자료는 한병옥, 장시우 등에게 제공받은 게 아니라 그들과의 담화과정에서 내가 수집한 것. 미제에게 제공하기 위해 리승엽에게 자료 넘김.
- 변호인 길병옥: 뻐트와 련계 맺고 남반부에서 정보자료 제공하였나?
  리강국: 그땐 없었다
- 변호인: 김수임을 리승엽에게 소개한 리유는?
  리강국: 뻐트의 요구대로 김수임과 남로당의 련결시키려.
  변호인: 신문 끝.


(재판장은 빠트에게 받은 임무를 입북하여 수행하였는지, 모략행위가 일상적이라는 기소사실을 승인하는지 물었고, 리강국은 승인. 리강국은 피소자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미제의 전형적 주구'라고 대답. 김수임은 처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설명. 모략행동의 배경으로는 박헌영을 거론. 리승엽과 림화는 리강국의 진술에 이견이 없다고 밝히고 재판장은 30분간 휴정 선언)

* 국가 검사의 론고,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우선 그는 대지주의 출신이며"라고 시작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하 생략. 위의 요약내용과 겹침.)

* 피소자 리강국에 대한 변호인 길병옥의 변론

(내용 생략)

변호인은 논고에 대한 반론이나 정상참작의 논거 제시 없이, 마치 논고를 발표하듯, 아니 검사보다 더 매서운 태도로 피소자들을 몰아붙였다.


* 리강국의 최후진술 (전문)

저는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조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하여 예심과 공판 심리를 통한 자기비판의 기회를 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과 인민이 주는 벌을 감수하겟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의 죄과를 인민 앞에 자비함으로써 옳은 사람이 되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공판문헌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이건 간에, 이 지식인의 추락에 서글픔과 씁쓸함이 느껴진다.

* 판결

(생략)

* 주문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형법 제68조에 사형,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을 각각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형에 처한다.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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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 메모 4

Film Tent & 2nd Stage | 2008. 8. 20. 23:23 | Posted by 김수민
8월 18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감독인 이만희 선생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다뤘다가 곤욕을 겪기도 했었지만, 이건 전형적인 반공영화. 이만희는 영화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영화배우 이혜영은커녕 '코코'의 이혜영도 겨우 알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사람이리라. 이번 영화제에서 영화음악상을 수상한 고 전정근 선생이 OST를 맡았다. 최무룡, 독고성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나, 가장 돋보이는 건 구봉서이다. 1963년작인 이 영화 하나를 놓고 말하는 것이 부실하기는 하나, 그 당시의 구봉서는 얼핏 지금으로 치면 송강호 같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9&no=168


<드럼비트>

꼬이고 꼬이다 파탄이 나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 그러나 입체적 구성에 기울인 노력이 너무 과다했는지 산만하고 지루한 중반부 진행을 보인다. 또다른 감독이 만들어 OST로 깐 드럼 사운드가 더 돋보인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4&no=148


8월 19일

<모로코 힙합 페스티벌>

이런 류의 영화는 앞으로도 쭉 나올 것이다. 회교 국가에서 뮤지션들이 겪는 난항을 다루었다. 모로코의 힙합 뮤지션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국의 전통음악을 접목시키는 등의 가상한 노력을 기울인다. 사회의 천시는 물론 심지어 힙합팬으로부터도 야유를 받는 소녀 래퍼도 주목할 만하다.

모로코는 회교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알 카에다의 테러를 당한 나라다. 래퍼들은 테러범들에게 "내 조국에서 손떼!"라고 노래한다. 그런 반면, 미국 대사관이나 코카콜라는 이들의 페스티벌을 지원하는 원군이다. 한국의 반미지상주의자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미국을 반대하는 편보다는 미국을 더 미워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6&no=174


<위대한 사운드의 세계>

미국에 창궐하고 있는 신인발굴작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GWS(위대한 사운드의 세계)는 크지는 않은 음반업체로, 오디션에 참가한 아마추어 뮤지션들을 꾀어 음반작업에 끌어들이면서 그들에게 작업비용의 30퍼센트를 뜯어내는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영화는 드라마이면서도, 실제 오디션 장면을 당사자의 허락 하에 영화에 삽입해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일부에 포함하고 있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4&no=152


폐막작 <비지터>

이번에 관람한 작품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다. 거의 비워놓다시피한 뉴욕의 아파트에 돌아온 경제학 교수가 어쩌다 그집으로 흘러든 불법체류자 커플과 마주치면서 교감이 시작된다. 남이 쓴 논문에 얹혀서 발표자 노릇을 하고 늘그막에 그나마 배우던 피아노마저 포기한 월터 교수 역할은 리처드 젠킨스가 맡았다. 감독은 매카시즘 비판 영화인 <굿 나잇 앤 굿 럭>에 출연했던 톰 매카시(아이러니한 이름이다. 옛날 민주당내에서도 진보파로 꼽혔던 유진 매카시라는 또다른 매카시가 있기는 했으나).

첫 대면의 격함과 쑥스러움으로부터 등장인물이 빠져 나오는 건 '북' 덕분이다. 이들은 함께 북을 치고, 청년이 검문검색에 걸린 후로도 교수는 북을 연마한다. 면회 장면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스토로크와 청년이 시리아로 강제추방된 뒤 정적이지만 깊은 분노에 찬 교수가 지하철에서 북을 두드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9.11 이후 미국의 이민자정책을 향한 정면 공격이기도 하다.

미국의 어떤 역사나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들이 다른 한편으로 애국주의를 더 선동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가 그랬었고, 마이클 무어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용소 벽에 붙은 자유의 여신상과 쌍둥이빌딩 그림, 공항에 붙어 있는 성조기 등으로 미국의 오늘을 야유하면서, 구차하게 '우리가 비판하는 건 가짜 애국이고, 우리는 진짜 애국이다'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폐막식에 참석한 한나라당 소속의 제천시장과 국회의원은 이 영화를 다 보고 집에 갔을까. 봤다면 어땠을까. "미국이 얼마나 좋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저렇게 떼를 썼을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초등학생도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우익 공화당원들은 verse를 통째로 빼먹고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미국에서 태어나>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꼬라지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한나라당은 그보다 더 멍청하잖아.  

2007년 발표된 영화인데 향후 한국에서 상영일정이 잡혀있는지 모르겠다. 관람을 권한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5&no=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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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이 구여운 북한 따라쟁이들...

Free Speech | 2008. 8. 19. 17:11 | Posted by 김수민
그니까 북한의 9.9절 같은 걸 너네도 한번 해보고 싶은 거지? 근데 그게 광복절이랑 겹쳐서 재섭다며 별러 왔던 거고. 박정희가 김일성한테 열폭해서 유신 만든지 36년이 지났다. 진도 좀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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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간첩설과 이강국 간첩설

史의 찬미 | 2008. 8. 18. 01:43 | Posted by 김수민

새내기 시절, 어떤 신문을 만들면서 대여섯살 많고 공부가 깊은 선배들이랑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두 선배가 논쟁을 벌였다. 지극히 점잖았지만 두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는가'라는 주제였다. 한쪽은 재야사학계에서도 그 문제는 결론이 난 상태이며, '김 주석(상대방의 통일주의적 정치 성향을 배려한 호칭이었으리라)의 권좌는 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다른 한쪽은 학내 NL 운동진영의 이론가로 꼽히는 형이었는데, 그는 박헌영의 집에서 무전기 등의 물품이 나왔다고 반박했다.

그때 나는 이것이 여전히 논쟁거리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나는 제로 베이스에서 이따금 박헌영 사건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펴본 공판문헌은 박헌영의 모든 행적이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조선은 박헌영과 미국의 연관을 표가 나게 무리해서 꿰어 맞추었다. 소설로 쓰기에도 버거울 만한 조작이었다. 젊어서 선교사 언더운드를 만나서부터 스파이로 기용되었다니(여기서의 언더우드는 원두우가 아닌, 그의 아들 원한경을 가리킨다). 그런 방식으로 태연하게 1950년대 피의 숙청을 시작한 김일성 정권은 인혁당사건을 조작해낸 박정희 정권에게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박헌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남한 좌익의 정통성을 박헌영에게서 발견하려는 시도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수로 있던 조선공산당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서도 종파주의를 휘둘러 댐으로써 여운형이나 백남운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결과적으로 좌익정당의 협동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남조선노동당은 좌익3당 각각의 다수파만을 모은 것이었고, 소수파들은 사회노동당을 만들고 그것은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진 뒤 다시 남북으로 흩어졌다. 10월봉기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은 정작 남한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을 다시 잇기 위해 북조선의 부수상으로서 무리하게 전쟁을 부추기고 밀어붙였다.

한데, 이러한 박헌영의 전쟁책임까지 변호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결과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진격으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김일성이 박헌영을 몰아세우며 잉크병을 벽에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박헌영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이야기렸다. 물론 김일성이 원래 반전파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전쟁 개시에 가장 공 들인 사람은 박헌영이다. 강정구 교수는 파문을 일으켰던 '통일전쟁' 발언을 하면서, 북조선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사회주의연합정권'이 들어섰으리라는 가정을 던진 바 있다. 아마 그런 정권이 태어났다면 박헌영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 인맥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전쟁에서 '국토완정'의 꿈은 박살났고, 박헌영은 결국 김일성에게 졌다. 이로 인해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 박헌영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나는 어느 대학생 단체의 회의에 처음 나갔을 때, 박헌영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에서 약간의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다. 박헌영에 대한 나의 비판이 일제 말기 지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똥짐지고 손수 일했던(벽돌공장에 숨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그 같은 인텔리가 과연 일을 했을지, 또는 해도 제대로 했을지는 나는 좀 의문이다) 그의 헌신을 간과하고 있으며, '당신이 박헌영보다 존경한다는 여운형은 쓸모가 없어 은도끼라는 별명도 있지 않았냐'는 요지였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박헌영에 대한 호평이 근근이 전해 내려져오던 전설에도 있었지만, 남한으로 귀순한 그의 측근 박갑동에 상당히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갑동이 옛날 신문에 썼던 연재는 상당히 반공주의적이었는데 이를 두고 당대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박갑동은 이철승과의 대담에서 해방정국기를 정리하면서 사정없이 밀리는가 하면, 심지어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독재정권기였던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것까지 이해해줄 수는 없다.  나는 박헌영의 추앙자들에게 박갑동 씨의 진술에 의존하지 말 것을 언제나 당부하고는 한다.

그런데 내가 박헌영의 추앙자들과 대화하면서, 입밖에 반쯤만 끄집어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완벽한 조작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헌영간첩설은 조작이겠지만, 이승엽이나 이강국을 향한 의심까지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씨의 노력으로 공개된 비밀문서에서 이강국이 CIC(미군방첩대) 요원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던 차였다. 거칠게 말해 나는 남로당계열이 예의 버릇대로 천방지축 잘난체하다가 북조선에서 호되게 당했다고, 또한 그중에서 실제 미국간첩도 있었고 덕분에 더 꼴사나워졌다고 생각한다.

박헌영의 추앙자들은 이재유, 이현상, 이강국의 추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노동현장의 활동가들과 권력을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남로당계 인텔리그룹은, 설령 그 둘의 노선이 같다고 치더라도 생활이나 사고의 방식에서 나오는 차이를 준거로 다소 분리해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강국과 박헌영도 분리되어야 할 것 같다. AP통신은 여간첩으로 마녀사냥 당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이 꾸준히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강국이 CIA의 스파이였음도, 그러니까 이강국이 김수임을 북조선의 간첩이 아닌 미국과의 연결고리로서 이용했음도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

김일성이 정당하게 스파이를 처단했을 뿐이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강국이 간첩이라는 것이 박헌영이 간첩이라는 것을 곧바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박헌영 간첩설을 거두든지 제대로 된 실증을 하든지 할 일이다. 일설에는 김일성이 죽기 얼마 전 박헌영의 복권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도 입장표명이 필요할 것이다. 남로당계열에 지나치게 편향된 쪽도 조금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북조선에서 불운하게 스러진 사회주의자들을 기리고 싶다면, 남로당계열 말고도 김원봉이나 옌안파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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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 메모 3

Film Tent & 2nd Stage | 2008. 8. 17. 21:48 | Posted by 김수민
<청춘의 십자로>

최소한 5~10분은 졸면서 영화를 하나하나 보던 동생이 조금도 졸지 않고 관람하는 데 성공한 영화. 청풍호반에서 야외상영되었고, 관객들은 30초에 한번씩 웃었고, 2분에 한번씩 뒤집어 졌다.

1934년작으로 아직도 전해지는 유일한 한국 무성영화이자 마지막 무성영화로 기록된 작품. 배우 조희봉이 변사를 맡아 재해석된 결과를 드러냈고, 역시 새로운 OST를 현장에서 연주한 악단의 솜씨도 돋보였다.

제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될 듯하지만 상영은 단 한번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도 선보일 계획이니까.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2&no=180


<청춘의 십자로>가 끝난 직후 그 자리에서 펼쳐진 힙합 공연은 DJ.DOC, 마브스, 45 RPM 등 부다 사운드 뮤지션들이 출연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고 직전에 상영된 영화처럼 재미난 공연이 됐다. 이들의 한국어 랩이 어째 영화의 변사와 어울리는 듯.

<심아상영>
1. 너바나: 러시아 여성 둘의 우애를 주제로 하였다. 가면급의 메이크업과 맹렬한 테크노 사운드가 어우러졌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4&no=153

2. 도쿄랩소디: 전후 일본인들이 즐긴 노래 11곡(주로 엔카풍이다)을 토대로 만든 드라마들이 엮였다. 심야영화를 세편 보면 한편을 조는 법인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졸지 않았다. 엽기적이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일본식 유머 작렬.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4&no=159

3. 쳇 베이커의 초상: 조느라 못 봤다. 앞의 두 영화를 눈뜨고 다 본 대가다. 쳇이 한때 치아가 다 나간 적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대목부터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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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 메모 2

Film Tent & 2nd Stage | 2008. 8. 17. 21:28 | Posted by 김수민
8월 15일
<레드 엘비스 - 동독의 딘 리드>

엘비스와 유사한 스타일을 가진 가수 딘 리드는 동독 시민이 되어 활동한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 수 없어서 동독으로 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 평화와 사회주의를 사랑한 뮤지션이었다는 찬사가 엇갈린다.

관람 내내 복잡한 심경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처의 증언처럼 순간의 열정을 사랑으로 착각하여 결혼와 이혼을 되풀이하고, 아이를 갖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 가정의 분열을 불러 일으키는 이 남자는, 공적으로도 너무 허영심이 컸다. 아옌데와 친구관계를 맺고, 팔레스타인의 해방군에도 가담하는 등 국제적인 행보를 보이는 그는 결국 동독의 갑갑한 현실 속에서 쇠락하게 된다. 그는 전체주의로 전락한 현실사회주의에 반항한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미국적 인간으로서 동독이 답답하고 고향이 그리웠던 것일까?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6&no=178



8월 15일 밤에는 청풍호반 수상아트홀에서 일렉트로니카 공연을 즐겼다. 비가 어찌나 쏟아지던지...


8월 16일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

고전 신화 <라마야나>를 재현한 에니메이션. 그러나 네가지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다채로운 구성을 보인다. 하나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두번째는 시타-라마 부부의 역경을 담은 <라마아냐>의 줄거리. 세번째는 시타가 블루스를 부르는 뮤지컬. 네번째는 <라마야나>를 둘러싸고 세 남녀가 벌이는 대화. 의외로 네번째 것이 가장 위트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옛 뮤지컬에 대한 오마쥬 삼아 깔린 3분간의 '인터 미션'도 재미있었다.(관객 가운데 한명은 진짜로 화장실을 갔다 왔다)

긴장감 없는 스토리 라인과 등장인물들의 전형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내 생각으로는, 이번 영화제에 관객상이란 게 있다면 이 영화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을 것이다.

뮤지컬에 삽입된 노래는 새로 만들어져 녹음된 것이 아니라, 감독이 친구 집에 얹혀 살던 시절 우연히 들었던 옛날 레코드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작권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난관에 부닥쳐 있다고 한다. 감독은 음악계 역시 음반불황의 현실을 저작권료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탓에 저예산영화도 과도하게 카피라이트를 행사한다며 아쉬워 했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3&no=138


<재즈 싱어>

1927년 영화사 사상 최초로 제작된 유성영화. 거의 모든 대사가 소리 없이 자막으로 처리되는 등 기존의 무성영화와 거의 비슷했지만, 노래와 몇가지 대사는 후시녹음으로 이뤄졌다. 어릴 적 가출해 재즈 가수로 성공한 주인공이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유대교 성가대에서 선창했던 아버지의 일을 잇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내용.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7&no=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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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 메모 1

Film Tent & 2nd Stage | 2008. 8. 15. 17:01 | Posted by 김수민

8월 14일

<로큰롤 인생>

원제는 영앳하트(young @ heart). 제천 시민들은 무료로 관람하는 개막작을 다큐멘터리로 고른 영화제측의 모험에 한표 던진다. 제천 주민들에게 이것이 절묘한 승부수였는지 무모한 도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2&no=171

8월 15일

<이상한 나라의 에드워드>

에두아르가 에드워드인 것은 그가 다니는 다국적 회사 때문이다. 이 뮤지컬에서 신입사원 에드워드는 시종일관 자유주의의 승리를 외친다. 주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노조위원장이 참여한 룰렛과 로또게임으로 해고의 여부와 규모를 가리고, 마지막에 에드워드가 세계화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은하계화를 할 차례라며 우주로 떠나는 장면 등 주주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직선적이고 통렬한 풍자가 압권.

오늘 아침 이명박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읊은 '자유주의' 타령은 이 영화와 제대로 포개진다. 케인즈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재무팀장은 에드워드에게 극빈층의 증가로 회사의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따지고, 에드워드는 거지를 위한 판자집을 짓자면서 회사의 스타가 된다. 해고로 인해 생산이 힘들다는 재무팀장의 지적에 에드워드 왈, "한국에 맡기면 된다." (자막만 그런 게 아니라 분명히 대사로 그렇게 나왔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6


<세 친구>, <DIY>

동남아 음악영화에 작지만 알찬 기대를 갖게끔 이끄는 단편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12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8


<솔로몬의 노래>

작달막한 키에 하이톤의 목소리. 마이클 코헨이라는 배우의 깊이를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다. 그가 랍비로서 예배 도중 부르는 노래와 그를 매혹시킨 여가수의 팝송은 상이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코드적 친연성을 가진다. 이런 설정은 세속과 종교, 절제와 쾌락의 스펙트럼에서 균형과 조화를 선택한 솔로몬의 발밑을 든든하게 해준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16


<영웅은 날개를 필요치 않는다>

팔 없는 DJ를 따라다니는 다큐멘터리. 진지하면서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청력 잃은 DJ의 재기를 다룬 리얼판타스틱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좆됐다 피트 통>을 본 사람이라면 감흥이 또 색다를 것이다. 물론, <...피트 통>은 웃기고 무지막지한 픽션이므로, 두 영화의 공통점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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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Free Speech | 2008. 8. 13. 01:25 | Posted by 김수민
어쩌다 보니 2000년 이후 출현한 일군의 논객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아웃사이더>에 참여했던 지식인들과는 서로 이름을 알고 지내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연이 이어져 오는 분은 홍세화 그리고 박노자밖에 없다. '송복 퇴임식 사건'으로 조선 동아에게 연타를 얻어맞고 있을 때 그가 방어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 사건을 한국판 68운동쯤으로 보는 듯하다. 내가 그와 메일을 자주 주고받던 시기는 군복무 기간이었다. 그의 관심사와도 결부된 군대 이야기도 좀 나누었지만, 그무렵 내가 한국사를 전공하리고 결심하면서 이것저것 대화할 게 많았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에게는 두가지 임무가 있다. 첫째, 급진적으로 타격해 판을 흔들면서 둘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책을 내놓는 것이다. 조희연의 표현처럼 비정상성을 지양하는 것과 정상성을 극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의 병행을 중요시하는데, 술자리에서 만난 홍기빈 씨가 똑같은 표현을 하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진중권도 그러한 축에 들지었만 최근 들어서는 후자에 기울어진 것 같다. 우석훈의 경우는 자신의 녹색지향과 재계와 관계를 넘나든 경력을 잘 조화시켰다.

박노자도 그런 색깔이 강하다. 그가 알려진 직후에는 사민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질적 핵심이 복지국가 예찬보다는 제국주의(및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있음을 알면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마침 2002년 말 또는 2003년 초에 그가 '트로츠키주의 성향'이 있다는 질문을 긍정한 인터뷰가 나왔다. 그는 만델보다 캘리니코스, 하먼을 존경하는 듯했고, IS계열인 '다함께'와 꽤 친한 관계였다. 한때는 다함께 회원인지도 긴가민가할 만큼.

(그랬던 그가 어쩌다 다함께와 그렇게 틀어졌는지도 다소 미스테리다. 천상이 비조직적 인간이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씀하시는 것 같고, 다함께의 일사분란한 방침과 드디어 충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영세 극좌파'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다단계', '런던연합' 따위의 조롱 어린 별명보다 점잖지만, 그만큼 충격적이기도 했다. 하하, 영세 극좌파라니... 지인들과 키득거렸다. 혹시 그 '영세'가 '영세중립국'할 때 '영세'면 그나마 덜 약올랐겠지만,하면서.)

이번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짤막한 글이 그의 사상적 지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개량주의자(?)'라고 표현하면서도 진보신당이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분명히 하자고 한다. 좀 억지스레 정리하자면, 진중권이나 홍세화의 입장을 '전진'과 접붙인 셈이다. 요즘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전진'이 두들겨 맞고 있는데 이게 어떤 파장을 미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전진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왠일이냐 싶지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당 강령의 문구로 넣는 데는 반대한다. 그점에서 나는 박 선생하고 다르다. 그러나 어쨌건 내가 중요시하는 'TWO TRACK'을 잘 구사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이념적 친화성을 느낀다. 그의 생각은 나 같은 사람보다 조금 혹은 훨씬 마르크스주의적이긴 하지만.

근래에는 뜸하지만 예전에 자주 만나서 그런지, 화면이나 지면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자신(의 기품)을 제대로 드러내서인지, 홍 선생이 어떤 분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박 선생은, 잘 모르겠다. 그가 집에서 어떤 아버지고 남편인지 좀 궁금하기도 하다. 원체, 잘 안 보여서 더 궁금한 것이다. 강연회 뒤풀이 때 그와 함께 간 곳이 술집이 아니라 커피숍이었다는 것, 어떤 학생이 그를 찾아갔더니 빵을 드시고 계셨다는 것, 고기를 안 드신다는 후문이 있더라는 것, 정도로만 그의 사생활을 어림할 뿐이다.

아마 그가 가진 '의외의 목소리'도 베일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얼굴은 에단 호크삘인데 말은 제2의 이다 도시? 그의 성대모사를 곧잘 하는 나도 그의 정신세계는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다. 이상, 사실 박노자의 사상보다는 인간 박노자가 더 궁금하다,는 잡설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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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미스코리아 대회가 처음 열릴 때 언론보도로나마 접하며 느낀 청량감이 떠오른다. 나는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의 지지자인 셈이고, 또 미스코리아 대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러나 미스코리아 대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것에 반감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비판자들은 미스코리아 대회가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북돋우는 주요 동력은 미스코리아 대회의 수상자나 주최측보다는 그 대회에 쏠리고 몰리는 시선과 환대에서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이 대회를 TV에서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며, 굳이 없애려고 노력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물론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미모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연예인들이 날개짓을 하면 온 사회가 S라인과 V라인의 태풍에 뒤덮인다. '원더걸스'의 소희나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가인이 받는 각광은 미의 다원화와 개성의 분출을 증명하는 한편으로, 외모지상주의가 더 넓은 폭을 가지며 공고해지게끔 교묘히 작동되기도 한다(통통한 볼이나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이들도 얼굴이 작고 날씬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외모지상주의를 우려한다고 해도, 빼어난 외모를 향한 추앙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반대자들도 미모를 향한 추앙 자체가 아니라, 그를 기준으로 세워지는 서열을 비판한다. 하지만 서열의 생성을 봉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며 외모도 그 예외는 아니다. 미모를 근거로 진, 선, 미를 가리는 일이 그르다면, 성적을 토대로 등급을 매기는 일도 그르다. 지식인이 미인보다 더 윤리적이라거나 지식이 미보다 사회에 더 효용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지식이 노력의 결과인 반면 미는 그저 얻어진 상속물’이라는 설명도 발 디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유권자가 더 나은 정치인에 투표하여 그를 당선시키고 소비자가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고르듯, 미인을 선발할 수도 있고 나아가 직종에 따라서 또는 심사자의 필요에 의해 미모가 합격이나 돈벌이의 견인차가 될 수도 있다. 미모를 향한 추앙이 존재하는 한, 그에 발맞추는 쪽도 늘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갖가지 서열과 순위라기보다는 그것으로써 우성 인간과 열성 인간을 가리는 차별이다. 이것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어떤 분야의 승자도 다른 영역의 패자가 되면서 멸시받을 수 있다. 예컨대  공부를 잘하지만 얼굴이 못생겼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특히 그가 여성이라면 ‘연애 시장’은 물론이고 ‘취업 시장’에서도 불이익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도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예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몇몇 연예인들도 곧잘 “멍청하다”, “머리가 비었다”는 공세에 시달린다. 어쩌면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친다는 묘사는 한국사회에 그리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외모는 시쳇말로 ‘스펙’이라고 부르는 ‘출세와 생존의 조건’에 철저히 예속된 하나의 부속품에 다름 아니다.

스코리아 대회의 모토도 실상 “예쁜 게 최고야!”와는 꽤 거리가 있다. 마치 기여입학제를 도입한다는 사립대학이 기부금 말고도 고교 내신성적이나 학생집안의 사회기여도까지 잰다면서 둘러대는 것처럼, 미스코리아 대회도 지성과 교양까지를 아울러 수상자를 뽑는다는 걸 뽐낸다. 주최측인 한국일보사는 미스코리아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 환경을 지키며 어린이를 보살피는 한국의 대표사절”이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이 대회가 참가자의 평화운동, 환경운동, 보육활동 경력을 따져, 입상과 순위에 반영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은 매끄러운 언변을 테스트하고 그의 아름다움이 최소한 백치미는 아님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친다. 

그렇다면 무엇이 준거가 될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대회의 수상자들, 특히 최고 수상자들 중에는 서울 지역의 유명 대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이 흔하고, 서울예선의 수상자가 전국본선의 수상자로 굳어지는 경향도 강하다. 세상의 흐름상 그들의 가정환경 또한 부유할 확률이 높다. 대회가 은밀히 귀띔하는, 그러나 아주 실질적인 모토는 대충 이런 게 아닐까: ‘재색 겸비한 최고의 스펙녀를 가장 좋은 혼처로’? 또는 ‘얼굴도 예쁘고 지능도 빼어난 연예인 탄생’?(물론 ‘연기력’이나 ‘가창력’은 보장할 수 없다.)

이번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위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최측은 과거 누드모델이었다는 이유로 한 수상자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의 누드화보가 세계평화를 깨트리거나 환경을 파괴한 것도 아니고, 화보를 보지도 못할 어린이에게 해로울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더욱이 주최측은 ‘성의 상품화’를 들먹이며 자격박탈을 합리화할 처지도 못 된다. 그들은 참가자들에게 똑같은 색깔의, 그것도 예전보다 더 얇아졌다는 의혹을 받는 수영복을 입혀 무대에 세우지 않았는가. 차라리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대회에 프로의 참여는 반칙이다”라고 변명한다면 몰라도.

주최측인 한국일보사는 제 인터넷판부터 돌아보길 바란다. 초기 화면에 뜨는 연예계 가쉽이나 남자들의 눈을 잡아끄는 사진은, 나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과시한 교양(!)주의와 대조적이다. 이 선정성은 특정한 섹션에 그치지 않고, 어느 객원논설위원의 에세이까지 집적거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꽃값-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라는 글이 <길거리 그녀들이 몸 팔고 받는 ‘화대’의 진짜 의미>라는 타이틀과 연결되어 있고, <구강성교에 쓰이는 건 혀뿐이 아니었다>는 링크를 클릭하면 <잇바디-눈 속의 매화>라는, 기대 이하(?)의 글이 나온다.

그 에세이들은 진중한 인문적 성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교묘하고 수줍게 에로틱한 측면이 있었고, 그래서 그 ‘야한 포장’은 그럭저럭 애교로 넘겨줄 만한 ‘낚시’였다고 백보 양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대담함에 비해 누드모델을 거르는 태도는 군색하고 초라하다. 게다가 주최측이 이미 누드화보 촬영 사실을 인지했다는 박탈자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심사의 자격을 박탈당해야 한다.

철학적 심미성은커녕 야트막한 통속적인 아름다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새삼스럽고 촌스러운 결정. 이 대회로부터 ‘미의 대제전’이라는 수식도 박탈해야 할 것 같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최대 안티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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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

Free Speech | 2008. 8. 10. 22:24 | Posted by 김수민
영 마뜩찮은 기색이 느껴지지만 자기가 내 글의 팬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간 썼던 글을 묶어서 책을 낼 생각은 없느냐, 그런 제의를 받은 적이 없느냐, 묻기도 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내게 가진 이견을 잔뜩 숨긴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블로그나 홈피를 어쩌다 방문하게 되면
거기에 내 글이 퍼올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빈말 좀 하지 말라. "김수민 씨 글을..." 어쩌구 호들갑 떠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그날 밤이나 새벽에 그 사람의 홈피나 블로그를 수색할 것이다.

너 같으면, 나 같은 놈이 내는 책 사겠냐? 그런 책을 찍어 내 주겠냐?
'저런 새끼도 책 낸다고 설친다'며 흉이나 안 보면 다행이지...
꼭 이렇게 남 엿 먹이는 걸 취미로 아는 인간들이 있다니까..

(내 글을 퍼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모르는 사람이거나, 나를 모르며 글만 퍼간 분들이다.) 
:

서태지 논란

Listen to the 무직 | 2008. 8. 10. 22:12 | Posted by 김수민

XTM에서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비지니스맨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하고도 밑과 끝이 빤히 보이는 논란이다. 어느 측이건 쓸데없는 다변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지니스맨에 불과하다는 쪽은 서태지가 과연 자신의 입방아에 오를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라는 쪽은 우석훈의 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시아 제패'라거나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제국주의'보다는 '촌놈'임이 더 부각된다. 이현도 등이 지적받듯 서태지에게도 가령 'C-G-Am-Dm' 같은 전형적인,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진부한 패턴이 있다. 팬들의 열정적 환영은 진부함 대신 친숙함에 더 표를 던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의 메시저처럼, 서태지가 진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태지가 록팬을 비롯한 음악매니아들에게 깎아 내려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표절 여부를 운운할 것도 없이, 서태지의 음반은 언제나 구미의 흐름을 추종하고 훌륭히 베껴 왔으며 이번 음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 얼터너티브는 그 이전에 '제이워커'나 '뮤턴트'가 시도했으며, 하드코어 혹은 뉴메틀에서도 '닥터코어 911'이나 '언루트'가, 이모코어에서는 바슬린이나 피아가 더 앞섰다.

창조성의 가늠이나 원조논쟁은 차치하고,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은 건 그가 지닌 '뮤지션쉽'의 현황이다. 세상에 잊을 만하면 돌아와 음반을 발표하고 그러다 다시 사라지는 대통령이 어디 있나. 서태지컴퍼니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가 현재의 음악계에 이수만이나 박진영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그냥 음악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소박한 뮤지션 겸 프로듀서일 뿐이다.

아마 그를 '대통령'으로 띄운 힘은 그가 표출한 정치사회적 메세지에 대한 먹물 비평가들의 호들갑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추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실이데아>가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다는 걸 뺀다면 말이다. 통일을 노래해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으로서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를 꿈꾼다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국기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막을 내리는 장대한 쇼에서, 통일지상주의와 애국주의의 메아리가 참 크게 울려 퍼지긴 하더라만. 서태지가 거둔 '저항의 성공'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눈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뱀 같은 지혜'를 가지자는 교훈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보여준 비판의 수준을 보면, 욕이든 뭐든 잘난 놈이 하면 효과가 있다는, 새기나마나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다. 그 노선은 네가 지지하는 노선일 뿐 내가 쌍수들 노선은 아니다.

서태지 이래 그에 관해 바보 같은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건 6집 <울트라맨이야>가 나오던 시절에 성기완이 썼던 글 정도다.


서태지에 대한 논란은 좀 다른 단계로 넘어가야 할 것 같고, 나도 이런 포스팅을 더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에 하나 댓글로 반박이나 질문이 들어오면 이 블로그에선 계속 이어가겠지만.)

일단 "서태지는 '불세출의 음악 오퍼상'"이라는 평가로, 이만 맺겠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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