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함하다 걸리는 순간 얼굴 표정부터 연습해 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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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측 기밀문서를 통해 실제 스파이였음이 드러나고 있는 이강국의 재판기록을 요약해 봤습니다. 물론 북조선측의 문서이고 박헌영간첩설의 신빙성이 떨어지는지라, 상당수 또는 전부 또는 일부가 조작되었을 개연성을 고려하고 읽으셔야 할 듯하군요.
어떤 역사학자들도, 제 개인적으로도 결론을 잘 못 내리고 있습니다.
궁금해 하는 지인들이 있어 노가다하며(ㅜ.ㅡ) 요약했습니다.
심지연 교수가 집필한 <이강국 연구>의 마지막 부분인 474~489쪽에 '부록 3: 이강국 관련자료'를 펴시면 전문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증인 리강국에 대한 신문(리강국의 진술)
- 1945년 11월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소집에서, 하지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이를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음.
-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를 받고 미국 500만 달라 강제 차관 반대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입북 지령을 받음.
- 박헌영의 비호로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직에서 간첩활동.
- 박헌영의 도움으로 비밀정보 입수하여 뻐트(미군 24사단 헌병사령관)에게 제공.
- 1950년 봄, 박헌영이 입북시킨 미국 간첩 현 애리스와 관계.
* 기소장
- 그는 1935년 미국 뉴욕에서 정탐부원인 크로리에 의해 간첩으로 고용.
- 크로리와 련계를 가지려 김수임과 련애. 김수임을 반도호텔에 취직시켜 뻐트에 접근.
- 1946년 6월 뻐트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 그후 월북하여 그의 간첩으로 가담.
- 월북 후 리강국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각 분야의 중요 정보를 수집, 제공.
- 1950년 5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간첩 현 애리스, 리 위리암을 평양 자택에서 두차례 만나 밀담.
- 노블의 지시에 의해 활동한 리승엽과 련결 가지기 위해 노력.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당에서 리용할 것을 소개.
- 리승엽 도당의 간첩활동에 가담한 리강국은 1952년 10월까지 수집된 군사기밀을 비롯, 4차에 걸쳐 당, 정부의 중요 비밀을 수집, 림화를 통하여 리승엽에게 제공.
- 림화는 자기 진술에서 리강국과 리승엽 간의 련락에 대해 리승엽 및 공모자들의 정체를 음폐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
* 피심자 각 개인의 죄명
- 그(리강국)는 공산주의의 탈락자. 1935년 독일 백림대학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할 때 미국 정탐기관의 크로리를 만나 범죄적 련계를 가질 것을 밀약.
- 1946년 9월 간첩활동 서약. 1947년 1월부터 북조선 외무국장 직위 잠입. 1948년 8월까지 5차에 걸쳐 비밀을 수집하여 미국 정탐기관에 제공. 1950년 5월경에는 미국 간첩 현 에리스, 리 윌리암과 간첩행위 감행을 약속.
- 1951년 7월부터는 리승엽의 지도 하에 있는 간첩망과 련계, 1952년 10월까지 4차에 걸쳐 공화국의 군사 정치적 비밀을 수집 제공.
- 조선을 미제에 예속시키고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정치적 모략활동 감행.
(리강국의 직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조선 일반 제푸 수입상사 전 사장'으로 표기되어 있음- 간추린이 주)
* 공판심리
(경력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주문)
- 저(리강국)는 진정한 맑스 레닌주의자가 아니며, 호기심과 공명심에서 맑스 레닌주의를 연구.
-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독일 계통이고 독일은 사회주의운동이 강하였기에 독일로 류학.
- 1932년 재독 공산주의자에게 지도받고, 프로레타리아 과학동맹 가담. 혁명적 아세아인 회의 참가. 1932년 10월 독일공산당 가입, 일본인 그루빠 책임자. 1935년까지 공산주의 실천활동 전개 후 학비관계와 본국에서의 운동을 이유로 11월 말 귀국.
- 마야께 교수사건 관계자로 일경에 체포, 기소유예 석방. 처남이 경영하는 증권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함.
- 1936년 4월 리주하와 원산 적색노조와 관계를 맺음. 1938년 10워 원산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저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음에도 피신생활을 계속하다 동년 12월 체포.
- 1941년 5월까지 감옥생활하며 동지를 팔지 않음. 1941년 5월 예심 종결 당시 "공산주의 실천운동에서 손 뗀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는 전향문 작성. 보석 석방. 1941년 5월 출옥 후 다시 체포, 1942년 2년 징역, 5년간 집행 유예 판결, 석방.
- 1942년 5월부터 8.15까지 대화숙 회의에 참가나 신궁 참배하지 않음. 술, 마작으로 세워을 보냄. 변절은 했으나 협력은 말자고 맹세. 조준호의 경제적 원조로 부화한 생활하며 적극적 친일파가 되지 않음.
- 일제말기에는 최용달과 같이 해방 맞이 태세. 세계정세를 약간 알았기에 민주진영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점을 리해하고 8.15와 동시에 민주주의진영에 나섬. 려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사업에 참가, 박헌영의 공산당 조직에 참가. 속죄의 정신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열성 발휘.
- 1945년 9월 인민공화국 참가, 1946년 2월 민전 사무국장, 1946년 9월 하지 정책 규탄선언 발표하여 체포령 내리자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입북 후 박헌영의 신변인으로서 1946년 10월부터 1947년초까지 사업. 1947년 북조선 외무국장, 1948년 9월부터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이후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1년 11월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무역성 일반 제품 수입상사 사장.
(미국 간첩 활동에 대한 질문)
- 저는 자원적인 미제의 주구. 불가피적으로 간첩으로 전락한 공동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라고 자인. 세계주의 영향으로 부르죠아적 자유주의사상 잔재가 농후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높이 평가.
- 독일 류학시 만난 미국인 크로리는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맑스주의에 동정적. 미국인 공산주의자라는 사람 2명까지 만나 담화.
- 귀국 후 일제의 탄압과 자신의 안일 위하여 운동을 적극적으로 못하고 미국인과의 련계도 맺지 못함.
- 해방 후 남조선이 미제에 강점되었으므로 더욱 미제와의 련계 희망. 적당한 기회가 없어 하지 뻐취(미군정 사령관)와는 공적인 관계만 맺음. 김수임의 반도호텔 취직에 동의. 김수임을 통해 헌병사령관 뻐트와 상면, 협력 약속.
- 미제가 획책한 좌우합작공작에 순응. 3당합당을 표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내막으로는 이 사업을 지연. 미국 간첩과 련계하였으나 표면상 미군정 정책을 규탄하여서 체포령이 내려짐. 김수임의 집에 숨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 입북 후 미제와의 련계 그리고 38선까지 헐하게 오기 위해 뻐트 만남. 뻐트는 체포령이 하지의 명령이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입북한 뒤에도 협력하자며 요구. 1. 김수임을 민주진영과 련계를 지어줄 것 2. 미군이 이북에 잠입시키는 자들을 옹호하여 줄 것 3. 우리의 필요한 자료를 보내줄 것.
- 뻐트가 소개한 미국인 차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와서 개성에서 최만용의 안내로 입북. 박헌영은 미국인 차를 타고 왔음을 말할 필요 없다고 일러둠. 입북 후 남조선 출신 불평분자들을 중심으로 친우 물색. 권오직, 한병옥, 장시우, 박승원, 림화 등과 친교.
- 1946년 10워 서득은에게 김수임 리용 권고. 1946년 12월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하는 방법 획책. 1947년 1월~1948년 5월 5차 정보 제공. 비서 신태희->김수임->빠트. '1947년 인민경제바런계획서', '쏘미공동위원회에 대한 쏘련측과 북조선측의 태도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표', '평양학원과 금강학원의 무장상태 훈련 등이 정규군과 같다는 세밀한 내용', '1947년 인민경제계획 실천 정형', '8.25 총선거를 위한 문건들과 간부 책벌 결정을 위시한 1948년도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등 제공. 아울러 이외에 날조문건 2건. '쏘련군사령부의 간섭이 있다는 것', '화폐개혁으로 소시민들의 재산 강탈, 인민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
- 1948년 8월 이후 정치적 실각으로 위축, 공작 중단. 1948년 미군 간첩 현 애리스와 리 윌리암 래방. 1950년 재차 방문하여 협력 요구. 그후 그들이 오지 않아 간첩 련계 맺지 못함.
- 1951년 6월 리승엽은 전달할 자료는 림화를 통해 달라고 말함. 전달자료가 간첩자료임을 직감, 응락.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한 후 리승엽은 김수임을 인입했다고 말한 바 있고, 1948년 8월 후 김수임으로부터 련락이 없어 리승엽과 김수임이 직접 련계를 맺는다고 생각했고, 리승엽이 신변을 주의하라는 충고를 준 일이 있었고, 리승엽이 저를 등용하려 노력한다는 점 때문.
- 리승엽의 요구가 그리 큰 기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그런데 리승엽은 제가 김수임을 소개하기 전부터 미제의 간첩이었음. 때로 저는 리승엽을 김수임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리승엽이가 간첩이 되었는가 고민.
- 자료는 림화가 취사하여 리승엽에게 제공케 함.
(피소자의 길과 실지 행동의 모순을 묻는 검사에게 리강국은 모순된다고 대답. 계급적 리해, 조선혁명이 아닌 류행식 맑스주의 조류에 인입하였고, 공명심 출세주의에 의해 활동을 했다고 밝힘. 박헌영의 테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지지한 리유로는 변절적 기회주의적 이데올로기, 명확한 테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 박헌영과 협력하면 출세주의적 숙망이 달성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을 듦. 테제의 내용이 반당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소부르죠아 정당화하는 노선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지지했다고 말함.)
(이어서 검사는 리승엽에게 림화를 통해 리강국의 간첩자료를 받았느냐고 묻고, 리승엽은 인정)
(리강국은 친한 녀자의 알선으로 미국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박헌영에게 보고했고, 어떤 녀자라는 질문에 당내에서 일반적으로 리용할 수 있는 녀자라고 대답하였다고 진술)
(재판장은 빠트에게 받은 임무를 입북하여 수행하였는지, 모략행위가 일상적이라는 기소사실을 승인하는지 물었고, 리강국은 승인. 리강국은 피소자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미제의 전형적 주구'라고 대답. 김수임은 처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설명. 모략행동의 배경으로는 박헌영을 거론. 리승엽과 림화는 리강국의 진술에 이견이 없다고 밝히고 재판장은 30분간 휴정 선언)
* 국가 검사의 론고,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우선 그는 대지주의 출신이며"라고 시작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하 생략. 위의 요약내용과 겹침.)
* 피소자 리강국에 대한 변호인 길병옥의 변론
(내용 생략)
변호인은 논고에 대한 반론이나 정상참작의 논거 제시 없이, 마치 논고를 발표하듯, 아니 검사보다 더 매서운 태도로 피소자들을 몰아붙였다.
* 리강국의 최후진술 (전문)
저는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조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하여 예심과 공판 심리를 통한 자기비판의 기회를 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과 인민이 주는 벌을 감수하겟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의 죄과를 인민 앞에 자비함으로써 옳은 사람이 되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공판문헌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이건 간에, 이 지식인의 추락에 서글픔과 씁쓸함이 느껴진다.
* 판결
(생략)
* 주문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형법 제68조에 사형,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을 각각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형에 처한다.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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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시절, 어떤 신문을 만들면서 대여섯살 많고 공부가 깊은 선배들이랑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두 선배가 논쟁을 벌였다. 지극히 점잖았지만 두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는가'라는 주제였다. 한쪽은 재야사학계에서도 그 문제는 결론이 난 상태이며, '김 주석(상대방의 통일주의적 정치 성향을 배려한 호칭이었으리라)의 권좌는 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다른 한쪽은 학내 NL 운동진영의 이론가로 꼽히는 형이었는데, 그는 박헌영의 집에서 무전기 등의 물품이 나왔다고 반박했다.
그때 나는 이것이 여전히 논쟁거리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나는 제로 베이스에서 이따금 박헌영 사건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펴본 공판문헌은 박헌영의 모든 행적이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조선은 박헌영과 미국의 연관을 표가 나게 무리해서 꿰어 맞추었다. 소설로 쓰기에도 버거울 만한 조작이었다. 젊어서 선교사 언더운드를 만나서부터 스파이로 기용되었다니(여기서의 언더우드는 원두우가 아닌, 그의 아들 원한경을 가리킨다). 그런 방식으로 태연하게 1950년대 피의 숙청을 시작한 김일성 정권은 인혁당사건을 조작해낸 박정희 정권에게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박헌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남한 좌익의 정통성을 박헌영에게서 발견하려는 시도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수로 있던 조선공산당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서도 종파주의를 휘둘러 댐으로써 여운형이나 백남운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결과적으로 좌익정당의 협동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남조선노동당은 좌익3당 각각의 다수파만을 모은 것이었고, 소수파들은 사회노동당을 만들고 그것은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진 뒤 다시 남북으로 흩어졌다. 10월봉기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은 정작 남한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을 다시 잇기 위해 북조선의 부수상으로서 무리하게 전쟁을 부추기고 밀어붙였다.
한데, 이러한 박헌영의 전쟁책임까지 변호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결과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진격으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김일성이 박헌영을 몰아세우며 잉크병을 벽에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박헌영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이야기렸다. 물론 김일성이 원래 반전파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전쟁 개시에 가장 공 들인 사람은 박헌영이다. 강정구 교수는 파문을 일으켰던 '통일전쟁' 발언을 하면서, 북조선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사회주의연합정권'이 들어섰으리라는 가정을 던진 바 있다. 아마 그런 정권이 태어났다면 박헌영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 인맥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전쟁에서 '국토완정'의 꿈은 박살났고, 박헌영은 결국 김일성에게 졌다. 이로 인해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 박헌영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나는 어느 대학생 단체의 회의에 처음 나갔을 때, 박헌영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에서 약간의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다. 박헌영에 대한 나의 비판이 일제 말기 지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똥짐지고 손수 일했던(벽돌공장에 숨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그 같은 인텔리가 과연 일을 했을지, 또는 해도 제대로 했을지는 나는 좀 의문이다) 그의 헌신을 간과하고 있으며, '당신이 박헌영보다 존경한다는 여운형은 쓸모가 없어 은도끼라는 별명도 있지 않았냐'는 요지였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박헌영에 대한 호평이 근근이 전해 내려져오던 전설에도 있었지만, 남한으로 귀순한 그의 측근 박갑동에 상당히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갑동이 옛날 신문에 썼던 연재는 상당히 반공주의적이었는데 이를 두고 당대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박갑동은 이철승과의 대담에서 해방정국기를 정리하면서 사정없이 밀리는가 하면, 심지어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독재정권기였던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것까지 이해해줄 수는 없다. 나는 박헌영의 추앙자들에게 박갑동 씨의 진술에 의존하지 말 것을 언제나 당부하고는 한다.
그런데 내가 박헌영의 추앙자들과 대화하면서, 입밖에 반쯤만 끄집어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완벽한 조작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헌영간첩설은 조작이겠지만, 이승엽이나 이강국을 향한 의심까지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씨의 노력으로 공개된 비밀문서에서 이강국이 CIC(미군방첩대) 요원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던 차였다. 거칠게 말해 나는 남로당계열이 예의 버릇대로 천방지축 잘난체하다가 북조선에서 호되게 당했다고, 또한 그중에서 실제 미국간첩도 있었고 덕분에 더 꼴사나워졌다고 생각한다.
박헌영의 추앙자들은 이재유, 이현상, 이강국의 추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노동현장의 활동가들과 권력을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남로당계 인텔리그룹은, 설령 그 둘의 노선이 같다고 치더라도 생활이나 사고의 방식에서 나오는 차이를 준거로 다소 분리해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강국과 박헌영도 분리되어야 할 것 같다. AP통신은 여간첩으로 마녀사냥 당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이 꾸준히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강국이 CIA의 스파이였음도, 그러니까 이강국이 김수임을 북조선의 간첩이 아닌 미국과의 연결고리로서 이용했음도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
김일성이 정당하게 스파이를 처단했을 뿐이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강국이 간첩이라는 것이 박헌영이 간첩이라는 것을 곧바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박헌영 간첩설을 거두든지 제대로 된 실증을 하든지 할 일이다. 일설에는 김일성이 죽기 얼마 전 박헌영의 복권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도 입장표명이 필요할 것이다. 남로당계열에 지나치게 편향된 쪽도 조금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북조선에서 불운하게 스러진 사회주의자들을 기리고 싶다면, 남로당계열 말고도 김원봉이나 옌안파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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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인생>
원제는 영앳하트(young @ heart). 제천 시민들은 무료로 관람하는 개막작을 다큐멘터리로 고른 영화제측의 모험에 한표 던진다. 제천 주민들에게 이것이 절묘한 승부수였는지 무모한 도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42&no=171
8월 15일
<이상한 나라의 에드워드>
에두아르가 에드워드인 것은 그가 다니는 다국적 회사 때문이다. 이 뮤지컬에서 신입사원 에드워드는 시종일관 자유주의의 승리를 외친다. 주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노조위원장이 참여한 룰렛과 로또게임으로 해고의 여부와 규모를 가리고, 마지막에 에드워드가 세계화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은하계화를 할 차례라며 우주로 떠나는 장면 등 주주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직선적이고 통렬한 풍자가 압권.
오늘 아침 이명박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읊은 '자유주의' 타령은 이 영화와 제대로 포개진다. 케인즈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재무팀장은 에드워드에게 극빈층의 증가로 회사의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따지고, 에드워드는 거지를 위한 판자집을 짓자면서 회사의 스타가 된다. 해고로 인해 생산이 힘들다는 재무팀장의 지적에 에드워드 왈, "한국에 맡기면 된다." (자막만 그런 게 아니라 분명히 대사로 그렇게 나왔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6
<세 친구>, <DIY>
동남아 음악영화에 작지만 알찬 기대를 갖게끔 이끄는 단편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12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8
<솔로몬의 노래>
작달막한 키에 하이톤의 목소리. 마이클 코헨이라는 배우의 깊이를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다. 그가 랍비로서 예배 도중 부르는 노래와 그를 매혹시킨 여가수의 팝송은 상이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코드적 친연성을 가진다. 이런 설정은 세속과 종교, 절제와 쾌락의 스펙트럼에서 균형과 조화를 선택한 솔로몬의 발밑을 든든하게 해준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16
<영웅은 날개를 필요치 않는다>
팔 없는 DJ를 따라다니는 다큐멘터리. 진지하면서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청력 잃은 DJ의 재기를 다룬 리얼판타스틱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좆됐다 피트 통>을 본 사람이라면 감흥이 또 색다를 것이다. 물론, <...피트 통>은 웃기고 무지막지한 픽션이므로, 두 영화의 공통점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http://jimff.or.kr/2008/contents/section_detail.asp?sn=51&no=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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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미스코리아 대회가 처음 열릴 때 언론보도로나마 접하며 느낀 청량감이 떠오른다. 나는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의 지지자인 셈이고, 또 미스코리아 대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러나 미스코리아 대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것에 반감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비판자들은 미스코리아 대회가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북돋우는 주요 동력은 미스코리아 대회의 수상자나 주최측보다는 그 대회에 쏠리고 몰리는 시선과 환대에서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이 대회를 TV에서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며, 굳이 없애려고 노력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물론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미모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연예인들이 날개짓을 하면 온 사회가 S라인과 V라인의 태풍에 뒤덮인다. '원더걸스'의 소희나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가인이 받는 각광은 미의 다원화와 개성의 분출을 증명하는 한편으로, 외모지상주의가 더 넓은 폭을 가지며 공고해지게끔 교묘히 작동되기도 한다(통통한 볼이나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이들도 얼굴이 작고 날씬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외모지상주의를 우려한다고 해도, 빼어난 외모를 향한 추앙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반대자들도 미모를 향한 추앙 자체가 아니라, 그를 기준으로 세워지는 서열을 비판한다. 하지만 서열의 생성을 봉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며 외모도 그 예외는 아니다. 미모를 근거로 진, 선, 미를 가리는 일이 그르다면, 성적을 토대로 등급을 매기는 일도 그르다. 지식인이 미인보다 더 윤리적이라거나 지식이 미보다 사회에 더 효용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지식이 노력의 결과인 반면 미는 그저 얻어진 상속물’이라는 설명도 발 디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유권자가 더 나은 정치인에 투표하여 그를 당선시키고 소비자가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고르듯, 미인을 선발할 수도 있고 나아가 직종에 따라서 또는 심사자의 필요에 의해 미모가 합격이나 돈벌이의 견인차가 될 수도 있다. 미모를 향한 추앙이 존재하는 한, 그에 발맞추는 쪽도 늘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갖가지 서열과 순위라기보다는 그것으로써 우성 인간과 열성 인간을 가리는 차별이다. 이것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어떤 분야의 승자도 다른 영역의 패자가 되면서 멸시받을 수 있다. 예컨대 공부를 잘하지만 얼굴이 못생겼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특히 그가 여성이라면 ‘연애 시장’은 물론이고 ‘취업 시장’에서도 불이익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도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예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몇몇 연예인들도 곧잘 “멍청하다”, “머리가 비었다”는 공세에 시달린다. 어쩌면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친다는 묘사는 한국사회에 그리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외모는 시쳇말로 ‘스펙’이라고 부르는 ‘출세와 생존의 조건’에 철저히 예속된 하나의 부속품에 다름 아니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모토도 실상 “예쁜 게 최고야!”와는 꽤 거리가 있다. 마치 기여입학제를 도입한다는 사립대학이 기부금 말고도 고교 내신성적이나 학생집안의 사회기여도까지 잰다면서 둘러대는 것처럼, 미스코리아 대회도 지성과 교양까지를 아울러 수상자를 뽑는다는 걸 뽐낸다. 주최측인 한국일보사는 미스코리아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 환경을 지키며 어린이를 보살피는 한국의 대표사절”이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이 대회가 참가자의 평화운동, 환경운동, 보육활동 경력을 따져, 입상과 순위에 반영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은 매끄러운 언변을 테스트하고 그의 아름다움이 최소한 백치미는 아님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친다.
그렇다면 무엇이 준거가 될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대회의 수상자들, 특히 최고 수상자들 중에는 서울 지역의 유명 대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이 흔하고, 서울예선의 수상자가 전국본선의 수상자로 굳어지는 경향도 강하다. 세상의 흐름상 그들의 가정환경 또한 부유할 확률이 높다. 대회가 은밀히 귀띔하는, 그러나 아주 실질적인 모토는 대충 이런 게 아닐까: ‘재색 겸비한 최고의 스펙녀를 가장 좋은 혼처로’? 또는 ‘얼굴도 예쁘고 지능도 빼어난 연예인 탄생’?(물론 ‘연기력’이나 ‘가창력’은 보장할 수 없다.)
이번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위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최측은 과거 누드모델이었다는 이유로 한 수상자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의 누드화보가 세계평화를 깨트리거나 환경을 파괴한 것도 아니고, 화보를 보지도 못할 어린이에게 해로울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더욱이 주최측은 ‘성의 상품화’를 들먹이며 자격박탈을 합리화할 처지도 못 된다. 그들은 참가자들에게 똑같은 색깔의, 그것도 예전보다 더 얇아졌다는 의혹을 받는 수영복을 입혀 무대에 세우지 않았는가. 차라리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대회에 프로의 참여는 반칙이다”라고 변명한다면 몰라도.
주최측인 한국일보사는 제 인터넷판부터 돌아보길 바란다. 초기 화면에 뜨는 연예계 가쉽이나 남자들의 눈을 잡아끄는 사진은, 나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과시한 교양(!)주의와 대조적이다. 이 선정성은 특정한 섹션에 그치지 않고, 어느 객원논설위원의 에세이까지 집적거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꽃값-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라는 글이 <길거리 그녀들이 몸 팔고 받는 ‘화대’의 진짜 의미>라는 타이틀과 연결되어 있고, <구강성교에 쓰이는 건 혀뿐이 아니었다>는 링크를 클릭하면 <잇바디-눈 속의 매화>라는, 기대 이하(?)의 글이 나온다.
그 에세이들은 진중한 인문적 성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교묘하고 수줍게 에로틱한 측면이 있었고, 그래서 그 ‘야한 포장’은 그럭저럭 애교로 넘겨줄 만한 ‘낚시’였다고 백보 양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대담함에 비해 누드모델을 거르는 태도는 군색하고 초라하다. 게다가 주최측이 이미 누드화보 촬영 사실을 인지했다는 박탈자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심사의 자격을 박탈당해야 한다.
철학적 심미성은커녕 야트막한 통속적인 아름다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새삼스럽고 촌스러운 결정. 이 대회로부터 ‘미의 대제전’이라는 수식도 박탈해야 할 것 같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최대 안티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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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M에서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비지니스맨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하고도 밑과 끝이 빤히 보이는 논란이다. 어느 측이건 쓸데없는 다변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지니스맨에 불과하다는 쪽은 서태지가 과연 자신의 입방아에 오를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라는 쪽은 우석훈의 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시아 제패'라거나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제국주의'보다는 '촌놈'임이 더 부각된다. 이현도 등이 지적받듯 서태지에게도 가령 'C-G-Am-Dm' 같은 전형적인,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진부한 패턴이 있다. 팬들의 열정적 환영은 진부함 대신 친숙함에 더 표를 던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의 메시저처럼, 서태지가 진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태지가 록팬을 비롯한 음악매니아들에게 깎아 내려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표절 여부를 운운할 것도 없이, 서태지의 음반은 언제나 구미의 흐름을 추종하고 훌륭히 베껴 왔으며 이번 음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 얼터너티브는 그 이전에 '제이워커'나 '뮤턴트'가 시도했으며, 하드코어 혹은 뉴메틀에서도 '닥터코어 911'이나 '언루트'가, 이모코어에서는 바슬린이나 피아가 더 앞섰다.
창조성의 가늠이나 원조논쟁은 차치하고,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은 건 그가 지닌 '뮤지션쉽'의 현황이다. 세상에 잊을 만하면 돌아와 음반을 발표하고 그러다 다시 사라지는 대통령이 어디 있나. 서태지컴퍼니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가 현재의 음악계에 이수만이나 박진영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그냥 음악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소박한 뮤지션 겸 프로듀서일 뿐이다.
아마 그를 '대통령'으로 띄운 힘은 그가 표출한 정치사회적 메세지에 대한 먹물 비평가들의 호들갑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추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실이데아>가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다는 걸 뺀다면 말이다. 통일을 노래해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으로서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를 꿈꾼다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국기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막을 내리는 장대한 쇼에서, 통일지상주의와 애국주의의 메아리가 참 크게 울려 퍼지긴 하더라만. 서태지가 거둔 '저항의 성공'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눈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뱀 같은 지혜'를 가지자는 교훈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보여준 비판의 수준을 보면, 욕이든 뭐든 잘난 놈이 하면 효과가 있다는, 새기나마나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다. 그 노선은 네가 지지하는 노선일 뿐 내가 쌍수들 노선은 아니다.
서태지 이래 그에 관해 바보 같은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건 6집 <울트라맨이야>가 나오던 시절에 성기완이 썼던 글 정도다.
보컬열전 (1) 롭 핼포드 - 공연 후기를 겸하여 (10) | 2008.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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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다스 프리스트 내한공연 -짤막한 소감 (2) | 2008.09.22 |
서태지와 록 (0) | 2008.07.30 |
김성면의 90년대와 80년대 (2) | 2008.07.28 |
롤라팔루자 0. TEMPLE OF THE DOG <Hunger Strike> (0) | 2008.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