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더는 못 버티겠다는 절망감과 5월 고향에서의 즐거운 추억 사이로 친구들 생각이 부쩍 난다. 5월 3일 KJM이란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래위 하얀 턱시도를 입은 녀석의 모습이 좀 웃겼다. 그날 난 같이 하객으로 갔던 다른 두 친구와 구미로 돌아와 즐겁게 놀았다. 한넘은 통영의 조선 회사에 취직했고, 다른 한넘은 나처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양복쟁이 셋이서 커피숍에 들러 타지에서 겪은 설움이나 짜증스러운 기억,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자신의 전공 공부 등을 이야기했다. 넥타이를 좀 풀고 술 한잔하며 만화 <20세기 소년>을 이야기하고, 노래방에선 넥타이를 대가리에 두르고 T-Rex의 <20th Century Boys>를 불렀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지만 참으로 그리운 날이었다. 각자의 사정 탓에 후일을 기약하기도 벅차다.
그날 짤막한 대화만을 나눠야 했던 KJM은 요즘 평택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하는 중이다. 나는 그에게 이미 서너해 전에 말해두었다. "넌, 지금 사귀는 여자랑 계속 사귀다가 스물 여섯이나 일곱쯤에 그대로 서로 코 꿰여 결혼할 거다, ㅋㅋ." 근래 들어 아무래도 육교 밑에 자리를 까는 게 낫겠단 소릴 듣기는 하지만, 이런 내 예견은 그저 감에서 나온 건 아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매우 유순하면서, 끝끝내 놓지 않는 고집통이 있다(내가 서울에서 만난 상당수의 인간들과는 완벽히 대조적이다). 고집통의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크기와 단단함이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KJM은 우리 중에선 고집통이 제일 작은 것 같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단단하다. 고집통이 작으면 고집이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한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 친구는, 한마디로, 순응적이다. 나는 그가 자기 부모에게 대든다거나 자기 상관이나 선배에게 개기는 모습을 잘 상상할 수 없다. 물론, 갑자기 못 참겠다는 식으로 나올 수는 있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 그가 참다참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던 적이 두번 있다. 당황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엉뚱하여, 하얀 턱시도를 입은 모습만큼이나 귀엽게 웃겼었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하고 재수를 해서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경로와 운으로 전교생 중 가장 먼저 대학에 합격한 나로서는 스무살 한해동안은 그에게 차마 연락할 엄두를 못냈고, 합격소식이 들릴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KJM의 해사 입성에 관해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도 좀 있었다. 그가 워낙 순해서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어울린다고 못 박았다. 관료제나 상명하복에서도 적응을 잘 할 사람. 내 친구라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KJM이 한번의 연애(ㅎㅎ정말일까? 내 알기론 맞다) 끝에 일찍 결혼하리라는 내 예감에는 특별한 근거가 필요 없었다. 그는 '딴 생각'을 잘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딴 생각'이 회의나 고민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그는 무성찰의 인간이 아니니까. 그 '딴 생각'이란 잡념이다. 지고지선이라는 게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고 그 반대인 경우가 외려 더 많지만, 어쨌든 그는 지고지선한 인간이다. 그는 별 탈 없이 졸업하여 임관했고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취업했다. 당연하지, 군대를 따로 가지 않아도 되고 졸업 후에 취업이 보장되는 대학엘 다녔으니까.
나와는 참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간이다. 내겐 회의가 많고, 잡념은 그 이상으로 많다. 나는 그의 대척점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십년지기인데도 말이다. 십년지기라. 그 친구와 트고 지낸지 꼭 10년이 됐다. 그와 나는 둘이서 <하드락 카페>, <난타> 등을 보러 구미예술회관을 들락거렸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해변가에 놀러가기도 하고, 그를 비롯해 다섯명의 친구들이 모여 어느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을 빌려 밤새 백일주를 마시기도 했다. 백일주를 마실 때 그가 낙방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해변가에 놀러갔을 때 그가 해군 장교가 될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함께 객석에 앉아 있을 때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손쌀같이 흐를지도 몰랐다.
근무지를 옮기면서 신혼집을 목포에 차린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갔는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식 이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2년 전임을 고려하면 얼굴을 다시 볼 날이 언젤지 장담할 수가 없다. 전화나 한통 때려야겠다. 그러면 대척점에 서 있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는 쑥 기어들어가겠지? 야 근데, 학생이 축의금으로 5만원이나 냈는데 구미서 만날 일 있으면 비싸고 맛난 것 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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