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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경에 관해 (이화여대 교지. 2007년 봄)

휴지통 | 2008. 3. 12. 18:06 | Posted by 김수민
2003년 3월 11일, 춘천으로 가는 입영열차에 올랐던 날이다.
벌써 5년이 지났다.

2007년 봄, 이화여대 교지의 관계자가
내가 경찰로 복무했던 것을 어디선가 슬쩍 본 모양인지
기고를 청탁해 왔다.

아래는 내가 보낸 글이다.




                       방패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진실
                                   
                                                                        김수민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4학년)

들어가기 앞서

나는 2003년 3월 육군으로 입대하여 4월 하순 작전전투경찰순경으로 배치되어 경찰학교에 입교했으며, 2주일의 교육을 거쳐 모 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났다. 내가 소속된 전경대는 시위가 빈번하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 뿐더러 나는 질병 및 부상 등의 이유로 상당 기간동안 전경대 바깥의 일선치안현장-파출소, 순찰지구대에서 근무했다. 따라서 나는 서울 지역 의 기동대나 전경대 등 진압부대에서 근무했던 전의경에 비해 시위진압경력이 미미하고, 경험했던 시위도 상대적으로는 평화적인 편이었다. 독자들은 이것을 유념해주셨으면 한다.

하나 더 밝히자면, 나는 시위와 진압을 동시에 경험해본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지면은 시위대와 전의경이 간접적으로나마 소통하면서, 동시에 ‘나’의 두가지 이력이 서로 대화하는 공간인 셈이다. 기회를 준 이화연대교지편집위원회에 감사한다.

전경이 될 줄이야

대학 1, 2학년이던 2001, 2년에 나는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했다. 그 운동의 문화는 NL(민족해방계열)과 PD(민중민주계열)로 상징되는 전통적 학생운동과 적지 않게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부역하고 오늘날에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해치고 있는 거대신문사를 보이콧하는 운동이니 따지고 보면 급진적이기는커녕 특별히 진보적이지도 않은 소박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실천의 방식에서는 경직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전통적 학생운동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고 때문에 ‘신사회운동’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나는 거리시위에 나선 적이 별로 없다. 학내외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신문을 펴내 돌리거나 조선일보사 부근 서울시의회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지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길거리로 뛰어든 것이 2002년 10월이었다. 당시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중학생을 추모하고 미패권주의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고 있던 차였고, 나도 거의 처음으로 전통적 학생운동계열이 주도하는 시위에 끼어 거리를 누볐었다.

극미(克美 혹은 克米)의 물결은 12월 대통령선거의 무드와 만나 절정에 달했다. 그때 나는 전의경들과 처음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힘겨루기를 했다. 당시 촛불시위에 가담한 인파는 5만을 훌쩍 넘겨 있었고 전의경들은 ‘데모꾼’도 아닌 일반 시민들의 힘마저 당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전경을 뚫고 나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아직 오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0여명의 전경들이 2열종대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피하지 않은 채 촛불을 들고 서 있었고 내 키(180cm)를 상회할 만큼 장신이었던 그들은 나를 가운데에 묻은 채로 지나쳐갔다. 누가 이걸 사진으로 찍으면 괜찮겠군,이라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5개월 후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 나는 강원도 102보충대대로 입대했다. 그곳에서는 “너희들은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는 우스개가 떠돌고 있었다. 나는 나흘이 지나 화천에 위치한 훈련소로 군사기본교육을 받으러 떠나며 내심 철책선 근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소 3주 후 나를 비롯한 240명의 인원 가운데 자그마치 100명씩이나 전경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5주차에 그 대열에 내가 끼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육군 입대자가 전경이 된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경과 의경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전경은 시위를 진압하고, 의경은 교통정리 등을 한다는 따위의 선입견만 퍼진 것 같다. 의경은 ‘의무전투경찰순경’의 줄임말이며 입대를 맞이한 젊은이들이 자진해서 시험을 거쳐 임명되고 일차 임무는 ‘치안업무 보조’이다. 전경은 ‘작전전투경찰순경’의 준말로 행정자치부 경찰청이 국방부 육군 입소자를 차출하면서 ‘만들어’지고 일차 임무는 ‘대간첩작전’이다. 그런데 시대상황이 달라지면서 전경 역시 ‘대간첩작전’보다는 이차 임무인 ‘치안업무 보조’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들을 뭉뚱그려 ‘전의경’이라고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전의경의 근무지는 다양하고, 소속에 따라 업무도 천차만별이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고, 진압부대(전투경찰대, 의경 기동대, 의경 방범순찰대)에서 근무하는 전의경도 있다. 시위진압은 진압부대의 몫이고, 시위진압의 양적·질적 부담은 의경 부대가 전경대보다 더 많이 진다.

나름대로 편한 군복무를 위해 의경을 지원했다가 기동대로 분류되었든, 육군으로 입대했다가 경찰로 분류되어 전경대에 배치되었든, 제대가 먼 미래인 신병에게는 불운하기 짝이 없는 경우다. 시위진압에 나서는 전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심적 타격부터 우선 헤아려야 한다.

서로를 적이 아니라 말하지만

“뭐? 쫄병도 자기 전에 MP3를 듣는다고?” 작년 초 휴가를 나온 후임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도 후임보다 선임이 많아 군생활이 편해졌다는 말이 선뜻 나오기는 힘든 입장일 터라서 그의 증언이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군대 중에서도 가장 완고하고 무지막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의경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징병제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날 부대의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전경대의 변화가 여느 육군부대를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악습의 기원이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튼튼했기 때문이다.

처음 전투경찰대로 발령나던 날부터 나는 2주일동안 신병으로서 담당 조교가 시키는 대로만 일일이 움직이게 되었는데 반쯤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악습들을 새삼스레 상세히 증언하지는 않겠다.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었던 것 그대로다.

대원들을 옭아매는 악습이 유지되는 힘은 크게 두 군데에서 나온다. 첫째는 “이것이 군대다!”라는 지상명령이다. 육군의 내무생활문화가 바뀌든 말든 전경대는 그 부대만의 독특한 관습이 있으며 그것은 ‘까라면 까는’ 철저한 상명하복이라는 식이다. 물론 전투경찰대설치법이나 경찰 간부들이 (적어도 말로는) 금지하는 바들이 어째서 고참의 권력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문민 통제’의 방법으로서 기강을 잡기 위한 상명하복은 당연히 아니다.

둘째는 “빠지면 뚫린다”는 강박증이다. 편해진 생활은 군기를 흐트러뜨리고, 그것은 시위대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뜻이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효과적인 진압에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의심은 그렇다고 쳐도, 실제로 부대가 시위를 제대로 막지 못할 때 대원들은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상부에게 추궁을 당한 간부들이 대원들을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생활실(전의경 부대는 내무반을 생활실이라고 부른다) 벽에 붙은 행동요령에는 “시위대는 적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무리하게 진압하지 말고, 씨름이나 럭비를 하듯 대처하라”는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무력충돌의 위험과 진압실패 시에 따르는 스트레스에 직면한 전의경들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별 의미가 없다.

시위에 나서는 ‘운동권’도 ‘전의경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고 발언한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경찰이 먼저 공격했다’ 혹은 ‘충돌 양상이 경찰로 인해 더 크게 번졌다’는 주장이 훨씬 더 앞선다. 그러나 폭력은 선후(先後)나 ‘상대적으로 더 큰 책임’을 가려낼 만큼 깔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평화시위를 외치는 것은 국가와 자본에 굴복하는 것이다’라는 견해까지도 나온다. 폭력은 자제되기는커녕 규명되지도 않고 서로의 아집만 강화시키고 있다.

필요 이상의 노출 vs. 쓸데없는 모욕

전시를 대비하는 국방부 소속 장병들과는 달리 전의경의 현장출동은 언제나 실전이다. 그럼에도 시위 현장에서는 쉽게, 빨리 전의경이 목격된다. 살벌한 풍경이다. 근래 들어서는 버스를 이용해 진을 치거나 비상시에 물대포를 쏘는 다양한 전술들이 선을 보이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검문검색을 불사하는 방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일선치안현장에서도 경찰이 지나친 노출을 자제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보 순찰을 도는 이미지로 각인된 런던의 경찰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순찰지구대나 파출소의 근무경관들이 입는 순찰복(얼마 전 디자인이 바뀌면서 이제는 아예 자원봉사대 같은 외양을 하고 있다)과 달리, 척 보기에도 전투태세를 짐작할 수 있는 복장을 착용한 전의경들이 방패와 봉을 들고 진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윤리적 판단을 떠나 전략적으로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위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항의이며, 그 항의는 정서적인 분노와 떼어놓을 수 없다. 구호가 아무리 이성에서 나와도 몸은 감성과 야성을 따르는 법이다. 평화시위를 기획했다고 해도 버스로 행인들과 격리시키고 마치 시비를 걸 듯 전의경을 배치해놓은 꼴을 보면, 시위 참여자도 맞대응의 충동에 휩싸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연히 필요 이상의 노출은 쓸데없는 모욕을 자초한다. 시위현장에서의 내 비애감도, 앞서 밝혔듯 폭력충돌을 비교적 덜 겪은 부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육체적 고달픔보다는 모욕을 받는 기분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막대기 네 개를 달고 있던 고참 시절에 전국공무원노조사태가 있었다. 마침 부대가 있던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파업으로 인한 공무원 해고자가 많았고, 시위는 사뭇 격렬했다. 요즘 들어서 학생시위는 과격한 축에 들지 못한다. 경제적 손실에 의해 노동자나 농민이 거리에 나섰을 때, 그리고 그 투쟁을 전국 규모의 단체나 진보정당이 지원했을 때, 그때가 충돌이 첨예한 시기인데, 전공노사태도 그렇게 확산되었다.

해고사태 직후 해당 지역의 도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제일 활약(?)했던 분이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여성이었는데, 시비를 걸려고 작정하고 나온 듯했다. 그의 입은 내 이해심을 추월해 나갔다. 그는 앞줄에 서 있던 체구가 작은 대원에게 쏘아붙였다. “넌 전경 왜 갔냐?”(순간, “시위대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는 지시가 대열 여기저기로 전파되었다). 그 대원은 나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후임이었고, 어느새 2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집회현장에 동료 대원이 시위대에게 욕을 먹거나 타격을 받으면 마음이 상한다. 그가 설령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고참이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그날 우리가 섰던 곳은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었다. 전진 배치를 하면 할수록, 물러서게 되든 버티고 서 있든- 치욕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은 커지는 것이다. 시위대에게 딱히 이념이 없고 지도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경우라면 도리어 사태는 더 커질 수도 있다. 한번은 정부 방침 때문에 땅값이 떨어진다며 항의하러 나온 아줌마들이 대뜸 벽돌을 던져댄 적도 있었다. (우스새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왕 성내러 나간 김에 전경들의 ‘방패’와 ‘보호장구’를 믿고 화풀이를 한 것이다.

“너무 앞에 세워놓고 시위대의 공분을 유발하자는 거나 뭐냐.” 이따금 휴가를 나와 만나는 후임들도 불만을 토로한다. “왜 먼저 진을 쳐놓고 폭력사태를 유발하는 거냐.” 이것은 시위당사자나 인권단체의 비판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만큼은 전의경과 시위대가 다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내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전의경 제도가 축소되니 폐지되니 말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드디어 정부가 작심을 한 모양이다. 내년부터 20%씩 인원을 줄여나가다가 2012년경에는 완전히 폐지한다는 계획안을 내놓았다.

자질구제한 심부름에서부터 시위현장 투입에 이르는 여러 3D 업무를 맡길 인력을 잃어버리게 될 경찰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엄청난 인력증원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해할 만한 주장을 펴기도 하고, 치안공백이 엄청나게 발생하리라며 과장된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경찰청의 의견이 얼마나 옳은지는 더 검토해봐야 한다. 하지만 전의경을 수단으로 삼은 병정놀이를 반성하는 데 게을렀으면서, 없어진 병정들의 자리를 직업경찰이 채워야 한다는 소식에는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찰청의 모습은 비판받아야만 한다.

더불어, 병정놀이의 가장 윗선에 청와대가 있음을 기억하자. 국정상황실에서 경찰청을 닦달할 때, 일선 대원들에게 미칠 그 여파는 가히 ‘나비효과’를 방불케 할 것이다. 전의경 폐지만을 공고하고 5년동안 진압양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전의경의 적이 될 것이다.

오늘날 전의경 부대의 실상은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내무생활의 혁신은 어려우리라고 사료된다. 이것은 마땅히 일선의 지휘관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부대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의경 부대의 특성상, 윗선에서의 지침이 하달되어 실현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의경 부대에 부임한 경관들은 대부분 전의경 부대를 현장의 외근이나 본서의 내근에서 벗어난 해방구로 인식하는 듯하다. 힘겨운 경찰생활 도중 조금 편한 근무지에 머무르며 자기계발에 열중하는 일을 탓할 수는 없지만, 구타와 가혹행위가 잔존하는 것까지 너그럽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의경 제도가 폐지되어서야 비로소 악습이 사라지는 불상사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

경찰 바깥에도 쓴소리를 던져야겠다. 아마 작년 말쯤에, 내가 제대할 무렵 신병이었던 대원들까지도 군복무를 모두 마쳤을 것이다.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후임들 대다수는 내 전임들이 그랬듯 시위하는 사람과 단체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의경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문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전의경의 수는 4만명에 달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니, 한명 한명의 구체적 현실에 봉사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집단적 행동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걸 새겨두기 바란다. 전의경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더라도, 그 뒤에 남은 것이 뻔뻔하고 무조건적인 자기합리화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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