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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논문 기획

史의 찬미 | 2008. 1. 21. 20:16 | Posted by 김수민

'역사'는 내 얕고 좁은 공부 인생에서, 특히나 글쓰기의 길에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아홉살 적 만화로 된 한국사를 보고 노트에 요약하며 해설을 붙였고, 열세살에는 '고구려'에 대한 논문을 쓴답시고 20페이지의 원고지에 필체를 박아넣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취미를 잃으면서 나의 국사, 세계사 과목 점수는 평균 점수를 티나게 웃돌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역사학과를 지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한국의 고대, 중세 역사에 가진 지식이 빈한하고 다른 동양 지역이나 서양의 역사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사실상의 문외한이다.

교육학과 소속인 나는, 원래는 제2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 국어국문학을 고려했었다. 우습게도 나는 신문방송학이란 학문에 여전히 무지하지만,  중학생 때 조선일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때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을 꿈꿨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문장의 골짜기에 푹 빠져 국어국문학에도 기웃거렸는데 당시 연대 국문과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접하며 뜻을 접었다(나는 그 사태를 다룬, 학내 언론계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역사학도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던 나는(역사학도라서 어울린 것이 아니라 마침 그들이 역사학도였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한국사학입문 강의를 들었고 2006년도에 이중전공으로 한국사를 신청했다. 길게 치면 15년을 넘어가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흥미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에 졸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의 일정을 고려해 교육학과 졸업논문을 미리 당겨 썼다. <해방 후 교육주도세력과 사립대학교의 형성>. 야심에 가득찬 준비에 불구하고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 늦어 시간이 촉박해지면서 졸문이 되고만 그 글의 제목이다. 이 교육'사' 논문은 과학'사'를 전공한 선배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씌어졌다. 나는 아마 신문방송학과에 갔어도 '언론사'를, 떨어졌던 고려대 정경학부에 붙었어도 정치외교학을 전공해 '정치사'를 연구했을 것 같다. 국어국문학과에 갔어도, <근대를 다시 읽는다>에 수록된 국문학자들의 논문처럼, 문학 작품에 드러난 일상사 연구를 했을 것 같다.

나는 이 논문을 쓰면서 논문쓰기의 맛과 고통을 알았다. 논문은 아무리 제주를 부려도 픽션이나 에세이보다 열등한 문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논문에 맞는 필치로 명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서-본-결'의 줄기로부터 파생될 가지와 잎새들은 넉넉하지 않다.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처럼 집필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초라함을 감내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논문쓰기가 가지는 태생적 요인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논문은 온갖 자료와 지난 연구 성과들에 대한 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른 장르의 글들보다는 메모와 그 집합에 가까운 글인 탓이다. 물론 여기서도 맞춤법이나 비문을 일소해야 하는 것은 물론, 어지간하면 같은 단락에 또는 원고지 10장 이내라던가 하는 가까운 범위 내에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법칙은 따르는 게 낫다. 라이터로서는 '논문도'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나, 논문쓰기에서 헤어나는 법을 깨우치는 게 조금 더 절실하다. 나는 논문 집필에 들어가면서는 문체가 화사해지려는 걸 막으려고 애를 썼고, 쓰고 나서는 본래의 문투를 복원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요즘 또다시 논문 작업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가제는 <허정 과도정부 연구>이다. 나는 한국현대사 가운데 유신시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1967~1972년 사이 남한과 북조선이 각자 유신체제와 유일체제를 성립해 나가는 과정을 비교하는 쪽으로 옮아갔다. 그 다음에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혁신계 지식인들이 윤보선이 아닌 박정희를 지지했다는 증언을 발견하고 1960년대 초중반으로 다시 미끄러져갔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 의장의 공산주의적 언행과 남로당 전력 등은 이탈리아나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처음에 좌익이었다는 점과 절묘하게 비교되었다. 거기에 당대 혁신계와 학생운동의 흐름, 사상적 혼란, 민족주의의 강화와 인민민주주의적 이념의 조용한 부상 등을 겹쳐보며, 일단은 4.19와 6.3 사이의 시대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이다.

사실 최근엔 또 초점이 이동하면서 한국전쟁에 숨은 5.16의 원인들을 찾는 데 신경이 쓰이고, 또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으로 6.3세대의 사회진출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에도 이끌리지만, 어쨌든 1960년대 초중반 연구의 전초 작업으로 4.19 혁명 직후부터 제2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짧게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를 논문 작업의 주제로 지목하게 되었다. 어차피 한국사 과정에 졸업논문 수업이 있었다면 이 주제를 두고 작업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TV에서 허정 과도정부를 다룬 역사물을 방영한 적이 있다. 우연히 프로그램의 말미만을 시청하고 느낀 짙은 아쉬움만이 '짧은 시간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는 충분한 힘이 없었다'는 결론부의 멘트와 함께 기억난다. 그것이 이 연구를 유도하였다.

허정은 근래로 치면 고건과 비슷한 인물로 한국민주당 출신이면서 이승만과도 절친한, 당대의 정치 지형에서는 이승만과 민주당의 중간께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이나 이승만이나 지독한 반공주의와 기득권세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고, 그러니 허정의 정치노선에도 그 이상의 별 특이사항이 없다. 하지만 한국현대사에서 여당 실력자와 야당 투사, 그리고 그들의 쟁투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보다 과장된 면이 있다. 특히 오늘날 모피아니 교육마피아니 하며 악명을 떨치는 자들을 바라보자면 정치인(또는 군부나 재벌) 못지 않게 관료들의 행적을 좇을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허정이든 고건이든 성난 인파의 시위를 전후하여 대통령직을 대행했지만, 그들이 -자신은 예상치 못했겠지만-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또 물러나거나 직무정지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으면서도 권력공백을 극복하고 국정을 운영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 답 안에는 바로 봄에 한 일을 겨울에 또 할 수 있는 '관료'만의 파워가 있다.  

대학에 입학할 적보다 썩 나아진 구석이 없지만 어느새 내 나이는 2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대학원 입학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만일 진학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 논문이 마지막일 것이 뻔하다. 그간 방학과 휴학들을 거쳐왔음에도 겨우 작년의 마지막 한달 반동안 몰아서 논문을 썼는데, 대학원에 가지 않으면 내 깜냥과 의지로는 앞으로는 한편도 못 쓰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우선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許政'을 검색해 옛 신문자료들을 뒤지는 중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번역되지 않은 영어 자료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대가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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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다스리기

Free Speech | 2008. 1. 20. 01:08 | Posted by 김수민
틱낫한의 책을 아무리 봐도 화가 다스려지기는커녕 반복되는 뻔할 뻔자에 도리어 화가 더 난다는 사람마저 있다. 그들은 아마 버스가 오지 않아 걷기 시작하면 하필 정류장 중간쯤에서 버스가 보이는지, 토스트를 떨어뜨리면 왜 항상 버터 바른 면이 바닥에 닿는지, 머리카락이 빠져서 모자를 벗었는데도 숱이 늘지 않는다는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리처드 로빈슨의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를 읽어보길 권한다. 혹 "책이 왜 이리 쉬워?"라고 묻진 마시길. 당신은 아마 어려운 책을 건네주면 "씨발 난 스트레스 하나 푸는 데에도 이렇게 어려운 책으로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나?"고 할 것이기에. "몇가지 의학 및 심리학 용어가 생소하기는 하지만, 이런 원리를 나도 알기는 해"라고 밝히지도 말길 바란다. 막상 중요할 때는 그런 게 생각이 안 나거덩... 그게 '머피의 법칙'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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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

史의 찬미 | 2008. 1. 18. 12:40 | Posted by 김수민

 

“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1)

- 영국 노동당내 좌파의 대안경제전략(AES)


김수민



1. 사회주의에 무심한 노동당, 사회화를 포기한 사회주의 


영국의 근대사는 이웃한 프랑스에 비하면 격랑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계급적 평등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놓고 사유했던 앵글로색슨적 전통은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덜 두드러지게 벌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의 특성은 이와 밀접하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의 제도적 진입을 위해 결성한 ‘노동자대표위원회(LRC)’의 후신이었고, 당명 그대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정당’,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노조의 당’에 가까웠다. 특별히 당원제도가 없이 노동조합원들이 곧바로 집단입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등의 특성은 이를 정확히 뒷받침 한다.


  영국 노동당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손색을 갖춘 것은 1918년 당 대회에서부터였다. 여기서 노동당은 “생산수단·분배·교환의 공동 소유, 민중적 경영과 산업·서비스의 통제 체계”라는 구절의 당헌 4조를 통과시킨다. 뿐더러 대회에서는 개인입당제도가 신설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로 노동당이 궁극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상층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된 힘으로 당을 이끌어나갔고, 여기에 하원의원들이 당의 일상활동을 주도함에 따라 당의 민주화를 저해하였다. 집권할 때는 각료들이, 그렇지 않을 때는 쉐도우 캐비넷(그림자 내각)의 구성원들이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다. 당수라는 존재도 이러한 구조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가 의원단의 선거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은 원내 인사들과 기꺼이 타협하여 당의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노동당은 사회주의의 핵심 강령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도 실현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애틀리 정부를 출범시켰고,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무상의료를 구현하고 주택의 공공화에서도 성과를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국가가 개입하여 수정을 꾀한다는 케인즈주의적 발상에 머무르고 만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그랬듯 결국 노동당은 노동자 주도의 경제,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계획과 시장의 혼합, 조세와 재분배를 더 주창하기에 이른다. 토니 크로슬랜드 등의 이데올로그들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전부인 양 여겼고, 1950년대 후반의 당지도부는 당헌 4조를 삭제하려고 시도했다. 혼합경제와 재분배를 1단계로 자주관리나 생산수단의 사화회를 2단계로 쳤을 때, 1단계에 집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1단계가 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면 말이다. 




2. ‘벤 좌파’와 대안경제전략의 부상


당의 우경화를 비난하며 왼쪽 깜빡이를 켜 당수가 된 헤롤드 윌슨도 총리 재임 기간동안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 데 실패한다. 노동당의 1964년 선거공약부터가 산업근대화와 경기확대라는 탈이념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윌슨은 사회주의 강령은 차치하고, 임금인상을 봉쇄하는 노동법 개정을 강행했다가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치는 등 ‘노동’당답지도 않은 모습을 연출한다.


  이 시기 노동당과 윌슨 정부의 우회전에 가장 제동을 걸었던 프랭크 카즌스 기술장관이 내각을 떠나 원래 일하던 운수노조로 복귀하면서, 당내 좌파의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 이가 토니 벤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영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명단에서 켄 리빙스턴 현 런던시장의 윗자리에 오르지만, 처음부터 그가 꽤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원의원을 아버지로 둔 윌슨의 1순위 후계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뒤 상원의원직을 맏아들로서 계승하게 되면서 그는 이 구습을 타파하고자 3년동안 투쟁했고, 영국식 민주주의와 이에 무비판적인 노동당의 행태를 회의하게 되었다. 공화파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해악을 직시하며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프랑스의 장 조레스와 닮은 부분이다. 


  토니 벤이 떠오르면서 노동당은 1970년대 들어 좌경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거대 노동조합에 좌파적 성향이 뚜렷한 지도부가 들어서고, 68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지역활동가로 자리잡았으며, 토니 벤은 전국집행위원회의 핵심인물로 급진적 정책 구상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전국집행위원회의 좌우 비율은 1964년에는 8:20이었으나 그무렵은 12:15로 좁혀져 있었다.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국유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집행위원회는 드디어 1973년에 들어 급진적 정책들을 채택한다. 정책강령은 초반에서 “노동당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권력과 부의 근본적이고도 불가역한 이전을 가져올 사회주의정당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선포하였다. 보수당 히드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며, 일반은행, 보험회사, 금융기관 그리고 제조업부문들을 국유화할 대상기업에 포함시켰다. 국민기업위원회(NEB: National Enterprise Board)는 바로 이 일련의 대안경제전략(AES: Alternative Economic Strategy)의 화룡점정이었다. NEB란, 25개 제조업을 비롯해 개별기업의 주식을 국가가 강제로 매입시키는 국가주주회사이다. 여기에 계획협약을 통해 국가가 100여개의 대기업체들로부터 가격, 이윤, 투자계획 등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덧붙여지면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노리는 AES는 한결 더 색깔이 짙어졌다.    


  AES는 만약 실현될 경우 국민총생산 및 총고용의 4할을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노동당이 1960년대 중후반에 실시한 산업재조직공사, 산업확대법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면, AES는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시도되는 사회주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노동당 좌파의 거두인 오를 후트가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강령”이라고 추켜세운 정책강령은 그해 말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1974년 2월 파업파동 등 혼란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1931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에 불구하고 불안하게나마 집권할 수 있었다. 총리 복귀한 윌슨에 의해 토니 벤은 산업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전국집행위원회 산하의 국내정책위원회 의장이었기에 정부와 당에 걸쳐 튼튼한 권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당내 좌파로 꼽히는 마이클 후트와 바바라 카슬도 각기 고용장관,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슨은 더 튼튼한 정부를 구성키 위해 10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했고, 노동당은 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3. NEB의 타락과 노동당의 패배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당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6%였고 공공부문 임금상승률은 20%에 이를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무역수지도 악화되었고 실업자는 100만면을 넘어섰다.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 바야흐로 케인즈주의가 몰락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벤 장관은 관료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실무자들의 녹서에 근거해 1974년 5월 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영국산업의 재건>이라는 백서2)는 선거공약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산업계와 보수언론은 당연히 반발했다. 각료들도 이미 국가개입보다 만성적 저투자의 해결에 관심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벤의 제안이 정부와 산업의 신뢰관계를 파손하리라고 우려했다. 


  결국 윌슨 총리는 그 자신이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앉아 노동당내 좌파를 배제하고 백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정안은 “산업부문과의 공개적 제휴”를 내걸었다. 애초 계획협정은 정부 필요에 의한 사부문 기업들을 강제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수정안에서는 계개별기업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재정지원을 받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게다가 NEB가 25개 업체를 인수하고 제약, 은행, 보험회사를 공공으로 이전한다는 언급도 삭제되고 이는 해당기업이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사부문의 축소하겠다는 취지가 사적 기업들을 보호·유지하는 쪽으로 꺾인 셈이다. 


  윌슨 정부는 새로 만든 산업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무난히 통과시켰다. 그런데 영국산업연맹은 윌슨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사부문이 더 침해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재수정을 요구했다. 윌슨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업이 정보를 노동조합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조항마저  지워졌다. 국유화는 물론이고 산업민주주의마저 부인되고, 산업투자와 생산력 확장을 위한 재정보조가 NEB의 주요기능이 되었다. 그리고 벤 장관은 보수당, 보수언론, 경제관료들의 공세와 그에 뇌동한 총리에 의해 경질당한다.


  NEB 이사회의 의장과 부의장도 사기업측의 대표자가 맡았다. 주식을 국가로 이전할 방도를 잃은 NEB는 몰락산업의 구조자로 전락했다. NEB가 출범 초기 주식을 사들인 68개의 기업 중 정부의 지분이 절반을 넘는 기업은 19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산업계획은 점차  영국 정부와 노총, 산업연맹의 3자협상 테이블인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C)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NEB를 위시한 실험은 “위대한 배반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1976년, 영국은 IMF 위기에 직면한다. 벤이 국내정책위원회에서 구제금융조건을 거부하고 국내의 자본 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은 IMF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40억 파운드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대공황 이후 최대의 규모로 예산을 삭감하고 금리를 15%로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위기는 1979년 보수당 대처 정부를 불러 일으켰고, 그 다음 총선에서도 노동당 우파 일부가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분열이 일어나 보수당과 대처가 승리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팡이었던 케인즈주의는 부러졌고 신자유주의의 험로가 놓인 것이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선의의 경쟁이라도 벌이듯 자본과 시장의 원리를 관철시켰다. 훗날 노동당은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을 내세워 정권을 잡지만, 이미 영국과 노동당은 그 사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블레어 총리는 ‘붉은 옷을 입은 대처’가 되었다.



4. 아직도 ‘벤 좌파’를 예의주시하는 이유


서·북유럽 진보정당 가운데 사회주의적 성격이 가장 묽은 영국 노동당에서 국유화 전략이 등장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나타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30년 대공황에 이어 또다시 민생경제를 강타한 1974년도의 불황은 진보·좌파 세력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계기였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세력이 기업의 지분을 차근히 인수하여 생산수단 사회화를 달성하려는 임노동자기금 계획을 세웠고, 독일에서는 소유의 사회화를 다시 사회민주당 강령에 삽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프랑스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강령을 통해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에 합의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민간기업이 성장한 가운데 국유화 전략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원래 사회주의의 이상은 ‘사회화’이며, ‘국유화’는 그의 한 유력한 수단일 뿐임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 좌파연합은 해외자본, 보수세력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우파와 동거정부를 꾸리며 ‘니니 정책(민영화도 국유화도 하지 않는다)’에 눌러 앉았다. 서·북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소유의 사회화 방안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후 불어올 신자유주의의 바람의 전초현상인 셈이다. 사회화에 대한 좌파의 무기력이 원인인지, 사회화가 무리하게 꺼내든 무기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국유화 테제를 자본주의 초기 국가가 시장과 자본의 힘을 유일하게 제어할 장치였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오늘날 좌파들은 협동소유나 자주관리 그리고 민주적 경영참여 등의 여타 사회화 전략으로 결론을 터야 할 것이다.


  서·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 내에서, 소득의 재분배나 다소의 경제계획에 우선 만족하는 편이 ‘사민주의 (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산업민주주의 내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계속 시도하는 쪽은 ‘사민주의 (내의)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좌파의 도전은 내외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보수화의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파탄이 나고 좌파 정당의 주류가 ‘제3의 길’로 우경화되면서, 그들이 사회주의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1973년, 영국 노동당에는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이 결성됐고, 5년이 지나서는 노동당조정위원회(LCC)가 출범했다. 전자의 목표는 의원단의 독재를 타파하며 당의 혁신과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AES를 더 연구하고 교육·선전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조직은 세를 불리며 서로 연합해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벤 좌파’ 또는 노동당 ‘신좌파’의 대표 조직이 되었다. 신좌파는 당헌 4조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찬성한다는 점에서 ‘트리뷴’ 그룹과 같으나, 의원단구조를 혁파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구좌파’와 달랐다. 신좌파는 정·부당수를 의원단이 아닌 대의원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시켰고, 구좌파 쪽의 마이클 푸트가 그 다음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수로 취임했다.


  벤 좌파는 아쉽게도 노조단위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블록투표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개별 당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제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의원단의 전횡을 견제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유지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대신 벤 좌파는 블록투표가 각 단위별 민주적 절차에 의거하도록 노력하고, 당구조에 직장분회를 신설하며 평당원 민주주의에 이바지한다. 또 당 바깥의 지식인들까지 초빙하여 ‘일요모임’이라는 정책집단을 만들고,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 등과 노동운동의 교류를 추진했다. <뉴 소셜리스트>는 바로 이 같은 벤 좌파의 운동을 홍보하는 기관지였다. 


  벤 좌파는 영국 정치와 노동당내의 힘 있는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대처 총리와 보수당에 맞서느라 노동당은 주류 우파 중심으로 굴러갔고, 블레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당은 더욱 우경화되었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굴신하는 것을 거부한 켄 리빙스턴(런던 시장)과 같은 이들이 있으나 내각의 다수자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100년 전 노동당이 소집한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환경·여성·소수민족까지 참여시키면서 창조적으로 복원하자는 토니 벤의 목소리는 우경화를 반대하는 영국 좌파의 표상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유럽의 진보정치는 사민주의의 이상을 배반하며 정당의 운영 면에서도 당원중심의 대중정당 모델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벤 좌파의 정당혁신과 ‘민주적 사회주의’는 안티-테제로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테제로서 가장 앞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다.


1) ‘제3의 길’의 이데올로그였던 앤서니 기든스가 토니 블레어에 이어 영국 총리로 취임한 영국 노동당 당수에게 “브라운, 이젠 당신 차례요”라고 말한 것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2) 백서는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뜻하고, 녹서는 특정 정책영역에 대한 토론보고서이다.



[참고문헌]


고세훈, 『영국노동당의 선거전략과 국유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적 성격과  당내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와 사회> 13호, 1992.

고세훈, 『영국 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장석준, 『역사속의 진보정당들 11. 영국노동당 신좌파운동: 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이론과 실천> 2003년 6월호.

한국 사회민주주의 연구회,『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도서출판 사화와 연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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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스네이크 DVD 구입

Listen to the 무직 | 2008. 1. 17. 21:17 | Posted by 김수민
화이트 스네이크 DVD 구입.

데이빗 커버데일의 보컬은 여느 라이브에서처럼 불안하다.
기타리스트 애드리언 반덴버그를 빼면 전성기 멤버도 없다.
더 치명적인 것은 <Whitesnake>(1987), <Slip of The Tongue>(1989)가 나온지 몇년 지난
1990년대의 공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가치가 있는 건
데이빗 커버데일이 서 있는 것만으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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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Film Tent & 2nd Stage | 2008. 1. 13. 22:00 | Posted by 김수민
영화가 좀 심심했으려나? 소금이나 후추를 더 쳤으면, 다대기를 풀어넣었으면, 또는 조금더 쫄였으면 하는 관객들이 있지 않았나 싶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세 친구>를 본 나로서는 익히 예상한대로였다. 임순례다운 영화였다.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할 말을 많이 남기지는 않는 영화다. 국수주의나 영웅주의로 빠져 들지 않았다는 호평이 가능하지만, 그건 기본이잖아? <디 워> 때문에 그게 칭찬이 됐다.

전형적인 스포츠영화로 끌고 가지는 않겠다고 했다. 순간 내 귀에는 경기 장면 갖고 뭐라하지 말라고 들렸지만, 나름대로 촬영은 잘 되었던 것 같다. 내 예상보다 배우들은 핸드볼에 잘 적응했고, 시스템이 화려하지 않았다지만 기본적으로 얼마간 역동성이 있었다.

내가 거슬리는 건 두가지였다. 자기편이 또는 상대편이 공격을 하고 있는 와중에 휘슬이 울리는 장면이 내 기억에는 없었던 것 같고, 경기나 피리어드가 끝나기 직전에 골이 들어가는 장면이 너무 많다.  극적인 타이 또는 역전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지만, 그렇게 여러번 쓰면 클리셰로도 적합하지 않다.

두번째는 마지막 실존 인물들의 인터뷰와 사진이 논픽션에 자연스레 섞이지 못했었다는 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등장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걸 피한 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 위의 두가지 지적은 다수의 관객들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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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

Free Speech | 2008. 1. 12. 20:33 | Posted by 김수민

어제 평당원 대토론회를 다녀왔다. 세시간동안 25명이 정식발언하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분당에 반대하는 어떤 이는 뒤풀이 자리에서 '간증회'라고 투덜거렸지만,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술자리에서나 자주파를 씹어대는 걸로 당활동기간을 소일했다는 걸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제는 주로 김종철 씨(서울시장 나갔던)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신당은 당원가입사업을 마구잡이로 벌이지 말고, 당원들에게 한달에 한번 모임이나 교육에 참석할 것을 의무로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동감하면서, 기존의 지구당체제를 유지할 필요없다, 지역당원협의회가 주민들을 굳이 당원으로 만들지 않고도, 비정규직 영세업자와 연계하고 민생상담실 및 교육, 문화센터를 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이런 이원적 지역사업론에는 공감을 표하는 분위기였다.

평당원 대토론회 마지막에, 지명발언을 했던 조승수 전 의원의 발언에 왠지 눈물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활동, 한편으로 헛고생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 역사의 저편이라고 넘어가고 진짜 시작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는 점잖고 수줍은 말투로 '개지랄을 떨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뒤풀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2010년도에 한국 국적을 가진 이주노동자를 안산 지역에서 후보로 내는 상상을 한다. 짜릿짜릿하다."

그는 1995년 울산에서 시 의원을 지냈고 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차례로 역임한, 당내 최장기 공직자이다. 그러나 그는 늘 당내 패권에서 떨어져 있었고, 당 대표에 도전했을 때에는 마타도어에 직면했다. 그 전에 그의 의원직은 선관위의 결정까지 무시한 사법부의 횡포로 박탈되어 있었다.

오늘 중앙위원회에서 조승수를 조갑제와 한편으로 취급하는 학생당원들의 퍼포먼스가 있었다고 한다. 개새끼들아, 얼른 뒈져버려라 정치적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승수 블로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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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Film Tent & 2nd Stage | 2008. 1. 8. 22:52 | Posted by 김수민

재밌게 잘 봤다. 간명한 영화인데도 생각보다 정리가 쉽지 않다. 모노 드라마로 극장에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려해보게 된다. 중간중간 좀비들과의 액션을 빼면 흐름이 역동적이지는 않다. 사람 사는 게 그렇지 뭐. 사냥총 들고 노루 쫓고 좀비 피해 백날 뛰어봐야 사회가 없으면 개인은 정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결론을 "뉴욕에만 사람 사는 줄 아냐?"로 받아들였다. 어째 뿌듯한 기분까지 든다. 도시에 남아 백신을 개발하던 주인공도 영웅주의적 틀틀 없이도 이해가 간다. 가족이 다 죽어 버렸으니께..

여기에 스포일러는 없으니 안심하고 글도 읽고 영화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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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평가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Free Speech | 2008. 1. 6. 21:38 | Posted by 김수민
대선 끝난지 20일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대선평가 지대 해봅샤!"하는 애들이 있다.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종북 청산 및 신당 창당 반대파들이고, 하나는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 있잖나... 거 왜... 기가 막히게 한박자 느린 사람들...

보면 몰라... 경선 끝나고 사실상 대선도 쫑났다. 그놈들 말하는 선거운동은 앵무새처럼 레파토리 외워고 율동하는 것밖에 없다. 9월부터 3개월동안 대체 뭐했나? 코리아연방공화국 갖고 삽질하질 않나, 어떤 색히들은 비례대표 세팅하러 댕기질 않나...

드디어 나온다는 대선평가가 '의회주의' 때문이란다. 아마 풀어서 쓰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박혀 자기네 일만 하고 운동판을 안 돌봤다는 말씀될 거시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래서 노회찬, 심상정보다 의정활동 못한 권영길을 추대했냐? 아예 이석행이나 이수호를 밀지 그랬어.

어떤 넘들은 판도상 불리했다고들 지껄이는데... 이건 "졌으니까 졌다"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왜 판도를 못 바꿨는데? 아니, 권영길 내보내서 참패할 걸 몰랐단 말야? 몰랐으면 짐싸고 알았으면 자진반납해라 시바..

저런 것들하고 대가리 모아봐야 박 터질 일밖에 없다.

제2창당에 종북 문제가 절대적인 건 아니다. 그밖에도 손보거나 박살낼 게 쌨다는 말이다. 종북 문제 갖고 이찔하고 자빠진 이상 딴 건 볼 것도 없다. 땔치우고 총선 뒤에 각자 평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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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욕은 내가 아니라도

Free Speech | 2008. 1. 5. 16:24 | Posted by 김수민
이거 원 술집에만 가면 이명박 욕을 듣는다. 심지어 정동영 찍었다는 게 자랑스러운 정치참여쯤으로 여겨지는 풍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명박은 당선되었는데 권영길이 3% 나오는 게 말이냐 되냐며 친구들에게 읍소한다. 보아하니 당원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 것 같은데, 고마워 해야 할지 당해도 싸다 해야 할지... 그들 중 여학생이 다수 보이는 것도 의외다. 이번 선거에서 반이명박 성향의 여대생 상당수는 이회창을 찍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보면 이명박 욕은 내가 아니라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해댈 것 같다. 이명박 찍지 않은 유권자 70% 대부분이 비토세력이 아닌가 싶은 예감마저 든다. 반이명박 전선에 서야 하는 부담은 덜었지만 동시에 또다른 부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이 주장한대로 노회찬, 심상정, 임종인 등은 꼭 이번 총선에서 구제되어야 한다. 그 세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대변하는 정치적 가치와 세력이 부상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머뭇거릴 새가 없다. 제2창당 또는 신당 건설을 2월 안에 완료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구리시 지역위원회 간부들이 집단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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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Free Speech | 2008. 1. 4. 13:36 | Posted by 김수민

계절학기 들으면서 매일 도서관에 간다. 물론 책읽고 대출하러 가는 거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중앙도서관에는 엄청난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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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 Jam <World Wide Suicide>

Listen to the 무직 | 2008. 1. 4. 00:13 | Posted by 김수민

최근 몇달동안 잘 듣지도 않고 넘겨버렸던 노래인데
용케 MP3 안에서 살아 남은 노래다. 세달동안인가? 여섯달? 1년?
언제 발표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래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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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가서 그러면 안 되지 말입니다

Free Speech | 2008. 1. 3. 15:25 | Posted by 김수민

복학하고 활동을 재개한지 얼마 안 지나 대학원생들을 세미나를 통해 만났다. 옹기종기 앉아서 어떤 기획안을 두고 토론할 일이 있었는데 가히 솜씨가 놀라웠다. 도나츠를 풀어 꽈배기로 만들어버린달까? 설명을 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됐다.

그게 가만 보니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더구만. 사회과학 계열 전공하는 이들이 특히 심했다. 인문계 쪽 대학원생들의 문제는 조금 다른 쪽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는 거다. 이를테면 오전에 포스트 모던 주장하고 오후에 민족주의 외치는 식으로.

내가 좀 요구하려는 건 뭘 공부하건 어떤 주의주장을 펼치건 간에 "공부한 걸 사람들 앞에서 써먹겠다"는 투의 행동거지부터 좀 걷어치우라는 거다. 써먹으려면 좀 지면이나 상대에 맞게 제대로 썰을 풀던가. 논문투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이종석이나 최장집 같은 이들 논문 보면, 전통적인 골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깔끔하게 쓴다. 관념어, 개념어의 남발이 독자를 거슬리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편성하는 솜씨가 서툴러 글이 너무 지저분해진다는 거다. 관념어, 개념어를 모르는 사람이 그 부분을 건너 뛰고 읽어도 글의 취지가 파악이 되어야 정상이다.

오늘 <레디앙>에 올라온 어느 박사과정생의 글은 최악이었다. 더구나 분석의 대상이 실재 세력하고는 판이하기 때문에 이건 논문으로도 못 써먹는다. 나는 다른 어휘와 개념을 적용할 수 있거나 나아가 그쪽이 더 적확함에도, 뻑하면 '탈영토화'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을 의심하고 지켜보는 편인데, 그 글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단어가 나온다.

저런 글 볼 때마다 대학원 가기가 두려워진다. 한국현대사 떼려치우고, 차라리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소재로 문화인류학 논문이나 한번 써볼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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