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1)
- 영국 노동당내 좌파의 대안경제전략(AES)
김수민
1. 사회주의에 무심한 노동당, 사회화를 포기한 사회주의
영국의 근대사는 이웃한 프랑스에 비하면 격랑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계급적 평등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놓고 사유했던 앵글로색슨적 전통은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덜 두드러지게 벌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의 특성은 이와 밀접하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의 제도적 진입을 위해 결성한 ‘노동자대표위원회(LRC)’의 후신이었고, 당명 그대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정당’,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노조의 당’에 가까웠다. 특별히 당원제도가 없이 노동조합원들이 곧바로 집단입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등의 특성은 이를 정확히 뒷받침 한다.
영국 노동당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손색을 갖춘 것은 1918년 당 대회에서부터였다. 여기서 노동당은 “생산수단·분배·교환의 공동 소유, 민중적 경영과 산업·서비스의 통제 체계”라는 구절의 당헌 4조를 통과시킨다. 뿐더러 대회에서는 개인입당제도가 신설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로 노동당이 궁극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상층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된 힘으로 당을 이끌어나갔고, 여기에 하원의원들이 당의 일상활동을 주도함에 따라 당의 민주화를 저해하였다. 집권할 때는 각료들이, 그렇지 않을 때는 쉐도우 캐비넷(그림자 내각)의 구성원들이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다. 당수라는 존재도 이러한 구조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가 의원단의 선거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은 원내 인사들과 기꺼이 타협하여 당의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노동당은 사회주의의 핵심 강령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도 실현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애틀리 정부를 출범시켰고,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무상의료를 구현하고 주택의 공공화에서도 성과를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국가가 개입하여 수정을 꾀한다는 케인즈주의적 발상에 머무르고 만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그랬듯 결국 노동당은 노동자 주도의 경제,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계획과 시장의 혼합, 조세와 재분배를 더 주창하기에 이른다. 토니 크로슬랜드 등의 이데올로그들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전부인 양 여겼고, 1950년대 후반의 당지도부는 당헌 4조를 삭제하려고 시도했다. 혼합경제와 재분배를 1단계로 자주관리나 생산수단의 사화회를 2단계로 쳤을 때, 1단계에 집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1단계가 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면 말이다.
2. ‘벤 좌파’와 대안경제전략의 부상
당의 우경화를 비난하며 왼쪽 깜빡이를 켜 당수가 된 헤롤드 윌슨도 총리 재임 기간동안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 데 실패한다. 노동당의 1964년 선거공약부터가 산업근대화와 경기확대라는 탈이념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윌슨은 사회주의 강령은 차치하고, 임금인상을 봉쇄하는 노동법 개정을 강행했다가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치는 등 ‘노동’당답지도 않은 모습을 연출한다.
이 시기 노동당과 윌슨 정부의 우회전에 가장 제동을 걸었던 프랭크 카즌스 기술장관이 내각을 떠나 원래 일하던 운수노조로 복귀하면서, 당내 좌파의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 이가 토니 벤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영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명단에서 켄 리빙스턴 현 런던시장의 윗자리에 오르지만, 처음부터 그가 꽤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원의원을 아버지로 둔 윌슨의 1순위 후계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뒤 상원의원직을 맏아들로서 계승하게 되면서 그는 이 구습을 타파하고자 3년동안 투쟁했고, 영국식 민주주의와 이에 무비판적인 노동당의 행태를 회의하게 되었다. 공화파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해악을 직시하며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프랑스의 장 조레스와 닮은 부분이다.
토니 벤이 떠오르면서 노동당은 1970년대 들어 좌경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거대 노동조합에 좌파적 성향이 뚜렷한 지도부가 들어서고, 68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지역활동가로 자리잡았으며, 토니 벤은 전국집행위원회의 핵심인물로 급진적 정책 구상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전국집행위원회의 좌우 비율은 1964년에는 8:20이었으나 그무렵은 12:15로 좁혀져 있었다.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국유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집행위원회는 드디어 1973년에 들어 급진적 정책들을 채택한다. 정책강령은 초반에서 “노동당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권력과 부의 근본적이고도 불가역한 이전을 가져올 사회주의정당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선포하였다. 보수당 히드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며, 일반은행, 보험회사, 금융기관 그리고 제조업부문들을 국유화할 대상기업에 포함시켰다. 국민기업위원회(NEB: National Enterprise Board)는 바로 이 일련의 대안경제전략(AES: Alternative Economic Strategy)의 화룡점정이었다. NEB란, 25개 제조업을 비롯해 개별기업의 주식을 국가가 강제로 매입시키는 국가주주회사이다. 여기에 계획협약을 통해 국가가 100여개의 대기업체들로부터 가격, 이윤, 투자계획 등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덧붙여지면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노리는 AES는 한결 더 색깔이 짙어졌다.
AES는 만약 실현될 경우 국민총생산 및 총고용의 4할을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노동당이 1960년대 중후반에 실시한 산업재조직공사, 산업확대법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면, AES는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시도되는 사회주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노동당 좌파의 거두인 오를 후트가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강령”이라고 추켜세운 정책강령은 그해 말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1974년 2월 파업파동 등 혼란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1931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에 불구하고 불안하게나마 집권할 수 있었다. 총리 복귀한 윌슨에 의해 토니 벤은 산업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전국집행위원회 산하의 국내정책위원회 의장이었기에 정부와 당에 걸쳐 튼튼한 권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당내 좌파로 꼽히는 마이클 후트와 바바라 카슬도 각기 고용장관,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슨은 더 튼튼한 정부를 구성키 위해 10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했고, 노동당은 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3. NEB의 타락과 노동당의 패배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당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6%였고 공공부문 임금상승률은 20%에 이를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무역수지도 악화되었고 실업자는 100만면을 넘어섰다.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 바야흐로 케인즈주의가 몰락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벤 장관은 관료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실무자들의 녹서에 근거해 1974년 5월 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영국산업의 재건>이라는 백서2)는 선거공약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산업계와 보수언론은 당연히 반발했다. 각료들도 이미 국가개입보다 만성적 저투자의 해결에 관심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벤의 제안이 정부와 산업의 신뢰관계를 파손하리라고 우려했다.
결국 윌슨 총리는 그 자신이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앉아 노동당내 좌파를 배제하고 백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정안은 “산업부문과의 공개적 제휴”를 내걸었다. 애초 계획협정은 정부 필요에 의한 사부문 기업들을 강제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수정안에서는 계개별기업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재정지원을 받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게다가 NEB가 25개 업체를 인수하고 제약, 은행, 보험회사를 공공으로 이전한다는 언급도 삭제되고 이는 해당기업이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사부문의 축소하겠다는 취지가 사적 기업들을 보호·유지하는 쪽으로 꺾인 셈이다.
윌슨 정부는 새로 만든 산업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무난히 통과시켰다. 그런데 영국산업연맹은 윌슨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사부문이 더 침해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재수정을 요구했다. 윌슨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업이 정보를 노동조합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조항마저 지워졌다. 국유화는 물론이고 산업민주주의마저 부인되고, 산업투자와 생산력 확장을 위한 재정보조가 NEB의 주요기능이 되었다. 그리고 벤 장관은 보수당, 보수언론, 경제관료들의 공세와 그에 뇌동한 총리에 의해 경질당한다.
NEB 이사회의 의장과 부의장도 사기업측의 대표자가 맡았다. 주식을 국가로 이전할 방도를 잃은 NEB는 몰락산업의 구조자로 전락했다. NEB가 출범 초기 주식을 사들인 68개의 기업 중 정부의 지분이 절반을 넘는 기업은 19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산업계획은 점차 영국 정부와 노총, 산업연맹의 3자협상 테이블인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C)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NEB를 위시한 실험은 “위대한 배반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1976년, 영국은 IMF 위기에 직면한다. 벤이 국내정책위원회에서 구제금융조건을 거부하고 국내의 자본 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은 IMF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40억 파운드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대공황 이후 최대의 규모로 예산을 삭감하고 금리를 15%로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위기는 1979년 보수당 대처 정부를 불러 일으켰고, 그 다음 총선에서도 노동당 우파 일부가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분열이 일어나 보수당과 대처가 승리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팡이었던 케인즈주의는 부러졌고 신자유주의의 험로가 놓인 것이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선의의 경쟁이라도 벌이듯 자본과 시장의 원리를 관철시켰다. 훗날 노동당은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을 내세워 정권을 잡지만, 이미 영국과 노동당은 그 사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블레어 총리는 ‘붉은 옷을 입은 대처’가 되었다.
4. 아직도 ‘벤 좌파’를 예의주시하는 이유
서·북유럽 진보정당 가운데 사회주의적 성격이 가장 묽은 영국 노동당에서 국유화 전략이 등장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나타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30년 대공황에 이어 또다시 민생경제를 강타한 1974년도의 불황은 진보·좌파 세력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계기였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세력이 기업의 지분을 차근히 인수하여 생산수단 사회화를 달성하려는 임노동자기금 계획을 세웠고, 독일에서는 소유의 사회화를 다시 사회민주당 강령에 삽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프랑스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강령을 통해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에 합의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민간기업이 성장한 가운데 국유화 전략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원래 사회주의의 이상은 ‘사회화’이며, ‘국유화’는 그의 한 유력한 수단일 뿐임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 좌파연합은 해외자본, 보수세력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우파와 동거정부를 꾸리며 ‘니니 정책(민영화도 국유화도 하지 않는다)’에 눌러 앉았다. 서·북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소유의 사회화 방안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후 불어올 신자유주의의 바람의 전초현상인 셈이다. 사회화에 대한 좌파의 무기력이 원인인지, 사회화가 무리하게 꺼내든 무기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국유화 테제를 자본주의 초기 국가가 시장과 자본의 힘을 유일하게 제어할 장치였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오늘날 좌파들은 협동소유나 자주관리 그리고 민주적 경영참여 등의 여타 사회화 전략으로 결론을 터야 할 것이다.
서·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 내에서, 소득의 재분배나 다소의 경제계획에 우선 만족하는 편이 ‘사민주의 (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산업민주주의 내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계속 시도하는 쪽은 ‘사민주의 (내의)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좌파의 도전은 내외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보수화의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파탄이 나고 좌파 정당의 주류가 ‘제3의 길’로 우경화되면서, 그들이 사회주의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1973년, 영국 노동당에는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이 결성됐고, 5년이 지나서는 노동당조정위원회(LCC)가 출범했다. 전자의 목표는 의원단의 독재를 타파하며 당의 혁신과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AES를 더 연구하고 교육·선전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조직은 세를 불리며 서로 연합해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벤 좌파’ 또는 노동당 ‘신좌파’의 대표 조직이 되었다. 신좌파는 당헌 4조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찬성한다는 점에서 ‘트리뷴’ 그룹과 같으나, 의원단구조를 혁파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구좌파’와 달랐다. 신좌파는 정·부당수를 의원단이 아닌 대의원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시켰고, 구좌파 쪽의 마이클 푸트가 그 다음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수로 취임했다.
벤 좌파는 아쉽게도 노조단위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블록투표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개별 당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제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의원단의 전횡을 견제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유지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대신 벤 좌파는 블록투표가 각 단위별 민주적 절차에 의거하도록 노력하고, 당구조에 직장분회를 신설하며 평당원 민주주의에 이바지한다. 또 당 바깥의 지식인들까지 초빙하여 ‘일요모임’이라는 정책집단을 만들고,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 등과 노동운동의 교류를 추진했다. <뉴 소셜리스트>는 바로 이 같은 벤 좌파의 운동을 홍보하는 기관지였다.
벤 좌파는 영국 정치와 노동당내의 힘 있는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대처 총리와 보수당에 맞서느라 노동당은 주류 우파 중심으로 굴러갔고, 블레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당은 더욱 우경화되었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굴신하는 것을 거부한 켄 리빙스턴(런던 시장)과 같은 이들이 있으나 내각의 다수자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100년 전 노동당이 소집한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환경·여성·소수민족까지 참여시키면서 창조적으로 복원하자는 토니 벤의 목소리는 우경화를 반대하는 영국 좌파의 표상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유럽의 진보정치는 사민주의의 이상을 배반하며 정당의 운영 면에서도 당원중심의 대중정당 모델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벤 좌파의 정당혁신과 ‘민주적 사회주의’는 안티-테제로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테제로서 가장 앞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다.
1) ‘제3의 길’의 이데올로그였던 앤서니 기든스가 토니 블레어에 이어 영국 총리로 취임한 영국 노동당 당수에게 “브라운, 이젠 당신 차례요”라고 말한 것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2) 백서는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뜻하고, 녹서는 특정 정책영역에 대한 토론보고서이다.
[참고문헌]
고세훈, 『영국노동당의 선거전략과 국유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적 성격과 당내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와 사회> 13호, 1992.
고세훈, 『영국 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장석준, 『역사속의 진보정당들 11. 영국노동당 신좌파운동: 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이론과 실천> 2003년 6월호.
한국 사회민주주의 연구회,『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도서출판 사화와 연대,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