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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ntioneers

Film Tent & 2nd Stage | 2008. 9. 2. 04:10 |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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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원 남자와 민주당원 여자의 러브스토리,라는 소개에 입맛을 다시는 이들이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 개봉을 하지 않았던 영화고, 아마 DVD를 구하기도 험난할 것 같다. 나는 2005년 부산까지 내려가 해운대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다. 물론 그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다. 그 영화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가 처음 본 영화이다. 나는 다음 영화(아마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였던 것 같다) 입장시간이 임박해서 '감독과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 자리를 떠야 했다. 아일랜드 국적의 모라 스티븐즈 감독의 미들 네임은 '미옥'으로 그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이 영화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버랩되며 만들어졌다. 대사에서 민주당원은 좌익으로 공화당원은 우익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주로 부시 정부의 외교정책에 초점이 맞춰진다(이런 영화가 유럽을 배경으로 했다면-이를테면 영국 노동당원 여자와 보수당원 남자가 주인공이었더라면 정치적 주안점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공화당 전당대회는 픽션이 아니다. 규탄하러 나온 시위대는 현실의 시위대였다. 힙합, 레게 등 다양한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물놀이패의 풍경도 잠시 스친다. 그중에는 "부시도, 캐리도 싫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달라"는 플래카드도 섞여 있다. 미국인으로 치면 거기에 가까울 나는 사실 감독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 진보정당의 당원인데, 민주당이 영화 내내 '진보'나 '좌익'으로 일컬어지니 서글프다." 다음 영화만 아니었다면(영화제에서는 늦게 도달한 관객에게 커튼을 열어주지 않는 게 관례다) 정말 그렇게 말했을 터이다. 

내가 가장 유심히 봤던 건 양측의 문화양식이었다. 공화당원 남자는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빼입으며 동료 당원들과 전당대회를 맞이한다. 민주당원 여자는 동료 운동가들과 모의를 하는데, 이념적인 대화는 거의 없고 퍼포먼스와 소품에 관한 토론이 많았다. 가령 전쟁반대 시위에 쓸 관과 그것을 덮을 성조기를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장식할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 나는 미대가 없는 소속학교의 특성과 그것이 학내 학생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또다른 긴장을 유발하는 존재는 민주당원 여자의 친구이다. 그는 학생운동가 출신의 수화 통역사인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수화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고 시름에 빠진다. 정치적 신념에 어긋나지만, 장애인들의 편리를 모른체하기 힘들었고, 더구나 생활여건상 일거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임무를 마친 뒤 재킷을 열어 티셔츠의 반전 표식을 보여주는 기습시위. 그러나 그는 통역만을 마치는데, 부시가 있는 무대 옆에서 열심히 수화를 하는 그의 모습에 거대정치의 구도로 읽어낼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스쳐간다.(영화 스탭들은 이 장면을 찍느라 곤욕을 치렀다. 장내 씬도 바깥의 규탄시위 장면처럼 실재였고, 스탭들은 촬영 도중 붙잡혀 구류를 살아야 했다.)

이 영화에서 정치는 두 남녀 간에 두드러지는 차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티븐즈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감독이 민주당 지지자는 아닐지라도 부시반대인 것 같기는 하다. 잠시 공화당원 남자는 대학 동창인 민주당원 여자에게 이끌려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하면서 착잡함에 사로잡힌다. 영어독해에 취약한 탓에 외신 따위를 읽을 리가 없는 내가 그라운드 제로의 의미가 180도로 뒤집혔음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덕택이다. 아니, 외신을 읽는 쪽보다 더 내게 이로웠다. 기사 읽고 사진 한장 보았다면 그냥 알고 끝났을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르다(이와 동일한 문장이 고종석의 소설에 있음을 밝히는 바지만, 누구나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고 또 깨달아가지 않는가).


2004년 말, 담배를 피다 머리를 싸쥐었었다. "김수민 수경님 진짜 걱정이 되십니까." "그렇지. 나야 몇달 지나면 제대지만, 니네는 큰일이다. 생각해봐. 부시가 되면 데모가 많아지겠냐, 적어지겠냐?" "아, 그렇지 말입니다." 어느새 4년이 흘렀다. 작년 루아얄이 프랑스 첫 여성대통령 탄생을 앞두고 좌절할 때 그러려니 지나쳤던 사람들도 이번엔 오바마의 당선을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게 그렇다.

이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자의 대선 후보지명 전당대회를 끝냈다. 저 컨벤셔니어즈 가운데서도 또 영화 주인공들이 나올지 모르지. 그나저나 <컨벤셔니어즈>는 어떻게 끝나냐고? 아 참, 참고로 영화에서 민주당원 여자는 약혼자가 있고, 공화당원 남자는 유부남이다. 덧붙이자면, 이 참고사항은 힌트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나의 하릴없는 장난일 수도 있다. 결말은, 비밀이다. 다만 난 당신이 어디선가 이 영화와 마주치게 된다면 놓치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고!(마지막 문장은 개그콘서트 '이색극장'의 안상태 말투로 읽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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