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TM에서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비지니스맨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하고도 밑과 끝이 빤히 보이는 논란이다. 어느 측이건 쓸데없는 다변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지니스맨에 불과하다는 쪽은 서태지가 과연 자신의 입방아에 오를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라는 쪽은 우석훈의 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시아 제패'라거나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제국주의'보다는 '촌놈'임이 더 부각된다. 이현도 등이 지적받듯 서태지에게도 가령 'C-G-Am-Dm' 같은 전형적인,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진부한 패턴이 있다. 팬들의 열정적 환영은 진부함 대신 친숙함에 더 표를 던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의 메시저처럼, 서태지가 진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태지가 록팬을 비롯한 음악매니아들에게 깎아 내려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표절 여부를 운운할 것도 없이, 서태지의 음반은 언제나 구미의 흐름을 추종하고 훌륭히 베껴 왔으며 이번 음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 얼터너티브는 그 이전에 '제이워커'나 '뮤턴트'가 시도했으며, 하드코어 혹은 뉴메틀에서도 '닥터코어 911'이나 '언루트'가, 이모코어에서는 바슬린이나 피아가 더 앞섰다.
창조성의 가늠이나 원조논쟁은 차치하고,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은 건 그가 지닌 '뮤지션쉽'의 현황이다. 세상에 잊을 만하면 돌아와 음반을 발표하고 그러다 다시 사라지는 대통령이 어디 있나. 서태지컴퍼니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가 현재의 음악계에 이수만이나 박진영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그냥 음악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소박한 뮤지션 겸 프로듀서일 뿐이다.
아마 그를 '대통령'으로 띄운 힘은 그가 표출한 정치사회적 메세지에 대한 먹물 비평가들의 호들갑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추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실이데아>가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다는 걸 뺀다면 말이다. 통일을 노래해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으로서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를 꿈꾼다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국기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막을 내리는 장대한 쇼에서, 통일지상주의와 애국주의의 메아리가 참 크게 울려 퍼지긴 하더라만. 서태지가 거둔 '저항의 성공'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눈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뱀 같은 지혜'를 가지자는 교훈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보여준 비판의 수준을 보면, 욕이든 뭐든 잘난 놈이 하면 효과가 있다는, 새기나마나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다. 그 노선은 네가 지지하는 노선일 뿐 내가 쌍수들 노선은 아니다.
서태지 이래 그에 관해 바보 같은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건 6집 <울트라맨이야>가 나오던 시절에 성기완이 썼던 글 정도다.
‘서태지 딜레마’는 계속된다
‘게릴라 전략’이 마케팅 전략으로 흡수된 비극, <울트라맨이야>에 치열함은 없어
확실히 그의 이번 앨범이 그의 것들 가운데 베스트는 아니다. 만일 베스트가 나왔더라면 누구도 그에게 입방아를 찧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서태지…’ 뭐 그런 말이나 했을까. 그러나 이번 앨범은 미흡했다. 그래서 말들이 많은 것 아닐까. 여러 해 동안의 공백 기간을 참작하더라도 그렇다. 그의 음악은 이것보다는 더 치열한 것이 되어야 했다. 그가 택한 스타일은 예전의 것에 비해 훨씬 안일한 것이다. 예전의 <수시아>를 생각해 보고 <슬픈 아픔>을 생각해 보라. 그냥 <하여가>를 생각해도 된다. 그것들은 새로운 형식을 자기 내면의 고통들과 끊임없이 연결하고 거기서부터 어떤 결과물을 꺼내려는 치열한 예술가의 자기 의식을 담고 있었다. 하다 못해 <난 알아요>를 들어보자. 중간에 나오는 강력한 기타소리.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로 그 대목 때문에 서태지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그의 저항은 결국 봉사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돌려 서태지의 전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전략적 치밀함이 눈에 띄게 음악적 탐색의 치열함을 앞서게 된 건(최소한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 건) 아마도 <컴백 홈> 앨범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굿바이>. 그즈음에, 그러니까 1996년쯤에 나는 그의 전략과 시스템의 전략을 둘러싼 대응,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을 ‘서태지의 딜레마’라 칭한 적이 있다. 서태지의 딜레마는 여전히 유효하나 그 의미는 달라졌다. 서태지의 딜레마는 서태지가 대중음악 시스템에서 활약하는 동안 그를 의미있게 만든,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강압된 역설적인 활력이며 그를 끝없는 은퇴/컴백의 굴레 속으로 넣어버린 동인이다.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은 애초에 메이저 대중음악계의 일반적인 관행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이 그걸 암시한다. 앞서 말한 ‘난 알아요’의 그 한 구절 같은 것이 그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렇게 자기 자존심을, 끝까지 버리거나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을 음악 속에 숨겨 넣었고 대중이 알아본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프레이즈는 게릴라 서태지이고 나머지 전체는 그것을 위장하는 엄폐물이었다. 그의 앞으로 음악 이력은 바로 이 한 프레이즈를 확대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 다시 말해 ‘게릴라 서태지’를 메이저 음악계에 심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대목에서 시스템과 얽힌 서태지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시스템은 처음에 그를 귀엽게 봐줬고 중간에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나중에는 그를, 게릴라 서태지를 품고 오히려 상업적 이윤창출에 이용하게 된다. 시스템은 괴물과도 같은 것이어서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목숨을 노리는 칼날이라도 받아들이고 키운다. 그의 시스템 내부에서의 좌표는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게릴라 상품’이다. 이건 어느 정도 서태지가 원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직 시스템에 저항하는, 혹은 시스템의 위상을 교란시키는 사람으로서만 시스템 내부에서 이윤을 창출한다. 그래서 시스템은 그를, 역설적으로 그것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고 서태지는 그 봉사의 과정에서 나오는 이윤을 받아들이면서 계속하여 기능하게 된다. 그가 게릴라로서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시스템 내부에 서태지에게 돌아갈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다. 그리고 시스템 내부의 자리가 아니면 그에겐 아무 자리가 없다. 최소한 그의 선택은 인디적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시스템은 그가 자기 거울을 보고 ‘이건 아니야’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도피하는 순간,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지 않고 오히려 비워놓는다. 그만한 이윤창출의 도구는 없으므로. 그 공백이 그의 떠남/돌아옴의 신화와 트릭을 창출하는 유일한 동력이다. 서태지의 부재가 시스템 내부에서는 서태지의 현존의 동력이라니! 자본주의는 참 엄청난 모순들의 공존을 허용한다.
다시 자신의 의미를 숙고하라
결론을 말한다면 서태지의 딜레마는 처음에 아주 멋진, 유의미한 하나의 선택이었고 시스템에 대응하는 한 개인의 방법이었으나 나중에는 그의 신화를 대중적으로 유지시킴으로써 계속적인 이윤창출에 기여하는 마케팅 전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건 사실 서태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서태지와 그의 시대가 커뮤니케이션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 사람의 문화적 장(場) 내에서의 의미, 혹은 좌표는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점이다. 서태지가 예전과 똑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계속 똑같은 서태지가 아니다. 만일 서태지가 진짜 메이저 신의 모순들을 뚫고 나갈 전략을 생각한다면 그 변화하는 좌표들의 각 지점들을 끝없이 숙고해야 한다. 서태지는 이미,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한 숙고가 예술가적 치열함과 구분되지 않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지점에 서 있었다. 그건 그의 선택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