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경향신문>은 '국가정체성을 묻는다'라는 특집의 세번째 기사로 '자유주의'를 다루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8045&code=210000).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경합하고 있고,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나 시장주의의 맥락을 따라 굴절되었음을 잘 소개하고 있는 기사다. 이 기사는 그러나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을 자유주의라는 한울타리에 넣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본디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고 쓰임새가 헤프지만, 이쪽 저편을 다 자유주의자로 칭하게 되면 자유주의라는 말은 아예 무용해진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사실상 폐기되거나, 또는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경향의 기사처럼 자유주의의 여러 종류를 들어주는, 이를테면 박노자와 복거일을 '두 자유주의자', '다른 자유주의'로 가리킨 것은 또다른 오해를 분만할 공산을 한껏 높여준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859305&code=210000). 공통점이 희박한 사람들을 각기 다른 수식을 붙여가면서 굳이 엮어야 했을까.
우선, 복거일이나 공병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박정희시대에 긍정적이다. 박정희정권이 훨씬 악독한 독재정권인 김일성정권으로부터 자유 대한을 수호했다는 취지에서다. '나쁜 자를 더 나쁜자로부터 지켜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임무다'라는 복거일의 지론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박정희정권보다 김일성정권이 더 독재적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한다. 김일성정권으로부터 박정희정권을 지켜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복거일 등은 박정희가 억누른 자유를 박정희로부터 지켜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에 얻을 자유를 빌미로 현재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이 군사독재를 방어하며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체제)의 자유'로, 개인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황장엽의 사유와 동형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치학자 린츠의 발명 이래 쓰이는 권위주의-전체주의의 분류를 응용하자면, 박정희정권은 권위주의이고 김일성정권은 전체주의다. 독재들의 성격을 분별하는 기초적 잣대로써 린츠의 학설은 유용하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늘상 되내이듯 권위주의가 그나마 전체주의보다 낫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순간, 그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 옹호로 전락한다. 자유주의자로서 써먹을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항간에서는 복거일, 공병호가 정부의 경제적 간섭을 존중하는 (칼 포퍼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는 아닐지라도 (하이에크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는 점을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개념과 용어의 사치다. 자유지상주의자의 길이 권위주의자나 보수주의자와 다르다면, 정치적으로도 국가의 간섭을 극력 배제해야 하고,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를 가차 없이 비난해야 마땅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박정희를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복거일과 공병호, 뉴라이트 등등은 조갑제 같은 국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재벌의 능동성에 더 비중을 두는 입장이지만, 재벌이 누린 자율성도 국가가 부여하였으며 독재정권기의 경제성장은 명백히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그리고 경제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진중권, 박노자, 고종석 등은 자유주의자일까? 박노자는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은 인간의 해방과 진정한 자유의 실천이므로 저도 ‘광의의 자유주의자’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그를 자유주의자라 지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박노자가 언급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자도 중시하는 자유주의이자 사회주의자가 아닌자도 얼마간 또는 전적으로 따라야 할 자유주의이다. 거기 기초해 자유주의자를 가려낸다면 극단주의자와 교조주의자들을 뺀 좌우의 모두가 자유주의자로 지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는 한국 자유주의의 명랑한 성취이기는 하나, 저자 자신이 자유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진중권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 '영업의 자유'만을 떠들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주의를 사회적 '상식'으로 심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을 따름이다.
특집 기사에서 자유주의자로 거명된 또다른 인물들, 강준만, 고종석, 최장집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자의 면모가 짙기는 하나 이들도 노무현정부 5년동안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를 겪으며 좌파 쪽으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다소 사회주의적으로 기울었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에 가깝고, 또다른 자유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명백히 후자이고, 나아가서는 자유주의자에서 탈피해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편이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자유주의라는 스펙트럼 자체를 형해화시킨다. 복거일, 공병호 등 역시, 비록 반대편에서지만,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절대권력의 대항마로 등장한 자유주의는 자유의 확산과 함께 독자적인 이념으로서의 생명력이 되레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귀결을 맞이한다. 신체, 사상, 집회, 결사, 언론, 프라이버시 등의 자유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자유'에 관한 논쟁은 경제적인 자유, 그러니까 사유재산권과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에 국한되어가며 치밀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현재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유주의운동도 사회복지의 요구 및 그것을 가능케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로부터, 사유재산권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뉴라이트의 '뉴'는 그저 '수구'라는 공세에 포위된 조갑제, 김용갑 등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홍보전략이고, 그들의 자유주의는 경향이 지적한대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특집기사는 그러한 사이비 자유주의들이, 자유주의자는 물론 참다운 사회주의자나 진정한 보수주의자까지도 견지해야 할 가치를 버리고 배반하는 현실을 분석하는 방향성을 띠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복거일, 공병호 등이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명토박고, 박노자, 진중권 등을 자유주의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리버럴'한 진보 지식인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