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 셋과 일행을 이루어 토요일 종일 고향인 구미 일대를 돌아 다녔다. 10.26을 하루 앞두고 박정희생가부터 들렀다. 우리는 '박상희 생가'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기도 했고, 나는 가이드를 하면서 박상희의 생애를 아는 대로 소개했다. 뒤이어 동락공원에서 바람을 쐰 뒤, 경부운하사업 인근 500m에 이내에 있는 구미 문화유산에 속하는 인동향교와 동락서원을 다녀왔다. 동락서원은 인동향교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있는데, 그야말로 '강변'에 있는, 운하를 파는 즉시 물에 잠기고도 남을 위치에 있었다.
저녁에는 구미경실련 조근래 사무국장과 진하게 술을 나누었다. 조 국장은 인민노련, 한국노동당, 민중당을 거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산 증인으로 소위 '노출'이면서도 위장취업한 '학출'들을 학습시켰던 분이었고, 90년대 초중반부터 시민운동에 투신했던 민완활동가다. 쉽게 설명하자면, 노회찬, 주대환 (그리고 신지호까지 포함해서) 등과 같은 시기 같은 단체에서 활약했었다. 그가 인민노련부터 한국노동당까지 '구미지부 대표'를 지냈고, 주대환이 의장, 황광우가 기관지위원장, 윤영상이 서울대표, 신지호가 울산대표, 전성이 안산대표를 지냈다(노회찬은 1989년경인가에 감옥에 갔고...) 그에게 박정희생가에 들렀던 이야기를 하니 박상희 선생묘가 그 부근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동생인 박정희나 사위인 김종필은 박상희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신간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 정도다. 언론학자 정진석에 따르면 매일신보의 지국을 맡기도 하는 등 얼마간 친일을 했다는 일설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품이 넓은 지역인사였고 해방 직후 숙청의 열기에서 사람들의 정상을 참작해주거나 1946년 10월항쟁 당시 소요를 주도하면서도 우익 인사나 경찰이 크게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구사태가 진압된 이후 경찰과의 평화적 중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물론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고야 말았지만.
박상희가 철과 피의 행보를 걷지 않았던 이유는 무대가 중앙이나 서울이 아닌 지역이라는 요건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대구경북의 좌익세력이 여운형계열과 박헌영계열을 막론하고 남로당으로 결집했던 것 역시, 중앙의 구도가 지역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사정을 반영했었던 결과다. 박상희 사후 황태성 등 그의 동지들은 남로당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따금 박상희가 조공계열이었고 남로당원이었다는 착오 섞인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러나 박상희는 중도좌파계열의 온건사회주의자였다고 규정하는 쪽이 올바르며, 그의 성품과 스타일 역시 여운형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점에서는 조근래 국장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마냥 시 당국과 적대할 수만은 없으며, 단체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자주 협조주의적인 노선을 갈 수밖에 없는 사정 등등 말이다. 어쨌거나 조근래 선배는 서경석이나 정태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고, 좀처럼 진보 인사가 나올 수 없었던 구미에서 박상희의 계보를 잇는 지역활동가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저녁에는 구미경실련 조근래 사무국장과 진하게 술을 나누었다. 조 국장은 인민노련, 한국노동당, 민중당을 거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산 증인으로 소위 '노출'이면서도 위장취업한 '학출'들을 학습시켰던 분이었고, 90년대 초중반부터 시민운동에 투신했던 민완활동가다. 쉽게 설명하자면, 노회찬, 주대환 (그리고 신지호까지 포함해서) 등과 같은 시기 같은 단체에서 활약했었다. 그가 인민노련부터 한국노동당까지 '구미지부 대표'를 지냈고, 주대환이 의장, 황광우가 기관지위원장, 윤영상이 서울대표, 신지호가 울산대표, 전성이 안산대표를 지냈다(노회찬은 1989년경인가에 감옥에 갔고...) 그에게 박정희생가에 들렀던 이야기를 하니 박상희 선생묘가 그 부근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동생인 박정희나 사위인 김종필은 박상희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신간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 정도다. 언론학자 정진석에 따르면 매일신보의 지국을 맡기도 하는 등 얼마간 친일을 했다는 일설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품이 넓은 지역인사였고 해방 직후 숙청의 열기에서 사람들의 정상을 참작해주거나 1946년 10월항쟁 당시 소요를 주도하면서도 우익 인사나 경찰이 크게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구사태가 진압된 이후 경찰과의 평화적 중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물론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고야 말았지만.
박상희가 철과 피의 행보를 걷지 않았던 이유는 무대가 중앙이나 서울이 아닌 지역이라는 요건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대구경북의 좌익세력이 여운형계열과 박헌영계열을 막론하고 남로당으로 결집했던 것 역시, 중앙의 구도가 지역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사정을 반영했었던 결과다. 박상희 사후 황태성 등 그의 동지들은 남로당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따금 박상희가 조공계열이었고 남로당원이었다는 착오 섞인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러나 박상희는 중도좌파계열의 온건사회주의자였다고 규정하는 쪽이 올바르며, 그의 성품과 스타일 역시 여운형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점에서는 조근래 국장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마냥 시 당국과 적대할 수만은 없으며, 단체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자주 협조주의적인 노선을 갈 수밖에 없는 사정 등등 말이다. 어쨌거나 조근래 선배는 서경석이나 정태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고, 좀처럼 진보 인사가 나올 수 없었던 구미에서 박상희의 계보를 잇는 지역활동가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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