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아류에서 용 난다 - 퀴즈

Listen to the 무직 | 2008. 10. 8. 22:30 | Posted by 김수민
처음엔 다음 아티스트들의 아류로 찍혔지만, 결국 용이 된 아티스트는?  

1) 밥 딜런
2) 롤링스톤즈
3) 레드 제플린
4) 퀸 
5) 펄 잼 - ㄱ. 사운드 다른데 목소리 땜에 억울하게 당한 경우
               ㄴ. 의도적으로 펄 잼을 흉내낸 경우

:

그의 군입대를 앞두고

Free Speech | 2008. 10. 7. 22:28 | Posted by 김수민

친우 하나가 다다음주에 군에 입대한다. 나보다 한살 위이니 참 늦된 입대다. 이번주 금요일 만나고, 가능하면 한번 더 만나기로 했다.

그는 '활동'을 하다 만난 사람이다. 1, 2학년 때는 지나가다 얼굴만 봤다. 아마 그가 내 이름을 먼저 알았을 것이다. (그에 대해 상세히 소개할 수 없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계열'의 활동가이다.  90년대 중반 학번이 득시글거리는 모임에서 01학번인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시절이었지만,  그의 활동무대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선배만 알았지, 그와는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이듬해 나는 군대에 갔고, 그동안 그는 학년이 올라가며 활동가로서 조금 더 부각될 수 있었다.

제대한 다음 나는 그가 있던 어느 집단에 들어갔다. 그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전역과 복학의 사이에 있던 어느 봄날, 나는 학교에서 주최된 토론회에서 패널로 나온 그를 보았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날 나는 그의 토론에 몹시 실망했다. 레퍼토리가 다소 달랐던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그는 너무 얌전해서 마음이 답답했다. 어쩌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나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토론회에 '구경'하러 온 듯한 양복쟁이 교수들이 허허거리며 악수하는 꼴을 목도하고 배알이 잔뜩 뒤틀렸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시원스러운 공격을 기대했는데, 이내 포기했다.

그를 '조직'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가 힘겨운 위치에 있음을 절감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사이에 대학은 많이 변해 있었다, 계층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학생사회운동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던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거의 학교를 떠났다. 때는 '반운동권'이 총학생회를 맡고 있었고, 그들은 작지만 교활했다.

그런 와중에 2006년 봄부터 그와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별로 도울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기획과 실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학업에서도 한창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그는 오전의 '잦은 회의'를 제안했다. 별 말 없이 따랐던 나는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다. 그무렵 나를 우라지게 괴롭히던 불면증 때문이었다. 이따금 그는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고 나를 잡아갔다. 참 미안했지만 몸도 마음도 여의치 않았던 나날이었다. 그는 또 가끔 저녁께에 집에 와서 한두시간 머물고 가기도 했다. 내 집(방)은 졸지에 '남학생 휴게실'로 전락하는 듯했다.

2006년 가을 계획들이 엉클어지면서 나는 그와 함께하는 조직의 사업에 열중하는 쪽을 택함으로써, 그와 마음을 더 터놓고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도 무척이나 외로웠던 계절이었다. 나는 회의에 꼬박꼬박 나갔고 뒤풀이에서 그와 술잔을 기울였으며, 회의가 없던 날에도 곧잘 신촌 술집으로 함께 갔다. 그의 노선은 나와 크게 달랐지만 그와 나 둘 다 고민하는 주제와 해법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솔직히 말해 내 속을 그에게 다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그 조직 전체 차원에서 발생된 오류를 놓고 골치를 앓았다. 조직 탈퇴를 염두에 두고(그에게 그것까지 일러두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집행부 일을 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조직의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진 터였다. 나와 노선이 비슷한 사람들 상당수보다 사적으로 그는 내게 더 가까이 있었다. 최소한 그때만큼은 그랬다. 그 가을부터 이듬해 초입의 겨울까지 그와 함께 슬퍼했고 그와 함께 즐거워했다. 내가 울고 그가 따라 운 적도 있다. 그는 2007년 2월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나와 한잔한 뒤 내 집에서 잤다. 이튿날, 졸업식에 지각한 그의 일성: "나와 학교의 관계는 언제나 이러하였도다."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그와 만나기가 열배로 힘들어졌다. 그가 졸업한지 1년쯤 지난 시점에 나는, 그가 남은 조직에서 탈퇴했다.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지만 운명처럼 같은 조직에서 만나, 서로 너무 통하지만 운명처럼 다른 조직으로 헤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른 데서 하고 다니지만 그에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적지 않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못하지만 그에게 하는 이야기도 내게는 있다. 그도 이를테면, 내가 한때 있었고 그가 지금도 있는 조직에서 주류를 차지한 사람들을 내 앞에서 비판한 적이 있다. 그와 나 사이의 벽은 다른 이와의 사이에도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 벽에 신경쓰지 않는다.  

기억에 의하면 내가 가을을 타기 시작한 건 늦어도 여덟 살 무렵이었다. 무려 19년이 지나서야 나는 가을을 좀 덜 타게 되었는데, 그의 입대소식에 또다시, 2년 전처럼, 마음이 싱숭해진다. 이번엔 그가 '민간인 사회'를 탈퇴하게 된다. 겨울에 가서 조뺑이 치지 하필 가을에 가냐. 입대 직전 며칠 간의 회한과 허탈을, 그는 이겨내지 못할 것 같다. 다만 혼이 나가면서 군에 적응하면 그런 감정들을 곧 털어버릴 수 있을 게다. 이왕 다가온 것이라면 축복해줘야지. 마치 제대를 앞둔 '개말년'에게 말하듯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며칠 안 남았어. 조금만 버텨!"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드스탁'에서 만난 찌질한 사람들  (0) 2008.10.19
폼생폼사 카스트  (0) 2008.10.12
블로그 수립 1주년  (0) 2008.10.04
강의석  (0) 2008.10.04
WINNING 11  (3) 2008.10.01
:

블로그 수립 1주년

Free Speech | 2008. 10. 4. 18:52 | Posted by 김수민
1
망명정부란답시고 블로그를 개설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2005년 가을부터 2년동안 걸었던 길을 반성하고 실패를 인정하면서
조용하고 차분히 앞날을 준비하고자 만들었다.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와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기억을 담을 예정이었으나
내 기준으로는, 꽤 많은 방문자들이 드나들면서 블로그의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1년동안 7만명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고정독자도 알게 모르게 늘었으며 한편으로는 '미스코리아 누드'와 같은 검색어를 통해 나에게 낚인
누리꾼들도 꽤 되었다.

2
그동안 민주노동당 몰락과 진보신당 창당, 총선 등의 일정을 거치면서
애초에 기획한 만큼의 대중음악 관련 포스트를 싣지 못했고,
사적으로도 여러 사건을 겪고 고향에서 교생실습을 마치고 올라오자마자
촛불시위에 뛰어든 덕택에 넉넉한 여유를 블로그에 녹여낼 수가 없었다.
이곳이 좀 더 풍성한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폼생폼사 카스트  (0) 2008.10.12
그의 군입대를 앞두고  (1) 2008.10.07
강의석  (0) 2008.10.04
WINNING 11  (3) 2008.10.01
기품  (2) 2008.09.30
:

강의석

Free Speech | 2008. 10. 4. 18:49 | Posted by 김수민

그가 서울대 입학 이후 보여온 행보들은 
"군대 폐지"보다는 차라리 "해병대 자진 입대" 쪽에 더 어울릴지 모르는 행보였다. 
'이색적 파이오니아'.
그런데 이번에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그의 -복서, 영화감독, 택시기사, 호빠- 행적을 토대로 
국군의날 퍼포먼스에 '진정성'이나 '언론플레이'라는 잣대를 갖다대는 건 
일관성 있는 비평은 아니다.  

군대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작전 실패다!" "튀기 좋아하는 사람의 짓"이라고 지적하고 웅성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강의석이 어떤 직종에 투신할 때마다
어김 없이 언론에 등장하는 행동에 대해 사실 눈살을 찌푸려 왔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예전에 보냈던 눈총을 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군입대를 앞두고  (1) 2008.10.07
블로그 수립 1주년  (0) 2008.10.04
WINNING 11  (3) 2008.10.01
기품  (2) 2008.09.30
주대환처럼 살지 않겠다  (0) 2008.09.22
:

WINNING 11

Free Speech | 2008. 10. 1. 00:25 | Posted by 김수민

어맛, 씨발!('신연예인지옥' 정지혁 병장 목소리로) 조선시대정치사상에 관한 수업 발제가 다음주 화요일이라는 걸 오늘 알았다. 분량이 짧긴 하지만 to be frank with you하자면 추천 참고문헌을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보고서나 소논문을 일절 쓰지 않았던 탓에 두려움과 멀미가 밀려온다. 그럼에도 나는 필요한 책을 챙겨 목요일 오전에 집에 내려갈 예정이다. 그날 수업은 휴강이고 이튿날은 개천절인 덕이다. 나는 집에서 무엇을 하는가? 발제문을 쓰고 프리젠테이션 작업을 하겠지만, 며칠 전부터 잡은 계획의 중심은 위닝11(플레이스테이션 축구오락)이다.

나는 도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스포츠라고는, 동호회에 가입하거나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친구가 없어, 조깅과 혼자하는 농구 뿐이다. 나한테 당구를 가르쳐줄 사람은 없고, 탁구장은 부근에 보이지 않는다. 볼링? 배우고 싶은데 역시 함께 칠 사람이 부재. 내게 가장 익숙한 종목은 배구지만 그걸 어디서 누구와 한담. 바둑은 머리 아프다. 스타 크래프트, 위니지 등 PC게임은 보기만 해도 어지럽다. 이렇다 보니 잡기라고는 술먹고 노래방가는 것밖에 없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돌연 위기의식을 느꼈다.

고향 집에는 꽤 근사한 엑스 박스 기계가 있다. 이걸 처음 구입하면서 같이 사들인 게임이 DOA와 위닝11이다.(언제나 그렇지만 울 집안에서 사는 넘은 동생이고 나중에 붙잡고 앉아 있는 건 나다. 이 기기와 게임도 마찬가지.) 처음엔 DOA에 잠시 열을 올렸으나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다. 위닝11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서울 원룸으로 돌아오면 즐길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 5월 고향에서 교생실습을 하며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한달 내내 '아마추어' 등급을 맴돌았고 짜증이 받치는 시점에 게임기를 끄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러나 역시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게다가 나는 7월 말부터 방학 끝까지 마음껏 위닝11에 매달릴 수 있었다. 나의 오마니께서는 어려서 게임을 못한 걸 이제야 한다고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다. ㅋㅋㅋ

나에겐 세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처음엔 동생이 제물이 됐다.  그 다음은 내 외사촌동생(16살). 그러나 거의 언제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얄미운 승리를 쟁취하고선, 밖에 나가 담배를 피던 나를 가리켜 외삼촌에게 "수민이 형 뿔났다"고 일러두던 그도 희생자의 반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 집에도 축구게임이 있었지만, 나도 방학동안 열심히 했거덩~ 왼손 엄지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로.

세번째 라이벌이 내 친구 조 아무개라는 친구인데, 2학기 개시와 함께 나의 도전을 받고 "왜 괜히 기분 잡칠 일 벌이냐"며 킬킬거리더니 바로 깨졌다. 이 친구와 나는 플레이 스타일이 매우 대조적이다. 이 친구는 볼 점유 시간이 길고 패스를 많이 돌리는 편이며 몸싸움이 잦다. 나는 기습공격이 잦고 슛도 그 친구보다 많이 쏘며 횡패스보다 종패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는 페널티 에어리어에 들어오는 빈도는 잦으나 슛의 수나 성공률은 떨어지는 편이다. 반면 나는 수비가 약하다. 방향키 조절이 아직도 엉뚱하게 이뤄지는 것도 한몫했다.  

수비 실력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끝에 나는 공격기술을 몇개 더 연마했다. 유저들은 알겠지만 기능을 아는 거랑 손에 익는 거랑은 전혀 다르다. 나는 몇가지만 취사 선택해 집중 연습을 했다. 특히 코너킥, 프리킥에서의 세트 플레이와 일대일 상황에서의 대처를. 그리고 조금 뚫릴라 치면 바로 슈팅을 때렸다. 세골 먹으면 네골 넣는다, 슈팅 성공률이 10프로라도 이기면 그만이다,라는 그야말로 무식한 모토 하에서의 연습이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조 아무개는 개학 후 첫 시합에 져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를 탔다. 그 다음에 그는 또 졌고, 술 먹다가 다시 플스방에 가자고 조른 끝에 또 깨졌다.  그 이후로도 몇판을 더 벌였지만 그가 계속 게임비를 물어야 했다. 9월 한달동안 그의 승률은 30프로가 되지 않은 데다가 서너골차로 지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실실 뺀다. 젠장, 너 말고 서울 거주자 중에 나랑 위닝할 사람이 없단 말이다! 발제 예정에도 불구, 집에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임기하고 한판 붙어야겠다. 역시 게임기랑 붙어야 실력이 늘고, 특히 수비가 발전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등급은 '아마추어'에서 '레귤러'로 올라갔다. 그 등급 모드에서, 코트디부르아르를 골라 이탈리아를 운영하는 게임기를 이길 만큼은 되니, 남들은 얼마 만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크게 쪽팔리지 않을 실력은 된 것 같다. 프로페셔널등급으로 게임기와 강팀 대 강팀으로 붙으면 아직 와장창 깨지는 수준이지만.

내가 위닝11으로 친해진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드록바다. 자취방에 TV가 없어 드록바의 경기는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위닝11을 통해서 그리되었다. 코트디부르아르나 첼시를 선택해서 경기를 하면, 안 시켜도 잘 구사하는 드록바의 발놀림과 최전방에서도 상대방 풀백을 상대로 수비를 벌이는 그의 플레이에 감탄하게 된다. 위닝11 커버모델은 C.호나우두지만, 천하무적으로 만들어진 건 드록바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그 수립 1주년  (0) 2008.10.04
강의석  (0) 2008.10.04
기품  (2) 2008.09.30
주대환처럼 살지 않겠다  (0) 2008.09.22
올해가 남긴 인물사진, 최고의 포스 두장  (0) 2008.09.11
:

기품

Free Speech | 2008. 9. 30. 01:44 | Posted by 김수민

기품 또는 품위 따위의 낱말들은 다분히 귀족적으로, 기껏해야 부르조아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들을 폐기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 뜻빛깔을 새로이 칠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추석연휴를 앞두고 진정한 '기품'의 한 실체를 보았다.

추석 전날 시외버스정류장은 전쟁터였다. 올 총선 서대문 진보신당의 유세차량을 위해 방문한 청계천 세운상가에 버금갔다. 곧잘 버럭버럭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어리버리 허둥지둥거리는 나로서는 발을 디디자마자 힘들었던 곳이 세운상가다. 아마 함께 간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면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널럴한 양반이었지만 -그쵸, 백승덕 씨?- 그곳에서는 거기에 걸맞는 박력과 센스를 발휘했다.

추석 연휴 직전의 시외버스정류장에서도 한껏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들 때문에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 벌어졌다. 입구 계단에서 담배를 필 때도 여러번 고성을 들었다. 떠들썩한 생기 한편으로 불쾌함이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더했으리라. 지난 몇년간 학교 편으로 한가위귀향단을 통해 내려가던 나로서는 간만의 풍경이었다.

흡연실 앞 데스크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무수히 많은 귀성객들에게 질문을 받고 안내를 했다. "허허 거 참, 내가 안내데스크처럼 보여요?" 아저씨의 질문에 아가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친절해 보이시니까." 아저씨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흐뭇한 제스춰를 취한다. 아가씨의 친구가 오자 "어허, 데이트 하고 있었는데"라며 껄껄 웃는 아저씨는, "연휴 잘 보내세요"라는 인사에 "나 연휴 내내 일해요, 허허"라고 답한다. 아가씨들은 조금 미안한 기색이지만, 나는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여유'를 그 아저씨로부터 느꼈다. 그는 맡지도 않은 임무를 귀찮아하지 않을 만한 위인이었다.

차에 오르기 전 천원짜리 팝콘 한봉지를 사러 갔다. 손님이 많지 않은 그 지점은 흡사 태풍의 눈이었다. 조용하지만,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에 낀. 아주머니는 덤덤하게 팝콘을 요리했고, 손님이 하나 뿐이지만 마치 10초 안에 버스에 타야 할 사람에게 재촉받은 듯 재빠르게 포장을 마쳤다. 지나가던 누군가 그에게 짧은 말을 걸었고, 그는 응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떠한 귀부인보다 고상하면서, 어떠한 가식도 배지 않은 웃음. 거기에 조금 깃든 피로까지. 기품이었다.

나는 노동계급적인 기품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기품일 뿐이다. 비천하고 당당한 이들의 기품. 삶을 부둥켜 안은 그 누구라도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나 그 누구도 제압하지 않는, 그런 '보편적 기품'이라고 해두자.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의석  (0) 2008.10.04
WINNING 11  (3) 2008.10.01
주대환처럼 살지 않겠다  (0) 2008.09.22
올해가 남긴 인물사진, 최고의 포스 두장  (0) 2008.09.11
추물  (0) 2008.09.10
:

보컬열전 (2) 로니 제임스 디오

Listen to the 무직 | 2008. 9. 26. 16:38 | Posted by 김수민

신해철이 SBS로 돌아온 다음에 그의 방송을 들은 건 이번주가 처음이었다.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니 제임스 디오 특집을 했다. 선곡은 'Rainbow'의 <Temple of the king>, <Kill the king>, <Rainbow eyes>, 'Black Sabath'의 <Heaven and hell>, <Paranoid>, 'Dio'의 <Holy diver>, <We rock>. 다 아는 노래들이었고, 신해철의 설명도 다 아는 바였다. 적어도 그만큼은 내가 디오에 심취해 살았다는 뜻이다.

'크래쉬'의 안흥찬은 1997년도 <Rock It>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애들이 너바나는 알지만 디오 같은 건 전혀 모른다고 푸념했다. 그때 디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당시는 P2P도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점이었고, 구미 시내에서 테이프가 가장 많은 가게는 우리 집과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이듬해 구미 시내 근처의 고교로 진학해서야 디오의 테잎을 살 수 있었다. 디오는 'Elf'라는 그룹에서 무명생활을 했고, 'Rainbow'에서 스타덤에 올랐으며, 'Black Sabath'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제 이름을 딴 'Dio'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내가 처음 구입했던 건 Rainbow의 베스트 앨범이었고 그 다음이 Dio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디오는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가 성악으로 길을 틀었다면 혹 파바로티나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록 보컬이 되었다면 로니 제임스 디오만큼 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또 나는 감히 장담한다. 디오는 역대 최강의 헤비메틀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명이다. 그 최강의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탈락시키더라도 로니 제임스 디오는 최후에 남을 공산이 높다.

무엇보다 그는 가장 완벽한 발성을 자랑한다. 디오는 흔히 롭 핼포드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소개되는데, 핼포드와는 판이한 발성을 가지고 있다. 제일 크게 도드라지는 부분이 바로 흉성이다. 악을 썼을 때 머리가 울린다고 두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듯, 낮고 굵은 소리를 낼 때 가슴이 울린다고 흉성은 아니다. 흉성은 혀를 이용한다. '이'발음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흉식 바이브레이션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금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디오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흉성은 중음역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며 디오의 노래도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물론 디오의 흉성에는 허스키까지 곁들여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량과 파워를 과시한다.

고음 샤우팅에 귀가 길들여진 이들은 디오의 노래를 쉽게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음을 맞추는 대신 발성을 싱겁게 하거나, 발성을 카피하면서 힘겹게 부르거나. 디오의 보컬이 지닌 최대 약점은 고음에서 중음에서만큼의 파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흉성을 쓰지 않는 롭 핼포드보다 디오가 뒤떨어진다. 인체의 특성상 굵직한 흉성은 높은 소리에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흉성을 구사하는 보컬리스트 대부분이 이런 난점에 시달린다. 그나마 디오는 저-중-고음역에 두루 노련한 보컬이고 덕분에 역대 최정상의 위치에 선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흉성을 구사하면서 음을 이동하는 데조차 불편함을 느낀다. 노래방에는 디오가 부른 노래가 몇곡 있지만, 거의 모두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버텨낸 이들조차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방송에서 김경호나 박완규 등이 곧잘 영미의 메틀 명곡을 부르지만, 언제 디오의 노래를 부르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못 봤다. 아, 어디선가 누가 디오가 레인보우 시절에 부른 <Man on the silver mountain>을 부르는 걸 들은 것 같기는 하다. 흉성이 거의 없어진 채로 말이다.

디오 말고 흉성에 능한 보컬리스트로는 데이빗 커버데일과 그레험 보넷이 있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블루스와 소울에 기반한 음색과 어프로치로 유명하다. 디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디오와는 달리, 외모가 받쳐준다. 레인보우의 후임 보컬인 그레험 보넷은 디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레인보우 탈퇴 이후 '임펠리테리'에서 선보인 그 막강한 성대! 그렇지만 이 둘은 결정적으로 라이브에서의 안정성이 디오에 비해 떨어진다. 더욱이 디오는 스티븐 타일러(에어로스미스)처럼 특이한 음계를 가지지 않았다. 딱딱 음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디오의 외양은 여러모로 카리스마를 내뿜기에 적절치 않다. 그의 홈페이지 디오넷은 키는 '프라이버시'라며 밝히지 않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신장이 150대인지 160대인지는 아직도 안개에 휩싸여 있다. 키에 비해 머리는 큰 느낌이고 머리칼에는 윤기가 없다. 허나 그는 이 모든 걸 극복해 내고 중세풍 헤비메틀의 대표 주자로 올랐다. 그 첫번째 비결은 '모션'이다. 그 어려운 노래를 무대 위에서 힘들이지 않고 소화하면서도 그는 전 세계의 레크레이션 강사들을 뺨치는 모션을 구사한다.

그가 보컬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이고, 완성도 높은 뮤지션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는 비단 음악적인 요소 뿐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배경도 있다. 그가 내뿜는 중세풍의 아우라는 얄팍한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중세문학에 정통해 있고 이는 그의 가사쓰기에 오롯이 다 반영된다. 심지어 그는 흑마술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런 그가 'king of rock'n roll'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스스로 '기회의 평등'이 얼어 죽었음을 선언하는 꼴이었을 테다.

레인보우나 블랙 새버스에서 음악적 주도권은 기타리스트였던 리치 블랙모어, 토니 아이오미 등에게 쥐어져 있었기에 단순한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던 디오는 결국 'DIO'를 결성했다. 나는 이 시절의 디오를 가장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는 기타리스트에게 발탁되는 훌륭한 보컬리스트에서, 훌륭한 기타리스트를 픽업하는 밴드 마스터로 거듭났다. 이 와중에 탄생된 디오-비비안 캠벨 조는 아더왕-렌슬롯에 비유되던 데이빗 커버데일-존 사이크스(화이트 스네이크) 조와 함께 헤비메틀 불멸의 보컬-기타 콤비로 꼽힌다. 비비안 캠벨 이후에도 'DIO'는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의 등용문이었고, 나는 개인적으로 <Wild One>에서 17세 기타리스트가 디오와 함께 튀긴 불꽃을, 디오의 베스트로 지목한다.

디오처럼 되고 싶어? 그렇다 한들 누구한테 "연락해"야 할까. 장르를 바꾸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거나. 그래도 디오처럼 되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라! 스래쉬메틀도 LA메틀/팝메틀도 아닌, 중앙파(?) 헤비메틀(예: 디오를 비롯,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은 옛날에 한물 갔으며, 디오의 전성기도 끝난지 오래. 하지만 분명 나는 디오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의 흑마술이 빚어낸 창대한 우연이다. 근래 한 1년반은 헤비메틀을 한낮에만 들었다. 어제 나는 신해철의 방송을 들으며 간만에 듣는 깊은밤의 헤비메틀에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침대에 누워 담담히 듣던 나는, 그러나 블랙 새버스의 <Heaven and hell>을 들으면서 무너졌다. 그것은 소년 시절 밤을 설치게 만들던 헤비메틀이었고, 더구나 그는 로니 제임스 디오였다.





:



롭 핼포드는 21일 공연한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리스트다. 메틀 보컬의 산 역사이며, 앞으로도 그를 능가할 보컬리스트는 물론, 그에 필적할 보컬리스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 락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솔로이스트로는 김종서과 김경호가 꼽힐 것이다. 그들을 통해 대중화된 락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보컬 스타일, 즉 하늘을 찌르는 하이톤 보컬이 곧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고음이 돋보이는 보컬들 간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들 두성을 쓴다는 점에서는 비슷비슷하지만, 김경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스트라이퍼'의 보컬 등은 기본적으로 미성에 바탕하고 있다. 국내 청중들이 락 발라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스틸 하트나 스콜피온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미성이라 함은 단순히 맑은 목소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청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 변성기 이후에도 높고 깨끗한 목소리를 유지하였으며 마치 여성처럼 자연스럽게 고음을 내는 이를 미성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일례로 스트라이퍼의 <I believe in you> 같은 노래는 여성과 흡사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일본이나 한국 등지에서 특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멜로디컬 메틀'의 보컬리스트들 다수는 '반가성'이 돋보인다. 하이틴 아마추어 메틀밴드들이 즐겨 커버하는 헬로윈이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 밴드의 보컬리스트는 실력이 되고 연습을 많이 해서 헬로윈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반가성은 미성이나 두성에 비해 선천성이나 각고의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 밴드 보컬은 아니더라도 노래방에서 고음부를 좀 소화하는 이들은 대부분 반가성을 사용할 줄 안다. 단 반가성에 의존하는 보컬들은 중저음과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고음 일색이거나 <A tale that wasn't right>처럼 초반부는 저음이고 후렴구에서는 막바로 고음을 내게 된다. 반가성은 또 컨디션에 크게 좌우받는다. 헬로윈이나 예레미의 보컬이 이따금 반가성이라기보다는 '거의 가성'에 가까운 발성을 하는 요인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반가성이나 미성이나 두성을 한가지만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어차피 인간의 한계가 있거니와 각자의 발성이 가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성은 파워가 약하고, 두성도 일정 음역에 다다르면 반가성으로 변환되게 된다. 이 세가지에 허스키(그냥 거친 소리가 아니라 목에 힘을 줘 긁어서 내는 소리를 뜻한다)를 꽤 많이 섞는 보컬이 바로, 핸섬 그 자체의 얼굴, 큰 키, 긴 머리칼 등 완소외모를 자랑하는 세바스찬 바크('스키드 로우' 출신)다.

그렇다면, 롭 핼포드는 어떤 케이스인가. 그는 미성에 기대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점에서 그를 '하이톤 보컬'로 분류하는 건 멋쩍은 짓일지 모른다. 롭 핼포드는 기본적으로 '기냥 육성'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고음으로 올라가면서 두성이 나오고 허스키가 섞이고 더 올라가면 반가성으로 가지만, 여하튼 그는 육성을 많이 쓴다. 대신 흉성은 거의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 흉성을 쓰지 않고 육성만으로 파워를 내는 보컬리스트로는 윤도현이 있는데, 물론 그와 핼포드는 닮은 구석이 없다. 핼포드는 음색 자체가 금속성이다. 짚어보니, 롭 핼포드는 교과서적 메틀 보컬리스트이면서도 꽤 개성적이다. 그의 아류들이야 있겠지만 그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원류를 쫓아온 사례는 거의 없다. 한국의 수많은 메틀 키드들이 그의 노래를 카피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부르지는 못했던 듯하다. 따라잡기의 용이성으로 치면, 헬로윈>스트라이퍼>세바스찬 바크>주다스 프리스트가 아니었을까.

흉성보다 두성이 돋보이는 보컬리스트들 대다수가 롭 핼포드를 따르지 못하는 결정적 측면은 단연 라이브에서 과시하는 안정성이다(이에는 고음실력 못지 않게 중음의 탄탄함도 깔려 있다). 세바스찬 바크나 제임스 라브리에(드림 시어터)가 날고 기어도 그들이 심한 기복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이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K.K. 다우닝과 글렌 딥튼의 기타, 스캇 트래비스의 드럼에도 귀가 집중될 수밖에 없지만(베이스는 빠트려서 죄송. 그에게는 근음과 8비트로 상징되는, 튀지 않는, 그러나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단순하고도 궁극적인 멋이 있지 않은가), 보컬은 튜닝이 되는 악기가 아니다. 게다가 핼포드는 이미 5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공연을 준비할 때나 끝나고 후기를 쓸 때나 팬들이 핼포드에게 마음이 끌렸던 건 당연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늙었고 이번 내한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대가, 창법이 늙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정상 그랬겠지만 의자에 앉아서 부른 노래가 몇곡 있었고, 앞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어딘가에 기대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딜레이나 리버브가 걸린 대목도 적지 않았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노래에 져서 쓰러지는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고음부가 너무 많아 악을 질러대거나 중음에서 흉성+허스키로 목을 상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성대의 보존이 그만큼 쉬웠으리라 판단된다. 그런데 발성이 단순하고 약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보컬계에서는 "제대로 된 중음 하나, 열 고음 안 부럽다"는 속담이 있다. 핼포드가 누구누구보다 음을 못 올려서 중음의 비중이 더 많을까? 또 한편으로, 중음에서 흉성을 쓰지 않는다는 건 심심한 느낌을 상쇄할 본인만의 무기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발성외적인 이야기지만, 롭 핼포드의 카리스마는 가만히 서 있어도, 이따금 팔만 좌우로 움직여도 관객들을 빡돌아 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이미 공연 초반부 <Metal God>을 통해 확인되었고, 그는 역시 메탈의 신이었다. 혹자는 냉철하게 따지면서, 그렇게 오래 인기를 누렸으니 별 모션이 없어도 대단해 보이는 거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거다. 1980년대를 관통한 그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고, 35년간 버텨온 그 에너지가 어디에 갔겠는가 말이다. '나도 롭 핼포드만큼 부를 수 있는데'라는 분은 그만큼 개겨 버리면 된다.

자세힌 몰라도 가시밭길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공장지대 노동계급 청년들이었다. 메틀 기타의 본보기라는 두 기타리스트도 걸출한 초식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은 아니었다. 또 이 밴드는 고질적으로 드러머 기근을 앓았고, 초창기에는 느릿느릿한 곡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다. 롭 핼포드에게는 누구를 따라하고 흉내낼 만한 시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로니 제임스 디오, 데이빗 커버데일, 그레험 보넷 등이 하드록에서 메틀로 자가발전했다면, 롭 핼포드는 그 과도기의 카오스를 1980년대를 장악할 막강권력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하나 더 기억하자. '정통 메틀' 어쩌구 하는 어휘가 있고, 그것이 주다스 프리스트나 아이언 메이든을 수식하기도 하지만, '메틀'은 태생적으로 록음악 내에서도 이단의 음악이었다. '헤비 메틀'이란 말부터가 경멸어였다.)

"다 늙어서 돈이 궁하니까 왔냐"고 깝죽거리는 네티즌을 한명 보았다.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메틀 보컬이 다른 장르의 싱어들보다 노화에 큰 지장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나이먹기라는 게 본디 기브 앤 테이크 아니었던가? 아티스트는 중년, 노년에 슬은 '녹'마저 광휘의 원천으로 쓴다. 그러면서 나이에 걸맞지 않을 수 있는 화장은 벗겨진다. 전성기 노장밴드의 대표선수인 롤링 스톤즈나 에어로스미스는 메틀밴드는 아니었다. 노장 메틀 뮤지션의 새로운 전성을 주다스 프리스트와 롭 핼포드로부터 보지 못하면 어디서 본다는 말인가. 이번 공연은, 안 가본 놈들만 손해봤다. 당신이 어디서 롭 핼포드 수준의 보컬을 직접 들을 수 있다고. (아차차, 주다스 프리스트에 관심 없었거나, 가고 싶었는데 사정상 못 간 사람은 예외.)

추신: 한국 록역사에서 핼포드와 가장 유사했던 보컬리스트는 '백두산' 시절의 유현상이었다. 그리고 유현상 이전에 유현상 없었고, 유현상 이후에 유현상 없었다.

'Listen to the 무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류에서 용 난다 - 퀴즈  (1) 2008.10.08
보컬열전 (2) 로니 제임스 디오  (6) 2008.09.26
주다스 프리스트 내한공연 -짤막한 소감  (2) 2008.09.22
서태지 논란  (4) 2008.08.10
서태지와 록  (0) 2008.07.30
:

정치와 운동의 차이에 관한 대착각

Forum | 2008. 9. 23. 17:48 | Posted by 김수민
내가 올해 들었던 가장 최악의 소리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는 운동이 아니라서... 어쩌구 저쩌구 주절주절"

한마디로
"정치는 현실이고 타협이니 정당은 게걸스럽게 하는 거다..."
뭐 이 따위 레퍼토리 되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이들과는 정반대로

정치는 필사즉생이고
운동은 생존도모라고
생각한다.

설명을 하고 납득시켜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

주대환처럼 살지 않겠다

Free Speech | 2008. 9. 22. 23:08 | Posted by 김수민

한때 내가 가장 존경했던 이론가,
주대환을 비판하는 3부작(?)을 다 썼다.
그 글 쓰는 데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내 인생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주대환처럼 살지 않겠다? 웃기는 이야기긴 하다.
주대환은 긴조세대 학생운동의 상징적 인물이고, 진보정당추진세력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나는 그냥 뭐 '듣보잡'이다.
그는 처연해 보이긴 하지만 잘난 사람이고,
나는 아니다.

주대환은 소수파로 전락을 해도 아웃사이더 기질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게 문제다.
 이점에서 내가 그보다 좀 더 잘 살 수 있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주대환은 하다 안 되면, 제휴대상이나 공간을 바꾸려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이 올 때를 기다릴 뿐이다.

실패하면 그냥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조금 빨랐던 게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다른 곳으로 가서 새 친구들을 사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기자는 작년에 4학년이던 내게 "배후조종 좀 하나?"라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이 사회는 물론, 사회운동이 나 같은 사람에게
많은 인원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도 라인에 서지 않았고, 지금까지 라인을 만들지 않았다. (만들 수 없었다.)

내가 끌어당긴, 그리고 나를 끌어당긴 몇몇의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기다린다.
기다리는 와중에 흐트러지지 않고,
내 어깨를 밟고 올라갈 신예들을 기다리며
조금 더 튼튼하게 자신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대장 같은 거, 하고 싶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
뻔한 사실 아닌가.
뜻이 이뤄지길 바라고,
이뤄지지 않아도 열패감 같은 건 갖지 않는다.

주대환이 자신의 오랜 동지인 전희식 선생을 돌아보길 바란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WINNING 11  (3) 2008.10.01
기품  (2) 2008.09.30
올해가 남긴 인물사진, 최고의 포스 두장  (0) 2008.09.11
추물  (0) 2008.09.10
최병천,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5) 2008.09.06
:

채플강제이수제도에 끝내 무릎 꿇다

Forum | 2008. 9. 22. 15:49 | Posted by 김수민

3년만에 출석을 했다. 수강신청을 하긴 했지만 들어가는 데 20일이 걸린 셈이다. 어쩐지 오늘은 오르간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순서도 없었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훨씬 더 두드러졌지만. 교목실 교수들 없이 학생들 네명이 등장했다. 이어 상영된 동영상은 오늘 현정화 선수가 등장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걸 알려 주었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학교 들어올 때 채플을 한다는 걸 모르고 들어 왔냐?"는 소리를 해댔다. 나는 2001년 1학기부터 2005년 2학기까지 중간의 휴학 3년을 빼고 세번의 채플을 이수해 왔다. 그리고 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채플이수조건을 강제로 부여하는 처사에 반대하였고, 그 이후부터 채플을 듣지 않았다. 내 소속집단이 어디든 틀렸다고 생각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다. 유엔 헌장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는 명시되어 있다. 교칙 어디에도 "채플을 보이콧하는 학생은 즉시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써 있지 않다. 그리고 학교측에서도 학생의 종교에 관계 없이 신입생을 뽑는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내 이런 재반박에 언제나 침묵해 왔다.

"기독교 학교에 들어왔으니 학교가 시키는대로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되먹지 않은 말장난이다. 만일 하버드 대학처럼, 일본의 도시샤 대학처럼, 채플이 자율화한다면 그렇게 떠드는 인간들은 채플에 참석할 것인가? 개새꺄, 솔직하게 말하라고. 졸업이 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그리 밝히고 있다. 그런 학생들은 채플에 따분해 하고 교목실은 그런 학생들을 달래고 얼를 방책을 찾는다.

그런 가운데 절충점에 세워진 채플에 대해 진짜 종교인들은 비종교적이라고 느낀다.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채플자율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비교인들까지 억지로 끌어들인 채플이 세레모니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민다. 채플은 종교행사이지만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모든 학생들에게 강제로 X를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서, X가 종교행사든 예배든 달라지는 건 없다.


더 웃긴 건 "채플이 예배야?"라고 떠들어 제끼는, 개신교인은 아니면서 채플강제이수의 하수인이 된 학생들의 반문이다. 채플은 순우리말 아니니 영어사전 뒤져가며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나는 채플 필참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었고, 그래서 대강당을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운동'이 아니라 내 '태도'였다. 운동으로 이어가려 했지만 참 버거웠다. 채플을 대놓고 보이콧하는 학생은 학내에서 두명. 그 두명이 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둘은 다른 일도 하고 있었던 데다가, 채플자율화라는 캠페인은 이슈의 성격상 정기적이고 꾸준하게 펼쳐지기는 힘들었다. 두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다른 학생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학생운동단위 쪽에 채플자율화에 동참하도록 강하게 권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꿈은 일찍 깨는 것이 좋다 쪽이었고. 그 친구라고 해서 자기 의견의 실현가능성을 믿지는 않았다. 그저 이야기라도 해보고 공식적으로 거절당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그럴 가치도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 친구는 먼저 채플에 들어가게끔 내가 설득했다.)


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학교측이 태도를 바꿀 공산은 제로였다. 사법부는 보수적이었고, 입법부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학내의 대중운동은 잠꼬대 같은 일. 나는 처음부터 승산 때문에 보이콧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당국의 처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따름이다.

학교에는 나처럼 생각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둘이 기억에 남는다. 한명은 신학과 학생이었고, 대광중학교 시절 류상태 목사(강의석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으로서 강의석을 지지했던)의 제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채플에 깔린 자본의 논리와 그 증거를 일러 주었다. 또 한명은 여호와의 증인. 졸업 직전에 다국적 회사에 취직하긴 했으나 채플을 하나도 패스하지 못해 걱정이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대강당으로 들어가면서 그분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나는 채플 보이콧을 시작하고 나서 부모님에게 한번도 압력을 받은 바 없다. 반대도 찬성도 들은 바 없다. 어머니는 "그래"라고만 했고, 아버지는 내게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에게 지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거의 내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녔다면 진즉에 학교를 그만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 빌붙어 다닌 학교를 마음대로 그만두지 못했다. 내 돈은 내가 우습게 보면 되지만, 부모님 돈은, '남'의 돈은 우습게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부모님은 집안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분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부모님과 의견이 충돌할 때,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했다. 이명박의 측근인 아버지가 내 야당 짓거리에 간섭하지 않는 것도 그런 과정의 결과다. 대학에 들어서면서 나는 자유가 되었다. 부모님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쯤의 모토를 지켰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폭력적 종교교육을 불사하는 사립대학'에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 채플에 들어가고자 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는 알 수가 없다. 이미 10학기째 다니고 있거니와 강의실 안에서 쌓은 것은 빈약하고,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은 대학과는 별 상관 없이 결정되었다. 그냥 졸업할 때 마음 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학사복이나 입혀드리고 싶다. 어차피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내 마음이다.

오늘은 교목실 인사들이 보이지 않아 굴욕감이 덜했지만, 위로 아래로 옆으로 봐도 가소롭기 그지 없는 폭력적 제도에 무릎꿇은 이 낭패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제가 주입받은 걸 절대 진리로 알며 말만 '글로벌'이지 철저히 한국식 근본주의 기독교에 젖어왔던 인간들과, 개신교인도 아니고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논리를 가진 양 채플강제이수제도를 옹호하던 인간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비참한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그 씨방새, 개새끼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나중에 사회 어디선가에서 나를 마주쳤을 때 나더러 "동문"이라고 부르는 패악질 따윈 하지 마라. 턱쪼가리를 날려 버릴 테니까. 
 
채플 시간에 주다스 프리스트가 왔으면 좋겠다. 프리스트는 프리스트잖아?

:

11년 전, 주다스 프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인류의 만년 묵은 귀가 그들을 통해
금속성 기타톤과 두성 샤우팅에 익숙해졌다.

<Metal God>, <Breaking the law>, <Painkiller>, <Electric Eye>......

메탈의 황홀경에 빠져, 
1시간 40분이 40분 정도로 느껴졌다.

내 생애 내한공연 중 최고였다. 2002년 오지 오스본을 능가했다.

<Before the dawn>은 '역시나' 셑 리스트에 빠져 있었다.
<Ram it down>이 빠진 건 아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Listen to the 무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컬열전 (2) 로니 제임스 디오  (6) 2008.09.26
보컬열전 (1) 롭 핼포드 - 공연 후기를 겸하여  (10) 2008.09.24
서태지 논란  (4) 2008.08.10
서태지와 록  (0) 2008.07.30
김성면의 90년대와 80년대  (2) 2008.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