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출석을 했다. 수강신청을 하긴 했지만 들어가는 데 20일이 걸린 셈이다. 어쩐지 오늘은 오르간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순서도 없었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훨씬 더 두드러졌지만. 교목실 교수들 없이 학생들 네명이 등장했다. 이어 상영된 동영상은 오늘 현정화 선수가 등장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걸 알려 주었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학교 들어올 때 채플을 한다는 걸 모르고 들어 왔냐?"는 소리를 해댔다. 나는 2001년 1학기부터 2005년 2학기까지 중간의 휴학 3년을 빼고 세번의 채플을 이수해 왔다. 그리고 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채플이수조건을 강제로 부여하는 처사에 반대하였고, 그 이후부터 채플을 듣지 않았다. 내 소속집단이 어디든 틀렸다고 생각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다. 유엔 헌장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는 명시되어 있다. 교칙 어디에도 "채플을 보이콧하는 학생은 즉시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써 있지 않다. 그리고 학교측에서도 학생의 종교에 관계 없이 신입생을 뽑는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내 이런 재반박에 언제나 침묵해 왔다.
"기독교 학교에 들어왔으니 학교가 시키는대로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되먹지 않은 말장난이다. 만일 하버드 대학처럼, 일본의 도시샤 대학처럼, 채플이 자율화한다면 그렇게 떠드는 인간들은 채플에 참석할 것인가? 개새꺄, 솔직하게 말하라고. 졸업이 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그리 밝히고 있다. 그런 학생들은 채플에 따분해 하고 교목실은 그런 학생들을 달래고 얼를 방책을 찾는다.
그런 가운데 절충점에 세워진 채플에 대해 진짜 종교인들은 비종교적이라고 느낀다.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채플자율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비교인들까지 억지로 끌어들인 채플이 세레모니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민다. 채플은 종교행사이지만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모든 학생들에게 강제로 X를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서, X가 종교행사든 예배든 달라지는 건 없다.
더 웃긴 건 "채플이 예배야?"라고 떠들어 제끼는, 개신교인은 아니면서 채플강제이수의 하수인이 된 학생들의 반문이다. 채플은 순우리말 아니니 영어사전 뒤져가며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나는 채플 필참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었고, 그래서 대강당을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운동'이 아니라 내 '태도'였다. 운동으로 이어가려 했지만 참 버거웠다. 채플을 대놓고 보이콧하는 학생은 학내에서 두명. 그 두명이 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둘은 다른 일도 하고 있었던 데다가, 채플자율화라는 캠페인은 이슈의 성격상 정기적이고 꾸준하게 펼쳐지기는 힘들었다. 두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다른 학생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학생운동단위 쪽에 채플자율화에 동참하도록 강하게 권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꿈은 일찍 깨는 것이 좋다 쪽이었고. 그 친구라고 해서 자기 의견의 실현가능성을 믿지는 않았다. 그저 이야기라도 해보고 공식적으로 거절당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그럴 가치도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 친구는 먼저 채플에 들어가게끔 내가 설득했다.)
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학교측이 태도를 바꿀 공산은 제로였다. 사법부는 보수적이었고, 입법부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학내의 대중운동은 잠꼬대 같은 일. 나는 처음부터 승산 때문에 보이콧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당국의 처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따름이다.
학교에는 나처럼 생각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둘이 기억에 남는다. 한명은 신학과 학생이었고, 대광중학교 시절 류상태 목사(강의석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으로서 강의석을 지지했던)의 제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채플에 깔린 자본의 논리와 그 증거를 일러 주었다. 또 한명은 여호와의 증인. 졸업 직전에 다국적 회사에 취직하긴 했으나 채플을 하나도 패스하지 못해 걱정이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대강당으로 들어가면서 그분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나는 채플 보이콧을 시작하고 나서 부모님에게 한번도 압력을 받은 바 없다. 반대도 찬성도 들은 바 없다. 어머니는 "그래"라고만 했고, 아버지는 내게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에게 지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거의 내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녔다면 진즉에 학교를 그만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 빌붙어 다닌 학교를 마음대로 그만두지 못했다. 내 돈은 내가 우습게 보면 되지만, 부모님 돈은, '남'의 돈은 우습게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부모님은 집안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분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부모님과 의견이 충돌할 때,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했다. 이명박의 측근인 아버지가 내 야당 짓거리에 간섭하지 않는 것도 그런 과정의 결과다. 대학에 들어서면서 나는 자유가 되었다. 부모님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쯤의 모토를 지켰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폭력적 종교교육을 불사하는 사립대학'에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 채플에 들어가고자 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는 알 수가 없다. 이미 10학기째 다니고 있거니와 강의실 안에서 쌓은 것은 빈약하고,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은 대학과는 별 상관 없이 결정되었다. 그냥 졸업할 때 마음 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학사복이나 입혀드리고 싶다. 어차피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내 마음이다.
오늘은 교목실 인사들이 보이지 않아 굴욕감이 덜했지만, 위로 아래로 옆으로 봐도 가소롭기 그지 없는 폭력적 제도에 무릎꿇은 이 낭패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제가 주입받은 걸 절대 진리로 알며 말만 '글로벌'이지 철저히 한국식 근본주의 기독교에 젖어왔던 인간들과, 개신교인도 아니고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논리를 가진 양 채플강제이수제도를 옹호하던 인간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비참한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그 씨방새, 개새끼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나중에 사회 어디선가에서 나를 마주쳤을 때 나더러 "동문"이라고 부르는 패악질 따윈 하지 마라. 턱쪼가리를 날려 버릴 테니까.
채플 시간에 주다스 프리스트가 왔으면 좋겠다. 프리스트는 프리스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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