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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 선생 별세

史의 찬미 | 2008. 3. 23. 16:23 | Posted by 김수민
건국 이후 혁신정당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그는 더없이 든든한 거목이었다.
진보당 사건 당시 그가 패기와 객기에 차서 남긴 메모가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에 대한 무기로 쓰인 바 있었으니
그가 이후에 겪었던 심적 고통은 짐작할 만하다.
정 선생이 근래에 진보진영에 남긴 말들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간 것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어도 늘 생각에 잠길 기회와 마주치곤 한다.
진보당계와 근민당계, 민자통과 중통련의 차이를 연구하며
한국 진보진영에게 통일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게 안겨준 분도 그분이다.
저승에서 조봉암 등 동지들과 반갑게 해후하시길 빈다.
공교롭게도 정태영 선생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나는 조봉암에 대한 원고를 작성한 바 있다.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
  [弔辭] 진보 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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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좌파

Forum | 2008. 3. 21. 23:06 | Posted by 김수민

내 기질이나 능력에 비해서는 오프라인 활동을 꽤 한 편이다. 하지만 내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졌던 건 온라인에서였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듯 싫어하는 사람도 내 온라인 활동을 문제 삼는다. 나를 싫어하는 쪽에서는 나를 키보드 워리어로 생각한다. 웃기는 이야기다. 자기네 조직이 길가다 우연히 봤을 때 남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질 만한가? 깊이 겪어 볼수록 더 신물이 나는 집단이라는 걸 만인이 인정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인터넷이 없었다면 내가 이만한 참여라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키보드를 통한 대화가 없었다면 불신을 깨지 못했을 것이다. 누리망은 내가 현장으로 향하는 그나마 유일한 출구였다. 진중권이 키보드 좌파가 되자고 썼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제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음에 기인한 견해다. 각개격파 당하는 가련한 개인들에게 이곳저곳 구멍이 뚫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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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Free Speech | 2008. 3. 21. 19:31 | Posted by 김수민

강연인지 발제인지 좀 헷갈리긴 하는데 연세대 교지편집위원회의 부름을 받고 세미나를 맡았다. 군대 가기 전 한창 자치언론 활동할 때는 연세 교지랑 인연이 없었다. 소 닭 보는 사이였던 셈이고, 연세 교지를 격렬히 싫어하는 동료도 있었다. 사회주의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글은 잘도 싣지만 진짜 학교측을 비롯해 기득권측을 불편케 하는 기획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사람은 적어졌고 문제의식은 꽤 근접하게 됐다. 연세 교지는 학교측의 곁눈질을 받고 남을 기획들을 양산해 냈고, 내가 동참하였던 채플 보이콧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다 줬다. 학자도 아닌 나부랭이인 내 이름과 글을 주석에 달아준 것도 연세 교지다.

교지에 일하는 용락 씨에게 이미 기고를 두번해서 더 도와줄 것이 없다고 말했었지만, '세미나 간사'를 맡아서 강연하는 것이 있다며 전해줄 만한 좋은 주제와 소재가 없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나는 졸업논문에서 다루기도 했던 연세대학교 해방전후사를 꼽았다. 그러고 말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진짜 연락을 받아 버렸고, 해방전후사와 함께 근래 연세대학교의 문제 등을 다루는 강연을 했다.

연세 교지 편집위원들 10여명만 참석한 비개방 강연회였다. 내가 블로그에서 '초딩'이라고 불렀던 08학번도 만났다(도망가지 못했다--). 지난번 <연세통>에게 초청 받아 발제했을 때도 그랬듯, 혼자 떠들다 보면 1시간 30분이 금방가고, 질의 및 응답하면 또 1시간이 금세 흐른다. 말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나름대로 연세대 역사를 추적하면서 얻었던 작업가설과 의심들을 참석자들에게 전수해 줬다. 내가 딱히 다른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졸업하기 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작업이 아닐까 한다. 마지막에 어쩌다 선배 티를 내면서 그분들에게 해준 말은 "사실의 편에 서라", "쉽게 형성한 노선은 쉽게 뒤집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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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내 뒷이야기..

휴지통 | 2008. 3. 19. 11:40 | Posted by 김수민

나름대로 3년 정도(2001.9~2002.12, 2006.1.~) 활동이란 걸 하면서 살았지만 나는 남들 눈앞에 좀처럼 튀지 않는 사람이었다. 운동가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고 직업정치에 뜻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며, 내가 할 말만 사람들에게 전파되면 그만이라는 기조 아래서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알고 보니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포레스트 검프처럼 살아왔다고나 할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때 그 현장'도 많다. 그냥 존재감 없이 앉아 있었던 적도 있고, 아주 약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적도 있었다.

진보신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내가 취한 자세에 대해서는 딱히 표현하고 규정할 말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내 깜냥껏 약간은 설치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고, 그만큼 나는 성공적으로 내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부한다. 정작 노회찬, 심상정 탈당 정국 때부터는 내 할 일이 없어졌고, 이건 내 개인적인 후퇴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의 우려와 이탈로 이어지긴 했지만.

작년 민노당 경선에 참여한 것은 실은 재창당 또는 분당을 위함이었다.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평등파 계열 인사들 몇몇이 노회찬을 지지하면서 혁신을 밀어붙이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합의를 한 바가 있다. 물론 평등파 내에서는 소수에 해당하는 의견이었고 그들의 결의는 말그대로 그냥 결의였다. 1. 분당을 각오한 2. 재창당 수준의 3. 혁신 작업. 뭐 이쯤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분들과는 교감한 적 없었지만 평소 지인들에게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경선을 전후로 한 자주파의 마지막 몸부림과 노회찬의 부상을 계기로 새로 가담하기 시작하는 대중들이 맞닥뜨리면, 당내 투쟁에서 자주파를 변두리로 몰거나 제2창당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자주파가 어쩌면 노 의원을 그토록 밟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이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의원회관에서는 "노회찬이 결선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행사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것이 보좌관의 잘못된 전달임을 깨달았다. 동행자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그때 얼마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잠실에 도착하니 이미 행사가 끝났는지 환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는 노 의원이 보였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다들 '조직화'와 '혁신'을 이야기했다. 나는 속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대선 끝나면 당을 떠날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걸 약속하고 다짐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난 안 한다'는 맹세를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인사하러 옆에 앉은 노 의원에게 해준 이야기는 '오아시스보다 큰 강물줄기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함께 있던 학생 당원이 울분에 차 인사불성이 되는 바람에 내게 건배 발언이 돌아왔을 때에도, 나는 "당을 바꾸면 세상이 바꾼다"라는 구호를 제의했다. 노 의원은 적어 가야겠다고 했지만, 동상이몽이었다. "바꾼다"는 것은 혁신하고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의 미필적 고의였고, 멋 모르고 사람들은 좋다고 건배했다. (ㅎㅎ 나의 티저 겸 마술에 걸린 것이다)

그날 자리에 김종철 씨가 위로차 방문을 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심상정 지지자나 그쪽의 민주노총의 모임을 가보면 넥타이 맨 사람도 많고 형편이 괜찮은 사람도 많다. 반면 권영길 후보의 지지자 모임에 가보면 사람들이 참 '못났다'." 진정 가난한 이들을 조직할 줄 아는 엔엘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는 엉뚱한 직감에 빠졌다. '김 선배가 엔엘이랑 아주 잘 어울려서 무슨 통합적 리더쉽 같은 걸 세우려는 게 아니라면, 혹시 분당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때 내 예감이 맞았는지는 나중에 물어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선배님들은 정치 노동자입니다. 당원이 낸 당비와 국민의 혈세로 살아갑니다. 이건 명분을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자주파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면, 당을 나가야 합니다." 민노당의 대선 참패 이후 만들어진 어떤 자리에서 내가 이연재 씨에게 한 말이다. 지금 그는 진보신당 유일의 대구경북 지역 후보이다. 그가 그날 이후 신당 창당에 앞장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선량한 눈빛과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동의해 주었다. 내게 전적으로 동의해줬던 진재필 씨도 노, 심 의원 탈당 이전에 신당건설에 합류했다. 깊이 고민하던 김석준 씨도 그랬다. 분당 논의에 강한 우려를 표하던 정창윤 씨도, 그를 설득하던 이장규 씨도 이젠 모두 함께하게 되었다. 대선 참패 이후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출범에 이르는 약 한달의 시간, 그때만큼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 기억도 드물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자잘한 뒷이야기를 남기며, 우리는 민노당을 떠났고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두어달 뒤 어디에선가 다들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을지, 의미있는 출발에 기뻐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수한 뒷이야기들이 그저 '후일담'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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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민노당이었던 시절인 1월에 열린 평당원 토론회. 나는 발언을 하겠다고 참석했는데,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할 말을 다 해버리는 바람에 그냥 앉아 있었다. 김혜경, 이덕우, 김준수, 윤영상, 조진한 씨 등등이 보인다. 나도 어디엔가 앉아 있다. 출처는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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