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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 졸업, 거처

Free Speech | 2008. 4. 27. 14:40 | Posted by 김수민

2005년 11월 대강당을 박차고 나온 이래 채플을 들어가지 않았다(채플 불참에 대한 어느 글). 4학기 이수자만이 졸업자격을 가질 수 있는데, 나는 현재 3학기 이수 상태다. 이전부터 채플을 보이콧했고 2006년에는 함께 자율화운동을 했던 친구에게 먼저 채플에 출석할 것을 권했다. 나도 뛰따라서 갈 생각이었다. 그 친구와는 달리 어차피 한학기만 남은 상태이기도 했고. 부모님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설득하거나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 힘으로 다닌 대학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그동안 낸 등록금이 아깝다. 내가 번 돈으로 다녔다면 아마 이미 학교를 때려치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그 대강당 안으로 들어가기가 싫거니와 졸업이 내게 그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졸업장은 쓸모가 없다.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성질머리 때문에라도 대기업 같은 데는 입사 못한다. 더구나 나는 'No Spec'으로 일관하고 있다. 언론사는 들어가기도 거의 불가능하지만 설령 그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도 보람은 없을 것 같다. 대학원에는, 가봤자다. 가고 싶은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공부하려면 대학원하고는 일찍부터 담을 쌓는 게 좋다. 그냥 이대로 채플에 불참하고 학교를 버린다고 해서 더 좋아지는 것도 없겠지만 나빠지는 것도 없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무기력해진 내가 흘러 들어갈 법한 몇가지 코스를 작년에 짚어냈고, 그것들을 다 끊어 버렸다.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도 대부분 없애버린 셈이다. 남은 건 꿈이나 소득은 다 제쳐두고 생계를 유지할 방법 뿐이다. 요즘 진지하게 축산업을 고려 중이다. 물론, 나는 과수원과 소 키우기를 겸했던 어느 농부의 손자일 뿐 어떤 노하우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목축은 내가 최근에 끌리는 얼마 안 되는 일이다. 소나 닭을 '풀어놓고' 키우는 구상을 한다. 그러나 이것도 대책이 만만치 않다. 대규모 목장을 가지거나 일을 작게 벌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한우를 인터넷으로 직매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물량 자체가 딸리면 난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좁은 우리에 몰아넣어 동물들을 미치게 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역시 목축은 겸업이나 부업의 대상인가?

내 소유로 된 땅이 있었다. '억대 자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쪽에서 소를 키워볼까 고려했었지만, 얼마 전 부모님와 의논하고 땅을 팔아 버렸다. 원래부터 재테크에 무심했던 어머니는 부동산 시험을 준비하면서 2년 정도 부동산 소유에도 관심을 가졌었지만, 근래엔 도로 신경을 꺼버리시고 불교 공부에 몰두 중이다. 땅을 판 것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거기말고 교외에 땅을 두군데인가 더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목축을 하려면 또 부모님 신세를 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거취'가 아니라 '거처'를 논해야 할 형편이다. 올해 12월, 나는 3년간 산 원룸을 떠나게 된다. 아버지가 내년 정년 퇴임을 하고 '범-정권'에 합류를 하여 가족이 상경한다는 시나리오(그러면 난 그 집에서 살게 된다능;)가 친척들 사이에서 돌지만 그거야 그저 추측일 뿐이다. 이거 참 어디서 살아야 할지를 걱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서른 즈음이다('서른 즈음에'를 자기 노래로 삼을 수 있는 연령이 27~33살이라는 일설에 따르면 나는 초심자).

만일 내가 채플을 마저 이수하고 졸업을 하게 되면 졸업장 말고 내 손에 쥐어지는 '스펙'으로는 교원자격증이 있다. 임용고사는 미치지 않는 한 준비하지 않을 작정이고 사립학교는 재수 없으니까 그걸 써먹으려면 대안학교행 밖에 없다(자격증을 굳이 요하지 않는 학교도 있기는 하다). 현재로서는 어딘지는 몰라도 그 대안학교 근처에서 살 공산이 높아 보인다. 거기는 서울일까, 아닐까? 이제는 좀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서울에서 만난 서투르면서도 교활하고, 악랄한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한 인간들에 지쳤다.


며칠 전 교육실습을 준비하면서 정장 한벌을 맞췄다. 이력이며 스펙이며 얼굴이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조금 딴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벗어나게 될까, 빨려들게 될까. 내가 중도에 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 않은 것이 벌써 운명을 결정해 버렸을까. 아니면 나는 내년 초를 전후하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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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 C

Free Speech | 2008. 4. 23. 23:47 | Posted by 김수민

집에 내려와서 어머니한테 얼마 전 아버지와 구미 경실련의 간부와 식사를 함께할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대충 감이 온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어머니에게 인상착의에 대해 물었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가 맞다고 한다.

C. 인민노련의 옛 활동가. 노동자 출신으로 대학생 출신들을 직접 가르쳤다는 인물.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과 한국노동당의 구미 지역 대표자였다. 민중당이 망한 후 경실련에 투신하여 지금 구미 지역에서 가장 명망있는 시민운동가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겪은 에피소드를 따라도 그렇다. '구미'하면 늘 진보운동가 두명이 꼽혔다. 하나가 김기수(민주노동당 전 최고위원, 현 진보신당)고 다른 이가 C이다. 

원래 부부동반 모임을 제의했는데 그는 혼자 나왔다고 한다. 접대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럽고 또 깐깐해 보였다는 것이 어머니의 후문이다. 그냥 척 보기에도 똑똑하고 일에 잔뼈가 굵고 인품이 훌륭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현황과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떨런지는 잘 모르겠다. 인민노련에서 중책을 맡았던 모 선생은 "참 똑똑한 사람"이라면서도 "중간층이 튼튼해야 진보정치가 발달한다"는 C의 견해에 대해서는 "계급은 두가지 뿐, 저것은 패배를 부르는 발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노동당에서 그를 만났던 또 다른 어떤 이는 작년에 "언젠가는 다시 함께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는 작년에 노회찬의 경선 출정식에서 지나가다 그를 본 적이 있다. 인민노련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이들이 모여 있었다.

당원인지는 몰라도 그는 (당연히)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무슨 목적으로 만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협의차 만난 것은 물론 아니고 지역 명망가 둘이 만나서 의견을 나누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대충 '대운하'가 주요 화제였나 보다. 그는 잘라 말했다고 한다. "대운하를 파면, 결국에 주로 쓰이는 건 관광용입니다. 뭔가 싶어 한번 유람선을 타보기야 하겠지요. 그라고 끝입니더."

뉴스를 검색해 보니 그는 근래에 금오공대와 경북대 공대 통합, 삼성전자 기술센터 등의 문제에 뛰어든 것 같았다. 그의 인터뷰에는 좌파가 하기는 힘든 어휘와 수사가 있었다. 나는 그런 것으로 좌우를 가리거나 하나의 축으로 한 인간의 포지션을 판단하는 것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가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좌파운동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행보가 '지역 유지'쯤으로 비쳐지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이념이 서린 구호를 핏대 올려 소리지르기보다 온갖 현안을 하나씩 짚어가고 발언하고 움직이며, 또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도 유능한 민완 시민운동가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그를 조금씩이나마 매체로 접해보면서 내가 내린 평가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지지니 뉴라이트니 하며 이탈하는 와중에서도 C는 진보적 활동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곧 그의 경험과 테제, 수완이 더욱 귀중하게 다루어질 날이 올 것이다. 어머니가 전하는 이런저런 인물평을 들으며,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임에도 뿌듯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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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돌아왔다... -_-

Free Speech | 2008. 4. 22. 13:48 | Posted by 김수민

5월 5일부터 교육실습(일명 '교생실습')에 들어간다. '어린이날'부터? 물론 그날은 쉬고 이튿날부터일 것이다. 어린이날에 놀토에 스승의날에 석가탄신일에, 놀 복은 터졌다. 나는 중간고사를 치는 과목이 하나도 없어 일단 오늘 집에 내려갔다 올라오려고 한다. 가는 김에 미리 연구주임 교사를 뵈려고 한다. 어제 모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교사 명단을 봤더니, 허걱, 돌아온 그들이 있었다. 늘 붙박혀 있는 사립학교와 달리 공립학교 교사는 주기적으로 전근을 가지만, 부근의 학교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패턴이 있다. 공교롭게도 딱 맞아 떨어졌다. 작년 교육실습 신청을 하러 갔을 때는 김oo 국어 선생님만 있었지만, 해가 바뀌면서 대거 복귀한 것 같다.

서xx 영어 선생님. 학교 다닐 때 무척이나 악명이 높았다. 공부도 빡시게 가르쳤던 데다가 양뺨을 두 손으로 압축시켜 버리는 체벌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그를 욕하는 졸업생이 아무도 없던 걸로 기억한다. "때려서 나를 바로 잡아주어 고맙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알고 보면 괜찮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지"라는 이유에서인데, 사실 한국 교육에서는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대개의 교사들처럼 나하고는 별 인연이 없던 분인데, 졸업할 즈음 내가 문학특기자라는 걸 알고 뒤늦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내가 졸업한 다음 실력을 인정받아 외국어고로 전근을 갔던 기억이 난다.

류xx 수학 선생님. 나를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에게 약간 관심을 가졋던 사람이다. 고2때 나는 '수학 열등반'에 있었는데 그 반에서는 내가 제일 잘하는 편이었다. 나는 문제풀기를 시키는 데 대비해 자습장을 끼고 살았는데, 한번 시켜서 잘 하니까 자꾸 시키고 결국 내가 못 풀기 시작하니까 "수민아, 공부 포기했냐~"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수학 선생이라기보다는 야간자습 감독 선생으로 더 많이 기억난다. 그는 야간자습에서 1학년 때 내 옆짝과 온갖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김xx 영어 선생님. 영어도 열정적으로 가르치지만 환경미화에 더 열성적이었던.... 학급에만 들어오면 바로 주번을 불렀다. '지각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지각하면 운동하는 거 말이당) 어느날 그 선생님한테 걸려 지각운동을 하다가 한 친구가 어지럼증을 내게 호소했던 날이 있는데, 그날 저녁 그 친구는 결국 사물함 쪽으로 쳐박히듯 쓰러졌고 그 친구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내가 그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근데 아주 잠깐 나돈 소문은 내가 사람을 때려서 죽인 걸로... ㅡㅡ;;;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가 새는구만. 여튼 김 선생은 내가 고3때 학년주임 선생이었다. 내가 졸업한지 한 2년쯤 지나 다른 신설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 근처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운동장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그가 역시나 아이들에게 쓰레기 줍기를 시키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전근가고 얼마 안 지나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 좀 궁금하다.

김-- 국어 선생님. 김00 국어 선생님이 급진적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은 전교조 교사였던 데 반해, 김-- 선생은 보수적인 성향이 보이는 분이었다(당시 두분이 딱히 대립했던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이고 학생들한테도 격의 없이 대했던 분이기도 하다. 그분이 김수영의 시를 읊으면서 정치적으로 조갑제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신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분이 쓴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는 최근에 뉴라이트계열의 교사모임에서 대표를 맡았다. 그렇게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분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좀 난감했다. 나를 좋아하는 교사였고 내가 문학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도 연신 잘됐다고 하셨던 분이다. 이번에 만나면 어떨지 모르겠다. 나에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 <딴지일보>를 빌려 가셨었는데, '좋은 책 읽는다'는 칭찬만 했다. 물론 이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군사독재 청산도 중요하지만 문민독재도 그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냐?"

이xx 교감 선생님은 내가 재학 당시에 지구과학을 가르쳤던 분으로,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어서 '김정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작년 학교를 찾아갔을 적에 교감으로 계시는 걸 봤는데, 어라, 머리가 덜 곱슬이고 김정일의 모습을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벼.

암튼 중요한 것은, 내가 잠시 돌아가 있을 곳애 그들이 돌아와 있다는 사실. ㄷㄷㄷㄷㄷ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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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전과 뒤통수

Free Speech | 2008. 4. 15. 00:47 | Posted by 김수민

나도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동안의 활동을 의심케 할 생각을 내비친 사람이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회피와 왜곡에
답답해진 나는 아무개가 근래에 쭉 써온 쓴 글을 읽어보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그는 읽지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문제 없다.
다만 그러면서도 계속 거기에 대해 읽은양 찬성하는양
말해온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장에 반감이 없으니까
그냥 시늉을 한 것이다.  

그는 그 필자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필자를 믿지 않는 것이랑 그 이야기의 옳고그름을 판별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느낌을 가지고 현상을 쉽게 재단하고
그 재단을 가지고 그 인물을 쉽게 논하고 흉보고는 했다.

그러다가는 어느새인가 친해져서 어울려 다녔다가
또 한편에서는 그 거꾸로의 장면을 연출하고는 했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습성을 나무랐다.
그는 그냥 면피한 것이지 새겨들은 것은 아닌데
마치 새겨들은 양 나와도 어울린 것이다.

그의 고집스러운 자세란 분별력도 없이 단순한 당위를 내세울 때나 가능했던 것이고
(분별력 없는 당위는 다른 살펴야 할 당위를 죽여 버린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그저 친교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었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
그 친구가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는 걸 그동안 쭉 알고 있었다.

예전 그가 과거 청소년기에 가진 어떤 신념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걸 기억하면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곰곰히
돌아보면 그때와 별다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더이상 간여하고 싶지 않다. 비맞은 중처럼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노래를
읖조린다.. 렛 잇 비~ 렛 잇 비~

여기서 더 참견하면 꼰대밖에 더 될 것 같고
나 역시 함정에 빠져들어갈 것 같다.

나는 뒤통수를 맞지 않았지만
내 뒤통수를 어루만져 본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라
어떤 고민에 파묻혀 다른 고민을 제쳐둔 것은 아닌지
한계를 짚어낸답시고 여지를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의 상상력과 사려심이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이 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어느 우주와의 대화를 마감한다.

하지만 'educo'(안에서 끄집어낸다)에 대한 믿음만은
버리지 말기로 하자.

남들이 나더러 가차 없다고 하거나 말거나...
또는 거꾸로 성선설론자라 규정하든 말든...
 
어디다 꺼내지도 써먹지도 못할
뒤죽박죽 횡설수설
술 안 먹고 쓴 술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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