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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한국현대사 OST # 4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롤러장에서 마주친 공효진네 패거리와 임은경과 그 친구들이 한쪽은 김승진의 <스잔>을, 다른 한쪽은 박혜성의 <경아>를 신청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당시는 쾌활하고 맹랑한 남성상에 열광하던 이들은 김승진에,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에 이끌리던 이들은 박혜성에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여성 스타의 경우 김완선과 이지연이 각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라이벌 승부를 펼쳤었다.

  ‘운동권’에서도 각자 ‘미는’ 노래가 달랐다. 그들이 부르는 민중가요의 가사가 정치적 이념을 담기 마련이었으므로 제목에서부터 취향은 확연히 갈렸다. 반미와 통일, 민족해방을 추구한 계열은 한반도 남반부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고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는데, 그들이 불렀던 <아 민주정부>의 가사는 이렇다: “한순간을 살아도 산맥처럼 당당하게 침묵의 거리를 박차고 투쟁하는 삶이라면. (중략) 아 아 민주정부 사천만의 희망이여 죽어도 다시 살아도 세우리라 꽃피우리라.” 

  반면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해방을 목적으로 삼았던 계열 가운데 일부는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선택했다. 13, 14대 대선에서 백기완 선본을 구성하고 이들은 <민중권력쟁취가>를 불렀다. “독재와 독점의 땅에 빼앗기고 짓밟힌 노동형제여 (중략) 역사 위에 피어 만발한 해방의 불꽃으로 투쟁하리라 노동해방 그날을 위해 민중권력쟁취투쟁.” PD(민중민주계열)라고 불려진 이들은 진보세력의 만국공통 투쟁가였던 <인터내셔널가>도 즐겨 불렀다. 하지만 NL(민족해방계열)은 그렇지 않았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다

  <인터내셔널가>조차 같은 나라에 사는 양측을 묶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진보진영이 두루 공유하는 몇 가지 노래들이 있기는 하고, 지금은 진보진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도 심심하면 열창하는 노래도 있다. 4년 전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업고 당선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청와대에 입성하여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79년 노동운동을 하던 가운데 사망한 고 박기순과 그 이듬해 광주 시민군으로 죽어간 고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탄생한 노래다. 두 사람은 광주에서 야학활동을 하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다. 박기순이 죽던 날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 모닥불이 탄다./ 기순의 육신이 탄다./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광주의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따와 작곡한 이 노래는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라는 음반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진보정당의 행사에 가면 으레 ‘민중의례’라는 것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먼저 간 열사들을 묵념으로써 추도한다. 민주·민족·민중운동에 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지는 의미는, <애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가지는 위상과 비견될 만하다. 나아가 이것은 아시아판 ‘인터내셔널가’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필리핀 등지에서도 이 노래는 알려져 있고, 꽤나 자주 입에 올려진다고 한다.

  1980년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던 사람들의 운명은 이리저리 갈라졌다. 자유주의 성향의 노무현과 일부 학생운동가들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 한국사회의 ‘신주류’가 되었다. ‘백기완 선본’이 만들어낸 흐름은 진보정치추진위,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을 경유해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김대중을 밀던 민족해방계열도 민주노동당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 민주정부>와 <민중권력쟁취가> 간의 갈등과 분열은 진보정당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북정책의 주요 목적은 (연방제)통일인가 평화(체제구축)인가.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해야 하는가. ‘민주노총당’으로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두고 민주노동당은 분당에 이르렀다. 이른바 평등파(신문기사는 이들을 PD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와 박승옥, 진중권 등 민주노동당 바깥의 진보주의자들이 모이고, 스타의원인 노회찬·심상정까지 신당창당을 결단함으로써 ‘진보신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중의례’에 대한 진보신당의 문제제기

  진보신당이 처음 태동할 무렵 한 토론회에서, ‘만화논평’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창우는 “행사를 할 때마다 반드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만 하느냐”며 문제제기를 했다. 일부 당원들도 지나치게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민중의례’를 도마로 올렸다. 마술사, 비보이, 율동패, 통기타가 어우러진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는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 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에 도전했던 진보신당 창당대회. 의자 마술이 약간 허술했던 모양인지 무대로 동원(?)된 언론인 홍세화와 김석준 부산대 교수는 괴로워 했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다가 행사 초반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은 아니다. 지금의 통합민주당이나 노무현 계열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그들의 정치노선이 옳든 그르든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만큼 그 노래는 빛바래고 변질되었다. 그러나 어찌 그런 이유로 버릴 수 있을까.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지만, 이제는 깃발을 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보자. 4.3 항쟁기념일을 무심히 지나친 이명박 대통령이, 왕년엔 운동권이었다지만, 다음달에 새삼 이 노래를 외울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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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O 내한공연

Film Tent & 2nd Stage | 2008. 4. 6. 16:21 | Posted by 김수민

                   
                       

TOTO/ Falling in Between



돔아트홀에서 TOTO 내한공연이 있었다. 서대문 선거유세에 정태인 본부장이 오셨는데 나를 안다고 했다. 그러나 그와 더 이야기할 기회를 포기하고 10만원을 바친 보람을 찾아 어린이대공원으로 갔다. 길을 잘못 들었지만, 나와 같은 처지인 어떤 이를 몰래 뒤따라 뜀박질하여 공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이나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내한공연만을 경험했던 내게 돔아트홀은 조금 독특한 곳이었다. 2000석의 객석이 꽉 찼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거의 전원이 일어나(앞에 사람 일어나면 어쩔 수 없지) 스탠딩 공연을 즐겼다.

TOTO는 한국인들에게 황인용의 라디오프로그램의 로고송인 <아프리카>로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TOTO를 '팝 그룹'으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친구도 "토토를 롹으로 볼 수는 없지 않냐?"라고 물었다. 어제 공연은 그런 사람들의 인식을 깨트리고도 남을 공연이었다. 근래에 나온 <Falling In Between> 음반도 그렇다. 물론 토토의 헤비 넘버들은 디스토션을 넣더라도 개성이 뚜렷하다. 그들은 '세션 맨 의식'이 강해서 장르주의에 잘 빠지지 않는다.

그들의 유연함이야말로 한국 관객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메틀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들이 한국과 일본에 많이 남아 있는데, 동아시아 롹팬들은 한편으로 발라드에 대한 선호도 굉장히 깊다. 그리고 화려한 테크닉에 대한 탐닉이 있다. 토토는 그 모든 요소들을 충족시켰다. 2008년 투어의 마지막 공연지를 서울로 선정한 것은 그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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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배우긴요

Free Speech | 2008. 3. 28. 01:15 | Posted by 김수민
<연두>라는 웹진에 '한국현대사 OST'라는 기획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런 댓글이 어제인가 올라왔다.

엘리브가
2008-03-26 18:12:30
잠깐 드는 생각이
김수민씨 직업이 무엇인가요;;
이런거 어디서 베우는 거지,,,


어디서 배우긴요... ㅎ
직업은 학생이구요... 사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능...

아마 저 리플이 달린 글에 음악, 역사, 정치, 문학 등 여러 소재가 나와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지만,
인간은 한가지에만 오로지 열중하는 사례가 아니면 누구나 조금씩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고,
얼마간의 감각만 지니면 그것을 연결시켜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김수민이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 OST'라는 것도 '코드 서너개' 잡고 '3분동안 연주'하는 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난 펑크보단 메탈이긴 한데, 내 인생은 PUN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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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변절한 후예들 그리고 김대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3
대나무산에 내린 검은비
 
 2008년 03월 22일 (토) 16:11:47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 김대환이 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그 역사적 배후에는 조봉암과 '다섯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전향했지만 변절하지 않았던 대나무산

 일제 시대 옥고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잃은 죽산(竹山) 조봉암은 해방을 앞둔 몇해동안 비교적 안온한 나날을 보냈다. 사실상 전향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떠난 결과였다. 이는 그가 해방공간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결별하면서 결국 공산주의자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제2의 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자본독재와 공산독재를 모두 반대하는 ‘제3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에 나섰다.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모색하던 인사들이 죽거나 현실정치에서 등을 돌릴 때, 조봉암은 제도권 안에서 견디는 쪽을 택했다. ‘일민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정당정치에 극도의 불신을 보냈고 전략적 파트너였던 한국민주당과 불화하던 이승만은 전직 공산주의자였던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내각으로 불러냈고,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의 완강한 제도정치권 참여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분명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정립한 민주적인 사회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따랐다. 왕족 출신 독재자 이승만과 지주·친일파로 이루어진 보수야당에 마음을 주지 못한 인민들이 조봉암의 곁으로 모였다. 왕년에 우익깡패였던 자도 그를 보좌했다. 그는 포연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50년대에 ‘평화통일’을 제창했고, 진보당의 강령은 ‘피해대중’의 지지를 받아냈다.

  조봉암은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만큼 살아남는 길을 거듭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이승만이나 신익희, 조병옥 같은 보수 정치인을 위협하면서 그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표묶음 앞뒤에 자신의 표를 덮는 등의 대대적 부정선거로 대한민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 정권은 조봉암을 죽이는 공작에 나선다. 꾸준히 외쳐온 평화통일론 그리고 남파간첩이라고 주장·간주된 양명산과의 만남을 근거로 조봉암은 마침내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허영만의 명작만화 <오! 한강>은 적지 않은 분량을 주인공과 조봉암의 인연(물론 픽션이다)에 할애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봉암을 기리고 새기는 노력들은 수두룩했다. 반면 조봉암 사후 진보정당인들이 걸었던 행보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변절의 역사였다. 박정희 정권기에 통일사회당을 이끌었던 당산 김철(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다)은 전두환 일당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갔다. 진보당 간사장이었던 청곡 윤길중 역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남재희와 함께 제5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대표와 국회 부의장까지도 역임하였다.

  이 전향과 변절의 이야기는 윤길중의 아들이 반 전두환 투쟁에 나서게 되는 또 다른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김소진의 소설 <혁명기념일>에도 픽션에 섞여 묘사되어 있다. 남재희의 딸도 학생운동에 가담해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전해진다. 남재희는 오늘날 진보정당에 애정 어린 충고를 연신 보내며 ‘진보 원로’처럼 행사하는가 하면, 운동가였던 그의 딸은 얼마 전 한미FTA를 주도한 실무진의 한명으로 나타났다.


 
 흑우 김대환의 생전 인터뷰 및 연주 동영상. 출처:T42.co.kr


  불꽃이 꺼지는 동안 검은비가 내렸다

  조봉암의 후배들이 주류 엘리트의 본연에 충실하며 ‘이너서클’로 화려하게 진입하는 동안, 조봉암의 호위경관이었던 흑우(黑雨) 김대환은 음악에 일로매진한다. 그는 ‘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고,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한 바 있다. 그 후 프리재즈에 투신하며 ‘드럼’이 아닌 ‘북’을 연주하였다. 즐겨 타는 할리 데이비슨을 무대에 올려 그 시동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한 손에 여러 채의 채를 끼워 절묘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김대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위에서 인용했듯 조봉암에게 충격과 자극을 받은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 공연 직전 물 묻힌 손가락으로 화선지에 좌우가 뒤바뀐 글씨를 써내려가는(관객들에게는 글씨가 똑바로 보인다) 퍼포먼스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은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자를 새긴, 이른바 ‘세서미각’이었다.

  집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사람보다는 활활 타오르다가 꺼져버리는 사람이 더욱 많다. 조봉암을 따라다니던 청년들은 가슴 속에 불길 하나씩은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주류의식에 함몰되거나 오랜 야인 생활에 지쳐 하나둘씩 타협하고 훼절하였다. 젊음과 객기에 기대 급격히 피어오른 불꽃은 철이 들어간다는 무상한 핑계 속에서 꺼져가곤 하였다. 진정한 열정은 언제나 은근과 인내에 빚을 지는 법이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지난 3월 1일은 김 선생의 4주기였다.

추신: 원고 마감이 끝난 3월 23일, <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 선생이 작고하였다. 북한에게 교육받은 이론가로 조작되어 조봉암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그는 이후에도 줄곧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을 했다. 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실현을 학술적으로 탐구하기도 했다. 유저로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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