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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선택

Free Speech | 2008. 5. 7. 21:11 | Posted by 김수민

하루는 학교에서 나이프가 없어졌다. 소로가 도둑으로 몰렸다. 집이 가난하다는 점, 자연을 좋아하는 그가 나이프를 필요로 했으리라는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소로는 "나는 훔치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며칠 뒤에 진짜 범인이 잡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가 훔쳤는지를 알고 있었다. 나이프가 없어진 날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뉴턴에 갔었다." 사람들이 "왜 그날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로는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했다"고 대답했다.

- 박홍규, <나의 헨리 데이빗 소로> 가운데 William Ellery Channing, Thoreau: The Poet-Naturalist(Robert Brothers, 1873), p. 12를 참조한 부분.


"내가 왜 구구절절 이야기를 해야 해? 당신부터 똑바로 이야기하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할 상황이 있다. 그러나 그때 원칙론은 먹히지 않기 마련이라 단번에 상대방의 억측을 뒤엎을 수 있는 증거를 속속 들이밀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가장 옳은 방식으로 버틸 것인가, 단칼로 빠르게 공박 또는 변호할 것인가. 선택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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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실습 첫날

Free Speech | 2008. 5. 6. 23:28 | Posted by 김수민
오리엔테이션 한번 안 해보고 출근하는 첫날, 미지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교사 휴게실에는 이미 두분의 동료 교생 선생님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혼자서 뻘쭘하게 한달동안 지낼 우려는 단번에 사라졌다. 기술교육을 전공한 강효진 선생님은 나보다 한살 어린 구미고 20회 졸업생이다. 나와는 달리 고교 시절에 기억나는 사건이나 교사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성격이 싹싹한 분이다. 한문을 담당하는 이지혜 선생님은 옆동네의 구미여고 출신인데, 5월 실습은 신청이 되지 않아 구미고로 왔다고 했다. 첫날부터 숙제를 받고 '파자(破字)'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짧게나마 가진 인사 자리에 모든 선생님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역시나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몇분 눈에 띄었다. 내가 교육학과에 합격할 때는 "거기 선생되는 과 아니제?"라고 물으셨던 분들이 많았지만, 7년만에 다시 나타난 제자를 진심으로 기쁘게 맞아주셨다. 재학 시절 과학 교사였던 교감 선생님은 자신을 잘 기억 못하는 강효진 선생님에게 섭섭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들 가운데에는 얼굴이 꽤 수척해진 분들이 계셨는데, 그중 한분은 몇해 전에 쓰러지셨다고 들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로 하체가 매우 단련되신 분이셨다. 안타깝다.

별도의 사전 면담 없이 출근하는 바람에 행정적, 기술적으로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연구주임, 지도교사, 학급담임 교사 분들께서 재빠르게 조처를 취해 주셔서 해결되었다. 나의 지도교사와 학급담임은 같은 분으로 2학년 5반 담임이시다. 내가 경찰 복무 이후로는 사람들 연령을 잘 짐작하지 못하지만- 30대 중반 가량의 여 선생님이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방송인 전제향을 닮으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시험날 첫 출근을 했고, 졸지에 시험감독으로 입실하게 되었다. 인사를 하자 교실이 떠나갈 듯했다. 그럼 이지혜 쌤이 들어간 교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체?(아그들 하교할 때도 여 교생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 뵈던데. 니넨 운 좋은 줄 알아라. 지방인 데다가 광역시도 아닌 지역의 남학교에 웬 여자 교생 선생님이...ㄲㄲ) 시험은 목요일까지 이어지고, 금요일은 학교장 재량 휴무일이다. 그 다음날과 24일은 '놀토'다. 12일은 석가탄신일이고, 22일은 학교 축제, 23일은 체육대회다. 15일 스승의날 일정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한달 실습하는 주제에 노는날, 쉬는날은 다 챙겨가게 생겼다.

90년대산 학생들은 거의 신인류급이었다. 앳된 학생과 들어 보이는 학생의 격차도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가볍다. 내 담당교사 분은 다소 샤프한 분이신데도 아이들은 정말 엄청나게 까불었다. 복도에서 날 보고 대뜸 '어서옵쇼~'하는 동작으로 "교생 쌤님~ 안녕하십니까~"하는 애들도 있었다. 2학년 5반에 들어갔더니 어떤 녀석이 어떤 급우를 가리키며 외쳤다. "쟤 수학 45점 맞았어요". 더 놀란 건 종례 시간에 담임 교사가 꺼내든 가방이었다. 가방에는 시험치기 전 내놓은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가방 자체가 휴대전화를 꽂기 좋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ㅡ_ㅡ  

달라진 건 교실 뿐이 아니었다. 여자 교사가 늘었고 평균 연령도 크게 낮아진 듯했다. 물론 교육실습생을 대하는 태도가 학창 시절 보았던 교사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풍경도 적이 달라졌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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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연두>에 연재.


'그리운 내 님'은 독립운동가 박헌영

[한국현대사 OST]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 최초의 국민가수? 혹자는 그를 '그레이트 김정구 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건국 이후 최고의 코미디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김국진이 1위를 차지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그가 ‘당시에’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조사를 벌이면 비슷한 원리에 따라 순위가 도출될 것이고, 구봉서나 배삼룡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제 영향력에 비해서는 뒷전에 쳐지기 쉬울 것이다. ‘가수’로 부문을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론가나 저널리스트, 연구자를 빼고 일반 국민들에게만 투표를 맡긴다면 말이다.


  순위야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기록과 기억은 어떤 분야에서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학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스타 김정구와 민중의 희망 박헌영


  이 칼럼의 제목은 ‘한국 현대사 OST'이지만 오늘은 ‘근대사’에 있었던 음악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왜 나는 제목을 ‘근현대사’라고 짓지 않았을까). 일제시대는 나라 없는 민족들임에도 조선인들이 ‘국민가수’를 가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구이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난 김정구는 연주에 능했던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가수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 신자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일찍 학업을 접고 양치기나 물지게꾼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충무로 대중음악계에 뛰어든 그는 <서울감상곡>, <항구의 선술집> 등의 곡을 취입하여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고, 제법 거금을 벌며 철마다 세벌쯤의 양복을 맞추어 경성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가 ‘가오’만 한껏 잡을 줄 아는 가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즈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재담과 제스춰였다.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만담에 뛰어났던 데다가 그의 노래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는 것은 물론, <왕서방 연서>를 부르며 이가 빠진 중국인 복장을 하고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김정구를 인기연예인에서 민족의 대표 가수로 격상시킨 노래였다. 이 곡은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에서 독립군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정소월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가 이시우가 정식음반으로 남기면서 김정구에게 노래를 맡겼고, 김정구가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3절까지 늘렸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를 뒤엎는 주장이 역사학자 임경석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거두였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증언을 담았는데, 증언자는 원경 스님으로 박헌영의 아들이다. <동아일보>에서의 퇴사와 <조선일보>에서의 해직 등을 거치며 끊임없이 혁명운동을 해온 박헌영은 1925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헌영은 재판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는 등(이것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심화되었고,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였다.”:소설가 심훈이 묘사한 그때의 박헌영이다. 참고로 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 주세죽 부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 주세죽, 박헌영 부부. 아기는 딸 박 비비안나. 허나 주세죽은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가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일제 말기 박헌영과 잠깐 만난 어느 처녀는 그의 아들인 원경 스님을 낳고 집으로 끌려 내려갔으며,

박헌영은 윤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928년 8월 두 부부는 바닷길을 통해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때 영화촬영차 두만강에 있다 소식을 들은 작곡가 김용호가 두만강변에서 영감이 떠올라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뚜렷하지 밝혀지지 않았던 작곡가 김용호는 다름아닌 김정구 친형 김용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경 스님은 또 1963년 라디오에 출연한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이야기를 친형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널리 불려지고, 박헌영은 잊혀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노년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왔던 국민가요이며, 강산에의 <라구요>로 또 다른 울림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빨갱이 두목’을 그리워하여 작곡된 것이라니! 대반전이 따로 없다. 더구나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북한에서도 이 노래에 담긴 역사성과 철학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공산당계의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관철시키기다가 좌익 내부의 협동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며, 공산당계의 신전술에 따라 민중들이 궐기했을 때는 이미 이북으로 탈출해 있었다. 남로당의 봉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국토완정론’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은 도리어 이승만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져 주었다. 북한 역시 건국 때 갖고 있었던 얼마간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세워지면서 그 자신부터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북한은 박헌영이 연희전문 창립자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을 만나 미국의 스파이가 되었다면서,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기 그리고 한국전쟁기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죄다 미국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우익 계열의 민족지도자들이 은둔이다 문화운동이다 심지어는 친일이다 하면서 침묵하거나 훼절하던 일제 말기에, 박헌영이 지하에서 부단히 독립투쟁을 이어가며 ‘그리운 내 님’으로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해방정국기에도 미군정은 그를 여운형, 이승만, 김구와 같은 반열에 선 대통령 후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권력투쟁에 소질이 있어서 좌익계의 다른 라이벌을 제치고 또 우익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 갇히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운동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북한의 부수상으로 나타나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결국엔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박헌영 뿐이랴.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들 모두를 위한 노래이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난에 부딪혀 나갔던 조선 민중의 노래인 것이다.




*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하는 사람들. 박헌영이 누구인지 아는 관객은 거의 없을 듯하다.

:

친일인명사전

史의 찬미 | 2008. 4. 30. 17:51 | Posted by 김수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인물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은 '직종'별로 분류되어 있고, '직위'를 준거로 삼고 있다. 이는 친일을 어설프게 은폐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 중 군수급의 관료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진정 제국주의에 부역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도 꽤 많다. 친일의 핵심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붙은' 데 있지 않다. 친일은 어떠한 경우에는 전쟁범죄였고 대부분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었으며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협력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과 층위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친일파를 공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들의 이름의 순서대로 각각의 이력과 행적을 공개하는 것과 친일행위를 정리하면서 관련인물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과정에 목격된 과거사 청산의 열의는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인명 순으로 정리된 사전이 편찬되면서는 '반민특위의 복수', '뒤늦은 숙청'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매국노'와 파쇼 군경과 행정공무원들이 친일파라는 기준 하에 그냥 뒤섞여 버린 사태에 입맛이 좀 씁쓸하다.

예전 김명인이 친일인명사전의 허점을 지적했던 글이다.


 

[정동칼럼]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문제
 
[경향신문 2005-09-08 18:42]

〈김명인/인하대 교수·계간 ‘황해문화’ 주간〉


한 민간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예비작업으로 친일인사 3,000여명의 명단을 발표해 적지 않
은 파문이 일고 있다.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거창한 민족주의적 수사학을 동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의 왜곡이 바로 친일잔재가 온존된 데서 비롯되었고, 지금도 한국사회의 수구냉전적이고 비자주적
인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의 원류가 바로 그 친일잔재에 있기 때문에 친일잔재의 올바른 청산이 결정적
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나-


하지만 친일잔재를 올바로 청산하는 한 계기로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라는 방식을 택한 데 대해서는 과
연 그 방법밖에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전이라는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 기술방식으로 한번 사전에
 등재된 사실은 좀처럼 수정되거나 말소되기 힘든 강한 경직성을 지닌다. 즉 그 사실은 하나의 가설에서 ‘정
설’로 고정되는 것이다. 아마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전이
라는 형식을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한국사회에서 친일잔재와 직·간접적으로 같은 이해를 갖는 기
득권 세력의 힘이 강한 만큼 저항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비교적 명백한 친일인사들을 ‘친일파’로 명토 박아
서 친일잔재 청산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성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친일잔재에 뿌리를 댄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득권 세력
의 힘이 여전히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민주화와 남북화해, 과거청산이라는 대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득권층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전 만들기 같은 유격적 전술이 아니고 친일잔재를 넓게 포위하는 헤게모니적 전술이다.


게다가 친일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설사 그런 기
준이 마련되어서 그 기준에 저촉되는 것이 확실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전후의 행적을 함께 고려하면 상대적
으로 평가가 곤란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뒷북을 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기 전에 먼저 광범한 친일행적자료를 먼저 공개하는 방
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구 누구가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사전적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그들의 친일관련
행적과 그 외의 전체 행적들을 자료집 형태로 폭넓게 수록하여 국가적 규모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거나 열
람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를 토대로 광범한 국민적 토론을 통해 친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내고, 그 결과 명백한 친일파들을 적출해 내고 엄중히 논죄하는, 그런 유연하고도 보다 견고한 방식의 친일
잔재 청산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 어설픈 봉인될 수도-


그리고 기실 더 중요한 것은 친일인물이나 식민지적 유제, 혹은 그에 기반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이라는 문제
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전되어 있는 친일적 정신구
조의 청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찰해 내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면서 내면화
된, 강한 것에 대한 굴종과 약한 것에 대한 경멸이라는 이중적 정신구조는 일제가 남긴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정신적 잔재이자 해방 전의 친일적 경사를 오늘날의 친미적 경사로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매개고리이며 이
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친일잔재는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지 재생산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올바로 성
찰하고 극복하는 보다 본질적인 기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는 이벤트는
미래를 열어젖히는 문고리가 아니라 과거를 서둘러 장송하는 어설픈 봉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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