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반지성주의 적대적 공존

Forum | 2009. 6. 18. 19:45 | Posted by 김수민
배울 거 다 배우고 약아빠진 놈들이 입만 열면 '먹물'이니 '식자우환'이니 떠들고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은 녀석들이 자기가 욕먹으면 반지성주의라고 입방아찧는다.  

'Forum'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대가 보수적이 아니라고?  (3) 2009.06.21
명박산성 연세대에 납시다  (1) 2009.06.20
세대간 연대  (0) 2009.06.18
좌우가 위에만 있는...  (2) 2009.06.01
촛불 잡생각  (1) 2009.05.17
:

세대간 연대

Forum | 2009. 6. 18. 00:55 | Posted by 김수민
김용민씨가 20대를 나무라면서 터진 논란을 지켜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세대내의 연대와 일체감에 취한 사람일수록 다른 세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는 배려하고 추켜올려도 그것은 지극히 기능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다. 기획 측면에서의 연대나 경합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와 친한 '참이슬'씨가 진보신당의 당령초안에 문제제기를 했다가 한 당관료에게 항의전화를 받았다. 불만을 공개적인 논쟁으로 풀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가 자기 후배세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폭로한 사건이었다.

나는 88만원세대 담론 이후에 나온 여러 대안적 기획에 한결같이 뚜렷한 한계가 깔려 있음을 본다. 88만원세대가 뭉쳐서 해결할 일은 없고, 오히려 그것으로써 잘못된 구도를 더욱 굳히는 효과만을 낳는 것이다. 88만원세대가 386세대의 매우 훌륭한 직계후배라는 나의 비아냥은 잘못된 대안으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러니 당당하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대상은 없다"고 말해줘야 한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스무살 어리거나 스무살 많은 이들과의 관계형성을 고민한다. 세대내 연대는 세대적 문제를 풀 만한 별다른 해법을 제공하지 못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박보장기는 엎어버리는 것이 정석이다.

끼리끼리 시시덕거리면서 다니는 그 어떠한 길도 철저히 외면하라.

'Foru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박산성 연세대에 납시다  (1) 2009.06.20
반지성주의 적대적 공존  (4) 2009.06.18
좌우가 위에만 있는...  (2) 2009.06.01
촛불 잡생각  (1) 2009.05.17
황석영에 대처하는 방법  (0) 2009.05.14
: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Free Speech | 2009. 6. 12. 16:18 | Posted by 김수민

중학교 졸업여행길에 올랐던 날은 아마도 대선을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앞둔 시점이었다.

A: 이번엔 바까야 돼. IMF도 터졌고 하니까.
B: 지랄 바꾸긴. 김종필이 국무총리되는 게 바뀌는 거냐.
A: 그럼 이번에 또 정권을 연장시켜줘야 되는 거야?
B: 김대중-김종필보단 이회창-조순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일까?

C: 그럼 넌 누굴 지지하는데?
B: 권영길이 사람은 젤 낫지.
C: 암튼 전두환이가 김대중을 완전히 쫓아냈어야 했는데...

A, B: 조까고 있네. 넌 빠져 임마.

2000년에 나는 유시민이 쓴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을 읽었다.
내가 1997년에 가진 생각도 유시민이랑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통합민주당 후원회장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DJ나 JP가 되는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적인 인물을 미는 게 낫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덕룡이나 이인제 등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여기엔 이회창도 들어간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이회창은 김대중보다 더 개혁을 대변했다.

언젠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쓴 일기를 들춰보니 이회창에 대한 구절이 나왔다. 
나는 머리속에 '쓰면 지는 거다'에 해당하는 어휘를 모은 수첩이 있다. 
그 첫줄에 씌어 있는 건 '융통성'. 
내가 본 어른들이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는 남에게는 '융통성이 없다'고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동시에 그게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내가 이회창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1995년경에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주변의 어른들은 원래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고향 구미 사람들은 김영삼 다음은 김윤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박정희 다음에 대통령이 구미에서 한명 더 나온다나?
(박정희가 대통령되기 전에 구미에서 대통령 나온다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바보 같은 태도였다. 김윤환이 어딜 봐서? 이런 수준이니, "노무혀이는 절대 안 된다"는 장담 덕에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민심은 이회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회창이 통합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을 택하면서, 그리고 민정계 김윤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존경심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내 주변 어른들이 "세력이 없어서 안 된다"던 이회창은 결국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보사태로 김영삼의 역할이 줄어들고 최형우가 쓰러진 뒤 민주계에게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에는 이수성이 후보가 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이 이기더라도
당내 반대자가 많아서 결선에서 뒤집힌다는 시나리오였다.
그해 나온 고원정의 소설도 이수성의 출마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전국에 형님아우하는 사람이 몇만몇천명이라도 소용없다.
김영삼에게 "독단적인 인물에게 미래 없다"라는 말을 듣고도
"비민주적 정당에게 미래 없다"라고 받아친 이회창 정도의 깡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 국민회의 경선에서는 김대중이 정대철을 꼬마다루듯 가뿐하게 꺾고 승리했다.
정계은퇴로 가슴을 찡하게 했던 김대중은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뉴스를 보던 삼촌은 "다시 하는 게 맞지. 그럼 누가 하노?"라고 밝혔다.
몇달 전 그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읽은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갈협박하듯 당권을 내놓으라 하더니 제1야당을 깨버린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6년 총선은 철저히 삼김의 지역분할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그때 내게 '구악'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조순 지지는 유시민의 조순 지지와는 조금 달랐다.
유시민은 당선가능성을 주된 잣대로 삼았겠지만, 나는 민주화나 정권교체에 더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배움이 많지 않고 지금보다도 열 서너살이 어린 나였기에 좌우 구도나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종확정된 대선 후보 중 권영길이 제일 낫다고 한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노무현이 당시에 "조순, 권영길 후보만 도덕적이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한다.

강준만은 옛 정권 출신인 조순을 어떻게 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박정희 추모행사인가에, 김대중이 참석해 재평가 발언을 늘어놓았고,
조순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시나,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 도중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를 선언했고,
조순은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오늘날 김대중은 한미FTA 찬성론자이고 조순은 반대론자이다.
사회경제적 좌우 구도가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은 점은 그때의 강준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순은 드디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며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단안'이라는 낱말을 처음 주워들은 게 이때였다.
다소 연로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는 김대중, 김종필보다 젊거니와, 나이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졌다.
거기에 노무현 등 통추 그룹이 붙어주면 보완이 될 터였다.
지금도 기억나건대, 조순은 등장하자마자 여론조사에서 24%를 얻어 김대중에 1% 뒤진 2위를 했다.
이인제가 떴을 때 지지율이 토막났지만 둘이 단일화를 할 경우 이긴다는 조사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이인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흉내를 내면서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박정희'라는 것은 내게 중요한 준거였다. 내가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 못했던 까닭도 거기 있다.

김대중이 통일과 경제분야에 식견이 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조순은 TV토론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발언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 조순이 단일화하길, 그래서 민주연합이 성사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DJP의 연합이었다.
그때 나는 그룹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선생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다.

1997년 당시에 내가 성인이라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굴 찍었을까?
김대중이나 이인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표 버리는 심정으로 권영길을 찍었거나, 차라리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내게 마지막 변수는 노무현이었다. 갑자기 그가 대선출마를 시사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추의 이인제 지지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때 난 저 사람이 다음에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은 아마 한동안 조순을 지지했겠지만 조순은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나는 노무현이 낄 데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내 눈에는 오히려 권영길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그때 왜 노무현이 김대중을 지지했는지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삼김을 청산하는 것보다는 일단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새 인물들의 등장에 이로웠다.
그리고 DJP연합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서 깨진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한국정치사에 큰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수와 초심을 겸비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능력이었다고 본다.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들을 두고 구룡이니 팔룡이니 말이 많았다.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들 중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정권교체'라는, 저변에 흐르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들이 30대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박태준까지 지지한다니 예전처럼 색깔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선 당일, 아버지는 밤 11시경 "에이, 마 끝났다. TV 끄자"라는 말을 남기고 주무시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을 자고 있는 어머니 눈앞에서 흔들었다.
1987년과 1992년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1997년에는 전혀 김대중 지지의사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까지 욕하는데 찍을 명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시내와 버스 안의 분위기는 촥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노인들 표정은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레코드 가게 종업원 남녀가 나눈 대화다.
"김대중이 당선이 됐네."
"거봐요."
"그렇게 찍자고 하더니. 됐어."
"오빠도 찍었잖아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으니 장사가 잘 되겠어."
"그럼요."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2002년  (1) 2009.07.10
모두가  (0) 2009.07.04
개명  (2) 2009.06.11
소문  (1) 2009.06.08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0) 2009.06.05
:

근원은 PD와 작가의 분리

전파낭비 | 2009. 6. 11. 16:12 | Posted by 김수민

"라디오 진행 몇년쯤 하셨어요."
"6,7년쯤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 프로는 작가 없어도 되겠네."

요즘 도는 대화내용이다. 라디오도 풍전등화인 것 같고, 간판투수인 쇼프로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시사교양부터 정리하는 모양이다. <6시 내 고향>도 작가 없이 진행중이란다. KBS 'PD집필제'가 빚어낸 풍경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성명을 낸 이래 MBC, SBS, EBS의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작가들도 연대에 동참했다. 이동이 잦은 작가들의 보이콧은 예사롭지 않다. 비정규직 및 프리랜서 노동자로서의 저항권을 실현한 셈이다. 물론 반대로, 남들이 마다한 자리 얼른 채어가야 하는 작가들도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이 사태를 초래한 불안정노동 말고도, 근원에 자리잡은 기성 분업체계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D와 작가들이 함께 PD집필제를 놓고 대담한 <미디어오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원고 쓰는 PD가 반드시 유능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PD라도 글 못쓰는 PD 많다. 경쟁력 있는 PD는 프로그램 보는 눈이 있고, 스텝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PD다."
- 김주영 한국방송작가협회 KBS사태 비상대책위원


김주영씨의 지적은 현재 한국방송의 현실에는 부합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기능주의적 관점을 안고 있다. 방송원고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말'을 적는 것이다. 특별한 미문을 요구받지도 않는데도 자신의 방송에 나갈 글을 쓰지 못하는 PD를 원론적으로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작가의 원고를 검토할 역량이 있다면 자신이 쓸 수 있는 역량 또한 있을 것이다. 작가들과 함께 PD집필제 반대에 나선 PD들도 PD의 집필참여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PD가 글 쓸 수 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풍경이 있는 여행>처럼 1인 제작 시스템도 있다. 하지만 이는 PD집필제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글 쓰는 문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는 이른바 PD집필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 김덕재 KBS PD협회장

"PD집필제 시행의 가장 큰 이유는 제작비 절감이다. PD들 놀면 뭐하나 이런 시각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일부 PD가 써도 무방한 프로그램이 있다. <아시아 투데이>의 연출을 맞을 때 집필을 한 적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PD가 현장에서 부딪혀야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녀온 PD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PD집필제로 PD들의 일이 많이 늘었다. 섭외부터 구성, 가원고, 자료조사까지. PD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적되면 힘들 수 있다. 맡고 있는 <역사추적>도 이번 주부터 집필을 하게됐다.
장점도 있다고 본다. 사실 PD들이 게을렀던 부분도 있다. 작가한테 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PD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더 꼼꼼하게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 나원식 <역사추적> PD 



사람들이 흔히 예상가능한 원고작성은 물론, 아이디어를 내놓고 계속해서 촬영화면을 체크하는 등 작가들은 방송에 누구보다 깊이 개입해 왔다. 시사교양프로의 경우 촬영현장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PD보다 확실히 낮은 위상을 가질 수는 없다. 굳이 따지면 작가는 내근 PD고, PD는 현장작가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명문대 나온 사람은 취업공부해서 PD로 입사하고, 작가는 '스펙'에 관계없이 도제 시스템을 밟아 프리랜서 및 비정규직으로 활동했다. 방송 전반을 궤뚫는 두 직종은 서로 배우고 수렴함에도 양자의 과정과 결과가 판이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비정규직은 쫓아내고 정규직은 혹사시킨다는 전형적 구도는 PD집필제를 통해 관철되고야 말았다.

꼭, PD보다 훨씬 많은 작가 인력을 되도록 정규직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PD를 프리랜서화, 비정규직화하자는 이야기도 아직은 꺼낼 계제가 아니다. PD와 작가의 업무와 노동형태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잊고, 현재 프로그램에서 맡고 있는 작업과 앞으로 요청받을 임무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PD와 작가는 다른 직종인가? 다른 직종이어야 하는가? PD집필제를 하려거든 PD에 작가가 포함되는 '작가의 PD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물론 여기엔 방송분야의 정규노동과 비정규노동 전체의 재편이 뒤따라야겠고.) 이런 노력이 단순무식한 인력 정리보다는 훨씬 프로그램의 질 향상에 바람직하게 작용할 터이다.  

듣자하니 남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원고보다 몇시에 무슨 일정을 소화할지 계획표를 써내는 쓸데없는 데 더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거유세에서, 참여정부를 두고 "일을 참 못해요"라고 했다. 누워서 침뱉기격임을 스스로 아는지, 그 말은 방송사 사장한테는 못하는 것 같다. PD도 원고를 쓸 수 있으면 좋다. 이점에서 나름 경영진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머리 맞대기의 창조성을 깨닫지 못한다. 재벌과 신문, 방송, 검찰과 경찰이 머리를 맞대지 않았다면 MB 버라이어티쇼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텐데.

:

개명

Free Speech | 2009. 6. 11. 00:57 | Posted by 김수민

내외가에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품고 사는 애들이 여덟은 된다. 아버지가 꼬박 한나절을 바쳐 작명하는 걸 몇차례 본 적이 있다. 그에게 한글 발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독특한 작품도 별로 없다. 내 생각엔 '우찬'이 그중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이 부모들이 원래 원하던 이름들은 대체로 기각된다. 한자의 획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도 과연 그렇게 지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동학농민군 출신 의병장 金秀敏의 별명은 金守民이었다. 그의 별명이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를 알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작명의 취지는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그야말로 별명으로나 어울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물론 그것을 별명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다른 이들도 각자 그러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일의 시작이자 곧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수민보다는, 숨인이 바르다. 그래서 늘 너무 강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름이 그 발음의 여성성만큼이나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 '저주'에 관해 쓴 글에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사주명리학적 접근을 해보자면 '개운'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개명도 개운의 한 방법이죠. 저도 한자만 바꾼 경험이 있는데..." 나도 개명할 작심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발음이랑 얼굴이 맞아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이젠 그도 아니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건 새 전화번호 하나 정하지 못하는 내가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자라도 바꾸어 볼까 싶다. 자신의 정체를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이름을 자기가 짓지 못한다는 극단적 보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 (이런 생각과 표현, 어디서 읽은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고로, '수민'이라는 단어에는 '수심하여 번민함', '뛰어나고 민첩합'(의병장의 본명이 담은 뜻이다)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 '소금쟁이'도 있지. 이게 제일 멋지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가  (0) 2009.07.04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4) 2009.06.12
소문  (1) 2009.06.08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0) 2009.06.05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0) 2009.06.04
:

소문

Free Speech | 2009. 6. 8. 18:42 | Posted by 김수민

말에 설킨 당사자 모르게 퍼지고 있다면, 그 소문은
발설자 스스로의 처지와 컴플렉스를 실토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뻘소릴 다해놓고 자리가 나오니 말을 뒤집고 덥썩 앉는 사람
그럴싸한 핑계로 돈떼먹고 도망가려다 걸린 사람
팩트의 왜곡으로 불안해진 발밑을 이념과 이론으로 떼우고 넘어갔던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저 사람 욕하고, 이 사람 없는 저 자리에서는 이 사람 욕한 사람

이런 주제에 남의 이미지를 타격하려는 데 나서고 다니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형이나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자기 자신이 정조준당하고 있음을 아는지나 모르겠다. 
남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게 자신을 지키기 편하다는 씁쓸한 원리를 새삼 깨우친다.  

소문을 퍼뜨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당사자 귀에 들어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겠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4) 2009.06.12
개명  (2) 2009.06.11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0) 2009.06.05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0) 2009.06.04
거기선 장사 없다  (1) 2009.06.03
: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Free Speech | 2009. 6. 5. 10:14 | Posted by 김수민

1992년은 정치적 계략이라는 걸 처음 부린 해로 기억된다.

그해 총선 이튿날 <소년한국일보>에는 민자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다고 나왔다.
아버지에게 '과반'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반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총의석은 299석이었고 민자당이 획득한 의석은 149석이었다.

1990년 1월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3당합당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사람 셋이 손을 잡아버린 기가 찬 사태였다. 쇼라고 하기에도 별난 사태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과반을 못 얻었다니... 입안이 고소했다.

나는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정주영 좋다', '정주영 될 수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진짜로 지지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내가 어린 마음에 김대중을 지지한 데는 거창한 이유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었음은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번이 세번째 출마인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선되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71년 박정희와 붙어 46%씩이나 득표했고, 그마저도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까지 했으니 대통령직에 앉는 게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

민자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은 창당 직후 총선을 치른 통일국민당의 선전에 있었고
정주영으로 표를 돌려놓으면, 정주영이 5, 600만표쯤 얻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박철언, 김복동이 정주영을 지지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강원도 뿐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표가 깨지겠구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방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건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정주영에게 표가 쏠리지 않는 원인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현상이다.
단지 반-김대중 정서가 김영삼으로 결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것만이 주효했다면
정주영은 340여만표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니까.
재벌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한, 좌우를 망라한 거부감이 있었을 테고,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카리스마를 쌓은 양김씨를 청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김영삼의 표를 깎았다면, 김대중의 표를 깎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TV에서 한복을 두르고 나온 한 후보를 보았다.
그는 연설 도중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전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역사만화'를 읽어서.
그렇다. 민자당 시절에도 사회적 민주화의 흐름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기완 후보가 김대중 후보와 다른 편인 까닭이 궁금했다. 물론 오래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도 못 미치는,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거둘 것 같았으므로.

친구들이랑 누가 꼴찌를 할까 내기도 했었다. 어떤 애는 이병호에, 다른 애는 백기완에, 나는 김옥선에 걸었다.
결국 이병호에 건 녀석이 과자를 먹었다.

돌아보면 3당합당으로 호남이 포위되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표 당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외숙부가 놀러와서 김영삼이 되는 판이 아니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래도 김대중이 이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희망이었다.

그날 MBC는 개표방송을 재밌게 한답시고 최병서의 성대모사에다가 퀴즈 코너도 개설했는데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 누구냐는 퀴즈는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10대는 최규하고, 12대는 전두환인데 11대는 누구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던 도중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차안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
정주영은 한마디로 '조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를 받았는데, 담당검사가 나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기억이 좀 또렷하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TV를 시청하던 나도 좀 찡했다.
하늘의 공평함보다는 인간세상의 세력판도가 더 세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김영삼의 당선에 실망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 김대중과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었던 정치인이었고
'정권교체'에 못지 않은, 32년만의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신기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을 찔렀었다.
정주영은 찍소리 않고 바짝 엎드렸고, 김대중은 캠브리지 유학을 다녀와 아태재단을 만들었다.
4위를 했던 박찬종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정종식', '정권교체' 대신에 세대교체를 꿈꿨을 것이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명  (2) 2009.06.11
소문  (1) 2009.06.08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0) 2009.06.04
거기선 장사 없다  (1) 2009.06.03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0) 2009.06.03
: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Free Speech | 2009. 6. 4. 15:01 | Posted by 김수민

그해 매일처럼 TV에 아저씨 넷이 나왔다.
그들 각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인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에게 물어 그것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행사임을 알았고, 거듭된 뉴스 시청을 통해 네 후보의 이름과 소속정당을 다 외웠다.

기호 1번은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반면 내 눈에 2번은 불손했고, 3번은 무서웠고, 4번은 칙칙했다. 
10년이 지나서야 찌푸린 3번의 표정이 방송의 편파왜곡보도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후보들의 손동작이다. 노태우 후보는 브이자를 그렸고, 김영삼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0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본인이 03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호감도의 순서는, 1번, 4번, 2번, 3번 순이었다. 
나는 그래서 1번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리 없는 아이였기에
나는 알아서 1번이 당선되는 줄 알았다. 뿐더러 나머지 순위도 기호 순대로 정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버이도 모두 1번을 지지했다.

2002년 대선을 지나 우리 집안에 아주 잠깐 과거사청산의 열풍이 불었다.
그해 숙부들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숙모들은 이회창을 지지했다.
막내 숙부와 숙모는 투표장에까지 가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육탄전 직전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북 지역에서 자라났으나 남자들은 정치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를 '남자의 개혁성, 여자의 수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쟤들은 부부가 따로 찍는데, 당신은 그때 날 왜 말렸느냐"며 아버지에게 따졌다.

사연인즉슨, 어머니는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었다.
물론 어머니 역시 포항에서 자란 분이고 특별히 진보적일 리가 없었다.
그는 1986년 건대 시위 화면을 보며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라고 한마디해 친척 오빠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어머니는 직장에 취업했을 때 거듭 질문을 받았다. 성적이 좋아서 굳이 이쪽으로 오려는 이유를 회사측에서 궁금히 여겼기 때문이다. 사측은 어머니의 고향집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위장취업'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위장취업이란 팔자 좋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다만 그런 어머니도 뭔가 나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중 가장 신선하다고 느껴진 김대중에게 마음이 갔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 동네의 김대중 포스터는 늘 훼손되고 낙서로 뒤덮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되레 역발상을 초래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력하게 "김대중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어머니를 책망했고
별다른 논리를 가지지 않은 어머니는 수긍하고야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당시 세살배기에 불과한 내 동생만을 빼고 세 명이 모두 노태우를 지지했고 두 명이 그에 표를 보탰다.
어머니가 기호 2번에 투표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빨리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중립적 관점의 역사만화만 봐도 박정희가 장기집권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TV에 연일 중계되던 청문회를 통해 망신당하는 전두환을 목격했다.
나는 노태우는 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뉴스에서 "노대통령 사과해야"라는 헤드라인을 봤다.
아주 오랜 뒤에 돌아보니, 그 사건은 윤석양 이병의 안기부 사찰 폭로일 확률이 크다.
이승만만 나쁜 놈이 아니라 현 대통령도 잘못을 하고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른들한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문  (1) 2009.06.08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0) 2009.06.05
거기선 장사 없다  (1) 2009.06.03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0) 2009.06.03
사주 아닌 저주가 나를 자유롭게  (3) 2009.06.01
:

거기선 장사 없다

Free Speech | 2009. 6. 3. 16:34 | Posted by 김수민
"정권교체가 되면 진보정당 가겠다고, 노무현이 그런 말 한 적이 있었죠."
"노무현이 민주노동당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대선 후보로 나왔을까?"

한마디 대답에 자리가 잠깐 뒤집혔다.

"자주파 땜에 못 나왔을 겁니다, 아마."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0) 2009.06.05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0) 2009.06.04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0) 2009.06.03
사주 아닌 저주가 나를 자유롭게  (3) 2009.06.01
고백  (0) 2009.05.27
: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Free Speech | 2009. 6. 3. 04:21 | Posted by 김수민
입장은 좀 달라도,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견결함과 투쟁성과 급진성으로 인해. 그러나 그것들이 매우 손쉬운 선택과 결행이 낳은 산물임을, 그들이 마침내는 물리학 제1의 법칙으로 굴러감을 깨달으면서부터, 그들은 나를 부끄럽게 하지 못했다. 이건 그들의 위기가 아니라 나의 위기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나서련다. 그들은 내게 신물과 한숨을 안겨주던 바로 그 사람들일 수도 있다. 내 경험이 가져다준 환멸은 오히려 나를 뿌리깊은 혐인으로부터 얼마간 해방시켰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0) 2009.06.04
거기선 장사 없다  (1) 2009.06.03
사주 아닌 저주가 나를 자유롭게  (3) 2009.06.01
고백  (0) 2009.05.27
이건희를 이건희라 부르지 못하고  (2) 2009.05.13
:

사주 아닌 저주가 나를 자유롭게

Free Speech | 2009. 6. 1. 17:02 | Posted by 김수민
봉기씨가 내 생년월일시를 알아갔다. 아는 선배의 사주 실습용으로 말이다. 몇시간 뒤 들뜬(?)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예언가는 내 쪽이다. -_- 사주팔자를 볼 때 되풀이되는 경험이 있다. 그것은 나의 성격, 기질, 취미, 적성을 제대로 맞힌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못 믿을 이야기 뿐이다. 사주팔자에 따르면 나는 무지 훌륭하고 대운이 트인 사람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나? 하지만 몇년 지나서 보면 맞는 꼴을 못봤다. 일전에 타로점을 한번 봤는데 앞날을 보는 건 그게 더 정확했다. "열 개 중에 아홉 개를 이뤄도 나머지 한 개가 없다며 다 버리고 다른 길로 가버리는 성격입니다." "얼마 뒤 사귈 여자는 사람 참 정신 사납게 만들 겁니다." 등등. 

평소에 '과학 과학'하는 소리를 가소롭게 여기는 편이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출발점은 현대의학에 대한 나의 불신이다. 나는 가슴이나 갈비뼈께에 형언하기 힘든 증상이 있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고, 잠들 땐 팔로 갈비뼈를 눌러야 한다. 그런데 병원엘 아무리 가도 규명이 안 된다. 그래서 안 간지 꽤 오래됐다. 그러던 어느날 '묫자리'에 얽힌 설명을 들었다. 또 무슨 헛소리냐 싶어 귀부터 후볐지만 들어보니 그 증상이 시작된 시기부터 모조리 딱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방해를 많이 받았을 거다." 심지어 내 동생의 증상까지 맞히질 않나.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귀신이 찾아왔다.-0- 어느날 밤, 내 자취방 현관문의 풍경소리가 울렸다. 문 잠궈놨는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잤다. 누가 내 발을 들었다. 분명히 남이 들었다. 혼자 하려면 복근에 힘을 줘야 올라가는 자세였으니까. 손가락이 발바닥을 누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마사지를.... 가만, 구미에 있는 엄마가 언제 서울로? 이 밤에? 그 순간 손톱이 내 발바닥을 찌르기 시작했고, 나는 베개를 던지며 최민식처럼 "누구냐 너"라고 외쳤다. 내 발께 밑에서 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라져갔다. 몇시간 뒤에 귀신 여섯 명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내 갈비뼈를 누르며 양쪽에 앉아 있었다.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 누구여? 무슨 한이 있는 거요? 말 좀 해보쇼. 좀 그만 괴롭히고."  (이 얘길 들으니까 남들이 나더러 담이 참 크다고 한다. 귀신은 별로 무섭지 않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따로 있다. UFO라고... 국민학교 새내기 때 과학책 읽고 한동안 밤외출을 못한 적이 있다.) 다음날 첫번째 귀신이 사라진 바닥을 보니 내가 옷을 개어놨더라. 귀신이 드나드는 구멍이 옷인감?

벌써 3년이 지났다. 방해, 그러니까 저주는 사주팔자보다 역시나 강했다. 갈비뼈의 증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은 평생동안 고칠 방도는 없을 것 같다. 그외에도 일들이 썩 잘 풀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3년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대세에 불응했지만 운명에는 순응하기로 했다. 안되면, 그냥 안되는 거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중간중간에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결핍과 저 훼방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살아가고 있겠지. 승승장구, 파죽지세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나는 스펙으로 남을 누르는 오만방자함 대신, 노숙을 하더라도 간직할 거만함을 얻었다. 사주를 봐주신 봉기씨의 선배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사주보다 저주를 믿기로 했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기선 장사 없다  (1) 2009.06.03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0) 2009.06.03
고백  (0) 2009.05.27
이건희를 이건희라 부르지 못하고  (2) 2009.05.13
"그땐 어려서 그랬다"는 말  (4) 2009.05.12
:

좌우가 위에만 있는...

Forum | 2009. 6. 1. 08:24 | Posted by 김수민
한국사회에서 하다못해 한나라당이라도 안 찍으려거든, 호남인이 아닌 이상 공부를 (어느 정도 이상은) 잘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매우 불순한 것이다. 불순함에는 좋은 불순함도 많지만, 그 불순함은 나쁜 불순함이다. 기회주의적 권력투쟁이 대거 개입된 결과라는 것이다. 대개 잘난체가 호기심을 추월하고, 자아실현을 인정욕구가 압도한다. 자기를 극복하는 보람을 남을 밟고 올라서는 쾌감이 밀어낸다. 그리고 일상적인 우월감 딱 그만큼 결정적인 시점에서 열폭한다. 저항 엘리트의 변절이 돈 때문이라는 해설은 아무 의미 없다. 이렇게 눈치코치에 젖은 그들에게 저항과 변혁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고기뷔페를 티라노사우루스한테 맡기는 꼴이었다. 좌우는 없고 위아래만 있다? 아니, 좌우는 위에만 있다. 이 질곡을 뚫지 못하면 진보의 진로는 없다. 교육 개혁, 진보교육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건 교육과정에서 한나라당 지지자가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른 말 안 듣는 애, 공부 못하는 애에게 그다운 개성을 발휘할 정당한 기회와 자리를 주는 것이다. 주지 못하면 그들 스스로가 얻어내도록 눈꼽만큼이라도 도와주는 것이다. 이 작업조차 '티라노 좌파'에게 넘어가기 십상이라고 생각하면 물론 또 우울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촛불집회에 모범생 아닌 이들이 많이 나와줘서 고맙고 다행스럽다. 그들이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다 '나서봐야 손해본다'라는 결론에 닿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발등에 떨어진 불로 난리가 났지만, 민주노조운동이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다.

'Foru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지성주의 적대적 공존  (4) 2009.06.18
세대간 연대  (0) 2009.06.18
촛불 잡생각  (1) 2009.05.17
황석영에 대처하는 방법  (0) 2009.05.14
FTA 딜레마  (1) 200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