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이사간 아파트에서 큰일이 났었다. MBC <오변호사 배변호사>의 현장중계차까지 왔다.
아파트 바로 뒷편의 폐수종말처리장 때문이었다. 악취가 나 여름에도 문을 닫아야 했고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야 주민들은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회사의 노조위원장이던 아저씨가 앞장섰고,
노조라면 혀를 차는 우리 아버지도, 그런 우리 아버지가 노조위원장이라고 잘못 소문을 낸 부녀회장 아줌마도,
다함께 머리띠를 맸다.
투쟁상대는 아파트를 지은 건설업체와 허가를 내준 시 당국 그리고 폐수종말처리장을 낀 회사였다.
주민들은 그 회사 정문까지 갔다가 덩치 좋은 경비 앞에서 등을 보이는가 하면,
공장을 향해 크고 작은 플랭들을 내걸기도 했다. 그중의 하나가 이거였다.
"근이야, 이러다 우리 다 죽겠데이!"
자체검열로 원안을 수정한 결과였다.
그 회사는 지금은 분립한, 당시 삼성계열의 회사였다.
그래도 한 공장의 일로 직접적 연관이 없는 재벌총수의 이름을 부를 생각을 다했다니.
집에서 공부하다 심심할 때면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 플랑의 문구를 구경하곤 했다.
결국 그 회사는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처리장을 옮겼다.
요즘, 읽고 있던 책 때문에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이다.
1997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절판됐다. 독서열이 매우 높은 어떤 회사에서 거의 다 사들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씨춘추>.
3년 전 윤종훈 회계사 강연 때, 맨 뒷편에서 씨부렁거리던 중년 사내들을 보았다.
강연회 제목은 내 작품인데, <1987년 이후: 전두환시대에서 이건희시대로>였었나?
어쩌면 그 사내들과 같은 회사 사람들이 책을 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별 두개 달고 정치판을 엎고 나서 세상을 호령하던 자들이 겨우겨우 물러나자
이제 밤 하늘에 별 세개만 트릿하게 떠 있다.
별들에게 물어본다.
근이야, 잘 지내니?
내가 그 아파트로 이사가던 날, 내게 손 흔들던 친구 이름 끝자가 '근'이다.
근이와 내가 살던 동네는 한 기업의 사원주택단지였다.
18평짜리 작은 집이었지만 단독주택과 아파트 사이사이에 나무와 꽃이 수두룩하고
운동장마저 훤히 있었던 그 동네는 나름 멋있었다.
바야흐로, 1990년대 초반은 '정규직 근로자'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학비 혜택은 물론이고 수많은 직원들에게 집까지 주다니.
그곳은 몽땅 허물어진 뒤 지금은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고
내가 네잎클로버를 따던 자리도 없어졌다.
정규직 근로자의 시대는 재벌의 시대에 얹혀 있었다.
얼마 전 어떤 어린이용 잡지의 표지가 인터넷에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작은 난리가 났다.
조또, 별로 충격받을 것도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 정주영과 김우중을 추앙하는 어린이용 저서들이 시중을 풍미하고 있었다니깐.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에
버스 안에서 우연히 박정희 욕을 하는 대학생들을 봤다.
그리고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에
대학생들이 뽑은 '존경하는 기업인 1위'에 올려진
<세상을 넓고 할 일은 많다>의 김우중도 아니고, 탱크주의 배순훈도 아닌
처음 듣는 이름 석자를 들었다.
돌아보면, 어느 틈엔가 한방 먹은 셈이다. 아니 잠깐 막간에 먹은 것도 아니고
늘 먹었던 듯하다.
김영삼은 전 노를 잡아쳐넣으면서 재벌 총수들을 검찰청에 불러냈다.
8년 후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일 무렵, 노무현은 이건희 회장의 불구속을 바란다고 말했다.
며칠 뒤에, 엑스파일 항소심이 있다고 한다.
TK논리, 박정희주의, 노조혐오 등등에 찌들었을 그 아파트 주민들도
'근이'까지는 갔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별 꼴이다.
트리플 별 꼴이다.
추신:
방문자들께 질문 드립니다.
독일에 사는 어떤 예술가들(교포인지 유학생인지)이 'SAMSUNG'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별 그림도 없이, 재즈 음악이 깔려 있고, 메시지만 왔다갔다하는 건데요.
문구는 알쏭달쏭합니다. 존댓말로 되어 있구요.
'뭐뭐뭐 프로젝트'라는 팀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홈페이지를 못 가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덧글 좀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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