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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Free Speech | 2009. 6. 5. 10:14 | Posted by 김수민

1992년은 정치적 계략이라는 걸 처음 부린 해로 기억된다.

그해 총선 이튿날 <소년한국일보>에는 민자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다고 나왔다.
아버지에게 '과반'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반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총의석은 299석이었고 민자당이 획득한 의석은 149석이었다.

1990년 1월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3당합당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사람 셋이 손을 잡아버린 기가 찬 사태였다. 쇼라고 하기에도 별난 사태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과반을 못 얻었다니... 입안이 고소했다.

나는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정주영 좋다', '정주영 될 수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진짜로 지지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내가 어린 마음에 김대중을 지지한 데는 거창한 이유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었음은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번이 세번째 출마인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선되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71년 박정희와 붙어 46%씩이나 득표했고, 그마저도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까지 했으니 대통령직에 앉는 게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

민자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은 창당 직후 총선을 치른 통일국민당의 선전에 있었고
정주영으로 표를 돌려놓으면, 정주영이 5, 600만표쯤 얻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박철언, 김복동이 정주영을 지지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강원도 뿐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표가 깨지겠구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방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건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정주영에게 표가 쏠리지 않는 원인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현상이다.
단지 반-김대중 정서가 김영삼으로 결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것만이 주효했다면
정주영은 340여만표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니까.
재벌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한, 좌우를 망라한 거부감이 있었을 테고,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카리스마를 쌓은 양김씨를 청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김영삼의 표를 깎았다면, 김대중의 표를 깎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TV에서 한복을 두르고 나온 한 후보를 보았다.
그는 연설 도중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전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역사만화'를 읽어서.
그렇다. 민자당 시절에도 사회적 민주화의 흐름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기완 후보가 김대중 후보와 다른 편인 까닭이 궁금했다. 물론 오래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도 못 미치는,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거둘 것 같았으므로.

친구들이랑 누가 꼴찌를 할까 내기도 했었다. 어떤 애는 이병호에, 다른 애는 백기완에, 나는 김옥선에 걸었다.
결국 이병호에 건 녀석이 과자를 먹었다.

돌아보면 3당합당으로 호남이 포위되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표 당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외숙부가 놀러와서 김영삼이 되는 판이 아니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래도 김대중이 이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희망이었다.

그날 MBC는 개표방송을 재밌게 한답시고 최병서의 성대모사에다가 퀴즈 코너도 개설했는데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 누구냐는 퀴즈는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10대는 최규하고, 12대는 전두환인데 11대는 누구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던 도중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차안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
정주영은 한마디로 '조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를 받았는데, 담당검사가 나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기억이 좀 또렷하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TV를 시청하던 나도 좀 찡했다.
하늘의 공평함보다는 인간세상의 세력판도가 더 세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김영삼의 당선에 실망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 김대중과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었던 정치인이었고
'정권교체'에 못지 않은, 32년만의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신기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을 찔렀었다.
정주영은 찍소리 않고 바짝 엎드렸고, 김대중은 캠브리지 유학을 다녀와 아태재단을 만들었다.
4위를 했던 박찬종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정종식', '정권교체' 대신에 세대교체를 꿈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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