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가에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품고 사는 애들이 여덟은 된다. 아버지가 꼬박 한나절을 바쳐 작명하는 걸 몇차례 본 적이 있다. 그에게 한글 발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독특한 작품도 별로 없다. 내 생각엔 '우찬'이 그중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이 부모들이 원래 원하던 이름들은 대체로 기각된다. 한자의 획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도 과연 그렇게 지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동학농민군 출신 의병장 金秀敏의 별명은 金守民이었다. 그의 별명이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를 알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작명의 취지는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그야말로 별명으로나 어울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물론 그것을 별명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다른 이들도 각자 그러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일의 시작이자 곧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수민보다는, 숨인이 바르다. 그래서 늘 너무 강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름이 그 발음의 여성성만큼이나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 '저주'에 관해 쓴 글에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사주명리학적 접근을 해보자면 '개운'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개명도 개운의 한 방법이죠. 저도 한자만 바꾼 경험이 있는데..." 나도 개명할 작심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발음이랑 얼굴이 맞아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이젠 그도 아니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건 새 전화번호 하나 정하지 못하는 내가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자라도 바꾸어 볼까 싶다. 자신의 정체를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이름을 자기가 짓지 못한다는 극단적 보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 (이런 생각과 표현, 어디서 읽은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고로, '수민'이라는 단어에는 '수심하여 번민함', '뛰어나고 민첩합'(의병장의 본명이 담은 뜻이다)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 '소금쟁이'도 있지. 이게 제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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