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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5

전파낭비 | 2009. 7. 18. 17:39 | Posted by 김수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5가 17일 종영됐다. 당초 16회 분량이었지만 시청자들의 요구로 20회까지 늘어났다. 시즌 5가 시작할무렵 나는 시즌 1의 1회부터 보기 시작했다. 80회 이상의 전편을 본 셈이다. 김현숙씨가 사촌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을 정도가 됐다. 시즌 6을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막막하다. 내가 팬이 된 까닭은, 리얼 드라마 형식의 독특한 재미가 있고, 연기력 빵꾸가 나지 않았으며, 여러 등장인물로부터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이영애(김현숙)는 그리 불행하고 불운한 인물은 아니다. 설정상 중산층으로 되어 있지만 집안을 들여보면 잘 사는 편이다. 항상 골치가 되는 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꼬이고 뒤틀리는 러브 라인이다. 거기에 시즌 5에서 계약직으로 내려앉은 노동조건이 추가된 정도다. 하지만 그녀가 외모적 소수자로서 마주치는 불이익은 만만하지 않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그녀는 따지는 과정에서 항상 "아줌마" 소릴 듣게 되고, 이것은 그녀가 핸드백을 휘두르는 도화선이 되고야 만다. 이영애는, 그러니까 김현숙은, 정말이지 제대로, 속시원하게 '팬다'. 그는 주변 인물들과도 돌아가면서 쉴 새 없이 싸우는데, 내가 발견한 이상한 점 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제부 김혁규(고세원)와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고, 대화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시즌 6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부각됐으면 한다.

대화가 많지 않은 영애와 혁규. 가끔 이렇게 위협감을 느끼는 정도?



여러가지 애로사항에도 불구 내가 이영애를 행운녀라고 여기는 이유는 친구의 존재다. 학교 동창이자 직장 동료인 변지원 역은 도지원(동명이인데 나이가 덜 든 쪽)이 맡았다. 이 배우는 이목구비가 참 예쁘다. 하지만 <용의 눈물>에서 세종대왕비 심씨로 나왔던 12년전과는 판이하게, <막돼먹은>에서는 망가질대로 망가진다. 예쁘긴 하지만 키가 작고 돌아이(돌아온 이혼녀)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또, 집안이 엽기적으로 지저분하다. 아, 동질감!

반면, 내가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 인물이 정지순, 일명 개지순이다. 얻어쳐먹는 건 좋아하지만 식사를 사는 법이 없으며, 아부에서 비아냥까지 미움받을 만한 짓은 두루 하고 다니고, 처음에 여자한테 치근덕댔다가도 여의치 않으면 바로 깡끄리 무시한다. 얼마 전에는 사면발이에 걸려 "사발면이 생각난다"고 놀림받는 등 진상의 극치에 이르렀다. 이러다 보니 참다못해 그를 때린 직장동료도 부지기수다. 아마 나라도 한방 먹였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무거운 짐에 힘겨워할 때, 과거 사랑한 여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 눈물흘릴 때야말로 드라마의 가장 슬픈 장면이 연출된다. 물론, 연민도 잠시, 그는 또 개지순으로 돌아가지만. 이 배우의 등장은 연기적 측면에서 <막돼먹은>이 거둔 최대 수확이다.

영애와 어머니가 한 화면에 잡힐 때, 가끔 유체이탈인 줄 알고 허걱하는 경우가 있다. 시즌이 뒤로 올수록 그렇다.



시즌 5에서는 청년실업자, 계약직, 인턴 사원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고용과 노동 문제를 비추기도 했다. 워낙에 유행어가 되어 별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88만원세대'라는 문구도 자막으로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누군가가 해고된다는 예고를 담고 있는데, 이외에도 여러가지 돌발변수들이 갑자기 나타나 시즌 6이 어떻게 흘러갈지 엄청난 궁금증과 조바심, 그리고 '자칫 막장드라마로 변하지 않을까' 약간의 걱정 안겨다주며 시즌 5가 끝났다. 시즌 6을 만든 건 8할이 시청자의 공로인 만큼 그것이 마지막 시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로 시즌 6은 당연히 러브 라인을 정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같다.

영애와 설킨 남자는 예전 직장후배였고 이미 두차례 사귀며 친숙해진 '도련님' 최원준과 상냥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던 디자인 과장인 장동건(이해영). 영애 곁에 최후에 남는 남자는, 제작진이 구체적인 결말을 다 정해놨을 공산이 높으나, 내 생각엔 시청자가 좌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가을에 시청 소감 게시판에서 한판 벌어지면 흥미진진하겠다. 구경만 할 계획이지만 나는 장동건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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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납북도 월북의 일부

史의 찬미 | 2009. 7. 17. 15:33 | Posted by 김수민
"사상범으로 몰려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왔습니다."(잊혀진 '납북 제헌의원' 40여명) 얼핏 남로당이나 보도연맹 연루자 유가족의 증언 같지만, 김영동 제헌의원 아들의 증언이다. 1969년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도 김 의원은 제외됐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재산가이며 따라서 좌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막노동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북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과 월북을 구별할 수도 없는 주제에 둘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북조선이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북측이 마련한 첫 방송연설에 나선 남측 인사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 송호성이었고, 그 다음이 제3대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었다. 반공반북의 핵심인물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잔류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안재홍, 조소앙 등이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한 데 비해, 김효석의 연설이 지나치게 비굴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다들 전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연설에 나선 결과지만, 북측에서 생명을 위협하거나 내용을 일일이 강제한 정황은 없었다는 게 연구결과다. (이신철, <북의 통일정책과 월 납북인의 통일운동 (1948~1961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대학원 박사논문, 2005)

제헌 국회의원들은 미제의 무력침공 반대를 골자로 하는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서도 서명했는데,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원세훈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김영동 의원의 이름도 올라가 있다. 단 국회프락치 관련자들은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평양으로 떠나 있었다. 해서 그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후일 제기되었다. 납북인사들의 활동을 증언했던 신경완도 소장파들이 북측의 성시백과 연결되어 활동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규식에 이어, 북측에 의해 마이크를 잡았던 김약수는 이승만 정권이 국회프락치 사건을 날조했다고 규탄했다. 이승만 정권을 견디고 있던 좌익이 월북했다는 것,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이 납북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 당사자들에 이르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그들이 진짜 프락치일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북으로 넘어가게 만든 1등공신이 이승만 정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6.25 직후 유력인사들이 서울에서 가진 방송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김영동을 비롯한 관련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6.25 직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가 도강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해 있었다. 설마 자신한테 북측이나 좌익이 심하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전쟁이 터졌을 무렵 야구장에서 태연히 앉아 있던 서울 시민들도 있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초기는 수없는 국지전 끝에 남침한 북조선에게 내전조차도 아니었다. 전쟁으로 이남을 먹겠다는 태도보다 서울을 잡으면 국토완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뚜렷했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평양에 '모셔진' 인사들도 나중에 서울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6.25는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선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다.

해방정국기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재밌는 대답이 떠올랐다. "북조선에 살았으면 월남했을 것이고, 남한에 살았으면 월북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 자리를 옮긴 뒤로는 사상적 건전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내 새로 만난 체제의 주류와도 불화했을 터이다. 남에서 북으로 간 김원봉이나 북에서 남으로 간 장준하처럼. 통일된 조국에서라면, 혹은 평화적 분단체제에서라면, 중도좌파나 중도우파로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런 경로를 밟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조선은 다양한 사회주의세력과 홍명희 같은 중도파까지 껴안고 있던 체제였다. 처음부터 강성 독재는 아니었다. 백퍼센트 자발적 월북이더라도 그것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거푸 말하지만 납북이든 월북이든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독재와 한국전쟁의 상황에 의해 북으로 내몰린 것이다. 어찌 됐건 '선을 넘어갔다'는 사실만이 오로지 명확하다. 월북을 폭넓게 해석하면 납북인은 그 하위 분류인 셈이다. 월북과 납북의 구별은 난망할 뿐더러 의미가 별로 없다. 북조선에서 호의호식한 게 아니라면, 김영동 의원을 비롯한 월납북인들은 남한 정부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반민특위에 투신했던 김 의원이 사후에도 벗어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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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껍

Free Speech | 2009. 7. 15. 17:58 | Posted by 김수민
소리나 촉감이 아닌,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깬 적이 있는가? 당연히 다들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는 맛있는 아침 냄새가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코에 의해 깨어나 눈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글쎄 방안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지 뭔가. 불이 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시껍하고 작은 집안을 돌아다녔다. 원인이 될 만한 건 담뱃불이 유일한데, 그것은 화장실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전말을 깨달았다. 아랫집의 연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랫집에 사는 원룸 주인 아줌마는 바깥 수돗가에서 생선을 태워먹은 프라이팬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화제가 아님을 확인했음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연기는 끊이지 않아서 나는 베란다 창문을 닫았고, 방안에 들어온 연기는 반대편 화장실쪽 창문으로 나가길 거부하며 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연기가 완전히 빠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냄새를 참으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생선비린내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못다한 잠을 청한 뒤, 꿈 속의 나는 넓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서 끄느라 고생을 했다. 아직도 방에는 비린내가 감돈다. 황사 등 자연현상에서부터 신자유주의 금융위기 같은 인재까지... 이 나라에도 연기가 자욱하고 비린내가 진동한다. 윗집 아랫집 가릴 처지가 못 된다. 특히 연기는 위로 뜨기 마련이라는 걸 '윗것'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행진이 예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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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라디오, 뉴규 아이디어냐규

전파낭비 | 2009. 7. 15. 02:04 | Posted by 김수민

김대중의 말은 논평과 거의 비슷하다. 노무현이 대변인이던 시절 막히는 게 있으면 동교동으로 가서 김대중 총재의 말을 들었는데, 그냥 받아적어도 논평감이었다고 한다. 사상시비를 비롯해 여러 음해를 받았던 정치인으로서 제 말이 활자화되었을 때를 충분히 대비하는 자세 덕일 것이다. 반대로 노무현은 활자매체에서는 두드려맞기 딱 알맞은 스타일이나, 영상매체에는 대단히 부합한다. TV앞 정치인은 진실하고 생생하면서도, 카메라 앵글에 잡기 좋은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 정동영과 김근태는 잘해야 둘 중 하나만 갖춘 경우다.

이명박의 부상에는 활자(신문)나 영상(방송)보다는 입소문이 크게 좌우했다. "청계천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카더라."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다 카더라." 어차피 그를, 그가 출세한 기업인임을 모르는 대중은 드물었다. 이명박캠프의 유능(!)한 기획가들은 플래카드에서 원래 그의 얼굴을 뺐다. 고지가 눈앞인데 괜히 비호감 키울 일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명박은 그나마 영상으로 보는 게 낫다. 얼굴은 별로면서도 목소리가 의외로 유려한 이들이 많지만, 이명박은 그것도 아니며 음성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 공영방송 라디오에 나와서 국정을 홍보할 권리는 있다. 노무현은 이상하게도 그 방법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으로서는 라디오 출연이 패착이었다. 본인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을 수도 있지만, 혹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건의한 자는 누구일까? 무능하도다. 

 

루스벨트가 가진 재능을 설명하려면 그가 좋아했던 의사소통 수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라디오였다. 친밀성과 직접성은 매체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라디오는 지도자에게 가자 친밀한 사회 단위인 가족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그 가족 구성원들 각각에게 친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하여 청취자들은 더 이상 연설가가 아닌 화자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중략) 라디오 청취자들은 루스벨트가 "황금의 목소리", 즉 "신선하고", "유쾌하고", "풍부하고", "재치 있고", 그리고 "선율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속성들을 루스벨트라는 한 인격체에 이입시켰다. (...) 1940년대의 한 수사학 연구자는 "만약 허버트 후버가 마이크에다 (루스벨트의 취임 연설과) 똑같은 단어들을 말했다면...... 주식 시장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며 그와 함께 국민의 신뢰도 붕괴했을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중략) 마치 시대착오적인 커다란 제스처를 사용하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이익을 었었던 것과 같았다. 장엄한 수사학적 양식이 없는 루스벨트의 연설 방식은 라디오 시대에는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루스벨트의 성공은 단지 선천적인 재능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라디오 연설들은 주의 깊게 구성되었으며 체계적으로 연습되었다. 히틀러가 거울 앞에서 제스처를 충분히 연습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는 발음, 억양, 속도, 숨 돌림 길이, 그리고 단어 선택에서 다양한 변화를 실험하면서 자신의 노변정담들을 연습했다. 그의 기본적인 규칙들 중 하나는 미국식 영어에서 어디에서나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목소리에서 실제 연설에서는 거의 포착하기 어려운 경미한 쇳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라디오 연설을 하기에 앞서 항상 의치를 했다.

(중략) 루스벨트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프랜시스 퍼킨스는 백악관에서 있었던 노변정당의 녹음을 회고하면서 "마치 그가 실제로 청중들과 함께 현관의 베란다, 혹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밝았다"고 말했다. 청중들의 반응도 거의 똑같았다. 루스벨트의 보좌진들 중 한 사람이 백악관에 돌아와서, "이 아래 있는 모든 국민들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들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고 보고했다.

- 볼프강 쉬벨부시 (차문석 옮김),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지식의 풍경, 2009, 86~91쪽.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더니 루스벨트가 아니라 이명박 '후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청와대 학동들이여, 날로 먹을 꿈도 꾸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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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연애

Free Speech | 2009. 7. 14. 18:35 | Posted by 김수민
어떤 진보적인 친구는 한나라당 지지자는 물론이고 민주당 지지자인 여자와도 사귀지 않겠다고 했다. 작년만 해도 그랬는데 나는 경악한 나머지 일장훈시를 늘어놓고 말았다. 한편 나는 일전에 어느 보수적인 친구에게 "운동권 여자와는 연애 안했다(안한다)"고 밝혔다가 '이중적인 놈'이라는 우스개 섞인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운동권 여자와 '연애해야 한다' 혹은 '연애하는 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알 수 없는 환상, "운동권은 싫어도 왠지 운동권 여자에게 끌린다"에 답변을 했을 뿐이다. 뭐, 그렇게 살았다. 동지애와 연애가 결합하는 것이 경이롭거나 또는 편안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가급적 사적 영역이 일과 떨어지기를 바랐다. "말이 잘 통하면 좋지 않느냐"고들 하지만 운동권이라고 해서 말이 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주관이 강해 오히려 벽 보고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되기 더 쉽다. 노선의 차이보다는 그것이 일상에 가져올 스트레스가 더 염려스럽다. 물론 무엇보다도 나는 사실 꾸준히 만나다가 누구를 좋아하기보다는 한눈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좋아했고 연애도 그런 식으로 해온 데다가, 특히나 내가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정파는 다른 곳보다 여성 비율이 확연히 적어서 자연스레 연애는 '딴데'서 하기 마련이었다(요즘은 정치하고 별 관련없는 여자들이랑 잘 지낸다. 덧붙이자면 그들이라고 고민과 철학이 없는 게 아니고, 또 나름대로 정치적 소신도 있는 경우도 많다). 어제 만난 한 친구는 운동단체에서 만난 사람과는 연애를 안 할 거라고 했다. 그에게 별달리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 중에 여자 한명만 오면 법석을 떨고 얼굴이나 몸매가 조금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뻘닭짓을 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운동조직 뿐이 아니다. 특정집단내에서의 연애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걸 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당사자 일인에게나 조직문화에게나 이롭지 못한 풍경을 자주 보았다. 사실 조직문화보다도 개인에 더 해로운 일이다. 자신이 죽치기 쉬운 집단, 제 뽄새가 먹히기 좋은 영역에 안주하면 하릴없이 딱딱해지거나 쓸데없이 물컹해진다. 내 개인적으로도, 대학 새내기 시절 다른 학교 여자를 안 만나본 게 조금 후회되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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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단체를 탈퇴한 이유

Free Speech | 2009. 7. 11. 16:16 | Posted by 김수민
친구가 한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상근자는 아니었지만 컴퓨터 앞에서 매일 오전을 꼬박 바쳐 일했다. 그는 타자를  시끄럽게 치고 백스페이스키도 엄청나게 많이 누르는 덕분에 민폐도 좀 끼쳤다. 급여는 70만원 가량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일은 그 단체의 핵심근무였고,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 그것은 사무실에서 공동작업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상근자들은 왜 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더 큰 문제는 초과노동이었다. 툭하면 그에게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논평을 써달라, 논평을 썼는데 교정을 봐달라,는 청탁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간사들은 무얼하고 있느냐고.

요즘 '사회적 경제'가 곧잘 회자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면 '시장 이하'의 공간이 하나 더 생길 뿐이다. 기업을 그따위로 운영했으면 벌써 탈이 났을 것이다. 만만한 사람 하나 잡히면 부려먹는 건 이 바닥의 습성인가. 부려먹기에 근태까지. (예전 책자를 하나 썼다가 고료 백만원을 떼어먹힌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나서야 털어놓는데, '조아세'라는 단체였다.)나는 근무평점을 매기기로 작심했다. 그 단체를 탈퇴했다. 만원의 응징이다. 이 만원을 보내줄 새로운 단체도 정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탈퇴를 해야 할런지. 내 자신이 징글맞고, 사람들이 너무 징그럽다. 해결의 편을 자임한 문제의 편들. 너희 안에 이건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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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2002년

Free Speech | 2009. 7. 10. 04:04 | Posted by 김수민

공사를 떡자르듯 나눌 수 있겠느냐마는 '대선의 기억'은 사적 체험을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 편은 많은 내용이 누락된다. 그해의 기억은 대부분 공적 체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2002년 6월은 말많고 탈많은 달이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때, 나는 동료들과 곤욕을 치렀다.
송복 교수 퇴임식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앞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문옥 후보를 지지하는 칼럼을
쓴 것이 사전선거운동으로 신고되어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담당 형사는 자기가 봐도 선거법이 좀 무리가 있다며
기소유예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두번째 경찰서를 찾았을 때 그의 낯빛은 좀 어두웠다.
물론 "벌금 나오면 내가 그 액수만큼 술 산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6월 말 검찰에게 불려갔고, 8월에 재판을 받았다.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판결이 나왔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내가 지지했던 후보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정몽준과의 단일화 내지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를 추진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부터 2004년 총선까지 개혁이 대세였지만,
2002년 6월부터 11월까지의 그 기간만큼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절망 속 몸부림을 통해 개혁당이 등장한 것도 그 시기였다.

다른 글로 여러번 밝혔지만 노무현 후보를 옛날부터 지지해왔다.
중학생 시절 나는 지역주의에 맞서는 개혁파 정치인이, 적어도 내가 쉰살이 되기 전까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나는 노무현이 포스트 삼김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직감했고 2002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되리라고 예측했다.
2001년 당시 친하게 지냈던 형들과 계속 입씨름이 이어졌다. 나의 예측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노풍이 불었을 적에는 용한 점쟁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얼빠진 정몽준바람으로 대선판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더이상 낙관할 수가 없었다.

결국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1%도 없다"던 노무현은 후보단일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줄곧 후보단일화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때부터는 맥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권영길을 지지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동안 지지했던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 총학생회를 뽑는 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본 어느 선배들과 술자리를 하던 밤,
노무현이 단일화승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시민운동을 하면서 겪던 고충과
정치판을 바라보며 느낀 환멸이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관할 일은 못되었다. 정몽준과 함께 정권을 꾸려야 한다는 점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것은 개혁당을 비롯한 신개혁세력과 동교동계 및 정몽준세력과의 향후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현대노동자들의 싸움을 거들었던 변호사였고, 정몽준은 현대재벌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그 이념차보다 훨씬 컸다. 인간적으로는 차라리 이회창과 노무현 간의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겉으로는 웃어도 돌아서면 서로 욕할 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 조화를 이루면 더 문제다. 노무현 정부가 꽤 보수화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정몽준이 국무총리라도 된다면 그 꼴을 어떻게 참고 볼 것인가?

그렇지만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은 나의 군걱정을 비웃었다.

2002년 12월 18일 밤, 나는 혼자 있었다.
'어차피 내일 판이 거나하게 벌어질 테니 하루만 참자.'
그래도 술 생각이 나서 고시원 방에서 캔맥주 두개를 비웠다.
그냥 자려니 뭔가 아쉬워 컴퓨터실에 들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마침 후배 하나가 메신저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후배가 '어 이런 일이...'라면서 대화가 멎었다. 
"무신 일?" 
"정몽준이... 단일화를 파기했대요." 

옆 TV실에서 속보 자막을 확인했다. 그즈음 TV실에 모인 고시원 사람들은 다들 대선에 관심이 있었다. 
하루는 신해철의 찬조연설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다른 채널이 나오고 있길래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리모콘으로 SBS를 틀었고 신해철이 등장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걸 보려고 모였다가 차마 말을 못 꺼냈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었으니 TV실에서 대선 관련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 C형과 통화를 했다. 그는 최후의 명동 유세 직전까지 선거운동을 함께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조짐은 전혀 눈치를 못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거... 우리가 이기면 대박이다. 혹 떼는 거다."

TV실을 나와 다시 컴퓨터실에 들렀다. 인터넷은 들끓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가 다운되었고,
단일화파기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나 전단이 유포되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나는 선관위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둔 뒤 스르르 고시원을 나섰다.

고시원 주변의 연희3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신촌으로 나가서 길바닥을 쏘다녔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녹색극장 맞은편의 조선일보 지국이 나왔다.
새벽부터 분주한 배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단이나 신문은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6시경 고시원에 들어왔다. 

고시원에는 망할 놈의 <조선일보>가 들어왔다.
나는 자기 직전 사설을 확인했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에서 논평을 맡고 있던 나는 최후의 한편을 연세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그리고 <조선일보>를 버릴 것이다."

점심께에 일어나 연락을 받았다. 출구조사에서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시간 뒤에 다시 온 메시지. "이기기 시작했다."

투표마감을 기해 나는 개혁당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전에 머리를 깎으러 길을 나섰다.
그 와중에 친구와 통화를 나누었는데 "남한이 섬나라가 되면 쓰겠냐"고 한마디하는 찰나
어떤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여! 남한이 섬나라가 된다니!"
척 보기에도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이미 술이 취해 있는 아저씨였다.
나는 순간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길바닥에서 나는 그와 실랑이를 시작했고,
그도 나를 독하게 붙들었다.

한창 옥신각신하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대북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남한이 섬나라처럼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젊은이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지금 너무나 걱정이 돼.
나 술 한병 사가지고 집에가서 또 마실 거야. 대통령선거 결과 보고."
노무현이가 되면 좋아서 축배를 들 거고, 이회창이가 되면 쓴잔을 마실 거여.
이회창이가 되면 박정희시대가 또 온다 이 말이여. 나 그럼 한국에서 못 살아.
차라리 중국엘 가지."

이회창이 되어도 박정희시대만하겠냐는 내 응답에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나는 노무현이 될 거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정몽준이가... 약속을 깼는데 될 수 있을까?"
"아까 여론조사 보니 이기고 있답니다. 오후엔 젊은층이 투표를 더하니까 차이가 더 벌어졌을 거예요."
"진짜지? 나 중국 안가도 되는 거지?"
"그럼요. 집에서 기분 좋게 한잔하세요."

그 아저씨와 헤어지면서 깨달았다. 어휴, 이러니 이회창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잖아도 2001년, 2002년 택시기사들이 이회창 욕을 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반감과 심판의지가 높아져가던 시점에도 그랬다.
예비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그를 마치 심판해야 할 현직대통령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반창정서가 반DJ 정서를 압도하리라고 예상했다.  
더구나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부상하면, 이회창은 김대중정권의 퇴장과 함께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우리 일행이 들른 술집에는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월드컵 때 재미 좀 봤겠다 싶었다.
우리는 주인에게 MBC를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투표마감 1분전이었다. 출구조사 결과를 직전에 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참이었다.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택시를 잡아 여의도 개혁당 당사로 갔다.
유시민 대표를 포함해서 당원들이 TV앞에 앉아 있었다. 각 지역별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시민은 해설자처럼 한마디씩 날리고 있었다.

개표방송 시청도 월드컵응원 못지 않았다.
초반에는 뒤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뒤집을 것이고, 가장 불리한 대구경북 지역이 일찍 함을 깠다는 생각에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표차가 줄어들 때마다 사람들은 "으랏차차~" 함성을 질렀고,
영남 선거구 중에 '30%' 이상의 득표율이 나온 곳이 있으면 손뼉을 쳤다.

마침내, 뒤집어졌다. 맥주를 뜯으며 노무현을 연호했다. 나를 비롯해서 다들 목소리에 약간 울음이 배어나왔다.
무슨 대선이 이렇게 험난하다는 말인가. 그 파란만장했던 1년을 뒤로 하고 개혁당원들은 기차 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가 개혁당사를 방문했을 때,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학생당원들끼리 신촌으로 다시 몰려가 밤새 술을 마셨다. 
자고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뒤에는 안티조선 진영 활동가들이 대학로 모처에 모여 크지는 않은 송년회를 벌였는데
축제 분위기였다. 노무현 지지자인 명계남이나 민노당원인 홍세화나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해 연말은 매우 들뜬 분위기에서 보냈던,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3개월 앞으로 다가온 군입대 탓에 다소 심경이 복잡하기도 한
시절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단일화하고 악연이 있는 것 같다.  
그 시작이 그해였다.

만일 노무현 정몽준이 단일화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무현이 떨어졌을 것이다. 2등 아니면 간발의 차로 3등. 2등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몽준은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니까.

3자구도로 끝까지 갔다면 분명 이회창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국정치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때 이회창이 되는 게 차라리 더 나았으리라는 웃기는 이야길 종종 듣곤 한다.
지랄 쌈싸먹는 이야기다.
노무현이 좋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 일개인으로만 치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노무현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은 실패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2007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등의 한계를 일찍부터 내보였지만
오바마와 임기를 함께하였다면 그래도 조금 더 수월하게 임기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파병은 안했을 것이고, 한미FTA 가능성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회창 정권 5년동안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었어도 독재나 공안정국은 안 왔으리라고? 도대체 근거가 뭘까?
그건 현재의 이명박 정권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무슨 박정희 정권처럼 20년 가까이 갔나?
달랑 5년했는데 이회창이 지금의 이명박보다 나았을 것 같나? 
북핵사태가 터지고 북미전쟁까지 점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는 게 민주화에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의견은
한마디로, 겉으로는 노빠 아닌 척하는  
실제로는 지극히 노무현적인 관점이다.
나는 이런 류의 좌파들이 광적인 노빠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2007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문국현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 찍어줄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명박이 되는 건 보다는 얼마간은 낫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어떤 이가 "그래서? 정권 실패하고, 진보진영은 또 덤터기 쓰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웃기는 착각이라는 걸, 그도 최소한의 기억력과 관찰력이 있다면 알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폭주 때문에 진보진영은 되레 반한나라당 담론으로 휩쓸리는 형국이다.

촛불시위 때 이명박 땜에 신난 사람들 있었을 것이다. 역전승 한판 꿈꾸면서 말이다. 
목적이야 정권퇴진이지만,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 그래라.  
노무현 정권 5년동안
김대중 노무현세력은 반한나라당 반사이득 볼 생각하지 말고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잘했어야 했고,
진보진영은 노무현이 잘하든 못하든 멋지게 살아나갈 길을 뚫어야 했다.  
그때도 못한 놈들이 이명박 정권 때 그걸 해? 
그래도 못한 놈들이 이회창 정권을 버틸 자신이 있나? 

 
얼마 전 어떤 개새끼가 이 블로그에
허세욱의 죽음은 고귀하고, 노무현의 죽음은 눈물 한방울 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냐는
요지의 댓글을 달았다.

너는 허세욱씨를 한번이라도 애도한 적 있니?
라고 묻는 건 너무나 사치스럽고,
너는 지금 우는 게 자랑스럽니? 지금 그럴 때니?
라고 되묻고 싶다.

노무현은 아직 있다.

노무현은
스승이자
적이고
경쟁자이다.

나는 진보진영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명박을 적수로 생각하지 마라."
"김근태에게 경쟁의식을 느끼지 마라."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노무현이다."

그것은 양쪽 모두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여기 끼어들어 망치는 놈들을 내쫓을 때까지
감상적 슬픔은 보류한다.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다.
나는 예전 오랫동안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그가 오른쪽으로 내가 왼쪽으로 가면서 그를 규탄하던 시절이 최근에 있었다.
그를 지지한 대가로 나는 진보와 개혁의 낙관주의를 잃어버렸고,
그는 대통령이 된 대가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하고 아플 뿐이다.
노무현을 한번도 지지하지 않았던 좌파나
지지한 이후 무조건 그를 따랐던 사람들보다
나 같은 사람이 더 한 것 같다.

2008년 초, 노무현 정권기 죽고 다친 분들과 그 친지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정치칼럼 연재를 끝맺은 내가
노무현이 다치고 죽는 꼴까지 봐야만 했던 것이다.

노무현시대, 노무현 정부보다 더 나은 
시대와 정부가 오기 전까지
나의 상처는 씻기지 않을 것 같다.


2007년 대선은 쓸 만한 사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이걸로 대선의 기억을 다룬 잡글은 마무리한다. 


추신: 
그의 비문으로는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가 노무현' 또는 그냥 '노무현'이 더 바람직하다.
비문 작업에는 황지우, 유홍준씨가 참여했다는데
이들도 이젠  예술행정가일 뿐, 예술가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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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복과 조끼

Forum | 2009. 7. 4. 21:16 | Posted by 김수민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지만 문민 지도자다. 그점에서 김일성과 가장 다르다. 김정일이 군복 입은 모습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인민복을 택했다. 이 또한 정장 차림이었던 제 아버지와 다른 부분이다. 중산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은 노동계급 친화성을 상징한다. 김정일의 인민복 착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체제의 안정과 결속을 기도했다는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민복이 대외적으로는 악효과를 낳았다고 추측한다. 바뀌지 않는 춘하추동복은 그의 파마 머리와 키높이 구두, 선글라스와 어우러지며, 게베라, 카스트로, 후세인과도 비하기 힘든 엽기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낳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정장이나 캐쥬얼 또는 군복을 입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렇게 해봐야 카스트로의 면도에 필적하는 충격만을 낳을 것이다. 대내적인 위상도 실추될 것이다. (영도자의 위엄을 너무 높고 굳게 잡아두어 나중에 고칠 수 없는 것이 쿠바나 북조선의 약점이다. 장기집권에 대한 설명-"서구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볼 일 아니다"라는 것 역시 되레 그 체제의 뒤떨어짐을 토로할 뿐이다.)

위는 비정규직법 회담에 참석한 노동운동 대표들의 조끼를 보고 이어진 생각이다. 수십년간 화면에 비친 김정일의 인민복은 더이상 노동계급의 유니폼이 아니고 이제는 노멘클라투라의 상징이다. 지금 조끼는 어떠한 의미인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와 노동운동가의 거리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거리보다 훨씬 멀고, '조끼'는 아직 그것을 입어보지 못한 다른 노동자들에게 남의 패션일 뿐이다. 물론 투쟁하는 운동가의 심벌은 노동자가 정치인이나 자본가와 테이블에서 맞겨루기하는 중이라는 걸 한눈에 내보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같은 계급에게나 다른 계급에게나 고정된 이미지로 다가간 결과도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조끼가 촌스러우니 벗으란 이야기가 아니다. 벗는 게 더 유의미해질만치 너무 입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얼핏 사측이라는 오해를 받더라도 노동운동가가 정장을 입고 나올 수도 있고, 치마든 청바지든 면바지든 반바지든 얼마든 입고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노동자와 약자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고 대화하는 운동가들에게, 미사일로 동해에 물수제비를 뜨는 나라의 지도자를 들먹여서 죄송하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불안정노동을 겨눈 사회적 담론이 확산되길 빈다. 그러면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끼입고 팔뚝흔드는 일쯤으로 취급받을 가능성도 점차 녹을 것이다. 다원주의 또는 종다양성은 여유 내지는 사치가 아니라 훌륭한 생존의 방식이다. 앞으로 노동운동의 생명력은 이 이치에서 나올 것이다. 나는 세대교체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아직은 현장 운동가들에게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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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Free Speech | 2009. 7. 4. 03:19 | Posted by 김수민
"모두가 숙련노동자이자
단순노동자이자
농민이길 바랍니다."

얼마 전 'PD와 작가의 분리'를 따져든 이유도
크게는 저기에 답이 있다.
세상 전체가 공장이나 시장은 아니다.
잘못된 분업은 흐트러뜨리고 지워야 한다.
내가 지닌 어떤 다른 지향보다도 더 먼 길을 가야 이뤄질 테지만
이건 유토피아를 향한 몽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억압과 차별을 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변함없이 그려본다.
모두가 숙련된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누군가는 해야 할 단순노동을 모두가 즐겁게 나눠지고 
죽어가는 농촌에 드나들며 우리 모두 소농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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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기 있을게

Listen to the 무직 | 2009. 6. 27. 16:48 | Posted by 김수민
학대가 있는 또는 없는 모든 곳에...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에 이어, 태어나 두번째로 좋아했던 노래 <빌리 진>...

그리고 그 가수가 어릴 적 JACKSON 5에서 부른 이 노래...
틀림없이 잘 부르는 노래에
심금을 울리는 맛도 있지만
어딘가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다른 노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가수의 매끈한 노래와 현란한 춤이
어린 시절 고된 훈육으로 비롯된 것임은 나중에 알았고,
어느새 그는 다른 학대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비인간적 훈련으로 탄생한 세계적 골퍼 앞에서 
<상록수>를 틀어놓고 감격에 빠진 지난 날 우리의 자화상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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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보수적이 아니라고?

Forum | 2009. 6. 21. 17:19 | Posted by 김수민
당연하지. 20대 후반과 중반과 초반은 다 다르니까.

고 노무현 추모공연을 두고 연세대 학생들이 벌이는 논란을 잘 보면
학번대에 따른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엿 같은 새끼들과 학교 같이 다닌 사람으로서
졸업하고도 엿 같다.

학교에서 사시 준비해야 되니까 학교에서 콘서트하지 말란다.

쉬뱅들아 그럼 니네집이나 독서실이나
동네도서관 가서 해.

시험 하루 앞두고 버스, 지하철 타고 학교 가고 싶냐?

세상 살다보면 이런저런 제약요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마련이고
자주는 알아서 잘 피하고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학교가 니네 집이냐?
고3때 니네 부모님 발꿈치 들고 다니고 난 후로부터는
세상이 만만해 보여?

이런 색히들 보면, 나 전경할 때
먹고 살 만한 주제에 땅값 떨어진다고 무슨 시위하다가
경찰한테 벽돌 던지던 아줌마들 생각난다.


공부가 유세냐? 
그래봐야 니네 자리 별로 없으니까 족구하시라 그래.
 
삼김씨에서 노무현으로 가면서 대통령되는 세대가 몇년 건너뛰는 거 봤지?
노무현 다음에도 마찬가지야.
그 다음에도 그럴 거고.

나랑 나이 비슷한 니네가 바로 그 세대야. 건너뛰는 세대.

아, 그래서 부스러기라도 쳐드실라고 발버둥치는 거니?
그런 거라면 형이 쵸큼은 이해해줄게.


20대가 보수적이라는 건 확실히 개념남용. 보수는 아무나 하나~
80년대에 학교 다녔으면 경쟁적으로 팔뚝질했을 새끼들이.
386? 그 잉간들도 마찬가지. 나중에 학교 다녔으면 똑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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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산성 연세대에 납시다

Forum | 2009. 6. 20. 05:25 | Posted by 김수민
지나가는 길에 한 기자가 소감을 묻길래 
'명박산성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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