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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2002년

Free Speech | 2009. 7. 10. 04:04 | Posted by 김수민

공사를 떡자르듯 나눌 수 있겠느냐마는 '대선의 기억'은 사적 체험을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 편은 많은 내용이 누락된다. 그해의 기억은 대부분 공적 체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2002년 6월은 말많고 탈많은 달이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때, 나는 동료들과 곤욕을 치렀다.
송복 교수 퇴임식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앞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문옥 후보를 지지하는 칼럼을
쓴 것이 사전선거운동으로 신고되어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담당 형사는 자기가 봐도 선거법이 좀 무리가 있다며
기소유예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두번째 경찰서를 찾았을 때 그의 낯빛은 좀 어두웠다.
물론 "벌금 나오면 내가 그 액수만큼 술 산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6월 말 검찰에게 불려갔고, 8월에 재판을 받았다.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판결이 나왔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내가 지지했던 후보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정몽준과의 단일화 내지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를 추진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부터 2004년 총선까지 개혁이 대세였지만,
2002년 6월부터 11월까지의 그 기간만큼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절망 속 몸부림을 통해 개혁당이 등장한 것도 그 시기였다.

다른 글로 여러번 밝혔지만 노무현 후보를 옛날부터 지지해왔다.
중학생 시절 나는 지역주의에 맞서는 개혁파 정치인이, 적어도 내가 쉰살이 되기 전까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나는 노무현이 포스트 삼김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직감했고 2002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되리라고 예측했다.
2001년 당시 친하게 지냈던 형들과 계속 입씨름이 이어졌다. 나의 예측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노풍이 불었을 적에는 용한 점쟁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얼빠진 정몽준바람으로 대선판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더이상 낙관할 수가 없었다.

결국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1%도 없다"던 노무현은 후보단일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줄곧 후보단일화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때부터는 맥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권영길을 지지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동안 지지했던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 총학생회를 뽑는 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본 어느 선배들과 술자리를 하던 밤,
노무현이 단일화승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시민운동을 하면서 겪던 고충과
정치판을 바라보며 느낀 환멸이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관할 일은 못되었다. 정몽준과 함께 정권을 꾸려야 한다는 점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것은 개혁당을 비롯한 신개혁세력과 동교동계 및 정몽준세력과의 향후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현대노동자들의 싸움을 거들었던 변호사였고, 정몽준은 현대재벌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그 이념차보다 훨씬 컸다. 인간적으로는 차라리 이회창과 노무현 간의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겉으로는 웃어도 돌아서면 서로 욕할 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 조화를 이루면 더 문제다. 노무현 정부가 꽤 보수화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정몽준이 국무총리라도 된다면 그 꼴을 어떻게 참고 볼 것인가?

그렇지만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은 나의 군걱정을 비웃었다.

2002년 12월 18일 밤, 나는 혼자 있었다.
'어차피 내일 판이 거나하게 벌어질 테니 하루만 참자.'
그래도 술 생각이 나서 고시원 방에서 캔맥주 두개를 비웠다.
그냥 자려니 뭔가 아쉬워 컴퓨터실에 들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마침 후배 하나가 메신저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후배가 '어 이런 일이...'라면서 대화가 멎었다. 
"무신 일?" 
"정몽준이... 단일화를 파기했대요." 

옆 TV실에서 속보 자막을 확인했다. 그즈음 TV실에 모인 고시원 사람들은 다들 대선에 관심이 있었다. 
하루는 신해철의 찬조연설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다른 채널이 나오고 있길래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리모콘으로 SBS를 틀었고 신해철이 등장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걸 보려고 모였다가 차마 말을 못 꺼냈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었으니 TV실에서 대선 관련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 C형과 통화를 했다. 그는 최후의 명동 유세 직전까지 선거운동을 함께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조짐은 전혀 눈치를 못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거... 우리가 이기면 대박이다. 혹 떼는 거다."

TV실을 나와 다시 컴퓨터실에 들렀다. 인터넷은 들끓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가 다운되었고,
단일화파기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나 전단이 유포되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나는 선관위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둔 뒤 스르르 고시원을 나섰다.

고시원 주변의 연희3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신촌으로 나가서 길바닥을 쏘다녔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녹색극장 맞은편의 조선일보 지국이 나왔다.
새벽부터 분주한 배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단이나 신문은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6시경 고시원에 들어왔다. 

고시원에는 망할 놈의 <조선일보>가 들어왔다.
나는 자기 직전 사설을 확인했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에서 논평을 맡고 있던 나는 최후의 한편을 연세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그리고 <조선일보>를 버릴 것이다."

점심께에 일어나 연락을 받았다. 출구조사에서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시간 뒤에 다시 온 메시지. "이기기 시작했다."

투표마감을 기해 나는 개혁당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전에 머리를 깎으러 길을 나섰다.
그 와중에 친구와 통화를 나누었는데 "남한이 섬나라가 되면 쓰겠냐"고 한마디하는 찰나
어떤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여! 남한이 섬나라가 된다니!"
척 보기에도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이미 술이 취해 있는 아저씨였다.
나는 순간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길바닥에서 나는 그와 실랑이를 시작했고,
그도 나를 독하게 붙들었다.

한창 옥신각신하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대북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남한이 섬나라처럼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젊은이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지금 너무나 걱정이 돼.
나 술 한병 사가지고 집에가서 또 마실 거야. 대통령선거 결과 보고."
노무현이가 되면 좋아서 축배를 들 거고, 이회창이가 되면 쓴잔을 마실 거여.
이회창이가 되면 박정희시대가 또 온다 이 말이여. 나 그럼 한국에서 못 살아.
차라리 중국엘 가지."

이회창이 되어도 박정희시대만하겠냐는 내 응답에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나는 노무현이 될 거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정몽준이가... 약속을 깼는데 될 수 있을까?"
"아까 여론조사 보니 이기고 있답니다. 오후엔 젊은층이 투표를 더하니까 차이가 더 벌어졌을 거예요."
"진짜지? 나 중국 안가도 되는 거지?"
"그럼요. 집에서 기분 좋게 한잔하세요."

그 아저씨와 헤어지면서 깨달았다. 어휴, 이러니 이회창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잖아도 2001년, 2002년 택시기사들이 이회창 욕을 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반감과 심판의지가 높아져가던 시점에도 그랬다.
예비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그를 마치 심판해야 할 현직대통령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반창정서가 반DJ 정서를 압도하리라고 예상했다.  
더구나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부상하면, 이회창은 김대중정권의 퇴장과 함께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우리 일행이 들른 술집에는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월드컵 때 재미 좀 봤겠다 싶었다.
우리는 주인에게 MBC를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투표마감 1분전이었다. 출구조사 결과를 직전에 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참이었다.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택시를 잡아 여의도 개혁당 당사로 갔다.
유시민 대표를 포함해서 당원들이 TV앞에 앉아 있었다. 각 지역별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시민은 해설자처럼 한마디씩 날리고 있었다.

개표방송 시청도 월드컵응원 못지 않았다.
초반에는 뒤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뒤집을 것이고, 가장 불리한 대구경북 지역이 일찍 함을 깠다는 생각에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표차가 줄어들 때마다 사람들은 "으랏차차~" 함성을 질렀고,
영남 선거구 중에 '30%' 이상의 득표율이 나온 곳이 있으면 손뼉을 쳤다.

마침내, 뒤집어졌다. 맥주를 뜯으며 노무현을 연호했다. 나를 비롯해서 다들 목소리에 약간 울음이 배어나왔다.
무슨 대선이 이렇게 험난하다는 말인가. 그 파란만장했던 1년을 뒤로 하고 개혁당원들은 기차 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가 개혁당사를 방문했을 때,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학생당원들끼리 신촌으로 다시 몰려가 밤새 술을 마셨다. 
자고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뒤에는 안티조선 진영 활동가들이 대학로 모처에 모여 크지는 않은 송년회를 벌였는데
축제 분위기였다. 노무현 지지자인 명계남이나 민노당원인 홍세화나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해 연말은 매우 들뜬 분위기에서 보냈던,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3개월 앞으로 다가온 군입대 탓에 다소 심경이 복잡하기도 한
시절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단일화하고 악연이 있는 것 같다.  
그 시작이 그해였다.

만일 노무현 정몽준이 단일화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무현이 떨어졌을 것이다. 2등 아니면 간발의 차로 3등. 2등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몽준은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니까.

3자구도로 끝까지 갔다면 분명 이회창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국정치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때 이회창이 되는 게 차라리 더 나았으리라는 웃기는 이야길 종종 듣곤 한다.
지랄 쌈싸먹는 이야기다.
노무현이 좋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 일개인으로만 치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노무현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은 실패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2007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등의 한계를 일찍부터 내보였지만
오바마와 임기를 함께하였다면 그래도 조금 더 수월하게 임기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파병은 안했을 것이고, 한미FTA 가능성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회창 정권 5년동안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었어도 독재나 공안정국은 안 왔으리라고? 도대체 근거가 뭘까?
그건 현재의 이명박 정권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무슨 박정희 정권처럼 20년 가까이 갔나?
달랑 5년했는데 이회창이 지금의 이명박보다 나았을 것 같나? 
북핵사태가 터지고 북미전쟁까지 점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는 게 민주화에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의견은
한마디로, 겉으로는 노빠 아닌 척하는  
실제로는 지극히 노무현적인 관점이다.
나는 이런 류의 좌파들이 광적인 노빠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2007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문국현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 찍어줄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명박이 되는 건 보다는 얼마간은 낫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어떤 이가 "그래서? 정권 실패하고, 진보진영은 또 덤터기 쓰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웃기는 착각이라는 걸, 그도 최소한의 기억력과 관찰력이 있다면 알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폭주 때문에 진보진영은 되레 반한나라당 담론으로 휩쓸리는 형국이다.

촛불시위 때 이명박 땜에 신난 사람들 있었을 것이다. 역전승 한판 꿈꾸면서 말이다. 
목적이야 정권퇴진이지만,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 그래라.  
노무현 정권 5년동안
김대중 노무현세력은 반한나라당 반사이득 볼 생각하지 말고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잘했어야 했고,
진보진영은 노무현이 잘하든 못하든 멋지게 살아나갈 길을 뚫어야 했다.  
그때도 못한 놈들이 이명박 정권 때 그걸 해? 
그래도 못한 놈들이 이회창 정권을 버틸 자신이 있나? 

 
얼마 전 어떤 개새끼가 이 블로그에
허세욱의 죽음은 고귀하고, 노무현의 죽음은 눈물 한방울 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냐는
요지의 댓글을 달았다.

너는 허세욱씨를 한번이라도 애도한 적 있니?
라고 묻는 건 너무나 사치스럽고,
너는 지금 우는 게 자랑스럽니? 지금 그럴 때니?
라고 되묻고 싶다.

노무현은 아직 있다.

노무현은
스승이자
적이고
경쟁자이다.

나는 진보진영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명박을 적수로 생각하지 마라."
"김근태에게 경쟁의식을 느끼지 마라."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노무현이다."

그것은 양쪽 모두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여기 끼어들어 망치는 놈들을 내쫓을 때까지
감상적 슬픔은 보류한다.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다.
나는 예전 오랫동안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그가 오른쪽으로 내가 왼쪽으로 가면서 그를 규탄하던 시절이 최근에 있었다.
그를 지지한 대가로 나는 진보와 개혁의 낙관주의를 잃어버렸고,
그는 대통령이 된 대가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하고 아플 뿐이다.
노무현을 한번도 지지하지 않았던 좌파나
지지한 이후 무조건 그를 따랐던 사람들보다
나 같은 사람이 더 한 것 같다.

2008년 초, 노무현 정권기 죽고 다친 분들과 그 친지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정치칼럼 연재를 끝맺은 내가
노무현이 다치고 죽는 꼴까지 봐야만 했던 것이다.

노무현시대, 노무현 정부보다 더 나은 
시대와 정부가 오기 전까지
나의 상처는 씻기지 않을 것 같다.


2007년 대선은 쓸 만한 사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이걸로 대선의 기억을 다룬 잡글은 마무리한다. 


추신: 
그의 비문으로는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가 노무현' 또는 그냥 '노무현'이 더 바람직하다.
비문 작업에는 황지우, 유홍준씨가 참여했다는데
이들도 이젠  예술행정가일 뿐, 예술가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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