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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단상

Listen to the 무직 | 2009. 9. 24. 22:56 | Posted by 김수민

표절곡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세개쯤으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도적으로 베끼는 경우다. 두번째, 무수히 들었던 곡 중 하나가 머리에 남아 있다가 자신의 영감처럼 튀어나온 경우다. 셋째, 듣지도 베끼지도 않았지만 우연하게 일치한 경우다. 셋째는, 수많은 인류가 살고 세상살이가 오묘한 탓에 전혀 가망이 없지는 않으나, 어쨌든 확률이 미미하다고 치자. 그런데 첫째와 둘째는 분간하기 어렵다. 표절곡 창작자로 지목된 이 스스로도 모를 수 있고, 타인의 입장에서 더더욱 판단이 어렵다. 당사자가 의도적으로 베끼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몰아붙이랴. 표절은 윤리적으로 단죄되기가 너무 힘든 행위다. 표절은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쓴다는 뜻인데, 표절이라는 단어를 폐기하거나 예술분야에서 의미를 수정해야 할 밖에 없다.

남은 과제는 의도적 베끼기를 규탄하는 대신, 또는 그런 행동에 앞서, 곡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도를 따져, 유사곡이 앞서 나온 곡보다 그만큼은 열등하다는 걸 공식화하는 일이다. 유사곡의 유명도가 더 높더라도 최소한 앞서 나온 곡의 작자에게 뒤에 나온 비슷한 곡의 수익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돌아가게끔 기준을 세워야 한다. 물론 현재 표절곡을 가르는 기준은 존재한다. 그것은 그러나 표절 여부를 판가름함을 넘어서 정도를 따질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고 정밀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이 표절논란에 대한 대책은 아니다. 조금씩 음과 리듬을 비틀어서 기준을 피해가기가 충분히 가능하다. 코드진행을 그대로 베껴오고 크게 다른 멜로디와 리듬을 얹힐 수도 있다. 이것은 잡을 수도, 표절이라고 욕할 수도 없다. 어떤 곡을 참고하되 그 곡과 상당히 다른 곡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도무지 의도성과 비의도성, 베끼기와 참고하기를 가를 수가 없는 사안이다. 이점은 표절에 관한 사람들의 헛발질을 유도한다.

예컨대 윤도현밴드의 <바다>는 배드 컴퍼니의 <Brokenhearted>와 진행이 유사하다. 심지어 기타 리프는 너무나 비슷해 윤도현밴드측은 음반 속지에 '부분 인용'임을 밝혔다. 허나 멜로디와 리듬이 한꺼번에 겹치는 부분은 없어서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 또 그들이 밝힌 후문에 의하면 기타 리프는 일부러 인용한 것이 아니고, 만들고 나서 비슷함을 알고 그렇게 썼다고 한다. 이는 지어낸 변명이 아닐 공산이 매우 높다. 반주는 보컬 멜로디보다 패턴이 많지 않고 기타 리프는 유사성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곡은 '부분 인용'을 밝힌 덕분인지 노래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본격적인 표절혐의를 받은 적이 없지만, 표절에 대해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사람이나 혹은 음악적 이해가 빈약한 상황에서 무작정 달려든 사람에게는 욕을 먹을 만하다.

실제로 표절공세를 받은 사례로는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가 있다. 이 노래는 벤 헤일런의 <Jump>를 표절했다는 공세를 받았다. 당시는 인터넷은커녕 PC통신 인구도 그리 많지는 않은 시점이었는데, 공륜까지 나서서 표절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두 곡은 건반이 주도하는 앞의 인트로가 닮았을 뿐인데 그마저 리듬과 멜로디는 다르다. '부분 인용'이라고 할 만한 성질도 못된다. <내일을 향해>의 '원곡'으로 지목된 아시아의 <Don't Cry>도 마찬가지다. 공륜은 또 사카이 노리코의 곡도 <내일을 향해>의 원곡으로 지목했었다. 해당 곡명은 검색되지 않는데, 혹시 <Anatani Tenshiga Mierutoki>인가 하는 노래라면, "그 곡의 기타 리프를 듣고 '이걸 갖고 인트로와 비슷하단 말인가'라며 웃었다"는 말을 당시 심의자에게 전해주고 싶,지는 않고 그저 17년 전이라 그랬거니 하며 웃어 넘긴다. 야한 소설 썼다고 소설가들을 잡아간 사건이 그즈음 아니 그보다도 더 뒤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런 마당에 윤도현밴드나 신성우가 평소 배드 컴퍼니나 벤 헤일런을 즐겨 듣는다거나 그러한 뮤지션과 닮고 싶다 말한다면 바로 의혹과 공격이 날아와 곤란해질 터이다. 그렇지만 영미 팝계의 어떤 뮤지션들은 자기가 어떤 선배 뮤지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참고한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특히 뮤지션들에게 말이다. 창조자적 지위의 훼손을 댓가로 하여, 언제라도 휘말릴지 모를 유사성 내지 표절 논란을 대비하는 길이다.

표절시비는 오늘날 벌어지는 입방아보다 훨씬 거대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거칠게 예측하자면 어떤 거대한 변동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표절 말고도 숱하다. '선한 베끼기'인 샘플링도 있다. 당장에 오토튠을 보라. 음정과 박자를 교정해주는 엔지니어에게도 저작권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농반진반의 소리도 있다. 표절을 풍자하며 이렇게 저렇게 하면 곡 하나가 완성된다는 동영상도 있다. 얼마간의 음악적 이해와 테크놀로지를 소유하고 있으면 뚝딱 노래 한곡을 만들어낼 공산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선율이 넘쳐 흐르는 시대에 벌어지는 베끼기나 겹치기에 의해 창작자 개개인과 악곡 하나하나의 아우라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몇몇 사례는 방지할 수 있어도 거대한 흐름은 넘어설 수 없다. 아니, 각자의 주장과 서로간의 토론으로도 변동의 방향과 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는 무섭다는 느낌이 들 따름이다. 20세기가 열리며 인류는 쇤베르크와 존 케이지도 경험했고, 동시에 급진적인 실험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보다는 하나의 별종으로 그치고 대중은 여전히 익숙함과 편안함을 찾는 현실도 겪었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반길 만한 길이 새로 열릴 것인가. 아니면 미어터진 이곳에서 끼이고 치이면서 살아갈 것인가.

일단은 미어터질 각오를 하자. 왜냐면 넘어설 자신감이나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뮤지션이나 저작권 관련자들보다 대중, 특히 네티즌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더 무겁다. 어떤 노래들이 서로 비슷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노래의 곡목을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올려보자. 폭로가 아니라 소개 삼아 말이다. 대뜸 표절이라고 달려들지 말고 '비슷하다고 여겨지는데 님들의 의견은 어떤지?'라고 물어보고, 그렇게 해서 '분위기가 비슷한 곡'들끼리 모아 리스트와 계보를 그려보자. 저마다 답변은 다를 것이고 금세 아우성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허나 그 속에서 많은 곡들의 참신성이나 독보성을 점차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조금은 의도적으로 베낀 곡을 포함한 유사곡들이 자신의 주제를 넘는 대우를 받을 여지는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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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일

Free Speech | 2009. 9. 17. 11:17 | Posted by 김수민
1.
고3이었던 2000년 이맘때, 나는 입사원서를 썼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나도 대학에 들어갈 의지가 줄어들면서 바로 사회로 나가야겠다는 궁리를 했다. 내가 응모한 곳은 모 음악잡지사였다. 나는 음악 기자가 되려고 했다. 학력에 관계없이 음악과 영어 중 하나만 능하면 자격요건이 충족되었다. 실은 둘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음에도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원서를 썼고, 그쪽에서 요구하는 장문의 평론을 썼다. 모집인원은 미정이었고 결과는 0명 선발이었다. 하지만 나의 당돌함(?)을 높이 산 편집부는 전문을 잡지에 게재했다. 그 직전에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갔고, 그 다음날 나는 대학에 붙었다. 사실 문학 때문이 아니라 음악 때문에 대학에 간 셈이다. 내가 당시 쓴 글은 대부분은 주제가 록음악이었다.

조금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대학생이 되어 상경한 뒤 그 잡지사와 교류를 하면서 음악평론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평론'이라는 건 컴플렉스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상대는 음악이었다. 고교 시절 내게 음악평론은 밴드가 해체되고 난 뒤의 소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특정 장르만 반복해서 들었고, 2000년대 초반은 내 귀를 잡아끌지 못하는 음악들이 유행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생활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답도 안 나오는 한탄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나는 음악평론과 멀어졌다. 10년이면 사람이 크게 바뀐다. 요즘 들어서는 다양한 음악을 들으려 애를 쓰고 공부도 하지만 평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록 보컬 평론'에는 아직 관심이 많다. 또 한국사회는 노래방이 아무래 성행해봤자 여전히 보컬의 불모지니까. 그런데 최근 '보컬 열전'을 블로그에 못 쓰고 있어서 갑갑하다.

2.
내가 대학에서 운동을 할 거라고는 내 고교 친구들도 몰랐고 대학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짜증나도록 무료한 시절이 다가온 신입생 봄날,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조선바보>에 들어갔다. 마침 만들던 밴드가 날아가버린 시점이었다. 이듬해에는 유뉴스에 칼럼을 연재했고 그러면서 글쓰기는 일이 되었다. 유뉴스 덕에 대학 학보사 청탁이 곧잘 들어와 돈도 짭잘하게 챙겼다. 게다가 2학년이었던 2002년은 일감이 참 많은 시기가 아니었던가.

워낙에 빈재라 군대 갔다와서도 했던 일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밴드 일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그랬구나. 여기서 내가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 단체활동이랑 칼럼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었다. 나의 선택은 사회에도 자신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하나만 택하기가 껄끄러우면 둘 다 그만뒀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둘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나름으로는 굉장히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얻은 것은 오해였다. 그 바닥에도 'FA 최대어'라는 표현이 있다. 졸업하면 여기저기에서 부름을 받을 것 같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누가 나더러 그런 단어를 들먹였지만 나의 처세는 그 반대였다. 돌아오자마자 유뉴스 편집부에 일러둔 일성부터가 이랬다: "무차별 폭격을 할 겁니다."(나를 전혀 통제하지 않은 편집부에 또 한번 경이를 표한다.) 유뉴스 독자 가운데는 NL 사람들이 많았는데, 버젓이 노골적으로 NL을 까대는 내 글이, 그것도 기획위원 명의로 실렸다.

2007년 초 편집진이 바뀔 때 유뉴스는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전직 편집자는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내가 앞으로 주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었다면서. 그때 나는 글쓰기 작업에 나선 걸 후회했다.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내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내내 사나운 공격에 나선 비결 중 하나는 글쓰기를 그만둔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데 있었다. 하지만 지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저렇게까지 하는데 영영 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교육학과 가면 선생되는 줄 알고 정외과 가면 정치인 지망생인 줄 아는 이런 사회에서는 찬물도 조심스레 마셔야 한다.

2006년경에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도 함께였다. 기고 청탁이 줄어든 게 무엇보다 행운이었다. 괜한 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자꾸 추켜올리면 스스로를 읽는 눈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고보다는 투고가 훨씬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장정일 코드 혹은 화두>라는 책에 실린 장정일의 한 단상을 읽어보길.)

3.
대학 당국의 특기자 정책 실패의 한 사례가 바로 나다. 특기자 프로그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진단도 있지만, 나의 경우 특기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성적 올리기가 버거운 나로서는 기숙사 자치회 활동으로 주어지는 근로장학금 이외에 유일하게 장학금이 나오는 건수였다. 창작 말고 필사만 해도 잘하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마침 당시에 있었던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조선바보>는 조선일보 비판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학내 문제, 특히 교수권력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던 차였고, 2002년 마광수 해임을 둘러싼 연세대 국문과 사태가 터졌다. 11명의 연구자가 대학원을 떠났고, 그 학과의 동창들끼리 벌인 알력 다툼도 극심했다. 사태의 주역인 국문과 김철 교수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학내 언론들은 비판을 하지 않거나 기사화했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덕분에 간 부은 <조선바보>와 내가 특종을 주워먹었다. 조금 특이한 건 그를 비판한 사람 가운데 나만 고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사태에 접근하던 <말>지 기자나 자퇴한 대학원생 모두 신기해 했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경악했다. 젊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시판에만 가도 꼴사나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들이랑은 되도록 어울리지 않겠다, 어울려도 한두명 개별적으로 만나지 절대 그 바닥과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매우 자연스럽게 국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계획도 접었다.  

새내기 시절 가을에는 참 열심히 문학평론을 읽었다. 이론보다는 문체를 탐닉했다. 평론이 소설보다 명문장이 더 많았다. 나는 백낙청보다 김현, 김병익을 훨씬 좋아했다. 과 친구들은 내가 무슨 민중문학을 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했지만.("요즘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밌게 읽고 있다"고 하면, 그쪽 애들은 의외라고 했다), 그때 함께 조선바보를 했던 ㅇ형은 "쟤는 창비보다는 확실히 문지야"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조세희, 최인훈의 소설도 다 문지에서 나왔다. 물론 그 문지라는 것도 옛날 문지지 요즘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내가 음악평론을 대하는 태도는 문학평론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픽션을 창작하고 싶었다. 김현이 아니라 조세희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국문과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이래저래 엉뚱한 글을 쓰느라,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다 놓쳐버린 꼴이니, 만약 글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이 전철을 조금도 따라 밟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흥미도 떨어졌고 이걸로 뭘 해먹겠다는 계획이 없으므로 상관 없지만 말이다.

4.
아주 오래전에 소설이랑 희곡 아이템 잡아둔 게 있는데 도대체 언제 쓰나. 기약이 없다. 직업이 아니라서 겪는 현상이다.

나는 내가 보기 좋은, 그러면 그냥 그걸로 땡인 픽션문학을 쓰기를 바란다.

5.
얼마 전에 정치칼럼 중단 원칙을 한번 어겼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미FTA반대를 호소하면서였다. 너무 절박하고 가슴에 한이 남아서 썼다. 오늘도 버스 안에서 FTA광고를 듣고 눈깔이 뒤집혔다. 함부로 예외조항을 적용하면 안되는 걸 알지만, 눈 한번 감고 썼다.

근래 들어서 고민을 조금 했다. 블로그에 쓰나 웹진에 쓰나 별 차이가 없는데 절필이란답시고 발표를 하지 않는 게 의미가 있는가. 슬슬 다시 쓸까 저울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첫째, 쓰기가 싫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내 공간에서 지껄이는 거랑 나름의 의무감을 갖고 기고하는 거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분명히 나는 약속을 했다. 2006년에 계획을 밝혔고 2008년에 중단을 선언했다. 셋째, 써봐야 무소용이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블로거와 씨부리머로 존재하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시장바닥이나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택했고 어쩌다 웹진까지 갔을 뿐이었다. 평론가가 되는 순간 내것은 증발된다. 최장집 한명보다는 김수민 백명이 낫고, 유창선 열명보다는 김수민 한명이 낫다. 담론권력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의 발언으로 대중 속에 섞여들면 그만이다. 더구나, 칼럼으로 접근하고 끌어들인 사람보다 내 삶과 일상으로 설득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아마 전자는 실상 0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 글을 퍼가는 사람은 더 믿지 않는다. 자기 마음에 드는 특정 구절만 쏙 뽑아 읽고, 그걸 부각하는 짓에 질렸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폭탄을 끼워놓는다. 퍼갈이가 어떤 구절을 미치도록 이용하고 싶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구절 때문에 결국 퍼가지 못하도록.

6.
돌이켜보면 나의 글이란, 말을 앗긴 자가 임시방편으로 택한 도구였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구꼴통, 김대중-노무현주의자, NL 정도겠지만,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사람에게도 눈총을 받는다. 그들과 마주칠 때 항상 듣는 말은 "아, 그 글 많이 쓰는 사람?"이다. "많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많이 썼을까?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많은데도, 어리다는 이유로, 볼 것 없는 외모를 가져서, 무식해 보여서 또는 직함이 없어서, 패거리를 거느리지 않아서, 발언권에 언제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주어진 자리, 작정하고 나간 자리, 손 들면 얼마간은 발언권이 돌아오고 공방까지 벌일 수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달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글을 잘 못쓰는 탓이겠지만 글 잘 쓴다는 말보다는 말 잘한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었다. 한때는 자만에 차서, 어떤 이를 달변이라는 평가하는 걸 들으면, 일일이 다 콕 찍어 지적해주면서 "저걸 달변이라고 하는 걸 봐서 당신은 언어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질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어딘가에서 한바탕 말을 잘하고 나면, 발언권에 더 큰 제약이 생겼다.(씨밤바들아 혹시 듣고 있다면 똑바로 들으라,고 굵은 글씨로 처리한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지를 내가 못 읽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한편처럼 여겨지는 이들도 그랬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좋아하지만 내게 말할 기회가 돌아가는 건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말폭탄만큼은 해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신 '글쓰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천형처럼 뒤집어 씌우려 했다. 글은 말보다 통제하기 쉽다.

내게 글은 말을 얻기 전에 참으면서 흘린 신음들이다. 이제 신음을 쓰지 않으련다. 입으로든 키보드로든 말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안 그래도 활자가 너무 지겹다. 부득이하게 자판을 쳐야 한다면, 구어가 거리가 먼 '글쓰기'라고 할지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내 자신에게는 들지 않게끔 할 것이다. 조촐히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의 오프닝 원고를 쓰는 게, 아이디어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아주 재미가 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말을 쓰는 일이다.

옛날 글쓰기에 쏟았던 만큼의 고민을 말을 하는 일에 쏟아 나간다면 재미 뿐이 아니라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병폐는 조금도 못 고치더라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맞서 싸우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편이, 별 쓸모도 없는 행위를 벌이면서 이미 설득된 사람을 또 설득하여 제 잇속을 챙기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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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기를 자제하다

Free Speech | 2009. 9. 17. 01:13 | Posted by 김수민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사는 길에는 일단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남의 인생에서 조연이나 단역을 맡지 않는 것. 두번째는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깜빡이를 자주 켜는 운전자에게 안전운행은 어려운 일이다. 어디서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표정이 바뀌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했다. 나는 길거리를 갈 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렇기에 어떤 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의 반응과 감정선을 살피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주인공병에 걸린 이들은 너무 쉽게 적발되었다. 주인공병 없이도 자연스레 타인의 이목을 모으는 능력자는 극히 희귀하다. 내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타산지석을 통해 형성되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끼어들기를 자제한 것이다. 잘 끼어들지 않는 또다른 이유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인데, 대화나 토론의 궤도가 나와는 너무나 멀 때 나는 끼어들지 않는다. 전제나 사실부터 일일이 교정해야 할 수고를 감내하기가 귀찮을 뿐더러, 그걸 해낸다고 해도 향후에 오해와 갑갑함만 남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진보진영이 한나라당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여아 한다"고 했을 때, 자주 "우경화", "계략"이라는 반응을 들어 자신의 진의는커녕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너희들끼리, 그 잘난 중소득 고학력 유권자들 표나 갈라먹다(그러면서도 민중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는 멍청함이라니) 망해라. 가까운 지지층부터 확보한다? 이미 박박 긁어 모든 게 그 수준이고 그게 전부야'라고 돌아섰다. 나는 어떤 패러다임이나 프레임을 다수에게 통용된다는 이유로 인정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자주 소외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나는 당신(들) 인생의 엑스트라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끼어들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어도 좋을 때도 많다. 좋은 이야기들이 나올 때가 그렇다. 가만히 있는 내게 어떤 이들은 종종 묻는다. "재미없죠?" 거기가 술자리였고 재미가 없었다면 나는 듣지 않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스무살 넘어서 내가 얻은 것 중에 하나는 말을 듣는 재미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내가 말수가 적고 얌전하다는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잘못 잡히면, 수십분 일장훈시를 듣는 수가 있다. 김수민이가 정말 괴팍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감하구나, 라는 사람도 있으나, 알고 보니 진짜 괴팍하다는 사람도 앞으로 생겨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남의 성격을 짐작한다. 누차 되내지만, 지레짐작은 속은 사람을 양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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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기술

Free Speech | 2009. 9. 16. 22:34 | Posted by 김수민
지난 6개월동안 먹고 사는 기술 하나를 배웠다. 교양을 쌓거나 학력(學歷)을 올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그야말로 직업교육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기능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탈바꿈을 넘어서 틀을 가는 괴로움도 겪었고, 수시로 찾아오는 무력감으로 애도 먹었다. 밥벌어 먹고 산다는 게 그렇다. 교육을 받는 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외에 여러 핸디캡을 안고 있는 탓에 살면서 별로 해본 적 없는 후회도 많이 했다. 기본기가 있다는 평가와 칭찬 끝에 따르는 지적 모두로 인해 후회는 좀 더 깊어졌다. 옛날에는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을까. 왜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몇마디를 붙이다가 결국 "그냥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답함으로써, 객관적 난관을 솔직한 만큼의 모호함으로 비켜나가곤 했다. 군 제대 직후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의 이 모든 조건을 안고 가야 한다. 당장에 돈 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어디론가로 나아간다는, 진출한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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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대 복지

Forum | 2009. 9. 12. 16:46 | Posted by 김수민
내 주변에 있던 NL 사람들은 비판적 지지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2007년 대선을 한두해 앞두고 민주대연합론이 재현될 조짐이 보일 때, 그중 한 사람은 내게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복지 대 반복지로 가야 한다"고 제 견해를 밝혔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 시절 고교평준화 폐지, 본고사 부활을 역설하는 동시에 지역균형 신입생선발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찾기 드문 포지션이지만, 이는 수구보수세력에게 커다란 힌트가 될 수 있다. 정운찬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중시하고 촉진한다는 점에서, 다만 경젱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과 이명박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밝혔다. 실제 이명박이 그점을 보여주는 데만이라도 애를 쓴다면, 한국 수구파는 이미지적인 업그레이드를 이루게 된다. 일단은 경쟁 대 연대의 전선이 흐려지고, 복지 대 반복지로 싸움을 끌고 갈 여지도 크게 줄어든다.

노무현 정부 임기 중반께 한국사회 대다수의 구성원은 성장률 저조보다 사회양극화 심화를 우려했다. 원래부터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을 선호하는 시민들이 많기도 했으니 관심이 자연스레 성장에서 분배로 기울어지는 추세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성장지상주의가 춤을 췄고 노무현 정부의 우경화는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파이의 크기와 트리클 다운에 탐닉하는 반복지담론이 또다시 기승을 부린 탓일까? 아니다. 대중은 여전히 파이의 크기에 주목하나 성장이 자동으로 가져올 분배를 기다리기에는 지난 세월 여러번 속았다. 돈은 돌아야 제 맛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이 명제는 좌우상하의 사회경제적 담론을 일거에 빨아들인 블랙홀이다. 진보 진영의 '비정규직 철폐' 구호까지도 이용당했다. 비정규직을 늘려 노동유연성을 꾀하자는 주장은 교활하거나 천진난만한 소수 엘리트들 바깥으로 나가면 힘을 잃는다. 보수적 대중에게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대다수가 정규직 일자리의 증대를 희망한다. 그렇게 해서 정부발 복지담론과 비정규직 철폐 구호가 만난 결과, 기껏 옛 기업복지의 신화를 향한 향수나 번지고 말았다. 월급을 타면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고 회사에 들어가면 자녀 교육비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에, '밑빠진 독'보다는 길어올 물에, 잔디구장보다는 공의 확보에 경도된 것이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지론을 흔히 '생산적 복지'라고 한다. 이 단어는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곁에 셋째 슬로건으로 세워둔 바 있다.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보자. "생산적 복지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생산적 복지의 정확한 반대개념은 쉽게 간추려 조세->재분배의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소비적 복지다. 하지만 아마 "비생산적 복지"라는 대답이 적이 들려올 것이다. 또한 근로의욕을 상실한 채 실업수당 받으면서 집에서 빈둥거리는 현상을 비생산적 복지의 폐해라고 지목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소비적 복지는 졸지에 비생산적 복지와 등치될 것이다. 굳이 '비생산적'이라고 하지 않아도, '소비'는 '생산'에 진다. 대중들은 이미 소비자제일주의의 질척한 수렁에 빠져 있지만, 아직 개념과 언어만은 그렇지 않다. 

(생산적 복지는 하나의 독을 더 품고 있다. 재분배 말고 사회의 평등과 조화, 협동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기업경영참여의 확대 등이 있다. 시민을 수동적으로 이끄는 기존 복지의 단점을 만회하고도 남는 실로 생산적인 이런 작업들을 '생산적 복지'는 고용과 취업이라는 떡밥으로 가려 버린다.)

한나라당 정책지휘자들은 '얕고 넓은 세수'를 주창한다. 세율은 낮춰도 '작은 정부론'은 누그러뜨리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Laffer Curve가 Laugher's Curve가 된 지 오래라 파급력 있는 기조는 아니다. 오히려 투쟁과 합의의 산물인 조세와 그것의 도움을 받은 사회서비스의 무상화를 더 크게 훼방하는 걸림돌은 "일자리가 복지", '기업 복지', '생산적 복지'이다. 이걸 깨지 못하면, '복지'는 '민주'와 '개혁' 형님들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민주민생세력을 자임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 줄초상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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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냐?

Free Speech | 2009. 9. 9. 22:30 | Posted by 김수민
지인 한분께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였다. 기존의 종교적, 또는 근본적 평화주의에 의한 병역거부하고 약간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그간 '국가권력'의 횡포와 부조리를 몇몇 구체적인 측면을 들어 고발했다. 조금 더 정치적인 거부인 셈이고, 대체복무 논란하고는 거리가 떨어질 것 같다. 앞으로의 싸움이 어떻게 펼쳐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물론 그 주목의 대부분은 걱정이다. 그분의 건투를 빈다.

이에 반해, 아예 세상을 군대로 만들려고 작정한 무리들도 가까이서 우연히 눈에 띈다. 해마다 이맘 때 운동장을 지나가다 보면 연고전을 준비하는 기수단의 연습을 목격할 수 있다. 소리를 질러가며 군기 잡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선착순과 엎드려뻗쳐를 목격했다. 그걸 시킨 애들은 작년이나 재작년에 고개 숙이고 있던 바로 걔들일 것이다. 대학에 가서까지 그러고 싶니? 기합 주는 애들과 받는 애들 모두가 우스꽝스러웠다. 

아까는 늦게 저녁을 해결하러 식당에 들렀는데, 옆자리 일행의 이야기가 아주 가관이다. 무언가를 조지고자 하는 한 여학생의 앙칼진 말투부터 귀에 들어왔다. 특히나 웃긴 대화는 이 부분: "걔한테 애들이 잘해주던데, 왜 그러는 거야?" "예쁘니까. 말투도 예쁘고." "그으래? 어디 한번 손을..." 혹시 기수단 애들인가 귀동냥을 해보니, 맙소사 밴드하는 애들이란다. 신입 후배들 혼내키다가 나이가 자기보다 더 많음을 알게 되어 새로운 긴장이 조성된 사연도 나온다. 아이구, 선배라고 까분 김에 그냥 쭉 나가시지 그땐 또 나이가 걸리시나? 나는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듣자하니 동아리내에서 술처먹고 주먹다짐, 정확히는 폭행까지 벌어졌나 보다. 이때도 그 여학생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뭐 몇대 맞으면 어때?" 하마터면 '야이 씨댕년아, 너 내가 나온 전투경찰대로 타임머신 여행 같이 갈래?'라는 읖조림이 나올 뻔했다. (하기야 이런 애는 '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새끼'라고 부르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이다. 나는 전 모 의원 같은 이들을 욕할 때 절대 '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씨방새"나 "새끼"라고 하지. 맞잖아? 전 모 의원이 여성인 건 내가 알 거 없고 확실한 건 그는 마초니까.)

나는 이런 육갑쟁이들의 천적이었는데, 세월 지나니까 내 곁에도 그런 새끼들이, 남아 날 리가 없으므로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포부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역적 공동체'에서도 그렇다. 서울 지역 대학은 지방에 비해 이른바 과기(합)가 매우 드문 편이니. 세상이 바뀌어가니 지방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동갑내기 친구들 중에도 사관학교에서 얼차려 받은 친구를 빼면 과기를 겪은 친구는 없다. 그러나 얼마 전 <한겨레>가 연세대 음대 기합 현장을 잡아냈듯, 이 대학가에 사각지대는 남아 있다. 이런 거나 탁탁 털어버리고 나올 걸.

며칠 전 술자리에서 어떤 애가 주먹질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호되게 밟아 놓으려고 했는데, 뒷일(패고 나서 감당해야 할 법적 문제나 합의금 등등)이 걱정되어 딴 데로 끌고 가 졸라리 욕하고 일장훈시하고 집에 보냈다. 다음날, 결정을 내렸다. 이번 일은 함구하는 대신(물론 이렇게 해줘도 정신 못차리고 숨어서 욕하는 사람있다. 그러면 별 수 있나. 함구는 끝날 수밖에), 우리 일행, 우리 모임에서 파문시킬 것. "공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지만, 사적으로는 휘두를 수 있다"던 걔의 변명 때문이었다. "나는 잘못 없다. 큰 맥락을 봐야 한다"는 예전 어떤 녀석의 변명 이후 최고의 수준이었다. 공부 많이 하고 실천해봐야 속내가 이런 수준이다. 그러니 엣지 있는(?) 인간들의 병영 같은 공동체는 계속되는 것이다.

알았던 놈이든 모르는 놈이든, 하여간 근래 구타유발자들이 너무 많이 생기고 있다. 그동안 오래 참았는데 여생을 마저 참게 제발 좀 도와주라, 으잉? 그게 싫으면, 밟고 밟히는 게 세상 이치라고 우격다짐 할 거면, 이 기회에 한번 밟혀보시든가. 때리는 거 말고도 방법은 많다. "차라리 때리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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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

Forum | 2009. 9. 8. 16:21 | Posted by 김수민

"정치판"이나 "지식계"에서 챙기는 야심과 잇속이 "현장"에는 없다는 전제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 또는 빈민의 헤게모니를 명목으로 자신의 야심과 잇속을 기도하는 건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옥석을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제 스스로 그것을 용이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현장 안팍에서의 '유세'로.
사는 데가 마침 거기,라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그냥 사"는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이 내비친 실천하고 있다는 자의식은 "내려간(갔)다"는 표현에 더없이 어울려 보인다. 
운동가인지 중간관리자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다. 중간관리자 폄하 발언인가?
나는 그들을 자본주의의, 아니 자본주의랄 것도 없이, 구질서의 마름이라고 부른다.
이건 마름 폄하 발언이 아니다. 실제로 하는 일이 같기 때문이다.
혹시 이들이 이해한 노동'계급'은 이등병, 일등병 그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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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

Free Speech | 2009. 9. 4. 15:40 | Posted by 김수민
"쟤가 저러는 거 처음 봤네. 아무래도 데려가셔야겠는데요."

강아지가 아주 난리가 났다. 연신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몸으로 내 팔을 안는다. 물론 데려오지는 못했다. 어제 만난 분들이 주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집은 좁은 데다가 개판이고 나는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다.

그래도 키우고는 싶다. 나는 어제 본 강아지(시츄였던가?)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체구의 애완견보다는 큰 개를 좋아한다. 삽살개도 참 좋아한다. 다만 비글 같은 개하고는 전혀 친하지 않다. 이런 애들한테는 꼭 깨물린다. 쬐끄만 게 깽깽 짖어대는 것도 참 싫다. 인터넷 검색창에 '3대'라고 치자마자 '3대 지랄견'이 뜨는군. 슈나우저는 그나마 귀엽고, 비글이랑 코카스페니얼은 가까이하기가 싫다. 달마시안도 장난 아니람서? 사람이랑 싸우는 것도 귀찮은데 개랑 싸워야겠냐!

언젠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게 된다면 꼭 삽살개 같은 걸 키우리라고 다짐하는데,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 나는 닭도 키우고 싶거든. 그래서 개 키우는 아는 형에게 물었다. 개가 닭을 공격할 확률은? 개마다 너무 달라서 알 수 없다고 그는 답했다.

따지고 보면 개가 고양이보다 개성이 더 천차만별이다. 고양이가 더 유아독존적인 것 같지만, 고양이끼리의 차이는 개끼리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아마 내가 교회나 성당에 다니게 되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키우게 되면 고양이 숨인이 보듯할 것 뻔하다. 친하게 지내기 힘든 사이다.

도둑고양이는 자주 만난다. 내가 현재 사는 집은 이 부근 자취, 하숙촌에서는 좀 이례적으로 마당이 있다. 이쪽으로 숱한 도둑고양이들이 지나다닌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깜짝깜짝 자주 놀랐다. 호랑이가 왜 고양이과인지를 새삼 실감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그 마당에 집 잃은 강아지가 며칠 임시로 묵은 적이 있다. 그 강아지도 나를 참 좋아했었다.

도둑고양이만 있는 게 아니라 주인없는 개도 골목에서 곧잘 만났었다. 이 친구들은 꼭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지나갔었다. 동네개들이 마실 나온 줄 알았는데 다 주인없는 개라고 해서 놀랐고, 야산 어디서 모여서 집회를 연다는 목격담에 전율했었다. 그무렵 나는 야생화되어 불어난 고양이와 개로 개판이 된 도시를 소재로, 영화 시나리오를 써볼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개띠는 개 편이라고. 정말이지 나는 고양이와 개 가운데 완벽한 개 편이다. 전경 근무하던 시절 나랑 친하게 지낸 분소 개가 있었다. 이 친구가 한번은 밤중에 분소 뒷편에서 왈왈 짖어댔다. 고양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친구는 분소장 사모님한테 혼이 났다. 텃밭을 갈아엎었다는 누명, 그러니까 고양이가 저지른 죄를 뒤집어 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도 못하는 그 친구의 변호를 서줬다. 하여간에 고양이는 괘씸하단 말이야.

개와 원숭이 중에는? 여기서는 중립이다. 원숭이를 키우고픈 생각도 많았었다. 하지만 명이 다해서 죽으면, 그놈이 사람이랑 원체 비슷하게 생긴 탓에 너무 슬플 것 같다. 예전에 <동물농장>이었나? TV에서 친구사이인 개랑 원숭이를 너무 즐겁게 지켜봤었다. 그 원숭이는 오락실에서 오락을 할 정도로 똑똑했던 반면, 개는 둔하고 멍했다. 원숭이가 개를 데리고 바나나를 사러 갔는데, 개가 중간에 뻗어버리자 바나나를 한개 먹이고 앞에서 춤을 추는 걸 보고 폭소했다. 원숭이나 돌고래를 보면, 혹시 이놈들이 인간들보다 머리가 좋은데 싸움을 못해서 당하고 사는 게 아닌지, 혹은 거꾸로 인간이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의심은 토끼가 실은 육식동물이라는 내 의심과 함께 동물에 관한 양대 의심이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인데 어릴 적 집에서 잠깐 고양이를 키웠다. 철없고 어린 엄마는 숙고도 하지 않고 아무거나 키워보자고 덜컥 고양이를 사왔지만, 전혀 감당을 하지 못했다. 고양이는 여기저기, 사람까지 할퀴고 다녔고, 급기야 엄마는 고양이를... 버렸다.;;;; 하지만 그날 밤, 집으로 다시 찾아와 '야옹~"하는 고양이. 부모님은 소름이 돋았고 일단은 다시 거두어들여 바깥에 놓고 대충 키웠다. 그러다 증조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을 때 그는 얼어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부모님은 다시는 고양이 키울 생각을 안하셨다. 대신 새나 금붕어를 키웠다. 얘들을 키우면서도 엄마의 철없는 행동이 이어져서, 이따금 온 가족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엄마는 식물은 잘 키우고 베란다 밭도 예쁘게 가꾸신다).

고양이 하면 또 기억이 나는 게 외할머니 장례식 때다. 외가댁에서 밤새 고양이가 울어대 집안 여자들이 밤잠을 설치고 난 후, 뒷켠에서 몰래 담배를 피던 내가 목재들 틈새에서 자는 듯 죽어 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것이다.

고양이 그리고 개에 관한 짠한 경험도 있다. 역시 치안현장 시절 일이다. 얼마 전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차도에 나왔다 죽은 동물을 수도 없이 봤고 때로는 치웠다. 가장 끔찍했던 건 아예 몸이 해체되어 버린 어떤 개였다. 함께 있던 경관은 끔찍한 사람 시체도 많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분은 알아주는 강심장에 한터프하시는 분이었다.) 수적으로는 개보다 고양이의 피해가 훨씬 컸다. 청솔모들도 떼거지로 죽곤 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다큐에도 재밌는 대화가 나온다. 한담 중 이상수 장관이 동물들이 지하로 다닐 수 있는 길을 뚫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교육도 안 받은 놈들한테 땅밑으로 가라"면 어쩌냐며 도로를 고가화해야 한다고 웃으며 답했다.

나는 길거리에서 죽은 동물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반동물적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 등등을 애완동물이라며 키우고 근래 들어서는 '반려동물'이라고까지 부르지만, 이 행위는 근본이 반자연적이고 반동물적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동물을 키우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울 때, 성대수술을 하는 건 개한테 못할 짓이고, 개가 마구 짖어대는 것도 이웃에게 못할 짓이다.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서 원래 잘 짖지 않도록 훈련된 개라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마음껏 짖고 뛰어놀게 해주고 싶다. 앞에서 말했듯 마당 있는 집에서 키우면 좋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애완'행위의 반동물성, 반자연성이 제거되거나 누그러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고 반려동물인 걸까.

그래도 어떻든 생물과 더불어 살고 싶다. 내 방에 생물은 나하나밖에 없다. 아, 모기도 있구나. 식물 쪽을 알아봐야겠다. 몇년전부터 계속 생각나는 게 있었다. 콩나물! 볕들지 않는 구석에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명상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만약에 키우게 되면, 주변에 싸게 팝니다. 그러나 왠지 해장용으로 내가 다 먹을 것 같다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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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비면 걸린다

전파낭비 | 2009. 9. 2. 18:20 | Posted by 김수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나로서는 용산참사 등에 등장한 컨테이너 진압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검색하니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멤버들이 속는 장면에서 여러 네티즌들은 언론장악을 떠올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제작의도는 짐작할 수 없다. 그냥 공중에 떠있는 설정을 위해 컨테이너가 등장했을 수도 있다. 최초로 제안한 PD나 작가가 "이 기획, 용산참사가 떠오르지 않냐?"라는 다른 스태프의 질문에, "어? 아닌데. 그렇게 보이나?"라고 했을 수도 있고, "힌트는 얻었는데 별 상관 없어요"라고 했을 수도 있다. 어떤 대답이었든 둘러대기용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다. 제작진이 한마음으로 폭력진압을 풍자하기 위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얼마 전 뉴라이트단체가 이 프로그램에 시비를 걸면서, 화면에 '1.9MB'라는 자막이 걸린 사진을 제시했다. 이게 청와대 2메가님보다도 0.1MB가 딸리는 지능이라는 뜻인지, 저용량 수치 가운데 아무거나 쓴 것인지, 역시 모를 일이다. 누가 캐물어도 굳이나 대답할 이유도 없다.

걸리는 건 덤비는 놈이다. 컨테이너 진압을 풍자했다는 소리가 확산되려면, 지난번처럼 뉴라이트가 한번 덤벼주면 된다. 어차피 쇼오락프로에서 사회풍자 또는 그 가능성을 단숨에 읽어낼 시청자는 드물다. 설령 읽어냈더라도 그게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연인원 1000만명을 돌파한 <괴물> 때문에 극미 정서가 확산되었다는 증거는 조금도 없다. 다만 덤비면 일이 된다. 덤비면 용산참사 풍자가 되고, 2MB 조롱이 된다.  

실제인지 가상인지 따져드는 게 무의미한 쇼오락프로에, 순혈주의적 이념투쟁에서 한국에서 제일 가는 뉴라이트가 덤볐다는 건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몇달 전 신해철의 학원광고를 둘러싼 찬반 논란에서도 볼 수 있듯, 하지 않아도 될 소리, 남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자세가 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제 먼저 덤비는 놈은 거꾸러질 것이다. '월간조선발 마녀사냥 사태'도 어느새 10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다. 추세는 이렇다. 독살을 시도하는 놈은 지고, 부글거리다 어설픈 선빵 날리는 놈도 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속인 놈은 없고 속은 놈만 득시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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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史의 찬미 | 2009. 8. 31. 20:36 | Posted by 김수민

전두환이 눈앞에 있으면 오만가지 액션으로 뭉개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김종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나의 아버지는 민정계라기보다는 공화계에 가까웠던 것 같다. 1996년 총선에도 5공출신은 모조리 물러나야 한다며 신군부였던 신한국당 후보를 거부하고, 박정희의 장조카인 자민련 후보에 투표하셨다. 어렸을 적 집안에는 김종필이 썼다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를 왠지 조금 더 친근(?)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박정희, 전두환, 어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김대중이라면 그 중간쯤에 김종필이 존재하였다고나 할까.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김대중을 계산하자>에서 김종필 특유의 낭만주의를 나름대로 평가하며, 그를 군사정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든 장본인으로 일컫는다. 수많은 밴드들이 활약했던 서울시민회관을 후원했던 김종필은, 확실히 꼰대 소심남 박정희와는 달랐다. 담배 물고 그림그리는 미남자의 사진은 유명하다. 박 정권기에도 외유를 떠났고 전두환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던 과거사도, 그를 '지배블럭 내부의 온건파'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요즘 문득 김종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전에 있을 경우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왠지 차분히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김종필을 성대모사할 때 가장 자주 구사하는 레퍼토리가 "노 코멘트, 허허허~"이다. 내 기억으로는 골프를 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에게 했던 말 같다. 그것은 김종필의 주요 무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필과 그에 얽힌 한국현대사에 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될 수밖에.

내가 그를 통해 알고 싶은 건 얼추 이렇다. 첫째, 김종필은 어찌 하여 해방정국기 좌익 학생운동에 관여했는가? (그는 도피책으로 군입대를 선택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는가? 둘째, 한국전쟁의 전면전 개시일 당시 육본 정보부서의 당직장교였던 그는 그날 무엇을 겪었는가? (물론 대답을 얻어낼 가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질문이다.) 셋째, 혁명정부 최고기구에 왜 북조선 어휘라는 공격을 받아가면서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그리고 당시 그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넷째, 몇해전 '정치개혁' 시도 전까지 유유히 내려온 '사무총장-지구당' 체제는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정당체계 개편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다섯째, 김종필이 주도하던 신당(민주공화당)의 이름이 '사회노동당'으로 보도되어, 김종필과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과 맞물린 의심을 자아냈다. 또 5.16군정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나 반미국가의 늬앙스를 띄는 것들이 많았다. 혹 군정은 좌우를 국가주의적으로 아우른 정부나 여당의 건설을 생각했었는가? 여섯째, 해방정국기부터 5.16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견지한 사상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가?

물론 내가 추정하거나 기대하는 종류의 답변이 있기는 하다. 최근 나는 5.16을 다시 사고하고 있다. 국가체계가 무르익기 전의 사건을 두고 '헌정 질서의 중단'이라고 평가하는 게 꽤나 사후적이며 '보수야당'중심의 역사관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혁신적 지식인들이 5.16을 환영했거나, 적어도 윤보선-장면계열을 두둔하지는 않았다는 증언들에도 몇해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가령 리영희는 임헌영과의 대담(<대화>)에서 제5대 대선을 '극좌 출신의 극우'와 '민주를 가장한 수구'의 대결이었다고 요약하며, 자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구술했다.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5.16을 '반동혁명'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박정희 정권을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신'은 neo보다는 new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5.16은 4.19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950년대 소장 지식인이 살아남기에 가장 좋았던 곳, 당시로서는 가장 근대적이었던 조직이 군부였다. 그리고 5.16 주체들이 문제삼았던 윗세대나 상부의 무능과 부패는 현실이었다. 비록 자의적일지라도 5.16이 4.19정신의 계승을 선포한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5.16을 비판하려거든 민족(국가)적 엘리트주의라는 근본적인 사상을 건드려야지, 이를 여대야,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반민주의 틀에 끼워맞춘다면 숱한 부분들이 왜곡될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조병옥이나 윤보선, 장면 등이 대단히 훌륭한 위인들인 줄 알았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척을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16을 박정희와 동일시하는 것도, 최저 수준의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기우뚱한 제3공화국과 유사 파시즘적 총화단결 체제를 지향한 제4공화국을 구분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박정희는 하나의 극단이었다. 그 대척점에 뒷날 5.16의 의의를 부정하게 된 5.16주체 박창암이 있었다(일제 말기 군부내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에 가담했다는 박창암은 여운형계열의 지식이었다고 한다). 5.16의 중심점은, 특히나 사상사적으로 규명하자면 김종필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종필은 기획가, 이론가로서의 면모도 강했다. 그는 북조선 정권의 어느 누구보다도 트로츠키를 닮았다. 현 정치인 중에 김종필과 가장 닮은 인물도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나 친노그룹 쪽에 있을 것 같다.

2004년 총선,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유세에 나온 어느 선거운동원들은 "조용필!"을 연호했다. 델리 스파이스의 <노인구국열사대>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의 한 대목도 자민련과 김종필을 조롱했다. 김종필은 (김윤환과 함께) 낭만과 풍류의 정객인 동시에 정치권의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당해왔다. 누가 예술은 길지만 인생을 짧다고 했나. 김종필의 오늘과 옛날을 견주면 그런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노코멘트하기 전에 알아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는 꾸준히 탐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전두환과 너무나 다른 점이 아닐까.

그에게, 또는 그에 관해 묻고 싶은 건, 청구동에서 쫓겨나더라도 두가지가 더 있다. 첫째, 1960년대 중후반 박정희보다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도 그랬나? 그 당시 어떤 야심을 가졌나? 둘째, 장인인 박상희 선생은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야, 노 코멘트... 으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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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죽어라 민족주의, 애국주의

Forum | 2009. 8. 28. 20:42 | Posted by 김수민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서양사학자가 순간 내뱉은 말에 아연했다. "우리나라는 통일이라는 과제도 있고... 그래서 민족주의를 극복하거나 탈피하자는 주장은 잘못됐다." 걸핏하면 뜬금없이 꺼내드는 통일론을 들으면 자기네들이 언제 그렇게 통일을 고민했는지 의심부터 들고, 동시에 통일이라는 게 민족주의에 의거해야만 하는 것인지, 혹은 통일은 어떤 상위가치의 통제도 따르지 않는 지상명제인지 따져묻고 싶다. 오늘날에 들어 같은 민족이니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는 한(조선)반도 주민의 살갗에 닿지 않고, 그 사이 대거 생략된 평화론이 힘을 잃을 경우 민족통일이든 평화체제구축이든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거개의 통일론과 그에 기반한 민족주의는 분단현실을 이용해 다른 논의와 노선을 억압하는 분단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것은 보혁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의 탄생 배경은 분명 분단현실이었다. 그러나 반인권악법을 폐지하는 과정이나 결과가 분단의 반대말이라는 '통일'에 달려 있지는 않다. "남북이 화해하고 있고, 통일도 해야 하니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아 그러쎄여? 얼마 전부터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통일은 요원하니 국보법을 놔둡시다." 이것은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논쟁을 이끈 대화방식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공세에, 그 법은 날 때부터 착오적이었다는 진실은 묻혀지고, 시대가 어떤지를 두고 소모적으로 다투다 날밤을 샜다.

민족주의는 과거사 정리와 청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몇해 전 수업시간, 한 학생은 숭실대학교의 신사참배 거부투쟁을 평가절하했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동이지 민족을 위한 싸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었다. "민족이 됐든 종교가 됐든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이었죠. 민족주의적 잣대로 의의를 제한한다면, 반제국주의 역사가 제대로 기려질 수 있겠습니까?" 백낙준 친일 심포지엄에 나온 어느 연세대 교수들은 백낙준의 일제부역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민족교육에 이바지한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무엇이 민족을 위한 길인지 논쟁할 이유는 없다.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매우 유동적이라, 아무나 차지할 수 있고 끝없이 논적을 욕하고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민족주의는 제한적이다. 태평양전쟁에 짓밟힌 여타 아시아국가의 시민들에게는, 백낙준이 한국민족교육에 이바지했든 말든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사실만 뚜렷할 뿐이다.  

민족주의 극복은 국가적 과제나 민족문제를 회피할 목적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견제하고 탄압한 구체적인 진실과 보편적인 규범을 되살린다는 명분을 가진다. 외세와 분단이라는 실체를 외면할 수는 없다. 민족문제는 여전히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족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이가 민족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민족문제 연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리영희나 반제국주의, 반오리엔탈리즘을 철두철미하게 견지하는 박노자 등이 그걸 증명한다. 탈민족주의자가 국가나 민족을 도외시한다는 비난에 응답해야 할 책무는 없다. 오히려 민족문제가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면서 왜 그리 곧죽어라 민족주의를 외쳐대고, 자신들의 과업을 굳이나 민족주의로 개념화하는지, 민족주의자가 답해야 할 일이다. 

근래에는 애국주의 타령까지 끼어드는 형국이다.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곁에서, 양면을 가진다. 첫째, 애국주의는 곧잘 '한민족'보다 '대한민국 국민'에 기반을 둠으로써 분단이나 외세, 반공주의를 생략하거나 축소한다. 그래서 자칫 보수적으로 흐를 여지가 크다. 둘째, 애국주의는 기존 민족주의의 종족적 혈통적 요인을 벗어던지고 '민주공화국'과 같은 국가정체성이 스스로를 결부시킴으로써 근현대적으로 진일보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왜 애국'주의'인가? 시장이 유용하다 믿는다고 해서 그가 시장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나 국가를 중시한다고 해서 그를 사회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제게 주어진 우연을 사랑하여 애국자가 될 수 있다. 헌법에 씌인 국가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고, 아직 꽃피지 못한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수도 있다. '조국'을 피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에게는 반전평화가 곧 애국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 맨앞에 '애국'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나아가서 애국주의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에둘러 갈 것 없다. '민주적 애국주의자'든, '열린 민족주의자'든 소리높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보다 진보적, 좌파적인 세력을 비난하여 소위 민주개혁진영, 진보진영에서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다른 쪽으로는 '애국 대 매국'으로 단순화된 이 나라의 담론지형에서 보수파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알리바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현재 진보좌파진영에서 국가의 개혁과 정치권력 획득을 도외시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과거 혁명주의의 잔향이 짙을 적에도 일군의 지식인, 운동가들은 퓰란차스를 끌어와 연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연이어 취조 심문한다. "너는 조국을 사랑하는가?" "이제는 좀 민족주의를 긍정하는가?" "왜 애국주의자가 되지 않는가?"

호통치고 캐묻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고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많기는 많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개혁' 진영을 분열시키는 짓이고,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진영 주류의 공고한 지도력을 훼손하기에. 자연히 그들은 민주당계열이 한나라당과 가장 다른 대목인 '평화통일'을 강조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정부를, 충분한 역사적 조명이나 개념 정리를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파시즘이라 규정한다. 그래야 단결할, 내부(그들의 입장에서는 내부다)를 단결시킬 빌미가 생기니까.

10여년간, 최소한 정서적으로나마, 여당 생활도 해본 그들은 책임정치의 탈을 쓰며 뒤늦게 지략가의 풍모를 갖추려 애쓴다. 민족주의 및 애국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권력을 쌓아나가겠다는 심산이다. 고생이 많다.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라는 휘장을 두른다고 해서 그게 득표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대중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성향은 자신을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라고 부르길 즐겨함으로써 생겨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외쳐대는 이들은 1980년대의 NL이나 PD와 무척 닮았다. 알고 보면 그다지 체계적이지도 않은 제 이론에 현실을 끼워맞추고, 특정한 하나의 기둥을 세워 환원주의를 행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까래나 창살로 만들어버린다. 조야하고, 철이 없다.

초등학생 시절 내 동생은 학교 견학을 통해 박정희 생가에 들렀을 때 묵념하는 순서에서 고개숙이지 않았다. 나는 군복을 입었을 때를 빼면, 고2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와 나의 행위는 충성 강요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그나 나나 적발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인간들이, 딱딱하게 앞만 바라보는 인간들이, 거부자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들이여, 그렇게 맹세하는 가운데 고작 곁눈질하며 강요하는 주제에 타인의 삶과 사유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겠는가. 나는 이들과의 사상논쟁이 진보진영 내부토론으로 불려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박정희 좌파'에 불과하다.


덧1: 6.3 학생운동세력은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화형시켰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진짜며 박정희를 사이비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상당수는 박정희의 자장으로 빨려들어갔다. 필연적이었다. 민족과 민주는 한국사에서 서로 어울리며 길을 뚫어왔지만, 결국은 어디에 더 역점을 둘 것인지를, 양자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최일선에 선 이명박, 이헌재나 이세기 같은 기득권자들, 사카린밀수 규탄자였던 정형근, 공화당과 민정당을 거친 김원웅 등은 민족주의(적 엘리트주의)의 행로가 어디인지를 훌륭하게 입증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정권 청와대에서 근무한 최장집이, 한동안 열린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가 끝내 민족주의 자체를 회의하기 시작한 것은 극적인 변화였다. 이 역시 어떤 민족주의의 진로 가운데 하나로, 민주주의의 맥락에 든 민족주의는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사례다. 최장집에 반해, 백낙청과 창비 진영은 모순을 껴안고 있으며, 김원웅은 그 모순이 가장 첨예한 사례다. 물론 모순 정도는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갈 수가 있다. 그렇지만 모순으로 가릴 수 없는 본색이라는 게 있다.

덧2: 작년 교생실습 당시,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 겸 후배들에게 내가 남긴 말.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는 민족사관에 근거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등의 잣대들이 있는 거죠. 이들은 각자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구체적인 현실을 깨닫고 떠받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억압한다면, 그 사관은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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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조선신민당, 조봉암

史의 찬미 | 2009. 8. 22. 05:07 | Posted by 김수민
한민당 지역간부인 장인이 탈퇴를 권유하기까지, 김대중이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별스럽지는 않다. 건준에는 그리고 안재홍과 같은 우익이 한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그걸 가지고 좌경, 용공 시비를 거는 것도 우습다. 그런데 미처 몰랐다가 김대중이 한때 조선신민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에 다소 놀랐다. 조선신민당은 북과 남에 모두 있었는데, 북에서는 최창익,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되어 중간계급, 지식인, 농민들을 규합하였고, 남에서는 백남운이 중심이었다. 북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이랑 통합해 북조선노동당이 되었고, 백남운 쪽은 남조선노동당에 결합하지 않고 여운형, 조선공산당 비주류와 따로 합당하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었다. 정강으로 치면 공산당보다는 오른쪽에 있고, 여운형의 인민당보다는 왼쪽에 있는 당이었다. 어째서 김대중이 인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신민당에 들어섰는지 연유가 궁금해졌다. (탈퇴 사유는 잘 알려져 있다. 건준이나 신민당이 계속 좌경화되어 민족주의적인 자신의 성향에 그리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은 김대중이 조봉암을 언급하거나 기린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박태준, 김종필 따위의 다른 여야대표들과 함께 복권사업에 참여했던 것을 빼고는 말이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나 피해대중 대변 노선은 분명 김대중의 3단계통일론이나 대중경제론과 유사하다. 김대중이 기존 보수야당의 한계를 조봉암노선으로 극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봉암에 대해 딱히 언급한 바가 없다. 옛날 옛적에야 색깔공세를 의식하고 본인이 보수정객을 자처했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와 과거사정리가 진행된 다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왜 밝히지 않는가보다는, 그가 조봉암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박정희를 연구할 때, 특히 인간적 심리적 측면을 추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시기가 해방 정국기에서부터 한국전쟁 직전에 이르는 시기다. 그때 청년 박정희는 자신이 충성한 일제의 패망, 좌익 인사인 형의 죽음, 남로당 참여와 적발, 군부로부터의 퇴출, 애인과의 결별 등으로 매우 심신이 피폐해졌다. 아마 1917년생으로서 30대 초반에 겪었던 그 시절은 그에게 쓰디쓴 절망과 엄청난 권력의지를 안겨다주었을 공산이 높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30대는 어떠했을까. 전도유망한 청년실업가에서(김대중은 한국 최초의 CEO 대통령이다), 연거푸 선거에 낙선하는 정치지망생이 되었던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다듬고 굳혀나갔을까. 야당의 대표자 시절, 대통령 시절의 행적과 공과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 당시의 김대중이 더 궁금하다.

위 사진은 드라마 <제3공화국>의 한 장면이다. 5.16 쿠데타 이후 당선자 등록증을 받으러 당돌하게 국회로 들어가는 김대중. <서울의 달>로 뜨기 직전의 백윤식이 이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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