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여행길에 올랐던 날은 아마도 대선을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앞둔 시점이었다.
A: 이번엔 바까야 돼. IMF도 터졌고 하니까.
B: 지랄 바꾸긴. 김종필이 국무총리되는 게 바뀌는 거냐.
A: 그럼 이번에 또 정권을 연장시켜줘야 되는 거야?
B: 김대중-김종필보단 이회창-조순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일까?
C: 그럼 넌 누굴 지지하는데?
B: 권영길이 사람은 젤 낫지.
C: 암튼 전두환이가 김대중을 완전히 쫓아냈어야 했는데...
A, B: 조까고 있네. 넌 빠져 임마.
2000년에 나는 유시민이 쓴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을 읽었다.
내가 1997년에 가진 생각도 유시민이랑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통합민주당 후원회장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DJ나 JP가 되는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적인 인물을 미는 게 낫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덕룡이나 이인제 등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여기엔 이회창도 들어간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이회창은 김대중보다 더 개혁을 대변했다.
언젠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쓴 일기를 들춰보니 이회창에 대한 구절이 나왔다.
나는 머리속에 '쓰면 지는 거다'에 해당하는 어휘를 모은 수첩이 있다.
그 첫줄에 씌어 있는 건 '융통성'.
내가 본 어른들이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는 남에게는 '융통성이 없다'고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동시에 그게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내가 이회창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1995년경에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주변의 어른들은 원래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고향 구미 사람들은 김영삼 다음은 김윤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박정희 다음에 대통령이 구미에서 한명 더 나온다나?
(박정희가 대통령되기 전에 구미에서 대통령 나온다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바보 같은 태도였다. 김윤환이 어딜 봐서? 이런 수준이니, "노무혀이는 절대 안 된다"는 장담 덕에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민심은 이회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회창이 통합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을 택하면서, 그리고 민정계 김윤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존경심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내 주변 어른들이 "세력이 없어서 안 된다"던 이회창은 결국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보사태로 김영삼의 역할이 줄어들고 최형우가 쓰러진 뒤 민주계에게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에는 이수성이 후보가 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이 이기더라도
당내 반대자가 많아서 결선에서 뒤집힌다는 시나리오였다.
그해 나온 고원정의 소설도 이수성의 출마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전국에 형님아우하는 사람이 몇만몇천명이라도 소용없다.
김영삼에게 "독단적인 인물에게 미래 없다"라는 말을 듣고도
"비민주적 정당에게 미래 없다"라고 받아친 이회창 정도의 깡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 국민회의 경선에서는 김대중이 정대철을 꼬마다루듯 가뿐하게 꺾고 승리했다.
정계은퇴로 가슴을 찡하게 했던 김대중은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뉴스를 보던 삼촌은 "다시 하는 게 맞지. 그럼 누가 하노?"라고 밝혔다.
몇달 전 그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읽은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갈협박하듯 당권을 내놓으라 하더니 제1야당을 깨버린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6년 총선은 철저히 삼김의 지역분할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그때 내게 '구악'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조순 지지는 유시민의 조순 지지와는 조금 달랐다.
유시민은 당선가능성을 주된 잣대로 삼았겠지만, 나는 민주화나 정권교체에 더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배움이 많지 않고 지금보다도 열 서너살이 어린 나였기에 좌우 구도나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종확정된 대선 후보 중 권영길이 제일 낫다고 한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노무현이 당시에 "조순, 권영길 후보만 도덕적이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한다.
강준만은 옛 정권 출신인 조순을 어떻게 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박정희 추모행사인가에, 김대중이 참석해 재평가 발언을 늘어놓았고,
조순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시나,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 도중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를 선언했고,
조순은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오늘날 김대중은 한미FTA 찬성론자이고 조순은 반대론자이다.
사회경제적 좌우 구도가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은 점은 그때의 강준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순은 드디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며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단안'이라는 낱말을 처음 주워들은 게 이때였다.
다소 연로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는 김대중, 김종필보다 젊거니와, 나이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졌다.
거기에 노무현 등 통추 그룹이 붙어주면 보완이 될 터였다.
지금도 기억나건대, 조순은 등장하자마자 여론조사에서 24%를 얻어 김대중에 1% 뒤진 2위를 했다.
이인제가 떴을 때 지지율이 토막났지만 둘이 단일화를 할 경우 이긴다는 조사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이인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흉내를 내면서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박정희'라는 것은 내게 중요한 준거였다. 내가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 못했던 까닭도 거기 있다.
김대중이 통일과 경제분야에 식견이 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조순은 TV토론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발언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 조순이 단일화하길, 그래서 민주연합이 성사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DJP의 연합이었다.
그때 나는 그룹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선생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다.
1997년 당시에 내가 성인이라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굴 찍었을까?
김대중이나 이인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표 버리는 심정으로 권영길을 찍었거나, 차라리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내게 마지막 변수는 노무현이었다. 갑자기 그가 대선출마를 시사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추의 이인제 지지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때 난 저 사람이 다음에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은 아마 한동안 조순을 지지했겠지만 조순은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나는 노무현이 낄 데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내 눈에는 오히려 권영길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그때 왜 노무현이 김대중을 지지했는지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삼김을 청산하는 것보다는 일단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새 인물들의 등장에 이로웠다.
그리고 DJP연합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서 깨진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한국정치사에 큰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수와 초심을 겸비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능력이었다고 본다.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들을 두고 구룡이니 팔룡이니 말이 많았다.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들 중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정권교체'라는, 저변에 흐르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들이 30대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박태준까지 지지한다니 예전처럼 색깔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선 당일, 아버지는 밤 11시경 "에이, 마 끝났다. TV 끄자"라는 말을 남기고 주무시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을 자고 있는 어머니 눈앞에서 흔들었다.
1987년과 1992년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1997년에는 전혀 김대중 지지의사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까지 욕하는데 찍을 명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시내와 버스 안의 분위기는 촥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노인들 표정은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레코드 가게 종업원 남녀가 나눈 대화다.
"김대중이 당선이 됐네."
"거봐요."
"그렇게 찍자고 하더니. 됐어."
"오빠도 찍었잖아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으니 장사가 잘 되겠어."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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