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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칼럼니스트, 박은석

Listen to the 무직 | 2009. 12. 31. 17:14 | Posted by 김수민

음악평론가 박은석은 태준식 감독의 <필승 연영석 ver. 2.0>을 스쳐지나간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인 그가 수상자인 연영석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그것이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는다. 올해 그가 <한겨레>에 연재 중인 '세상을 바꾼 노래'를 꾸준히 읽은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박은석은 아티스츠 유나이티드 어게인스트 아파르트헤이트의 <선 시티>(1985)를 소개하며 "'선 시티'에 참여했던 49명 뮤지션의 면면을 통해, 역사의 반동에 임하는 이 나라의 대중음악 스타들을 다시 생각하며 2009년 말미를 갈무리"하였다.

 

'세상을 바꾼 노래'는 말그대로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소재로 삼는다. '바꾼'에서 풍기는 과거형 늬앙스는 올드팝 팬들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예전 일제시대 독립운동사에 접근했던 이들이 '독립된 오늘'을 믿지 않고 변혁투쟁에 나섰듯, 박은석은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글에 담아 세상을 개선하려 힘쓰고,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유리되었던, 근래에는 서로 닿을듯 말듯했던 문화적 신선함과 정치적 올바름을 연결짓는다. 연영석이나 블랙홀의 노래처럼 말이다. 

 

삽을 든 '빅 브라더'와 '사상경찰'이 '1984'년쯤에나 가능했던 방법으로 그들만의 '멋진 신세계'를 건설한다며 텔레비전을 볼모 삼으려는 지금,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은 시민적 의무와 다르지 않다.

- 길 스콧-헤론의 <더 레볼루션 윌 낫 비 텔리바이즈드> (1971년)

 

생각건대, 언론소비자 주권 운동이 범법행위 취급을 받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이 심대한 위협을 받는 지금 여기의 상황은 이 노래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 엑스레이 스펙스의 <오 본디지, 업 유어스!>(1977)

 

역설적으로, 이 노래를 정치/자본/언론 권력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의 지침이라고 의도적으로 오역한들 이제 궤변이라고 할 일은 아니다.

- 폴리스의 <에브리 브레스 유 테이크>(1983년)

 

박은석의 음악평론에 녹아든 현실 비평은 추상적 거대담론이 아니다. 그의 화살이나 과녁은 분명하다. "평범한 영웅의 위대한 도전을 허망하게 쫓아버린 우리의 실패를 기억할 일이다." 이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본 투 런>(1975년) 리뷰의 마지막 문장이었으며 게재 시점은 6월초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의 <댄싱 퀸>(1976년)을 다루며 이렇게도 썼다. "'댄싱 퀸'은 무엇보다 절충적 실용성의 승리였다. 요즘 우리 곁을 떠도는 일방적 실용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한편 스페셜스의 <고스트 타운>(1981년)에서는 초입부에서부터 경제위기로 인해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역사의 심판대로 소환되었다고 역설하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행복도시라는 아이러니한 약칭 탓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세종시 계획의 분열상에서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날지도 모를 유령도시를 떠올린다면 이 노래는 안성맞춤의 사운드트랙"이라고 추천한다.

 

그때 거기부터 지금 여기까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념의 차이를 빌미로 재앙의 위험을 외면하는 정치 권력의 비인간성이다.

- 밴드 에이드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1984년)

 

용산 참사, 촛불 진압, 그리고 법치를 빙자한 일련의 폭력적 조치들 속에서 '피의 일요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부르며 각성해야 하는 것일까?

- 유투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1983년)

 

박은석이 한국의 음악평단을 이끈 장본인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매주 연재하는 이 짧은 칼럼에도 그의 열렬한 음악애호와 꼼꼼한 조사연구의 자취가 숨어 있음은 이제 별스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읽고 나서 항상 노리에 또렷이 남은 건 문화창작이, 그중에서도 현실정치와는 거리가 멀 법한 음악평론이 이렇게 정치적이고 선동적일 수도 있느냐는 경탄이다. 따지고 보면 이 칼럼의 선배는 꽤 있다. 만화 <20세기 소년>에서 도탄에 빠진 인류를 일으켜 세우는 주인공 켄지의 노래 <밥 레넌>, 뜻하지 않게 거리의 노래가 된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이 그렇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박은석은 활자로 노래한다는 것이다. 방송출연으로 친숙했던 평론가는 오늘, 스러져가는 활자로 침체에 빠진 음악을 이야기한다.

 

인생을 바꾼 음악이 있고, 음악에 건 인생이 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음악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느끼고 감사하는 법은 망각해버린 시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무엇이다. 음악은 그렇게 우리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돈 매클린의 <아메리칸 파이>(1972년)

 

2008년 말 그는 킹 크림슨의 <트웬티 퍼스트 센추리 스키초이드 맨>(1969)의 표지 얼굴이 "가진 자의 물욕이 초래한 경제 한파와 성장 만능의 구태의연한 발상이 자초한 사회 분열이란 안팎의 위기를 살아야 했던, 올해 2008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에 다름 아니"라고 썼다. 2008년을 2009년으로 바꾸어 읽어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지난해와 달리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세밑에 다다른 처지에 이른 이 시민의 귀에는 그 문장이 더욱 우렁차게 울린다. 박은석을 2009년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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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2. 31. 03:34 | Posted by 김수민
책을 산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펼쳐 한달음에 읽어내려갔고 저녁 6시에 책장을 덮었다. 숱하게 등장한 인명을 이 독자의 머리에 입력해두기가 어려우나, 어쨌든 '부드러운 직선'보다 그냥 직선을 좋아한다는 그는 실명 거론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권용목과 김창현인데, 권용목을 향한 안타까움은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드러냈었고, 김창현과 이영순은 가히 낙선운동 대상자급이었다. 김과 이를 위시한 울산연합의 행태에서 놀랐던 것은 이들이 통일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좌절과 민주노동당 분당에 관한 회고[각주:1]가 없다는 점을 빼면, 민주노총 위원장과 구청장을 지낸 인사의 자서전으로서 여러모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특히 투쟁과 협상의 방법을 적은 메뉴얼이 인상적이다.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펼친 활동 가운데 내게 가장 경이를 안겨다준 건 골리앗 투쟁도 민주노총 위원장 활동도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라 구청장 시절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회장들과 가진 면담이다. 또 그는 곳곳에서 애국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정파주의 등 각종 집단주의를 경계하고 배격한다. 그는 견결한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돋보인 것이 탄탄한 민주주의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갖고 있었던, 구청장 시절 공문서 조작 사건에 대한 의구심도 풀렸다. 현중 활동가 여럿의 훼절에도 불구 직선으로 걸어온 그가 잘되길 빈다. 그리고 자신이 곡선도 꽤 잘 그린다는 걸 인식했으면 한다. 사실 나와 그의 이념적 거리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노총이나 연맹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굵직한 노동운동가 중에 내가 가장 덜 꺼려하는 사람이다. 이갑용은 여전히 민주노총 직선제를 주장한다. 직선제가 되면 우파(국민파)의 득세가 온존 내지 강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업장 매몰, 연맹이기주의, 정파의 패권추구를 꺾고 노동계급의 연대를 지향하려면, 조합원 개개인에게 표와 이니셔티브가 돌아가야 한다. 가입이나 조합비 납부에서도 그렇다. 내가 만일 언젠가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다면, 직선제 쟁취에 뜻을 보태련다. 노동운동의 G-드래곤, 갑드래곤의 또다른 히트작을 기다리며.    
  1. 이갑용은 문제의 2.3 당대회에서 최고의 명연설을 남겼다. 남한진보정파연합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수명을 다하기 직전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는 일심회 사건을 해당행위가 아닌 국가보안법상의 탄압으로 연계시키려는 자주파에게, "노동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며 경고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피식 웃었을 테고, 특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선동가가 그랬다면 '네가 노동자대표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갑용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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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대상 정형돈

전파낭비 | 2009. 12. 27. 19:54 | Posted by 김수민

올해 막방에서도 말을 잇지 못하고 마는...



내게 올해 연예대상을 수여할 독점적 권한이 주어진다면 정형돈에게 상을 주겠다. 심리테스트 결과를 받아든 <무한도전> 멤버들은 정형돈더러 "시청자 적성"이라고 단언했었다. 정형돈은 사이드의 구경꾼으로서 나름대로 쉼 없이 멘트를 날리고, 막상 작정하고 들어올 때는 언제나 제지당한다. 반면 민어 손질이나 도망치기 등 각종 기능에 능해, '기능인', '웃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코미디언'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정형돈의 가치이며 그야말로 '무한도전'의 화룡점정을 찍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내려간 마라도에서 병에 담긴 짜장면을 받으며 절규하고, 식사를 하겠다며 전화를 먼저 끊어버리는 노홍철을 향해 "찌롱씨, 어디 햄버거 가게, 어디 햄버거... 야, 임마!"라고 소리지르고, 단지 냄비 두껑을 남이 열었다는 이유로 "(요리가) 망했네!"를 외치는 그의 분노신공을 나는 최고의 장면으로 꼽는다. 웃기려고 했을 것 같지 않은 그 분노에 수많은 시청자는 물론이며 현장의 출연진까지 대소하였다.





이따금 그는 예능의 춘장을 뺀 수타면발 같은 분노신공을 선사한다. 정형돈표 예능 간짜장이다.


뒷자리의 김태호 PD를 부러워할 시청자가 많으리라.




그리고 그가 '웃기는 것을 빼고 다 잘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위장막이다. 그는 '남녀탐구생활'로 웃기는 것도 잘하고 거기 연기력까지 뛰어난 연기자임을 단방에 증명했다. 올해 <무한도전>의 마지막 편에서 정준하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 것도 정형돈이었다. 

더불어 <무한도전>과 MBC에게도 내년의 분투를 기대한다. 

 

뉴또라이들 발끈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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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샌로지즈 내한공연

Listen to the 무직 | 2009. 12. 16. 20:20 | Posted by 김수민
건샌로지즈 싫어한다. 내한공연에 갔을 리 없다.

김작가가 쓴 건샌로지즈 내한공연 혹평에 댓글 논란이 한창이다.

당일 라이브 수준이나 사운드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바람직하다.

추억과 반가움?
신촌 놀이터에서 똘똘이 앰프 놓고 공연해도 만족하는 게 팬 아닌가? 이해한다.
다만 팬은, 팬으로서는 거기까지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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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질투심 탐구생활

전파낭비 | 2009. 12. 13. 20:31 | Posted by 김수민
남녀탐구생활에는 정가은, 정형돈이 나와요. 둘은 정씨라는 것만 빼면 균형이 맞지 않아요. 샤방샤방 꽃미남을 출연시키거나, 여자를 신봉선으로 바꿔야할 것도 같아요. 하지만 시청자들, 불만은 새발의 손톱만큼도 없어요. 보기엔 균형이 안 맞아보이는데 저울추는 0점이에요. 어떤 소개팅 프로에서도 찌질한 남자가 부족할 거 없는 여자랑 만나요. 혹시 여자 눈높이를 못 맞추는 여성 차별일까요. 아님 남자 평균 수준을 발닦개로 까는 남성 희화화일까요. 그런 소릴할 바엔 걍 닥치고 남녀질투심을 탐구해 보아요.

먼저, 질투하는 남자 편이에요. 남자는 오늘도 길거리에서 안구질을 해대요. 저 여자 얼굴, 그 여자 다리, 요 여자 가슴을 여친의 눈을 피해 감상해요. 여자와 연애를 시작한 뒤에 세상에는 여자가 더 많아 보여요. 누가 그러는데, 여자는 하나로는 부족하고 둘은 너무 많대요. 둘이 너무 많은진 몰라도 하나로는 부족한 것도 같아요. 아씨, 여친한테 걸렸어요. 다음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녀야겠어요. 안되겠다 싶었는지 어느날 여친이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해요. 친한 친구라며 왠 사내놈을 데리고 왔어요. 다 알아요. 콧방귀를 껴요. 척 보니 나보다 얼굴이 못났어요. 일류대에 다닌들 소용 없어요. 또 데리고 왔어요. 얼굴은 쫌 생겼어요. 하지만 나보다 키가 작아요. 또 데려와요. 학벌도 되고 얼굴도 되고 키도 괴는데, 애가 '애'에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그 남자에게 "앞으로 형이라고 해!" 해요. 데려온 남자가 가고, 둘만 남을 때 남자는 "남자는 남자가 보면 아는데, 그 사람은 쫌..."하면서 자신감에 가득찬 씨부리머가 돼요. 여친은 남자가 질투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지만,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오히려 잘나뻥질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질투심 유발에 실패한 여친을 보며 남자는 뿌듯함으로 사우나를 해요. 하지만 이런 남자를 한방에 보낼 수 있어요. 사실 이 남자도, 자기보다 하나라도 나은 부분에 순간순간 열등감으로 비눗칠을 했거든요. 뭐 하나 꿇릴 거 없는 남자를 데려오면 남자는 바로 야코 죽어요. 만일 힘센 남자랑 팔씨름이라도 해서 지게 되면, 남자는 그날로 확인사살당해요.

이번엔 질투하는 여자 편이에요. 여자는 남자에 비해 길거리 안구질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TV에 나오는 남자, 영화에 나오는 남자, 무대에 오른 남자, 사진에 나오는 남자, 유심히 쳐다봐요. 이거 직빵이에요. 남친은 바로 열폭해요. 그러자 남친의 질투심 유발이 시작됐어요. 남자는 평소에 하던 안구질을 더 열심히 해요. 이 시키가 아예 선글라스를 끼고 왔어요. 눈탱이 밤탱이를 만들어 테 없는 선글라스를 하나 선물하고 싶어요. 하지만 여자는 다른 여자를 질투하기보다는 남자의 지조 없음에 짜증나는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지가 나 말고 딴 여자를 엥간히나 사귀겠어요. 남친은 눈탱이 밤탱이가 돼도 나를 떠나지 못할 거라 믿어요. 남친은 또 어디서 배워왔는지 다른 여자를 자리에 불러요. 잘못 삼긴 해파리 냉채처럼 질투를 목구녕에서 쭉쭉 뽑아내려고 해요. 지가 아는 여자 중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델꼬 왔어요. 어쩌라고. 해파리가 "저런 여자가 너를 좋아할 것 같니?"라며 기어나올 것 같아요. 여자는 남친의 아는 여자가 메고 온 명품 가방과 구두, 옷을 스캔하기에 바빠요. 또 아는 여잘 데려왔어요. 이번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는 쭉쭉 빵빵이에요. 하지만 역시 이런 여자가 남친을 남자로 볼 것 같진 않아요. 대신에 나도 운동해서 저 여자처럼 될 거라고 삼일천하를 작심해요. 또 데려왔어요. "뭐야 별로잖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존심이 팍 상하고 화딱지가 앉아요. 후시딘도 소용 없어요. 저 정도 여자가 뭐가 그리 괜찮다고. 여자는 '아야여오요우유으'예요. 어이가 없어요.

이번엔 남녀탐구생활 보너스 편- 남자와 여자의 야동 감상이에요. 야동 중에는 특정한 성 하나만 나오는 게 있어요. 남자는 여자만 나오는 야동을 봐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요. 근육질에 거시기 큰 남자가 나오면 열폭하니까요. 반면 여자는 남자만 나오는 야동을 보지 않아요. 짐승남도 사양이에요. 여자는 동영상 속 여자에 감정이입하니까요.

정형돈은 조금 뚱뚱하기는 하지만, 양복 입으면 직장인으로 둔갑하고 츄리닝 입으면 실업자로 빙의해요. 대한민국 표준남이라잖아요. 정형돈이 남자대표로 나오는 것을 남자나 여자나 다 받아들여요. 한편 정가은이 대한민국 평균녀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남자는 남자대로 정가은을 침흘리며 쳐다보고, 여자는 정가은이 재현하는 생활을 침넘기며 관찰해요. 결론적으로 아무도 불만 없어요.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 남자 몰라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생물학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예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도 있어요. 다만 남자 다수의 경향과 여자 다수의 경향, 그리고 그 사이의 차이라는 게 있을 뿐이에요. 그 원인이 무언지는 잘 몰라요. 그냥 차이를 보며 공감하면 웃는 것이죠. 이상 남녀탐구생활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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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간들도

Free Speech | 2009. 12. 12. 20:49 | Posted by 김수민
좌파 행세를 한다니, 한국사회는 그래도 꽤 평화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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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루저란 무엇이었는가?

전파낭비 | 2009. 12. 11. 16:11 | Posted by 김수민
나와 친구들이 루저라는 말을 영어시간 바깥 일상에서 처음 썼던 건 고교 졸업, 대학 입학무렵이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인디야."
"인디? 인디는 뭐 그냥 혼자 있으면 다 인디인 줄 아나?"
"음, 그럼 나는 루저야."
"야 루저는 아무나 되나?
"그럼 도대체 뭐라 그래야 되냐? 비주류? 마이너? 언더그라운드?"
"웃기고 있네. 술이나 마셔라."

당시 우리에게 '루저'란 '인디', '비주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단어였고,
밤길에 "나(우리)는 'Nothing To Lose'"라고 외치곤 했다.

몇달 전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어느 형이
"논문제목에 'loser'라는 단어를 쓸 텐데 적확한 한국어 번역어가 뭘까?"
라며 물어왔다.
"글쎄요. 패배자, 실패자, 낙오자...?"
정답이었지만 어감이 살지 않아 몇 가지를 더 덧붙였다.
"찌질이, 찐따, 슈레기..."
그린데이의 'Basket Case'나 라디오 헤드의 'Creep'에 비견될 만했다.

'루저'는 예전 나와 친구들이 쓸 적보다 훨씬 가벼운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장난처럼 남에게 툭툭 던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비장미나 마지막 자존심 따위는 덜어내버린 상태였다.

왜 '루저 발언'에 발끈하는가, 보다
그들은 왜 '루저'라는 어휘를 썼는가, 를 생각하다 떠오른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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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의 비하인드 스토리

Listen to the 무직 | 2009. 12. 11. 16:10 | Posted by 김수민
1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는 김현식 트리뷰트 방송으로 진행되었다. 김현식을 술회할 때 엄인호와 함께 빠질 수 없는 인물인 김종진, 전태관이 출연했다. 흥미로운 몇가지 이야기들 중에 유재하가 밴드에서 탈퇴한 사연이 있었다. 김현식이 후배들에게 곡을 받을 때 유재하는 나중 자신의 음반에 들어가게 되는 곡 전부를 줬다. 그러나 김현식은 한곡씩만 받는다는 취지로 박성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김종진의 <쓸쓸한 오후>을 선택했고, 유재하의 곡 가운데서도 <가리워진 길>만을 골랐다. 상심한 유재하는 그래서 탈퇴했고 자작곡들을 손수 묶어 음반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2 - 인터뷰 편>(선)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밝힌 비하인드 스토리에도 실려 있다. 그들이 꺼낸 이야기는 둘인데, 나머지 하나가 유재하의 죽음에 얽힌 사연이다. 운전을 못했던 유재하가 운전면허증을 땄던 날이 바로 11월 1일이었다. 그는 면허증 획득을 자축하는 파티를 하고 나서 직접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내놓기 다소 꺼림직한 그의 실수로, 우리는 한가지를 잃었고 한가지를 얻었다. 잃어버린 한가지에 대해 따로 주절거릴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얻은 한가지는 그의 유작이다. 단 하나의 음반은 마치 전집처럼 남았다. 그 음반의 실린 이 곡 저 노래는 김현철, 신승훈, 유희열에 이르는 흐름을 두루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꼭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유명한, 우연의 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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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2. 11. 13:40 | Posted by 김수민
다녔던 대학교의 도서관이 졸업생의 일상적 출입을 사실상 금했다. 학기초에 신청을 해야 한단다. 뒤늦게야 안 것은 반년 넘게 거길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때 출입체크기계가 이상한 반응을 했다. 아, 그게 그거였나 보다. 졸업생은 책을 빌리려고 해도 30만원쯤인가의 금액을 평생동문회비로 내야 했는데 이제 출입도 따로 신청해야 한다. 더러워서 안 가지만, 갈 이유도 없다.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삶'. 이루지 못했던 꿈이 올 한해 피어오르는 중이다. 최근 3, 4년간 누가 내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면 바로 답을 하지 못했었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자료'에 불과했다. 책의 외양을 하고 있어봐야 한낱 자료뭉치였다. 묶고 엮는다고 다 책이 아니다. 冊의 가로획은 독자가 긋는 것이다. 언젠가 경제위기가 닥치게 되면 주저 없이 책을 팔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는 데 20년이 걸린 셈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멍청해지는 인간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진도가 빨라지기는 했다. 저렇게 멍청해지느니 이렇게 멍청한 게 낫겠다. 책이라고는 좀처럼 읽지 않는 삶이란 글 같은 것은 남기지 않는 삶과 꽤 포개어질 것이다. 이제 쓸 글도 별로 없다. 예전에 내 글을 읽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들려줄 예전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가 드물다. 결국은 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책을 자료로 전락시켰듯 글을 메모로 강등하면 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칼의 꼬붕이 된 펜이 펜을 못 구한 칼을 이겼을 뿐이다. 펜을 버리고, 아무도 참칭하지 않고, 허공에만 나의 칼을 휘두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버려야 하고, 그 다음에 버릴 것들을 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무소유의 비장미를 풍겨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몰락이어야 한다. 서서히 꺼지기보다 확 타오르다 사라지는 게 낫다는 어느 뮤지션의 유언은 헛소리다. 당신도 서서히 꺼진 거라고. 자살은 말야. 인간만이 가능하다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자연사거든. 제 명에 죽은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책과 글, 활자에 얽힌 비루한 인생이 굳어져서, 나는 또다시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일 테다. 그래도, 가능하면 덜 읽고 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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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친일

史의 찬미 | 2009. 12. 10. 16:44 | Posted by 김수민
안중근의 10.26의거를 기념하여 얼마 전 동양평화론 조명 논의가 있었다. 물론 그가 테러를 결심했지만 사상적으로는 평화주의였다는 수준으로 귀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토론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곱씹을 거리 하나는 건졌다. 그것은 '평화'보다는 '동양'에 있다. 안중근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아시아주의자라는 점이다. 이 아시아주의가 제국주의와 단절적이거나 차별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개화기 아시아주의는 개화된 일본과 함께 한국과 중국이 공영해야 한다는 사상이며, 여기에는 앞서 나간 사회에 대한 동경, 그러니까 사회진화론이 포함되어 있다.

위암 장지연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는 소식에 그 유족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많은 이들도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을사조약을 맹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장지연의 일제부역행위는 진실이다. 그는 1911년 11월 2일자 <경남일보> 지면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시를 실었으며, 1915년 초에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총독부를 칭찬하였다.



장지연은 변절자인가? 그렇지 않다. 한일병합 이후 그의 행보는 필연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애국적 사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반일과 반제는 아니다. 개화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민족주의와 애국은 곧 반일이라는 등식부터가 잘못되었다. 장지연은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황성신문>에서 일본의 승리를 염원했다. 황성신문과 당대 개신 유림은 백인종에 대항하는 황인종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 국제적인 패권주의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고, <대한매일신보>와는 달리 반일적이지도 않았다.[각주:1]

'시일야방성대곡'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건 동양평화의 비전이 무산되면서 새어나온 배신감의 표현이었다. 그점에서는 안중근과 닮았다. <황성신문>의 친일 논조는 을사조약 직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독립 유지를 전제하고 있었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 일본과의 공영에 몰두하였다. 이는 힘 센 나라, 먼저 개화한 나라와 더불어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사회진화론의 발로였다. 많은 민족 인사들은 이렇듯 전쟁찬양과 인종주의에 협력하면서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달리 태생적으로 저항적, 해방적이었다는 통설을 개화기 역사는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도 그 출발은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다.)

반박 뿐인가. 일제의 통치가 본격화될수록 뚜렷이 입증된다. 3.1운동에 앞서 잠시나마 이완용조차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영입될 기미가 있었다. 그걸 사양한 건 이완용 자신이었다. 국가대표 친일파마저 민족대표로 자리매김하는 마당에 일면 반일적인 듯한 인사가 일제부역자가 되는 건 별 일도 아니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처럼 일본의 강성함을 찬탄하며 자민족의 현실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철두철미한 약육강식론자로 거듭나 제국주의를 합리화했다. 피해대중의 고통보다 자신의 명망과 이익이 더 소중했던 지주, 자본가들도 독립을 포기한 뒤 자치론을 펴는 '타협적 민족주의'에 그쳤다. 심지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조차 1930년대 후반께 잠시 일본이 모색했던 새로운 길, 동아신질서론에 현혹되어 전향하는 사례도 있었다.

신채호는 이와 정반대의 길로 고집스레 걸어간 인물이다. 그는 사회진화론자였으나 그것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함을 간파하고 사회진화론을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주의자였지만 말기 그 민족주의에는 무정부주의까지 섞여들어갔다. 식민지배 뿐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독재에 저항한 좌익들(물론 이들이 정녕 사회진화론을 떨쳤는지는 좀 더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소비에트연합에 기댄 일부의 행태는 '사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 아닌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중도파로서 '균등'을 앞세운 조소앙, 국제주의적인 신민족주의를 제시한 안재홍 등이 모두 사회진화론에 반대한 지식인들에 속한다. 사회진화론에 반대하지 않고서 온전히 반제국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일제 말기 김활란, 백낙준 등이 내심은 친미파였으나 일제 권력에 굴종한 '전쟁협력자'였다면[각주:2], 장지연 같은 인물은 민족중심적 사고를 갖춘 동시에 아시아 인종주의자, 사회진화론자였다. 양쪽 모두 민족/반민족, 애국/매국, 친일/반일이라는 기존의 구도로는 논거들의 우격다짐만 계속될 따름이다. 개화기 우국지사들에게서 지나치게 반제국주의의 모범을 찾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욕을 을사오적에게만 퍼붓고 있지는 않은지, 본심은 다른 쪽이었다는 변명으로 구체적인 부역행동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되돌아볼 때다. 궁극적으로 친일청산의 동력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가치들-평화,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에서 나와야 한다.
  1. 대한매일신보에 관한 접근도 다각적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경영자인 베델에 대해서다. 지금까지 그를 그저 서구에서 날아온 구원자로 채색하는 시도만 있었다.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기는 했으나 영국인 거류지 상인들은 이 동맹으로 잃은 이익에 민감했기에, 베델이 인 집안 출신으로서 반일 정서를 가진 측면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으로]
  2. 박정희 역시 교사 시절 반일적이었다며 친일파가 아니라고 두둔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내심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불 속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없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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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Free Speech | 2009. 9. 27. 16:56 | Posted by 김수민
빛좋은 품성보다는 어둑한 배려를. 예전 강연회를 주최할 때면 늘 뒤풀이에 관해 세운 원칙을 되새겼다. 주최자는 연사 곁에 앉지 않는다. 모두 그럴 필요는 없지만 나는 가장자리에 앉는다. "평소 참 뵙고 싶었습니다"하고 알은체하기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선수'들이 아니라 손님들이 연사 곁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주최자는 그쪽 곁에 앉아 대화해야 한다. 뭐, 한번은 예외가 있었다. 단 두명이서 고전하며 준비한 강연회가 있는데, 다들 내게 고생했다며 연사와 함께 중간쪽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대신 2차에서는 연사 곁에 앉지 못한 방문자들 가까이에 있었다. 

얼마 전 촛불시민들이 마련한 어느 자리에 갔다. 말씀하시기가 불편하신 분이 계셨다.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궁금한 점을물어보려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분들은 대화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성격이신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말을 전해주었어야 했는데 뻘쭘하게 앉아 있던 터라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분은 서너차례 그런 일을 겪다가 조금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일찍 일어난 것이 소통을 포기해서인지 다른 사정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빈자리가 안타까웠다. 나는 마음 씀씀이가 대범치 못해 이런 기억은 두고두고 남는다.   

크게 안타깝지는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비슷한 기억들이 더 있다. 작년 여름 경찰과 대치하다가 밤을 샜던 어느 날, 옆에 있던 어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남에 사는 스무살 청년이었다. 그는 하남시민이 추진하는 주민소환투표에는 찬성하지만 화장장을 향한 반발은 집단이기주의이라고 했다. 자신의 동생이 고등학생인데 자신의 고교 시절 선생이기도 한 이가 촛불집회참여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서, 친구들과 몰려가 따졌다는 일화도 들었다. 겪은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현장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참 뒤 그와 나와 나의 일행은 귀가했는데, 지하철에 내려가기 전 설렁탕 한술이라도 같이 뜨고 헤어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흔히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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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단상 (속)

Listen to the 무직 | 2009. 9. 25. 18:15 | Posted by 김수민
로이 슈커에 따르면, 월드 뮤직은 인위적으로 보존된 음악이 아니라야 한다. '국악'은 이 조건을 날렵하게 빠져나갈 수 없다. 한국 땅에서는 월드 뮤직의 물줄기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대중의 내면 깊이 각인된 '전통가요'는 존재한다.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뽕작 매니아는 극히 드물겠지만 그들도 뽕짝을 부른다. 내가 'MT 트로트'라고 부르는 그 흐름은 뽕짝이 가요프로그램의 중심에서 밀려난 뒤에도 명맥이 끊어진 적 없다. 

가령 한국의 록 매니아 가운데 어려서부터 블루스를 듣고 새긴 이가 몇이나 될까. 독특한 가정환경을 배경에 두지 않은 한 힘든 일이다.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가지는 차별성을 보라. 그렇다고 다분히 한국적인 음악으로 어떤 장르든 소화하기에는 대중의 기호가 걸린다. 블랙홀이 초창기 '정통 록 매니아'에게 받은 냉대를 상기하라. 한국에서 음악을 시도하는 대부분은 자신이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음악과 자신이 동경하고 하고 싶은 음악 사이의 괴리에서 출발한다. 나는 영미팝을 참고하고 추종하고 베끼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청취자 및 예비 창작자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다양한 장르에 노출할 수 있도록, 트렌드와 무관하게 각자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있는 음악에 애정을 갖고 도전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아무리 표절에 쌍심지를 켜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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