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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조선신민당, 조봉암

史의 찬미 | 2009. 8. 22. 05:07 | Posted by 김수민
한민당 지역간부인 장인이 탈퇴를 권유하기까지, 김대중이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별스럽지는 않다. 건준에는 그리고 안재홍과 같은 우익이 한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그걸 가지고 좌경, 용공 시비를 거는 것도 우습다. 그런데 미처 몰랐다가 김대중이 한때 조선신민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에 다소 놀랐다. 조선신민당은 북과 남에 모두 있었는데, 북에서는 최창익,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되어 중간계급, 지식인, 농민들을 규합하였고, 남에서는 백남운이 중심이었다. 북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이랑 통합해 북조선노동당이 되었고, 백남운 쪽은 남조선노동당에 결합하지 않고 여운형, 조선공산당 비주류와 따로 합당하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었다. 정강으로 치면 공산당보다는 오른쪽에 있고, 여운형의 인민당보다는 왼쪽에 있는 당이었다. 어째서 김대중이 인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신민당에 들어섰는지 연유가 궁금해졌다. (탈퇴 사유는 잘 알려져 있다. 건준이나 신민당이 계속 좌경화되어 민족주의적인 자신의 성향에 그리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은 김대중이 조봉암을 언급하거나 기린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박태준, 김종필 따위의 다른 여야대표들과 함께 복권사업에 참여했던 것을 빼고는 말이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나 피해대중 대변 노선은 분명 김대중의 3단계통일론이나 대중경제론과 유사하다. 김대중이 기존 보수야당의 한계를 조봉암노선으로 극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봉암에 대해 딱히 언급한 바가 없다. 옛날 옛적에야 색깔공세를 의식하고 본인이 보수정객을 자처했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와 과거사정리가 진행된 다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왜 밝히지 않는가보다는, 그가 조봉암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박정희를 연구할 때, 특히 인간적 심리적 측면을 추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시기가 해방 정국기에서부터 한국전쟁 직전에 이르는 시기다. 그때 청년 박정희는 자신이 충성한 일제의 패망, 좌익 인사인 형의 죽음, 남로당 참여와 적발, 군부로부터의 퇴출, 애인과의 결별 등으로 매우 심신이 피폐해졌다. 아마 1917년생으로서 30대 초반에 겪었던 그 시절은 그에게 쓰디쓴 절망과 엄청난 권력의지를 안겨다주었을 공산이 높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30대는 어떠했을까. 전도유망한 청년실업가에서(김대중은 한국 최초의 CEO 대통령이다), 연거푸 선거에 낙선하는 정치지망생이 되었던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다듬고 굳혀나갔을까. 야당의 대표자 시절, 대통령 시절의 행적과 공과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 당시의 김대중이 더 궁금하다.

위 사진은 드라마 <제3공화국>의 한 장면이다. 5.16 쿠데타 이후 당선자 등록증을 받으러 당돌하게 국회로 들어가는 김대중. <서울의 달>로 뜨기 직전의 백윤식이 이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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