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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택리지

2010. 2. 1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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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대 복지

Forum | 2009. 9. 12. 16:46 | Posted by 김수민
내 주변에 있던 NL 사람들은 비판적 지지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2007년 대선을 한두해 앞두고 민주대연합론이 재현될 조짐이 보일 때, 그중 한 사람은 내게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복지 대 반복지로 가야 한다"고 제 견해를 밝혔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 시절 고교평준화 폐지, 본고사 부활을 역설하는 동시에 지역균형 신입생선발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찾기 드문 포지션이지만, 이는 수구보수세력에게 커다란 힌트가 될 수 있다. 정운찬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중시하고 촉진한다는 점에서, 다만 경젱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과 이명박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밝혔다. 실제 이명박이 그점을 보여주는 데만이라도 애를 쓴다면, 한국 수구파는 이미지적인 업그레이드를 이루게 된다. 일단은 경쟁 대 연대의 전선이 흐려지고, 복지 대 반복지로 싸움을 끌고 갈 여지도 크게 줄어든다.

노무현 정부 임기 중반께 한국사회 대다수의 구성원은 성장률 저조보다 사회양극화 심화를 우려했다. 원래부터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을 선호하는 시민들이 많기도 했으니 관심이 자연스레 성장에서 분배로 기울어지는 추세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성장지상주의가 춤을 췄고 노무현 정부의 우경화는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파이의 크기와 트리클 다운에 탐닉하는 반복지담론이 또다시 기승을 부린 탓일까? 아니다. 대중은 여전히 파이의 크기에 주목하나 성장이 자동으로 가져올 분배를 기다리기에는 지난 세월 여러번 속았다. 돈은 돌아야 제 맛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이 명제는 좌우상하의 사회경제적 담론을 일거에 빨아들인 블랙홀이다. 진보 진영의 '비정규직 철폐' 구호까지도 이용당했다. 비정규직을 늘려 노동유연성을 꾀하자는 주장은 교활하거나 천진난만한 소수 엘리트들 바깥으로 나가면 힘을 잃는다. 보수적 대중에게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대다수가 정규직 일자리의 증대를 희망한다. 그렇게 해서 정부발 복지담론과 비정규직 철폐 구호가 만난 결과, 기껏 옛 기업복지의 신화를 향한 향수나 번지고 말았다. 월급을 타면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고 회사에 들어가면 자녀 교육비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에, '밑빠진 독'보다는 길어올 물에, 잔디구장보다는 공의 확보에 경도된 것이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지론을 흔히 '생산적 복지'라고 한다. 이 단어는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곁에 셋째 슬로건으로 세워둔 바 있다.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보자. "생산적 복지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생산적 복지의 정확한 반대개념은 쉽게 간추려 조세->재분배의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소비적 복지다. 하지만 아마 "비생산적 복지"라는 대답이 적이 들려올 것이다. 또한 근로의욕을 상실한 채 실업수당 받으면서 집에서 빈둥거리는 현상을 비생산적 복지의 폐해라고 지목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소비적 복지는 졸지에 비생산적 복지와 등치될 것이다. 굳이 '비생산적'이라고 하지 않아도, '소비'는 '생산'에 진다. 대중들은 이미 소비자제일주의의 질척한 수렁에 빠져 있지만, 아직 개념과 언어만은 그렇지 않다. 

(생산적 복지는 하나의 독을 더 품고 있다. 재분배 말고 사회의 평등과 조화, 협동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기업경영참여의 확대 등이 있다. 시민을 수동적으로 이끄는 기존 복지의 단점을 만회하고도 남는 실로 생산적인 이런 작업들을 '생산적 복지'는 고용과 취업이라는 떡밥으로 가려 버린다.)

한나라당 정책지휘자들은 '얕고 넓은 세수'를 주창한다. 세율은 낮춰도 '작은 정부론'은 누그러뜨리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Laffer Curve가 Laugher's Curve가 된 지 오래라 파급력 있는 기조는 아니다. 오히려 투쟁과 합의의 산물인 조세와 그것의 도움을 받은 사회서비스의 무상화를 더 크게 훼방하는 걸림돌은 "일자리가 복지", '기업 복지', '생산적 복지'이다. 이걸 깨지 못하면, '복지'는 '민주'와 '개혁' 형님들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민주민생세력을 자임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 줄초상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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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

Forum | 2009. 9. 8. 16:21 | Posted by 김수민

"정치판"이나 "지식계"에서 챙기는 야심과 잇속이 "현장"에는 없다는 전제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 또는 빈민의 헤게모니를 명목으로 자신의 야심과 잇속을 기도하는 건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옥석을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제 스스로 그것을 용이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현장 안팍에서의 '유세'로.
사는 데가 마침 거기,라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그냥 사"는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이 내비친 실천하고 있다는 자의식은 "내려간(갔)다"는 표현에 더없이 어울려 보인다. 
운동가인지 중간관리자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다. 중간관리자 폄하 발언인가?
나는 그들을 자본주의의, 아니 자본주의랄 것도 없이, 구질서의 마름이라고 부른다.
이건 마름 폄하 발언이 아니다. 실제로 하는 일이 같기 때문이다.
혹시 이들이 이해한 노동'계급'은 이등병, 일등병 그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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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죽어라 민족주의, 애국주의

Forum | 2009. 8. 28. 20:42 | Posted by 김수민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서양사학자가 순간 내뱉은 말에 아연했다. "우리나라는 통일이라는 과제도 있고... 그래서 민족주의를 극복하거나 탈피하자는 주장은 잘못됐다." 걸핏하면 뜬금없이 꺼내드는 통일론을 들으면 자기네들이 언제 그렇게 통일을 고민했는지 의심부터 들고, 동시에 통일이라는 게 민족주의에 의거해야만 하는 것인지, 혹은 통일은 어떤 상위가치의 통제도 따르지 않는 지상명제인지 따져묻고 싶다. 오늘날에 들어 같은 민족이니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는 한(조선)반도 주민의 살갗에 닿지 않고, 그 사이 대거 생략된 평화론이 힘을 잃을 경우 민족통일이든 평화체제구축이든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거개의 통일론과 그에 기반한 민족주의는 분단현실을 이용해 다른 논의와 노선을 억압하는 분단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것은 보혁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의 탄생 배경은 분명 분단현실이었다. 그러나 반인권악법을 폐지하는 과정이나 결과가 분단의 반대말이라는 '통일'에 달려 있지는 않다. "남북이 화해하고 있고, 통일도 해야 하니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아 그러쎄여? 얼마 전부터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통일은 요원하니 국보법을 놔둡시다." 이것은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논쟁을 이끈 대화방식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공세에, 그 법은 날 때부터 착오적이었다는 진실은 묻혀지고, 시대가 어떤지를 두고 소모적으로 다투다 날밤을 샜다.

민족주의는 과거사 정리와 청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몇해 전 수업시간, 한 학생은 숭실대학교의 신사참배 거부투쟁을 평가절하했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동이지 민족을 위한 싸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었다. "민족이 됐든 종교가 됐든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이었죠. 민족주의적 잣대로 의의를 제한한다면, 반제국주의 역사가 제대로 기려질 수 있겠습니까?" 백낙준 친일 심포지엄에 나온 어느 연세대 교수들은 백낙준의 일제부역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민족교육에 이바지한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무엇이 민족을 위한 길인지 논쟁할 이유는 없다.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매우 유동적이라, 아무나 차지할 수 있고 끝없이 논적을 욕하고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민족주의는 제한적이다. 태평양전쟁에 짓밟힌 여타 아시아국가의 시민들에게는, 백낙준이 한국민족교육에 이바지했든 말든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사실만 뚜렷할 뿐이다.  

민족주의 극복은 국가적 과제나 민족문제를 회피할 목적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견제하고 탄압한 구체적인 진실과 보편적인 규범을 되살린다는 명분을 가진다. 외세와 분단이라는 실체를 외면할 수는 없다. 민족문제는 여전히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족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이가 민족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민족문제 연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리영희나 반제국주의, 반오리엔탈리즘을 철두철미하게 견지하는 박노자 등이 그걸 증명한다. 탈민족주의자가 국가나 민족을 도외시한다는 비난에 응답해야 할 책무는 없다. 오히려 민족문제가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면서 왜 그리 곧죽어라 민족주의를 외쳐대고, 자신들의 과업을 굳이나 민족주의로 개념화하는지, 민족주의자가 답해야 할 일이다. 

근래에는 애국주의 타령까지 끼어드는 형국이다.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곁에서, 양면을 가진다. 첫째, 애국주의는 곧잘 '한민족'보다 '대한민국 국민'에 기반을 둠으로써 분단이나 외세, 반공주의를 생략하거나 축소한다. 그래서 자칫 보수적으로 흐를 여지가 크다. 둘째, 애국주의는 기존 민족주의의 종족적 혈통적 요인을 벗어던지고 '민주공화국'과 같은 국가정체성이 스스로를 결부시킴으로써 근현대적으로 진일보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왜 애국'주의'인가? 시장이 유용하다 믿는다고 해서 그가 시장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나 국가를 중시한다고 해서 그를 사회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제게 주어진 우연을 사랑하여 애국자가 될 수 있다. 헌법에 씌인 국가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고, 아직 꽃피지 못한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수도 있다. '조국'을 피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에게는 반전평화가 곧 애국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 맨앞에 '애국'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나아가서 애국주의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에둘러 갈 것 없다. '민주적 애국주의자'든, '열린 민족주의자'든 소리높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보다 진보적, 좌파적인 세력을 비난하여 소위 민주개혁진영, 진보진영에서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다른 쪽으로는 '애국 대 매국'으로 단순화된 이 나라의 담론지형에서 보수파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알리바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현재 진보좌파진영에서 국가의 개혁과 정치권력 획득을 도외시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과거 혁명주의의 잔향이 짙을 적에도 일군의 지식인, 운동가들은 퓰란차스를 끌어와 연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연이어 취조 심문한다. "너는 조국을 사랑하는가?" "이제는 좀 민족주의를 긍정하는가?" "왜 애국주의자가 되지 않는가?"

호통치고 캐묻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고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많기는 많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개혁' 진영을 분열시키는 짓이고,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진영 주류의 공고한 지도력을 훼손하기에. 자연히 그들은 민주당계열이 한나라당과 가장 다른 대목인 '평화통일'을 강조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정부를, 충분한 역사적 조명이나 개념 정리를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파시즘이라 규정한다. 그래야 단결할, 내부(그들의 입장에서는 내부다)를 단결시킬 빌미가 생기니까.

10여년간, 최소한 정서적으로나마, 여당 생활도 해본 그들은 책임정치의 탈을 쓰며 뒤늦게 지략가의 풍모를 갖추려 애쓴다. 민족주의 및 애국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권력을 쌓아나가겠다는 심산이다. 고생이 많다.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라는 휘장을 두른다고 해서 그게 득표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대중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성향은 자신을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라고 부르길 즐겨함으로써 생겨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외쳐대는 이들은 1980년대의 NL이나 PD와 무척 닮았다. 알고 보면 그다지 체계적이지도 않은 제 이론에 현실을 끼워맞추고, 특정한 하나의 기둥을 세워 환원주의를 행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까래나 창살로 만들어버린다. 조야하고, 철이 없다.

초등학생 시절 내 동생은 학교 견학을 통해 박정희 생가에 들렀을 때 묵념하는 순서에서 고개숙이지 않았다. 나는 군복을 입었을 때를 빼면, 고2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와 나의 행위는 충성 강요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그나 나나 적발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인간들이, 딱딱하게 앞만 바라보는 인간들이, 거부자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들이여, 그렇게 맹세하는 가운데 고작 곁눈질하며 강요하는 주제에 타인의 삶과 사유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겠는가. 나는 이들과의 사상논쟁이 진보진영 내부토론으로 불려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박정희 좌파'에 불과하다.


덧1: 6.3 학생운동세력은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화형시켰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진짜며 박정희를 사이비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상당수는 박정희의 자장으로 빨려들어갔다. 필연적이었다. 민족과 민주는 한국사에서 서로 어울리며 길을 뚫어왔지만, 결국은 어디에 더 역점을 둘 것인지를, 양자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최일선에 선 이명박, 이헌재나 이세기 같은 기득권자들, 사카린밀수 규탄자였던 정형근, 공화당과 민정당을 거친 김원웅 등은 민족주의(적 엘리트주의)의 행로가 어디인지를 훌륭하게 입증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정권 청와대에서 근무한 최장집이, 한동안 열린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가 끝내 민족주의 자체를 회의하기 시작한 것은 극적인 변화였다. 이 역시 어떤 민족주의의 진로 가운데 하나로, 민주주의의 맥락에 든 민족주의는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사례다. 최장집에 반해, 백낙청과 창비 진영은 모순을 껴안고 있으며, 김원웅은 그 모순이 가장 첨예한 사례다. 물론 모순 정도는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갈 수가 있다. 그렇지만 모순으로 가릴 수 없는 본색이라는 게 있다.

덧2: 작년 교생실습 당시,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 겸 후배들에게 내가 남긴 말.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는 민족사관에 근거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등의 잣대들이 있는 거죠. 이들은 각자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구체적인 현실을 깨닫고 떠받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억압한다면, 그 사관은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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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와 그 어설픈 반대자들

Forum | 2009. 8. 5. 10:39 | Posted by 김수민
"자유시장은 계획에 의한 것이지만 계획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이
"시장을 철폐하자"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따위의 구호보다
훨씬 좌파적이라고 생각한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이 폴라니에 경기를 하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냥 한번 시비나 걸어보잔답시고 나서는 이들도 있나 보다.
이택광 씨라는 사람도 한번 그랬던 것 같다.

알튀세르는 제대로 자본론을 읽지도 않고 잘난체하느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던데
(알튀세르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론적 측면을 떠나서.)
나오자마자 비판적 지식인이란답시고 두들겨나보자는 이들, 고생이 참 많다.
알튀세르주의자든 그냥 한번 까보자는 인간이든 도리어 자신의 문제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 있다. 

홍성태 교수는 얼마 전 낙원음악영화축제 토론회에서 
건축적 폐해 때문에 낙원상가가 철거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철거할 때의 태도가 지을 때의 태도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이런 견해가 성립될 수 있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교조적 마르스크주의는 시장의 전제를 계획지상주의로 대체하고자 하고
신자유주의는 시장'들'을 압도하고 사회원리를 뒤덮는 단일시장원리를 추구한다.
폴라니의 사상은, 바로 그에 대한 안티 테제다. 
이건 양비론도 아니고 절충주의도 아니다. 획일성과 전체주의적 사유에 맞선 거대한 대결이다.

계획 대 시장의 구도 자체가 허구라는 얘기다.
그걸 뒤엎지 않고, 자본주의에 반대해야 좌파이고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 폴라니는 별로 좌파적이라고 지껄이는 건 무의미하다.
(또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완벽히 동일시하는 제 시각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이야 내 개인적으로는 내놓은 인간들이라고 쳐도,
나머지 폴라니 비판자들은, 우습지도 않다.
무슨 장기판 좌파 어쩌고 하는 표현까지 나왔던데,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남한테 입히려고 노력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이따위 꼬라지를 보고도, 홍기빈씨는 가만히 있었나?


3년전에 썼던 어설픈 글: 민주주의로 시장을 갈아치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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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 | 2009. 7. 26. 21:09 | Posted by 김수민
상인들을 비롯한 평택시내 다수 여론은 쌍용차투쟁에 적대적인 것 같다. 지난번 대추리 사태 당시에도 그랬다. 투쟁의 종결을 외치고 심지어 투쟁자들을 억누르기도 하는 대열의 맨앞에는 상인들이 존재한다. 노조가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공장이 정상화되어야 평택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다. 대량해고가 구매력 감소를 불러일으킨다는 인식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대형할인마트의 등장에 항의하거나 신음하는 상인들에게, "대형할인마트가 들어와 상업의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경제가 발전한다"고. "우리 노동자들은 이왕이면 할인마트에서 구입하는 게 낫다"고. 그때 상인들은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남의 아픔엔 관심도 없는 놈"? 그건 대추리 사태 때 반대투쟁하는 활동가들을 폭행한 평택상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노조의 투쟁을 욕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웃는다. 밥그릇 투쟁이라는 삿대질에는 더 크게 웃는다. 왜냐면 그는 분명 자기가 노동자였다면 밥그릇 투쟁에 나섰을 터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의 사업조정 조치로 대형마트의 진입이 멈칫하고 있다. 내게는 낯선 풍경이다.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한다. 정치나 행정은 경제를 간섭하면 안 된다, 국가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야 된다, 할 수 있다는 근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알아서 그리하지는 않으며, 결국 답은 '사회'에 있다는 걸 깨달아나갈 것이다.

우선 노동자-영세상인들의 동맹이 시급하다. 영세상인들이 자신의 이웃이자 단골인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관심을 가지는 것, 영세상인들의 보호에 이미 조직화되어 있는 노동자가 앞장서는 것. 이 나라에는 영세상인들이 매우 많다. 그들과 노동자와의 반목으로 남을 건 서민경제의 공멸 뿐이다. 이 실업자보다 민주노조운동과 상인단체의 시야가 더 넓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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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 | 2009. 7. 22. 21:56 | Posted by 김수민
학교 좀 만들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있나. 철학에도 사회학에도 정치학에도 없다.

그냥 놔둬라.

1.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지 마라. 그게 자립형인가?

2. 국공립대는 자립형 사립고 졸업자들에게 응시자격을 주면 안 된다.

국가가 할 일을 잘 생각해보자.
자유를 규제하지 말고
권한과 이익을 통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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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복과 조끼

Forum | 2009. 7. 4. 21:16 | Posted by 김수민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지만 문민 지도자다. 그점에서 김일성과 가장 다르다. 김정일이 군복 입은 모습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인민복을 택했다. 이 또한 정장 차림이었던 제 아버지와 다른 부분이다. 중산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은 노동계급 친화성을 상징한다. 김정일의 인민복 착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체제의 안정과 결속을 기도했다는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민복이 대외적으로는 악효과를 낳았다고 추측한다. 바뀌지 않는 춘하추동복은 그의 파마 머리와 키높이 구두, 선글라스와 어우러지며, 게베라, 카스트로, 후세인과도 비하기 힘든 엽기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낳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정장이나 캐쥬얼 또는 군복을 입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렇게 해봐야 카스트로의 면도에 필적하는 충격만을 낳을 것이다. 대내적인 위상도 실추될 것이다. (영도자의 위엄을 너무 높고 굳게 잡아두어 나중에 고칠 수 없는 것이 쿠바나 북조선의 약점이다. 장기집권에 대한 설명-"서구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볼 일 아니다"라는 것 역시 되레 그 체제의 뒤떨어짐을 토로할 뿐이다.)

위는 비정규직법 회담에 참석한 노동운동 대표들의 조끼를 보고 이어진 생각이다. 수십년간 화면에 비친 김정일의 인민복은 더이상 노동계급의 유니폼이 아니고 이제는 노멘클라투라의 상징이다. 지금 조끼는 어떠한 의미인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와 노동운동가의 거리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거리보다 훨씬 멀고, '조끼'는 아직 그것을 입어보지 못한 다른 노동자들에게 남의 패션일 뿐이다. 물론 투쟁하는 운동가의 심벌은 노동자가 정치인이나 자본가와 테이블에서 맞겨루기하는 중이라는 걸 한눈에 내보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같은 계급에게나 다른 계급에게나 고정된 이미지로 다가간 결과도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조끼가 촌스러우니 벗으란 이야기가 아니다. 벗는 게 더 유의미해질만치 너무 입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얼핏 사측이라는 오해를 받더라도 노동운동가가 정장을 입고 나올 수도 있고, 치마든 청바지든 면바지든 반바지든 얼마든 입고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노동자와 약자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고 대화하는 운동가들에게, 미사일로 동해에 물수제비를 뜨는 나라의 지도자를 들먹여서 죄송하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불안정노동을 겨눈 사회적 담론이 확산되길 빈다. 그러면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끼입고 팔뚝흔드는 일쯤으로 취급받을 가능성도 점차 녹을 것이다. 다원주의 또는 종다양성은 여유 내지는 사치가 아니라 훌륭한 생존의 방식이다. 앞으로 노동운동의 생명력은 이 이치에서 나올 것이다. 나는 세대교체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아직은 현장 운동가들에게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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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보수적이 아니라고?

Forum | 2009. 6. 21. 17:19 | Posted by 김수민
당연하지. 20대 후반과 중반과 초반은 다 다르니까.

고 노무현 추모공연을 두고 연세대 학생들이 벌이는 논란을 잘 보면
학번대에 따른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엿 같은 새끼들과 학교 같이 다닌 사람으로서
졸업하고도 엿 같다.

학교에서 사시 준비해야 되니까 학교에서 콘서트하지 말란다.

쉬뱅들아 그럼 니네집이나 독서실이나
동네도서관 가서 해.

시험 하루 앞두고 버스, 지하철 타고 학교 가고 싶냐?

세상 살다보면 이런저런 제약요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마련이고
자주는 알아서 잘 피하고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학교가 니네 집이냐?
고3때 니네 부모님 발꿈치 들고 다니고 난 후로부터는
세상이 만만해 보여?

이런 색히들 보면, 나 전경할 때
먹고 살 만한 주제에 땅값 떨어진다고 무슨 시위하다가
경찰한테 벽돌 던지던 아줌마들 생각난다.


공부가 유세냐? 
그래봐야 니네 자리 별로 없으니까 족구하시라 그래.
 
삼김씨에서 노무현으로 가면서 대통령되는 세대가 몇년 건너뛰는 거 봤지?
노무현 다음에도 마찬가지야.
그 다음에도 그럴 거고.

나랑 나이 비슷한 니네가 바로 그 세대야. 건너뛰는 세대.

아, 그래서 부스러기라도 쳐드실라고 발버둥치는 거니?
그런 거라면 형이 쵸큼은 이해해줄게.


20대가 보수적이라는 건 확실히 개념남용. 보수는 아무나 하나~
80년대에 학교 다녔으면 경쟁적으로 팔뚝질했을 새끼들이.
386? 그 잉간들도 마찬가지. 나중에 학교 다녔으면 똑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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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산성 연세대에 납시다

Forum | 2009. 6. 20. 05:25 | Posted by 김수민
지나가는 길에 한 기자가 소감을 묻길래 
'명박산성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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