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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보컬열전 (5) 제니스 조플린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24. 20:26 | Posted by 김수민

내 친구 중에 가수가 하나 있다. '가리나 프로젝트'라는 팀의 싱어... 모른다고? 그냥 아는체해라. 소개한 내 입장이 뭐가 되냐능;; 팬틴 무시기 샴푸 광고에도 노래가 흘러 나왔고 유명 그룹이당.(이렇게 덧붙일수록 더 군색해질지도 ㅋ 아직 못 들어본 분은 여기서 들어보시라.) 이번 포스트를 준비하다, 제니스 조플린의 테잎을 나는 2001년도에 그에게 빌려 아직껏 갖다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몇주 전 그녀석과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쳤는데, 쫀쫀하게도 미반납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롤라팔
: 반갑다. 나는 스물 여덟살 젊은이다. 1943년에 태어나 1970년도에 사망한 당신도 한국 나이로 치면 죽을 무렵 스물 여덟살이다. ‘갑’끼리 이렇게 만나서 참 반갑다.
제니스: 한국식 나이는 기수가 아닌 서수 개념인가 보지? 그럼 당신은 1982년생인가 본데, 난 당신보다 39년 일찍 태어났다. 뭐, 사실 미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경어를 쓰는 건 아니라 어차피 상관 없지만 말이다. ‘펄(pearl)’이라고 불러달라.

롤라팔: 내가 죽으면, 저승짬은 내가 당신한테 한참 못 미치니 그때는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제니스: 누나누나해~) 보컬열전의 다섯 번째 인물로 선정되셨는데, 예전의 연재물을 본 적이 있나?
제니스: 도착하기 전 한 번 쭉 훑었다. 네 명 다 내가 죽은 뒤에 데뷔한 이들이라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전부 다 남자라는 것이 좀 거슬렸지만 취향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들 로커들이고, 메틀 뮤지션이었거나 그런 경력이 있더군. 편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롤라팔: 그 점은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주의를 많이 기울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록팬이라는 게 펄한테는 유리했다. 그게 펄이 아네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를 앞질러 보컬열전에 출연하게 된 원인이었다.
제니스: 조치 안타. 당신은 아네사를 나보다 앞서 다뤘어야 했다.

롤라팔: 펄은 베시 스미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알고 있다.
제니스: 맞다. 그녀 묘비의 절반을 산 적도 있다. (롤라팔: 나머지 반은?) 어떤 간호사가 샀다던가? 그리고 나는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 오티스 레딩도 좋아한다. 그의 필모어 공연을 감동 깊게 관람한 적도 있다. 나중에 오티스 레딩도 다뤄주었으면 한다. 아네사에 대해서 하나 흥분되는 기억이 있다. 그녀는 1968년 타임지의 6월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나에게 "백인 록 운동에서 탄생한 가장 강력한 가수"라는 칭찬을 해주었다.

롤라팔: <보그>지는 당신에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노래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찬사를 보냈다. 리처드 골드스타인이라는 평자는 "그녀는 타르처럼 살금살금 걸어다니며 전쟁처럼 얼굴을 찌푸린다. 그녀는 조調를 무시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기관총처럼 소리를 뿜어댄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라고도 했다. 그가 당신에게 "록계를 이끄는 최고의 여성 로커"라고 한 것은 물론이다.
제니스: 비평가들 전부가 내게 호의적지는 않았다. 1968년 2월 <롤링스톤>지는 내가 몸담은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에 꽤나 비판적이었다.

롤라팔: <롤링스톤>은 펄을 “로큰롤의 주디 갈란드”라고 하기도 했다지? 주디 갈란드처럼 예쁘다는 뜻은 아닐 테고. (서로 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신이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를 떠나 ‘코즈믹 블루스’로 옮기고 나서도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빅브라더’와의 결별은 아마추어리즘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 자리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테지만, 수익금 문제도 그렇다. 빅 브라더에 있을 때 당신은 멤버들과 똑같이 돈을 나누어 가졌으나, 코즈믹 블루스는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었고 특히 당신은 높은 지명도를 인정받아 멤버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졌다.
제니스: 그래서 코즈믹 시절은 쇼비지니스의 논리가 한층 더 강하게 내 삶을 덮은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즈음 내가 사치를 했다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롤라팔: 코즈믹 시절 도리어 빅 브라더와 재결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밴드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지루하며 불안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제니스: 코즈믹 블루스의 음악엔 브래스 섹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음색이 트럼펫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누이 꼬집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수용하지 않았다. 코즈믹은 프로적 전문성이 있는 밴드였다. 금방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1969년도 나는 블루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롤라팔: 어쨌든 빅 브라더의 매력과 코즈믹 블루스의 강점이 어우러져 세 번째 밴드 ‘풀 틸트 부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잦은 설왕설래는 코즈믹 블루스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펄의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에 대해서도 폄하가 없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이 제대로 발성의 노하우를 갖추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다고 여긴다. 펄은 언젠가 스테이플즈 싱어즈와 동시에 한 무대에 서는 걸 거절하기도 했다. 자신감 부족이었는가?제니스: 솔직히 비난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나는 원래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게 힘겨울 만큼 숫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본 뒤 그림을 포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어떤 분야든 하지 않았다”고 했다더라.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특유의 신음과 비명조차도 사전에 충분히 계획했다. 당신은 내 보컬에 어떤 면모에 가장 신경이 쏠리나?

롤라팔: 당연히 그 탁성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박경림이라는 방송인이 있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노래로 가끔 사람들을 웃겨 놓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당신과 좀 비슷하다. 시간나면 검색해 보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경림씨가 펄의 <Summer Time>을 방송에서 카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제니스: 대학 밴드 시절부터 빅 브라더 입단 전까지, 내게는 맑은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도 목구멍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지? 나는 관중의 호응도에 따라 스타일을 바꿨다. 청승맞게 부르기도 하고, 쥐어짜듯 부르기도 했다. 하루는 내게 조안 바에즈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관중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나머지 반은 환호했던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톤을 잡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편으로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위스키 같은 목소리가 되었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있다.


박경림씨에게 이 노래를 권한다.


롤라팔
: 펄은 역시 '풀 틸트 부기' 시절 목소리가 더 풍성했고 샤우팅과 읊조림도 탁월하게 어우러졌던 것 같다.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당신이 처음 음악을 접하던 어린 시절부터 조화에 쓰일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느낌도 받았다.
제니스: 고향인 텍사스와 그 부근의 루이지애나는 민속음악이 풍부한 곳이었다. 여기에 컨트리, 블루스, 멕시코 음악까지 흘러 들어왔으니... 나는 1962년 텍사스 나콕도체스 은행의 CF 송을 불렀다. 내 인생에서 최초로 녹음한 이 노래는 포크의 거장 우디 거스리의 <This is your land>를 편곡한 것이었다. 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인 가스펠 음악인들과도 교류했었다. 음악 뿐 아니라 내 성장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나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이해받고 사랑받지는 못했다. 외로웠다.

롤라팔: 당신의 고립과 쓸쓸함에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로 지목되었던 데에는 당신이 학생단체들의 비위를 거스른 측면이 있었을 것이니까.
제니스: 뭐, 그랬다. 그랬었다....... 범생이들이 나를 미워했던 게지. 나도 그들을 자극했었고. 하지만 남들이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오기도 했다. 고향에 들어와서는 결혼하려고 했다. 실패했지만. 결혼의 실패는 내가 노래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후로도 죽기 전까지 나는 몇차례 결혼을 간절히 원했고 추진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죽은 해인 1970년도에 난 1년 뒤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했었다.

롤라팔: 아이 이야기는 의외다. 결혼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물론 달리 고려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결혼제도가 강제하는 1부1처제는 얼마간의 평등을 담보해준다. 결혼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섹스 상대를 최소한 1명 정해둘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제니스: 외모 콤플렉스와 결혼시도의 실패는 내가 대중들의 인기를 갈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것도 많다. 남우세스러운 사연을 고백하자면, 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거나 하는 일들을 좀 과장해서 주변에 말하곤 했다. 난 툭하면 일탈을 일삼고 다 뒤엎길 좋아하는 겁 없는 반항아는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과 한 번도 연락을 단절한 적 없다. 죽을 무렵 친하게 지냈던 폭주족 친구 하나는, 내가 죽은 직후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음, 그인, 참으로, 유순, 한 사, 사람이, 었다.

롤라팔: 펄에게는 허세가 어려 있다. 하지만 그 허세가 얼마나 진실했던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 화제로 나가보자.
제니스: 당신은 인터뷰를 제의하면서 마약과 이성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나버린 전생의 일이라 개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당신의 제의가 새삼 고맙다. 이쯤 하자.

롤라팔: 당신은 1960년대 후반 한창 활동한 뮤지션이다. 당시 미국 청년들은 유럽 청년들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사적이었기는 했으나, 히피들은 마리화나나 LSD에 못잖게 ‘러브 앤 피스’에 미쳐 있었고, 반전운동, 민권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 시기 유럽의 절정이 1968년이었다면 미국의 절정은 이듬해인 1969년 우드스탁이었을 것이다. 펄도 그 무대에 섰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해줄 수 있는가?
제니스: 코멘트를 ‘잠깐’ 해달라는 부탁은 당신의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면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1968년 그해 여름, 일련의 정치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책깨나 읽었던 반면, 신문과 잡지는 거의 접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사적’이었다는 특징만 나와 관련 있다.

롤라팔: 당신은 1969년 11월 16일 확성기를 들고 관중들에게 명령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이는 마이애미에서 짐 모리슨이 성기노출을 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과 맞물리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두 사건은 청년문화의 좌초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반격을 상징한다.
제니스: 실제 나의 죽음은 록계의 전반적 쇠락이라는 흐름에 실려 찾아오기도 했다. 우드스탁 다음에 열린 페스티벌은 개판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알타몬트에서는 흑인 참여자가 살해 당했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이었다. 어른들은 강했다.

롤라팔: ‘어른’이라. 그렇다. 당신이 죽고 10년이 지나, 당신의 조국의 대통령이 된 그 양반만 봐도 그렇더라. MTV 이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시대가 왔지만, 강한 놈들은 늘 음흉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그들의 웃음보다 더 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끝으로 한 말씀.
제니스: 한국에서는 제사라는 풍습이 있다지? 10월 4일, 내 기일을 챙겨달라. 마음으로.
롤라팔: 알겠다. 그 하루 전날이 한국 민족 대다수가 자신들의 공통 조상이라고 착각하는 어떤 이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날보다 펄의 생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의미 있다. 오늘 인터뷰 고마웠다. 한 잔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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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열전 (4) 김준원

Listen to the 무직 | 2008. 12. 8. 00:36 | Posted by 김수민
지난 번 '데이빗 커버데일' 편은 무플이 되었다. 나는 왕삐졌다. 이번에도 무플이면 당분간, 짧아도 연말까지 이 포스트가 계속 초기화면에 뜰 것이다! 노래감상이라도 올리시라...

 
비교적 최근의 곡인 <이별... 하늘...>을 올린다. 묻히는 걸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
<안개도시>(1집 수록곡), <걱정하지 마>(2집), <오늘 나는>(3집)과
H2O가 피처링한 듀스의  <Go! Go! Go!>도 꼭 들어보기를.
 


'김준원'은 '록보컬열전'의 네 번째 편이자 한국 보컬리스트 최초 편이다(지금껏 거명된 네 명 모두가  남성이다. 록에, 그중에서도 거친 록에 기울어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필자의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앞으로도 아마 대부분을 남성 록커들이 채우게 될 것 같다). 내가 한국 보컬리스트들 중 최초로 그를 다루는 이유는 내가 그를 역대 최고의 한국 -'록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보컬리스트라 느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흔히 1980년 중후반 한국 록계를 주름잡은 시나위, 부활, 백두산을 묶어 '한국 메틀의 트로이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4인방'이라는 표현도 있다. H20를 포함해서. 미국에 살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1986년 결성한 H20는  LA메틀 본토에서 직수입된 듯한 무대매너와 패션을 과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곧잘 '파고다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를 자처하지만, 파고다극장은 내가 어섯 눈뜨기도 전에 문을 닫았으니(그래서 파고다극장은 그저 꿈의 극장이다) '전설'을 전하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H20는 김준원을 위시한 재미교포 젊은이들이 1985년에 만든 밴드 '흙'의 후신이었다. 그들은 이듬해 싱글음반 <멀리서 본 지구>를 발표하며 LA에서 들국화와 공동공연을 펼쳤고, 1987년에 1집을 내놓으며 한국 땅을 밟았다. 2003년 노바소닉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불후의 명곡 <안개도시>가 H20 1집의 첫 트랙이다.

H2O 1집 시절의 김준원 (출처 http://www.h2o4ever.net/)



'한국 메틀의 3대 보컬리스트'라는 표현도 있었다.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는 수사처럼 공허하고 편향적이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가 모두 나이가 엇비슷한 영국인이며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것처럼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역시 다들 시나위의 노래꾼들이었다. 대중성,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카리스마, 영향력, 생명력 등등을 고려하고 특정밴드에 대한 편중 위험까지 덜어내자면, 그나마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로 1980년대 '3대 메틀 보컬리스트' 를 구성하는 것이 조금 더 온당할 듯하다. 아니, 아니다. 다 무르자. 김준원이 빠졌으니까.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이 1990년대 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발라드 솔로이스트로 전향하던 무렵, 김준원은 H2O 2기의 멤버들과 메틀의 시대를 접고 있었다. 하기야 이것도 전향이리라. 그러나 그후에 그와 그들이 연 것은 가요의 발전이 아닌 또 다른 록의 시대였다. 1992년 발매된 2집에서 롤링 스톤즈로 회귀한 듯한 복고성과 같은 시기 영국과 미국의 록에서 만개하던 모던함은 그럴싸한 수준을 넘어 온전히 내면화된 채 구현되었다. 노래방에도 있는 <걱정하지 마>가 그 2집의 수록곡이다. 펄 잼이나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그런지 스타일의 그룹이 거의 없었던, 그래서 신대철 같은 메틀 밴드 출신들이 결국 1995년 시나위의 재결성에 맞춰 그런지 록을 시도했던 한국에서, H2O는 유앤미블루(방준석, 이승열)와 함께  '얼터너티브 밴드'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김준원은 펄 잼의 보컬, 에디 베더와 곧잘 비교되었다. 메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서 H2O와 펄 잼이 유사했던 탓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진솔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닮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테다. 김준원은 고음에 약하지 않지만 '고음 교조주의'에 편승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중음, 저음, 고음에 모두 능한 가수가 되었다. 또 부활 시절 이승철이 여리고 소년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청년의 무르익은 남성성을 구현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극단적인 남성성을 추구했던 임재범과 달리 중성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흉성과 두성은 있었으나  이따금씩은 거의 '맨소리'를 낼 만큼 목소리에 포장이 작았고 꾸미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김준원은 연기자로 치면 나문희나 최진실에 비할 수 있을 정도의 일상성을 획득해 냈다.

1집과 2집 사이에 H2O에 가입해 김준원의 옆에 서고 뒤에 앉은 연주자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카리스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박현준이 H20의 기타를 잡아 절제되고 감각적인 리듬 배킹으로 밴드의 새 출발을 이끌었다. 베이시스트 강기영은 시나위에서 베이스 줄로 줄넘기를 하다시피하던 용맹한 연주자였다. H2O의 해체 후 강기영은 박현준과 삐삐밴드, 삐삐롱스타킹을 거친 다음, 록의 무대에서 춤판의 한구석으로 내려가 DJ 달파란으로 더 유명해졌다. 드러머는 고등학생일 적 시나위 2집을 통해 데뷔한 김민기였다. 그는 그 앨범 이후로 한국 최고의 드러머로 군림해 오고 있었으며, 1990년대 중반 김종서와 다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김준원은 멤버들을 아울러 밴드의 길을 잡는 일에서 발군이었다. 메틀 뮤지션이었지만, 그것도 메틀제일주의가 한창이던 무렵의 록 키드였었지만, 그의 취향은 잡식성이었다. 김준원과 H20의 이런 열린 태도는 듀스와의 합작품 <Go! Go! Go!>로 나타나기도 했다.

강기영: (...) 그는 INXS를 좋아했다.
- 박준흠,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을> 中


그러고 보니 김준원은 이니시스의 마이클 헛친스와 비슷한 내음을 풍긴다. 강기영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박준흠: 김준원은 어떤 사람인가?
강기영: 그는 인간적이다. 리더십도 있고 동생들을 잘 챙겨준다. 무대에서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었고 말도 잘했다. 그리고 편협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수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H20 음악이 가능했다.


1993년, H2O는 한국 록 역사상 최상급의 걸작인 3집 <<오늘 나는>>을 분만하였다. 박현준의 그루브가 초절정에 이르른 가운데 강기영-김민기는 힘있고도 깔밋한 리듬 라인을 펼쳐고 김준원은 그 위에서 분방하게 놀았다. 한국 록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저음질은 마크 코브린이라는 외국인 엔지니어가 해결하였고, 이정식을 비롯한 브래스 세션의 가세로 곡들은 잘 부풀어오른 프랑스빵처럼 풍성해졌다.

2집에서 창작을 주도했던 강기영이 <고백을 하고>, <짜증스러워>, <나를 돌아보게 해>를, 박현준이 <방황의 모습은>, <착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을 썼다. 작곡도 세련되었지만 가사도 색달랐고, 가사의 일상성은 김준원의 가식 없는 노래와 완벽히 어우러졌다. 이로써 H2O는 안치환, 블랙홀과 함께 록의 한국적 어법을 위해 고투한 얼마 되지 않는 뮤지션으로 지목될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불행히도 이런 평가는 당시에 제출된 것이 아니다. 3집은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고 H2O는 해산을 맞이했다.

H20 3집 시절. 왼쪽부터 김민기, 김준원, 강기영, 박현준. (촬영은 김중만. 출처http://www.h2o4ever.net/)



김준원은 오랫동안 밴드 활동을 접었지만 신성우와 더블 캐스팅되었던 <ROCK 햄릿> 등 여러 뮤지컬을 통해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한다(이미 1992년 드라마 <고개숙인 남자>에 얼굴을 내비치며 미미하게나마 연기경력을 쌓은 차였다). 뮤지컬은 그에게 명확한 발음과 다채로운 음색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이는 2004년 발매된 4집 <<Boiling Point>>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예컨대 <pray>는 딱히 높은 음역에까지 닿는 곡은 아니나 어지간한 발음과 발성으로는 온전히 불러낼 수 없다.

4집은 타미 킴(기타), 김영진(베이스)라는 최고의 세션맨을 제3기의 멤버로 불러 들었음에도  '11년만의 재결성'을 언론매체들이 잠시 알렸을 뿐 폭넓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컴백 음반을 발표한 임재범이 '다시 깨어나 달리는 전설'이라면, 김준원은 '안개에 싸인 무관의 제왕'이다. 그렇지만 결혼 이전까지 잠행과 은둔을 거듭했던 임재범과 대조적으로 김준원은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도회인이었다. 그는 극장 무대 위에 있었고, 강남에서 블랙신드롬의 박영철과 함께 운영한 카페에도 있었다.
보수적인 부친 때문에 라디오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던 교포 소년은 화려한 메틀 키드로, 젠틀한 모던 록커로, 뮤지컬 배우로 -어느 인터뷰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 흐르듯 살아 왔다. 그 물은 주류 음악계의 시스템을 끝내 돌아 흘러, 저주 받은 걸작들을 양산해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은 결코 H2O 재평가를 향한 옹골찬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들락거린 구미역 앞의 레코드점에는 운좋게 H20의 1집 테이프가 하나 남아 있었고 나는 곧 그 주인이 되었다. 내 행운은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H2O의 3집이 나온지 5년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윤도현, 최정원 주연의 <하드록 카페>가 구미예술회관에 올랐을 때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타잔 아저씨'역으로 열연한 김준원의 노래를 맨 앞자리에서 들었다. 이후로 나는 아무리 좋아해 마지 않는 보컬리스트일지라도 그 목소리가 지겨워질 때면 H2O를 찾았다. 테크닉은 완벽하나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나가는 신인급 가수의 노래를 듣고난 후에도 곧잘 김준원을 켰다.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탄산음료로 갈증을 달랠 수 없을 때, 물을 찾듯 말이다. 이 물은 로커빌리, 블루스, 팝 발라드, 하드 록, 재즈, 펑크, 훵크, 글램, 뉴웨이브, 그런지를 모두 녹여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김준원과 같은 전천후 보컬리스트는 내 생애 단 하나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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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열전 (3) 데이빗 커버데일

Listen to the 무직 | 2008. 11. 14. 17:20 | Posted by 김수민

롭 핼포드가 '본좌'로니 제임스 디오가 '킹왕짱'이라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은 '완소(완전소중)'에, '캐간지'다. 보컬열전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으나, 데이빗 커버데일은 내가 핼포드 이상으로, 디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이다. 나는 록팬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대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거나 혹은 아예 그를 모른다고 하면 대화를 길게 나누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 일반은 물론이고 록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새내기 시절 록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신촌 한 구석의 술집에 출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고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내가 Impellitteri의 곡을 신청했다. 주인장은 죄송하지만 음반이 없어 못 틀어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Loudness의 곡을 주문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크박스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지 않고 음반만으로 레파토리를 채우는 술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을 청했다. 그러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없는 곡만 신청하시니 난감하네요. 요즘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어요?" 내가 되묻고 싶었다. 1970년대에 나온 레드 제플린은 틀어주면서, 1980년대에 나온 걸 가지고, 뭐? 누가 듣냐고?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당장에 일본과 견줘도 그렇다. 바로 이 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가 데이빗 커버데일이다. 물론 데이빗 커버데일은 1970년대 최강의 밴드 Deep Purple의 멤버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네이크를 전혀 접한 적 없더라도, 기타 아르페지오가 애잔하게 흐르는 <Sodier of fortune>을 들어본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에서 Deep Purple은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로 더 유명하다. 이곡들은 데이빗 커버데일이 입단하기 이전, 이안 길런이 마이크를 잡고 있던 2기 시절의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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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캐간지랄 수밖에...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에 가입할 때만해도 상점 종업원을 전전하던 무명의 가수지망생이었다. 게다가 촌뜨기였다. 심지어는 사팔뜨기였는데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리더, 기타리스트)한테 고치라는 경고를 받고 수술도 없이 자가교정에 성공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커버데일의 음성은 전임자 이안 길런과는 상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지역별, 계급별, 인종별로 향유하는 장르가 크게 달라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된다. 커버데일은 백인이지만 어릴 적 내내 오티스 레딩과 같은 블루지하고 소울풀한 음악을 라디오로 듣고 자라며 꽤 흑인에 근접한 필을 가지게 되었다. 이안 길런이 날카롭게 찔러대는 창법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면, 커버데일은 굵직하게 울부짖는 흉성으로써 딥 퍼플의 3기를 장식했다. 그때의 대표곡이 <Burn>, <Stormbringer>.

딥 퍼플에는 사실상 한 명의 보컬리스트가 더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로, 데이빗 커버데일보다 고음에 능하고 라이브에서 더 안정된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탓에 경쟁심이나 갈등이 없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둘은 서서히 딥 퍼플의 노선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려나던 리더 리치 블랙모어는 중세풍 취향을 공유한 엘프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와 눈이 맞아 레인보우를 창설하며 딥 퍼플에서 나갔다. 제임스 갱 출신의 토미 블린이 후임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나 곧 딥 퍼플은 해산하였고 커버데일에게는 첫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유라이어 힙으로 영입될 뻔하다 탈락한 것도 이 시절의 일화다.

그러나 딥 퍼플에서 만난 존 로드(건반) 등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고 닐 머레이 등이 가담하면서 1970년대 말 화이트 스네이크가 결성되었다. 초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은 후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하드 록이나 헤비메틀보다는 블루스 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한 이때의 음악이야말로 커버데일이 가장 편하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의 굵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어렵게 끌고 가는 커버데일의 나쁜 버릇도 꽤 교정되었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딥 퍼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레인보우와 경쟁하는가 하면, 존 로드가 재결성된 딥 퍼플로 향하면서 잠깐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둥 같은 드러밍으로 유명한 코지 파웰이 있었고, 씬 리지 출신의 존 사이크스가 들어오면서 1984년도 <<Slide in it>>이라는 걸작이 나왔다.

허나 두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데이빗 커버데일의 성대 이상. 의사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고할 수준이었다. 존 사이크스를 대동해 메탈씬을 정복하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거꾸로 말해, 커버데일은 마침내 장애를 딛고 3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7>>. 화이트 스네이크의 최대 히트 음반이었다. 존 사이크스의 기타에선 불꽃이 튀었고 커버데일은 더 역동적으로 거듭났다. 한결 세련된 편곡을 거쳐 재수록된 <Here I go again>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별히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속 발라드인 <Is this love?>도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올랐다.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이 본격적인 메틀로 '여기서, 다시 나아감'으로써, 데이빗 커버데일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성향도 더 짙어졌다. 스스로 리메이크한 <Crying in the rain>에서 그의 변천 또는 진화는 유감 없이 드러났다.

존 사이크스가 음악적 불화로 탈퇴했음에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탈퇴 후 블루 머더의 깃발을 꽂은 존 사이크스는 딥 퍼플 시절의 글렌 휴즈와 더불어 '데이빗 커버데일과 밴드를 같이 한 다음 보컬리스트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비언 캠벨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나가고, 더블 기타 시스템의 한 축이던 에드리언 반덴버그가 손가락을 다쳤지만, <<Slip of the tongue>>의 제작 와중에 멋진 구원투수가 들어왔다. 스티브 바이. 촌티 풀풀 날리는 블루지 넘버 <Fool for your loving>이 그의 손을 거쳐 말끔하게 번뜩이는 곡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전의 중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팬들도 많겠지만, 다시 실린 <Fool for your living>에서 감정을 눅이기보다는 폐부를 찔러대는 쪽을 택한 커버데일의 보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붐이 락씬을 휩쓸며 화이트 스네이크는 여느 메틀 밴드처럼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후 커버데일은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Coverdale & Page를 구성해 '꿈의 블루지 콤비'를 이루는가 하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 음반에서 밴드 시기 못다한 블루스, 소울, 컨트리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커버데일이 원초적으로 지닌 매력을 감상하려면 이 시절의 음악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커버데일에게는 여러가지 단점이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고음에서의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밀어붙이듯 고음을 올리더라도 갑자기 음성이 얇아지는 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치더라도, 라이브에서의 고질적인 불안함 때문에 매니아들의 입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마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게 있다. '노이즈가든'의 멤버 박건이 영국에서 화이트 스네이크 공연을 보고 신해철에게 귀띔한 바, "그냥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용서된다". 그는 목소리로나 외양의 분위기로나 지극히 남성적인 동시에 당대에서 제일 섹시한, 하드록/헤비메틀 사상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였다. 곡이 매듭지어지면서 나오는 한숨소리마저 당당히 노래의 한 영역을 차지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멸하지 않고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그 관능미의 극치였다. "로큰롤과 섹스는, 힘들어도 끝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는 명언도 커버데일쯤 되어야 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커버데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가수들이 있다. 김태화, 임재범, 박완규, 양원찬(전 블랙신드롬) 등은 문헌이나 방송, 입소문을 통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들이다. 신성우, 서문탁 같은 이들에게서도 커버데일과 비슷한 어프로치를 엿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커버데일의 후예들은 어쩌면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퀸)를 사숙한 이들 못지 않은 세를 형성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보컬리스트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굵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R&B를 소몰이 창법으로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7년 전, "요즘 화이트 스네이크를 누가 들어요?"라고 타박받은 나는 날이 갈수록 복고주의자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을 확인하더니 "수구세력이시네요"라고 농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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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열전 (2) 로니 제임스 디오

Listen to the 무직 | 2008. 9. 26. 16:38 | Posted by 김수민

신해철이 SBS로 돌아온 다음에 그의 방송을 들은 건 이번주가 처음이었다.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니 제임스 디오 특집을 했다. 선곡은 'Rainbow'의 <Temple of the king>, <Kill the king>, <Rainbow eyes>, 'Black Sabath'의 <Heaven and hell>, <Paranoid>, 'Dio'의 <Holy diver>, <We rock>. 다 아는 노래들이었고, 신해철의 설명도 다 아는 바였다. 적어도 그만큼은 내가 디오에 심취해 살았다는 뜻이다.

'크래쉬'의 안흥찬은 1997년도 <Rock It>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애들이 너바나는 알지만 디오 같은 건 전혀 모른다고 푸념했다. 그때 디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당시는 P2P도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점이었고, 구미 시내에서 테이프가 가장 많은 가게는 우리 집과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이듬해 구미 시내 근처의 고교로 진학해서야 디오의 테잎을 살 수 있었다. 디오는 'Elf'라는 그룹에서 무명생활을 했고, 'Rainbow'에서 스타덤에 올랐으며, 'Black Sabath'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제 이름을 딴 'Dio'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내가 처음 구입했던 건 Rainbow의 베스트 앨범이었고 그 다음이 Dio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디오는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가 성악으로 길을 틀었다면 혹 파바로티나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록 보컬이 되었다면 로니 제임스 디오만큼 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또 나는 감히 장담한다. 디오는 역대 최강의 헤비메틀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명이다. 그 최강의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탈락시키더라도 로니 제임스 디오는 최후에 남을 공산이 높다.

무엇보다 그는 가장 완벽한 발성을 자랑한다. 디오는 흔히 롭 핼포드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소개되는데, 핼포드와는 판이한 발성을 가지고 있다. 제일 크게 도드라지는 부분이 바로 흉성이다. 악을 썼을 때 머리가 울린다고 두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듯, 낮고 굵은 소리를 낼 때 가슴이 울린다고 흉성은 아니다. 흉성은 혀를 이용한다. '이'발음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흉식 바이브레이션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금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디오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흉성은 중음역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며 디오의 노래도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물론 디오의 흉성에는 허스키까지 곁들여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량과 파워를 과시한다.

고음 샤우팅에 귀가 길들여진 이들은 디오의 노래를 쉽게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음을 맞추는 대신 발성을 싱겁게 하거나, 발성을 카피하면서 힘겹게 부르거나. 디오의 보컬이 지닌 최대 약점은 고음에서 중음에서만큼의 파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흉성을 쓰지 않는 롭 핼포드보다 디오가 뒤떨어진다. 인체의 특성상 굵직한 흉성은 높은 소리에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흉성을 구사하는 보컬리스트 대부분이 이런 난점에 시달린다. 그나마 디오는 저-중-고음역에 두루 노련한 보컬이고 덕분에 역대 최정상의 위치에 선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흉성을 구사하면서 음을 이동하는 데조차 불편함을 느낀다. 노래방에는 디오가 부른 노래가 몇곡 있지만, 거의 모두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버텨낸 이들조차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방송에서 김경호나 박완규 등이 곧잘 영미의 메틀 명곡을 부르지만, 언제 디오의 노래를 부르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못 봤다. 아, 어디선가 누가 디오가 레인보우 시절에 부른 <Man on the silver mountain>을 부르는 걸 들은 것 같기는 하다. 흉성이 거의 없어진 채로 말이다.

디오 말고 흉성에 능한 보컬리스트로는 데이빗 커버데일과 그레험 보넷이 있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블루스와 소울에 기반한 음색과 어프로치로 유명하다. 디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디오와는 달리, 외모가 받쳐준다. 레인보우의 후임 보컬인 그레험 보넷은 디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레인보우 탈퇴 이후 '임펠리테리'에서 선보인 그 막강한 성대! 그렇지만 이 둘은 결정적으로 라이브에서의 안정성이 디오에 비해 떨어진다. 더욱이 디오는 스티븐 타일러(에어로스미스)처럼 특이한 음계를 가지지 않았다. 딱딱 음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디오의 외양은 여러모로 카리스마를 내뿜기에 적절치 않다. 그의 홈페이지 디오넷은 키는 '프라이버시'라며 밝히지 않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신장이 150대인지 160대인지는 아직도 안개에 휩싸여 있다. 키에 비해 머리는 큰 느낌이고 머리칼에는 윤기가 없다. 허나 그는 이 모든 걸 극복해 내고 중세풍 헤비메틀의 대표 주자로 올랐다. 그 첫번째 비결은 '모션'이다. 그 어려운 노래를 무대 위에서 힘들이지 않고 소화하면서도 그는 전 세계의 레크레이션 강사들을 뺨치는 모션을 구사한다.

그가 보컬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이고, 완성도 높은 뮤지션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는 비단 음악적인 요소 뿐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배경도 있다. 그가 내뿜는 중세풍의 아우라는 얄팍한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중세문학에 정통해 있고 이는 그의 가사쓰기에 오롯이 다 반영된다. 심지어 그는 흑마술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런 그가 'king of rock'n roll'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스스로 '기회의 평등'이 얼어 죽었음을 선언하는 꼴이었을 테다.

레인보우나 블랙 새버스에서 음악적 주도권은 기타리스트였던 리치 블랙모어, 토니 아이오미 등에게 쥐어져 있었기에 단순한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던 디오는 결국 'DIO'를 결성했다. 나는 이 시절의 디오를 가장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는 기타리스트에게 발탁되는 훌륭한 보컬리스트에서, 훌륭한 기타리스트를 픽업하는 밴드 마스터로 거듭났다. 이 와중에 탄생된 디오-비비안 캠벨 조는 아더왕-렌슬롯에 비유되던 데이빗 커버데일-존 사이크스(화이트 스네이크) 조와 함께 헤비메틀 불멸의 보컬-기타 콤비로 꼽힌다. 비비안 캠벨 이후에도 'DIO'는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의 등용문이었고, 나는 개인적으로 <Wild One>에서 17세 기타리스트가 디오와 함께 튀긴 불꽃을, 디오의 베스트로 지목한다.

디오처럼 되고 싶어? 그렇다 한들 누구한테 "연락해"야 할까. 장르를 바꾸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거나. 그래도 디오처럼 되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라! 스래쉬메틀도 LA메틀/팝메틀도 아닌, 중앙파(?) 헤비메틀(예: 디오를 비롯,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은 옛날에 한물 갔으며, 디오의 전성기도 끝난지 오래. 하지만 분명 나는 디오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의 흑마술이 빚어낸 창대한 우연이다. 근래 한 1년반은 헤비메틀을 한낮에만 들었다. 어제 나는 신해철의 방송을 들으며 간만에 듣는 깊은밤의 헤비메틀에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침대에 누워 담담히 듣던 나는, 그러나 블랙 새버스의 <Heaven and hell>을 들으면서 무너졌다. 그것은 소년 시절 밤을 설치게 만들던 헤비메틀이었고, 더구나 그는 로니 제임스 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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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핼포드는 21일 공연한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리스트다. 메틀 보컬의 산 역사이며, 앞으로도 그를 능가할 보컬리스트는 물론, 그에 필적할 보컬리스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 락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솔로이스트로는 김종서과 김경호가 꼽힐 것이다. 그들을 통해 대중화된 락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보컬 스타일, 즉 하늘을 찌르는 하이톤 보컬이 곧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고음이 돋보이는 보컬들 간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들 두성을 쓴다는 점에서는 비슷비슷하지만, 김경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스트라이퍼'의 보컬 등은 기본적으로 미성에 바탕하고 있다. 국내 청중들이 락 발라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스틸 하트나 스콜피온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미성이라 함은 단순히 맑은 목소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청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 변성기 이후에도 높고 깨끗한 목소리를 유지하였으며 마치 여성처럼 자연스럽게 고음을 내는 이를 미성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일례로 스트라이퍼의 <I believe in you> 같은 노래는 여성과 흡사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일본이나 한국 등지에서 특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멜로디컬 메틀'의 보컬리스트들 다수는 '반가성'이 돋보인다. 하이틴 아마추어 메틀밴드들이 즐겨 커버하는 헬로윈이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 밴드의 보컬리스트는 실력이 되고 연습을 많이 해서 헬로윈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반가성은 미성이나 두성에 비해 선천성이나 각고의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 밴드 보컬은 아니더라도 노래방에서 고음부를 좀 소화하는 이들은 대부분 반가성을 사용할 줄 안다. 단 반가성에 의존하는 보컬들은 중저음과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고음 일색이거나 <A tale that wasn't right>처럼 초반부는 저음이고 후렴구에서는 막바로 고음을 내게 된다. 반가성은 또 컨디션에 크게 좌우받는다. 헬로윈이나 예레미의 보컬이 이따금 반가성이라기보다는 '거의 가성'에 가까운 발성을 하는 요인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반가성이나 미성이나 두성을 한가지만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어차피 인간의 한계가 있거니와 각자의 발성이 가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성은 파워가 약하고, 두성도 일정 음역에 다다르면 반가성으로 변환되게 된다. 이 세가지에 허스키(그냥 거친 소리가 아니라 목에 힘을 줘 긁어서 내는 소리를 뜻한다)를 꽤 많이 섞는 보컬이 바로, 핸섬 그 자체의 얼굴, 큰 키, 긴 머리칼 등 완소외모를 자랑하는 세바스찬 바크('스키드 로우' 출신)다.

그렇다면, 롭 핼포드는 어떤 케이스인가. 그는 미성에 기대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점에서 그를 '하이톤 보컬'로 분류하는 건 멋쩍은 짓일지 모른다. 롭 핼포드는 기본적으로 '기냥 육성'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고음으로 올라가면서 두성이 나오고 허스키가 섞이고 더 올라가면 반가성으로 가지만, 여하튼 그는 육성을 많이 쓴다. 대신 흉성은 거의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 흉성을 쓰지 않고 육성만으로 파워를 내는 보컬리스트로는 윤도현이 있는데, 물론 그와 핼포드는 닮은 구석이 없다. 핼포드는 음색 자체가 금속성이다. 짚어보니, 롭 핼포드는 교과서적 메틀 보컬리스트이면서도 꽤 개성적이다. 그의 아류들이야 있겠지만 그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원류를 쫓아온 사례는 거의 없다. 한국의 수많은 메틀 키드들이 그의 노래를 카피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부르지는 못했던 듯하다. 따라잡기의 용이성으로 치면, 헬로윈>스트라이퍼>세바스찬 바크>주다스 프리스트가 아니었을까.

흉성보다 두성이 돋보이는 보컬리스트들 대다수가 롭 핼포드를 따르지 못하는 결정적 측면은 단연 라이브에서 과시하는 안정성이다(이에는 고음실력 못지 않게 중음의 탄탄함도 깔려 있다). 세바스찬 바크나 제임스 라브리에(드림 시어터)가 날고 기어도 그들이 심한 기복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이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K.K. 다우닝과 글렌 딥튼의 기타, 스캇 트래비스의 드럼에도 귀가 집중될 수밖에 없지만(베이스는 빠트려서 죄송. 그에게는 근음과 8비트로 상징되는, 튀지 않는, 그러나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단순하고도 궁극적인 멋이 있지 않은가), 보컬은 튜닝이 되는 악기가 아니다. 게다가 핼포드는 이미 5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공연을 준비할 때나 끝나고 후기를 쓸 때나 팬들이 핼포드에게 마음이 끌렸던 건 당연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늙었고 이번 내한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대가, 창법이 늙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정상 그랬겠지만 의자에 앉아서 부른 노래가 몇곡 있었고, 앞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어딘가에 기대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딜레이나 리버브가 걸린 대목도 적지 않았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노래에 져서 쓰러지는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고음부가 너무 많아 악을 질러대거나 중음에서 흉성+허스키로 목을 상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성대의 보존이 그만큼 쉬웠으리라 판단된다. 그런데 발성이 단순하고 약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보컬계에서는 "제대로 된 중음 하나, 열 고음 안 부럽다"는 속담이 있다. 핼포드가 누구누구보다 음을 못 올려서 중음의 비중이 더 많을까? 또 한편으로, 중음에서 흉성을 쓰지 않는다는 건 심심한 느낌을 상쇄할 본인만의 무기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발성외적인 이야기지만, 롭 핼포드의 카리스마는 가만히 서 있어도, 이따금 팔만 좌우로 움직여도 관객들을 빡돌아 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이미 공연 초반부 <Metal God>을 통해 확인되었고, 그는 역시 메탈의 신이었다. 혹자는 냉철하게 따지면서, 그렇게 오래 인기를 누렸으니 별 모션이 없어도 대단해 보이는 거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거다. 1980년대를 관통한 그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고, 35년간 버텨온 그 에너지가 어디에 갔겠는가 말이다. '나도 롭 핼포드만큼 부를 수 있는데'라는 분은 그만큼 개겨 버리면 된다.

자세힌 몰라도 가시밭길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공장지대 노동계급 청년들이었다. 메틀 기타의 본보기라는 두 기타리스트도 걸출한 초식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은 아니었다. 또 이 밴드는 고질적으로 드러머 기근을 앓았고, 초창기에는 느릿느릿한 곡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다. 롭 핼포드에게는 누구를 따라하고 흉내낼 만한 시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로니 제임스 디오, 데이빗 커버데일, 그레험 보넷 등이 하드록에서 메틀로 자가발전했다면, 롭 핼포드는 그 과도기의 카오스를 1980년대를 장악할 막강권력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하나 더 기억하자. '정통 메틀' 어쩌구 하는 어휘가 있고, 그것이 주다스 프리스트나 아이언 메이든을 수식하기도 하지만, '메틀'은 태생적으로 록음악 내에서도 이단의 음악이었다. '헤비 메틀'이란 말부터가 경멸어였다.)

"다 늙어서 돈이 궁하니까 왔냐"고 깝죽거리는 네티즌을 한명 보았다.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메틀 보컬이 다른 장르의 싱어들보다 노화에 큰 지장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나이먹기라는 게 본디 기브 앤 테이크 아니었던가? 아티스트는 중년, 노년에 슬은 '녹'마저 광휘의 원천으로 쓴다. 그러면서 나이에 걸맞지 않을 수 있는 화장은 벗겨진다. 전성기 노장밴드의 대표선수인 롤링 스톤즈나 에어로스미스는 메틀밴드는 아니었다. 노장 메틀 뮤지션의 새로운 전성을 주다스 프리스트와 롭 핼포드로부터 보지 못하면 어디서 본다는 말인가. 이번 공연은, 안 가본 놈들만 손해봤다. 당신이 어디서 롭 핼포드 수준의 보컬을 직접 들을 수 있다고. (아차차, 주다스 프리스트에 관심 없었거나, 가고 싶었는데 사정상 못 간 사람은 예외.)

추신: 한국 록역사에서 핼포드와 가장 유사했던 보컬리스트는 '백두산' 시절의 유현상이었다. 그리고 유현상 이전에 유현상 없었고, 유현상 이후에 유현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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