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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史의 찬미 | 2010. 1. 11. 16:22 | Posted by 김수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대답하기가 난처하다. 대의명분 있는 뚜렷한 계기가 있어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다면 멋도 있고 질문 한 사람도 만족시킬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히 개인적인 이유로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됐으니 말이다.

이처럼 민주화운동이나 정치활동에 참여한 동기가 사회적인 데 있기보다 개인적인 데 있었기 때문인지 나의 경험이나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말하자면 '만물의 척도는 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회풍조에 편승하거나 사회과학지식에 얽매이지 않은 편이다.


교수들은 우리들의 주장이 다 맞는다면서도 '자네들도 어른이 되면 우리들 심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다짐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젊은 사람들에게 '자네들도 어른이 되어 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멋진 이야기고, 오늘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장기표다.

늘 반성하며 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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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 30년?

史의 찬미 | 2010. 1. 8. 20:48 | Posted by 김수민
'군사정부(정권)'의 정확한 정의를 모르겠다. 인터넷 사전을 뒤지니 대충 '군인들이 다스리는 정부(정권)'쯤으로만 나와 있다. 한국에서는 '군정 30년'이라고들 했다. 군인이 정권을 탈취하긴 했으나 30년동안 군부가 다스린 것은 아니다. 쿠데타 이후에는 민정으로 이양했고 자신이 그 문민이 되기 위해서라도 군복을 벗었으며 정당을 건설해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도, 노태우 정권까지 포함해, 30년이란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건데 정녕 '군정 30년'이라는 표현이 맞기는 맞나? 하기야 '군사 파쇼'라는 표현까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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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친일

史의 찬미 | 2009. 12. 10. 16:44 | Posted by 김수민
안중근의 10.26의거를 기념하여 얼마 전 동양평화론 조명 논의가 있었다. 물론 그가 테러를 결심했지만 사상적으로는 평화주의였다는 수준으로 귀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토론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곱씹을 거리 하나는 건졌다. 그것은 '평화'보다는 '동양'에 있다. 안중근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아시아주의자라는 점이다. 이 아시아주의가 제국주의와 단절적이거나 차별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개화기 아시아주의는 개화된 일본과 함께 한국과 중국이 공영해야 한다는 사상이며, 여기에는 앞서 나간 사회에 대한 동경, 그러니까 사회진화론이 포함되어 있다.

위암 장지연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는 소식에 그 유족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많은 이들도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을사조약을 맹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장지연의 일제부역행위는 진실이다. 그는 1911년 11월 2일자 <경남일보> 지면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시를 실었으며, 1915년 초에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총독부를 칭찬하였다.



장지연은 변절자인가? 그렇지 않다. 한일병합 이후 그의 행보는 필연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애국적 사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반일과 반제는 아니다. 개화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민족주의와 애국은 곧 반일이라는 등식부터가 잘못되었다. 장지연은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황성신문>에서 일본의 승리를 염원했다. 황성신문과 당대 개신 유림은 백인종에 대항하는 황인종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 국제적인 패권주의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고, <대한매일신보>와는 달리 반일적이지도 않았다.[각주:1]

'시일야방성대곡'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건 동양평화의 비전이 무산되면서 새어나온 배신감의 표현이었다. 그점에서는 안중근과 닮았다. <황성신문>의 친일 논조는 을사조약 직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독립 유지를 전제하고 있었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 일본과의 공영에 몰두하였다. 이는 힘 센 나라, 먼저 개화한 나라와 더불어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사회진화론의 발로였다. 많은 민족 인사들은 이렇듯 전쟁찬양과 인종주의에 협력하면서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달리 태생적으로 저항적, 해방적이었다는 통설을 개화기 역사는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도 그 출발은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다.)

반박 뿐인가. 일제의 통치가 본격화될수록 뚜렷이 입증된다. 3.1운동에 앞서 잠시나마 이완용조차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영입될 기미가 있었다. 그걸 사양한 건 이완용 자신이었다. 국가대표 친일파마저 민족대표로 자리매김하는 마당에 일면 반일적인 듯한 인사가 일제부역자가 되는 건 별 일도 아니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처럼 일본의 강성함을 찬탄하며 자민족의 현실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철두철미한 약육강식론자로 거듭나 제국주의를 합리화했다. 피해대중의 고통보다 자신의 명망과 이익이 더 소중했던 지주, 자본가들도 독립을 포기한 뒤 자치론을 펴는 '타협적 민족주의'에 그쳤다. 심지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조차 1930년대 후반께 잠시 일본이 모색했던 새로운 길, 동아신질서론에 현혹되어 전향하는 사례도 있었다.

신채호는 이와 정반대의 길로 고집스레 걸어간 인물이다. 그는 사회진화론자였으나 그것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함을 간파하고 사회진화론을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주의자였지만 말기 그 민족주의에는 무정부주의까지 섞여들어갔다. 식민지배 뿐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독재에 저항한 좌익들(물론 이들이 정녕 사회진화론을 떨쳤는지는 좀 더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소비에트연합에 기댄 일부의 행태는 '사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 아닌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중도파로서 '균등'을 앞세운 조소앙, 국제주의적인 신민족주의를 제시한 안재홍 등이 모두 사회진화론에 반대한 지식인들에 속한다. 사회진화론에 반대하지 않고서 온전히 반제국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일제 말기 김활란, 백낙준 등이 내심은 친미파였으나 일제 권력에 굴종한 '전쟁협력자'였다면[각주:2], 장지연 같은 인물은 민족중심적 사고를 갖춘 동시에 아시아 인종주의자, 사회진화론자였다. 양쪽 모두 민족/반민족, 애국/매국, 친일/반일이라는 기존의 구도로는 논거들의 우격다짐만 계속될 따름이다. 개화기 우국지사들에게서 지나치게 반제국주의의 모범을 찾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욕을 을사오적에게만 퍼붓고 있지는 않은지, 본심은 다른 쪽이었다는 변명으로 구체적인 부역행동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되돌아볼 때다. 궁극적으로 친일청산의 동력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가치들-평화,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에서 나와야 한다.
  1. 대한매일신보에 관한 접근도 다각적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경영자인 베델에 대해서다. 지금까지 그를 그저 서구에서 날아온 구원자로 채색하는 시도만 있었다.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기는 했으나 영국인 거류지 상인들은 이 동맹으로 잃은 이익에 민감했기에, 베델이 인 집안 출신으로서 반일 정서를 가진 측면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으로]
  2. 박정희 역시 교사 시절 반일적이었다며 친일파가 아니라고 두둔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내심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불 속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없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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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史의 찬미 | 2009. 8. 31. 20:36 | Posted by 김수민

전두환이 눈앞에 있으면 오만가지 액션으로 뭉개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김종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나의 아버지는 민정계라기보다는 공화계에 가까웠던 것 같다. 1996년 총선에도 5공출신은 모조리 물러나야 한다며 신군부였던 신한국당 후보를 거부하고, 박정희의 장조카인 자민련 후보에 투표하셨다. 어렸을 적 집안에는 김종필이 썼다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를 왠지 조금 더 친근(?)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박정희, 전두환, 어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김대중이라면 그 중간쯤에 김종필이 존재하였다고나 할까.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김대중을 계산하자>에서 김종필 특유의 낭만주의를 나름대로 평가하며, 그를 군사정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든 장본인으로 일컫는다. 수많은 밴드들이 활약했던 서울시민회관을 후원했던 김종필은, 확실히 꼰대 소심남 박정희와는 달랐다. 담배 물고 그림그리는 미남자의 사진은 유명하다. 박 정권기에도 외유를 떠났고 전두환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던 과거사도, 그를 '지배블럭 내부의 온건파'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요즘 문득 김종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전에 있을 경우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왠지 차분히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김종필을 성대모사할 때 가장 자주 구사하는 레퍼토리가 "노 코멘트, 허허허~"이다. 내 기억으로는 골프를 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에게 했던 말 같다. 그것은 김종필의 주요 무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필과 그에 얽힌 한국현대사에 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될 수밖에.

내가 그를 통해 알고 싶은 건 얼추 이렇다. 첫째, 김종필은 어찌 하여 해방정국기 좌익 학생운동에 관여했는가? (그는 도피책으로 군입대를 선택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는가? 둘째, 한국전쟁의 전면전 개시일 당시 육본 정보부서의 당직장교였던 그는 그날 무엇을 겪었는가? (물론 대답을 얻어낼 가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질문이다.) 셋째, 혁명정부 최고기구에 왜 북조선 어휘라는 공격을 받아가면서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그리고 당시 그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넷째, 몇해전 '정치개혁' 시도 전까지 유유히 내려온 '사무총장-지구당' 체제는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정당체계 개편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다섯째, 김종필이 주도하던 신당(민주공화당)의 이름이 '사회노동당'으로 보도되어, 김종필과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과 맞물린 의심을 자아냈다. 또 5.16군정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나 반미국가의 늬앙스를 띄는 것들이 많았다. 혹 군정은 좌우를 국가주의적으로 아우른 정부나 여당의 건설을 생각했었는가? 여섯째, 해방정국기부터 5.16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견지한 사상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가?

물론 내가 추정하거나 기대하는 종류의 답변이 있기는 하다. 최근 나는 5.16을 다시 사고하고 있다. 국가체계가 무르익기 전의 사건을 두고 '헌정 질서의 중단'이라고 평가하는 게 꽤나 사후적이며 '보수야당'중심의 역사관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혁신적 지식인들이 5.16을 환영했거나, 적어도 윤보선-장면계열을 두둔하지는 않았다는 증언들에도 몇해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가령 리영희는 임헌영과의 대담(<대화>)에서 제5대 대선을 '극좌 출신의 극우'와 '민주를 가장한 수구'의 대결이었다고 요약하며, 자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구술했다.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5.16을 '반동혁명'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박정희 정권을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신'은 neo보다는 new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5.16은 4.19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950년대 소장 지식인이 살아남기에 가장 좋았던 곳, 당시로서는 가장 근대적이었던 조직이 군부였다. 그리고 5.16 주체들이 문제삼았던 윗세대나 상부의 무능과 부패는 현실이었다. 비록 자의적일지라도 5.16이 4.19정신의 계승을 선포한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5.16을 비판하려거든 민족(국가)적 엘리트주의라는 근본적인 사상을 건드려야지, 이를 여대야,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반민주의 틀에 끼워맞춘다면 숱한 부분들이 왜곡될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조병옥이나 윤보선, 장면 등이 대단히 훌륭한 위인들인 줄 알았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척을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16을 박정희와 동일시하는 것도, 최저 수준의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기우뚱한 제3공화국과 유사 파시즘적 총화단결 체제를 지향한 제4공화국을 구분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박정희는 하나의 극단이었다. 그 대척점에 뒷날 5.16의 의의를 부정하게 된 5.16주체 박창암이 있었다(일제 말기 군부내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에 가담했다는 박창암은 여운형계열의 지식이었다고 한다). 5.16의 중심점은, 특히나 사상사적으로 규명하자면 김종필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종필은 기획가, 이론가로서의 면모도 강했다. 그는 북조선 정권의 어느 누구보다도 트로츠키를 닮았다. 현 정치인 중에 김종필과 가장 닮은 인물도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나 친노그룹 쪽에 있을 것 같다.

2004년 총선,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유세에 나온 어느 선거운동원들은 "조용필!"을 연호했다. 델리 스파이스의 <노인구국열사대>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의 한 대목도 자민련과 김종필을 조롱했다. 김종필은 (김윤환과 함께) 낭만과 풍류의 정객인 동시에 정치권의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당해왔다. 누가 예술은 길지만 인생을 짧다고 했나. 김종필의 오늘과 옛날을 견주면 그런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노코멘트하기 전에 알아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는 꾸준히 탐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전두환과 너무나 다른 점이 아닐까.

그에게, 또는 그에 관해 묻고 싶은 건, 청구동에서 쫓겨나더라도 두가지가 더 있다. 첫째, 1960년대 중후반 박정희보다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도 그랬나? 그 당시 어떤 야심을 가졌나? 둘째, 장인인 박상희 선생은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야, 노 코멘트... 으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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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의 찬미 | 2009. 8. 22. 05:07 | Posted by 김수민
한민당 지역간부인 장인이 탈퇴를 권유하기까지, 김대중이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별스럽지는 않다. 건준에는 그리고 안재홍과 같은 우익이 한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그걸 가지고 좌경, 용공 시비를 거는 것도 우습다. 그런데 미처 몰랐다가 김대중이 한때 조선신민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에 다소 놀랐다. 조선신민당은 북과 남에 모두 있었는데, 북에서는 최창익,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되어 중간계급, 지식인, 농민들을 규합하였고, 남에서는 백남운이 중심이었다. 북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이랑 통합해 북조선노동당이 되었고, 백남운 쪽은 남조선노동당에 결합하지 않고 여운형, 조선공산당 비주류와 따로 합당하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었다. 정강으로 치면 공산당보다는 오른쪽에 있고, 여운형의 인민당보다는 왼쪽에 있는 당이었다. 어째서 김대중이 인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신민당에 들어섰는지 연유가 궁금해졌다. (탈퇴 사유는 잘 알려져 있다. 건준이나 신민당이 계속 좌경화되어 민족주의적인 자신의 성향에 그리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은 김대중이 조봉암을 언급하거나 기린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박태준, 김종필 따위의 다른 여야대표들과 함께 복권사업에 참여했던 것을 빼고는 말이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나 피해대중 대변 노선은 분명 김대중의 3단계통일론이나 대중경제론과 유사하다. 김대중이 기존 보수야당의 한계를 조봉암노선으로 극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봉암에 대해 딱히 언급한 바가 없다. 옛날 옛적에야 색깔공세를 의식하고 본인이 보수정객을 자처했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와 과거사정리가 진행된 다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왜 밝히지 않는가보다는, 그가 조봉암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박정희를 연구할 때, 특히 인간적 심리적 측면을 추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시기가 해방 정국기에서부터 한국전쟁 직전에 이르는 시기다. 그때 청년 박정희는 자신이 충성한 일제의 패망, 좌익 인사인 형의 죽음, 남로당 참여와 적발, 군부로부터의 퇴출, 애인과의 결별 등으로 매우 심신이 피폐해졌다. 아마 1917년생으로서 30대 초반에 겪었던 그 시절은 그에게 쓰디쓴 절망과 엄청난 권력의지를 안겨다주었을 공산이 높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30대는 어떠했을까. 전도유망한 청년실업가에서(김대중은 한국 최초의 CEO 대통령이다), 연거푸 선거에 낙선하는 정치지망생이 되었던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다듬고 굳혀나갔을까. 야당의 대표자 시절, 대통령 시절의 행적과 공과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 당시의 김대중이 더 궁금하다.

위 사진은 드라마 <제3공화국>의 한 장면이다. 5.16 쿠데타 이후 당선자 등록증을 받으러 당돌하게 국회로 들어가는 김대중. <서울의 달>로 뜨기 직전의 백윤식이 이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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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의 찬미 | 2009. 7. 17. 15:33 | Posted by 김수민
"사상범으로 몰려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왔습니다."(잊혀진 '납북 제헌의원' 40여명) 얼핏 남로당이나 보도연맹 연루자 유가족의 증언 같지만, 김영동 제헌의원 아들의 증언이다. 1969년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도 김 의원은 제외됐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재산가이며 따라서 좌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막노동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북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과 월북을 구별할 수도 없는 주제에 둘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북조선이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북측이 마련한 첫 방송연설에 나선 남측 인사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 송호성이었고, 그 다음이 제3대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었다. 반공반북의 핵심인물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잔류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안재홍, 조소앙 등이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한 데 비해, 김효석의 연설이 지나치게 비굴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다들 전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연설에 나선 결과지만, 북측에서 생명을 위협하거나 내용을 일일이 강제한 정황은 없었다는 게 연구결과다. (이신철, <북의 통일정책과 월 납북인의 통일운동 (1948~1961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대학원 박사논문, 2005)

제헌 국회의원들은 미제의 무력침공 반대를 골자로 하는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서도 서명했는데,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원세훈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김영동 의원의 이름도 올라가 있다. 단 국회프락치 관련자들은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평양으로 떠나 있었다. 해서 그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후일 제기되었다. 납북인사들의 활동을 증언했던 신경완도 소장파들이 북측의 성시백과 연결되어 활동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규식에 이어, 북측에 의해 마이크를 잡았던 김약수는 이승만 정권이 국회프락치 사건을 날조했다고 규탄했다. 이승만 정권을 견디고 있던 좌익이 월북했다는 것,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이 납북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 당사자들에 이르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그들이 진짜 프락치일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북으로 넘어가게 만든 1등공신이 이승만 정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6.25 직후 유력인사들이 서울에서 가진 방송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김영동을 비롯한 관련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6.25 직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가 도강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해 있었다. 설마 자신한테 북측이나 좌익이 심하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전쟁이 터졌을 무렵 야구장에서 태연히 앉아 있던 서울 시민들도 있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초기는 수없는 국지전 끝에 남침한 북조선에게 내전조차도 아니었다. 전쟁으로 이남을 먹겠다는 태도보다 서울을 잡으면 국토완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뚜렷했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평양에 '모셔진' 인사들도 나중에 서울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6.25는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선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다.

해방정국기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재밌는 대답이 떠올랐다. "북조선에 살았으면 월남했을 것이고, 남한에 살았으면 월북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 자리를 옮긴 뒤로는 사상적 건전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내 새로 만난 체제의 주류와도 불화했을 터이다. 남에서 북으로 간 김원봉이나 북에서 남으로 간 장준하처럼. 통일된 조국에서라면, 혹은 평화적 분단체제에서라면, 중도좌파나 중도우파로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런 경로를 밟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조선은 다양한 사회주의세력과 홍명희 같은 중도파까지 껴안고 있던 체제였다. 처음부터 강성 독재는 아니었다. 백퍼센트 자발적 월북이더라도 그것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거푸 말하지만 납북이든 월북이든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독재와 한국전쟁의 상황에 의해 북으로 내몰린 것이다. 어찌 됐건 '선을 넘어갔다'는 사실만이 오로지 명확하다. 월북을 폭넓게 해석하면 납북인은 그 하위 분류인 셈이다. 월북과 납북의 구별은 난망할 뿐더러 의미가 별로 없다. 북조선에서 호의호식한 게 아니라면, 김영동 의원을 비롯한 월납북인들은 남한 정부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반민특위에 투신했던 김 의원이 사후에도 벗어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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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수라는 운동가

史의 찬미 | 2009. 3. 24. 01:07 | Posted by 김수민
1970년대 학생운동사를 이야기하며 그를 빼놓는다면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를 이야기하지 않고 1970년대 학생운동을 논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당대의 학생운동은 그를 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활동반경은 무변광대했다. (...) 그런데 그것뿐이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는다. 정작 따지고 들면 그가 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건에도 직접 연루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더욱 존재가 신비롭고 행적이 전설적이다.
그가 4년이나 늦게 대학에 진학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 대학 진학을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그는 군대조차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징집 영장을 받은 그는 병무청을 찾아가 "집안 사정으로 기피를 해야겠다"고 말하고는 소집에 불응했다. 
장선우(영화감독, 본명 장민철, 고고인류학과 71학번)로 하여금 10.2데모에 가담토록 움직인 사람도 그였다. (...) 하지만 10.2데모로 구속 제적된 장선우와 달리 그를 움직인 신동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참고인으로 불려다닐 때 동수형이 그걸 알고 미리 몇 시에 어느 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 놓았다. 잡혀간 나는 그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까지 궤뚫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약속 시간에 다방에 전화를 걸어 나를 바꿔달라고 하면 기관원들은 허탕을 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게 확인되는 것이다."
 
그의 숨은 행적은 더 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나긴 도피생활을 하며 그
와중에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를 숨겼다.
1978년 완성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실질적인 제작자도 그다. 1980년대 원혜영이 일으킨 '풀무원'의 성공 스토리 뒤에도 그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숨어 있다

스스로는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한 것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어두운 시절을 좌표 없이 표류해왔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후배들한테 코 꿰여 같이 좀 다녔을 뿐"이라며 최근에는 "집안이 어려워 특별한 인생설계 없이 도피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여한 측면도 있다"는 말도 했다.

"그를 보면 호치민이 생각난다. (...) 홑점퍼 하나를 몇 년씩 입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 그의 장점 중 하나가 공연이든 선언문이든 비평문이든 거기에 대한 미학적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자극이 되고 혼란스러운 것이 잘 정리됐다.(...)" (장선우)
그는 지금도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1980년대 풀무원 사업에 참여했다가 식품업을 시작한 그는 지금껏 그 일을 하고 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간 것일까. 좀처럼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그가 겨우 내놓는 대답 또한 그의 학생운동 전력처럼 난해하다. "농업 쪽에 제대로 기여했으면 했는데, 장사가 워낙 힘드니까..."
 신동호 (2007), <70년대 캠퍼스> 1권(환경재단 도요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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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3

史의 찬미 | 2009. 3. 10. 22:17 | Posted by 김수민
<미인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 정사 장면이 아니라(<색/계>에 비견하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창기들이 관객들 앞에서 청나라 체위를 선보이는 씬이 더 재미있었다. 다만 김민선이 첫 섹스하는 여자의 수줍은 감격에 어울리는 연기와 표정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설득력 있고 현실적으로 개혁군주(정조)를 묘사했다는 점이다. <신기전>에서 백성(정재영)과 세종(안성기)의 육두문자가 포개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쟁에 앓는 골머리를 그림으로 달래고 국가적 화가를 양성하는 왕은, 민란의 소식에 역정을 내고 마침내는 신윤복을 탄압하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중반부 신윤복의 그림이 드러나 왕이 역정을 냈을 때 김홍도는 타락한 양반들을 풍자하였다고 변명하며 제자를 감싸지만, 신윤복은 그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신윤복은 노론벽파도 민란의 가담자도 김홍도도 아니다. 영화 속 그는 남장 여자의 억압과 당대 화가들간의 경쟁을 정치가 아닌 그림으로 돌파하려고 하고, 왕은 견디지 못하여 그를 심판하고 내쫓는다. 조선조 왕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은 우리 편이 아니다. 왕은 자유의 대척점에 있다. 기득권 신료들과 밀서를 주고받든 암투를 벌이든 그는 우리 자유민들과 같은편을 먹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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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2

史의 찬미 | 2009. 3. 6. 18:04 | Posted by 김수민

현대사 버전: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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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史의 찬미 | 2009. 2. 11. 04:38 | Posted by 김수민
새로 공개된 정조의 어찰은 독살설을 반증하고 있지 않다.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반증이람. 독살설은 당대에 '썰'로도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김조순이 벽파를 날릴 때 이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인 전체도 아닌 영남 구석에 있던 남인들끼리 유포한 카더라 통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영남 남인에 합세하여 독살설을 믿거나,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조를 추앙하는 이들은 민족자존의 얼굴을 한 서구중심주의자들이다. 절대계몽군주를 거쳐야 -시민혁명 따위를 통해- 근대를 열어제낄 수 있다는 도식에 기대고 있는 몇몇 역사학자들 말이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정조에 대해서는 절대계몽군주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붕당정치가 토리당-휘그당처럼 발전해나갈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두지 않는다. 붕당은 형이상학적 논쟁이나 권력투쟁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쟁점을 겪으며 꾸준히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 후대에 '실학자'로 일컬어진 박지원, 정약용 등이 엄연히 붕당의 소속원이라는 것, 조선은 분명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 등도 고려되지 않는다. 박지원은 군주를 士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하였지만, 정조는 하 은 주 시대의 관념까지 끌어와 임금과 스승의 위치를 겸할 것을 선포하고 '만천명월주인옹'을 자처했다. 이에 대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소농 중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하여 신권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어찰은 '정조=개혁', '붕당(노론 벽파)=수구기득권'이라는 구도를 뒤흔들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정조가 노론 벽파와 실은 온전히 한패거리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격한 표현을 쓰면서 자기 측근들을 비방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정조는 붕당을 억누르기 위해 소장파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했지만, 그들이 서학과 북학을 선도해 나가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척사보다는 부정학이라는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어쨌든 정조도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틀림 없다. 정조는 영조와 달리 각 당파의 의리론을 인정하는 의리탕평론을 폈으나 어렵사리 성취한 삼상연립정권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왕권강화책은 공론정치의 붕괴를 가져왔고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한사코 썩은 모리배들에 의해 좌절된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까닭은? "왕은 우리편이다"라는, 그만은 그래도 우리편이었었다는 의식이 아닐까. 민중 봉기가 성공하거나 그 성공이 유지된 적이 없는 나라에서 '民다이'는 '君다이'와 결합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民으로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君이 그 강력한 힘으로 추진했었다는 환상. 그러나 그 君도 臣의 음모로 주저 앉음으로써 民과 같은 약자였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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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도 '특강'이 있었다. 1998년 가을 내가 재학하던 고등학교의 강당에 1학년 학생들이 모였다. 특강의 주제는 잊혀졌지만 강사의 소속이 '자유총연맹'이었다는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자유총연맹은 한국의 대표적 관변단체이나 그러면서도 당시 상황상 '김대중 정부 하의' 관변단체라는 성격을 피할 수 없었고,  예의 그 '안보'와 '통일'이라는 특강의 기조에는 김 정부의 기조였던 '햇볕'이 슬그머니 들어와 있었다. 시종 애매했던 강연은 막판에 갑자기 박정희 문제로 새기 시작했다. "한가지만 인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번 봅시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 왜 하필이면 쿠데타도 납치도 고문조작, 사법살인도 아닌 '장기집권'을 거론했을까. "그럼,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했는 걸 부인하는 사람?" 나는 혼자서라도 손을 들려고 했으나, 아뿔싸, 강당 학생들의 대다수가 '전사'해 있었다. 끝나가는 강연을 연장해 원성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때나 요즘이나 학생들은 효과적인 보이콧 방법을 알고 있다. 민망하게도 카메라 부근에 앉은 학생들이 모조리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중 몇몇은 아예 담요까지 덮고 앞자리에서 대담하게 존다. 잠에서 깨어 해맑은 얼굴로 강연장을 나갔다는 학생들은, 뻔한 줄거리였다는 반응과 강의의 주장이 틀렸다는 비판,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 등을 표출한다. 시중 유행하는 '한국근현대사 특강'의 풍경이다.


특강의 연사로 초빙된 인물 면면이 드러나면서부터 이 기획은 시민들에게 맹성토 당했다. 한눈에 봐도 극우편향이었다. 이것을 의식해서인지 당국은 이영훈과 조갑제를 제외했다. 이 둘은 평소 언사를 감안하면 수면제가 아니라 폭탄이 될 법도 하니, 학생들의 집중도만큼은 제고할 수 있는 카드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어떤 폭탄이 추가될지, 어떤 수면제가 사라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로 빼서는 안될, 반드시 학생들 앞에서 전시해야 할 사람이 있다.


1992년 9월로 예정된 남북고위급회담을 맞아 노태우 정부는 이산가족상봉을, 북한 정부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옹의 송환을 꾀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에 이산가족 상봉, 판문점 면회소 설치, 납북 선원 송환의 세가지 조건을 일단 내걸며, 세번째 조건(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을 뺀 나머지 두 조건이 합의될 시 이인모 옹을 송환하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9월 15일 북한은 첫번째, 두번째 조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평양에 있던 남한대표단은 협상을 타결하겠다며 청와대, 통일원, 안기부로 청훈을 보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답신이 돌아왔다. 3개 조건의 동시 충족으로 협상방향을 바꿔 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훈령이었으니 이산가족 상봉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임동원 당시 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 위원장은 통일원장관에게 질책을 받았다. 반드시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라고 재차 훈령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양의 대표단이 받은 훈령 내용은 3개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마 '중년탐정 김정일'이라면 "움직이지마! 움직이는 놈은 다 범인이여~"를 외쳤을 터이다. 결국 서울과 평양을 오간 전문이 조사되었고, 범인이 드러났다.


범인은 평양에서 보낸 청훈을 안기부 이외의 수신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평양에서 가짜 훈령을 작성했으며, 진짜 훈령을 입수하고 나서는 회담 종료 이후 총리에게 지연보고했다. 간덩이 스케일 한번 거하게 과시한 그는 안기부의 특보였고,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산가족 상봉의 의의나 이인모 옹의 송환 명분 등은 차치하기로 하자. 이 사건의 본질은 간첩도 아니고 불복종 시민운동가도 아닌 정보기관 간부가 청훈을 묵살하고 훈령을 조작했다는 데에 있다. 혹시 이 글을 접한 독자 가운데 한국근현대사 특강 따위를 들었거나 혹은 들어야 할 고등학생이 있는가? 엄청나게 간 큰 그 남자는 바로 여러분의 특강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 아저씨가 강단에 섰을 때, 여러분이 졸면서 헤드뱅을 할지 '범인은 이 안에 있다'는 생각에 잠이 확 달아날지, 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다만 그 이름 석자 '이동복'을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아울러 특강을 기획한 교육당국에도 고한다. 이동복 씨의 출연 빈도를 늘려라. 그는 특강의 취지인 '묵살'과 '조작'에 더없이 적임이니까.


추신: 내가 강원도 모 순찰지구대에서 일할 적이다. 경찰 유관기관에서 직책을 맡은 지역유지인가 뭔가가 쇼파에 앉아 지구대장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강연은 잘 들으셨나요?" "아, 뭐~ 우리 같은 사람이 들을 필요가 없어요. 노무현 정권부터 와서 듣고 정신차리라고 해요." 강연은 경우회인가 뭔가가 주최했고, 연사는 이동복이었다. 그놈의 입은 '잃어버린 10년'동안에도 멈추는 법이 없었으며, 언제나 그랬듯 꼰대 어른들은 자야 할 때 잘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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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와 조근래

史의 찬미 | 2008. 10. 27. 00:36 | Posted by 김수민
다른 이 셋과 일행을 이루어 토요일 종일 고향인 구미 일대를 돌아 다녔다. 10.26을 하루 앞두고 박정희생가부터 들렀다. 우리는 '박상희 생가'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기도 했고, 나는 가이드를 하면서 박상희의 생애를 아는 대로 소개했다. 뒤이어 동락공원에서 바람을 쐰 뒤, 경부운하사업 인근 500m에 이내에 있는 구미 문화유산에 속하는 인동향교와 동락서원을 다녀왔다. 동락서원은 인동향교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있는데, 그야말로 '강변'에 있는, 운하를 파는 즉시 물에 잠기고도 남을 위치에 있었다.

저녁에는 구미경실련 조근래 사무국장과 진하게 술을 나누었다. 조 국장은 인민노련, 한국노동당, 민중당을 거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산 증인으로 소위 '노출'이면서도 위장취업한 '학출'들을 학습시켰던 분이었고, 90년대 초중반부터 시민운동에 투신했던 민완활동가다. 쉽게 설명하자면, 노회찬, 주대환 (그리고 신지호까지 포함해서) 등과 같은 시기 같은 단체에서 활약했었다. 그가 인민노련부터 한국노동당까지 '구미지부 대표'를 지냈고, 주대환이 의장, 황광우가 기관지위원장, 윤영상이 서울대표, 신지호가 울산대표, 전성이 안산대표를 지냈다(노회찬은 1989년경인가에 감옥에 갔고...) 그에게 박정희생가에 들렀던 이야기를 하니 박상희 선생묘가 그 부근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동생인 박정희나 사위인 김종필은 박상희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신간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 정도다. 언론학자 정진석에 따르면 매일신보의 지국을 맡기도 하는 등 얼마간 친일을 했다는 일설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품이 넓은 지역인사였고 해방 직후 숙청의 열기에서 사람들의 정상을 참작해주거나 1946년 10월항쟁 당시 소요를 주도하면서도 우익 인사나 경찰이 크게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구사태가 진압된 이후 경찰과의 평화적 중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물론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고야 말았지만.

박상희가 철과 피의 행보를 걷지 않았던 이유는 무대가 중앙이나 서울이 아닌 지역이라는 요건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대구경북의 좌익세력이 여운형계열과 박헌영계열을 막론하고 남로당으로 결집했던 것 역시, 중앙의 구도가 지역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사정을 반영했었던 결과다. 박상희 사후 황태성 등 그의 동지들은 남로당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따금 박상희가 조공계열이었고 남로당원이었다는 착오 섞인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러나 박상희는 중도좌파계열의 온건사회주의자였다고 규정하는 쪽이 올바르며, 그의 성품과 스타일 역시 여운형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점에서는 조근래 국장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마냥 시 당국과 적대할 수만은 없으며, 단체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자주 협조주의적인 노선을 갈 수밖에 없는 사정 등등 말이다. 어쨌거나 조근래 선배는 서경석이나 정태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고, 좀처럼 진보 인사가 나올 수 없었던 구미에서 박상희의 계보를 잇는 지역활동가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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