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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곤 읽지 않는'에 해당되는 글 15

  1. 2009.12.31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2. 2009.12.11
  3. 2009.05.16 황석영에게 권하는 책 1
  4. 2009.02.10 김수민에세이상 뒷이야기
  5. 2009.02.08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 열 편 3
  6. 2009.01.14 '작가의 말'과 '작가 소개' 4
  7. 2008.12.07 홍기빈 3
  8. 2008.11.06 인류의 미래사
  9. 2008.09.16 박종현 1
  10. 2008.06.25 6.25 단상 1
  11. 2008.06.10 <정주영 무릎꿇다>를 읽다 1
  12. 2008.03.18 만화책 추천 받습니다 14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2. 31. 03:34 | Posted by 김수민
책을 산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펼쳐 한달음에 읽어내려갔고 저녁 6시에 책장을 덮었다. 숱하게 등장한 인명을 이 독자의 머리에 입력해두기가 어려우나, 어쨌든 '부드러운 직선'보다 그냥 직선을 좋아한다는 그는 실명 거론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권용목과 김창현인데, 권용목을 향한 안타까움은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드러냈었고, 김창현과 이영순은 가히 낙선운동 대상자급이었다. 김과 이를 위시한 울산연합의 행태에서 놀랐던 것은 이들이 통일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좌절과 민주노동당 분당에 관한 회고[각주:1]가 없다는 점을 빼면, 민주노총 위원장과 구청장을 지낸 인사의 자서전으로서 여러모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특히 투쟁과 협상의 방법을 적은 메뉴얼이 인상적이다.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펼친 활동 가운데 내게 가장 경이를 안겨다준 건 골리앗 투쟁도 민주노총 위원장 활동도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라 구청장 시절 참여예산제를 시행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회장들과 가진 면담이다. 또 그는 곳곳에서 애국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정파주의 등 각종 집단주의를 경계하고 배격한다. 그는 견결한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돋보인 것이 탄탄한 민주주의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갖고 있었던, 구청장 시절 공문서 조작 사건에 대한 의구심도 풀렸다. 현중 활동가 여럿의 훼절에도 불구 직선으로 걸어온 그가 잘되길 빈다. 그리고 자신이 곡선도 꽤 잘 그린다는 걸 인식했으면 한다. 사실 나와 그의 이념적 거리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노총이나 연맹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굵직한 노동운동가 중에 내가 가장 덜 꺼려하는 사람이다. 이갑용은 여전히 민주노총 직선제를 주장한다. 직선제가 되면 우파(국민파)의 득세가 온존 내지 강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업장 매몰, 연맹이기주의, 정파의 패권추구를 꺾고 노동계급의 연대를 지향하려면, 조합원 개개인에게 표와 이니셔티브가 돌아가야 한다. 가입이나 조합비 납부에서도 그렇다. 내가 만일 언젠가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다면, 직선제 쟁취에 뜻을 보태련다. 노동운동의 G-드래곤, 갑드래곤의 또다른 히트작을 기다리며.    
  1. 이갑용은 문제의 2.3 당대회에서 최고의 명연설을 남겼다. 남한진보정파연합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수명을 다하기 직전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는 일심회 사건을 해당행위가 아닌 국가보안법상의 탄압으로 연계시키려는 자주파에게, "노동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며 경고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피식 웃었을 테고, 특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선동가가 그랬다면 '네가 노동자대표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갑용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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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2. 11. 13:40 | Posted by 김수민
다녔던 대학교의 도서관이 졸업생의 일상적 출입을 사실상 금했다. 학기초에 신청을 해야 한단다. 뒤늦게야 안 것은 반년 넘게 거길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때 출입체크기계가 이상한 반응을 했다. 아, 그게 그거였나 보다. 졸업생은 책을 빌리려고 해도 30만원쯤인가의 금액을 평생동문회비로 내야 했는데 이제 출입도 따로 신청해야 한다. 더러워서 안 가지만, 갈 이유도 없다.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삶'. 이루지 못했던 꿈이 올 한해 피어오르는 중이다. 최근 3, 4년간 누가 내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면 바로 답을 하지 못했었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자료'에 불과했다. 책의 외양을 하고 있어봐야 한낱 자료뭉치였다. 묶고 엮는다고 다 책이 아니다. 冊의 가로획은 독자가 긋는 것이다. 언젠가 경제위기가 닥치게 되면 주저 없이 책을 팔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는 데 20년이 걸린 셈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멍청해지는 인간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진도가 빨라지기는 했다. 저렇게 멍청해지느니 이렇게 멍청한 게 낫겠다. 책이라고는 좀처럼 읽지 않는 삶이란 글 같은 것은 남기지 않는 삶과 꽤 포개어질 것이다. 이제 쓸 글도 별로 없다. 예전에 내 글을 읽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들려줄 예전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가 드물다. 결국은 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책을 자료로 전락시켰듯 글을 메모로 강등하면 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칼의 꼬붕이 된 펜이 펜을 못 구한 칼을 이겼을 뿐이다. 펜을 버리고, 아무도 참칭하지 않고, 허공에만 나의 칼을 휘두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버려야 하고, 그 다음에 버릴 것들을 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무소유의 비장미를 풍겨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몰락이어야 한다. 서서히 꺼지기보다 확 타오르다 사라지는 게 낫다는 어느 뮤지션의 유언은 헛소리다. 당신도 서서히 꺼진 거라고. 자살은 말야. 인간만이 가능하다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자연사거든. 제 명에 죽은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책과 글, 활자에 얽힌 비루한 인생이 굳어져서, 나는 또다시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일 테다. 그래도, 가능하면 덜 읽고 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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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에게 권하는 책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5. 16. 11:47 | Posted by 김수민
그래, 어쩌면 황석영의 오늘은 장준하의 1972년 7월 4일과 10월 17일 사이와 대동소이할지도 모른다.
손학규를 지지했든 이명박을 감싸든 통일 때문일 수는 있단 느낌이 든다.
그 '통일'이 튀어보려는 그의 버라이어티쇼의 중심소재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중도, 그의 통일은 
가운데에서 하나를 내세워 흩어진 다원성을 억압하는
또하나의 극단 
또하나의 분단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통일과정의 지난함보다는
통일 이후를 먼저 깨우치는 것이
눈높이에 맞을 것 같다.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을 추천한다. 

새벽을 꼬박 바쳐 읽고 나니 이응준이 다시 보인다.


(...) 진짜 사회주의자는 말이야. 제 애비가 정주영이라고 해도 사회주의자인 놈이어야 해. 어디 있냐? 그런 놈이. 나한테 연락 좀 부탁한다고 그래라. 통일 이후에도 그래. 좌파들이 이북 노동자들한테 하는 소행들이 어떠냐? 방금 뉴스에서도 함경도 아저씨 하나 천국 갔잖아. 또 우파들이 누구냐? 통일 전에 그렇게 북한 인권을 들먹이던 사람들 아니냐. 그걸 걸고넘어지면서 식량 원조에 반대하던 양반들이 아니냐고. 뭐냐? 통일이 되고 나니까 이북 사람들 바로 왕따시켜 버렸잖냐. 통일 전에 우파들은 북한 사람들을 걱정했던 게 아니라 그들에게 공으로 퍼 주는 게 아까웠던 거야. 좌파들은 동포애를 주둥이로만 나발거렸을 뿐 막상 옆집에 이북 사람들이 살게 되니까 너무 좆같은 거고.
그럼 뭡니까?
뭐냐고?
네.
회사원인 거지. 양쪽 다 회사원. (...)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까지 전부 회사원이니 나머지 놈들은 말 다 했지.(...)

황석영씨, '중도파'는 회사원은 아닌가요?
CEO라도 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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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에세이상 뒷이야기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2. 10. 13:41 | Posted by 김수민

나는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을 선정하며 평을 붙이지 않았으나, 별도의 포스팅으로써 나름의 소감을 밝히기로 결심을 수정했다. 

1. 장정일 <인생>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기껏 그를 '야한 소설 잘 쓰는 작가', 조금 더 그럴싸하게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추문에 휩싸인 사제'쯤으로 여겼었다. 그런 내게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실린 단상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그를 정치사회적 발언가로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정작 '인생'은 유미주의 반대가 지성주의의 탈을 쓰고 암약하는 사회상에 유쾌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서 장정일이 피력한 견해는 작년에 내가 작성한 '미스코리아가 누드모델보다 잘났어?'('20대 대구 여성'이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례적인 기사였다)로 이어졌음을 고백한다. 옛날 장정일은 시쓰는 법을 잃어버렸다며 그후 소설과 희곡에 천착해 왔는데, 요즘엔 교술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어쩌면 소설쓰는 법조차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울 때마다 집이나 도서관의 책장에서 예전 작품을 뽑으면 그만.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을 곱씹어보면, 그의 행로는 넉넉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그의 인문학 공부를 훔쳐 보련다.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기숙사 자치회실에서 받아읽던 <시사저널>에 실린 작품. 그가 이 에세이에서 지적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의거한 '옆차기'는(지랄옆차기여!) 내가 대학생활 내내 경계해온 것이다. 그는 거짓말처럼 2002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을 숨겼던 탓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공 잘 차고 춤 잘 춘다는 그는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리베로의 구평을 구사해 왔다. 1980년대 PD계열 활동가 겸 비평가였다는 사실, 이인화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증거를 잡아낸 지난 사건은 나중에 알았다. 이성욱처럼 다재다능한 비평가로는 정윤수와 성기완을 꼽을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한 분은 축구해설가로 다른 한 분은 기타리스트 또는 시인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까 리베로 '비평가'로서 나는 이성욱을 제일 첫자리에 앉혀 놓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성욱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고, 소장한 저서도 <비평의 길>밖에는 없다. 이 작품을 선정하면서,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를 그간 별러왔으면서도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나는 2002년의 반미 무드가 석연치 않았고 못마땅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하등의 반성도 없었으며 이주노동자를 괄시하던 이들이 언제 그리도 "약소국 국민"으로서 분개했는지 우습기 그지 없었다(곧 있음 강대국된다매?). 나는 그래서 민족주의를 초월한 미국 비판을 부산교대 교지의 기고문을 통해 주문하기도 했었다. 반미운동의 심각한 결함은 도리어 심미선, 신효순 씨 사건으로 더욱 분명히 폭로되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즈음 온 나라는 월드컵에 취해 다른 이슈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시위가 터지자, 일부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주검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동록 사망에 침묵하다가 별안간 "효순이, 미선이"를 부르짖은 대중들은 가부장주의("감히 우리 딸을!")를 실토했다. 반성은 없었다. 촛불시위를 제안한 네티즌 '앙마'는 세계주의적 자세를 시종 견지했고 이라크전쟁반대운동까지 꾀했지만, 우리의 '운동권'들께서는 소파개정구호를 주한미군철수요구로 뒤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다시 한번 분노의 마음으로, 필자에 관한 소감까지 생략하면서, 이 글을 되새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운동가는 아니었고 진보적이지도 않았지만, 남북통일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던 한 선배가 있었다.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라고 못박던 내게 그는 "그런 발상이면 통일은 영영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기 내에 통일을 하지 못하면 기회는 없다"고 타일렀다. 그는 내게 2000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정운영 강연의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통일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나.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글도 챙겨 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중앙일보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감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초창기 시절에 내놓은 칼럼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본작처럼 울림이 큰 경우도 있었다. 왼쪽으로 흐르고 있던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그와 이 칼럼에서 조우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둡체크의 방랑과 복수! 한동안 나는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로 체코와 프라하를 꼽았다. 정운영은 고인이 되었고, 그 선배는 노동쟁의로 들끓었던 어느 기업의 직원이 되었다. 비조합원이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진보개혁을 지지하지만 고종석의 글을 싫어한다는 이들은, 그의 신중함과 거리두기에 이물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러나 고종석만큼 편파적인 글장이도 없다. 상대방의 비열함에 맞춰 자신의 강약을 훌륭히 조절하는 그는 자주 가차 없는 독설가로 등장한다. 이 글을 그 증거로 제출한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이문열의 담론권력은 막강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옳은가 그른가를 물으면 6:4가 나왔지만 이문열의 홍위병 발언이 옳은가 물은가를 조사하면 비율이 거꾸로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문열은 창작에 부진했고 제자를 양성하러 만든 부악문원도 흐지부지되었으며 그의 말빨은 예전처럼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이에 고종석의 기여가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에세이는 참으로 적절한 수준의 사나움으로 이문열의 사기극을 제압하였다. 이문열의 수구반동성에 동조하거나 그에게 예술가-예외주의를 베풀던 팬들이야 벌떼처럼 흥분했지만, 이제 담론권력으로 치면 검도 5단 이문열보다 뿅망치 1단 진중권이 더 강렬한 시대가 왔다. 나중에 이문열은 이빨빠진 호랑이의 모습으로 고종석과 대담하였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2006년 추석 연휴를 앞둔 밤 술을 진탕 마신 나는 버스 안에서 약간의 두통과 극심한 허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귀향길이었다. 김명인이 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었던 덕분이다. 정과리는 1988년 민중문학론을 이렇게 비판했다. "(...) 민중의 주체성의 회복 문제에 그들을 가둠으로써 (...) 결국 그것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라는 명분 하에, 그 노동 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때 민중문학론의 한 가운데 있던 김명인은 1990년대 전향을 선언했다. 당시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는 모 비평가는 세해 전 재인식 어쩌구를 지껄이는 집단에 가담했으며, 정과리는 수구신문과 어울리고 있다. 김명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과리에게 배운 셈이 되었지만, 정과리는 김명인에게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듯하다. 김명인은 7, 80년대와는 다른 이념과 방법으로 여전히 폭압에 저항하고 있다. <스텐카 라진>(잡지 수록 당시 제목은 <찬가의 비극>)의 감동은 그가 90년대 새 길에 들어서며 내놓았던 <불을 찾아서>보다도 훨씬 진하고 또 은은하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바람을 타고 박민규는 <한겨레>의 '야! 한국사회'로까지 나아갔다. 대통령탄핵의 폭풍과 후폭풍이 한국사회를 휩쓸 무렵 그가 표출한 유머러스한 결기가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서 갈구한 '일 많이 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화두는 한국사회에 닥쳐온 실업과 고용불안 속에서 손쉽게 사장되었다. 박민규는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가 흠칫했듯 '십구구단'과 같은 고난도 코스가 새로 들어선 대신, 가감승제 가운데 나눗셈만은 우리네의 '스펙'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박민규는 후일 용 네 마리가 모여 이룬 '말많을 절'이라는 한자를 제목으로 삼은 소설을 발표했다. 무림고수의 극악빙공은 지구온난화에 꺾여 버리고, 민주는 아빠에게 자긴 돈이 전부라고 소리친다. 곱셈을 넘어 제곱에 맛 들린 이 나라에, 박민규는 루트를 씌울 수 있을까. 제법 똑똑하고 제 정신이기도 한 몇몇 사람들이 지구 멸망에 대비한다며 충북 단양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민규, 단양에서 취재하시라.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교수들이란, 참 믿기 힘든 사람들이다. 얼마나 많이 남의 다리 밑을 기면서, 숱하게 학문적 재미나 이념적 소신을 집어 던졌을까. 박홍규는 "(...)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박홍규는 믿을 만한 교수이다. "쓰레기 같은 이메일이라 잘 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기도 해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 내가 보낸 메일에 대한 그의 답신이었다. 이 에세이에 밀려 아깝게 수상작에서 떨어진 <나의 초라한 보수주의>를 옮긴다: "어제 참 오랜만에 ‘진보’ 교수들과 개강 술 같은 걸 마시면서, 정규 교수직 임금을 10%만 깎아도 비정규 교수직 임금은 2배가 되는데 그런 운동을 하자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 공생을 위해 대학에서는 자가용이나 휴대전화를 쓰지 말자고 하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컴맹인 나를 시대착오적 골통 ‘보수’라고 비웃는다." 박교수여,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그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를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이다. 구미가 고향이라는 박홍규를 보면, 갑자기 내 안에서 애향주의가 도지기까지 한다.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중학교 1학년생일 때 그를 처음 읽었다. 이 글은 2006년 1월 어느날 아침에 받아든 한겨레신문에 있었다. 와우,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는가? 나는 2년에 걸쳐 한 대목을 내 프로필에 가져다 썼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사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어느 기고문의 초반부에서 이재현이 한총련 학생들에게 했던 표현("한총련은 30초 안에 버릴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로버트 드니로라면, 화염병보다 먼저 주체사상을 버렸을 것이다" )을 인용하고, 뒷부분에서는 학생사회는 운동권문화와 기만적 탈정치를 30초 안에 모두 버려야 한다고 변주한 적도 있다. 그해는 내가 가장 열심히 다양한 운동(movement)에 뛰어들었던 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난 세계의 칼에 베여 죽지 않았고, 멍청한 세계는 역시나 나를 해석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였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이번의 수상자 가운데 진중권은 이재현, 고종석과 함께 청소년기부터 내게 영향을 끼친 글장이로 꼽힌다. 그는 글을 빠르게 많이 쓰고, 본 수상작 말고도 기억에 남는 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2년 반에 걸쳐 유지한 민주노동당 당원자격을 버린 직후에 나온 이 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4년 2월 민주노동당 입당 결심을 굳혔고, 제대하고 나서 3개월쯤 지나 입당했다. 민족해방파와 사회주의자들 양쪽 등쌀을 못 견뎌낼 것 같아 말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2006년초부터 지난한 당혁신운동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고, 2007년 9월 내가 밀었던 노회찬 후보가 꼴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TKO를 선고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진중권은 별다른 정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학내 강연에 그를 초빙하러 연락했을 때, 그는 정치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민노당 분당을 전후해 나는 "진중권 안 오기만 해봐"라며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고 썼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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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 열 편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2. 8. 17:23 | Posted by 김수민
김수민에세이상은 김수영문학상이 김수영을 기리는 상인 것과는 달리, 김수민을 기리는 상이 아니라 김수민이 주는 상이다. (당연한 말씀...) 상품, 상장, 상금은 일절 제공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시상식이 개최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내가 대학생 신분이었던 2001년 3월~2009년 2월(군복무 기간 포함)에 발표된 에세이 및 칼럼들 중에 열 편을 골랐다. 메시지가 마음에 들고 울림이 크면서, 미문이거나 독특한 스타일이 빛난 작품들이다. 순위는 없으며, 발표 순서대로 배열한다. 

고심 끝에 작품별 해설은 생략하기로 했다. 밑줄도 치지 않았다. 괜한 주접이 될 터이므로. 단 하나만 뇌까리자면, 대중음악을 다룬 에세이가 수상작에 포함되지 않아 아쉽다.  

수상작 명단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1.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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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과 '작가 소개'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 14. 03:18 | Posted by 김수민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다. 그가 이 작품을 쓰면서 깊이 알아야 했던 것은 비단 민생단사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과 당대 만주의 상황,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은 물론 그 시기 유행했던 노래에까지 파고 들어갔을 작가의 노고가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감각이 발휘된 묘사의 힘으로써,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설치된 바리케이트에 걸려 그만 설명과 서사에 주도권을 가벼이 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밤은 노래한다>는 아마 소설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악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온 오프라인의 웅성거림을 들어보니 나에 앞서 이 작품을 읽은 이들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연수가 NL이었던 것 같아"라는 속삭임도 더러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촌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녕 NL의 냄새가 난다면 뒤지지 않아도 맡아낼 요량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틀간 각일의 밤을 빌려 읽으며 나는 중간중간에 저 촌평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냐면, 외려 도대체 그의 전력이 드러날 만한 구절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와 중공의 양압에 신음하는 조선인들을 그렸다고 해서 작가를 민족주의자라거나 민족해방파로 모는, 몰지각하고 폭력적인 독해습성이 없는 사람은 다들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의문은 '작가의 말'에서 풀렸다. 김연수가 NL임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촌평자들이 얼마나 희떠운지를 깨닫게 됐다. 단지 북한 사투리로 시를 써보았다고 해서, 촛불시위에서 만난 남총련의 깃발과 학생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고 해서, 그가 NL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다니. 물론 촌평자들이 그게 아닌 소설 텍스트의 어떤 부분(들)을 근거로 삼았을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바 소설의 설정에서부터 섬세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런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촌평자들이 작품 이전에 '작가의 말'을 읽었더라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필요한 선입견과 잡념에 휘둘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사회에서(다른 나라의 사회에서는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좁힌다) 텍스트의 함의가 전력으로부터 연유된 속내 읽기에 거꾸러지는 사건은 흔하게 벌어진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내 엉덩이밑도 약간 불안하다. 나는 김연수가 여섯 해전인가에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동인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도 나타나 있다. 김연수 씨는 대찬 작가는 아니다 싶었었다. 그래도 나는 종래의 인물평으로 소설읽기를 덮치지는 않았다,라며 이 글의 첫 문단을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지만, 불안하기는 불안하다.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나는 동인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작품에 대한 필요 이상의 악평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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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12. 7. 00:19 | Posted by 김수민

홍기빈의 <소유는 춤춘다>를 읽는 중이다. 얇은 분량에 여기저기 삽화가 들어간 이 책이 독자층을 어떻게 설정했는지 좀 알쏭달쏭하기는 하나, 내가 읽기에 참 좋다.ㅎㅎ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가 인상적이다.

(...) 대학에 들어가서 똑똑한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남들보다 뛰어난 쪽으로 경쟁을 하는 것보다는 내게 의미가 있고 남들에게도 쓸모가 있어 보이는 일이나 공부를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 경제학이나 국제 정치학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공부하게 되어, 지금도 계속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공부나 다른 뜻 있는 일을 하는 데 꼭 특출한 머리와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과목과 학과를 나누어 가르치는 지식의 틀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그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외교학으로 석사를 땄다. 현재 정치학 박사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는데, 그의 연구 주제는 엉뚱하게도 '지구정치경제학'이다. 그가 경제학, 외교학, 정치학을 연이어 공부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한국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면 그리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와는 두 번 만난 일이 있다. 물론 나는 그에게 '빨간테 안경'을 쓴 어떤 대학생으로 기억되었을 뿐, 그는 내가 <프레시안>에서 자신의 글을 반박했던 이라는 것까지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을 함께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어떤 이야기보다 그것을 뚜렷이 기억하는 건, 그 말이 나를 개안케 했기 때문은 아니고, 나의 생각과 표현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내가 수업시간에 교수로부터 '여운형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에(발설자는 고 방기중 선생이다), 갑자기 반색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박헌영이 싫다고 했고, 그때 가장 옳았던 것은 여운형 노선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제주도에 땅 몇평을 사서 움막을 짓고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책날개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어린 시절 창경원에서 코끼리와 처음 만나 길고 커다란 코와 악수하며 비스킷과 물벼락을 주고받은 뒤, 코끼리를 평생의 토템으로 삼고 있다.



코끼리는 죽기 직전 남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조용히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의 주검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옛날 발간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나왔던 내용이다. 코끼리라...

나는, 토템까지는 아니고, 후생에 고래로 태어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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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사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11. 6. 12:02 | Posted by 김수민
오바마현상으로 주가만 오르는 게 아니라 블로그 조회수도 오르는구만. 어제 이 블로그 조회수를 보고, 열풍에 끼어든 것 같아 머쓱해진다. 거푸 말하지만, 나는 미국 시민이라면 투표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바마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는다. 다만 케냐와 인도네시아에서 들려오는 함성에는 귀가 솔깃하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쏘아올린 그놈의 '글로벌' 시대정신에 부합한 정치인은 WASP가 아니라 '아프로-아메리칸' 이었던 것이다.

미래학자 워런 와거가 <인류의 미래사>라는 소설을 냈었다. 피터 젠슨이라는 이가 손녀에게 편지를 써 2000년 이후 200년의 역사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세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로, 여성이자 흑인이고 소속 정당은 '빼앗긴 자의 연합'이며 이름은 '차베스'인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 있다. 2032년경 유색인종이 미국 인구의 반 가까이에 이르고, 결국 내전이 벌어져 민주당-공화당 체제가 무력화된 결과다. 그뒤 미국 차베스 정권은 자본가연합과 필사의 대결을 벌이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야 마는데, 이때 미국과 유럽의 성향은 현재의 성향을 뒤바꿔 놓은 듯했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세계당'의 주도 하에 세계연방으로 묶인다. '작은당'의 승리로 정부 없는 개인들의 지배가 오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한 어떤 한국계 여성(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민주당원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자신이 유색인종으로서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국계 미국인 중엔 꼴통보수가 꽤 많지 않았었나? 모 하원의원을 봐도 그렇고. 히스패닉의 경우에도 오바마보다 힐러리에게 더 끌리는 건 아닌가, 그래서 대선에서의 응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미 대선에서 유색 인종 및 소수 민족의 대다수는 오바마에게 표를 던져 백인층에서 매케인에게 뒤진 그를 당선자로 올려 놓았다.

나는 여전히 오바마 정권기에 정치적으로든 사회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변혁은 없다고 예상한다. 그러나 유색인종의 비율 증가가 몰고올 미국의 변화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계급 정치'와 제대로 배합된다면 유럽과 다른, 또는 유럽보다 더 진보적인 흐름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흐름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며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3할의 시민들이 창조자로 나서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사>와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문화 창조자들>이라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난 아직 이 책이 거는 희망에 관해 유보적이긴 하지만.)

한편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이번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충분히 민주당이 선명한 색깔과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번 선거와 결부된 저서가 아니다. 레이코프는 미국판 강준만이 아닌 것이다. 민주당이 레이코프의 전략을 소화할 수 있을지 일단 의문이 들고, 미국적 이상과 가족적인 근본 프레임을 천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전제하는 레이코프에게도 한계가 있다. 근래 미국에서는 제3당을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었단다. 물론 오바마의 부상으로 잦아들었겠지만, 이 흐름을 부자당이나 우익 민중주의에 내어줘서는 안 된다. '빼앗긴 자의 연합'의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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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9. 16. 19:38 | Posted by 김수민

서점에서 <케인즈&하이에크-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좋은 교양서적이 나왔겠거니 하고 지나치려다가 손으로 집어들고 말았다. 지은이 때문에.

현재 진주산업대에서 화폐금융을 강의하는 박종현 교수는 7년 전 내가 수강했던 <정치경제학> 수업의 강사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분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내 이름을 먼저 알았고, 수업시간에 내 이야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났다. 내가 수업을 들었을 때도, 뻔히 강의실 안에 앉아 있단 걸 알면서도, 내 칭찬을 했다. 왜 그렇게 칭찬을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수정자본주의 대 신자유주의', '시장실패론 대 정부실패론'이라는 교과서적 구도에 입각한 듯한 이 책을 피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몇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나는 그의 수업을 들었고, 그의 스타일과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서 조금 안다. 몇해 전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던 그의 경제칼럼도 재미나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안다고 넘겨버린 것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싶었다. 사실 난 아직도 경제학에 문외한이다. 하이에크에 대해서는 오래전 <노예의 길>을 읽고 밀턴 프리드먼과는 다른 부류라는 직관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케인즈에 관해서도 나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나는 진정으로 '시장'을 통찰했다고 보기 어렵다.  

박 교수는 수업시간에 다양한 사례를 들다가 다른 길로 접어들고마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일화를 꺼내드는 그에게 "이번엔 돌아오셔야 해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 습관이 가장 빛났던 때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이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같은 이론들이 정연하고도 다채롭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강연 끝머리에 그는 자신의 성향과 자신이 속한 어떤 연구모임의 성격을 "케인지안 좌파"라고 밝혔다. 조금 어렴풋한 기억인지라 무슨무슨 일을 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는 그 강의를 끝으로 국회도서관 연구원 일만 했고, 조금 지나서 진주로 갔다.

책날개에 나오는 "대안적 제도주의 경제학의 분석틀을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도 관심이 있다"는 저자 소개에 '그러면 그렇지'한다. 조금 더 그의 글을 자주 봤으면 좋겠다. 책 내용은? 지금 막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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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단상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6. 25. 22:06 | Posted by 김수민
1.
"어제, 간첩이 잡혔다. 너희도 이런 건 알아야 돼... 민중당의 김낙중이란 사람 등등이 간첩으로 잡혔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들은 이야기다. 담임 교사가 워낙 정색을 하고 말한 데다가 나는 그것을 뒤엎는 보도를 볼 수가 없었다. 과거 박정희 정권이 고문을 자행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간첩사건들이 조작되어 왔고 아직도 그러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는 뜻이다. 김낙중 선생의 딸, 김선주 씨가 집필한 책이기도 하다. 김낙중은 청년시절 부닥친 전쟁 속에서 국군도 인민군도 거부하였고, 손수 쓴 통일방안을 들고 남북을 오가다 북에게는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남에게는 '북에서 1년간 교육받은 요원'으로 찍힌 비운의 인물이다. 이 사건은 파고 또 퍼내는 우물이 되어 그를 수차례 간첩으로 만들고, 굴비처럼 간첩단을 엮어내는 기원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무르익지 않은 나라에서 발생한 좌우갈등에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는 민족적 관점의 결핍으로부터 좌우분열의 원인을 찾았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자였고, 사회진보를 추구하지만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사회주의자였으며, 남한과 북조선의 관제 통일방안이 아닌 중립화와 연방제통일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남과 북 사이의 중도파였다.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과 보수야당(김대중)과의 연대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에서 좌우 사이의 중도정치인이기도 했다(나는 실제로 여권측이 민중당의 계좌로 돈을 넣었고, 김낙중 선생이 그런 현상을 괴로워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다. 김낙중 선생은 김대중에게 민중당 후보를 일괄 사퇴시킬 터이니 서울 지역구 두개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물론 나는, 이것이 매우 현명한 거래라고는 보지 않는다).

김낙중을 기억하는 이는 문익환과 백기완을 기억하는 이보다 훨씬 적다. 두말할 나위 없이, 레드 컴플렉스 때문이다. 문익환은 다분히 친미적인 배경을 가진 목사이며, 백기완은 반공주의자인 김구와 장준하의 제자 또는 후배였다. 반면 김낙중에게는 딱히 방패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수병이나 김남주 같은 지하조직사건의 희생자들만큼 기려진 것도 아니다. 김낙중은 남루하고 축축한 회색지대에 서 있었다.


2.

인터넷뉴스로 한국전쟁 참전국의 국기들을 들고 있는 일군의 예비역 사내들을 보았다. 최근에 이름을 널리 알린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이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6월 25일이다.


3.

환경이라는 게 참 무섭다. 어리벙벙하게 뛰어다니다 휴식시간에 좋아하는 유행가 한소절씩을 부르던 훈련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1주일이 지나 습관적으로 군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해,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군가는 <전선을 간다>였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맺힌 눈동자

밟아도 뿌리를 뻗는다며 옛날 옛적 조상들이 세운 큰나라를 찬양하는 <아리랑겨레>나 "고향땅 부모형제 평화를 위해"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걸라는 <멸공의 횃불>보다 우리는 이 노래를 더 좋아했다. 가슴이 찡해 남몰래 슬쩍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탐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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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무릎꿇다>를 읽다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6. 10. 11:26 | Posted by 김수민
학교 도서관이 무료배포 서가를 마련했다. 최근에 2차 배포에 포함된 책은 대부분 영어 서적이었다. 제목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싶은 것이 없었다. 1992년 대선 이후 나왔던 <정주영 무릎꿇다>를 뽑았다.

1992년 초, 총선을 두달여 앞두고 창당된 통일국민당은 강령에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그리고 재벌해체를 명시하고 있었다. 재벌이 기업의 힘을 빌려 만든 당의 정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의 정주영을 베를루스코니나 로스 페로에 비견하는 건 무리다. 특히 정주영은 이건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이건희가 후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하위 파트너로 두는 노선을 걸은 반면, 직접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은 정치의 고유 영역과 그 속성을 인정했던 셈이다. 달리 말해 재벌이 곧 국가라기보다는, 정치에는 정치에 맞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가졌던 거다. 따라서 그 밑절미는 자본주의나 부르조아 정신이 아니라, 민족주의나 애국심이 된다.    

그외에도, 관훈클럽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에도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에도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공산당'과 '북한'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 이때 김대중은 정주영의 주장이 헌법 실정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정주영의 북한관은? 경제개방을 통한 5년내 흡수통일이었다. 김대중은 이에 북한의 무력도발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후일 정주영의 경제주의적 통일관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서 빠질 수 없는 기조가 되었고, 두 사람은 역사적 화합을 했다.

책의 뒷표지에도 써 있는 것이지만 "경제전쟁에서 익혀온 노회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결국 정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후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은 독자정당이 아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틈새와 우수리를 노리다가 후보단일화 경쟁에서 좌절했다. 정주영의 천지동우회까지는 동행했으나 민자당으로 방향을 튼 이명박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주구장창 '탈여의도'를 외치고 'CEO 담론'을 펴면서 기존 정치인들을 비효율적 이미지에 몰아넣은 전략은 주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토지공개념을 담아낼 비전 같은 건 없으며 그의 노선은 자본주의가 아닌 대자본가주의로만 치달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정치를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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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8. 3. 18. 14:52 | Posted by 김수민

블로그에 고정적으로 다녀가시는 분이 10명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답변하실 수 있는 분은 댓글 좀 달아주세요.

요즘 만화가게를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만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강풀이나 최규석 만화는 거의 다 봤구요,
만화가게에 있는 허영만 만화도 다 봤습니다.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맨>을 팔고 있는 책방이나 온라인 서점을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취향은 대중 없습니다.
그림이 조잡한 건 잘 보지 않습니다.
SF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반게리온> 이런 거 취미 없구요.

얼마 전 본 <20세기소년>은 매우 괜찮은 만화였습니다.
<키드깽>을 제일 재미있게 봤구요.. 웃겨도 장땡입니다.
주제도 뭐 대중 없습니다.
음악에 관한 것도 좋고, 뻔하지 않으면 스포츠만화도 오케입니다.
일상적인 주제를 다룬 것(ex. 천재 유교수의 생활)도 좋습니다.
<타짜>나 <쩐의 전쟁>류의 만화도 곧잘 봅니다.

추천 좀 해주세요.
만화방에서 세겹으로 된 책꽂이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헤매니까
정신 없고 머리 아픕네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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