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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史의 찬미 | 2009. 8. 31. 20:36 | Posted by 김수민

전두환이 눈앞에 있으면 오만가지 액션으로 뭉개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김종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나의 아버지는 민정계라기보다는 공화계에 가까웠던 것 같다. 1996년 총선에도 5공출신은 모조리 물러나야 한다며 신군부였던 신한국당 후보를 거부하고, 박정희의 장조카인 자민련 후보에 투표하셨다. 어렸을 적 집안에는 김종필이 썼다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를 왠지 조금 더 친근(?)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박정희, 전두환, 어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김대중이라면 그 중간쯤에 김종필이 존재하였다고나 할까.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김대중을 계산하자>에서 김종필 특유의 낭만주의를 나름대로 평가하며, 그를 군사정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든 장본인으로 일컫는다. 수많은 밴드들이 활약했던 서울시민회관을 후원했던 김종필은, 확실히 꼰대 소심남 박정희와는 달랐다. 담배 물고 그림그리는 미남자의 사진은 유명하다. 박 정권기에도 외유를 떠났고 전두환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던 과거사도, 그를 '지배블럭 내부의 온건파'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요즘 문득 김종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전에 있을 경우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왠지 차분히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김종필을 성대모사할 때 가장 자주 구사하는 레퍼토리가 "노 코멘트, 허허허~"이다. 내 기억으로는 골프를 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에게 했던 말 같다. 그것은 김종필의 주요 무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필과 그에 얽힌 한국현대사에 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될 수밖에.

내가 그를 통해 알고 싶은 건 얼추 이렇다. 첫째, 김종필은 어찌 하여 해방정국기 좌익 학생운동에 관여했는가? (그는 도피책으로 군입대를 선택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는가? 둘째, 한국전쟁의 전면전 개시일 당시 육본 정보부서의 당직장교였던 그는 그날 무엇을 겪었는가? (물론 대답을 얻어낼 가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질문이다.) 셋째, 혁명정부 최고기구에 왜 북조선 어휘라는 공격을 받아가면서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그리고 당시 그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넷째, 몇해전 '정치개혁' 시도 전까지 유유히 내려온 '사무총장-지구당' 체제는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정당체계 개편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다섯째, 김종필이 주도하던 신당(민주공화당)의 이름이 '사회노동당'으로 보도되어, 김종필과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과 맞물린 의심을 자아냈다. 또 5.16군정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나 반미국가의 늬앙스를 띄는 것들이 많았다. 혹 군정은 좌우를 국가주의적으로 아우른 정부나 여당의 건설을 생각했었는가? 여섯째, 해방정국기부터 5.16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견지한 사상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가?

물론 내가 추정하거나 기대하는 종류의 답변이 있기는 하다. 최근 나는 5.16을 다시 사고하고 있다. 국가체계가 무르익기 전의 사건을 두고 '헌정 질서의 중단'이라고 평가하는 게 꽤나 사후적이며 '보수야당'중심의 역사관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혁신적 지식인들이 5.16을 환영했거나, 적어도 윤보선-장면계열을 두둔하지는 않았다는 증언들에도 몇해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가령 리영희는 임헌영과의 대담(<대화>)에서 제5대 대선을 '극좌 출신의 극우'와 '민주를 가장한 수구'의 대결이었다고 요약하며, 자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구술했다.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5.16을 '반동혁명'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박정희 정권을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신'은 neo보다는 new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5.16은 4.19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950년대 소장 지식인이 살아남기에 가장 좋았던 곳, 당시로서는 가장 근대적이었던 조직이 군부였다. 그리고 5.16 주체들이 문제삼았던 윗세대나 상부의 무능과 부패는 현실이었다. 비록 자의적일지라도 5.16이 4.19정신의 계승을 선포한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5.16을 비판하려거든 민족(국가)적 엘리트주의라는 근본적인 사상을 건드려야지, 이를 여대야,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반민주의 틀에 끼워맞춘다면 숱한 부분들이 왜곡될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조병옥이나 윤보선, 장면 등이 대단히 훌륭한 위인들인 줄 알았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척을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16을 박정희와 동일시하는 것도, 최저 수준의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기우뚱한 제3공화국과 유사 파시즘적 총화단결 체제를 지향한 제4공화국을 구분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박정희는 하나의 극단이었다. 그 대척점에 뒷날 5.16의 의의를 부정하게 된 5.16주체 박창암이 있었다(일제 말기 군부내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에 가담했다는 박창암은 여운형계열의 지식이었다고 한다). 5.16의 중심점은, 특히나 사상사적으로 규명하자면 김종필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종필은 기획가, 이론가로서의 면모도 강했다. 그는 북조선 정권의 어느 누구보다도 트로츠키를 닮았다. 현 정치인 중에 김종필과 가장 닮은 인물도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나 친노그룹 쪽에 있을 것 같다.

2004년 총선,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유세에 나온 어느 선거운동원들은 "조용필!"을 연호했다. 델리 스파이스의 <노인구국열사대>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의 한 대목도 자민련과 김종필을 조롱했다. 김종필은 (김윤환과 함께) 낭만과 풍류의 정객인 동시에 정치권의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당해왔다. 누가 예술은 길지만 인생을 짧다고 했나. 김종필의 오늘과 옛날을 견주면 그런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노코멘트하기 전에 알아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는 꾸준히 탐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전두환과 너무나 다른 점이 아닐까.

그에게, 또는 그에 관해 묻고 싶은 건, 청구동에서 쫓겨나더라도 두가지가 더 있다. 첫째, 1960년대 중후반 박정희보다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도 그랬나? 그 당시 어떤 야심을 가졌나? 둘째, 장인인 박상희 선생은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야, 노 코멘트... 으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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