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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납북도 월북의 일부

史의 찬미 | 2009. 7. 17. 15:33 | Posted by 김수민
"사상범으로 몰려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왔습니다."(잊혀진 '납북 제헌의원' 40여명) 얼핏 남로당이나 보도연맹 연루자 유가족의 증언 같지만, 김영동 제헌의원 아들의 증언이다. 1969년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도 김 의원은 제외됐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재산가이며 따라서 좌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막노동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북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과 월북을 구별할 수도 없는 주제에 둘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북조선이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북측이 마련한 첫 방송연설에 나선 남측 인사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 송호성이었고, 그 다음이 제3대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었다. 반공반북의 핵심인물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잔류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안재홍, 조소앙 등이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한 데 비해, 김효석의 연설이 지나치게 비굴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다들 전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연설에 나선 결과지만, 북측에서 생명을 위협하거나 내용을 일일이 강제한 정황은 없었다는 게 연구결과다. (이신철, <북의 통일정책과 월 납북인의 통일운동 (1948~1961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대학원 박사논문, 2005)

제헌 국회의원들은 미제의 무력침공 반대를 골자로 하는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서도 서명했는데,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원세훈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김영동 의원의 이름도 올라가 있다. 단 국회프락치 관련자들은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평양으로 떠나 있었다. 해서 그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후일 제기되었다. 납북인사들의 활동을 증언했던 신경완도 소장파들이 북측의 성시백과 연결되어 활동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규식에 이어, 북측에 의해 마이크를 잡았던 김약수는 이승만 정권이 국회프락치 사건을 날조했다고 규탄했다. 이승만 정권을 견디고 있던 좌익이 월북했다는 것,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이 납북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 당사자들에 이르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그들이 진짜 프락치일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북으로 넘어가게 만든 1등공신이 이승만 정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6.25 직후 유력인사들이 서울에서 가진 방송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김영동을 비롯한 관련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6.25 직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가 도강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해 있었다. 설마 자신한테 북측이나 좌익이 심하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전쟁이 터졌을 무렵 야구장에서 태연히 앉아 있던 서울 시민들도 있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초기는 수없는 국지전 끝에 남침한 북조선에게 내전조차도 아니었다. 전쟁으로 이남을 먹겠다는 태도보다 서울을 잡으면 국토완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뚜렷했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평양에 '모셔진' 인사들도 나중에 서울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6.25는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선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다.

해방정국기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재밌는 대답이 떠올랐다. "북조선에 살았으면 월남했을 것이고, 남한에 살았으면 월북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 자리를 옮긴 뒤로는 사상적 건전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내 새로 만난 체제의 주류와도 불화했을 터이다. 남에서 북으로 간 김원봉이나 북에서 남으로 간 장준하처럼. 통일된 조국에서라면, 혹은 평화적 분단체제에서라면, 중도좌파나 중도우파로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런 경로를 밟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조선은 다양한 사회주의세력과 홍명희 같은 중도파까지 껴안고 있던 체제였다. 처음부터 강성 독재는 아니었다. 백퍼센트 자발적 월북이더라도 그것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거푸 말하지만 납북이든 월북이든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독재와 한국전쟁의 상황에 의해 북으로 내몰린 것이다. 어찌 됐건 '선을 넘어갔다'는 사실만이 오로지 명확하다. 월북을 폭넓게 해석하면 납북인은 그 하위 분류인 셈이다. 월북과 납북의 구별은 난망할 뿐더러 의미가 별로 없다. 북조선에서 호의호식한 게 아니라면, 김영동 의원을 비롯한 월납북인들은 남한 정부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반민특위에 투신했던 김 의원이 사후에도 벗어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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