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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이 생긴다는 것

Free Speech | 2010. 1. 4. 17:33 | Posted by 김수민
2001년에는 대전 충남에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봄날 자기네끼리는 곧잘 만나기도 했나 본데, 난리가 한번 났다. S와 통화를 했더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K랑 L이랑 같이 살잖아. 근데 L이 연애하고나서부터 애가 너무 달라져가지고, 지금 말도 잘 안해. 걔네 학교 축제 때 가서 이야기듣는데, K가 거의 울려고 그러더라." 사연을 좀 더 자세히 듣고보니, L에게 연락하는 것도 겁이 났다.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나도 L과는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감까지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맛탱이가 갔다'는 것이었다. K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나다를까 하소연이었다. 그래도 한쪽이나 중재자 또는 관찰자만의 이야기만 들을 수 없어서 L과도 통화를 했다. "순전히 내가 잘못했지." 다행히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얼마 후 L은 여친이랑 헤어졌는데, 한참동안은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겸연쩍어 했다.  

나 또한 당시 서울에서 골치 아픈 일을 겪었고, 그 와중에 바로 그 친구들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다. 무슨 오디션에서 탈락한 직후에 그애들이랑 채팅을 하다가 내가 빈정상해 "잠수를 타버리겠다"며 대화를 끊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여자애 때문에 내가 잠적 상황을 즉시 풀어버린 걸 그들이 알게 됐다. "씨댕,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도 L보다는 상태가 낫지 않냐...;;" 그런데 그때 그 '작업'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보다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속만 썩고 있었다. 하루는 학생회실에서 어떤 형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애가 씨발, 그걸 해서 힘이 나고 주변에 보기도 좋아야지, 서로를 갉아먹는 그런 걸 하면 안돼." 다른 사람더러 하는 말이었지만 꼭 나더러 하는 소리 같았다. 그 덕분인지 나는 소모적인 작업에서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가 있었다.

입학했을 적 과반에서 남들이 칭찬하고 높이 사는 한 누나가 있었다. 나보다 두 학번 위고 서너살 위였다. 교양 있고 지적이고 품위 있고 그런, 나무랄 데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이듬해 초 어느날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 그날, 그가 수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흉볼 일이 아니었고, 아무도 흉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자신이 먼저 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뒤 02학번 새내기들이 들어왔는데, 그중 삼수를 했던 어떤 애와 그 누나는 사귀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새내기는 여기저기 껄떡거리다가 그 누나한테 정착했고, 비결을 묻는 다른 사람들에게 "5분간 삽질했더니 넘어오더라"는 말로 과방에 있던 그의 선배들, 특히 내 또래 여학생들의 두껑을 열어버렸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주변의 평은 틀린 걸로 판명났다. 사람이 변했는지 원래 그랬는지를 따지는 건 무망한 짓이고, 어쨌든 그 누나는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물론이고, 그 누나와 오래 교류해왔던 사람들조차 그 누나와 더 말을 섞지 못했다.  

3년전인가, 4년전인가의 일이다. 무슨 세미나가 끝난 다음에 뒤풀이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 물었다. "다들 애인이 있으시죠?" 정말 그랬다.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참 든든하다는 그런 눈빛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는 일주일인가 이주일이 지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새에 솔로가 되어 있었다. 시시콜콜 그동안 어떻게 되었노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고, '그럼 눈빛만으로 치면 나는 언제나 연애중이었다는 것인가'하고 씩 웃고 말았다. 연인이라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시달리게 하는 조건이나 일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니네가 뭐라 그러든 나는 편이 있기 때문에 꿋꿋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깨닫는 거지만 그건 나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반면교사, 타산지석에 기대어 왔던 지난날로부터 배운 것이다. 저 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배울 만한 점이나 부러운 구석을 일부러 찾고 뒤지는 것도 참 고역스럽다.

그 누나의 소식을 들은지는 한 7년쯤 됐다. 사는 게 대부분 그렇겠지만 여자 쪽이 좀 더 힘들다. 과반 커플의 경우 깨지고 나면, 남자는 다시 친구들을 찾아오고 친구들은 그를 어쨌든 받아주지만 여학생 쪽은 달랐다. 한번 멀어지면 좁히기 힘들다. 남이 받아줘도 제 스스로가 돌아가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결별 후에는 어학연수를 떠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뭐 남학생이라고 해서 쉬운 것만도 아니다. 군으로 직행하기도 했으니. '한 편'이라는 거, 참 부질 없다. 고작 그래서 달라진 눈빛이라는 거, 상황이 역전되면 장사 없다. 그러고 보면 이와 반대로, 자기네끼리 알콩달콩 살면서도 주변 사람들 보살피고 분위기 훈훈하게 만들어주던 사람들은 갈라지고 나서도 사람 구실하면서 살았다. 지난날의 옛사람들이지만 다들 근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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