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 2024/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김수민에세이상 뒷이야기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2. 10. 13:41 | Posted by 김수민

나는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을 선정하며 평을 붙이지 않았으나, 별도의 포스팅으로써 나름의 소감을 밝히기로 결심을 수정했다. 

1. 장정일 <인생>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기껏 그를 '야한 소설 잘 쓰는 작가', 조금 더 그럴싸하게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추문에 휩싸인 사제'쯤으로 여겼었다. 그런 내게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실린 단상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그를 정치사회적 발언가로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정작 '인생'은 유미주의 반대가 지성주의의 탈을 쓰고 암약하는 사회상에 유쾌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서 장정일이 피력한 견해는 작년에 내가 작성한 '미스코리아가 누드모델보다 잘났어?'('20대 대구 여성'이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례적인 기사였다)로 이어졌음을 고백한다. 옛날 장정일은 시쓰는 법을 잃어버렸다며 그후 소설과 희곡에 천착해 왔는데, 요즘엔 교술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어쩌면 소설쓰는 법조차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울 때마다 집이나 도서관의 책장에서 예전 작품을 뽑으면 그만.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을 곱씹어보면, 그의 행로는 넉넉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그의 인문학 공부를 훔쳐 보련다.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기숙사 자치회실에서 받아읽던 <시사저널>에 실린 작품. 그가 이 에세이에서 지적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의거한 '옆차기'는(지랄옆차기여!) 내가 대학생활 내내 경계해온 것이다. 그는 거짓말처럼 2002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을 숨겼던 탓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공 잘 차고 춤 잘 춘다는 그는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리베로의 구평을 구사해 왔다. 1980년대 PD계열 활동가 겸 비평가였다는 사실, 이인화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증거를 잡아낸 지난 사건은 나중에 알았다. 이성욱처럼 다재다능한 비평가로는 정윤수와 성기완을 꼽을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한 분은 축구해설가로 다른 한 분은 기타리스트 또는 시인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까 리베로 '비평가'로서 나는 이성욱을 제일 첫자리에 앉혀 놓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성욱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고, 소장한 저서도 <비평의 길>밖에는 없다. 이 작품을 선정하면서,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를 그간 별러왔으면서도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나는 2002년의 반미 무드가 석연치 않았고 못마땅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하등의 반성도 없었으며 이주노동자를 괄시하던 이들이 언제 그리도 "약소국 국민"으로서 분개했는지 우습기 그지 없었다(곧 있음 강대국된다매?). 나는 그래서 민족주의를 초월한 미국 비판을 부산교대 교지의 기고문을 통해 주문하기도 했었다. 반미운동의 심각한 결함은 도리어 심미선, 신효순 씨 사건으로 더욱 분명히 폭로되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즈음 온 나라는 월드컵에 취해 다른 이슈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시위가 터지자, 일부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주검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동록 사망에 침묵하다가 별안간 "효순이, 미선이"를 부르짖은 대중들은 가부장주의("감히 우리 딸을!")를 실토했다. 반성은 없었다. 촛불시위를 제안한 네티즌 '앙마'는 세계주의적 자세를 시종 견지했고 이라크전쟁반대운동까지 꾀했지만, 우리의 '운동권'들께서는 소파개정구호를 주한미군철수요구로 뒤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다시 한번 분노의 마음으로, 필자에 관한 소감까지 생략하면서, 이 글을 되새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운동가는 아니었고 진보적이지도 않았지만, 남북통일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던 한 선배가 있었다.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라고 못박던 내게 그는 "그런 발상이면 통일은 영영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기 내에 통일을 하지 못하면 기회는 없다"고 타일렀다. 그는 내게 2000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정운영 강연의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통일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나.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글도 챙겨 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중앙일보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감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초창기 시절에 내놓은 칼럼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본작처럼 울림이 큰 경우도 있었다. 왼쪽으로 흐르고 있던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그와 이 칼럼에서 조우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둡체크의 방랑과 복수! 한동안 나는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로 체코와 프라하를 꼽았다. 정운영은 고인이 되었고, 그 선배는 노동쟁의로 들끓었던 어느 기업의 직원이 되었다. 비조합원이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진보개혁을 지지하지만 고종석의 글을 싫어한다는 이들은, 그의 신중함과 거리두기에 이물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러나 고종석만큼 편파적인 글장이도 없다. 상대방의 비열함에 맞춰 자신의 강약을 훌륭히 조절하는 그는 자주 가차 없는 독설가로 등장한다. 이 글을 그 증거로 제출한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이문열의 담론권력은 막강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옳은가 그른가를 물으면 6:4가 나왔지만 이문열의 홍위병 발언이 옳은가 물은가를 조사하면 비율이 거꾸로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문열은 창작에 부진했고 제자를 양성하러 만든 부악문원도 흐지부지되었으며 그의 말빨은 예전처럼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이에 고종석의 기여가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에세이는 참으로 적절한 수준의 사나움으로 이문열의 사기극을 제압하였다. 이문열의 수구반동성에 동조하거나 그에게 예술가-예외주의를 베풀던 팬들이야 벌떼처럼 흥분했지만, 이제 담론권력으로 치면 검도 5단 이문열보다 뿅망치 1단 진중권이 더 강렬한 시대가 왔다. 나중에 이문열은 이빨빠진 호랑이의 모습으로 고종석과 대담하였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2006년 추석 연휴를 앞둔 밤 술을 진탕 마신 나는 버스 안에서 약간의 두통과 극심한 허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귀향길이었다. 김명인이 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었던 덕분이다. 정과리는 1988년 민중문학론을 이렇게 비판했다. "(...) 민중의 주체성의 회복 문제에 그들을 가둠으로써 (...) 결국 그것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라는 명분 하에, 그 노동 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때 민중문학론의 한 가운데 있던 김명인은 1990년대 전향을 선언했다. 당시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는 모 비평가는 세해 전 재인식 어쩌구를 지껄이는 집단에 가담했으며, 정과리는 수구신문과 어울리고 있다. 김명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과리에게 배운 셈이 되었지만, 정과리는 김명인에게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듯하다. 김명인은 7, 80년대와는 다른 이념과 방법으로 여전히 폭압에 저항하고 있다. <스텐카 라진>(잡지 수록 당시 제목은 <찬가의 비극>)의 감동은 그가 90년대 새 길에 들어서며 내놓았던 <불을 찾아서>보다도 훨씬 진하고 또 은은하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바람을 타고 박민규는 <한겨레>의 '야! 한국사회'로까지 나아갔다. 대통령탄핵의 폭풍과 후폭풍이 한국사회를 휩쓸 무렵 그가 표출한 유머러스한 결기가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서 갈구한 '일 많이 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화두는 한국사회에 닥쳐온 실업과 고용불안 속에서 손쉽게 사장되었다. 박민규는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가 흠칫했듯 '십구구단'과 같은 고난도 코스가 새로 들어선 대신, 가감승제 가운데 나눗셈만은 우리네의 '스펙'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박민규는 후일 용 네 마리가 모여 이룬 '말많을 절'이라는 한자를 제목으로 삼은 소설을 발표했다. 무림고수의 극악빙공은 지구온난화에 꺾여 버리고, 민주는 아빠에게 자긴 돈이 전부라고 소리친다. 곱셈을 넘어 제곱에 맛 들린 이 나라에, 박민규는 루트를 씌울 수 있을까. 제법 똑똑하고 제 정신이기도 한 몇몇 사람들이 지구 멸망에 대비한다며 충북 단양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민규, 단양에서 취재하시라.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교수들이란, 참 믿기 힘든 사람들이다. 얼마나 많이 남의 다리 밑을 기면서, 숱하게 학문적 재미나 이념적 소신을 집어 던졌을까. 박홍규는 "(...)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박홍규는 믿을 만한 교수이다. "쓰레기 같은 이메일이라 잘 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기도 해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 내가 보낸 메일에 대한 그의 답신이었다. 이 에세이에 밀려 아깝게 수상작에서 떨어진 <나의 초라한 보수주의>를 옮긴다: "어제 참 오랜만에 ‘진보’ 교수들과 개강 술 같은 걸 마시면서, 정규 교수직 임금을 10%만 깎아도 비정규 교수직 임금은 2배가 되는데 그런 운동을 하자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 공생을 위해 대학에서는 자가용이나 휴대전화를 쓰지 말자고 하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컴맹인 나를 시대착오적 골통 ‘보수’라고 비웃는다." 박교수여,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그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를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이다. 구미가 고향이라는 박홍규를 보면, 갑자기 내 안에서 애향주의가 도지기까지 한다.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중학교 1학년생일 때 그를 처음 읽었다. 이 글은 2006년 1월 어느날 아침에 받아든 한겨레신문에 있었다. 와우,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는가? 나는 2년에 걸쳐 한 대목을 내 프로필에 가져다 썼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사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어느 기고문의 초반부에서 이재현이 한총련 학생들에게 했던 표현("한총련은 30초 안에 버릴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로버트 드니로라면, 화염병보다 먼저 주체사상을 버렸을 것이다" )을 인용하고, 뒷부분에서는 학생사회는 운동권문화와 기만적 탈정치를 30초 안에 모두 버려야 한다고 변주한 적도 있다. 그해는 내가 가장 열심히 다양한 운동(movement)에 뛰어들었던 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난 세계의 칼에 베여 죽지 않았고, 멍청한 세계는 역시나 나를 해석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였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이번의 수상자 가운데 진중권은 이재현, 고종석과 함께 청소년기부터 내게 영향을 끼친 글장이로 꼽힌다. 그는 글을 빠르게 많이 쓰고, 본 수상작 말고도 기억에 남는 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2년 반에 걸쳐 유지한 민주노동당 당원자격을 버린 직후에 나온 이 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4년 2월 민주노동당 입당 결심을 굳혔고, 제대하고 나서 3개월쯤 지나 입당했다. 민족해방파와 사회주의자들 양쪽 등쌀을 못 견뎌낼 것 같아 말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2006년초부터 지난한 당혁신운동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고, 2007년 9월 내가 밀었던 노회찬 후보가 꼴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TKO를 선고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진중권은 별다른 정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학내 강연에 그를 초빙하러 연락했을 때, 그는 정치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민노당 분당을 전후해 나는 "진중권 안 오기만 해봐"라며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고 썼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책이라곤 읽지 않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09.12.11
황석영에게 권하는 책  (1) 2009.05.16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 열 편  (3) 2009.02.08
'작가의 말'과 '작가 소개'  (4) 2009.01.14
홍기빈  (3) 2008.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