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무당 앞에 장사 없다 (2) | 2008.12.16 |
---|---|
귀싸대기 (0) | 2008.12.06 |
3년 (0) | 2008.11.30 |
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0) | 2008.11.29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선무당 앞에 장사 없다 (2) | 2008.12.16 |
---|---|
귀싸대기 (0) | 2008.12.06 |
3년 (0) | 2008.11.30 |
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0) | 2008.11.29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넥스트 6집 <666 Trilogy> part 1 (0) | 2008.12.13 |
---|---|
보컬열전 (4) 김준원 (8) | 2008.12.08 |
보컬열전 (3) 데이빗 커버데일 (6) | 2008.11.14 |
음반 속지 (0) | 2008.10.20 |
아류에서 용 난다 - 퀴즈 (1) | 2008.10.08 |
10년 전에도 '특강'이 있었다. 1998년 가을 내가 재학하던 고등학교의 강당에 1학년 학생들이 모였다. 특강의 주제는 잊혀졌지만 강사의 소속이 '자유총연맹'이었다는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자유총연맹은 한국의 대표적 관변단체이나 그러면서도 당시 상황상 '김대중 정부 하의' 관변단체라는 성격을 피할 수 없었고, 예의 그 '안보'와 '통일'이라는 특강의 기조에는 김 정부의 기조였던 '햇볕'이 슬그머니 들어와 있었다. 시종 애매했던 강연은 막판에 갑자기 박정희 문제로 새기 시작했다. "한가지만 인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번 봅시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 왜 하필이면 쿠데타도 납치도 고문조작, 사법살인도 아닌 '장기집권'을 거론했을까. "그럼,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했는 걸 부인하는 사람?" 나는 혼자서라도 손을 들려고 했으나, 아뿔싸, 강당 학생들의 대다수가 '전사'해 있었다. 끝나가는 강연을 연장해 원성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때나 요즘이나 학생들은 효과적인 보이콧 방법을 알고 있다. 민망하게도 카메라 부근에 앉은 학생들이 모조리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중 몇몇은 아예 담요까지 덮고 앞자리에서 대담하게 존다. 잠에서 깨어 해맑은 얼굴로 강연장을 나갔다는 학생들은, 뻔한 줄거리였다는 반응과 강의의 주장이 틀렸다는 비판,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 등을 표출한다. 시중 유행하는 '한국근현대사 특강'의 풍경이다.
특강의 연사로 초빙된 인물 면면이 드러나면서부터 이 기획은 시민들에게 맹성토 당했다. 한눈에 봐도 극우편향이었다. 이것을 의식해서인지 당국은 이영훈과 조갑제를 제외했다. 이 둘은 평소 언사를 감안하면 수면제가 아니라 폭탄이 될 법도 하니, 학생들의 집중도만큼은 제고할 수 있는 카드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어떤 폭탄이 추가될지, 어떤 수면제가 사라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로 빼서는 안될, 반드시 학생들 앞에서 전시해야 할 사람이 있다.
1992년 9월로 예정된 남북고위급회담을 맞아 노태우 정부는 이산가족상봉을, 북한 정부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옹의 송환을 꾀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에 이산가족 상봉, 판문점 면회소 설치, 납북 선원 송환의 세가지 조건을 일단 내걸며, 세번째 조건(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을 뺀 나머지 두 조건이 합의될 시 이인모 옹을 송환하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9월 15일 북한은 첫번째, 두번째 조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평양에 있던 남한대표단은 협상을 타결하겠다며 청와대, 통일원, 안기부로 청훈을 보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답신이 돌아왔다. 3개 조건의 동시 충족으로 협상방향을 바꿔 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훈령이었으니 이산가족 상봉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임동원 당시 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 위원장은 통일원장관에게 질책을 받았다. 반드시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라고 재차 훈령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양의 대표단이 받은 훈령 내용은 3개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마 '중년탐정 김정일'이라면 "움직이지마! 움직이는 놈은 다 범인이여~"를 외쳤을 터이다. 결국 서울과 평양을 오간 전문이 조사되었고, 범인이 드러났다.
범인은 평양에서 보낸 청훈을 안기부 이외의 수신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평양에서 가짜 훈령을 작성했으며, 진짜 훈령을 입수하고 나서는 회담 종료 이후 총리에게 지연보고했다. 간덩이 스케일 한번 거하게 과시한 그는 안기부의 특보였고,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산가족 상봉의 의의나 이인모 옹의 송환 명분 등은 차치하기로 하자. 이 사건의 본질은 간첩도 아니고 불복종 시민운동가도 아닌 정보기관 간부가 청훈을 묵살하고 훈령을 조작했다는 데에 있다. 혹시 이 글을 접한 독자 가운데 한국근현대사 특강 따위를 들었거나 혹은 들어야 할 고등학생이 있는가? 엄청나게 간 큰 그 남자는 바로 여러분의 특강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 아저씨가 강단에 섰을 때, 여러분이 졸면서 헤드뱅을 할지 '범인은 이 안에 있다'는 생각에 잠이 확 달아날지, 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다만 그 이름 석자 '이동복'을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아울러 특강을 기획한 교육당국에도 고한다. 이동복 씨의 출연 빈도를 늘려라. 그는 특강의 취지인 '묵살'과 '조작'에 더없이 적임이니까.
추신: 내가 강원도 모 순찰지구대에서 일할 적이다. 경찰 유관기관에서 직책을 맡은 지역유지인가 뭔가가 쇼파에 앉아 지구대장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강연은 잘 들으셨나요?" "아, 뭐~ 우리 같은 사람이 들을 필요가 없어요. 노무현 정권부터 와서 듣고 정신차리라고 해요." 강연은 경우회인가 뭔가가 주최했고, 연사는 이동복이었다. 그놈의 입은 '잃어버린 10년'동안에도 멈추는 법이 없었으며, 언제나 그랬듯 꼰대 어른들은 자야 할 때 잘 줄 모른다.
왕은 우리편이다? 2 (2) | 2009.03.06 |
---|---|
왕은 우리편이다? (1) | 2009.02.11 |
박상희와 조근래 (0) | 2008.10.27 |
김원봉, 민족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0) | 2008.09.06 |
이강국 재판기록 요약 (0) | 2008.08.23 |
귀싸대기 (0) | 2008.12.06 |
---|---|
그만 졸라라 (5) | 2008.12.05 |
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0) | 2008.11.29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말 한 마디에 복분자가 (4) | 2008.11.13 |
나, 친구, 구미 시민운동가 C 선배, 이렇게 셋이서 만났던 시월 어느 날, 내 위는 기름진 안주와 초저녁부터 들이킨 쏘맥 폭탄주를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했고, 집에 와서도 토했고, 몇시간 지나 또 토했다.
새벽녘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던 차에 나는 내용물 일부를 화장실 문앞에서 흘리고 말았다. 구토액에 누런빛이 거의 없을 만큼 토하고 난 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입식 걸레를 베란다에서 빨고 있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그가 아버지인지 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왕 쪽팔림이냐 덜 쪽팔림이냐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총각 시절 마른 체구였지만 지금은 후덕한 중년이 되어 있고, 동생은 원래부터 몸이 빵빵했다. 그러니 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다. 몇분 후 그는 동생으로 밝혀졌다. 불과 몇분 전까지 곯아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저지른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확인을 했지만 동생에게는 아버지의 느낌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1992년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의 차에 동승한 직장 후배가 뒷자리의 내 동생을 보고 "쟤는 다른 집 애죠?"라고 물었다.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저녁에 동생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했다. 사람들은 동생이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그것도 썩 맞는 얘긴 아니었다. 다만 동생이 아버지를 거의 닮지 않았다는 데로 일찌감치 중론이 모아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전인자의 발현에는 넉넉한 세월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제는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대개 장남에게 투영되기 마련이고, 또 안목이라는 것이 비주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느낌에 끌려다니는 노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어머니를 적지 않게 닮았다. 사실 틀림 없는 외탁이다,라고 적을 뻔했는데, 그것은 취소한다. 내가 외가식구들의 전통을 딱히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닮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기다란 팔다리는 어머니를 닮은 반면 두꺼운 흉곽은 아버지의 것이니까, 딱 잘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어머니를 닮았다. 하지만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이를 인정하는 친척은 없다. 혈연사회 바깥에서 내가 만난 젊은 사람들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데 무게를 두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러나 친가의 신세대라는 숙모들도 내가 다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지방거주자들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고, 수도권 거주자들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내 친인척의 절대 다수는 지방거주자다.
중3때 담임선생이 학교에 온 어머니에게 "많이 닮았네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라고 했고, 이에 당시 담임은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지는 몰라도, 어머님을 빼어 닮았습니다"라고 했다. 졸업식 날, 담임과 아버지가 만났다. "아이고, 어머님 말씀이 진짜네요."
솔직히 어느 쪽을 더 닮았는지는 모르겠다. 때론 양쪽 다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유아독존적인 내 성격 탓이다. "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냐?" 10대 초중반 가끔 듣던 어머니의 타박에,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잠긴 적도 있다. 그래도 요즘 나는 어머니를 더 닮았다는 데로 기울고 있다. 인위적인 균형맞추기인 셈이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덮어놓고 말하고, 짝 맞추기라고 하는 짓인지 닮지도 않은 내 동생과 어머니를 포개어놓는 친척 어른들에게 저항감이 생겼다.
어머니와 나의 손만 붙여봐도 알 것이다. 자신들이 반쯤은 틀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아버지와 동생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라. 억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만 졸라라 (5) | 2008.12.05 |
---|---|
3년 (0) | 2008.11.30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말 한 마디에 복분자가 (4) | 2008.11.13 |
수업 종료 (0) | 2008.11.12 |
미네르바 2 (5) | 2009.01.10 |
---|---|
미네르바 (0) | 2009.01.09 |
운동권 선본 불출마 사건 (5) | 2008.11.13 |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 (0) | 2008.10.24 |
적립금 펀드, 몇번이나 꼬여버린... (0) | 2008.10.15 |
어떤 사람이 논문을 쓰는 데 인터뷰가 필요하다며 연락해 왔다. '토마토 친구들'이라는 단체에서 일했던 이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그에 이어서 나를 인터뷰할 생각이며 이전에 인터뷰이들이 나를 만나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왜지?). 나는 최근 사정상 만나기는 힘들고 전화나 서면으로 인터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토마토 회원이었던 분들 말고, 나를 토마토 회원이었다고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토마토는 민주노동당 분당, 진보신당 창당의 와중에 해산하였는데, 나는 그보다 1년 반쯤 전에 토마토를 탈퇴했었다. 토마토는 2006년 여름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내가 '토마토'라는 이름의 조직에서 활동한 건 두세달 남짓이다. 물론 토마토 이전의 '새로운당운동을모색하는학생당원모임'(정확한가? 기억이 가물하다)까지 포함하면 열달쯤 된다.
내가 탈퇴한 까닭은 당시 민주노동당이 북핵과 일심회 문제로 홍역을 앓는 데 심각한 회의가 들어서 탈당까지 염두한 채 당활동을 중단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자연히 토마토 탈퇴는 내가 민노당 연세대학생위원회 집행부를 그만둘 때와 겹친다. 그런데 토마토가 출범할 당시 벌어진 논쟁 때문에 내가 나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논쟁은 늦여름에 있었고, 내 탈퇴는 가을에 이뤄졌다(또 가물거린다. 10월인지 11월인지). 논쟁은 거세게 이뤄졌지만 길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을에 탈퇴한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모르면 물어보거나, 그게 귀찮으면 입을 닥치면 될 일이었다.
"말도 없이 나가고. 김수민답지 않다. 뭐하나 지르고 나가지 그랬냐"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웃기는 얘기였다. 탈퇴한 사유를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를 게 있을 만큼의 사유가 있어서 나갔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무슨 글을 쓰고 나갔다면 그것 때문에 입방아를 찧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말 없이 활동을 마쳤다. 나중에 희한한 소문이 난 것을 알고, 나는 '역시나'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화가 그 조직을 망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봤다.
졸업논문을 애써 준비하는 분에게 무슨 죄가 있으겠느냐만, 나는 내가 토마토와 연계되는 것에 대해서 몹시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내가 탈퇴한 이후의 토마토는 내가 있을 적보다 더 부진하거나 더 희한하게 굴러갔다고 나는 평가한다. 또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그런 현상은 나의 탈퇴하고는 무관하다. 인과관계가 아니라 선후관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토마토는 민주노동당을 혁신하고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출범했던 단체다. 노선은 대충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소위 '평등파'를 떠올리면 된다. 학생당원에서는 평등파가 자주파는 물론이고 '다함께'보다도 세가 작았다. 그 가운데서 토마토는 시작했다. 그런데 이념이고 지향이고 한때의 구성원으로서 잘 알고 있다만, 이 조직은 과연 무얼하려고 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 이전에 이미 가입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처음 토마토 전신인 '새로운정당운동을모색하는학생당원모임'에 가입했을 무렵, '전진'에도 학생모임이 있다는 전언을 듣고 나는 "그쪽에 이야기해서 같이 하면 좋겠네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상대방은 "우리가 먹힐걸요?"라면서 가벼운 어투에 살짝 경계심을 실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전진의 학생은 세 명이었단다. 그 세 명이 무서워 그 엄살을 떨었는지 아니면 '전진'이라는 그룹 자체를 배척하려고 한 건지는 몰라도 그를 비롯한 몇몇이 나타냈던 사고방식은... 아, 말하기도 귀찮다, 아무튼 이게 조직이 망한 이유였고 그것은 애초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절주절 말하기는 귀찮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망해야 할 조직이었다. 나는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중 몇몇은 요사이에도 가끔 만나 살갑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직으로는 영 아니었다. 미꾸라지 몇마리만 분탕질을 쳐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물'이기도 했었으니.
3년 (0) | 2008.11.30 |
---|---|
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0) | 2008.11.29 |
말 한 마디에 복분자가 (4) | 2008.11.13 |
수업 종료 (0) | 2008.11.12 |
선생의 별세 (3) | 2008.11.09 |
롭 핼포드가 '본좌'고 로니 제임스 디오가 '킹왕짱'이라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은 '완소(완전소중)'에, '캐간지'다. 보컬열전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으나, 데이빗 커버데일은 내가 핼포드 이상으로, 디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이다. 나는 록팬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대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거나 혹은 아예 그를 모른다고 하면 대화를 길게 나누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 일반은 물론이고 록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건 뭐 캐간지랄 수밖에...
새내기 시절 록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신촌 한 구석의 술집에 출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고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내가 Impellitteri의 곡을 신청했다. 주인장은 죄송하지만 음반이 없어 못 틀어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Loudness의 곡을 주문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크박스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지 않고 음반만으로 레파토리를 채우는 술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을 청했다. 그러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없는 곡만 신청하시니 난감하네요. 요즘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어요?" 내가 되묻고 싶었다. 1970년대에 나온 레드 제플린은 틀어주면서, 1980년대에 나온 걸 가지고, 뭐? 누가 듣냐고?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당장에 일본과 견줘도 그렇다. 바로 이 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가 데이빗 커버데일이다. 물론 데이빗 커버데일은 1970년대 최강의 밴드 Deep Purple의 멤버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네이크를 전혀 접한 적 없더라도, 기타 아르페지오가 애잔하게 흐르는 <Sodier of fortune>을 들어본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에서 Deep Purple은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로 더 유명하다. 이곡들은 데이빗 커버데일이 입단하기 이전, 이안 길런이 마이크를 잡고 있던 2기 시절의 노래들이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에 가입할 때만해도 상점 종업원을 전전하던 무명의 가수지망생이었다. 게다가 촌뜨기였다. 심지어는 사팔뜨기였는데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리더, 기타리스트)한테 고치라는 경고를 받고 수술도 없이 자가교정에 성공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커버데일의 음성은 전임자 이안 길런과는 상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지역별, 계급별, 인종별로 향유하는 장르가 크게 달라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된다. 커버데일은 백인이지만 어릴 적 내내 오티스 레딩과 같은 블루지하고 소울풀한 음악을 라디오로 듣고 자라며 꽤 흑인에 근접한 필을 가지게 되었다. 이안 길런이 날카롭게 찔러대는 창법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면, 커버데일은 굵직하게 울부짖는 흉성으로써 딥 퍼플의 3기를 장식했다. 그때의 대표곡이 <Burn>, <Stormbringer>.
딥 퍼플에는 사실상 한 명의 보컬리스트가 더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로, 데이빗 커버데일보다 고음에 능하고 라이브에서 더 안정된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탓에 경쟁심이나 갈등이 없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둘은 서서히 딥 퍼플의 노선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려나던 리더 리치 블랙모어는 중세풍 취향을 공유한 엘프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와 눈이 맞아 레인보우를 창설하며 딥 퍼플에서 나갔다. 제임스 갱 출신의 토미 블린이 후임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나 곧 딥 퍼플은 해산하였고 커버데일에게는 첫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유라이어 힙으로 영입될 뻔하다 탈락한 것도 이 시절의 일화다.
그러나 딥 퍼플에서 만난 존 로드(건반) 등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고 닐 머레이 등이 가담하면서 1970년대 말 화이트 스네이크가 결성되었다. 초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은 후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하드 록이나 헤비메틀보다는 블루스 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한 이때의 음악이야말로 커버데일이 가장 편하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의 굵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어렵게 끌고 가는 커버데일의 나쁜 버릇도 꽤 교정되었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딥 퍼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레인보우와 경쟁하는가 하면, 존 로드가 재결성된 딥 퍼플로 향하면서 잠깐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둥 같은 드러밍으로 유명한 코지 파웰이 있었고, 씬 리지 출신의 존 사이크스가 들어오면서 1984년도 <<Slide in it>>이라는 걸작이 나왔다.
허나 두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데이빗 커버데일의 성대 이상. 의사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고할 수준이었다. 존 사이크스를 대동해 메탈씬을 정복하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거꾸로 말해, 커버데일은 마침내 장애를 딛고 3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7>>. 화이트 스네이크의 최대 히트 음반이었다. 존 사이크스의 기타에선 불꽃이 튀었고 커버데일은 더 역동적으로 거듭났다. 한결 세련된 편곡을 거쳐 재수록된 <Here I go again>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별히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속 발라드인 <Is this love?>도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올랐다.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이 본격적인 메틀로 '여기서, 다시 나아감'으로써, 데이빗 커버데일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성향도 더 짙어졌다. 스스로 리메이크한 <Crying in the rain>에서 그의 변천 또는 진화는 유감 없이 드러났다.
존 사이크스가 음악적 불화로 탈퇴했음에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탈퇴 후 블루 머더의 깃발을 꽂은 존 사이크스는 딥 퍼플 시절의 글렌 휴즈와 더불어 '데이빗 커버데일과 밴드를 같이 한 다음 보컬리스트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비언 캠벨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나가고, 더블 기타 시스템의 한 축이던 에드리언 반덴버그가 손가락을 다쳤지만, <<Slip of the tongue>>의 제작 와중에 멋진 구원투수가 들어왔다. 스티브 바이. 촌티 풀풀 날리는 블루지 넘버 <Fool for your loving>이 그의 손을 거쳐 말끔하게 번뜩이는 곡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전의 중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팬들도 많겠지만, 다시 실린 <Fool for your living>에서 감정을 눅이기보다는 폐부를 찔러대는 쪽을 택한 커버데일의 보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붐이 락씬을 휩쓸며 화이트 스네이크는 여느 메틀 밴드처럼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후 커버데일은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Coverdale & Page를 구성해 '꿈의 블루지 콤비'를 이루는가 하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 음반에서 밴드 시기 못다한 블루스, 소울, 컨트리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커버데일이 원초적으로 지닌 매력을 감상하려면 이 시절의 음악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커버데일에게는 여러가지 단점이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고음에서의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밀어붙이듯 고음을 올리더라도 갑자기 음성이 얇아지는 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치더라도, 라이브에서의 고질적인 불안함 때문에 매니아들의 입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마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게 있다. '노이즈가든'의 멤버 박건이 영국에서 화이트 스네이크 공연을 보고 신해철에게 귀띔한 바, "그냥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용서된다". 그는 목소리로나 외양의 분위기로나 지극히 남성적인 동시에 당대에서 제일 섹시한, 하드록/헤비메틀 사상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였다. 곡이 매듭지어지면서 나오는 한숨소리마저 당당히 노래의 한 영역을 차지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멸하지 않고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그 관능미의 극치였다. "로큰롤과 섹스는, 힘들어도 끝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는 명언도 커버데일쯤 되어야 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커버데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가수들이 있다. 김태화, 임재범, 박완규, 양원찬(전 블랙신드롬) 등은 문헌이나 방송, 입소문을 통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들이다. 신성우, 서문탁 같은 이들에게서도 커버데일과 비슷한 어프로치를 엿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커버데일의 후예들은 어쩌면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퀸)를 사숙한 이들 못지 않은 세를 형성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보컬리스트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굵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R&B를 소몰이 창법으로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7년 전, "요즘 화이트 스네이크를 누가 들어요?"라고 타박받은 나는 날이 갈수록 복고주의자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을 확인하더니 "수구세력이시네요"라고 농담하더라.
보컬열전 (4) 김준원 (8) | 2008.12.08 |
---|---|
액슬 로즈 (0) | 2008.12.04 |
음반 속지 (0) | 2008.10.20 |
아류에서 용 난다 - 퀴즈 (1) | 2008.10.08 |
보컬열전 (2) 로니 제임스 디오 (6) | 2008.09.26 |
내가 입학하던 무렵 연세대에서는 한총련과 전학협의 각축이 한창이었다. 그뒤 몇년간 대학사회의 탈이념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그 때문인지 수북한 먼지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그때를, 나는 두 학생운동단체의 진검승부시대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소속 학교인 연세대(그리고 고려대 정도에) 한해서 하는 말이다. 2000년 전학협은 학교 사상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을 배출하며 기염을 토했다(미디어에는 '4년제 대학사상 최초'라는 수식이 돌아다녔으나,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입학했던 2001년도에 총학생회 권력은 한총련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력간 경쟁이 심한 대학에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비운동권이면서도 2003년과 2004년 연속으로 총학을 맡은 서울대 '학교로'가 이색적인 존재인 것이다.
2001년 '청년개척자'는 1996년 사태 이후 한총련계열로서는 최초로 총학선거에 당선되었다. 모처럼만의 승리만큼이나 불안한 위상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학내에서 한총련을 보는 눈길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1996년도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 한총련사태 직후 연세인 여론조사는 공안당국에 더 큰 책임을 묻고 있었다. 한총련의 승리 원인은 그 조직의 이념노선이 아니라, 등록금투쟁과 같은 구체적 사업에서 느껴지는 열의나 조직력, 대외관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도 그해 학내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하며, 총학 관계자들과 예상치 못한 연을 맺었다. 활동 파트너들은 나보다 너댓살 많은 이론가나 대중활동가들이었지만, 내게 깍듯이 대했다. 자기네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했다면 좋았으련만.
2002년 총학은 다시 전학협으로 넘어갔다. 역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는 힘든 법이었다. 속칭 PD계열이며 사회당에 가담했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에 대한 환상을 떨치고 민중의 이름으로 진군하자"고 외쳤던 그들은 어떻게 해서 한총련과 번갈아 가며 총학생회에 입성했을까. 내가 목도한 바 그들은 가장 세련된 표현기법을 가진, 언뜻 프랑스 68세대처럼 비쳐지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비결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반-한총련' 캠페인이었다. 한총련이 통일과 자주의 명분을 역설하면서도 자기네들의 북한관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 것처럼, 전학협도 자기네식의 사회주의 성향보다는 한총련 성토를 앞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총학생회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후에는 절제와 여과 없이 마구 제멋에 겨운 언어를 남발하다 학생대중의 외면을 받고는 했다.
2002년 11월 선거는 양측 대결의 절정이었다. 여기서 전학협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다. 진짜 '비운동권' 선본이 출현한 것이었다. '연세피플'이라는 비권 선본은 부후보도 없이 혼자서 선거운동을 진행했지만, 운동권을 향한 광범위한 반감을 모아나갈 수 있었고 전학협의 '반-한총련' 캠페인은 그리 먹혀들지 않았다. 총학 선거 때 한총련을 제외한 나머지 운동권 선본은 최대한 자기네 색깔을 뺀다. 하지만 이 해, 그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올해 서울교육감 선거에서의 이인규 선본처럼 말이다. 깃발을 흔들고 풍물을 쳐대며 대놓고 "나 운동권"이라고 외친 한총련 선본이 당선됐다. 그리고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던 전학협쪽 선본은 단기필마의 연세필마와 에누리 없이 똑같은 표를 기록했다.
그 전년도에 꼴찌를 면했던 SAS(학생행동연대) 선본은 꼴찌에서 주저 앉았다. 그 선본의 부후보는 낙선소감에서 목격자들의 실소를 유발한 명언을 남겼다. "선거는 기만입니다!" 왜 나왔대?라는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SAS는 네그리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조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총학과 총학선거라는 형식에는 언제나 녹아드는 행보를 보여 왔다. 2년이 지나, 선거가 기만이라던 이는 또 부후보로 출마하였다. 그것도 남의 선본의 부후보를 낚아 채 자기네 선본의 정후보로 심은 채. 총학선거 사상 최고의 패악질이었다. 나는 그무렵 군복무 중이어서 사나운 꼴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2001, 2002년 한총련 사람들은 안티조선운동을 전폭적으로 성원했다. 그쪽에서 <조선바보>에 파견한 인물들은 고학번대의 브레인급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신문 논조에 영향을 끼치려 하지 않고, 그저 맡기로 한 기사를 썼다. 그들은 당시 학내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였던 내게 어떠한 불편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조선바보>는 2002년 11월 선거에서 어느 선본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총련 계열의 '다른 미래' 선본은 유세에서 강한 유대감을 표시했다. "XX형, 이거 반칙지않아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년도 예산 걱정은 없겠군.' 한총련 쪽이 당선되자 학생회관은 축제분위기였다.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전학협에 질린 이들이 숱했다. 나는 당선 선본이 뒤풀이를 여는 '푸른샘'에 초대되어 축사까지 했다. 휴학생이라 투표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그 자리에서 뒷날인 2006년도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단과대 회장을 역임했던 이들이 '새내기 발언'을 했을 것이다.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학내 운동권 판도는 예측을 불허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전학협은 해체되었다. SAS는 여전히 총학생회 당선의 꿈을 불태웠다. 소위 '현장좌파'에 꼽히는 조직이 문과대 모 학과와 총여학생회를 터전으로 삼아 새로 등장했다. 손쉽게 연임에 성공한 한총련은, 놀랍게도 분열되었다. 예전 NL의 비판적 지지+전민항쟁이냐 진보정당 참여냐, 학생회중심성을 고수할 것이냐 아니냐, 한총련을 고수할 것이냐 발전적 해산하고 한대련에서 새 출발할 것이냐 등을 두고 노선투쟁을 벌인 끝에, 결국 2004년 가을 선거에서 따로 출마를 하게 되었다. 그중 한쪽은 학회 등지에 있던 좌파 성향의 학생들과 손잡고 선거에 출마했다. 학생회 구조를 대담하게 혁신하겠다는 공약이 주를 이루었고, 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선발하는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경선에서 생긴 잡음을 틈 타 SAS측이 부후보로 선출된 이를 빼 갔고, 이 선본은 구운동권 선본과 반운동권 선본의 공세에 포위되어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2004년 11월 당선하여 2005년도 총학생회를 맡은 '탈정치 작은총학'은 단순한 비운동권 조직이 아니었다. 서울대 '학교로'와는 너무도 또렷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반운동권'이었다. 1987년 대선을 방불케 하는 구도에서 그들은 꼭 노태우처럼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30퍼센트대 초반. 이 조직은 수구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나에게 NL 운동권 사람들은 총학이 뉴라이트라고 했다. 근거는 없었고,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탈정치라는 허울 하에 감춰진 수구보수 노선이 뉴라이트와 화음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운동권측이 곧 죽어라 뉴라이트와의 직접적 관계를 떠들었던 이유가 무얼까. 탈정치 작은총학의 승인은 기실 운동권측의 오류와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2005년, 반운동권은 너절했고, 운동권은 한심했다.
2006년도 총학이 다시 한총련 쪽의 수중으로 돌아간 이유는 고장난 레코드처럼 '탈정치'를 재생하면서 학생들을 무관심층으로 돌린 반운동권측의 자업자득에도 있었고, 등록금 5% 인하를 내건 한총련계열 선본의 교육투쟁전략에도 있었다. 2005년 11월 선거는 한총련, SAS, 기존 총학의 반운동권에 보수적 기독학생들이 가세하여 엉겨붙은 싸움이었다. 우습게도 두 반권 중에 후자가 더 큰 인기를 모았다. 후보자의 인물과 호감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SAS쪽이 선거규정 위반 누적으로 중도탈락함으로써 한총련 선본이 신승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냉정한 표정으로 판단 내리자면, 이미 한총련을 비롯해 운동권은 학내사회에서 거의 생명이 다한 상황이었다. 뇌사 끝에 거둔 판정승이랄까.
2006년 초, 학교 본부측의 12% 등록금인상안은 처음엔 한총련 총학생회에 더없는 호기를 가져다 주었다.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고 총학은 백양로 삼거리에 2천여명의 학생을 모아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다른 학교의 교육투쟁 소식도 열기를 고조시켜줬다. 허나 그때가 정점이었다. 본관 점거에 들어가는 순간 기나길지만 힘빠지는 투쟁과 한치의 변화도 없는 등록금 인상률은 시한부 인생처럼 학생사회를, 그리고 총학생회를, 운동권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거리를 뒤덮고 있던 여론은 본관 안으로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점거기간은 100일로 신기록이었으나 어느 쪽은 지쳐가고 어느 쪽은 짜증을 내고 어느 쪽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운동권 총학을 성토하였다.
별 거 없는 뒷얘기지만, 나는 정파적 입장을 떠나 교육투쟁의 실패가 몰고 올 회오리를 염려하여, 고민 끝에 같이 일하던 민노당 학생위원장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학생총투표 말고 방법이 없었다. 물론, 학교 본부측이 마음을 바꿔먹게 만들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모처럼 모인 여론을 박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총투표는 휴학생을 뺀 재학생의 과반이 투표해야 성립된다는 사실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투표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았다. 고생고생해서 총학생회 성원 1/10을 모아 개최한 학생총회로는 여론의 분노를 전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여론을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자신할 수 없었다. 운동권도 반운동권도 학교 본부도. 결정을 바꿀 수 없다면 뜻이라도 명확하게 전달해야 했다. 정말, 총투표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본관 점거 직후부터 전위단체처럼 행동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작전은 모두 짜여졌으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태도였다. 다른 운동권 조직에서도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형, 할 얘기 있는데 잠깐 나 좀 봅시다"하면서 민노당 연세대 학생위원장을 불러냈던 나는, 약속시각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아닙니다. 그만둡시다"라고 만남을 취소했다. (어이 형, 그때 기억 납니까?) 어차피 당시 총학측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한 데다가, 이미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투쟁에 더 잔소리를 얹을 만큼의 힘이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2005년 가을부터 2006년 가을까지, 나는 학생회를 통해 정치노선을 강력하게 실현하는 기존 노선을 접으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전략전술상 후퇴가 아니라 그것이 학생회를 학생회답게 만드는 길이라는 취지에서였다. 온갖 권한을 다 틀어쥐지 말고 과반학생회나 동아리, 부문별 네트워크, 학생복지위원회 등으로 돌리지 않으면 피돌기는 멎고 에너지는 없고 학생사회운동(학생의 사회운동말고 학생사회의 운동)은 고사한다고 말했다. 공허한 외침이었지만, 손해는 결국 그들이 보는 것이었다.
2006년도 총학생회는 심판을 받았고, 한총련 선본 하나와 반운동권 선본 하나의 대결로 치러진 2007년 11월 선거는 뒷쪽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은 예의 그 고약한 탈정치철학과 무능을 2005년에 이어 그대로 노출하였고, 게다가 총여 폐지를 두고 쓸데없는 일을 벌여 그해 여름에 이르기도 전에 폭삭 주저 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운동권 쪽으로 흐름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작년 이맘 선거에서, 운동권 둘과 비운동권 둘이 출마했지만, 언뜻 비슷비슷해 뵈는 선본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학생회관에 서식하는 '선수' 또는 '전문가' 뿐이었다. 단연 변수는 조직력이었다. 그래서 비운동권 선본인 '연세 36.5'가 이겼다. 운동권은 이제 조직력에서도 비운동권에 밀린다.
어제 학생회관 앞에서 이름을 그대로 걸고 자신만만하게 출마한 '연세 36.5' 선본 운동원과 마주쳤다. 내가 최근 1년간 백양로 행인으로 살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이 선본이 총학을 맡은 한 해동안 무리와 소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촛불시위 때는 학생들을 모아 깃발을 들고 시청앞으로 행진했고 정치토론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어제 만난 '연세 36.5'의 운동원은, 놀랍게도 국적은 모르겠지만 외양이 외국인인 학생이었다. 나는 그에게 팸플렛을 받으며 더 놀랐다. 그는 입에 완전히 익은 한국어로 말했다. 대대로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말했다. 그것도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똑같은 말투로! "46대 총학생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앞에는 등록한 선본들의 이름이 게시돼 있었다. 운동권 선본은 하나도 없었다. 조직력에서 비운동권에 밀리다 못해 총학 선본을 내지 못한 것이다. 운동권 정파들은 단과대 몇군데에서 승부처를 마련했지만, '연세36.5'에서도 상당수의 단과대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비운동권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기 전에 이러한 일이 생기리라고까진 예측하지 못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메이저 캠퍼스'라는 더러운 이름을 달고 운동권이든 비운동권, 반운동권이든 사건을 터트리면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학교에서 또 사건이 터졌지만, 운동권의 소멸해 가는 모습과 그것을 스스로 재촉하던 예전의 행보들이 나는 조금도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어쩌면, 와야 할 것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탈정치화, 보수화에 원인을 돌리지 마라. 나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만, 그래도 도서관 등지에서 진보적인 저서들을 읽고 있는 학생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운동권이든 아니든 간에 학생사회의 성격을 그리 간단히 재단할 수는 없다. 학생운동권이야말로 탈정치화, 보수화의 공동정범이 아니었던가? 현재로서는, 실천적으로 나서지 않는 지독한 액션결핍만이 구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학생사회의 현상일 뿐이다.
이제 운동권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예전과 같은 NL과 PD의 색깔이 짙은 학생은 찾기 힘들다. NL은 이들이 NL인가 싶고, PD는 그냥 순진무구하거나 늘어진 테잎 속에 담겨진 유일한 언더그라운드(?) 히트곡 '개량주의는 나쁘다'를 주구장창 불러 제낀다. NL도 PD도 아니면서 진보적인 학생들은, 흩어져 있거나 찌질하게 끼리끼리를 형성하고 있다. 나처럼 되는 일 없이 살다 졸업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겠지.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
미네르바 (0) | 2009.01.09 |
---|---|
'성노동' (2) | 2008.11.22 |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 (0) | 2008.10.24 |
적립금 펀드, 몇번이나 꼬여버린... (0) | 2008.10.15 |
정치와 운동의 차이에 관한 대착각 (0) | 2008.09.23 |
믿을 수 없는 전화를 받았다. 복분자를 공짜로 준다는 것이다. 전라도 어딘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 아주머니는 돈 받는 것 아니라며 거듭 강조했다. 복분자를 일주일간 공짜로 마신 다음 설문조사에 응하시고, 마음에 들면 주문하시라고 했다. 아, 이렇게 도-농연대가 실현되는구나!
"택배를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어디시죠?"
"받을 수 있는 장소요?"
"네, 직장이나 자택 아무 데나 편한 곳이요."
"서울시..."
"아, 서울이신가요?"
"...네."
일순 당황했다. 서울은 너무 멀어 배달해 주지 않는 건 아닐까?
"서울시...?"
그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멀다고 배달을 못해?
"서대문구... XX동, &&번지, ~~~호입니다."
"네 그쪽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설문조사 응해 주시면 되구요. 신상을 조금 확인할게요."
성명과 전화번호를 물었다. 복분자는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떻게 걸려온 전화인지는 몰라도 세상이 팍팍하지는 않구나.
"저,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스물 일곱입니다."
뱉어놓고 나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뒤돌아 생각하면 유도심문에 걸려 술술 불러버린 꼴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빨리 굴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공짜 복분자를 앗아갈 요인이, 에이 설마 있겠어?'하며 방심했다.
"아, 나이가 젊으시군요. 목소리가 굵으셔서..."
스트라이크 존이 한결 넓어진 기분이었다.
"그럼 결혼을 하셨는지...?"
"아뇨."
아뇨.
아뇨.
아뇨.
아뇨.
헛스윙.
그는 진땀 또는 식은땀을 흘렸다. 화상전화가 아니라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땀이 났다. 아이구 허허, 아줌마는 아저씨처럼 웃었다.
"아이구, 허허.... 아, 이게... 결혼하신 분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거라서... 설문조사도 해야 되고."
뭥미?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물을 뻔했다. 물론 그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도 윗니에 걸려 있었다.
그게 꼭 그런 데 써야 하는 겁니까? 그냥 몸에 다 좋은 거 아닙니까?
라는.
나는 쓸데 없이 밤에 뒤척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공짜를 먹고 싶었을 뿐이고
아줌마는 쓸데가 여의치 않은 사람한테는 그냥 줄 수 없다고 한 셈이고
나는 다 불어 버렸고!
아줌마는 수습하다 전화를 끊었고
나는 내가 목소리로 공짜 복분자를 그냥 낚고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고
결론적으로, 세상엔 공짜 없고!
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0) | 2008.11.29 |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수업 종료 (0) | 2008.11.12 |
선생의 별세 (3) | 2008.11.09 |
이외수, 참 잘한다 (1) | 2008.11.02 |
토마토 친구들 (3) | 2008.11.22 |
---|---|
말 한 마디에 복분자가 (4) | 2008.11.13 |
선생의 별세 (3) | 2008.11.09 |
이외수, 참 잘한다 (1) | 2008.11.02 |
유인촌과 권해효 (3) | 2008.10.29 |
조선 후기 조세금납화에 관해 석사논문을 썼던 선생은, 그뒤 일제시대로 넘어와 <백남운의 정치경제사상 연구>로 박사논문을 썼다. 당시만 해도 그의 어떤 선학들은 그의 연구를 "운동"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단다. 학문적 깊이가 없는 나로서는 여기서 설명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생실습을 다녀온 뒤 유월에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그 학기 함께 수업을 들은 학생들과 종강을 기한 술자리에서였다. 그는 그날따라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 했고, 최근에 마음 먹은 바도 이야기해주었다. 선생은 내게 "민노당원이냐 진보신당원이냐"고 묻더니 "너무 싸우고 그러지는 말어"라며 웃으며 한마디했다.
뜻 모를 말씀도 하셨다. "수업시간에 사회진화론 이야기 많이 하더구만. 요즘 듣자하니 사회진화론 제4기인가 뭐라던데... 자네는, 언제까지 '준비'만 할 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내게 그는 곤조를 좀 더 부려보라고 덧붙였다. 노래방에선 내게 "너는 아무래도 길을..."이라며 흥겨워하였다.
선생은 도어즈와 딥 퍼플의 팬이고, 배호와 신중현의 곡을 애창했다. 내가 그와 가졌던 두 차례의 술자리는 모두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새벽에 토스트로 독창적인 해장도 해 보았다. 그는 마시고 놀고 터놓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가끔은 수업시간에 엊저녁 술자리가 남긴 힘겨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름에 그가 쓰러졌다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을학기 수업도 강의보다 토론이 많은 것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어제는 선생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하는 얼굴이 조금 닮은 사람을 만나, 잠시 선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유월 그날, 선생은 나를 보고 연신 웃었다. 계속 말을 걸었고, 대화가 끊어질 때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또 웃었다. 얼마나 뻘쭘하고 쑥스럽던지. 아직도 나는 그날 선생의 말씀과 웃음의 의미를 잘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건강 걱정 없이 편히 마시고 노시길 바랄 뿐이다. 내가 가끔 선생의 성대모사를 한다는 걸, 곧 들킬 것 같다.
빈소 :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지하1층 11호실(신관) (02-2227-7547)
발인 : 11월 12일(수) 오전 8시 30분
말 한 마디에 복분자가 (4) | 2008.11.13 |
---|---|
수업 종료 (0) | 2008.11.12 |
이외수, 참 잘한다 (1) | 2008.11.02 |
유인촌과 권해효 (3) | 2008.10.29 |
가전제품 (0) | 2008.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