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학하던 무렵 연세대에서는 한총련과 전학협의 각축이 한창이었다. 그뒤 몇년간 대학사회의 탈이념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그 때문인지 수북한 먼지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그때를, 나는 두 학생운동단체의 진검승부시대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소속 학교인 연세대(그리고 고려대 정도에) 한해서 하는 말이다. 2000년 전학협은 학교 사상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을 배출하며 기염을 토했다(미디어에는 '4년제 대학사상 최초'라는 수식이 돌아다녔으나,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입학했던 2001년도에 총학생회 권력은 한총련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력간 경쟁이 심한 대학에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비운동권이면서도 2003년과 2004년 연속으로 총학을 맡은 서울대 '학교로'가 이색적인 존재인 것이다.
2001년 '청년개척자'는 1996년 사태 이후 한총련계열로서는 최초로 총학선거에 당선되었다. 모처럼만의 승리만큼이나 불안한 위상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학내에서 한총련을 보는 눈길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1996년도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 한총련사태 직후 연세인 여론조사는 공안당국에 더 큰 책임을 묻고 있었다. 한총련의 승리 원인은 그 조직의 이념노선이 아니라, 등록금투쟁과 같은 구체적 사업에서 느껴지는 열의나 조직력, 대외관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도 그해 학내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하며, 총학 관계자들과 예상치 못한 연을 맺었다. 활동 파트너들은 나보다 너댓살 많은 이론가나 대중활동가들이었지만, 내게 깍듯이 대했다. 자기네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했다면 좋았으련만.
2002년 총학은 다시 전학협으로 넘어갔다. 역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는 힘든 법이었다. 속칭 PD계열이며 사회당에 가담했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에 대한 환상을 떨치고 민중의 이름으로 진군하자"고 외쳤던 그들은 어떻게 해서 한총련과 번갈아 가며 총학생회에 입성했을까. 내가 목도한 바 그들은 가장 세련된 표현기법을 가진, 언뜻 프랑스 68세대처럼 비쳐지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비결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반-한총련' 캠페인이었다. 한총련이 통일과 자주의 명분을 역설하면서도 자기네들의 북한관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 것처럼, 전학협도 자기네식의 사회주의 성향보다는 한총련 성토를 앞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총학생회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후에는 절제와 여과 없이 마구 제멋에 겨운 언어를 남발하다 학생대중의 외면을 받고는 했다.
2002년 11월 선거는 양측 대결의 절정이었다. 여기서 전학협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다. 진짜 '비운동권' 선본이 출현한 것이었다. '연세피플'이라는 비권 선본은 부후보도 없이 혼자서 선거운동을 진행했지만, 운동권을 향한 광범위한 반감을 모아나갈 수 있었고 전학협의 '반-한총련' 캠페인은 그리 먹혀들지 않았다. 총학 선거 때 한총련을 제외한 나머지 운동권 선본은 최대한 자기네 색깔을 뺀다. 하지만 이 해, 그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올해 서울교육감 선거에서의 이인규 선본처럼 말이다. 깃발을 흔들고 풍물을 쳐대며 대놓고 "나 운동권"이라고 외친 한총련 선본이 당선됐다. 그리고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던 전학협쪽 선본은 단기필마의 연세필마와 에누리 없이 똑같은 표를 기록했다.
그 전년도에 꼴찌를 면했던 SAS(학생행동연대) 선본은 꼴찌에서 주저 앉았다. 그 선본의 부후보는 낙선소감에서 목격자들의 실소를 유발한 명언을 남겼다. "선거는 기만입니다!" 왜 나왔대?라는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SAS는 네그리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조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총학과 총학선거라는 형식에는 언제나 녹아드는 행보를 보여 왔다. 2년이 지나, 선거가 기만이라던 이는 또 부후보로 출마하였다. 그것도 남의 선본의 부후보를 낚아 채 자기네 선본의 정후보로 심은 채. 총학선거 사상 최고의 패악질이었다. 나는 그무렵 군복무 중이어서 사나운 꼴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2001, 2002년 한총련 사람들은 안티조선운동을 전폭적으로 성원했다. 그쪽에서 <조선바보>에 파견한 인물들은 고학번대의 브레인급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신문 논조에 영향을 끼치려 하지 않고, 그저 맡기로 한 기사를 썼다. 그들은 당시 학내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였던 내게 어떠한 불편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조선바보>는 2002년 11월 선거에서 어느 선본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총련 계열의 '다른 미래' 선본은 유세에서 강한 유대감을 표시했다. "XX형, 이거 반칙지않아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년도 예산 걱정은 없겠군.' 한총련 쪽이 당선되자 학생회관은 축제분위기였다.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전학협에 질린 이들이 숱했다. 나는 당선 선본이 뒤풀이를 여는 '푸른샘'에 초대되어 축사까지 했다. 휴학생이라 투표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그 자리에서 뒷날인 2006년도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단과대 회장을 역임했던 이들이 '새내기 발언'을 했을 것이다.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학내 운동권 판도는 예측을 불허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전학협은 해체되었다. SAS는 여전히 총학생회 당선의 꿈을 불태웠다. 소위 '현장좌파'에 꼽히는 조직이 문과대 모 학과와 총여학생회를 터전으로 삼아 새로 등장했다. 손쉽게 연임에 성공한 한총련은, 놀랍게도 분열되었다. 예전 NL의 비판적 지지+전민항쟁이냐 진보정당 참여냐, 학생회중심성을 고수할 것이냐 아니냐, 한총련을 고수할 것이냐 발전적 해산하고 한대련에서 새 출발할 것이냐 등을 두고 노선투쟁을 벌인 끝에, 결국 2004년 가을 선거에서 따로 출마를 하게 되었다. 그중 한쪽은 학회 등지에 있던 좌파 성향의 학생들과 손잡고 선거에 출마했다. 학생회 구조를 대담하게 혁신하겠다는 공약이 주를 이루었고, 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선발하는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경선에서 생긴 잡음을 틈 타 SAS측이 부후보로 선출된 이를 빼 갔고, 이 선본은 구운동권 선본과 반운동권 선본의 공세에 포위되어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2004년 11월 당선하여 2005년도 총학생회를 맡은 '탈정치 작은총학'은 단순한 비운동권 조직이 아니었다. 서울대 '학교로'와는 너무도 또렷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반운동권'이었다. 1987년 대선을 방불케 하는 구도에서 그들은 꼭 노태우처럼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30퍼센트대 초반. 이 조직은 수구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나에게 NL 운동권 사람들은 총학이 뉴라이트라고 했다. 근거는 없었고,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탈정치라는 허울 하에 감춰진 수구보수 노선이 뉴라이트와 화음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운동권측이 곧 죽어라 뉴라이트와의 직접적 관계를 떠들었던 이유가 무얼까. 탈정치 작은총학의 승인은 기실 운동권측의 오류와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2005년, 반운동권은 너절했고, 운동권은 한심했다.
2006년도 총학이 다시 한총련 쪽의 수중으로 돌아간 이유는 고장난 레코드처럼 '탈정치'를 재생하면서 학생들을 무관심층으로 돌린 반운동권측의 자업자득에도 있었고, 등록금 5% 인하를 내건 한총련계열 선본의 교육투쟁전략에도 있었다. 2005년 11월 선거는 한총련, SAS, 기존 총학의 반운동권에 보수적 기독학생들이 가세하여 엉겨붙은 싸움이었다. 우습게도 두 반권 중에 후자가 더 큰 인기를 모았다. 후보자의 인물과 호감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SAS쪽이 선거규정 위반 누적으로 중도탈락함으로써 한총련 선본이 신승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냉정한 표정으로 판단 내리자면, 이미 한총련을 비롯해 운동권은 학내사회에서 거의 생명이 다한 상황이었다. 뇌사 끝에 거둔 판정승이랄까.
2006년 초, 학교 본부측의 12% 등록금인상안은 처음엔 한총련 총학생회에 더없는 호기를 가져다 주었다.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고 총학은 백양로 삼거리에 2천여명의 학생을 모아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다른 학교의 교육투쟁 소식도 열기를 고조시켜줬다. 허나 그때가 정점이었다. 본관 점거에 들어가는 순간 기나길지만 힘빠지는 투쟁과 한치의 변화도 없는 등록금 인상률은 시한부 인생처럼 학생사회를, 그리고 총학생회를, 운동권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거리를 뒤덮고 있던 여론은 본관 안으로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점거기간은 100일로 신기록이었으나 어느 쪽은 지쳐가고 어느 쪽은 짜증을 내고 어느 쪽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운동권 총학을 성토하였다.
별 거 없는 뒷얘기지만, 나는 정파적 입장을 떠나 교육투쟁의 실패가 몰고 올 회오리를 염려하여, 고민 끝에 같이 일하던 민노당 학생위원장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학생총투표 말고 방법이 없었다. 물론, 학교 본부측이 마음을 바꿔먹게 만들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모처럼 모인 여론을 박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총투표는 휴학생을 뺀 재학생의 과반이 투표해야 성립된다는 사실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투표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았다. 고생고생해서 총학생회 성원 1/10을 모아 개최한 학생총회로는 여론의 분노를 전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여론을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자신할 수 없었다. 운동권도 반운동권도 학교 본부도. 결정을 바꿀 수 없다면 뜻이라도 명확하게 전달해야 했다. 정말, 총투표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본관 점거 직후부터 전위단체처럼 행동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작전은 모두 짜여졌으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태도였다. 다른 운동권 조직에서도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형, 할 얘기 있는데 잠깐 나 좀 봅시다"하면서 민노당 연세대 학생위원장을 불러냈던 나는, 약속시각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아닙니다. 그만둡시다"라고 만남을 취소했다. (어이 형, 그때 기억 납니까?) 어차피 당시 총학측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한 데다가, 이미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투쟁에 더 잔소리를 얹을 만큼의 힘이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2005년 가을부터 2006년 가을까지, 나는 학생회를 통해 정치노선을 강력하게 실현하는 기존 노선을 접으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전략전술상 후퇴가 아니라 그것이 학생회를 학생회답게 만드는 길이라는 취지에서였다. 온갖 권한을 다 틀어쥐지 말고 과반학생회나 동아리, 부문별 네트워크, 학생복지위원회 등으로 돌리지 않으면 피돌기는 멎고 에너지는 없고 학생사회운동(학생의 사회운동말고 학생사회의 운동)은 고사한다고 말했다. 공허한 외침이었지만, 손해는 결국 그들이 보는 것이었다.
2006년도 총학생회는 심판을 받았고, 한총련 선본 하나와 반운동권 선본 하나의 대결로 치러진 2007년 11월 선거는 뒷쪽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은 예의 그 고약한 탈정치철학과 무능을 2005년에 이어 그대로 노출하였고, 게다가 총여 폐지를 두고 쓸데없는 일을 벌여 그해 여름에 이르기도 전에 폭삭 주저 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운동권 쪽으로 흐름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작년 이맘 선거에서, 운동권 둘과 비운동권 둘이 출마했지만, 언뜻 비슷비슷해 뵈는 선본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학생회관에 서식하는 '선수' 또는 '전문가' 뿐이었다. 단연 변수는 조직력이었다. 그래서 비운동권 선본인 '연세 36.5'가 이겼다. 운동권은 이제 조직력에서도 비운동권에 밀린다.
어제 학생회관 앞에서 이름을 그대로 걸고 자신만만하게 출마한 '연세 36.5' 선본 운동원과 마주쳤다. 내가 최근 1년간 백양로 행인으로 살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이 선본이 총학을 맡은 한 해동안 무리와 소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촛불시위 때는 학생들을 모아 깃발을 들고 시청앞으로 행진했고 정치토론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어제 만난 '연세 36.5'의 운동원은, 놀랍게도 국적은 모르겠지만 외양이 외국인인 학생이었다. 나는 그에게 팸플렛을 받으며 더 놀랐다. 그는 입에 완전히 익은 한국어로 말했다. 대대로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말했다. 그것도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똑같은 말투로! "46대 총학생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앞에는 등록한 선본들의 이름이 게시돼 있었다. 운동권 선본은 하나도 없었다. 조직력에서 비운동권에 밀리다 못해 총학 선본을 내지 못한 것이다. 운동권 정파들은 단과대 몇군데에서 승부처를 마련했지만, '연세36.5'에서도 상당수의 단과대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비운동권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기 전에 이러한 일이 생기리라고까진 예측하지 못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메이저 캠퍼스'라는 더러운 이름을 달고 운동권이든 비운동권, 반운동권이든 사건을 터트리면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학교에서 또 사건이 터졌지만, 운동권의 소멸해 가는 모습과 그것을 스스로 재촉하던 예전의 행보들이 나는 조금도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어쩌면, 와야 할 것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탈정치화, 보수화에 원인을 돌리지 마라. 나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만, 그래도 도서관 등지에서 진보적인 저서들을 읽고 있는 학생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운동권이든 아니든 간에 학생사회의 성격을 그리 간단히 재단할 수는 없다. 학생운동권이야말로 탈정치화, 보수화의 공동정범이 아니었던가? 현재로서는, 실천적으로 나서지 않는 지독한 액션결핍만이 구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학생사회의 현상일 뿐이다.
이제 운동권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예전과 같은 NL과 PD의 색깔이 짙은 학생은 찾기 힘들다. NL은 이들이 NL인가 싶고, PD는 그냥 순진무구하거나 늘어진 테잎 속에 담겨진 유일한 언더그라운드(?) 히트곡 '개량주의는 나쁘다'를 주구장창 불러 제낀다. NL도 PD도 아니면서 진보적인 학생들은, 흩어져 있거나 찌질하게 끼리끼리를 형성하고 있다. 나처럼 되는 일 없이 살다 졸업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겠지.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
'Foru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네르바 (0) | 2009.01.09 |
---|---|
'성노동' (2) | 2008.11.22 |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 (0) | 2008.10.24 |
적립금 펀드, 몇번이나 꼬여버린... (0) | 2008.10.15 |
정치와 운동의 차이에 관한 대착각 (0) | 200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