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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

Forum | 2008. 10. 24. 14:48 | Posted by 김수민
인력소개소 일에 열중하며 점점 이주노동자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어가는 앤지에게, 그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동자들의 처우가 어떤지, 네가 하는 일이 옳은 건지 따져 묻는다. 국내 노동자의 취업문제가 거론될 때 앤지의 항변이 재밌다. "국민전선에 들어가시지 그래요?"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 접어들면 금세 내셔널리즘과 극우파를 연상하는 사고방식이 내키는대로 뱉어내는 말버릇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 영화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나서, 나는 그 비슷한 버릇을 가진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를 생각한다.

그를 달리 소개할 말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노동운동가'라는 단어가 적합할 듯하다. 그의 이율배반과 자기기만을 표현하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예쁘냐?"라고 반응하듯 활동가 이야기가 나오면 "정파가 어디냐?"는 질문이 으레 나온다. 그의 정파는 글쎄. 그룹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있는데 딱히 소속정파는 없는 것 같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쪽은 정파가 있다. 그러나 "정파가 없다"고 밝히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는 그걸 그대로 받아 옮긴다. 

그는 무척이나 독립적이다. 계보 없는 '래디컬'이라는 점에서다. 그는 앤지처럼 나오는대로 내뱉고 들어가는대로 씹는다. 그에게 한계를 극복하고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란 없다. 한계와 딜레마가 있는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그른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그는 늘 좌향좌를 외쳐 왔다. 그러나 이런 급진주의에 일관성이나 체계는 없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구석이 있으면 개량주의, 시혜주의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다 맛이 간 것이다. 이를테면 강준만이 지역에서 '선샤인뉴스'를 만드는 일도 그에게는 이상한 짓이다. 

그는 정당정치의 한계에 대해 떠들지만 실제로 정당에 가입되어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실용주의가 매우 돋보인다. '연대사업' 말이다. 정당에 관해서도, 운동에 관해서도 초보적인 관점과 상식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어떤 일을 같이 하고 있다면, 같이 할 수 있다면 가입하는 걸까?  그는 한국 실용주의의 평균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언뜻 수완이 뛰어난 운동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활약을 하는 분야는 뻔하다. 다독 다작 다상량 모두가 거리가 먼 그가 사상과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특기는 테이블에 앉아서 협상하고 이른바 '택'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짜는 것이고, 결국은 경제투쟁이다. 협상은 사실 다그치기에 더 가깝다.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평소완 달리 작전을 짤 때는 눈빛이 좀 달라진다. 

그는 '돈'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운동 역시 중심화두가 '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분별 없는 깎아 내리기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식과 용감, 순혈주의, 근본주의 등등은 때때로 순식간에 무너진다. 진보정당의 한계를 떠들어대는 한편 그는 재태크에 손을 댄다. 자기 돈으로 스스로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이때 그에게 급진주의, 근본주의, 순혈주의 등은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물론 그의 운동과 재테크 사이에 몇몇 공통점은 있다. 돈이 중심이라는 것, 하고 싶으면 한다는 것,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 

켄 로치는 <자유로운 세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앤지는 싱글맘이고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거세게 탓에 해고되었다. 그의 자기합리화가 조금만 더 세련되었다면 관객들은 그의 처지와 선택에 공감을 하였을 테고, 마지막에 가서야 선악 구도 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착취의 위력을 깨달으며 거세게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켄 로치의 앤지는 초장부터 '나 나쁜 놈이 되고 있어'라고 이마빡에 써붙이고 있다. '어느 노동운동가' 정도의 단순무식한 감수성과 안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나 앤지가 우리의 곁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그악스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일 '어느 노동운동가'가 언젠가 노동운동을 때려 치운다면, 앤지처럼 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인물이 될까?  (알량한) 의식을 배반하는 재테크에 손대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는 그는, 어쩌면 자기가 유리한 걸 요구하고 떼쓰고 소리지르고 따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걸 유일한 철학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의 태도는 사채업자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가 운동가나 연대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된다면? 혹시 어떤 사람들은, 유물론을 지향하는 것과 경제동물이 되는 것을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장이 바뀌면 옳고그름이 뒤집히는 걸 마치 계급투쟁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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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

Free Speech | 2008. 10. 23. 15:32 | Posted by 김수민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 등장하는 구멍가게 아저씨는 민주화운동의 이력이 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 탓에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해 자격지심이 있고, 그러면서도 그의 아버지를 닮은 덕인지 똑똑하고 해박하다. 아들은 호순(김원희)이를 좋아하지만 호순이는 춘섭(최민식)을 짝사랑한다. 아들의 컴플렉스는 삼각관계 속에서 만난 춘식의 고졸 학력 앞에 더 강해진다. 그러던 중 아들과 김원희는 컴퓨터학원에 다니게 되는데...

호순: "저는 가전제품 다루는 거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구멍가게 아들: "무슨 소리예요? 컴퓨터는 가전제품이 아닙니다!"


호순이가 옳았다. 그녀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였다. 김운경 작가는 당연히 예상못했을 것이다. 빌 게이츠도 인터넷 상용화는 실패할 거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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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속지

Listen to the 무직 | 2008. 10. 20. 23:34 | Posted by 김수민

어느 초슈퍼밴드의 새로운 걸작을 샀다. 속지에 적힌 비평인지 소개문인지를 보니 가슴이 막혀 온다. 10년이 지나도록 개선된 것이 없다.

우선 매니아와 음악평론가 사이의 차별점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깔아놓고 있다. 이는 민주화나 포스트모던이 벽을 허문 귀결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습성의 발로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모든 음악평론가는 음악매니아여야 하나, 매니아라고 해서 음악평론을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것과 음악에 대해 쓰는 것, 뮤지션의 테크닉과 장비, 계보를 읊어대는 것과 그것을 글로 푸는 것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매니아적으로가 아니라 사회학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에조차,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대중음악평론이 수두룩하다.

이번에 읽은 속지에서, 글쓴이는 곡별 소개를 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를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다. 곡별 소개는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글쓴이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프라이드로부터 나오며, 글솜씨의 보좌를 받는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곡별 소개가 삽입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 뿐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쓸데 없이 횡설수설하더니 어떤 대목에서는 자신이 느낀 아쉬움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음반 속지의 최대 맹점, '주제 파악의 실패'가 드러난다. 음반 속지의 글은 소위 발문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의 글에 해당하며, 더 노골적으로는 '주례사(적 비평)'의 성격을 품는다. 달리 말해, 비판은 저널리즘이나 출판에서 소화할 일이라는 것이다. 찬탄만을 지나치게 늘어놓아 글과 글쓴이 자신의 격을 함께 깎아내리는 것이 우려된다면, 절제해서 쓰면 된다. 그간의 소식과 음반제작 과정, 뮤지션의 옛 궤적, 신작의 장르적 특성과 주법, 창법 따위만 건조하게 늘어놓아도 훌륭한 발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음반 속지를 물들일 펜은 평론가나 기자보다는 음반사 관계자가 직접 쥐는 게 더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 평론가의 권위를 대신해 카피라이터의 특질도 녹여낸다는 의의도 있다. 설마 음반사 직원들이 죄다 비지니스나 영어에만 능하거나, 음악애호가지만 글 한 편 깔끔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겠는가.

발매 이전에 음원이 공개되는 경우라면 팬클럽 회원에게 맡기거나 네티즌들에게 공모를 해도 될 것 같다. 1980년대, 한 애호가는 '부활'의 음반에다, 두고 두고 웃음거리가 된 '라우드니스를 능가한다'류의 문구를 휘갈긴 바 있다('부활'은 훌륭한 밴드지만, 음악적으로 너무 다른 '일본 밴드'를 끌어 들이는 짓은 치기 어린 쇼비니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쯤은 음반사가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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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오해들에 답함

Free Speech | 2008. 10. 19. 21:42 |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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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 중에서 '활동'을 하다가 만난 사람의 수는 적다. 활동을 하다가 만났더라도 활동 때문에 친해진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친구가 되고 안 되고는 결국엔 사적인 요인으로 결판나는 것이다.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들의 다수는, 스쳐 지나가는 나, 또는 글 속의 나를 통해 나를 알게 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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