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소개소 일에 열중하며 점점 이주노동자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어가는 앤지에게, 그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동자들의 처우가 어떤지, 네가 하는 일이 옳은 건지 따져 묻는다. 국내 노동자의 취업문제가 거론될 때 앤지의 항변이 재밌다. "국민전선에 들어가시지 그래요?"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 접어들면 금세 내셔널리즘과 극우파를 연상하는 사고방식이 내키는대로 뱉어내는 말버릇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 영화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나서, 나는 그 비슷한 버릇을 가진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를 생각한다.
그를 달리 소개할 말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노동운동가'라는 단어가 적합할 듯하다. 그의 이율배반과 자기기만을 표현하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예쁘냐?"라고 반응하듯 활동가 이야기가 나오면 "정파가 어디냐?"는 질문이 으레 나온다. 그의 정파는 글쎄. 그룹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있는데 딱히 소속정파는 없는 것 같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쪽은 정파가 있다. 그러나 "정파가 없다"고 밝히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는 그걸 그대로 받아 옮긴다.
그는 무척이나 독립적이다. 계보 없는 '래디컬'이라는 점에서다. 그는 앤지처럼 나오는대로 내뱉고 들어가는대로 씹는다. 그에게 한계를 극복하고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란 없다. 한계와 딜레마가 있는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그른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그는 늘 좌향좌를 외쳐 왔다. 그러나 이런 급진주의에 일관성이나 체계는 없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구석이 있으면 개량주의, 시혜주의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다 맛이 간 것이다. 이를테면 강준만이 지역에서 '선샤인뉴스'를 만드는 일도 그에게는 이상한 짓이다.
그는 정당정치의 한계에 대해 떠들지만 실제로 정당에 가입되어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실용주의가 매우 돋보인다. '연대사업' 말이다. 정당에 관해서도, 운동에 관해서도 초보적인 관점과 상식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어떤 일을 같이 하고 있다면, 같이 할 수 있다면 가입하는 걸까? 그는 한국 실용주의의 평균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언뜻 수완이 뛰어난 운동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활약을 하는 분야는 뻔하다. 다독 다작 다상량 모두가 거리가 먼 그가 사상과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특기는 테이블에 앉아서 협상하고 이른바 '택'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짜는 것이고, 결국은 경제투쟁이다. 협상은 사실 다그치기에 더 가깝다.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평소완 달리 작전을 짤 때는 눈빛이 좀 달라진다.
그는 '돈'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운동 역시 중심화두가 '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분별 없는 깎아 내리기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식과 용감, 순혈주의, 근본주의 등등은 때때로 순식간에 무너진다. 진보정당의 한계를 떠들어대는 한편 그는 재태크에 손을 댄다. 자기 돈으로 스스로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이때 그에게 급진주의, 근본주의, 순혈주의 등은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물론 그의 운동과 재테크 사이에 몇몇 공통점은 있다. 돈이 중심이라는 것, 하고 싶으면 한다는 것,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
켄 로치는 <자유로운 세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앤지는 싱글맘이고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거세게 탓에 해고되었다. 그의 자기합리화가 조금만 더 세련되었다면 관객들은 그의 처지와 선택에 공감을 하였을 테고, 마지막에 가서야 선악 구도 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착취의 위력을 깨달으며 거세게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켄 로치의 앤지는 초장부터 '나 나쁜 놈이 되고 있어'라고 이마빡에 써붙이고 있다. '어느 노동운동가' 정도의 단순무식한 감수성과 안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나 앤지가 우리의 곁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그악스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일 '어느 노동운동가'가 언젠가 노동운동을 때려 치운다면, 앤지처럼 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인물이 될까? (알량한) 의식을 배반하는 재테크에 손대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는 그는, 어쩌면 자기가 유리한 걸 요구하고 떼쓰고 소리지르고 따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걸 유일한 철학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의 태도는 사채업자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가 운동가나 연대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된다면? 혹시 어떤 사람들은, 유물론을 지향하는 것과 경제동물이 되는 것을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장이 바뀌면 옳고그름이 뒤집히는 걸 마치 계급투쟁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 등장하는 구멍가게 아저씨는 민주화운동의 이력이 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 탓에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해 자격지심이 있고, 그러면서도 그의 아버지를 닮은 덕인지 똑똑하고 해박하다. 아들은 호순(김원희)이를 좋아하지만 호순이는 춘섭(최민식)을 짝사랑한다. 아들의 컴플렉스는 삼각관계 속에서 만난 춘식의 고졸 학력 앞에 더 강해진다. 그러던 중 아들과 김원희는 컴퓨터학원에 다니게 되는데...
호순: "저는 가전제품 다루는 거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구멍가게 아들: "무슨 소리예요? 컴퓨터는 가전제품이 아닙니다!"
호순이가 옳았다. 그녀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였다. 김운경 작가는 당연히 예상못했을 것이다. 빌 게이츠도 인터넷 상용화는 실패할 거라고 했으니...
어느 초슈퍼밴드의 새로운 걸작을 샀다. 속지에 적힌 비평인지 소개문인지를 보니 가슴이 막혀 온다. 10년이 지나도록 개선된 것이 없다.
우선 매니아와 음악평론가 사이의 차별점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깔아놓고 있다. 이는 민주화나 포스트모던이 벽을 허문 귀결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습성의 발로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모든 음악평론가는 음악매니아여야 하나, 매니아라고 해서 음악평론을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것과 음악에 대해 쓰는 것, 뮤지션의 테크닉과 장비, 계보를 읊어대는 것과 그것을 글로 푸는 것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매니아적으로가 아니라 사회학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에조차,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대중음악평론이 수두룩하다.
이번에 읽은 속지에서, 글쓴이는 곡별 소개를 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를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다. 곡별 소개는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글쓴이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프라이드로부터 나오며, 글솜씨의 보좌를 받는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곡별 소개가 삽입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 뿐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쓸데 없이 횡설수설하더니 어떤 대목에서는 자신이 느낀 아쉬움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음반 속지의 최대 맹점, '주제 파악의 실패'가 드러난다. 음반 속지의 글은 소위 발문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의 글에 해당하며, 더 노골적으로는 '주례사(적 비평)'의 성격을 품는다. 달리 말해, 비판은 저널리즘이나 출판에서 소화할 일이라는 것이다. 찬탄만을 지나치게 늘어놓아 글과 글쓴이 자신의 격을 함께 깎아내리는 것이 우려된다면, 절제해서 쓰면 된다. 그간의 소식과 음반제작 과정, 뮤지션의 옛 궤적, 신작의 장르적 특성과 주법, 창법 따위만 건조하게 늘어놓아도 훌륭한 발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음반 속지를 물들일 펜은 평론가나 기자보다는 음반사 관계자가 직접 쥐는 게 더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 평론가의 권위를 대신해 카피라이터의 특질도 녹여낸다는 의의도 있다. 설마 음반사 직원들이 죄다 비지니스나 영어에만 능하거나, 음악애호가지만 글 한 편 깔끔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겠는가.
발매 이전에 음원이 공개되는 경우라면 팬클럽 회원에게 맡기거나 네티즌들에게 공모를 해도 될 것 같다. 1980년대, 한 애호가는 '부활'의 음반에다, 두고 두고 웃음거리가 된 '라우드니스를 능가한다'류의 문구를 휘갈긴 바 있다('부활'은 훌륭한 밴드지만, 음악적으로 너무 다른 '일본 밴드'를 끌어 들이는 짓은 치기 어린 쇼비니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쯤은 음반사가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0.
내 친구들 중에서 '활동'을 하다가 만난 사람의 수는 적다. 활동을 하다가 만났더라도 활동 때문에 친해진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친구가 되고 안 되고는 결국엔 사적인 요인으로 결판나는 것이다.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들의 다수는, 스쳐 지나가는 나, 또는 글 속의 나를 통해 나를 알게 되는 편이다.
1.
"잘 생긴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꽤 듣는다.
안 생겼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할 거 없다. 나도 샤워할 때는 거울 보니까 안다.
어쨌든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중에 일부는 나에게 "글을 잘 쓴다"라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증명요구를 좀 해야겠다.
글쟁이 가운데 글을 잘 쓰면서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이 있다면 사례를 좀 들어주시고,
외모와 글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원리를 간단하게라도 설명해 주셨으면 한다.
2.
글을 보니까 뭣도 없는 인간인데 하도 당당하니까
"뭘 믿고 저러나. 얼굴이라도 잘 생겼나?"라고 생각했을 경우도 있을 법하다.
그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사람은 글 못 쓰고 얼굴 못 생긴 놈은 움츠리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퍽이나 잘나신, 혹은 평생 열등의식을 벗지 못할 인간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분들은 아예 나한테 말을 안 걸어주셨으면 좋겠다.
3.
그외에 '글을 봤을 땐 ~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까 아니다'의 레파토리는 여럿이다.
재밌는 건 그들끼리 의견이 정반대로 엇갈린다는 점.
"글을 읽었을 땐 체구가 작고 곱상할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그렇지 않다"
"글을 읽었을 땐 굉장히 거칠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그렇지 않다"
"글은 합리적인데 실제로 좀 거칠다"
"이렇게 만나니 참 점잖은데 글은 참..."
그분들에게 내가 드리고 싶은 말은
"당신들끼리 모여서 의견정리를 하시거나, 아니면 말을 좀 아끼세요."
4.
처음엔 일개인의 황당한 경험으로 치고 넘어가려고 했었지만,
최근엔 기실 사회풍토의 한 편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건 병이다. 판단중독증이다. 입시교육이 불어넣은 헛똑똑에다가
'의식화'니 뭐니 해서 마구 머리에 구겨 넣은 도식들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단적이고 극명한 사례의 하나라는 것이다.
저 자신들이 얼마나 과학적이라고 자부할지도 모르지만
글을 보고 사람의 성격은 물론이고 얼굴까지도 감히 그려내는 태도는 이미
점쟁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점쟁이는, 엉터리, 돌팔이, 야매다.
5.
나에 대한 오해 중 상당수, 특히 위에서 예시한 것은 사실
친근감의 발로이기는 하다.
그러나 친해진다는 것은 친근감을 표한다는 것과 다르며,
나는 그런 식으로 남과 친해진 적이 없다.
상상력이 딸리고 추리력이 약하면 관찰의 인내쯤은 가져주었으면 한다.
그게 싫으면 말을 아끼고, 그것도 못하겠으면 아무 데서나 늘어놓지는 말았으면..
"친해지자는 취지에서 그런 건데 뭐 그리 예민하게..."
이런 건 평소에 전혀 예민하지 않은 나를 자극하려고 작정한 듯한 멘트이며
나는 그렇게 주절거리는 사람과는 절대로 친해질 생각 없다.
6.
얼마 전 여기에 '가오'와 '후카시'에 관한 짤막한 포스트를 올렸다.
사실 나는 두 가지 모두와 친하지 않다.
가오라는 건 잡는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가오 잡다가 후카시 잡게 되고, 추해지는 거다.
나는 '절제'를 중시하긴 하지만 '여과'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게 살아가면서 약점이 될 때도 많겠지만 버릇을 고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몰라도 그런 시도들만큼은 경멸한다.
내가 쌈마이인 건 맞다. 그렇지만 아무 데서나, 언제나, 쌈마이 티를 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나오는 걸 감추지는 않는다. 아니, 못 가린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런데 나의 어떤 면모는 보고, 어떤 면모는 보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딴소리를 한다.
상상력이라는 건 글을 보고 감히 사람 얼굴을 짐작하는 따위로 발휘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내가 못 본 것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시위현장 젤 앞에서 내가 무슨 짓하는지 본 사람? 애기들, 꼬마들이랑 내가 노는 거 본 사람? 딸랑 두 가지지만 두가지 다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내가 욕하는 거 본 사람? 내가 우는 거 본 사람? 내가 대가리 흔드는 거 본 사람? 내가 동네할머니랑 이야기하는 거 본 사람? 병 깨서 난동 부리는 취객한테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본 사람? 사소한 일에 허둥지둥 어리버리 진땀흘리는 날 본 사람? 중학교 때 누가 누구한테 삥뜯은 돈 다시 삥뜯는 나를 본 사람? 군대에서 내가 완전 바보되어 고참들한테 얻어 맞는 걸 본 사람?
내가 쓴 '안내서' 성격의 글 읽은 사람? 노트북에 숨겨놓은 희한한 글 읽은 사람?
봐달라, 읽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노출증 환자, PR 바이러스 감염자가 아니라
그런 것들 일일이 보여줄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좀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는 거다.
7.
다음 오해에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답변을 해야겠다.
내가 굉장히 똑똑하고, 책을 엄청나게 읽으며, 학자를 하면 참 잘하겠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해 내가 저어하면, 그게 겸양으로 읽히면서 칭찬이 더 커지는, 그런 골때리는 상황으로 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답하자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다.
일단 나는 영어 독해와 한자 해독에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구축된 지식 및 학문체계와의 불일치에 시달리는 중이다.
기껏 착오와 고심 끝에 역사공부를 하게 됐지만, 정치학을 할 걸, 국문학을 할 걸,이라는
후회가 때때로 엄습한다. 그러나 내가 정치학이나 국문학을 전공으로 삼았더라도
역사학을 할 걸,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독서량이 적다.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는 걸 싫어한다.
판단중독증을 향한 유별난 반감 덕분인지 '정리'를 하는 것도 싫어한다.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고민은 가끔 한다. 왜냐면 재주가 없어서.
허나 재주가 없다고 공부할 재주가 생기진 않는다.
내 학습력이라는 건 중3부터 고3에 이르는 기간동안 밑뿌리까지 소진되었다.
어떤 프로젝트가 생겼을 때나 학문적 접근을 하고 공부를 해대는 내 습관으로서는
공부를 절대 업으로 삼지 못한다.
나는 수능점수나 내신성적이 좋아서 대학 간 사람이 아니다.
방탕하게 막 살아도 중고교 성적이 좋은 사람들은 하던 가닥이 나오는 법인데,
나한텐 그게 없다는 것이다.
8.
나란 인간의 타입을 밝히기 위해, 불가피하게 집안내력을 들먹여야겠다.
참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일이다.
내겐 친가와 외가 합쳐서, 다섯 분의 삼촌이 있다.
한 분은 공무원, 한 분은 자영업자, 세 분은 회사원이며,
그중 셋은 고졸이고 둘은 지방 사립대 출신이다.
이제서야 깨달은 거지만 이 분들은 대단한 언변을 가지고 있다.
재담가 스타일도 있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걸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엄청난 통찰과 절묘한 수사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들 학문적 무장이나 이론의 칠갑하고는 무관하다.
어머니가 어릴 적 돌아가신 내 외할아버지의 경우도
사랑방을 들끓게 만드는 공력을 가지신 분이지만
평생 '문맹'이셨다고 한다.
내가 그 분들을 당해낼 재간은 없겠지만, 나에 대한 오해에 실려오는 평가보다는
그 분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달리 말해, 나는 이론가도 아니고 학자 타입도 아니고
명석한 두뇌와 방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글쟁이도 아니며(그렇게 될 수가 없으며)
잘 생기고 잘 나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다.
아무리 앎이라는 게 중요하더라도 과학주의 따위는 언제라도 패배할 만큼
세상은 끝없이 열려 있고, 사람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세상과 대화하고 검술대결을 펼칠 수 있다.
나는 주로 반지성주의와 싸우려 노력했지만
실은 그 이상으로 엘리트주의와 싸워 왔다. (반지성주의와 엘리트주의는 물론 함께 반대해야 할 대상이다)
신념이나 이론 때문이 아니라 체질과 성격상 그래 왔다.
학문과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거나,
혹은 그 여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내 평생의 삶이어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사랑방'을 아무나에게,
공부 잘하고 학벌 좋다고 잘생겼다고,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데 말이다.
9.
나는 내 사랑방을 만드는 것 뿐이다.
그러니 나더러
얼마나 잘났길래 저러고 다니냐고 말하지 말라.
억울하면, 억울해 하지 마라.
나에게 처음에는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했다가
"네가 안다고,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냐"고
찌짐 뒤집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못난 사람'은 좋아하지만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서로 웃는다더라)
열등감 많은 사람을 혐오한다.
열등감은 대체로 우월감과 비례한다.
그자들이 서울대 가려고 문제지 파고 있을 때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제대로 자유롭게 살지는 못했지만) 했을 뿐이다.
그자들이 비판적 지식인이 되겠다며 어디서 어줍잖은 책 읽고
먼저 산 사람들이나 선배들 한 말을 취사선택해서 권위를 확보할 때,
나는 좋지도 않은 머리와 맑지도 않는 눈으로
마음 비우고 어깨 힘 빼고 내가 못난 거 인정하고
자랑거리 없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이야기하고 관찰하고 '잘 모리겠네..'하고 돌아다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