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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Free Speech | 2008. 11. 29. 15:02 | Posted by 김수민

나, 친구, 구미 시민운동가 C 선배, 이렇게 셋이서 만났던 시월 어느 날, 내 위는 기름진 안주와 초저녁부터 들이킨 쏘맥 폭탄주를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했고, 집에 와서도 토했고, 몇시간 지나 또 토했다.


새벽녘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던 차에 나는 내용물 일부를 화장실 문앞에서 흘리고 말았다. 구토액에 누런빛이 거의 없을 만큼 토하고 난 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입식 걸레를 베란다에서 빨고 있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그가 아버지인지 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왕 쪽팔림이냐 덜 쪽팔림이냐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총각 시절 마른 체구였지만 지금은 후덕한 중년이 되어 있고, 동생은 원래부터 몸이 빵빵했다. 그러니 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다. 몇분 후 그는 동생으로 밝혀졌다. 불과 몇분 전까지 곯아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저지른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확인을 했지만 동생에게는 아버지의 느낌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1992년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의 차에 동승한 직장 후배가 뒷자리의 내 동생을 보고 "쟤는 다른 집 애죠?"라고 물었다.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저녁에 동생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했다. 사람들은 동생이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그것도 썩 맞는 얘긴 아니었다. 다만 동생이 아버지를 거의 닮지 않았다는 데로 일찌감치 중론이 모아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전인자의 발현에는 넉넉한 세월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제는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대개 장남에게 투영되기 마련이고, 또 안목이라는 것이 비주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느낌에 끌려다니는 노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어머니를 적지 않게 닮았다. 사실 틀림 없는 외탁이다,라고 적을 뻔했는데, 그것은 취소한다. 내가 외가식구들의 전통을 딱히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닮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기다란 팔다리는 어머니를 닮은 반면 두꺼운 흉곽은 아버지의 것이니까, 딱 잘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어머니를 닮았다. 하지만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이를 인정하는 친척은 없다. 혈연사회 바깥에서 내가 만난 젊은 사람들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데 무게를 두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러나 친가의 신세대라는 숙모들도 내가 다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지방거주자들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고, 수도권 거주자들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내 친인척의 절대 다수는 지방거주자다.


중3때 담임선생이 학교에 온 어머니에게 "많이 닮았네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라고 했고, 이에 당시 담임은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지는 몰라도, 어머님을 빼어 닮았습니다"라고 했다. 졸업식 날, 담임과 아버지가 만났다. "아이고, 어머님 말씀이 진짜네요."


솔직히 어느 쪽을 더 닮았는지는 모르겠다. 때론 양쪽 다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유아독존적인 내 성격 탓이다. "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냐?" 10대 초중반 가끔 듣던 어머니의 타박에,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잠긴 적도 있다. 그래도 요즘 나는 어머니를 더 닮았다는 데로 기울고 있다. 인위적인 균형맞추기인 셈이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덮어놓고 말하고, 짝 맞추기라고 하는 짓인지 닮지도 않은 내 동생과 어머니를 포개어놓는 친척 어른들에게 저항감이 생겼다.


어머니와 나의 손만 붙여봐도 알 것이다. 자신들이 반쯤은 틀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아버지와 동생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라. 억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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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

Forum | 2008. 11. 22. 17:27 | Posted by 김수민
성노동, 성매매 문제만 나오면 진보신당 게시판이 벌집이 된다. 구도야 뻔하다. 성매매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성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의 대결이다. 나는 성노동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산업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은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보다는 성산업시스템 하에서 판매자가 겪을 여러가지 피해에 더 주목한다. 성산업의 특성상 '성노동자'가 '성자본가'나 '성관리자'에 대항할 여건을 마련할 수는 없고, 실제로 성노동자운동은 포주를 그리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성매매나 성노동에 대한 근본적 철학을 차치하고, 나는 일단 '집창촌'이나 '술3종' 등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한다(그리고 비직업적, 일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성매매는 어차피 논쟁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나로서는 당연히 성노동자의 조직권리를 성매매금지법의 대안으로 제시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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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친구들

Free Speech | 2008. 11. 22. 03:13 | Posted by 김수민

어떤 사람이 논문을 쓰는 데 인터뷰가 필요하다며 연락해 왔다. '토마토 친구들'이라는 단체에서 일했던 이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그에 이어서 나를 인터뷰할 생각이며 이전에 인터뷰이들이 나를 만나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왜지?). 나는 최근 사정상 만나기는 힘들고 전화나 서면으로 인터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토마토 회원이었던 분들 말고, 나를 토마토 회원이었다고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토마토는 민주노동당 분당, 진보신당 창당의 와중에 해산하였는데, 나는 그보다 1년 반쯤 전에 토마토를 탈퇴했었다. 토마토는 2006년 여름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내가 '토마토'라는 이름의 조직에서 활동한 건 두세달 남짓이다. 물론 토마토 이전의 '새로운당운동을모색하는학생당원모임'(정확한가? 기억이 가물하다)까지 포함하면 열달쯤 된다.

내가 탈퇴한 까닭은 당시 민주노동당이 북핵과 일심회 문제로 홍역을 앓는 데 심각한 회의가 들어서 탈당까지 염두한 채 당활동을 중단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자연히 토마토 탈퇴는 내가 민노당 연세대학생위원회 집행부를 그만둘 때와 겹친다. 그런데 토마토가 출범할 당시 벌어진 논쟁 때문에 내가 나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논쟁은 늦여름에 있었고, 내 탈퇴는 가을에 이뤄졌다(또 가물거린다. 10월인지 11월인지). 논쟁은 거세게 이뤄졌지만 길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을에 탈퇴한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모르면 물어보거나, 그게 귀찮으면 입을 닥치면 될 일이었다.

"말도 없이 나가고. 김수민답지 않다. 뭐하나 지르고 나가지 그랬냐"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웃기는 얘기였다. 탈퇴한 사유를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를 게 있을 만큼의 사유가 있어서 나갔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무슨 글을 쓰고 나갔다면 그것 때문에 입방아를 찧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말 없이 활동을 마쳤다. 나중에 희한한 소문이 난 것을 알고, 나는 '역시나'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화가 그 조직을 망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봤다.

졸업논문을 애써 준비하는 분에게 무슨 죄가 있으겠느냐만, 나는 내가 토마토와 연계되는 것에 대해서 몹시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내가 탈퇴한 이후의 토마토는 내가 있을 적보다 더 부진하거나 더 희한하게 굴러갔다고 나는 평가한다. 또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그런 현상은 나의 탈퇴하고는 무관하다. 인과관계가 아니라 선후관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토마토는 민주노동당을 혁신하고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출범했던 단체다. 노선은 대충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소위 '평등파'를 떠올리면 된다. 학생당원에서는 평등파가 자주파는 물론이고 '다함께'보다도 세가 작았다. 그 가운데서 토마토는 시작했다. 그런데 이념이고 지향이고 한때의 구성원으로서 잘 알고 있다만, 이 조직은 과연 무얼하려고 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 이전에 이미 가입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처음 토마토 전신인 '새로운정당운동을모색하는학생당원모임'에 가입했을 무렵, '전진'에도 학생모임이 있다는 전언을 듣고 나는 "그쪽에 이야기해서 같이 하면 좋겠네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상대방은 "우리가 먹힐걸요?"라면서 가벼운 어투에 살짝 경계심을 실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전진의 학생은 세 명이었단다. 그 세 명이 무서워 그 엄살을 떨었는지 아니면 '전진'이라는 그룹 자체를 배척하려고 한 건지는 몰라도 그를 비롯한 몇몇이 나타냈던 사고방식은... 아, 말하기도 귀찮다, 아무튼 이게 조직이 망한 이유였고 그것은 애초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절주절 말하기는 귀찮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망해야 할 조직이었다. 나는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중 몇몇은 요사이에도 가끔 만나 살갑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직으로는 영 아니었다. 미꾸라지 몇마리만 분탕질을 쳐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물'이기도 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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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열전 (3) 데이빗 커버데일

Listen to the 무직 | 2008. 11. 14. 17:20 | Posted by 김수민

롭 핼포드가 '본좌'로니 제임스 디오가 '킹왕짱'이라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은 '완소(완전소중)'에, '캐간지'다. 보컬열전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으나, 데이빗 커버데일은 내가 핼포드 이상으로, 디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이다. 나는 록팬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대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거나 혹은 아예 그를 모른다고 하면 대화를 길게 나누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 일반은 물론이고 록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새내기 시절 록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신촌 한 구석의 술집에 출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고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내가 Impellitteri의 곡을 신청했다. 주인장은 죄송하지만 음반이 없어 못 틀어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Loudness의 곡을 주문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크박스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지 않고 음반만으로 레파토리를 채우는 술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을 청했다. 그러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없는 곡만 신청하시니 난감하네요. 요즘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어요?" 내가 되묻고 싶었다. 1970년대에 나온 레드 제플린은 틀어주면서, 1980년대에 나온 걸 가지고, 뭐? 누가 듣냐고?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당장에 일본과 견줘도 그렇다. 바로 이 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가 데이빗 커버데일이다. 물론 데이빗 커버데일은 1970년대 최강의 밴드 Deep Purple의 멤버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네이크를 전혀 접한 적 없더라도, 기타 아르페지오가 애잔하게 흐르는 <Sodier of fortune>을 들어본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에서 Deep Purple은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로 더 유명하다. 이곡들은 데이빗 커버데일이 입단하기 이전, 이안 길런이 마이크를 잡고 있던 2기 시절의 노래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뭐 캐간지랄 수밖에...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에 가입할 때만해도 상점 종업원을 전전하던 무명의 가수지망생이었다. 게다가 촌뜨기였다. 심지어는 사팔뜨기였는데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리더, 기타리스트)한테 고치라는 경고를 받고 수술도 없이 자가교정에 성공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커버데일의 음성은 전임자 이안 길런과는 상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지역별, 계급별, 인종별로 향유하는 장르가 크게 달라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된다. 커버데일은 백인이지만 어릴 적 내내 오티스 레딩과 같은 블루지하고 소울풀한 음악을 라디오로 듣고 자라며 꽤 흑인에 근접한 필을 가지게 되었다. 이안 길런이 날카롭게 찔러대는 창법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면, 커버데일은 굵직하게 울부짖는 흉성으로써 딥 퍼플의 3기를 장식했다. 그때의 대표곡이 <Burn>, <Stormbringer>.

딥 퍼플에는 사실상 한 명의 보컬리스트가 더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로, 데이빗 커버데일보다 고음에 능하고 라이브에서 더 안정된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탓에 경쟁심이나 갈등이 없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둘은 서서히 딥 퍼플의 노선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려나던 리더 리치 블랙모어는 중세풍 취향을 공유한 엘프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와 눈이 맞아 레인보우를 창설하며 딥 퍼플에서 나갔다. 제임스 갱 출신의 토미 블린이 후임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나 곧 딥 퍼플은 해산하였고 커버데일에게는 첫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유라이어 힙으로 영입될 뻔하다 탈락한 것도 이 시절의 일화다.

그러나 딥 퍼플에서 만난 존 로드(건반) 등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고 닐 머레이 등이 가담하면서 1970년대 말 화이트 스네이크가 결성되었다. 초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은 후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하드 록이나 헤비메틀보다는 블루스 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한 이때의 음악이야말로 커버데일이 가장 편하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의 굵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어렵게 끌고 가는 커버데일의 나쁜 버릇도 꽤 교정되었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딥 퍼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레인보우와 경쟁하는가 하면, 존 로드가 재결성된 딥 퍼플로 향하면서 잠깐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둥 같은 드러밍으로 유명한 코지 파웰이 있었고, 씬 리지 출신의 존 사이크스가 들어오면서 1984년도 <<Slide in it>>이라는 걸작이 나왔다.

허나 두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데이빗 커버데일의 성대 이상. 의사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고할 수준이었다. 존 사이크스를 대동해 메탈씬을 정복하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거꾸로 말해, 커버데일은 마침내 장애를 딛고 3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7>>. 화이트 스네이크의 최대 히트 음반이었다. 존 사이크스의 기타에선 불꽃이 튀었고 커버데일은 더 역동적으로 거듭났다. 한결 세련된 편곡을 거쳐 재수록된 <Here I go again>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별히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속 발라드인 <Is this love?>도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올랐다.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이 본격적인 메틀로 '여기서, 다시 나아감'으로써, 데이빗 커버데일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성향도 더 짙어졌다. 스스로 리메이크한 <Crying in the rain>에서 그의 변천 또는 진화는 유감 없이 드러났다.

존 사이크스가 음악적 불화로 탈퇴했음에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탈퇴 후 블루 머더의 깃발을 꽂은 존 사이크스는 딥 퍼플 시절의 글렌 휴즈와 더불어 '데이빗 커버데일과 밴드를 같이 한 다음 보컬리스트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비언 캠벨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나가고, 더블 기타 시스템의 한 축이던 에드리언 반덴버그가 손가락을 다쳤지만, <<Slip of the tongue>>의 제작 와중에 멋진 구원투수가 들어왔다. 스티브 바이. 촌티 풀풀 날리는 블루지 넘버 <Fool for your loving>이 그의 손을 거쳐 말끔하게 번뜩이는 곡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전의 중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팬들도 많겠지만, 다시 실린 <Fool for your living>에서 감정을 눅이기보다는 폐부를 찔러대는 쪽을 택한 커버데일의 보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붐이 락씬을 휩쓸며 화이트 스네이크는 여느 메틀 밴드처럼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후 커버데일은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Coverdale & Page를 구성해 '꿈의 블루지 콤비'를 이루는가 하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 음반에서 밴드 시기 못다한 블루스, 소울, 컨트리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커버데일이 원초적으로 지닌 매력을 감상하려면 이 시절의 음악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커버데일에게는 여러가지 단점이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고음에서의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밀어붙이듯 고음을 올리더라도 갑자기 음성이 얇아지는 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치더라도, 라이브에서의 고질적인 불안함 때문에 매니아들의 입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마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게 있다. '노이즈가든'의 멤버 박건이 영국에서 화이트 스네이크 공연을 보고 신해철에게 귀띔한 바, "그냥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용서된다". 그는 목소리로나 외양의 분위기로나 지극히 남성적인 동시에 당대에서 제일 섹시한, 하드록/헤비메틀 사상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였다. 곡이 매듭지어지면서 나오는 한숨소리마저 당당히 노래의 한 영역을 차지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멸하지 않고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그 관능미의 극치였다. "로큰롤과 섹스는, 힘들어도 끝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는 명언도 커버데일쯤 되어야 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커버데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가수들이 있다. 김태화, 임재범, 박완규, 양원찬(전 블랙신드롬) 등은 문헌이나 방송, 입소문을 통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들이다. 신성우, 서문탁 같은 이들에게서도 커버데일과 비슷한 어프로치를 엿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커버데일의 후예들은 어쩌면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퀸)를 사숙한 이들 못지 않은 세를 형성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보컬리스트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굵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R&B를 소몰이 창법으로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7년 전, "요즘 화이트 스네이크를 누가 들어요?"라고 타박받은 나는 날이 갈수록 복고주의자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을 확인하더니 "수구세력이시네요"라고 농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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