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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산다

Free Speech | 2008. 2. 17. 03:15 | Posted by 김수민

잘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2년 반쯤 살았다. 한참동안 그것을 인정하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받아들인 다음부터는 쓸쓸함과 싸워야 했다.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 중에서도 교외로 나가서 일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했었다.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안'해서가 아니라 '못'해서이다. 못하는 것도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고등학교를, 그때 생각대로, 그만 다녔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그다지 괴롭지 않다. 앞으로 일을 해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마저도 유능하게 해내지 못해 늘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약해질수록 고통에 익숙해져 무던해질 것이다.

그래서 산다. 그래도 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살아가는 중이다. 개미집단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20퍼센트의 구성원들도 필요하다. 세상이 인정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를 떠받치는 무능한 사람들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무능하기로서니, 꿈이 없기로서니, 뭐 그리 야단날 일일까.

마음을 꽤 비웠다. 민주노동당에서 지역위원장을 맡았고(이제는 전직이 됐다), 환경그룹에서 활동한 선배가 얼마 전에 배아줄기세포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병이 들었으면 죽는 게 생이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참 공감했다(그날 그의 히트발언:"인간이 오색딱따구리보다 우등하단 근거가 있어요?"). 나도 언젠가부터 불치병이 걸려도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던 차였다(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 집어치우고 비관마저 집어치우다 보니까 졸지에 생태주의(?)에 닿아 버린 거다.

일이 안 풀리면 그러려니 하고 산다. 도리어 일이 잘 되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놓아버린 상태에서 별로 겁날 것이 없다. 근래 나랑 싸운 사람들은 왜 내가 그토록 이미지 망쳐가면서, 때로는 상또라이 꼬라질 하고 공격해대는지 기가 차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위악을 부리지도 않았고 처세의 끈을 끊어버렸을 뿐이지만, 뭘 믿고 설치냐며 누군가가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믿을 게 없어서 기댈 게 없어서 그러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삶이 녹록하지 않을 전망이다. 중학교 때 "What's your favorite season?"이라는 문제지의 질문에 "Nothing"이라고 적었다가 어머니한테 한 소릴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다(심지어 한때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적에도). 그러나 사회적 시선은 만만치 않다. 내 꿈을 짓밟던 이들과 싸웠던 나는, 꿈없음을 비웃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그보다 더 강한 건 내가 처할 기본적 여건이겠지만, 그때 일은 그때가서 생각해부러~ ^^

만일 내 가정형편이 매우 곤궁했다면 이렇게 버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들 '하부구조'니 '유물론'이니 떠들어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임을 스스로 인식하면서부터
세상을 지탱하는 것도
세상을 바꾸는 것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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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Film Tent & 2nd Stage | 2008. 2. 16. 23:59 | Posted by 김수민

<추격자>를 개봉 첫날에 봤다. 김윤석과 하정우는 예전부터, 내가 감독이었다면 캐스팅하고 싶은 1순위 배우였다. 김윤석은 한석규가 그렇듯 안경을 쓰고 나올 때와 쓰지 않고 나올 때로 연기가 나뉘어지는데(<야수>와 <타짜>), <즐거운 인생>에서 그 중간을 개척한 다음 연기폭이 더 넓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정우는 여성들을 홀릴 만큼의 외모를 지녔지만 그 속에는 마이너리티 감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 스스로도 마이너적인 행보를 선택해 이어갔다.

만들어질 리 없는 영화지만 내가 상상해본 영화는 정보요원과 지하조직의 대립을 다룬 영화인데, 하정우를 정보당국의 젊은 요원으로, 김윤석을 지하조직의 지도자로 설정해 보았다. 김강우를 지하조직의 젊은 행동가로, 천호진을 정보당국의 고위 책임자로, 백윤식을 <콘스탄틴>의 중립자와 비슷한 캐랙터로 설정해 보기도 했었다(막판에 반전이 있는 영화다. 안 만들어져도 반전은 안 밝힌다 ㅋ).

어쨌든 그 두 배우가 나온다는 이유로 몇주전부터 엄청 주목했던 영화다.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던 이여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는 절묘한 추리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추격'에 초점을 맞춘 하드웨어적(?) 작품이었다. 무전을 칠 때 실제 경찰에서 쓰는 약어를 사용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이 경찰 복무했던 나로서는 리얼하게 느껴졌다(물론 실제로 용의자를 그렇게 패진 않으니, 혹은 패는 걸 적어도 난 본 적이 없으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예상과는 달리 연쇄살인 사건의 행적을 뒤쫓기보다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짧은 시간을 다루었는데, 밀도 높은 이야기를 무리없이 농축시킨 것 같다.

다른 매력은 잘 모르겠다. 보다 보니까 시간이 가서 극장을 나왔을 뿐. 복기가 필요한데, 요즘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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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

Forum | 2008. 2. 15. 04:13 | Posted by 김수민

작년 봄 조한혜정 교수의 1학점짜리 수업을 들으면서 댄 킨들러의 <알파걸>을 읽어보게 되었다. 알파걸은 페미니스트 어버이를 둔 딸들로 포스트 페미니즘의 징후로 평가받았지만, 구자유주의도 모른 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로 통용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 수업에서 내가 제출한 쪽글이다.


글쓴이 : 김수민 글쓴날 : 2007/03/28 16:39 조회수 : 20

베타보이와 오메가걸이 알파걸을 말하다

평점 3.8 이상의 성적에, 모종의 클럽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학교 내외의 과외활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인정과 부의 축적을 향한 욕구가 강하고 신뢰성이 높은 여학생. 댄 킨들런은 이들을 알파걸
이라고 부른다.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학교 내외의 과외활동에 참여하지만 리더 역할을 맡지 못하거나 기껏
해야 독박을 쓰고, 평점이 3.8을 넘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부모님보다 못살 각오를 하고 살며 인정욕구
도 희박한 ‘베타 보이’가 책을 읽고 난 뒤, ‘오메가 걸’을 만났다.


  베타 보이: 당신은 ‘알파걸’인가?

  오메가걸: 평점은 4.0이 넘는다. 그러나 리더 역할? 그 둘이 양립가능하다고 보나? ‘과외활동’을 하기는 한다.
 중학생, 고등학생 과외 말이다. 사회적 인정은 차치하자. 물론 부를 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난 가난
하다. 지은이는 서문에 예시한 설문조사 문항에 몰라서인지 일부 그랬는지 ‘알파걸’의 기준에 집안의 경제
사정에 대한 질문을 빠트렸다.


  베타보이: “여권주의자가 아니다. 그냥 평등주의자”라는 알파걸 몰리의 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페미니즘은 평등이념의 한 단면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입장이 아닌지. 여성운동을 했지만 사회평등에 기여하기는커녕 제 몫 챙기는 방향으로 흘러버리는 경우도 많았지 않았나?

  오메가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평등주의자도 여권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남성중심의 질서에 익숙해진 채 살았을 것이다. 새롭고 반항적인 사고나 행동양식을 지녀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우리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페미니스티인 것도 아니다. 알파걸은 잘나가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어버이 밑에서 성장해서 ‘더 잘 나가려고 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인간에 다가서는 사람들이다.


  베타보이: 그렇다면 당신이 알파걸이 아닌 것은 전적으로 가정환경 탓인가?

  오메가걸: 글쎄. 전적인 것은 아니면서 결정적인 요인일까? 다만 알파걸과 내가 비슷한 점은 각박하게 살고 있다는 거다. 아무리 담론을 포장해봐도 알파걸은 시간을 빡빡하게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풍요로운 체 할 수는 있어도 여유로울 수는 없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에 그들은 과외활동을 한다. 과외활동이 즐겁기는 하나 그것이 휴식과 사색, 느린 동작을 위한 시간을 앗아가면 임금노동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억압할 수 있다. 무작정 ‘느리게 살자’느니 떠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알파걸이 신인류로 포장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베타보이: 신인류까지는 아니더라도 알파걸을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 나아가 ‘포스트 페미니즘’의 징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메가걸: 무심해진 것도 진보일 수는 있다. 예컨대, 동성애자에 대한 무관심 같은 거. 그런데 이건 좀 무식해진 측면도 있지 않나 싶다. 


  베타보이: 해방을 운위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세대가 있었다. 한국의 386운동권 같은 예가 그렇다. 알파걸은 그 거꾸로인, 자유만 건네받고 해방의 에너지를 가지지 못한 신세대로 볼 수 있을까? 지은이는 ‘혁명의 딸’이라고 그랬는데.

  오메가걸: 혁명의 딸? 그 혁명은 뭔가.

  베타보이: 1960년대 구미의 인권, 반전, 평화, (반)문화, 여성운동이겠지.

  오메가걸: 토니 블레어나 클린턴 부부를 보면 느껴지는 것이 없나? 그 혁명은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에 활력을 불어넣은 쪽은 신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전직 좌파’, ‘소싯적의 아나키스트’ 등이 아닌가. 하이에크도 그랬고. 알파걸은 현대의 시류를 만족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과연 저항하는 방법을 알까? 나처럼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베타보이: 마지막 질문이다. 알파걸에 비판적이지만 당신에게 정말 선망의 마음조차도 없을까?

  오메가걸: 당연히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될 수 없기에 더 이상의 선망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들이 새로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성공하든 말든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말하니 ‘무식한 여자 대학생의 전형’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은 출세할 여학생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들과 직장에서 경쟁하는 정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지지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알파걸이라는 이름에서 선정주의를 느꼈고, 남자들에 의해 대상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피해의식인가?

  베타보이: '피해의식'이라. 그것도 알파걸과 오메가걸을 가르는 차이일까? 아무튼 코멘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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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개의 손가락

史의 찬미 | 2008. 2. 12. 19:40 | Posted by 김수민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조봉암은 일제 말기 투쟁을 접으며 얼마간의 안온함과 양식을 누린 탓에 해방정국에서 소외되었다. 그때 그는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고향인 인천에서부터 '제3전선'의 형성을 위해 활동했다. 그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와 논평이 있다. 하지만 그는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을 위한 경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승만이나 신익희 등 보수 정객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념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집념이 아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집념을 가진 이는 흔치 않다. 불꽃들이 차고 넘치는 진보진영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필요하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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