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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북평통

史의 찬미 | 2008. 2. 21. 16:31 | Posted by 김수민

“북으로 간 조소앙·안재홍 50년대 독자적 통일운동” (한겨레)

학부생이 북한사를 다루면 얼마나 다루겠는가? 재작년 수강했던 북한현대사 수업에서 나는 처음에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보고서를 쓰겠다고 했다가 교수에게 퇴짜를 맞았다. 너댓명이 같은 주제를 신청한 것이다. 7.4공동성명이나 주체사상의 형성도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이후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이 걸은 길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 주제조차 한명의 신청자가 더 있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경쟁자'보다 앞서 나가려 급히 도서관에를 갔으나, 내가 없는 사이 교수가 수업에서 주제에 관련해 추천했다는 이신철 박사의 박사논문은 학교 도서관에 없었다. 다만 북측 당국자였다가 탈북한 신경완의 증언을 담은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을 찾았다. 상세한 회고였다. 그러나 겨우 그 한권을 손에 넣고 보고서를 쓸 수는 없었다.

하루는 북한현대사 담당교수가 입이 삐뚤어진 채 수업에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은 바로 했는데(캬캬), 자신이 보다시피 수업이 어렵게 됐으며 오늘은 특강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소개 받아 연단에 선 이는 놀랍게도 이신철 박사였다. 그는 북한의 역사적 흐름과 시사적 현안을 명료하고도 빼어난 입담으로 소개하면서 1시간동안 밀도 높은 강연을 했다.

나는 수업 말미에 '재북평통'의 활동을 연구하려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을 하나밖에 못 찾았다며, 더 볼 만한 책이 있는지 그리고 박사논문 좀 얻을 수 없겠는지 물었다. 그날이 아마 아카라카 축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천극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속에서 나는 이 박사를 뒤따라가 박사논문을 건네 받았다. 그가 말했다. "졸업하고 대학원 갈 생각 있어요? 가세요. 요즘엔 시절이 좋아져서 역사 공부해도 먹고 살아요."

이 박사의 논문은 2005년에 나온 것으로, 해방정국기의 남북협상과 김일성의 민주기지론부터 시작해서 한국전쟁의 납북 그리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통일운동을 다루고 있다. 김규식은 납북 도중에 숨을 거두었고 자연히 재북평통의 구심은 조소앙, 안재홍이었다. 북조선은 이들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환대하였으며, 그들도 극렬한 저항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측은 의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어 북조선은 재북평통을 통제하였으며 재북평통도 걸핏하면 항의단식을 실시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과부들을 요인들 곁에 배치하는 등 북조선 당국은 치밀한 작전을 펴기도 하는데, 이 과정이 <압록강변의 겨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재북평통은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창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대남 '평화 공세'에 이를 활용하게 된다. 이것이 적화통일의 음흉한 방책이라고만 오해받는 '연방제 통일방안'의 배경이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통일방안을 오늘날 덜떨어진 통일지상주의자들의 '코리아연방공화국'과 동일시하면 대략 난감하다.

순망치한이라고, 남쪽에 있을 땐 웬수였을 박헌영이 숙청 당하고 나자 남쪽 출신 인사들도 위기에 처한다(그럴 거면 뭐하러 데리고 갔는지, 원). 감시가 심해지자 그들은 김일성에게 직접 항의를 하게 되고, 이를 우연히 지켜본 김정일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좋은 중재자가 된다는 에피소드도 <압록강변의 겨울>에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과 그들을 이간하는 당국자들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또 재북평통을 구성한 뒤 전략적 동반자로 설정된 연안파(최창익 등)마저 숙청이 되자 납북 요인들은 궁지에 몰린다.

조소앙이 자살했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풍문이 굴절된 것이다. 1958년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 학질을 앓고 있던 몸으로 과음한 그가 대동강변에서 쓰러졌다는 게 진실이다. 안 그래도 기울어지던 재북평통은 그가 죽음으로써 파국을 맞이했다. 납북 요인들은 더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역사의 뒷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인사들이 만든 자리를 해방정국기에 월북한 백남운과 홍명희가 새로 채웠다.

1950년 총선에서는 조소앙이 전국 최고 득표율을 올리는 등 중간파의 대약진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남북 양쪽을 피해 농사꾼으로 위장했던 근로인민당 출신 장건상은 전국 득표율 2위였다. 한민당이나 이승만이나 대중적 지지도가 취약했다. 물꼬를 중도로 돌릴 수 있던 바로 그 찰나에 전쟁이 터져 버린 것이다. 전투 소식을 듣고도 버젓이 야구장에 있었던 그 국민들은 3년 후 빨갱이라면 치를 떨거나 독재자가 무서워 입을 열지 못하는 국민으로 변신했다. 중간파와 좌파는 남한에 남아 탄압받는 경우가 아니면 북으로 넘어가거나 끌려갔다. 북조선에서는 박헌영을 죽이고 최창익을 제거하였으며, 백남운은 구석에 몰렸고 홍명희는 침묵하며 살았다.

소위 국토완정은 그렇게 이승만과 김일성의 '분단 국민국가'의 기초작업이 되었다. 아마도 재북평통은 북으로 끌려가고 남에서 내쳐짐으로써 자신의 정신이 남과 북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게 된 없었던 마지막 인간들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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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학번이 쳐들어온다~ 튀어라!

Free Speech | 2008. 2. 20. 22:27 | Posted by 김수민

내가 입학했던 2001년, 단과대 학생회장은 96학번이었고 총학생회장이 97학번이었다. 98, 99학번의 남학생 다수는 군대에 있었고, 여학생 선배들은 보기 힘들었다. 술자리에서 우연하게나 같은 과의 95학번 선배를 마주칠 수 있었다. 수업에서 93학번을 발견하면서 일종의 고고학적 기분을 느낀 적은 있었다. 내가 일곱살이 더 많은 94학번을 바라보듯 새내기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 마추질 일도 많지 않겠지만.

2006년 3월에 새내기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칼럼을 <유뉴스>에 쓴 적이 있다. 그때와는 마음가짐이 많이 다르다. 군복무 2년을 끼고 살아가는 남대생에게 5년의 나이 차이쯤이야... 그러나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08학번은 여전히 초딩이었다!ㅠ 오늘 그 왕년의 초딩들이 어엿한 어른이 되어 오리엔테이션을 하겠다며 학교에 왔더라. 무섭다. 순이가 온다(Coming soon)~

변명: 나는 8학기를 끝내고 이제 대학교 5학년이 됐다. 2학기에도 수업 두세개를 더 듣는다. 결코 학생운동한답시고 학교에 죽치고 있거나, 학점이 너무 심하게 나빠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ㅡㅡ^
1. 전공 두개에 교직이수를 하는데다가
2. 바로 지난 학기에 12학점을 들었고, 중간중간에 수강철회가 있어서 비는 학점들이 있었으며
3. 입대 전 F먹은 거 재수강하느라;;
이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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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2

Free Speech | 2008. 2. 20. 20:41 | Posted by 김수민

오랜만에 도서관엘 갔다. 역시나 두개의 목적을 가지고. 드라마는 속개된다. 뾰족한 수는 없지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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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직' 노동자?

Forum | 2008. 2. 19. 05:15 | Posted by 김수민

옛날 한동안은 '미전향 장기수'라는 말이 쓰였다. 그러던 것이 '비전향'으로 바뀐 것은 '미-'라는 접두사가 '되어야 할 것이 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서, 전향을 당당히 거부하는 장기수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논리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만큼은 아니지만 '비혼'이 '미혼'을 밀어내는 모습도 이따금 보인다.

'미조직 노동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진보적이어서 아무래도 모두가  '비전향 장기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때의 접두사 '미-'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각별히 선택되어 대안적인 문제의식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노동자들을 구체적 차원에서는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하다못해 교섭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로,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급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일념에 기초한 선택이다. 나 역시 당연히 방안과 사고를 좀 달리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조직과 형성'이라는 명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미조직 노동자'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눈에 띄는대로, 틈나는대로 재고를 요청할 생각이다.

당장에 '비조직'으로 써도 조직화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는 시시껄렁한 설명이 가능하거니와, '비-'는 '미-'보다 규정성이 약하다. 규정성이 약한 것은 적어도 폭력이나 중심성, 타자화 등등의 위험은 훨씬 덜하다. 극복되어야 할 현실지언정 현실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앞으로 기필코 조직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담기보다 '조직되지는 않은'이라는 정도로 규정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짧은 시간동안 성과주의의 눈총을 받을지도 모르나, 목적 이전에 지향한 가치를 지키며, 전략적으로도 폭넓은 조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좋은 인식에서 좋은 실천이 나오고, 강박감을 버리는 것은 좋은 인식의 첫걸음이다.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등성명을 부르기 힘든 '그냥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한다. 아무리 악의 없는 생각일지라도 두려움을 잃은 접근은 몽상 아니면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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